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추천시]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작성자게바라|작성시간04.04.16|조회수110 목록 댓글 0

                    흰 바람벽이 있어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 던지고
                때글은 낡은 무명 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 하는 듯이 나를 울력 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
                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
                치는 사랑과 슬픔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 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 하듯이
     


    바람벽 : 집안의 안벽
    때글은 : 오래도록 땀과 때에 절은
    쉬이고 : 잠시 머무르게 하고, 쉬게하고
    앞대 : 평안도를 벗어난 남쪽지방, 멀리 해변가
    개포 : 강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
    이즈막하야 : 시간이 그리 많이 흐르지 않은, 이슥한 시간이 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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