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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153주간

제31회 신명기 5장-10장

작성자본당신부|작성시간17.07.05|조회수547 목록 댓글 0

신명기 5-10

신명 5,1-22 십계명

모세가 제일 먼저 전하는 율법은 십계명이다. 십계명은 구약성경의 율법을 모두 아우르는, 하느님 나라의 헌법과 같은 가르침이다. 또한 단순한 법률이 아니라 이집트에서 해방된 백성이 선물로 받은 하느님 가르침이다. 그래서 십계명에는 법문장 뿐 아니라 권유, 설명, 명령이 풍부히 들어있다.

구약성경의 율법은 조건문을 사용하여 구체적 형벌을 적시한다(... 하면, ...에 처한다). 그러나 십계명은 조건 없는 권유형으로 구체적 형벌을 언급하지 않는다(‘살인해서는 안된다는 정언법). 곧 십계명은 어떤 조건에서도 지켜야 하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형벌이 무서워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순종하고 그분의 뜻과 조화롭게 살려는 인간의 열망에 기반한 계명이라는 뜻이다.

율법의 핵심 요약인 십계명은 하느님의 자비와 백성의 참된 자유를 상세하게 언급하지 않고 그 핵심을 간략하게 제시한다. 해방된 백성이 할 일은 크게 두 가지이다. 우선 하느님을 옳게 섬겨야 한다(1-3계명). 그리고 서로의 자유와 권리를 지켜주어야 한다(4-10계명). 바오로 사도는 4-10계명을 한마디로 이웃사랑으로 요약했다(로마 13,9). 하느님을 공경하고 인간을 사랑하나는 경천애인(敬天愛人) 사상은 예수님의 핵심적 가르침이기도 하다. 본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할 수 없다”(나사의 그레고리우스).

한편 십계명의 분류하는 방식은 유다교과 그리스도교가 다르다. 또한 가톨릭과 성공회와 루터교가 같지만 대부분의 개신교와 그리스 정교회는 가톨릭의 첫째 개명을 둘로 나눈다(첫째,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 둘째, 우상을 섬기지 마라). 가톨릭의 아홉째와 열째 계명을 하나로 합쳤다(열째,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마라). 신명기의 십계명은 탈출 20장과 거의 같다. 그러나 신명기 저자는 전승으로부터 물려받은 탈출 20장의 본문에 독특한 신학적 성찰을 더했다. 특히 안식일에 종이 쉬어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12-15). 또한 여성이 소유물이 아님을 뚜렷이 했다(21). 해방된 하느님 백성이 평등한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점을 도드라지게 밝힌 것이다. 신명기에 따라 가톨릭교회는 21절을 아홉째 계명과 열째 계명으로 인식하였다.

1모세는 온 이스라엘을 불러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스라엘아, 내가 오늘 너희에게 똑똑히 일러 주는 규정과 법규들을 들어라! 너희는 그것들을 배우고 명심하여 실천하여라. 2 주 우리 하느님께서는 호렙에서 우리와 계약을 맺으셨다. 3주님께서는 이 계약을 우리 조상들과 맺으신 것이 아니라, 오늘 여기에 살아 있는 우리 모두와 맺으신 것이다”(1-3).

십계명은 이집트 탈출 이후 상당한 시간이 흐른 다음 현재와 같은 형태로 고정되었지만, 절대 낡은 법이 아니다. 하느님의 가르침은 오늘들려 주신 말씀으로서, ‘지금 여기에 실천해야 한다. 또한 십계명은 먼 옛날 중재자 모세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졌지만, 하느님을 간접적으로 체험한 것으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너희에게 똑똑히를 직역하면 너희 귀에. 곧 십계명은 하느님께서 우리 귀에 대고직접 들려주신 말씀이다.

하느님의 율법은 온 백성이 배우고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 율법을 듣고 힘써 배우는 일도 중요하지만, 최종목표는 율법을 지키고 실천하는 것이다. 십계명은 호렙 산에서 맺은 계약이다. 호렙 산은 지금까지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 곳이고, 앞으로도 거듭 등장하는 구세사의 중요한 장소이다. 또한 이 산에서 십계명을 받은 일은 구세사의 다른 사건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오늘 여기에 살아있는 우리 모두와 맺으신 것이다를 직역하면 우리와, 곧 오늘 여기에 살아있는 우리 모두와 맺으신 것이다이다. 하느님은 창세기에서 노아와 아브라함 등 조상들과 계약을 맺는다. 십계명은 이 조상들과 맺은 계약을 충실히 계승하는 새로운 계약이다. 또한 십계명은 먼 옛날 모세를 통해 전달된 낡은 것이 아니라, ‘우리와, 곧 오늘 여기에 살아있는 우리 모두와맺은 계약이다.

주님께서는 그 산 위 불 속에서 너희와 얼굴을 마주 보고 말씀하셨다”(4).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호렙 산의 불타는 떨기나무 속에서 처음 나타나셨다(탈출 3,1-2). 그리고 십계명도 같은 호렙 산의 불 속에서 주셨다(신명 4,24). 주님께서 모세와 얼굴을 마주보고 말씀하셨다는 말은 주님과 친밀하게 소통하였다는 뜻이다. 모세는 구약성경에서 드물게 하느님과 얼굴을 직접 마주보고 말씀을 나누 인물이다. 그만큼 모세는 주님과 친밀하였다. 그런데 여기서는 모세뿐 아니라 백성도(“너희와”) 주님과 얼굴을 마주 보았다고 전한다. 이런 언급은 중개자의 신학을 오해할 가능성을 막으려는 것이다. 곧 모세와 같은 훌륭한 중개자가 있다고 해서, 백성이 하느님을 직접 체험하지 못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4,22;31,17).

자비의 하느님은 인간을 향하신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거역하면 하느님께서 얼굴을 감추실 것이다(31,17.18;32,20). 하느님께서 우리를 향해 계실 때 우리의 얼굴도 하느님을 향해있어야 한다. 하느님을 외면하거나 등지고 있다면, 하루빨리 하느님을 향해 몸을 돌려야 한다. 이렇게 하느님을 향해 돌아섬은 회개(매타노이아: 마음의 방향을 바꾸다)의 본질이다.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 하느님이다”(6). 십계명의 서문으로, 이 계명을 주신 주님의 신원이 가장 결정적으로 드러난다(탈출 20,2). 이렇게 하느님께서 1인칭 직접화법으로(“나는...이다”) 당신을 드러내는 곳은 신명기 전체에서 이곳이 유일하다. 십계명을 주신 하느님은 해방의 하느님이다. 하느님의 참된 해방 계획은 일찍이 하느님께서 최초로 모세에게 나타나셨을 때부터 확고했고, 이집트 탈출이 사직되기 직전에도 확인되었으며, 이제 해방된 백성에게 참된 자유와 권리를 가르쳐 주는 자리에게 거듭 언급된다. 따라서 십계명은 해방의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해방의 하느님이 바로 모든 권위의 근거이다. 그러므로 계명이란 인간의 참된 해방을 향한 것일 때에만 의미 있다. ‘이집트 종살이는 종교적 사회적 억압이 결합된 상태였다. 이 모두에서 해방하신 해방의 하느님이 주신 십계명은 종교적으로(1-3계명) 그리고 사회적으로(4-10계명) 참된 자유와 권리를 다룬다.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7). 십계명의 제1계명 한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이는 하느님께서 이집트 종살이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켰으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백성은 하느님 한 분만을 믿고 따라야 한다. 이집트 탈출 사건을 통해 하느님은 나는 ...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레위 26,12)하고 말씀하신다. 이는 하느님과 백성이 맺은 계약의 핵심이자 구약성경의 핵심이다.

십계명을 선포하기 전에 모세는 그분 말고는 다른 신이 없다고 유일신 사상을 거듭 선포하였다. 그리고 모세는 첫째 계명에서 하느님 한 분을 모시며, 그분만을 경배하며 살아야 한다는 실천을 강조한다. 유일신 교리의 이해보다 유일신 섬김의 실천을 역설하고 있다. 유일신의 진리는 명백하지만 세상에서는 다른 신들을 믿은 사람들이 늘 존재한다. 그래서 신명기에서는 다른 신을 거듭 언급한다.

십계명은 이미 탈출 20장에서 자세히 다루었다. 다만 안식일 규정을 지켜야 하는 이유에 관해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탈출기에서는 “‘주님이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20,11)에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지만신명기에서는 주님이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을 이끌어 낸 일을 기억하기 위해서(5,15)라고 가르친다. “12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여라. 13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 하여라. 14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그날 너의 아들과 딸, 너의 남종과 여종, 너의 소와 나귀, 그리고 너의 모든 집짐승과 네 동네에 사는 이방인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여 너의 남종과 여종도 너와 똑같이 쉬게 해야 한다. 15너는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였고, 주 너의 하느님이 강한 손과 뻗은 팔로 너를 그곳에서 이끌어 내었음을 기억하여라. 그 때문에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는 것이다”(12-15).

이러한 차이가 지니는 의미는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탈출기는 안식일 계명의 근거를 하느님 창조에서 찾는 반면신명기는 하느님 구원에서 찾는다. 이는 선명기의 관점이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좀 더 강조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둘째탈출기에서 안식일 준수는 이렛날에 쉬신 하느님을 닮기 위한 노력의 하나이고신명기에서 안식일 준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느님을 기억하기 위한 노력이다. 탈출기에서 안식일 준수가 하느님을 모방하기 위한 것이라면신명기에서는 하느님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이다. 이 밖에 신명기에서는 안식일이 주인뿐 아니라 집안의 종들을 위한 휴식임을 강조한 점도 특별하다. 이는 안식일 계명에 이스라엘을 하나로 통합하는 역할도 있음을 의미한다.

주님께서는 구름이 덮이고 어두운 산 위 불 속에서, 큰 소리로 너희 온 회중에게 이 말씀을 하시고, 아무것도 보태지 않으셨다. 그리고 두 돌 판에 이 말씀을 쓰시어 나에게 주셨다”(22). 탈출기는 사제와 백성은 산 아래 있고, 오직 모세와 아론이 산으로 올라가 십계명을 받았다고 전한다(탈출 19,24). 하지만 신명기는 백성에게 직접 주셨음을 뚜렷이 한다(1.3). 곧 신명기는 하느님께서 백성에게 선물로 직접 주신 십계명이라는 점을 더욱 강조한다. 22절에 언급하는 호렙 산, 불 속, 중개자 모세 등의 요소는 2-5절에 이미 나온 말이다. 5장에서 설명한 십계명은 크게 하느님 사랑과 인간 사랑의 두 부분으로 나뉜다. 이 십계명은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과 일치한다.

 

신명 5,23-33 백성이 모세의 중개를 요청한다

23산이 불에 타고 있는 가운데, 어둠 속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를 듣고, 너희 지파의 우두머리들과 원로들이 모두 나에게 가까이 와서 24말하였다. ‘보십시오, 주 우리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영광과 위대함을 보여 주시고, 우리는 불 속에서 울려 나오는 그분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사람과 말씀하셨는데도 그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을 오늘 우리가 보았습니다”(23-24).

모세의 두 번째 말씀(4,44-28,69)의 첫 번째 설교(5,23-10,11)는 신명기 법전이 주어지기 전에 중요한 신학을 설명하는데중개자의 신학으로 뼈대가 잡혀있다. 백성이 모세의 중재를 청하면서(5,23-33) 시작하는 첫 번째 설교는 새 십계판을 받으면 끝난다(10,1-11) 그 사이에 모세는 설교(6,1-19; 8,6-20; 9,1-7)와 과거의 회상(7; 8,1-5; 9,7-17)을 반복하며 교차한다. 그 가운데 자녀교육 신학에 담긴 셰마(6,4-5)와 교육 신경(6,20-25)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모세는 백성의 가장 큰 죄인 우상을 만든 사건을 회상하고서(9,7-17) 백성이 처음 요청한 대로(5,23-33) 중재에 응하고(9,18-29) 하느님은 모세의 중재를 수락하신다(10,1-11). 그 결과는 하느님의 가르침이 새겨진 새 십계판이다. 이렇게 거듭되는 설교과 회상으로 첫 번째 설교에 담긴 신학은 매우 풍부해졌다.

완전하지 못한 인간 본성은 완전한 존재인 하느님을 찾게 마련이다. 하지만 하느님께 직접 도달하는 것은 평범한 인간에게 무척 힘든 일이다. 하느님 백성은 모세에게 하느님과 백성의 중재를 요청하는데 이런 요청은 인간의 본성을 고려하면 무척 자연스런 일이다.

신명기는 중개자의 신학을 잘 보여준다. 하느님과 인간은 완전히 다른 존재다. 하느님은 지극히 거룩하신 분이시기에우리 인간에게는 감춰져 계신다. 그리고 인간이 죄를 지으면 하느님과 더욱 멀어진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는 중개자가 필요하다. 중개자는 사람이다. 그는 인간의 속죄를 통해 한님과 인간의 화해를 이룬다. 이미 구약성경에서 예언자, 사제, 임금, 천사, 율법 학자 등이 어느 정도 중개자 역할을 했다.

하지만 신명기는 중개자의 전형으로 모세를 제시한다. 중개자 모세는 한편으로 하느님의 명령을 충실히 전달하고(4,2),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대표자로서 하느님 앞에 선다(4,10). 중개자 모세는 하느님과 친밀한 인물이다. 그는 하느님과 단둘이 시간을 보냈으며하느님과 얼굴을 맞대고 사귀었다(34,10).

신명기는 하느님-모세-백성이라는 공간적 구도를 의식적으로 사용하여(5,5)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개자로서 모세를 부각한다. 모세를 통한 중개는 직접적이었다. 하느님은 모세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똑똑히 일러주셨다(5,1). 모세는 하느님의 분노를 격하게 표현하기도 하였다(9,17).

중개자는 양편에서 중재의 요청을 받는다. 우선 하느님이 중개자를 통해 백성을 부르실 때도 있고(4,10)이 단락이 전하듯 백성이 중개를 요청하기도 하였다(5,27). 백성과 하느님 사이에서 고뇌하는 중개자 모세는 백성을 위해 단식하고(9,9.18) 거듭 기도한다(9,20.25; 10,10). 하느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어주시어 분노를 가라앉히신 적이 있다(9,26-29). 중개자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전하는 존재이면서동시에 하느님 앞에서 백성의 죄를 짊어지는 사람이기도 했다. 결국 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도 그의 죄 때문이 아니라 백성의 죄 때문이었다.

신명기는 모세와 같은 중개자를 또 보내시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을 전한다(18,18). 사도들은 신명기의 약속을 들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된 중개자이심을 고백하였다(사도 3,22). 그러므로 신명기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난 중개자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된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도 한 분이시니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1티모 2,5).

모세에 따르면 호렙 산에서 직접 하느님께 십계명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에게 찾
아와 그들이 더는 하느님의 소리를 듣지 않게 해달라고 청했다. 이는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거룩하신 하느님 가까이에 머무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모세가 대신 하느님의 명령을 듣고 그 내용을 자기들에 게 전달해 달라고 청했고모세도 하느님의 승인을 받아 이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기로 했다.

32그러므로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것들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 너희는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서는 안 된다. 33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길을 따라 걸어야 한다. 그러면 너희가 차지할 땅에서 너희가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잘되고 오래 살 것이다”(32-33).

명심하고 실천하라는 말씀은 5장을 열고 닫는 권고이다. 십계명을 줄 때와 십계명을 닫을 때 똑같은 권고를 함으로써, 이제 백성이 해야 할 일은 계명의 실천임을 강조한다. 신명기는 주님의 계명을 실천할 것을 하느님 백성에게 신신당부하는 것이다.

주님이 명령한 길에서 너희는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말은 신명기에서 여러 번 반복되는 문장이다. 모세의 당부가 가장 압축적으로 표현된는 말이다. 또한 모세가 전해주는 가르침은 거룩하고 지존하신 분의 드높은 가르침이다. 우리 인간은 그분께 순종해야 한다는 교훈을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말이다. 주님이 명령하신 길에서 벗어나면 그것은 곧 타락의 길로 가는 것이다(9,12).

십계명 등 하느님의 계명을 잘 지키면, 하느님께서 주신 땅에서 잘되고 오래 살 것이다는 사상은 신명기의 핵심 사랑으로서 여러 번 반복되는 표현이다. 예수님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고 가르치셨다.


신명 6,1-25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6장은 자녀 교육에 대한 것으로전체적으로 5장과 짝을 이룬다. 5장은 십계명을 배우고”(5,1) 실천하라는 권고로 시작하여 십계명을 선포하고(5,1-22)계명을 가르쳐야한다는 말로 맺는다(5,31). 이어서 6장은 가르치라는 권고로 시작하여 자녀 교육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다(교육 신경: 20-25)배우는 처지든 가르치는 처지든주님의 계명을 듣고 명심하여 실천하는 것은 꼭 필요한 전제다. 5장과 6장은 명심하여 실천하라는 강한 실천적 권유로 열고 맺는 공통점이 있다.

6장은 전체적으로 십계명의 첫째 계명을 설명한다(특히 4,14-15). 한분이신 하느님을 사랑해야 함을 이토록 강조하는 이유는 모든 계명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어떤 경우에도 이집트 탈출의 하느님을 잊으면 안 된다.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을 섬기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하느님이 이스라엘에게 기대하시는 전부임을 거듭 가르치는 것이다.

이 내용은 특히 셰마 이스라엘로 알려진 부분이스라엘라,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6,4-6)라는 구절에 압축되어 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셰마 이스라엘)을 히브리어 어순으로 말하면 들어라. 이스라엘아로 직역할 수 있다. 이 말의 첫 단어인 셰마를 따서 4-6절의 셰마라고 한다. 셰마는 신명기의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가장 잘 요역한 구절이다. 이는 고대 이스라엘의 기본교리와 규범을 알려주는 가장 오래된 신경(Credo)이다. 하느님은 신적 신비를 알려주시기 전에 이렇게 들어라하고 명령하신다. 사랑의 출발은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듣고 피어나는 사랑’(30,10)은 모든 사랑의 기초이다. “인간이 최초로 저지른 죄는(창세 3)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생겼다”(니사의 그레고리우스).

하느님 한 분만을 사랑하는 셰마는 유배를 거치면서 그 중요성이 더 강조되었다. 예수님도 첫째가는 계명에 대해 질문을 받으시고 이 셰마를 인용하였다. 셰마의 중요성은 지금도 유효하다. 일단 모든 유다인은 셰마를 암기해야 하고 11,13-21과 함께 매일 두 번씩 바쳐야 한다.

교부들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세 가지 방법,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라는 표현을 깊이 성찰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구약시대에 이미 삼위일체 신비를 하느님 사랑에 내재된 것으로 보앗다. 암브로시우스는 셋 가운데 마음이 처음 언급된 것에 대해 우리가 주님께 우선 드릴 것이 마음이라는 뜻이며, ‘마음을 다하라는 말만으로도 이미 나의 전부로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해석했다.

모세는 이러한 명령을 실천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려준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은 늘 그분 명령을 기억하고하느님이 약속의 땅을 거저 주셨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오직 하느님만을 경외하고 섬기며 그분의 이름으로만 맹세해야 하고다른 신들을 따라가서는 안 되며 하느님을 시험해서는 안 된다.

20뒷날, 너희 아들이 너희에게, ‘주 우리 하느님께서 부모님께 명령하신 법령과 규정과 법규들이 왜 있습니까?’ 하고 물으면, 21너희는 너희 아들에게 이렇게 말해 주어야 한다. ‘우리는 이집트에서 파라오의 종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강한 손으로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다”(20-21). “주 우리 하느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그분 앞에서 이 모든 계명을 명심하여 실천하면, 우리가 의로워질 것이다.’”(25).

20-25절은 이른바 교육 신경'으로서 역사 신경’(26,5-10)과 함께 신명기의 양대 신경을 이룬다. 이스라엘은 하느님 백성으로서 하느님의 이름을 잊지 않아야 하고(12), 다른 신을 따라서는 안 된다(14). 그리고 세대 간의 단절을 넘어서 정체성을 전해야 한다. 다음 세대에 반드시 물려주어야 할 교육 내용은이스라엘 민족의 기원(21)하느님의 기적으로 이집트에서 해방됨(21-22)약속한 땅을 주심(23)율법을 주심(24)그리고 순명하면 의롭게 될 것(25)이다. 21-24절은 지나간 역사의 요약이고25절은 미래의 약속이요 복음이다. 이렇게 구세사의 핵심 내용을 다음 세대의 마음에 심는 일은 하느님 백성의 의무다(21: “말해주어야 한다') 지금도 이 신경은 유다교 교육에서 중요하게 사용된다.

이집트 탈출의 기억이야말로 교육 신경의 핵심 내용이다. 교육 신경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되신 이유가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기 때문이라고 전한다(21). 그리고 이집트 탈출의 기억을 두 가지로 요약하는데첫째 파라오에게 크고 무서운 표정들과 기적들"(22)을 내리셨고 둘째는 땅을 주신 것’(23)이다. 그 결과 이스라엘과 하느님은 멜 수 없는 관계를 맺었다. 이집트에서 해방하시고 땅을 주신 주님께 대한 응답으로 하느님 백성은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주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의로워질 것이다의로움은 우리 것이 될 것이다로 직역할 수 있다. 이미 믿음의 선조 아브라함부터 믿음을 통해 의로움을 얻었다(창세 15,6; 갈라3,6)그러므로 미래에도 역시 하느님을 믿으면 의롭게 될 것이다. 이렇게 이미 신명기는 먼 미래에 도래할 복음의 싹을 보여준다. 그 미래는 지상의 행복한 삶을 포함하는 개념이며 율법 안에서 이루어지는 의로움이다. 여기에 인간의 통치가 끼어들 틈은 없다. 오직 하느님께 맡겨져 있다(9,4). ‘명심하여 실천하라는 표현은 5장과 6장을 열고 닫는 실천적 권유다(5,1.32; 6,3).

 

신명 7,1-26 이스라엘과 이민족의 관계

5장과 6장은 주로 백성이 살 땅에서 앞으로 지킬 규정들과 명령에 대해 설명하였다. 이제 7장은 과거를 되돌아보며 앞으로는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특히 다른 민족과 그들의 신들에 대한 태도를 규정한다. 7장은 독립된 설교로 보아도 좋을 정도로 문학적 구성이나 완성이 뛰어나다. 이 설교의 핵심에는 하느님과 그분 백성을 정의하는 일과 하느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라는 권고가 자리 잡고 있는데, ‘새로운 하느님 백성인 교회에도 적용할 수 있다. 신명기계의 성찰은 하느님 백성의 본질과 미래를 다룬다. 하느님 백성은 다른 신들을 멀리하고 오직 하느님만을 모시기 때문에 다른 민족과 완전히 구별된다. 그러므로 하느님 백성은 하느님의 가르침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

1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가 차지하러 들어가려는 땅으로 너희를 데려가시고, 많은 민족, 곧 너희보다 수가 많고 강한 일곱 민족인 히타이트족, 기르가스족, 아모리족, 가나안족, 프리즈족, 히위족, 여부스족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실 때, 2그리고 주 너희 하느님께서 그들을 너희에게 넘겨주셔서 너희가 그들을 쳐부수게 될 때, 너희는 그들을 반드시 전멸시켜야 한다. 너희는 그들과 계약을 맺어서도, 그들을 불쌍히 여겨서도 안 된다”(1-2). 하느님께서는 백성을 데려가셨고’, 일곱 민족을 몰아 내시고 넘겨 주셨다그러므로 백성은 그들을 쳐부술 수 있었다. 가나안의 성읍들을 다스리던 대표적인 민족의 목록인 일곱 민족은 구약성경에서 여기에서만 언급된다.

히타이트족은 기원전 18세기 아나톨리아 반도를 중심으로 대제국을 건설하여 이집트와 맞서던 민족이다. 일찍이 아브라함부터 히타이트인과 교류하였다(창세23). 또한 다윗의 장수 우리야가 히타이트 사람이다(2사무 11,3). 여부스인들은 예루살렘에 살던 민족으로 다윗은 그곳을 차지하여 다윗 성이라 이름 지었다(2사무 5,6-9). 가르가스족, 프리즈족, 히위족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아모리족과 가나안족은 1,7에서 언급하였다.

너희는 또한 그들과 혼인을 해서는 안된다. 너희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도 말고, 너희 아들에게 주려고 그들의 딸을 맞아들여서도 안 된다”(3). 혼인금지는 이스라엘과 다른 민족이 신학적으로 완전히 구분되어야 함을 뜻한다. 하느님 백성은 선별된 민족이다. 하느님을 따라 노예살이에서 해방된 유일한 백성으로서, 하느님의 참된 계명과 규정과 법규를 지키는 민족이다. 반면 다른 신을 따르는 자들은 세속적이고 차별과 착취의 제도를 지녔다. 그러므로 혼인을 통해서 다른 민족의 풍습이 들어오면 하느님 백성은 다른 신들의 법에 물들게 될 것이다. 이는 첫째 계명을 어기는 죄다. 실제로 솔로몬 같은 훌륭한 임금도 아내들을 통해 이스라엘에 죄를 퍼뜨리는 결과를 맞기 못했다(느헤 13,26). 한편 이런 엄격한 혼인 금지 조항은 에즈 9-10에 영향을 주었다.

이는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며,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선택하시어 땅 위에 있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너희를 당신 소유의 백성으로 삼으셨기 때문이다”(6). ‘거룩한 백성’(암 카도쉬)이란 신명기 특유의 표현으로서, 세속적인 것과 완전히 구별된다는 뜻이다. 구약성경에서 거룩하다는 뜻은 하느님을 묘사하는데 쓰이며, 인간과 구별되는 그분의 높으심과 위대하심을 표현한다. 하지만 신명기는 이 말을 백성에 대해 사용한다.

예수님도 백성을 거룩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요한 15,15-17). 이스라엘이 거룩한 백성인 이유는, 도덕적으로 우월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기 때문이다(레위 20,26). 다시 말해 거룩한 백성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아 다른 민족과 구별되는 집단을 뜻한다. 이렇게 근본적으로 대조되는 인간의 집단을 통해서 하느님은 당신의 거룩하심을 드러낸다.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내게 하소서라는 말씀도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은 참된 하느님 백성을 새롭게 모아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만천하게 드러내게 하도록 청하며기도하신 것이다. 초대교회 신앙인들은 이에 따라 스스로를 선택받은 새 하느님 백성으로 인식했다(로마 1,6-7).

* 바알 신과 아세라 신: 구약에서 제일 먼저 등장하는 우상이 바로 그 유명한 바알 신이다. 성경을 통틀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우상이 바알인데 바알’(Baal)은 주()라는 뜻이며 농사를 짓던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던 신이다. 가나안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들이 존재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으뜸이 되는 신이 ’(El)입니다. 바알은 이 엘 신의 아들이다. 그런데 아버지인 엘보다 아들인 바알이 훨씬 인기가 좋았다. 왜냐하면 바알은 풍요와 다산을 주관하는 폭풍우의 신(남자 신)이었기 때문에 농사를 짓는 가나안에서 최고 인기를 끌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닷가에 가면 용왕 섬기는 사람들이 많은 법이다. 이것은 용왕이 풍랑을 안 일게 하고 물고기를 많이 잡게 해줘야 먹고 살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계에 직접 연관된 신이 더 인기가 좋은 법인데 농사를 짓는 가나안 사람들은 농사와 풍요를 주관하는 바알이 중요한 신이다.

이렇게 인기가 최고인 바알 신은 아버지인 최고신 엘과 어머니인 바다의 신 아세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야훼 하느님만 섬기는 유일신 신앙을 가장 심각하게 위협하던 우상숭배가 바알 신앙이었다. 본디 유목민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농사를 짓게 되는데 그들에게 있어 농사와 풍요를 주관하는 바알이 중요하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바알숭배는 남성신인 바알과 그 아내인 여신 아낫(=아스다롯, 예레 44,19)의 성적인 결합을 통해 비가 오고 풍요를 얻게 된다는 내용 때문에 매우 성적으로 타락한 종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제사 자체가 성행위로 이루어져 있는 음란한 종교이다. 그러니 바알종교는 먹고 사는 문제도 해결해 줄 뿐 아니라 성적 타락까지 겸한 참 매력적(?)인 종교였던 것이다.

바알과 함께 따라오는 우상이 아세라 신이다. 위에서 소개한 것처럼 아세라(Asherah)는 바알의 어머니이다. 여신이다. 아세라는 가나안의 3대 여신 중의 하나인데 바알이 남성신 중에 최고의 인기 신이었다면 아세라는 여성신 중에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풍요의 신이고 특히 페니키아 사람들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신으로 숭배하였다.

아버지는 제일 높은 신인데 아버지만 쏙 빼놓고 아들 신과 엄마 신이 제일 인기가 좋았다는 말이다. 흔히 아세라 여신상은 나뜻가지를 잘라내 기둥으로 만들어 목상을 바알의 제단 옆에 함께 세웠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바알 신과 아세라 신이 늘 함께 등장하는 것이다. 엘리야 예언자가 갈멜 산에서 바알을 섬기는 예언자 450명과 아세라를 섬기는 예언자 400, 도합 850명의 우상 예언자와 850:1의 싸움을 한 판 벌리는 장면이 나온다. 바알과 아세라 우상이 항상 함께 붙어 다녔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세라 숭배 역시 바알 숭배처럼 매우 음란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에서는 철저하게 금지되었다. 그런데 아합 왕 때에 왕비인 이사벨이 앞장서서 바알 숭배와 아세라 숭배를 지원해서 온 나라가 바알 우상과 아세라 우상을 섬기게 되었다(1열왕 16,33). 결국 바알 숭배, 아세라 숭배 때문에 아합 왕과 이사벨 왕비뿐 아니라 이스라엘 온 나라가 끔찍한 재앙을 맞게 된다. 나라가 약해서가 아니라,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상 숭배 때문에 나라가 망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참하느님이시며,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계약과 자애를 지키시는 진실하신 하느님이심을 알아야 한다”(9). 여기서 주 너희 하느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시며 진실하신 하느님이시고라고 직역할 수 있다. 하느님의 호칭 두 개가(하느님과 진실하신 하느님) 연속해서 등장한다. 첫째는 우리의 하느님이야말로 참되고 유일한 하느님이라는 뜻이다. 이름은 존재의 모든 것을 드러낸다. ‘하느님이야말로 주님의 가장 단순하고 정확한 호칭이며, 앞서 다른 신은 없다고 한 말씀과 같다. 일찍이 엘리야 예언자는 카르멘 산에서 바알 예언자들과 겨루어 대승을 거두고, 감격에 겨워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를 두 번이나 외쳤다(1열왕 18,39). 또한 충실한 임금금인 히즈키야는 아시리아의 포위 공격을 당하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주님만이 하느님이심을 고백하였다(2열왕 19,19). 둘째 진실하신 하느님질투하시는 하느님’(5,9)과 내용상 거의 같은 말이다.

역겨운 것을 너희 집에 들여놓아서는 안 된다. 그러면 너희도 그것처럼 전멸할 것이다. 그것은 전멸하게 되어 있는 물건이므로, 너희는 그것을 철저히 혐오하고 역겨워해야 한다”(26). ‘역거운 것이란 원어 '토에바''몹시 싫어하다', '지독하게 미워하다'는 말에서 파생된 단어로,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혐오스러운 것' 또는 '구역질 나는 것'을 가리킨다. 역겨움은 하느님과 이스라엘과느 도저히 함께할 수 없는 것으로서 하느님 백성 가운데에서 근절해야 할 것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신명기는 종교적으로 가장 엄격히 다스려야 할 대상을 역겨운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가나안의 각종 우상들을 가리키는데, 모세는 여기서 이러한 우상, 곧 가증한 것에 대해 백성들이 취할 태도를 다음 세가지로 명령했다. (1) 절대 탐하여 추하지 말라. (2) 결코 집안에 들여놓지 말라. (3) 극히 꺼리며 심히 미워하라. 따라서 백성들은 가나안의 모든 우상을 철저히 부수고 파괴하여 완전 소각시켜 없애버려야 했다(탈출 32,20; 2열왕 23,4). 한편 이는 오늘날 신자들이 온갖 유형, 무형의 우상에 대하여 가져야 할 마땅한 감정 및 태도가 어떠한 것인지를 생생히 일깨워 준다. 어떤 보상을 바래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며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심정에서 섬기는 것을 기뻐하신다. 따라서 지극히 계산적인 자세에서 섬기는 것은 결코 원치 않으신다(1사무 15,17 - 23). 왜냐하면 하느님은 무엇이 부족하여 사람의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도리어 인간에게 다함 없는 축복과 은혜 베푸시기 위하여 경배를 명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신명 8,1-20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주님의 은혜

너희는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모든 계명을 명심하여 실천하여라. 그러면 너희가 살 수 있고 번성할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너희 조상들에게 맹세하며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 그 땅을 차지할 것이다”(1). ‘너희에게 명령하는 모든 계명이란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주신 모든 율법, 곧 계명과 법규과 규정(11)을 가리킨다. 이에는 십계명 뿐 아니라 모든 도덕법과 의식법(儀式法), 시민법, 제사 제도 등이 다 포함된다. ‘명심하여 실천하여라4,1.40; 5,1.33; 6,1-3, 등에 이어 거듭 반복되고 있는 권고이다. 이는 모세가 이집트 탈출 제 40, 모압 평지에서 행한 3편의 설교(1,1-4,43; 4,44-26,19; 27,1-34,12)를 통해 백성들에게 주지시키려고 한 본서 전체의 주제이다. 이는 이스라엘의 생존과 번영 그리고 약속(탈출 19,5-6) 성취에 있어서 필요불가결한 조건이기도 하다.

그러면 너희가 살 수 있고 번성할 것이다이 같은 사실은 이스라엘의 구세대가 하느님께 불순종한 결과 광야 40년 동안의 방황 끝에 모두 죽고만(민수 14,26-35) 것에 의해서도 충분히 입증되었다. 따라서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행하는 그 사실은 단순히 축복과 화의 문제가 아니라 삶과 죽음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한편,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유념해야 할 사실은 어떠한 보상을 바라고서 인간이 하느님께 순종하는 행위는 기복신앙(祈福信仰)으로 흐르기 쉽다는 점이다. 하느님은 인간이 어떤 보상을 바래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며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심정에서 섬기는 것을 기뻐하신다. 따라서 지극히 계산적인 자세에서 섬기는 것은 결코 원치 않으신다(1사무 15,17-23). 왜냐하면 하느님은 무엇이 부족하여 사람의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도리어 인간에게 경배를 명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인도하신 모든 길을 기억하여라. 그것은 너희를 낮추시고, 너희가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너희 마음속을 알아보시려고 너희를 시험하신 것이다‘(2).

광에서 보낸 기간은 40년이었다. 40은 구약성경의 대표적 완전한 수이다. 고대 근동인은 땅이 동서남북 4방향의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4는 완전함을 뜻하고, 거기에 다른 완전수 10을 곱하여 얻은 40전혀 모자랄 것이 없는 완전한 충만함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구약성경은 이 상징수를 즐겨 사용한다. 태초의 홍수는 40일 동안 일어났고(창세 7,4), 야곱의 시체를 방부처리할 때도 40일이 걸렸다(창세 50,3). 이스라엘의 산모는 사내아를 낳았을 경우 40일을, 계집아이를 낳았을 경우 그 두 배인 80일을 집에 머물러야 했다(레위 12,1-5). 골리앗은 이스라엘 군과 40일을 대치했고, 엘리야가 호렙 산에 갈 때도 40일이 걸렸다. 예언자 요나는 40일 뒤에 니네베가 무너진다고 예언했다. 신명기도 완전수 40일을 즐겨 사용한다. 신명기를 기록한 날짜 자체가 이집트 탈출 40년째이며, 모세가 계약판을 받기 전에 산에 머무른 기간도 40일이다. 사람에게 매질하는 숫자를 40으로 제한한 것도 역시 40이면 충분하기 때문에 이를 초과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특히 ‘40은 인간에 주어진 완전한 시간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40년을 보냈고, 다윗과 솔로몬 등은 40년을 다스렸다. 이집트 탈출 이후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짓기까지 480년이 걸렸다는 기록은 완전수 40에 이스라엘 12지파의 숫자를 곱한 결과이다. 완전수 40의 전승은 신약성경으로 이어진다.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기전 광야에서 단식한 기간이 40일이며, 부활하신 다음 승천하실 때까지도 40일이 걸렸다.

광야는 시험의 장소이다. 하느님 백성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하느님이 주시는 시험을 거쳐야 한다. 하느님은 이 시험을 통해 우리가 내면 깊은 곳에서 하느님을 깨닫기를 원하신다. 이는 부모가 자식을 단련시키는 것에 빗댈 수 있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시험을 당하셨다.

그분께서는 너희를 낮추시고 굶주리게 하신 다음, 너희도 모르고 너희 조상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게 해 주셨다. 그것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3). 신명기에서 만나는 오직 8장에서만 나온다. 만나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내린 식량이었다. 그러나 신명기는 만나가 깨달음의 도구이기도 했다고 해석한다. 하느님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으며 오직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깨닫길 원하였다. 이는 광야에서 겸손을 가르친 것과 같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실 때, 바로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첫 번째 유혹을 물리쳤다(마태4,4). “하느님을 향한 믿음에 충실하면, 타인의 부유함을 시기하는 마음에서 자유로워지고, 물질적 어려움에 대한 느낌에서 해방되어 하느님 나라에서 상속받을 진정한 부()를 소유하게 된다”(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을 경외해야 한다”(6).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라1절에서 나온 설교 주제의 반복으로, 40년간의 광야 생활동안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풀어 주신 여러 가지 은혜를 회상(2-5)한 목적이 백성들로 하여금 그분의 은혜를 기억하고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게 하려는 데 있음을 보여 준다.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을 경외해야 한다는 대표적인 신명기적 권고로서 자주 반복된다. 여기에서 은 앞에서 언급한 광야 시대에 백성이 지나간 길을 의미한다. 이는 자녀들이 아비의 음성에 복종하는 것이 당연하듯 신자들이 하느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은 주님 경외의 기본이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좋은 땅으로 데리고 가신다. 그곳은 물이 흐르는 시내와 샘이 있고, 골짜기와 산에서는 지하수가 솟아나오는 땅이다”(7). ‘좋은 땅이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말로도 종종 묘사되고 있는데(탈출 3,8;민수 13,27), 이는 대부분이 사막 지대인 인근 근동 지역에 비하여 가나안 땅은 풍부한 물(7), 풍부한 농작물(8), 풍부한 광물질(9)이 있는 하느님의 아름다운 언약의 땅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골짜기와 산에서 지하수가 나오는 땅이란 이스라엘이 40년 동안 지내온 메마른 광야와는 달리 가나안 땅에는 식수(食水)와 용수(用水)가 풍부함을 뜻한다. 옛부터 물은 다른 어떤 자연 조건보다 더 기본적이고도 필수적인 중요 자원으로서, 문명의 발상 및 발전과도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으므로, 가나안 땅에 물이 풍부하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에게 실로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17너희는 마음속으로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이 재산을 마련하였다.’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18그러나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을 기억해야 한다. 바로 그분은 오늘 이처럼, 너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계약을 이루시려고, 너희가 재산을 모으도록 너희에게 힘을 주시는 분이시다”(17-18). 하느님 백성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을 때 저지르는 잘못된 생각을 종합적으로 보여준다. 부유한 백성은 하느님을 잊고(11.14), 마음이 교만해지지 쉽다. 자기 힘만으로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바로 멸망으로 이끈다. “이렇게 자기 확신이 지나친 인간은 오류를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성공에 어떤 영광도 없고, 죽은 후에 아무것도 자신에게 남지 못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며, 무한히 추구하는 탐욕을 부끄러워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암브로시오).

18절은 8장의 주제문이다. 풍요로운 백성이 교만에 빠져 멸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느님을 기억해야 한다. 그 반대로 하느님을 잊으면 멸망한다(19).

약속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허락하시고 또한 그 땅의 풍요로움을 그들이 누릴수 있오록 하신 것은 약속의 하느님을 더욱 섬기며 그에게만 영광 돌리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도 그들이 하느님과 맺은 약속을 깨뜨리고 그 땅의 우상 숭배에 빠져 들게 된다면, 결국에는 그들이 쫓아냈던 가나안 족속들과 똑같이, 그들 역시 비참하게 쫓겨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경고하고 있다. 이것은 하느님이 인간을 먼저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다만 죄악이 인간을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너희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처럼 너희도 멸망할 것이다”(20).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 하느님 백성이 아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처럼 멸망을 맞을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을 믿는 그분 백성은 하느님이 주신 복을 받는다. 하느님을 믿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예수님도 자주 들어라는 표현 속에 깊이 생각하여 잘 깨닫고 믿어라는 의미를 담아 말씀하였다(마태 11,15).

 

신명 9,1-6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보다 의로울 것이 없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너희는 너희보다 더 크고 힘센 민족들에게 가서 그들을 쫓아내고, 하늘까지 닿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큰 성읍들을 차지하러, 오늘 요르단을 건너가려 하고 있다”(1). ‘이스라엘아 들으라!’에서 '듣다'에 해당하는 원어 '셰마''주의 깊게 듣다', '경청하다'는 뜻이다. 이는 6,4에서와 마찬가지로 청중들로 하여금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한 말이다.

오늘이란 원어 '하욤''오늘 당장'이 아닌 '바로 지금' 또는 '이때에'란 뜻으로 곧 임박한 시점을 가리킨다. 즉 이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이 눈앞에 다가왔음을 뜻하는데, 실제로 그들이 요르단을 건너 것은 이때로부터 불과 두어달 후의 일이었다(여호 3,14-17). 그리고 너보다 강대한 나라들은 가나안의 일곱 부족을 뜻한다.

하늘까지 닿는 성벽이란 38년전 '카데스 바르네아'에서 있었던 가나안 정탐꾼들의 불신앙적 보고를 의도적으로 인용한 것이다. 즉 아직도 일부 백성들의 마음속에 잠재해 있는 가나안 원주민들에 대한 두려움을 감지한 모세는 일부러 이같은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백성들의 불신앙을 깨우치고 상대적으로 하느님의 능력과 은총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아낙인'(Anak)이라는 말은 '목이 긴 사람'이란 뜻이다. 이들은 주로 가나안 남쪽 산지에 거주하였는데 기골이 장대하기로 유명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그들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실 때, 너희는 마음속으로 우리가 의롭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를 데려오시어 이 땅을 차지하게 하셨다.’ 하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 저 민족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시려는 것은 그들이 악하기 때문이다”(4). 고대 근동의 전쟁은 한마다로 의로움의 전쟁이었다. 곧 의로운 자는 승리하고 불의한 자는 패배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승자는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했다. 이에 이스라엘도 승리한 뒤 자신들이 의롭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모세는 4-6절에서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고 거듭 당부한다. 모세의 주장은 확고하다. 정의롭고 올바르신 분은 하느님 한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만을 버리고 하느님 앞에서 겸손해야 인간이 회개하고 더 의롭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인간이 스스로의 의로움을 찾지 말고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으로움을 찾아라”(마태 6,33)하고 가르치셨다.

인간은 모든 일을 인간의 생각과 의지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오만이다. 세속적 성공을 이루 때에는 물론이고, 영적 고양을 이루고 악한 마음과 싸워 승리할 때에도, 나의 옳음과 나의 능력과 나의 지혜로 말미암아 이루었다는 판단은 금물이다. 나 스스로 이런 것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은 자신을 들뜨게 만든다. “오직 주님이 도와주시고 보호해 주시지 않으면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의심의 여지가 없다”(요한 카시아누스).

 

신명 9,7-17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느님께 불충하다

신명 9,7-10,11은 탈출 32-24장의 내용을 되풀이하면서, 이스라엘이 처음부터 자기들의 하느님께 끊임없이 거역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하느님 은총의 역사에 백성의 불충의 역사가 맞서는 것이다. 모세는 이 둘 사이에서 중개자인 동시에 화해자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주님은 언제나 용서하시는 분으로 드러난다. 율법을 새로 주는 것이 그 표지이다.

너희는 광야에서 주 너희 하느님의 분노를 일으킨 일을 기억하여 잊지 마라. 너희가 이집트 땅에서 나와 이곳에 이를 때까지, 너희는 줄곧 주님을 거역해 왔다”(7). 모세는 40일 밤낮을 단식하며 계약의 돌판을 호렙 산에서 받았다. 그는 하느님의 명령으로 산에서 서둘러 내려왔다. 하느님이 죄를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첫째는 목이 뻣뻣한 백성이고, 둘째는 송아지 우상이었다. 결국 중개자 모세는 하느님의 돌판을 깨뜨린다. 계약이 깨진 것이다(17). 하느님의 선물인 계약을 받을 자격을 백성 스스로 차버린 것이다. 이렇게 이 단락은 광야에서 저지른 가장 불충한 죄, 곧 송아지 우상을 만들 일을 묘사한다. 이 죄는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죄’(4-6)보다 중한 것이며, 가장 큰 죄로 거론된다(21). 이는 하느님의 분노를 일으킨 일’(7)이었고, 이런 죄를 저지른 이스라엘은 하느님 백성이 아니라 그 반대로 겸손하고 순종하지 않는 백성 목이 뻣뻣한 백성’(13)이었다.

내가 보니, 너희는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주 너희 하느님께 죄를 짓고 있었다. 너희는 이렇게 주님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길에서 빨리도 벗어났다”(16). 여기서 송아지 우상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에겔은 오직 9장에서만 두 번 쓰인다(21). 소는 그 자체로 긍정적 의미가 있다. 그러나 우상으로서 소는 권력과 돈과 성적 능력을 의미했고, 바알의 상징이었다. 탈출 32장과 신명기에서 이렇게 송아지를 섬기는 행위가 완전히 끊기지 않았다. 특히 이스라엘을 남북으로 분열시킨 장본인인 예로보암은(931-910년 재위) 금송아지 우상을 놓고 감히 이집트 탈출의 야훼 하느님과 동일시했다(1열왕 12,28-29). 이 송아지 섬김은 하느님께 등 돌리는 일이고 공동체의 분열을 의미하는 일이었다.

한편 신명기는 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백성이 축제를 벌였다는 이야기(탈출32,1-5)를 자세히 전하지 않는다. 신명기는 금송아지가 어떤 다른 신의 전례나 축제에 사용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언급하지 않는 신중한 태도를 취한다. 그럼으로써 이미 독자가 알고 있는 큰 범죄를 다시 언급하지 않고, 진정한 축제의 의미에 대해 따로 길게 설명한다. 침묵을 통해 이 문제를 깊이 성찰함을 보여준다.

 

신명 9,18-29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주님께 간청하다

그런 다음에 나는 전과 같이, 주님 앞에서 밤낮으로 사십 일을 엎드려 있었다. 너희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질러 그분의 분노를 돋우며 지은 그 온갖 죄 때문에, 나는 빵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았다”(18). 모세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하느님께 간절히 용서를 구한다. 우상을 만드는 일은 하느님의 분노를 극도로 드러내게 한다.

그리고 나는 너희가 만든 죄악, 곧 송아지를 가져다가 불에 태우고 그것을 부순 다음, 먼지 같은 가루가 될 때까지 잘게 갈아, 산에서 내려오는 시내에 내버렸다”(21). 송아지 우상에 하는 네 가지 행동, 가져다가 태우고 부수고 가는 것은 고대 근동에서 상대편의 신상을 모독하고 그 신상의 효력을 없애버리는 최고 수준의 상징적 행동이었다. 그런데 이 네 가지 행동에 버리다는 행위를 더한다(탈출 32,19-20). 이스라엘과 유다의 임금도 이런 행위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유다 이금 아사는 아세라 신상을 키드론 골짜기에서 태워버렸다. 여호야다 사제는 바알의 신상을 부수었다. 히즈키야 임금도 기념 기둥들을 부수었다. 요시야 임금은 위에 열거한 행동들을 모두 실행하였는데, 그는 다양한 신상들을 끌어내어 태우고 부수고 갈아서 버렸다(2열왕 23,4-16). 이렇게 모세가 한 철저한 무효화 행위는 오직 요시야만이 그대로 실행하였다.

주님께서 너희를 멸망시키겠다고 하셨기 때문에, 나는 밤낮으로 사십 일을 주님 앞에 엎드려 있었다”(25). 모세는 이스라엘을 위해 또 한 번 사십 일을 지새며 하느님의 은총을 구한다. 구원과 용서는 오직 하느님의 일임을 그는 잘 알고 있다. 모세는 청원의 근거로 기도의 시작과 끝을 잡고, 그 사이에 네 가지 청원을 올린다.

A 근거: 저희는 당신이 해방시키신 당신의 백서이요 당신의 소유입니다(26)

B1 청원 1: 저희를 파멸시키지 말아주십시오(26)

B2 청원 2: 저희 조상을 기억해 주십시오(27)

B3 청원 3: 저희의 완고함과 악과 죄를 보지 말아주십시오(27)

B4 청원 4: 이웃 민족이 하느님을 비방하지 못하게 해주십시오(28)

A’ 근거: 저희는 당신이 해방시키신 당신의 백성이요 당신의 소유입니다(29)

그들은 당신께서 당신의 큰 힘과 당신의 뻗은 팔로 이끌어 내오신 당신 백성, 당신의 소유입니다”(29).

 

신명 10,1-11 새 십계판과 계약 궤

“1그때에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먼젓번과 같은 돌 판 두 개를 깎아서, 산으로 나에게 올라오너라. 또 나무 궤를 하나 만들어라. 2그러면 네가 부수어 버린 먼젓번 판 위에 쓰여 있던 말을 내가 그 판 위에 써 줄 것이니, 너는 그것을 궤 안에 넣어라’”(1-2). 이 단락은 얼핏 보면 앞의 이야기와 중복되는 것 같지만사실은 완전히 새로운 신학적 주제들을 제시한다. 모세는 하느님의 명령(1-2)을 그대로 행하는(3-5) 충성심을 보여준다. 그는 십계명의 돌판을 먼젓번과 같(3) 만들었다. 하느님은 모세가 준비한 돌판 위에 직접 십계명을 써주셨다(4). 모세는 이제 계약 궤를 만들고 그 안에 하느님의 십계명을 직접 넣었다(5). 그러다 아론이 세상을 떠나고그의 아들이 대를 이었다(6). 이로써 모세 홀로 이스라엘을 중재함이 확실해지고모세의 곁에서 아론의 자손과 레위인들이 보좌한다(8). 레위 지파의 유래와 임무가 간략히 제시된 다음(8-9) 이제 유일한 중개자로 이스라엘을 떠맡은 모세가 처음 한 일은 백성을 위해 하느님께 간청한 것이다(10). 주님께서는 모세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시고 새 출발을 명하신다(11).

모세는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두 번 받았지만두 개의 십계명을 받은 것은 아니다. 두 번째 받은 것은 첫 번째 받은 것과 완전히 똑같다. 두 번째 계명을 주실 때, 하느님은 이미 첫 번째 계명과 같은 것을 주시기를 결심하였다.

신명기에서 처음으로 궤를 언급하는 곳이다. 여기서는 나무 궤”(3)"라고 했지만다른 곳에서는 계약 궤"(8;31,9.25.26)라고 했다. 계약 궤를 만든 의미는 각별하다. 하느님의 계명은 귀로 듣고 끝내서는 안 되고하느님 백성이 언제나 모시고 다녀야 하는 것이다. 탈출기도 궤를 언급하지만(탈출 25,10-22)십계명을 새로 받는 장면에서 계약 궤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탈출 34). 하지만 신명기는 십계명을 주신 그 순간에 계약 궤를 만들라고 명하셨음을 분명히 한다. 신명기 신학에서 계약 궤는 그만큼 중요하다. 이 궤는 전쟁과 관련 있는데(신명 23,15; 1사무 4,6; 2사무 11,11) 이스라엘 백성은 궤를 이민족에게 빼앗겼다 도로 찾은 적이 있다(1사무 4-6). 광야에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이 궤와 함께 행진했다(민수 1033-36). 다윗은 거룩한 계약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겼고(2사무 6)솔로몬은 이 궤를 성전 가장 깊숙한 안쪽 성소에 모셨다(1열왕 6,19-28; 8,1-21).

십계명을 처음 받을 때는 주님께서 친히 쓰신 돌판이었지만(9,10) 이번에는 모세가 준비한 돌판에 하느님께서 십계명을 직접 써주실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느님께서 써주신 돌판을 궤에 넣을 사람은 모세다.

십계명을 하느님은 돌판에 직접써주셨다. 하지만 탈출기는 두 번째도 하느님이 말씀하신 대로 모세가 기록하였다고 전한다(탈출 34,27-28). 비록 탈출기와 신명기의 기록은 이렇게 다르지만 주님의 십계명이 계시된 그대로 쓰였다는 점은 같다. 신명기의 기록이 탈출기와 다른 이유는신명기가 십계명을 다른 계명과 다른완전한 상위의 법률로 보기 때문이다. 십계명은 하느님이 직접 써주셨지만(4)나머지 계명은 모세가 썼다(31,9). 또한 십계명은 모세가 직접 궤 안에 넣었지만(6)나머지는 계약 궤를 나르는 레위 자손들이 계약 궤 곁에 둔다(31,25-26). 곧 신명기는 십계명이 내용뿐 아니라 계시되고 전승되는 방식도 나머지 율법과는 완전히 다름을 체계적으로 제시한다. 신명기에 따르면 십계명은 구약성경의 율법을 모두 아우르는 하느님 나라의 헌법과도 같은 가르침이다(20,17).

민수기에 비해(민수 20,22-29) 아론의 죽음을 간결하게 묘사한다. 아론의 법통이 그의 아들 엘아자르에게 이어진다는 보고뿐이다. 엘아자르는 모세의 조카인 셈이니 이제 하느님 백성은 모세 홀로 이끄는 것이다. 그 결과 모세를 사제(아론의 후손)와 레위인이(8-9) 보좌하는 체계가 갖춰졌다. 신명기는 아론의 자손들인 사제들에 대해서 말을 아낀다. 하지만 레위인에 대해서는 비교적 풍부하게 설명한다(18,1-8). 이는 사제에 중점을 두어 설명하는 민수기의 태도와 다르다.

그때에 주님께서는 레위 지파를 따로 가려내셔서, 주님의 계약 궤를 나르게 하시고, 주님 앞에 서서 당신을 섬기며 당신의 이름으로 축복을 하게 하셨는데,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온다”(8).

레위 지파의 가장 기본적인 임무를 나열한다.계약 궤를 나른다(31,9.25). 주님 앞에 선다. 주님을 섬긴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뒤의 세 가지 일은 어떤 전례적 상황을 설명하는 듯하다(21,5). 이 밖에도 레위인은 가르치는 일향을 피우는 일 번제물을 바치는 일 등 다양한 일을 했고(33,8-22)신명기는 이들의 권리에 대해서 따로 자세히 설명한다(18,1-8). 례위인에게 이런 임무를 주신 분은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백성은 가난한 사람과 함께 레위인을 보살펴야 했다(14,28-29).

그러고 나서 주님께서는 나에게, ‘일어나 백성 앞에 서서 길을 떠나라. 그래서 그들이,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에 들어가 그 땅을 차지하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11). 십계명을 새롭게 받고 하느님과 백성의 관계는 회복되었다. 이제 하느님은 백성에게 맨 처음 하신 명령, 차지하여라’(1,8)를 다시 가능하게 하라고 명하신다. 이렇게 하느님은 백성에게 또 새 출발의 기회를 주셨다. 하느님이 주신 회복은 완전한 회복으로서그동안 백성의 죄는 완전히 극복되고, 구세사의 수레바퀴는 다시 힘차게 전진한다.

 

신명 10,12-22 사랑과 순종의 법

12이제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모든 길을 따라 걸으며 그분을 사랑하고,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섬기는 것, 13그리고 너희가 잘되도록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님의 계명과 규정들을 지키는 것이다”(12-13).

이제부터 두 번째 설교가 이어진다. 두 번째 설교는 새 계약판을 받은 이후에 하는 설교로서첫 번째 설교의 핵심적 내용을 요약한다. 특히 두 번째 설교는 하느님이 가장 높은 분이심과(14.17.21) 그분의 계명을 지켜야 함을(11,1.8.22) 반복하며 강조한다. 또한 창조신학과 윤리신학 등의 내용을 풍부히 담고 있다.

하지만 첫 번째 설교와 비교할 때 새로운 내용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계약의 돌판을 처음 받을 때나두 번째 받을 때나 하느님을 향한 하느님 백성의 의무와 권리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백성은 언제나 모든 것을 다 바쳐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 이 단락은 아래와 같이 각 규정들을 제시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되어있다.

A1 규정: 하느님을 섬기고 계명을 지켜라(12-13).
    B1 이유: 하느님의 사랑과 선택을 보아라(14-15)
   A2 규정: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16).

B2 이유: 하느님은 위대하시며 정의로우시다(17-18).

A3 규정: 이방인을 사랑하라(19)
    B3 이유: 너희도 이방인이었다(19)
   A4 규정: 주님께만 매달러라(20)

B4 이유: 하느님이 너희에게 해주신 일을 보아라(21-22).

이렇게 다양한 규정과 권유들이 나오지만이 단락에서 명령법이 쓰인 적은 한 번도 없다. 모두 권유형이다. 하느님은 우리를 위해서 많은 일을 해주신위대하고 정의로운 분이시지만 언제나 우리에게 부드럽게 권유하셔서 우리가 스스로 행동하길 원하신다.

12-13절에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요약되어 있다. 순서대로 나열하면경외주님의 길을 따라 걷기사랑섬김계명과 규정을 지킴이다. 여기서 주님의 계명을 지커는 삶 자체가 주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 경외와 사랑의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면 자연스레 그분의 계명도 지키게 된다. 형식적으로 계명을 지키는 것은 소용없다. 예수님도 온 율법의 정신이 하느님 사랑과 인간 사랑에 있다고 가르치셨다(마태 22,37-40).

이제 이스라엘아는 새롭게 설교를 시작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주님 경외’(12)410; 5,25.29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12)4,29; 6,5계명과 규정을 지커다4,40; 5,33섬기다’(12)는 전례에 참석한 상황을 의미한다. 전례에 참석하는 것도 주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18또한 그분은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되찾아 주시고, 이방인을 사랑하시어 그에게 음식과 옷을 주시는 분이시다. 19너희는 이방인을 사랑해야 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18-19).

하느님께서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는 분이라는 점은 신명기에서 자주 반복된다(14,29; 16,11.14; 23,8; 24,17-22; 26,12-13). 고대 근동은 가부장제 사회였기에 아버지가 없는 고아와 남편이 없는 과부는 어떤 집안에도 속하기 힘든 자들로서당장의 생계가 막막한 계층이다.

곧 사회적으로 가장 약자를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정의의 하느님은 이런 소외 계층의 권리를 되찾아 주시는 분이다. 이 말씀은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위한 교회의 우선적인 선택’(사회교리의 핵심 주제)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표현은 고대 근동의 정의에 대한 개념을 잘 보여준다. 현대에서 정의는 대개 기회나 재화 등을 균등하게 제공하는 의미로 쓰인다. 그러나 고대 사회에서 정의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과 심리적 · 정서적 연대의식을 갖는 것을 의미했다(측은자심). 하느님이 정의를 실현하시는 방식은 대표적 소외계층인 고아와 과부를 마음으로부터 불쌍히 여기심으로써 시작된다.

하느님은 소외받는 이방인 집단인 이스라엘을 선택하시어 큰 민족을 만들어 주셨다(22).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이방인을 소외시키면 안 된다. 오히려 이방인을 사랑해야 한다. 그래야만 하느님 백성은 진정한 형제애가 이루어지는 곳이 될 것이다. 탈출기는 같은 말씀을 이방인을 학대해서는 안 된다"(탈출 22,20; 23,9)고 부정어법으로 표현했지만레위기와 신명기는 이방인을 사랑해야 한다’(레위 19,34; 신명 23,8)고 긍정어법으로 표현했다. 신명기의 이런 어법은 사랑의 황금률’(마태 7,12)을 긍정어법으로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투와 닮았다.

너희 조상들이 이집트로 내려갈 때에는 일흔 명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제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해 주셨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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