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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153주간

제89회 아가서 1장-9장

작성자본당신부|작성시간19.01.31|조회수2,432 목록 댓글 0

89회 아가서 1-8

유다인들은 성경 이름을 대부분 첫 구절에서 취했다. ‘아가역시 11절을 따라 쉬르 핫쉬림’(Shir Hashirim)이라 했다. ‘노래들의 노래란 뜻이다. 희랍어 성경도 같은 의미로 아스마 아스마톤’(Asma Asmaton)이라 했고, 라틴어 성경 역시 깐띠꿈 깐띠꼬룸’(Canticum Canticorum)이라 했다. 모두가 노래 중의 노래란 의미다. 우리 말 성경이름 아가는 중국어 이름 아가(雅歌)를 그대로 번역한 것이다.

아가는 남녀 간의 사랑을 노래한 책이다. 유다인들은 이를 하느님과 이스라엘간의 사랑으로 받아들였다. 주님께 대한 열정을 그런 식으로 표현했다고 해석한 것이다. 한편 유다인들은 그분의 사랑이 가장 크게 드러난 사건을 이집트에서의 탈출로 꼽았다. 그러기에 파스카 축제 때면 아가를 읽었다. 이스라엘을 끔찍이 사랑하셨기에 구원해 주셨다고 믿은 것이다.

한편 햇곡식을 바치는 축제인 주간절’(신명 16,10)에는 룻기를 읽었고 애가는 성전이 파괴된 날(아브월 9) 읽었다. 그리고 초막절(레위 23,33)과 푸림절(에스 9,21)에는 코헬렛과 에스테르기를 각각 낭독했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축제 때는 아가를 포함한 다섯 지혜서를 반드시 읽었다. 이 성경들을 흔히 다섯 두루마리라 한다. 이런 전통이 굳어진 것은 바빌론 유배 이후(기원전 6세기)로 보고 있다.

아가서는 솔로몬을 저자로 제시하지만 내용을 분석하면 그의 작품은 아니다. 솔로몬이 많은 노래를 지었다는 전승 때문에 그의 이름을 내세운 것뿐이다. 따라서 아가서 역시 오랜 세월을 거쳐 여러 사람에 의해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몇몇 노래는 분명 솔로몬 시대의 창작이지만 대부분은 바빌론 유배이후의 작품으로 해석한다. 지금의 형태를 갖춘 것은 페르시아 말기에서 그리스 시대 초기로 보고 있다.

아가는 여덟 장의 짧은 책이지만 내용은 파격적이다. 선입견 없이 읽으면 뛰어난 연애시를 읽는 기분이다. 표현 역시 솔직하고 관능적이다. 어떻게 성경으로 인정되었는지 신기한 생각마저 든다. 아무튼 아가서에는 인간적인 사랑과 생명력이 넘쳐난다. 딱딱한 율법의 세계에서 한 가닥 신선함을 제공하고 있다. 분명 성경의 다양성을 느끼게 하는 책이다.

아가의 주인공은 술람밋’(아가 7,1)이라는 여인이다. 술람밋은 수넴 여인을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그런데 다윗 왕이 늙어 쇠약해졌을 때 그를 보살폈던 처녀가 수넴 여인 아비삭이었다(1열왕 1,3). 다윗이 죽은 뒤 아도니야왕자는 이 여인을 아내로 삼으려다 솔로몬에게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1열왕 2,13-25). 아가의 두 남녀는 솔로몬과 수넴 여인 아비삭이라는 주장도 있다.

특이하게도, 아가서에는 야훼 혹은 하느님이라는 단어가 한번도 등장하지 않고, 신앙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들도 부재한다. 시종일관 남녀간의 절절한 사랑 모티브만 지속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아가서는 신약성서에서 단 한번도 인용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이스라엘의 최고 축제인 과월절 전례 중 낭독되었다는 것은 고대 근동지역 경신례적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집트, 바빌론, 가나안의 문명권에서는 남신(男神)과 여신(女神)의 관계성을 특별히 강조하는 신화 이데올로기가 부각되어 있었고, 그들은 세상의 모든 사건들을 남신과 여신의 조화로 이해하고 있었다. 마치 동양 문화권에서 음양의 조화로 세상의 이치를 보는 경향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고대 근동의 경신례에서는 언제나 남녀간의 사랑을 다룬 시편들이 낭독되었고, 아가서의 과월절 낭독과 정경화는 이러한 맥락 안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아가는 사랑에 빠진 한 여인의 노래이다. 물론 이 작품에는 그녀이외에도 연인인 남자 주인공과 합창단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들 중 가장 비중 있는 역할을 맡은 이는 여자 주인공이다. 중심인물답게 그녀는 첫 장면과 마지막에 등장하여 서두와 대미를 장식한다. 이 이야기의 갈등구조는 여주인공인 그녀가 원하는 만큼 쉽게 연인을 만날 수 없다는데서 발생한다. 사랑하는 연인을 마음에 품고 있기에, 그는 언제나 그녀 주변에 존재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직접 만날 수 없기에 또한 언제나 부재한다. 사랑하는 이의 현존과 부재라는 갈등상황과 그로인한 간절함이 이야기의 역동적 모티브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아가 1,1 표제

솔로몬의 가장 아름다운 노래”(1). 아가 1,1은 일종의 표제에 해당되는 구절로서, 이 책을 솔로몬에게 속하는 노래중의 노래라고 표현하고 있다. 노래 중의 노래라는 표현은 쉬르 하쉬림이라는 히브리 구절의 번역으로, 히브리어 고유 문법의 하나인 최상급 표현기법을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히브리어는 같은 어근을 두 번 혹은 세 번 반복하는 것으로 최상급 표현을 만들기 때문이다. 즉 아가는 노래라는 명사를 두 번 반복함으로써 이 책이 히브리 노래들 중 가장 으뜸가는 노래이며 솔로몬의 여러 노래들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노래임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아가 1,1의 표제는 본문보다 상당히 후대에 붙여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 또한 각별한 의미를 가진다. 아가서가 가지는 여러가지 문제점들(남녀간 사랑에 대한 노골적 표현과 신앙관련 표현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의 노래 중 가장 아름답다는 후대인들의 긍정적 평가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가의 표제는 분명히 이 책이 솔로몬의 작품임을 명시하고 있고, 1, 1이외에도 3, 7. 9. 11; 8, 11. 12에 솔로몬이 직접 등장하고 있어서, 아가서가 솔로몬의 작품이라는 통념을 이끌어내었다. 더욱이 여인과의 사랑이라는 전체적 줄거리는 거대한 규모의 하렘(harem)을 소유하고 있었던 솔로몬의 여성편력과도 잘 어우러졌기에 솔로몬 저작설을 더욱 일반화시켰던 것이다(전도 2, 8; 1열왕 11, 1~3 참조).

그러나 아가에 사용된 문체와 단어들이 매우 후대의 것(페르시아 시대 혹은 헬레니즘 시대)이라는 점이 판명되고 있어서, 학자들은 솔로몬 저작설을 전적으로 부인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표제에 등장하는 솔로몬의라는 표현은 후대 편집자에 의한 첨가일 뿐이며, 수천개의 잠언과 노래의 작가로 알려진(1열왕 4, 32; 5, 12) 솔로몬의 권위와 명성을 빌어 이 책의 사회적-문학적 위상을 격상시키고자 했던 문학적 설정이라는 것이다.

물론 솔로몬이라는 이름이 어떤 경위를 거쳐 아가의 표제에 삽입되게 되었는지, 현재로서는 그 정확한 과정을 추적해 내기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가서가 그를 저자로 내세움으로써 잠언, 지혜서와 함께 이스라엘의 지혜전통을 이어가고자 했고, 솔로몬의 이름과 권위를 통해 노골적 성애 묘사라는 걸림돌을 무마시킬 수 있었다는 점이다.

세속적이고 관능적 분위기까지 풍기는 아가서가 어떠한 경위와 과정을 통해 경전에 속하게 되었는지,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아가를 솔로몬의 오래된 작품으로 여겼다는 점과 아가에 등장하는 남녀간의 사랑을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사랑으로 해석하려했다는 점이, 문제적 내용을 무마시키는데 큰 요인으로 작용했으리라 추측할 뿐이다. 이러한 정황은, 히브리 경전 목록을 최종적으로 규정했던 얌니야회의에서, 랍비 아키바가 한 말을 통해서 잘 제시되고 있다.

아가는 이렇게 그 내용상의 문제 때문에 어렵게 경전안에 들어왔지만, 그 논란은 초세기 교회 안에서도 여전히 계속되었다. 그러나 많은 교부들에 의해 아가의 진정한 의미와 종교적 가치가 주장됨으로써 여러 난관을 극복하게 된다. 현재 우리교회는 아가를 미사경본과 성무일도에 자주 인용(성모 마리아 축일, 성녀들의 축일, 막달라 마리아의 축일 등)할 정도로, 이 책의 정경적 가치를 분명히 인정하고 있다.

 

아가 1,2-4 포도주보다 달콤한 사랑

아가는 그 서곡부터 여주인공의 주도적 역할이 강조되어 있다. “, 제발 그이가 내게 입맞추어 주었으면! 당신의 사랑은 포도주보다 달콤하답니다”(2)이라는,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강렬한 표현에 담아 시작하기 때문이다.

우리말 번역(새 번역과 공동번역)에는 분명히 드러나 있지 않지만, 실제 히브리어 문장은 입 맞추다라는 동사의 어근(나샤크, nasaq)을 두 번 반복함으로써(직역: 그의 입술의 입맞춤으로 나에게 입맞춤해 주었으면), 그리움(입맞춤)에 대한 최상급적 표현을 시도하고 있다.

2절은, 당신이라는 2인칭 대명사를 적용하고 있는 3~4절과는 달리, (3인칭)로 연인을 지칭하고 있어서, 3절 이하와의 작은 문학적 균열을 드러낸다.

정녕 당신의 향유 내음은 싱그럽고 당신의 이름은 부어 놓은 향유랍니다. 그러기에 젊은 여자들이 당신을 사랑하지요”(3). 3절은 특별히 연인의 향기와 그의 이름이 가지는 강력한 능력이 제시되고 있는데, 이는 사랑의 시에서 보편적으로 등장하는 모티브이다.

더욱이 이 두 명사는 비슷한 히브리어 자음과 발음을 가지고 있어서(향기- 쉐멘, 이름-), 시의 음성적 진가와 리듬을 살려주고 있다.

결국 저자는 이름향기를 상응시킴으로써, 사랑하는 이의 이름(히브리 어법에서 이름은 호칭의 기능보다 존재론적 가치를 의미한다)은 그 자체로 향기임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당신에게 끌어 주셔요, 우리 달려가요. 임금님이 나를 내전으로 데려다 주셨네. (친구들) 우리는 당신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당신의 사랑을 포도주보다 더 기리리다. 그들이 당신을 사랑함은 당연하지요”(4). 나의 임금으로 연인을 제시한 표현(4) 역시, 고대 근동 연애시에서 쉽게 발견되는 표현인데(1, 12; 7, 6 참조), 사랑의 관계에서 연인이 차지하게 되는 절대적 우위성과 권력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4절의 3행은 1행의 우리(여인과 그녀의 연인)와 구별되는 또 다른 우리가 등장하는데, 새롭게 등장한 이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본문은 제시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익명성역시 아가서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으로(1, 8; 2, 15; 3, 3.5.6; 5, 2.3; 6, 10; 8, 4.5.8~9.14 ), 문장과 문맥에 의지해서 그 정체를 추론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1,5에 등장하는 예루살렘의 아가씨들이 이 우리에 해당되며, 여주인공의 입장과 마음을 이해하고, 그녀의 기쁨과 슬픔에 동참하는 친구들로 보면 무리가 없을 듯하다. 특별히 이들은 아가서 내내 합창단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아가 1,5-6 검지만 아름다운 포도원지기

서곡에 이어 첫째 노래가 이어진다. 이 부분은 다시 전반부(1,5-8)와 후반부(1,9-2,6), 그리고 결어(2,7)로 구분되는데, 처녀는 예루살렘의 아가씨들에게 연인을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을 물어보고, 그를 찾아 용감하게 길을 나선다. 후반부인 1,9-2,6은 사랑의 기쁨을 노래하고, 이 사랑을 깨우지 말아 달라는 간절한 애원으로 노래는 마무리된다(2, 7).

전반부는 처녀가 자신을 소개하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특이하게도 그녀는 자신의 특징 중에 제일 먼저 피부색에 대하여 말을 건넨다. “ 예루살렘 아가씨들이여/ 나 비록 가뭇하지만 어여쁘답니다 / 케달의 천막처럼 / 솔로몬의 휘장처럼”(5). 여기서 제시된 케달의 천막솔로몬의 휘장은 여주인공의 아름다움이 민중의 전통왕실의 전통을 함께 어우른 것임을 암시한다. 그녀의 아름다움이, 민중의 생활과 연결되어 있던 케달의 천막과 왕실의 화려함을 상징하던 솔로몬의 휘장에 직유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표현은 이스라엘 스스로가 가졌던 자기이해의 반영이라고 보고 있다.

즉 이스라엘은 그저 평범한 유목민의 후손이었지만 하느님께로부터 선택받았다는 측면에서 귀족의 품위를 지니고 있음을 상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가무잡잡하다고 빤히 보지 말아요. 햇볕에 그을렸을 뿐이니까요. 오라버니들이 나에게 골을 내며 나를 포도원지기로 만들어 내 포도밭은 지키지도 못하였답니다”(6).여인은 자신이 검게 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제시하는데(6), 오빠들이 포도원을 지키게 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경 전통에서 포도밭은 여성의 몸을 표상하기도 하고, 이스라엘 자신을 의미하기도 한다(이사 5,1-2; 시편 80,8-16 등 참조).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포도밭을 지키지 못하였다는 고백은 하느님이 주신 유산을 지킬 줄 몰랐던 이스라엘의 통한과 후회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아가 1,7-8 사랑하는 이를 찾아

신부와 합창단(친구들)이 새로운 주제로 서로 노래를 주고받는다. 여기서는 사랑하는 이들이 목자로 묘사된다. 이는 연애시에서 즐겨 사용하던 문체이다.

“(여자) 내 영혼이 사랑하는 이여, 내게 알려 주셔요. 당신이 어디에서 양을 치고 계시는지 한낮에는 어디에서 양을 쉬게 하시는지. 그러면 나 당신 벗들의 가축 사이를 헤매는 여자가 되지 않을 거예요”(7). 7절에서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와 밀회를 원한다. 두 번에 걸쳐 그를 어디에서찾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사랑하는 이에 대한 강한 갈망의 표현이다. 이들에게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은 매우 견디기 힘든 일이다. 그들은 양들을 쉬게 하는 한낮에 우물가에서 만나고자 한다. 그러면 여자는 다른 목자들 가운데서 사랑하는 남자를 찾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여자는 그가 다니는 길은 어디에 있는지, 한낮의 더위를 피해 쉬는 곳은 어디인지를 알고 싶어 한다. 이는 그녀가 사랑을 찾아 길을 떠날 준비를 다했음을 표현하며, 이러한 태도는 위험한 여정을 무릅쓰겠다는 각오일 뿐 아니라 당시의 사회적 관습에 도전해서라도 사랑을 쟁취하겠다는 그녀의 강인한 다짐의 표출이다.

고대사회가 일반적으로 가졌던 특징이지만, 여성 혼자 길을 떠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안전한 선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주인공의 염원과 갈망을 이해하는 친구들은 8절에서 연인을 만날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을 제시한다. 사랑하는 이의 길을 따라 나서라는 것이다. 그의 흔적을 따라가는 것, 사랑을 만나서 그 사랑을 살기위해 우선적으로 꼭 필요한 조건이다.

8절에서 합창단이 여자에게 양 떼의 발자국을 따라가다 양치기들의 천막에서 새끼 염소들이 풀을 뜯게 하면 된다고 일러 준다. 그곳에서 여자는 사랑하는 이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노래는 아마도 결혼식에 참석하러 온 축하객들이 부르는 것으로 보인다.

너희를 대상으로 진행되던 여주인공의 대사는, 7절부터 당신으로 바뀐다. 사랑하는 그녀의 연인이 바로 눈앞에 있는 듯한 직접화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인데, 자기 마음 안에 존재하는 그녀의 당신에게 직접 말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가 1,9-18 첫번째 시의 후반부

이 노래에서 신부와 신랑은 서로 상대방의 아름다움과 매력을 찬양한다. 노래의 배경은 결혼식이 시작될 때이다. 신락은 보석으로 치장한 신부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 있다.

후반부의 앞부분(1,9-17)은 매우 조직적인 구조를 보여준다. 비슷한 분량으로 이루어진, 남자와 여자의 노래가 서로 듀엣(Duet)처럼 교차되기 때문이다: A) 남자(9-11) -> B) 여자(12-14) -> A') 남자(15) -> B') 여자(16-17).

먼저 노래를 시작하는 이는 남자이다. “(남자) 나의 애인이여 나 그대를 파라오의 병거를 끄는 준마에 비기리다”(9). “파라오의 병거를 끄는 준마라는 말은 고대 근동인들에게 육체의 완전한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최상의 표현이다. 사랑에 빠져 거친 들판을 헤매던 처녀를 알아본 사람은,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연인이었다. 자신을 찾아 먼길을 떠나온 그녀를 발견한 남자는 여인의 아름다움을 파라오의 준마에 비유한다. 이 상징하는 대담함, , 자유가 파라오라는 귀족적 아우라를 통해, 왕후의 우아함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신부의 완전한 아름다움에도 신랑은 신부에게 사랑의 표시로 더 많은 보석을 선물하고 싶어 한다.(9-11). 신랑의 찬사에 신부가 감탄과 환희에 찬 화답을 보낸다(12-14).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동아시아가 원산지인 값비싼 나르드 향기가 신랑 신부의 사랑을 퍼뜨리며 그들의 사랑이 성취될 것을 예고한다. 신랑은 결혼식을 위하여 몸에 몰약과 헤나를 바를 것이다. 신랑의 몸에 발린 기름들은 그 향기로 신부의 기분을 좋게하고 행복을 느끼게 해 준다.

이 부분의 모티브는 향기이다. 고대사회에서 여인들은 향료주머니를 몸에 지니거나 목에 걸고 다녔다고 하는데, 여주인공은 자기의 연인이야말로 목에 걸려 있는 살아있는 향기임을 강조한다.

“15 (남자) 정녕 그대는 아름답구려, 나의 애인이여. 정녕 그대는 아름답구려, 당신의 두 눈은 비둘기라오. 16 (여자) 정녕 당신은 아름다워요, 나의 연인이여. 당신은 사랑스러워요, 우리의 잠자리도 푸르답니다. 17 우리 집 들보는 향백나무 서까래는 전나무랍니다”(15-17). 15-17절은 다시 남자-여자의 듀엣이 시작되는데, 여기서 결정적으로 강조된 단어는 아름다움이다. 서로를 아름답다고 칭송하며 사용된 이 히브리어 야페, 짧은 문장안에 3번이나 반복되고 있다. 신랑과 신부는 서로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신랑은 비둘기를 연상시키는 신부의 아름다운 눈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그는 신부의 생기 있고 맑은 눈동자에 홀딱 반한 것이다. 고대 근동의 연애시에서 비둘기는 종종 젊은 여자를 표현한다.

아가 2,1-3 나리꽃과 같은 그대, 사과나무 같은 당신

2장에서부터 두 연인은, 서로를 많은 군중 사이에서도 알아본다는 내용의 노래를 부른다. 1-3절은 잠에서 깨어나는 자연과 꽃과 열매로 사랑하는 이들 서로의 환희를 묘사한다. 신부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봄에 피는 사론의 수선화에 비긴다. 신랑에게는 그녀가 많은 젊은 여자들 가운데 가장 수려하게 핀 아름다운 꽃이다. 신랑의 화답에 신부가 같은 찬사의 말로 응답한다. 숲 속에 있는 사과나무가 다른 나무를 능가하여 시원한 그늘과 좋은 열매를 내어주듯, 신랑은 다른 모든 남자들보다 더없이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다. 예로부터 사고나무와 그 열매는 사랑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남자는 여주인공을 아가씨들 사이에 있는 나의 애인은 엉겅퀴(아가씨들) 사이에 핀 나리꽃 같구나”(2)라고 구별한다. 여자는 남자를 젊은이들 사이에 있는 나의 애인은 숲 속 나무들 사이의 사과나무 같답니다”(3)라고 표현한다. 사랑의 대상인 바로 말고는 그 어떤 가치도 아름다움과 특별함의 대상일 수 없음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이의 그늘에 앉는 것이 나의 간절한 소망/그이의 열매는 내 입네 달콤하답니다라는 2,3b부터는 조금 긴 여주인공의 노래가 이어진다.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사랑하는 이를 (3인칭)로 표현한다는 점이다. 여인은 그이(사과나무)의 그늘에 앉기를 갈망하며, 그이의 열매를 먹기를 희망한다(3b). 강렬한 햇빛과 전형적 목축-농경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팔레스틴의 문학작품에서, 일반적으로 그늘은 보호와 평안을 의미하며, 열매는 삶의 절대적 조건을 상징한다.

 

아가 2,4-7 만남과 포옹

이 노래는 즐거운 결혼식이 끝난 후 마침내 신랑과 단둘이 오붓한 시간을 가지기를 갈망하는 신부의 설렘을 들려준다. “(여자) 그이가 나를 연회장으로 이끌었는데/ 내 위에 걸린 그 깃발은 사랑이랍니다”(4). 여자는 자신의 위에 걸린 깃발의 이름은 사랑임을 선포한다(4). 여인은, 자신에게 꽂힌 사랑의 깃발 때문에 몸에 병이 났다. 그녀의 병명은 사랑(5)! 상사병은 고대 근동의 연가에서나 한국의 민담에서 자주 등장하는 모티브이다. “여러분, 건포도 과자로 내 생기를 돋우고 사과로 내 기운을 북돋아 주셔요. 사랑에 겨워 앓고 있는 몸이랍니다”(5). 그런데 일반적 연가와 아가를 차별화 시키는 모티브는 그 병을 앓고 고백하는 화자이다. 이러한 적극적 고백은 대개 남자들의 전용멘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가는 이 병을 여성 스스로 고백하게 한다. 다행스럽게도 아픈 그녀를 치유시켜준 존재는 그녀의 연인이었다. “그이의 왼팔은 내 머리 밑에 있고 그이의 오른팔은 나를 껴안는답니다”(6). 아픈 여주인공을 안아주는 포옹을 통해 그녀의 사랑은 보상 받는다. 7절에서는 다시 예루살렘의 아가씨들이 등장하는 것으로 작은 균열이 제시되며, 여인은 결국 사랑을 보호하려는 염원으로 노래를 마무리한다. “(남자) 예루살렘 아가씨들이여/ 노루나 들사슴을 걸고 그대들에게 애원하니/ 우리 사랑을 방해하지도 깨우지도 말아 주오,/ 그 사랑이 원할 때까지”(7). 7절에서 신랑은 자신들만의 은밀한 사랑이 방해받지 않기를 바란다. 여기서 노루나 들사슴은 성애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이스라엘에서도 일반적으로 사랑의 여신으로 알려져 있었다. 사랑을 방해하지도 깨우지도 말아줘요. 그 사랑이 원할 때까지구절은 3,58,4에도 후렴처럼 반복되는 것으로서, 그만큼의 중요성을 암시한다. 여인은 사랑이 인위적인 힘이나 가공적 조건에 의해 방해받거나, 혹은 커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그리고 사랑은 사랑 자체가 그 끝을 알고 결정함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아가 2,8-14 사랑의 계절

봄과 사랑의 조화는 모든 연애시에서 항상 나타나는 소재이다. 차가운 겨울 우기가 끝나고 봄이 자연을 깨우면, 사랑도 깨어난다.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가 자기를 얼마나 연모하는지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여자는 남자가 자기를 보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래 서둘러 달려오는 모습을 창 너머로 주시한다. 한지만 남자가 마침내 여자의 집 앞에 다다르자, 여자는 숨도 쉬지 않는 듯 가만히 숨어서 남자가 자기를 찾게 한다.

2,8은 자신을 찾아왔던 연인을 회상하는 여주인공의 노래로 시작된다. 봄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전체적으로 감미롭고 따스한 느낌을 준다. “8 (여자) 내 연인의 소리!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잖아요. 9 나의 연인은 노루나 젊은 사슴 같답니다. 보셔요, 그이가 우리 집 담장 앞에 서서 창틈으로 기웃거리고 창살 틈으로 들여다본답니다”(8-9). 초반에 등장하는 , 노루, 젊은 사슴모티브는 마지막 구절인 17절에 다시 반복됨으로써, 전체적인 틀(인클루시오)을 형성하고 있고, 시간적 배경을 아침-낮으로 설정하고 있어서, 밤 이야기가 시작되는 3,1이하(세번째 시)와 뚜렷이 구분된다.

노래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 시작된다(8a). 여인은 그 목소리가 사랑하는 연인의 소리임을 즉시 깨닫는다. 자신을 찾아오는 연인을, 산과 언덕을 뛰어넘는 노루와 젊은 사슴으로 표현한데 이어, 9b에서는 담벼락과 창문 뒤에서 기웃거리는모습으로 묘사한 점이 흥미롭다.

힘차게 달려온 노루가, 담벼락 뒤에서 그녀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다는 설정인데, 동적인 성향과 정적인 모습을 결부시킴으로써, 활기차고 날렵하지만 동시에 무례하지 않는 연인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10절에서 남자는 직접 화법으로 말을 건넨다. “내 연인은 나에게 속삭이며 말했지요.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주오”(10).

이 표현은 13절에 다시 반복되고 있는데, 물론, 이 말은 남자가 직접하는 이야기라기보다 여자가 기억하고 있는, 혹은 환상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로 이해할 수 있겠다. 11-13절에 등장하는 봄에 대한 묘사는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자연관련 묘사 중 가장 아름다운 본문 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11, 이제 겨울은 지나고 장마는 걷혔다오. 12 땅에는 꽃이 모습을 드러내고 노래의 계절이 다가왔다오. 우리 땅에서는 멧비둘기 소리가 들려온다오. 13 무화과나무는 이른 열매를 맺어 가고 포도나무 꽃송이들은 향기를 내뿜는다오.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11-13). 마치 슬라이드를 보듯이 풍경화를 연달아 보는 듯한 효과를 주기 때문이다. 9절에서 젊은 사슴으로 묘사되었던 남자는 14절에서 이제 자신의 여인을 바위틈에 있는 비둘기로 표현한다. 전통적으로 비둘기는 평화와 온유를 상징하고, 동시에 봄이 왔음을 알리는 전령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제비가 날아오면 봄이 시작되었음을 알듯이, 팔레스티나에서는 비둘기를 통해 봄이 왔음을 인식했던 것인데, 연인은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왔음을 상기시키면서, 바위 틈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그녀(비둘기)에게 어서 나올 것을 촉구한다. 그들의 사랑이 자연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15절에는 갑자기 작은 여우들이 등장하여 포도원을 망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물론 이 표상은 포도원이 상징하는 것(여성의 몸 혹은 그들의 사랑)과 그것을 방해하거나 위협하는 것(여우)에 대한 은유로 볼 수 있다.

16절에 등장하는 나의 연인은 나의 것, 나는 그이의 것. 그이는 나리꽃 사이에서 양을 치고 있네이라는 표현은 전통적으로, 서로의 사랑을 교환하는데 사용된 고유 표현이다(6, 3; 7,11). 이 표현은 주로 혼인 계약시에 사용되었으며, 특별히 구약성서 전통 안에서는 이스라엘과 하느님의 관계를 선포하는데 적용되었다.

주님께서 너의 하느님이 되시고 너는 그분 소유의 백성이 될 것이다”(신명 26, 17-18)가 그 대표적 구절이다. 둘째 시는 연인을 다시 베델산으로 초대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17). 이 산이 어디에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실제상으로 존재하지 않는 상징적인 산일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모호성은 아가가 노래하는 모든 내용이 꿈과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다분히 몽환적 상태의 것임을 밝히고 있다.

 

아가 3,1-5 연인을 찾음

3,1-5는 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밤 이야기는 5, 2-6에서 다시 등장하는데, 특히 이 두 본문은 찾음-잃음/ 존재-부재라는 상반된 모티브를 교차시키는 형태로 되어있다.

3,1-5은 특별히 찾다(히브리어, 바카쉬)-발견하다(마짜)-내 영혼이 사랑하는 이여(쉐아하바 납쉬)를 정확히 4번 등장시킴으로써, 그 체계적 구성을 보여준다.

노래를 시작하는 이는 여주인공이다. 그녀는 밤새도록 연인을 찾았건만 찾아내지 못하였다고 고백한다(3,1.2). 현존-부재의 문제는 모든 연애시에 절대적으로 등장하는 소재이며, 또한 교회전통의 유명한 신비가들이 거듭 사용해온 주제이기도 하다.

신비가들은 영혼의 밤이라는 주제로 이를 설명해왔는데, 이들에 의하면 모든 사랑 안에는 자체적 밤이 있기 마련이다. 고독과 방황, 혼란과 극적인 부재의 밤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체험하게 하지만, 좀 더 깊은 진리와 관계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은총의 장이된다. 아가에서 특별한 점은 이러한 고독과 고통의 고백이 언제나 여주인공의 몫이라는 점이다.

“(여자) 나는 잠자리에서 밤새도록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아다녔네. 그이를 찾으려 하였건만 찾아내지 못하였다네”(1). 사랑하는 남자에 대한 갈망이 너무나 커서 여자는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래서 여자는 마침내 침대에서 일어나 성읍 어디엔가 있을 남자를 찾아 나선다. 이는 실제 여자가 밤에 밖으로 나섰다는 말이 아니라 꿈속에서 애인을 찾아 헤매는 모습을 시인이 그리고 있는 것이다. 밤중에 혼자 성읍을 돌아다니는 일은 젊은 여자에게 대단히 위험한 일임에도 여자는 사랑하는 이에 대한 갈망 때문에 두려움 없이 그를 찾아 거리와 광장마다 돌아다닌다. 마침내 여자는 남자를 발견하고서는 놓치지 않으려고 꼭 붙잡는다.

연인을 찾기 위해 어두운 성읍의 거리와 광장을 돌아다니는 그녀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으리(2)라고 다짐하지만, 그녀가 만난 이들은 도시의 야경꾼들뿐이었다. “성읍을 돌아다니는 야경꾼들이 나를 보았네. ‘내가 사랑하는 이를 보셨나요?”(3). 애절한 마음으로 여인은 야경꾼에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모든 노력을 접는 순간에 기적은 일어난다. 돌연히 자기 앞에 서있는 연인을 만나게 되니 말이다(4).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 나 그이를 붙잡고 놓지 않았네, 내 어머니의 집으로, 나를 잉태하신 분의 방으로 인도할 때까지”(4). 여인은 연인을 자기 어머니의 침실로 인도하는데, 여기서도 여인의 적극적인 태도가 부각되어있다. 전통적으로 어머니의 침실로 신부를 인도하는 이는 신랑이기 때문이다(창세 24, 67 참조).

침실로 인도된 연인들의 이야기는, 5절에서 갑자기 예루살렘의 아가씨들에게 사랑을 방해하지 말 것을 남자가 당부하는 내용으로 마무리 된다. “(남자) 예루살렘 아가씨들이여, 노루나 들사슴을 걸고 그대들에게 애원하니 우리 사랑을 방해하지도 깨우지도 말아 주오, 그 사랑이 원할 때까지”(5).

 

아가 3,6-11 혼례 행렬

밤거리를 찾아 헤매던 여인의 모습은 사라지고, 이제 무대는 솔로몬의 결혼식 장면으로 이동된다. 갑작스런 전환과 누가 화자인지 분명하지 않은 히브리 본문, 더욱이 지금까지 적용되어왔던 대화(듀엣)양식이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은, 이 장면과 이전 본문들 사이의 뚜렷한 단절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솔로몬의 결혼과 아가의 두 연인이 가지는 연관성인데,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솔로몬과 그의 신부가 가장 호사스럽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인생에서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는 것 정도이다.

“ (친구들) 연기 기둥처럼 광야에서 올라오는 저 여인은 누구인가? 몰약과 유향, 이국의 온갖 향료로 향기를 풍기며 오는 저 여인은 누구인가?”(6). 합창단(친구들)이 혼례 행렬의 모습을 노래한다. 혼례가 시작되면 신랑과 그의 친구들이 장엄하게 신부를 데리러 온다. 그들은 신부를 태워 가기 위하여 몰약과 유향, 그리고 온갖 향료로 꾸민 가마를 가지고 온다. 행렬의 모습은 사막을 지나오는 대상 행렬을 연상시킨다(6-8). 신랑은 향기를 내뿜는 향로에 둘러싸여 있고, 향로에서 구름 기둥이 생경 하늘로 올라간다. 이 노래에서 신랑은 신비스럽게 뒤에 숨어 있다. 혼례 행렬의 묘사는 주님께서 시온으로 오심을 노래하는 시편 68을 떠올리게 한다.

솔로몬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샬롬(shalom)에서 파생하였다. 아마도 이 이름이 3번이나 반복되고 있다는 것은(7, 9, 11), 그것이 제시하는 평화-지혜의 의미를 부각시키고자 함인 듯하다.

결국 솔로몬의 등장은,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모두 솔로몬처럼 평화와 지혜를 소유하게 됨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아무리 보잘 것 없고 가난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사랑을 체험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솔로몬 임금에 견줄 만큼 호사스럽고 아름다울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혼례 행렬을 호위하는 관습은 신부를 납치하려는 강도를 막기 위한 옛 관습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1마카 9,40-41 참조). 가마를 호위하는 용사들은 젊은이들 가운데서 선별된 이들로서 신랑의 이상을 한층 더 세워 준다. 신랑은 신부가 자기 남편에게 기대하는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솔로몬이 모든 이스라엘인에게 이상적인 인물이었듯, 신랑은 신부에게 가장 이상적인 인물이다. 9절은 6절의 물음에 답을 준다. 값진 가마의 모습은 실제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신부의 이상적인 모습을 상징적으로 그리고 있다. 시온 아가씨들은 이러한 남자를 신랑으로 맞이하는 신부가 얼마나 복된지 보아야 할 것이며, 모두 함께 결혼의 기쁨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나와서 보아라, 시온 아가씨들아, 혼인날, 마음이 기쁜 날에 그 어머니가 면류관을 씌워 준 솔로몬 임금을!”(11).

 

아가 4,1-7 신부에 대한 찬가

이 시는 신부의 아름다움, 특히 그녀의 육체적 아름다움을 묘사하고 있다. 이 시로노래를 부르는 것 역시 결혼식의 일부였을 것이다. 탈무드는 비록 신부가 어여쁘지 않은 경우라고 그녀를 칭송하는 것이 관습이었음을 알려 준다. 노래의 시작과 끝이 그 구체적인 묘사를 한마디로 요약하여 들려준다.

4,1에서는 솔로몬이라 불리는 신랑이 자기 신부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내용이 전개된다. “(남자) 정녕 그대는 아름답구려, 나의 애인이여. 정녕 그대는 아름답구려. 너울 뒤로 얼보이는 그대의 두 눈은 비둘기라오. 그대의 머리채는 길앗 비탈을 내리닫는 염소 떼 같다오”(1). 여인의 신체적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찬가는 아랍을 비롯한 고대 근동의 전통에서 항구하게 등장하는 요소이며, 특별히 아가는 근동의 연애시 전승에 자신들의 셈족 사고와 유목 환경, 그리고 솔로몬이라는 상징적 인물을 통합함으로써 그들만의 고유한 노래를 만들어내었다.

따라서 신체적 조건에 대한 심미적 표현은 그녀의 품성과 인간됨, 정신적 아름다움에 대한 찬양으로 마무리되는데, 마지막에 등장하는 나의 애인이여, 그대의 모든 것이 아름다울 뿐 그대에게 흠이라는 하나도 없구려”(7)라는 표현은 사랑에 빠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찬사이다.

이는 창세기의 언급과도 연결된다. 보기에 참 좋은모습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함은, 역으로 인간에 대한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간절한 것이었는지를 증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작과 끝 말 사이에 신부의 육체에 대한 세세한 묘사가 이루어진다. 면사포 사이로 살며시 보이는 신부의 눈은 마치 비둘기의 눈처럼 생기가 있고 맑다(1,15 참조). 혼례 행렬에서 종종 처녀성의 상징으로 쓰이던 신부의 검은 머리채는 비탈을 내리닫는 염소 떼를 상기시킨다. 이처럼 사람의 육체를 동물에 비유하는 것은 우리에게 낯설게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시 저자의 삶이 인간과 자연이 일치하는 배경을 지녔기에 자연 안에서 하느님의 창조 능력과 영광을 체험하였던 것임을 생각하면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2절은 신부의 고른 치아를, 3절은 윤기가 도는 입술과 면사포 사이로 살며시 엿보이는 볼을 찬양한다. 말을 하는 듯한 그녀의 입 역시 어여쁘다. 따라서 신부가 사랑받는 이유는 단지 육체적 매력 때문만이 아닌 것이다. 4절에서 신부의 목을 다윗 탑에 비유하는 것은 가는 목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파수대에 걸려 있는 방패들처럼 목걸이들이 신부의 목을 장식하고 있다. 5절에서 신부의 젖가슴을 한 쌍의 젊은 사슴, 쌍둥이 노루에 비유하는 것은 그녀의 양쪽 젖가슴의 부드럽고 고른 모습을 보여준다. 6절의 내용에서 이 노래가 신랑이 부른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신랑이 이제는 자신의 여자가 된 아름다운 신부에 대하여 자랑하는 모습을 뚜렷이 볼 수 있다. ‘몰약 산유향 산은 어떤 장소를 가리키는 적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들의 궁합을 완곡하게 표현하는 말이다.

솔로몬이 그의 신부에게 바친 최상의 찬미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그 오십분의 일만이라도 표현해준다면, 그래서 사랑하는 아내에게, 혹은 어머니에게 용기를 내어 당신이 정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라고 말해줄 수 있다면, 그건 그분들께는 평생동안 결코 잊지 못할 소중한 선물이 될 것이다.

 

아가 4,8-15 레바논으로

“(남자) 나와 함께 레바논에서, 나의 신부여, 나와 함께 레바논에서 떠납시다. 아마나 산 꼭대기에서, 스니르 산과 헤르몬 산 꼭대기에서, 사자 굴에서, 표범 산에서 내려갑시다”(8). 여기에서는 레바논이라는 새로운 모티브가 도입되고 있는데, 처음과 중간, 마지막에 등장함으로써 단락 전체를 포괄하고 있다(8.11.15). 레바논은 팔레스티나 지역 최북단에 있는 곳으로, 아름다운 경관과 헤르몬산으로 유명하다. 이 신비의 땅이 아가의 여주인공에게 비유되고 있다는 것은, 그녀가 그만큼 아름답고 신비로움을 표현해준다.

또한, 자신의 신부를 누이라고 부르는 것이 눈에 띄는데(4,9.10.12; 5,1), 이렇게 연인을 누이혹은 오라버니로 부르는 관습은 고대 이집트의 연가에서 자주 발견된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그대의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대의 사랑은 포도주보다 얼마나 더 달콤하고 그대의 향수 내음은 그 모든 향료보다 얼마나 더 향기로운지!”(10).

12-15절은 이제 여인을 정원으로 표현한다. “(남자) 그대는 닫혀진 정원,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그대는 닫혀진 정원, 봉해진 우물”(12). 근동지역의 척박한 기후를 염두에 둔다면, 정원과 샘이야말로 가장 적절한 파라다이스적 표상이라 할 수 있겠다. 사랑하는 연인끼리는 서로가 생명과 구원의 장소가 됨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주인만이 드나들 수 있는 정원과 물을 깨끗이 보존하기 위하여 봉해진 우물의 은유에서 신랑은 자기에게만 속한 누이 신부를 알아본다. 이 은유는 젊은 신부의 신비스러운 광채와 매력을 느끼게 한다. 13-14절은 12절의 은유를 계속 이어 간다. 누이 신부인 닫힌 정원에는 그늘과 향기를 제공하는 귀한 과일들과 나무들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정원은 이스라엘인들에게 낙원을 상징하는 개념이었다. 이 정원은 사랑의 기쁨과 신부의 매력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비유였으며, 신랑은 이 신부가 오로지 자기만을 위하여 보존되어 왔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대는 정원의 샘/ 생수가 솟는 우물/ 레바론에서 흘러내리는 시내라오”(15). 15절의 생수가 솟는 우물” “흘러내리는 시내라는 말은 아무도 손댄 적이 없는 청순한 신부를 가리키는 은유이다. 신부가 주는 행복은 깨끗한 물처럼 생기를 복돋워 준다. 중세 시대의 영적 독서에서 닫힌 정원은 종종 마리아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16절에서 노래를 부르는 주체는 다시 여인이다. 그녀는 자기 몸에서 향기로운 바람을 일으켜, 연인을 자신의 정원으로 초대하고자 한다. “(여자) 일어라, 북새바람아! 오너라, 마파람아! 불어라, 내 정원에, 온갖 향료들이 흘러내리게! 나의 연인이 자기 정원으로 와서 이 맛깔스런 과일들을 따 먹을 수 있도록!”(16).

아가 5,1-16 사랑의 시험

“(남자)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나의 정원으로 내가 왔소. 내 몰약과 발삼을 거두고 꿀이 든 내 꿀송이를 먹고 젖과 함께 내 포도주를 마신다오. (친구들) 먹어라, 벗들아. 마셔라, 사랑에 취하여라”(1). 연인이 도착하고, 몰약, 발삼, , , 포도주에 취한다는 표현(5,1)은 이제 두 사람이 온전히 결합했음을 표현한다. 주변 사람 모두 사랑에 취하여라는 권고를 한다.

5,2-8의 노래는 31-4절의 꿈 이야기와 비슷하다. 잠든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가 자기에게 오기를 바라고 남자는 그녀를 찾아온다. 이어서 신부와 신랑이 서로를 거부하다가 받아들이는 대화가 반복된다. 사랑을 시험하는 것일까?

“(여자) 나는 잠들었지만 내 마음은 깨어 있었지요. 들어 보셔요, 내 연인이 문을 두드려요. ‘내게 문을 열어 주오, 나의 누이 나의 애인, 나의 비둘기, 나의 티 없는 이여! 내 머리는 이슬로, 내 머리채는 밤이슬로 흠뻑 젖었다오’”(2). 신랑은 밤을 마다치 않고 사랑하는 여자에게 달려간다. 신부와 떨어져 있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신랑은 자기 머리채가 밤이슬로 흠뻑 젖었다고 하면서 신부에게 문을 열어 달라고 간청한다. 하지만 그녀는 핑계를 대며 문을 열어 주기를 마다한다. 그러다가 신랑이 문틈으로 손을 내밀어 문을 열려고 하자 신부가 직접 문을 열어 준다.

그러나 이제는 신랑이 신부에게서 떠나간다. 단지 사랑의 흔적(몰약)만을 남긴 채. 신랑이 떠나 버리자 신부는 넋이 나간다. 아마도 신랑을 밖에서 너무 오랫동안 기다리게 했는가 보다. 그러자 신부는 밤중임에도 불구하고 신랑을 찾으러 나간다. 야경꾼들은 신랑을 찾아다니는 신부를 보고 미친 여자, 또는 창녀라 여겨 때리고 상처를 내며 그녀의 겉옷을 빼앗는다. 그녀는 신랑의 사랑을 시험하고 싶었으나 이제 자기가 시험을 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성읍을 돌아다니는 야경꾼들이 나를 보자 나를 때리고 상처 내었으며 성벽의 파수꾼들은 내 겉옷을 빼앗았네”(7).

이 노래를 이해하는 데는 많은 의문이 따른다. 실제로 신부가 꾼 꿈 이야기인가? 신부가 사랑하는 이가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는 태도는 수수께끼이다.

이 때 예루살렘의 아가씨들이 등장하고(9), 여인은 그들에게 연인에게 사랑 때문에 앓고 있다고는 말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한다(2, 5참조). 야경꾼들의 폭행으로 고통스러운 그녀는 그 아픔을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애처로운 애원에 아가씨들은 연인의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사로잡았는지를 묻는다. “(친구들) 그대 연인이 다른 연인보다 나은 게 무엇인가? 여인 중에 가장 아름다운 이여. 그대 연인이 다른 연인보다 나은 게 무엇인가? 그대가 우리에게 그토록 애원하게”(9). 그 답변으로 여인은 자기 연인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5,10-16).

“(여자) 나의 연인은 눈부시게 하얗고 붉으며 만인 중에 뛰어난 사람이랍니다”(10). 아름다운 남성에 대한 찬사는 성경전통에도 드물지 않게 등장하는 주제로서, 요셉(창세 39, 6), 다윗(1사무 16, 18), 압살롬(2사무 14, 25) 등이 출중한 용모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그이의 입은 달콤하고 그이의 모든 것이 멋지답니다. 나의 연인은 이렇답니다, 내 벗은 이렇답니다, 예루살렘 아가씨들이여!”(16)에서 그이의 모든 것이 멋지다고 얘기하는 여인의 마음을 너무도 잘 이해한 친구들은 이제 그를 찾아 나설 것에 동의한다.

아가 6,1-3 내 곁에 있는 나의 연인

친구들은 신부가 신랑을 찾는 일을 돕고자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신부는 신랑이 자기 곁에 있음을 알고 있다.

“2 (여자) 나의 연인은 자기 정원으로, 발삼 꽃밭으로 내려갔어요. 정원에서 양을 치며 나리꽃을 따려고 내려갔어요. 3 나는 내 연인의 것, 내 연인은 나의 것. 그이는 나리꽃 사이에서 양을 친답니다”(2-3). 2-3은 또 다른 내용상의 균열을 드러낸다. 지금껏 연인을 찾아 헤맨 여인이, 남자의 행방을 알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정원에 있다는 것인데(5, 1 참조), 연인의 근황에 대한 앎은 그녀가 사랑을 다시 찾았음을 암시한다.

아가의 여인은 자신의 향기로운 바람을 일으켜 연인을 부르고(4, 16), 이제 그가 조용하고 평화로운 정원(자기 자신)에 찾아와 있음을 깨닫는다.

 

아가 6,4-9 그대의 빼어난 아름다움

“(남자) 나의 애인이여, 그대는 티르차처럼 아름답고 예루살렘처럼 어여뻐 기를 든 군대처럼 두려움까지 자아낸다오”(4).

남자는 사랑하는 여인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데, 비슷한 내용이 벌써 두 번이나 등장한 바 있다(1,9-17; 4,1-7). 4절에서는 여인이 두개의 도시에 비유되는데, 그 중 하나인 티르차는 사마리아 이전에 북이스라엘의 수도였던 곳이고(1열왕 16,23; 여호 12,24), 예루살렘은 남유다의 수도였던 곳이다. 티르차는 예로보아 때부터, 오므리 임금이 새로 건설한 사마리아로 옮겨 갈 때까지 북 이스라엘의 수도였다. 애인을 티르차에 비유했다고 해서, 아가가 이 도시가 수도였을 시대, 또는 이 도시의 명성이 이미 자자했을 솔로몬 시대애 지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말로가 비참한 사마리아에 대한 언급을 피하고, 다른 한편으로 이 도시 이름의 어근인 좋아하다를 암시하고자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즉 여인의 아름다움이, 이 도시들의 이름과 연결되어있는 듯 하다. 예를 들어, 티르차는 좋아함, 기쁨, 즐거움과 어원적으로 연결되고, 예루살렘은 평화와 연결된다.

, 이 이름들이 가지는 즐거움-평화의 이미지가 여인에게 대입되고 있는 것이다. 이어 노래는 목자적 표상을 통해 여인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5-6).

수많은 왕비와 후궁과 궁녀 가운에서 아름다움이 뛰어난 이는 신랑이 사랑하는 여인뿐이다. 왕비들과 후궁들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칭송한다. 8절의 표현은 비록 수에 있어서 차이가 나긴 하지만 솔로몬의 여자들을 염두에 둔 것 같다. 신랑에게 사랑하는 신부는 수많은 여자와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유일하게 아름다운 여인이다.

 

6,10-12 견줄 데 없는 애인

“(친구들) 새벽빛처럼 솟아오르고 달처럼 아름다우며 해처럼 빛나고 기를 든 군대처럼 두려움을 자아내는 저 여인은 누구인가?”(10). 10절은 두려움이란 소재를 사용한다. 사랑하는 여인은 마치 초자연적 존재처럼 솟아오른다. 달은 일반적으로 여자를 상징한다. 이제 새벽빛, , 해 등이 그녀의 아름다움에 비유된다. 세상에서 유일무이하게 존재하면서 인간 삶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 그녀에게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10). 이어 등장하는 기를 든 군대처럼 두려움을 자아내는 저 여인은 누구인가?라는 표현은, 그녀의 거부할 수 없는 기품과 권위를 표상한다. 11-12절은 본문이 손상되어 있어서, 정확한 의미를 끌어내기 어렵다.

특별히 12절의 암미나딥가 그런 단어인데, 이를 일반명사로 간주하면 나의 고상한 백성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칠십인역에서는 고유명사로 이해하여 암미나딥(민수 10, 14참조)과 연결시킨다.

새 번역은 칠십인역의 선택을 따르고 있는데, 여기서 어느 것이 맞는지는 구체적으로 결정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남자가 이제 호두나무 정원으로 들어가(11) 여인과의 결합을 노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가 7,1-14 아름다운 애인

“(친구들) 돌아와요, 돌아와요, 술람밋이여. 돌아와요, 돌아와요, 우리가 그대를 바라볼 수 있도록. 너희는 어찌하여 술람밋이 두 줄 윤무를 추기라도 하는 듯 바라보느냐?”(1).

이 시는 신부가 홀로 추는 춤에 동반되는 일종의 합창곡이다. 1절에서는 모든 이가 신부의 아름다움을 감탄할 수 있도록 신부에게 춤을 추어 달라고 요청한다. 축하객들 앞에서 신부가 춤을 추는 것은 고대 근동에서 널리 알려져 있던 관습이다. 아마도 신부는 양쪽으로 줄을 서 있는 남자들 가운데로 지나가면서 춤을 추었을 것이다. 아가에서 신부의 이름이 언급된 곳은 오직 여기뿐이다.

노래를 부르는 주체는 그녀의 연인이다. 1절에서 그녀는 술람밋이라고 표현되고 있는데, 이 표현 역시 많은 해석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아가에서 유일하게 여기에만 등장하므로 다른 맥락(context)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다. 메소포타미아의 여신 이름이라는 견해도 있고, 슈남미트로 읽는다면 슈넴에서 온 여인(1열왕 1,1-4; 2,17.21~22)을 의미할 수도 있다. 샬롬을 어근으로 하는 솔로몬의 이름과 연결된다고 보는 견해도 있는데, 그렇다면 이는 솔로몬의 여인(부인) 혹은 평화의 여인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남자) , 귀족 집 따님이여 샌들 속의 그대의 발은 어여쁘기도 하구려. 그대의 둥근 허벅지는 목걸이처럼 예술가의 작품이라오”(2). 2절 이하에서 신부의 아름다운 육체가 묘사되는데, 이번에는 발부터 시작한다. 춤을 출 때에는 보통 발부터 보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신부는 놀랍게도, ‘귀족집 따님이라 불린다. 그런 다음 관중의 시선은 신부의 허벅지를 거쳐 배가지 이른다. 동그란 술잔과 밀 곡식 더미는 궁합의 기쁨을 표시하며 다산을 기원한다. 또한 신부의 젖가슴과 목은 41-7절에서처럼 은유법으로 묘사된다. 5절의 상아탑은 흰 피부를 가리킨다. 5절의 헤스본은 요르단 동쪽 아모리족의 수도였으며(민수 21, 27), 나중에는 모압인들의 도시가 된 곳이다(이사 15,4). 그러나 이 도시에는 5절에 등장하는 밧라삠 성문이나 연못이 없었기에, 아마도 이러한 표현들은 여인의 맑고 영롱한 눈을 상징하기 위한 설정으로 보여진다. 레바논 탑으로 은유되는 신부의 코는 그녀의 자랑스럽고 감히 근절할 수 없는 모습을 묘사한다.

6절의 카르멜산은 자부심과 귀족성을 상징하는 곳으로, 여인을 왕의 품위에 비유하고 있다(1,4.12 참조). 나무가 울창한 카르멜 산은 꼿꼿한 신부의 머리와 광채나는 머리카락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절대적 칭송에 대해, 이제 아가의 여인은 나는 연인의 것/ 그이는 나를 원한답니다라고 응수하면서(11), 자신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이 노래는 음란한 표현을 쓰지 않으면서도 매력과 품위를 지닌 육체의 아름다움을 훌륭하게 묘사한 좋은 예이다.

“(여자) 오셔요, 나의 연인이여 우리 함께 들로 나가요. 시골에서 밤을 지내요”(12). 12절에서 여인은 대담한 제안으로 노래를 시작한다. 연인과 함께, 아무런 방해도 없는 들로 나가 자연의 축복 안에 밤을 지내자는 것이다. 13절에 표현된 만개한 자연에 대한 비유는, 만개한 그들의 사랑을 상징해준다.

합환채는 향기를 내뿜고 우리 문간에는 온갖 맛깔스런 과일들이 있는데 햇것도 있고 묵은 것도 있어요. 나의 연인이여 이 모두 내가 당신을 위하여 간직해 온 것이랍니다”(14). 합환채란 지중해변에서 자라는 이 풀로서 줄기가 없고 넓은 잎에서는 냄새가 나며 누런 열매를 맺는다. 그 뿌리가 사람 모습을 하고 있어 통속적으로 임신촉진제로 쓰였다. 문간에 있는 과일들이 햇것도 있고 묵은 것도 있다14절의 표현은 그녀가 연인과의 만남을 위해 오랜 시간 모든 것을 차곡차곡 간직해 왔음을 말해준다. 그 과일들은 그녀의 삶 전체와 사랑의 역사 전부를 대변해주고 있는 것이다.

 

아가 8,1-14 죽음보다 강한 사랑

“1 (여자) , 당신이 내 어머니의 젖을 함께 빨던 오라버니 같다면! 거리에서 당신을 만날 때 누구의 경멸도 받지 않고 나 당신에게 입 맞출 수 있으련만. 2 나를 가르치시는 내 어머니의 집으로 당신을 이끌어 데려가련만. 당신에게 향료 섞인 술, 나의 석류주를 대접하련만”(1-2). 1-2절에서 여인은, 사랑하는 연인이 자신의 남자 형제였으면 좋겠다고 염원한다. 좀 더 쉽고 편하게 만날 수 있는 관계,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그런 관계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둘의 완전한 결합은 3-4절에서 표현되는데 이러한 내용은 이미 2, 6-7에도 등장한 바 있다. 그러나 사랑을 방해하지 말라고 부탁하는 이 부분은, 비논리적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다.

그이의 왼팔은 내 머리 밑에 있고 그이의 오른팔은 나를 껴안는다면!”(3). 지금까지 당신이라고 불려진 연인은 그이라는 3인칭으로 불리며, 껴안는다면!하는 히브리어 미완료형은 미래적 시점을 제시하므로, 지금까지의 내용들이 실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마치, 이 모든 상황이 인 듯이 처리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연인에게 몸을 기댄 채 광야에서 올라오는 저 여인은 누구인가?(5)라는 물음으로 시작되는 첫 부분은 3, 66, 10에서도 반복된 바 있다. 다만 8, 5은 화자가 누구인지 정확하지 않고(아마도 여인의 친구들인 듯),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이렇게 두 사람이 함께 등장하는 것은 아가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경우이기에, 5절의 동반 등장은 매우 특별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먼저 노래를 부르는 이는 역시, 여인이다. 그녀는 과거를 회상하며 노래를 시작하고, 사랑하는 연인이 잉태되던 순간부터 그를 사랑해 왔음을 고백한다. 이 부분에 등장한 사과나무2, 3에서 이미 연인을 상징하는 모티브로 등장한 바 있는데, 이제 그녀는 사과나무 아래에서 연인의 어머니가 그를 잉태하던 순간, 즉 그의 생명이 시작되던 순간부터 줄곧 함께 해왔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6-7절은 죽음처럼 강한 사랑에 대한 이 찬가는 아가의 절정이다. “6인장처럼 나를 당신의 가슴에, 인장처럼 나를 당신의 팔에 지니셔요.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정열은 저승처럼 억센 것. 그 열기는 불의 열기 더할 나위 없이 격렬한 불길이랍니다. 7큰 물도 사랑을 끌 수 없고 강물도 휩쓸어 가지 못한답니다. 누가 사랑을 사려고 제집의 온 재산을 내놓는다 해도 사람들이 그를 경멸할 뿐이랍니다”(6-7).

신부는 신랑에게 자기를 인장처럼 지녀 달라고 청한다. 인장은 보통 끈에 매어 목에 두르곤 하였다. 인장은 일종의 사인으로서, 그 사람 전체를 대표한다. 바로 그런 인장처럼 자신을 가슴과 팔에 새겨 달라는 표현 안에는, 언제나 연인과 함께이기를 원하는 여인의 강한 열망이 들어가 있다. 특별히 가슴과 팔은 인간의 대표적 기능인 정신행동을 상징하기에, 그녀의 염원은 연인의 모든 삶에 함께이고 싶은 마음을 암시한다. 그녀는 이렇게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까이 붙어 있고자 하는 것이다. 이 말에는 절제된 감정이 감추어져 있다. 이 감정은 곧 따라 나오는 말들에서 사랑과 그 힘에 대한 찬가로 이어진다.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은 결코 거기에서 도망칠 수 없다. 마치 사람이 죽음에서 도망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성 간의 사랑은 인간 존재 전체를 완전히 포로로 만들어 버린다.

여인은 자신의 사랑을 죽음쉐올(저승)에 비유한다. 히브리적 사고에 의하면, 죽음과 죽음 이후에 가게 되는 쉐올은 그 어느 누구도 빗겨갈 수 없는, 매우 강력한 존재들이다. 아가에서 사랑과 죽음, 쉐올이 함께 비유되고 있다는 것은, 사랑과 죽음이야말로 인간의 실존을 결정짓는 가장 강력한 힘이며, 결국 죽음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사랑뿐임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사랑은 불의 열기로 표현된다. 그 열기는 불의 열기, 더할 나위 없이 격렬한 불길이랍니다. 그런데 여기서 격렬한 불길이라는 표현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샬헤베트야()의 불길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만일 이를 야의 불길로 해석한다면, 86절은 아가에서 유일하게 야훼라는 이름이 등장한 구절이 된다.

그러나 일반적 형태의 이름 야훼가 아니라, 라는 단축형으로 제시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성서의 일반적 전통에 의하면 불은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였다.

그러므로 사랑이 주님의 불길로 표현되고 있다는 것은, 사랑이야 말로 야훼가 현존하는 장소이며 그 만큼 강한 힘을 내포하고 있음을 제시한다.

7절에서 사랑은 큰물(바다, 깊은 심연)과 연결된다. 6절의 과는 상극적 소재인 이 대조되고 있는 것인데, 모두 절대적 힘을 상징한다. 고대근동의 전통에 의한다면, 바다, 깊은 물은 언제나 강력한 원초적 혼돈과 으로 간주되어 왔기 때문이다.

바다의 신 라합은 하느님을 대적하는 악한 힘으로 표상되었고(시편 89, 10-11), 강한 물살과 급류(시편 124, 2-5)죽음의 파도로 표현되어 있다(시편 18, 5).

이렇게 강한 혼돈인 큰물을 끌 수는 있겠지만, 사랑을 끌 수는 없다(7). 사랑은 그 어떠한 악의 세력(큰물)도 이겨낼 능력과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어 아가의 여인은 사랑이 결코 돈과 재산으로 얻을 수 없는 것임을 언급한다(7).

누가 사랑을 사려고 제 집의 온 재산을 내놓는다 해도, 사람들의 빈축만 살 뿐, 결코 사랑을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금까지 아가는 두 연인의 사랑을 통해 그 사랑 안에 살아계신 하느님의 실존그분의 사랑을 말해왔던 것이다. 사실, 성서 전체를 관통하는 절대적 메시지는 사랑이다.

사랑의 정열은 죽음과 같은 것이다. 사랑의 열기는 격렬한 불길을 일으킨다. 어떠한 위험도, 곤경도, 고통도(=큰 물) 사랑의 불을 끌 수 없다. 사랑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믿는 자는 어리석다. 사랑은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다. 오로지 그저 주고받는 것일 뿐이다. 이 노래는 아가에서 지혜문학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유일한 대목이다.

마지막 부분 8-14절은 서로 연결되지 않는 이야기들이 수수께끼처럼 엮어져 있어서 후대에 첨가된 부록일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여인의 오빠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이미 1,6에 나타난 바 있다. 고대 근동에서 오빠들은 누이를 보호해야할 의무를 가진 사람들로 간주되고 있었다. 디나의 오빠들이 그러했고(창세 34), 다말의 오빠인 압살롬도 예외가 아니었다(2사무 13).

아가 여주인공의 오빠들 역시 동생의 혼사를 위해 그녀를 보호해야할 의무를 느끼는데 그들은 동생이 아직 결혼 적령기에 이르지 않았다고 본다(8). 그러나 그녀는 오빠들에게 이의를 제기하며 자신이 이미 성숙한 여인임을 주장한다(10). 물론 그녀를 여인으로 만든 것은 연인이었다. 이제 소녀는 여인이 되었고 더 나아가 화평을 찾은 여인(10)이 되었다고 말한다. 사랑은 한 사람을 성숙시키며, 그 어떤 억압과 소외의 상황에서도 샬롬즉 평화를 이끌어 주는 것일까.

11-12절은 누가 화자로 등장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여기에 등장하는 바알하몬도 어디인지 알 수 없는데, 글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재산의 주인이라는 뜻이 된다.

많은 학자들은 이 곳을 솔로몬 내궁의 포도원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11-12절의 내용은, 솔로몬이 자기의 포도원을 소작인들에게 각각 은전 천닢을 받고 맡겼다는 것이고, 이는 포도원이 대단한 금전적 가치를 지님을 암시해준다. 구약성경과 아가의 전통에서 포도원은 여인을 상징해왔기에, 이러한 포도원의 가치는 곧 여주인공의 가치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13 (남자) 정원에 있는 그대여 친구들이 그대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구려. 나에게만 들려주오. 14 (여자) “나의 연인이여, 서두르셔요. 노루처럼, 젊은 사슴처럼 되어 발삼 산 위로 서둘러 오셔요”(13-14). 이제 아가의 마지막 부분이 등장하는데 노래를 부르는 이는 여인이다. 아가의 처음을 노래로 시작했던 이도 여인이었고, 마무리 역시 그녀의 몫으로 되어있는 것이다.

이제 그녀는, 처음에 자기 연인을 상징했던 노루, 젊은 사슴의 소재를 다시금 적용시킨다. 마치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듯 초기에 등장했던 모티브를 적용시키고 있는 셈이다.

그녀는 연인을 서둘러 오라고 초대하는데 그 장소는 발삼산이다. 발삼산은 그녀 자신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기에, 이제 연인을 그녀에게로 초대하면서 긴 여정을 마무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는 정의를 읽은 적이 있다. 때론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죽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될지라도 그를 기어이 살려내는 것, 그런게 바로 사랑이라는 의미로 이해했다.

아가의 마지막 부분에서 여인은 자신을 화평을 찾은 여인이라고 표현한다. 결코 행복하지 않았던 그녀의 여정을 돌아다본다면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비논리적, 폭력적 상황에서도, 조용하고 다정한 얼굴로 그 부당함을 극복함을 기억하기에, 그녀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아가의 대단원의 막은, 마침내 두 사람이 함께 등장하여 사랑의 영원성을 노래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참 사랑은 죽음만큼 강하고 불길보다 맹렬하다고 노래하는데, 이러한 내용은 아가의 전반적 메시지를 집약적으로 수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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