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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이노 문학관

블루파일-자기 돌잔치에 초대된 사나이⑥

작성자블루아바타|작성시간04.04.24|조회수26 목록 댓글 0


<제 14화>

끝단을 십자꽃으로 수 놓은 흰 천이 넓게 옷걸이를 가리고 있다. 그 아래 젯상이 차려져 있다. 진홍 불꽃을 흐적이며 양초 두 자루가 젯상 위에서 타고 있다. 창백하도록 하얀 소복차림의 어머니가 촛불로 향을 사루고 있다. 그 어머니의 소복치마를 움켜쥐고 있는 사내 아이. 사내의 손 끝이 그 아이를 가리키고 있다. 돌 전 날 아버지가 죽은, 그래서 생일 음식이 제 애비 제사 음식이었던, 밤 제사가 겨워 하품 끝에 눈물을 매달고 서있는 작고 마른 아이. 그 아이는 두 살배기 무 량한씨의 모습이었다.

"한...아."

무 량한씨는 아이의 이름을 불러 본다. 소리가 말이 되기 전에 목에 잠긴다. 어머니 앞에서 그리고 두 살배기 어린 자신 앞에서 무 량한씨는 주춤댄다. 사내를 본다. 사내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버님 소상 날입니다."

사내가 무 량한씨의 손을 잡아 끈다. 사내에게 끌려 무 량한씨는 허정걸음으로 젯상 앞에 섰다. 향 연기가 키를 늘리는 맞은 편에 잔 웃음을 물고 흑백사진이 무 량한씨를 보고 있다. 아버지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하지만 기억 속에 인두질 되어 지워지지 않는 얼굴. 삼십대 짱짱한 그 얼굴이 불혹의 아들을 보며 웃고 있다. 그 웃음을 가리며 두 살배기 사내 아이가 술잔을 올린다. 어머니가 그 뒷 모습을 보고 있다. 아이가 뒷걸음으로 물러나 어머니 옆에 선다. 소복. 그 죽음의 예복으로 쥘부채마낭 여윈 몸을 가린 어머니가 가라앉는다. 포갠 손을 눈썹머리에 받치고 사내 아이도 그 곁에 가라앉는다.
사내가, 잡고 있던 무 량한씨의 손을 앞으로 당긴다. 떠밀리듯 어머니 곁에, 두 살배기 자기 곁에 서서 무 량한씨도 눈썹머리에 손을 포개 받치고 절을 올린다. 절을 마친 어머니는 손등에 이마를 짚은 채 일어나질 않는다.
'우시는구나'
반 절을 끝낸 무 량한씨는 목례 자세로 아이를 본다. 아이가 어머니를 흔든다. 어머니 얼굴을 받쳐 올린다. 아이의 두 손에 일으켜진 어머니의 얼굴이 눈물범벅이다. 아이가 단풍잎 같은 조막손으로 그 눈물을 닦아준다. 아이의 두 손을 당신 손으로 덮어 뺨에 누른 채 어머니가 고개를 젖힌다. 하염없이 어머니가 울고 있다. 어머니 눈에서 솟치는 눈물이 목줄기를 따라 흘러내린다. 입을 삐죽대던 아이도 기어이 울음보를 터뜨린다. 들리지 않는 어머니의, 두 살배기 자신의 울음을 무 량한씨가 대신 울먹이고 있다.

"이미 진행된 빛을 쫓아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곳은 시공이 휘어진 시간의 동심원입니다. 무 량한씨의 시간을 중심으로 다른 시간이 원을 만들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동심원들의 시간의 각도만 맞추면 이미 진행된 과거의 빛도 망막에 비춰질 수 있습니다. 무 량한씨의 시간과 다른 시간은 동심원의 띠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시간이 막입니다. "

무 량한씨는 목젖을 쿨럭쿨럭 넘쳐대는 울음을 삼키며 어머니와 두 살배기 자신에게 기어갔다. 하지만 어머니와 아이는 다가가면 그만큼씩 무 량한씨에게서 밀려났다. 두 손, 두 무릎잡이로 바닥을 짚은 채 무 량한씨는 울고 있는 모자를 멀건히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아이의 팔을 당겨 품에 안는다. 아이를 안은 채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보는, 어머니 품에 안겨 흐득흐득 울음끝을 물고 있는 그 어머니와 두 살배기 자신의 모습이 순식간에 눈 앞에서 지워진다.

"어머니...얘, 한아..."

모두 사라졌다. 어머니도 두 살배기 자신도, 향 연기를 너울대던 젯상 모두가 깨어난 꿈처럼 허망했다. 무 량한씨는 책상다리로 앉아 사내를 돌아 보았다. 사내는 벽시계를 보고 있다. 언제 움직였는지 벽시계의 시침이 숫자 '3'에 기울어져 있다.

"무 량한씨는 360개 계단을 거쳐 이 곳에 들어오셨습니다. 저 벽시계의 시침은 계단 숫자를 거꾸로 돌려 놓고 있습니다. 시침이 완전히 360도 회전해 제 자리로 돌아오면 무 량한씨도 처음 그 자리로 돌아갈 겁니다."
"왜 내가 이래야 됩니까? 돌아보면, 과거란 게 들추면 그게 죄 상처 뿐인데...더는 확인하기 싫소. 가슴만 아픈 일 관두겠소."

무 량한씨는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내는 무 량한씨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 잠시의 정적을 흔들며 흐느낌이 들려왔다.

"여보...아이구 여보 몬 살겠어요. 어찌 살아요. 나도 데려 가지 날도 좀 데려가지. 한이 아부지..."

어머니의 흐느낌이 곰팡이 포자처럼 방 안을 떠돌고 있다. 어머니의 그 울음 입자를 들이 마시며 무 량한씨는 가슴이 죄여들었다.

"아아....아, 엄...마아..."
"한아...애고 불쌍한 거 애고 한이 아부지..."
"아아아...엄...마아..."

무 량한씨는 눈을 감았다. 그리곤 울음 소리에 흔들리는 나무처럼 천천히 몸을 흔들었다. 스치는 바람이듯 어머니의 울음도 두 살배기 나의 울음도 그렇게 스쳐갈 것이다. 무 량한씨는 사십 몇 해 슬픈 나이테를 들여다 보며 한 그루 외로운 울음나무가 된듯 휘청거렸다.


<제 15화>

'지난 상처로 고통 받는 건 잘려 없어진 손 다리의 통증을 느끼는 환지통과 다를 게 없다. 그러고 싶지 않다. 보고 싶지 않다.'
무 량한씨는 눈을 감은 채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앞을 향해 걸었다. 보는 것이 고통이라면 차라리 어둠 속에 묻히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어느 때던가, 어둠이 두려웠던 적이 있었다. 밤이 오면 사방에서 덮혀 오는 어둠 속에 사지를 버둥대야 했었다.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겹겹의 이불로 씌워진 어둠 속에선 어떤 소리도 용납되지 않았다. 어둠 밖에서 쏟아지는 정체 모를 발길질과 몽둥이질은 오래고 지루했었다. 짐승처럼 이불 속 어둠에 웅크린 채 주먹으로 입을 틀어 막고 밑도 끝도 없는 매질을 견뎌냈었다. 원장 아버지와 형들이 줄줄이 경찰차에 실려가던 날 밤. 형들이 할당했던 껌통의 껌들을 하나씩 입에 까넣으며 단물을 빨았었다. 방 문 틈으로 어둠에 덮힌 마당의 화장실이 보였다. 터질듯이 오줌보가 부풀어왔지만 마당에 버티고 있는 어둠은 세상 그무엇보다 넘어설 수 없는 공포였었다. 오줌이 종단지 아래로 흘러내리고 방바닥에 흩어진 껌종이들을 적셔댔었다. 그리고는 정신을 놓았던가. 오줌 범벅인 껌종이 위에서 눈을 떴을 때 하얗게 쏟아지는 아침햇살에 온 몸을 떨며 울어댔었다. 아침을 맞는다 건 기어이 밤이 올 거라는 것이고 그건 또다시 어둠 속에 갇힐 것이라는 공포감 때문이었다.

"눈을 뜨세요.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를 시간들입니다. 괴로우시더라도 이대로 이동시키시면 안됩니다."

사내는 귀를 막고 있는 무 량한씨의 손을 잡아채며 앞을 가로막았다. 무 량한씨는 사내의 가슴을 밀어냈다.

"내가 싫소. 내가 아파서 싫단 말이오. 당신이 내 입장이 되보겠소? 그럼 당신 시간이나 불러내서 실컷 즐기시오. 난 더이상 보지도 듣지도 않고 때가 되면 이 곳에서 나갈테니."

무 량한씨는 다시 귀를 막으려 했지만 사내의 손이 무 량한씨의 손목을 굳게 틀어쥐었다.

"저도 그래보고 싶지만 저 한텐...기억될 시간이 없습니다. 제 기억이라는 건 모두 학습된 자료들 뿐입니다. 들어보세요. 아버님이십니다."

사내는 쥐고 있던 무 량한씨의 손목에 힘을 주었다. 무 량한씨는 사내에게 손목을 잡힌 채 고개를 숙였다. 낯선 음향이 공기 중에 마아블링처럼 퍼져왔다. 아버지의 목소리. 태어나서 처음 듣는 그 목소리가 무 량한씨를 부르고 있다.

"한아, 이 눔아 퍼떡퍼떡 크그라. 니 걸음만 떼면 진짜배기로 세상 구경 맴껏 시켜줄끼니까네."

무 량한씨는 아버지의 목소리와 함께 사진 속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모습과 목소리는 물과 기름처럼 겉돌았다. 얼굴을 떠올리면 목소리가 달아나고 목소리에 집중하면 아버지의 모습이 맞물리지 않았다. 무 량한씨는 기억장애와 다름없는 단절감에 당혹스러웠다.

"아버님은 시간이 이동하기 전까지 십개월된 무 량한씨를 목말을 태우고 계셨습니다. 저는 기억상실증입니다. 제 시간을 불러내도 그건 기억할 수 없는 낯선 시간들입니다. 무 량한씨가 아버님 목소리를 기억할 수 없는 것처럼 제 기억은 무연고입니다. 네, 무연고 기억, 그겁니다."

'무연고 기억.'
무 량한씨는 사내의 말을 되뇌여보았다. 아이들은 제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가질 수 없었다. 사진을 보여주면 제 할머니를 찾아내긴 해도 그건 실감할 수 없는 허상일 뿐이었다. 아이들에게 사진 속 할머니 모습은 사내의 말 대로 저희들과 아무 상관없는 무연고 기억일 것이었다.

"그럼 지금껏 살면서 기억 나는 게 아무 것도 없단 말이오? 자기가 누군지는 알 거 아니요."
"안다면 알고 모른다면 모릅니다. 남아있던 기억과 학습된 기억을 구별 할 수 없으니까 무얼 알고 무얼 모른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사내는 무 량한씨의 손목을 놓아주고는 벽시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벽시계의 시침은 숫자 '4'로 이동해 있었다. 벽시계를 바라보는 사내의 어깨는 무거워 보였다. 무 량한씨는 그런 사내의 뒷모습에서 문득 요리책을 떠올렸다. 먹어보지 않아 맛을 알 수 없는 요리들의 이름이 빼곡이 적힌, 그리고 맛도 모른 채 요리법을 줄줄이 외워야 하는, 사내의 인생은 어쩌면 그런 요리책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 량한씨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그리고는 팔꿈치로 사내의 옆구리를 찔러댔다.

"당신이 얻는 게 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곳을 나가야 하니까...시간을 움직이겠소."

어리둥절하니 두 눈을 꿈뻑대며 무 량한씨를 바라보던 사내는 무 량한씨의 말에 얼굴 가득 웃음이 돌았다.

"근데, 대체 당신이 얻는 게 뭐요?"
"말씀드렸듯이 사진입니다. 무 량한씨가 불러낸 시간들이 단한번 일직선상에 놓이는 사진입니다."

사내는 벙글벙글 웃어대며 양복저고리 앞섶을 열어 와이셔츠 어깨에 매고 있던 사진기를 가리켰다. 무 량한씨는 사내가 매고 있는 사진기를 손끝으로 툭툭 건드려 보았다. 이상할 것이 없는 평범한 사진기일 뿐이었다.

"사진기로 과거를 찍겠단 말이요?"

무 량한씨는 검지손가락을 세워 자신의 관자놀이에다 원을 그려 보였다. 그런 무 량한씨를 향해 사내는 어깨를 으쓱 들어 보이곤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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