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담적 작가의 탄생
― 김훈론
1. 김훈의 소설은 왜 읽기가 쉽지 않은가 ?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나는 아주 힘들게 읽었다. 그 소설을 읽는데 한달 쯤 걸린 듯 한데, 내 책읽기의 습관으로 보자면 매우 예외적인 현상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단숨에 읽었다는 사람을 만나면 괜히 주눅이 들었다. 내가 머리가 나쁜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던 것이다. 내가 그 소설을 힘들게 읽은 것은 이야기의 선조적(線條的) 진행에서 자꾸 곁길로 빠져나가 밑도끝도 없이 형이상학적 진술을 풀어내는 밀란 쿤데라의 서사 전략이 지루하고 낯설었던 탓이다.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장르의 경계가 희미한 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을 읽을 때도 다시 그 어려움은 되풀이되었다. 끼냐르의 소설은 줄거리가 아예 없거나 아니면 아주 어렴풋하고 모호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소설이다. 문장과 문장 사이를 연결하는 의미의 맥락은 아주 성글고,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단절과 휴지(休止)의 여백들이 가로놓여 있다. 핵심 언표들은 하나의 의미의 맥락으로 꿰어지지 않은 채 문장들 사이로 잘게 쪼개져 흩어져 있다. 끼냐르는 돈호법과 중단법이라는 기법으로 선조성(線條性)에서 벗어난 각각의 문장들에 여담의 주제들을 분배함으로써 이야기의 흐름을 의도적으로 분절하고 지연시킨다. 그때 문장 속에 흩어진 핵심 언표들은 전체 주제에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대신에 저마다의 소리를 낸다. 하지만 겁먹을 필요는 없다. 시간이 좀더 필요할 뿐이다. 나는 단상의 포식자가 되어 키냐르의 소설들을 천천히 씹어 삼킨다. 위에 언급한 두 소설이 나쁜 소설인 것은 아니다. 두 소설을 읽을 때 나는 여담의 서사적 전략에 대해 무지했던 것이다.
김훈의 소설도 읽기가 쉽지 않다. 이를테면 무수한 격언구들이 플롯의 중심축에서 떨어져 나와 저 혼자 놀고 있는 김훈의 첫소설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을 나는 끝까지 읽지 못했다.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에서 서사물에게 요구되는 규범적 얼개에 균열과 빈틈들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문장들은 최소한도의 의미의 접합력으로 이어져 문장과 문장 사이는 헐거웠다. 조급한 자는 그 헐거움을 견디지 못하고 소설을 삼분의 일쯤 읽다가 밀쳐뒀는데, 그 뒤로 서가에서 사라졌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 소설을 읽지 못했다. 나는 왜 그 소설을 끝까지 읽지 못했을까 ? 오래도록 그 까닭을 알지 못하다가 『현의 노래』를 읽다가 문득 그 까닭을 짐작할 수 있었다. 소설의 앞부분에서 독자들은 느닷없이 한 작중인물의 오줌누는 대목과 만난다. 무정형한 것으로 흩어져버리고 말 사소한 경험의 문체적 복원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대목이 그 깨달음을 일으킨 부분이다. "아라는 치마를 올리고 속곳을 내렸다. 엉덩이를 까고 주저앉아 가랑이를 벌렸다. 허벅지 안쪽에 풀잎이 스치자 팔뚝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아라는 배에 힘을 주어 아래를 열었다. 쏴 소리를 내면서 오줌줄기가 몸을 떠났다. 떡갈나무 마른 잎에 부딪칠 때 오줌줄기는 물방울로 흩어지면서 탁탁 튀는 소리를 냈다. 침전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불을 땔 때, 마른 삭정이가 타들어가는 소리와도 같았다. 덜 마른 밤나무 잎에 부딪힐 때 오줌소리는 젖어서 낮아졌고 돌멩이 위에 낀 이끼에 부딪힐 때 소리는 돌 속으로 스미자, 오줌줄기가 몸을 떠나서 쏴 ― 소리가 크게 울렸다. 몸속에서 살이 울리는 소리가 가랑이 사이의 구멍으로 퍼져나오고 있었다. 오줌을 눌 때마다 그 소리는 낯설고 멀게 들렸고, 소리를 내고 있는 살구멍의 언저리가 떨렸다. 아라는 놀라서 오줌줄기의 방향을 바꾸었다. 마른 잎이 찢어지고 흙이 튀었다. 아라는 가랑이를 벌려서 오줌줄기를 펼쳤고 가랑이를 오므려서 오줌줄기를 모았다. 땅은 부채 모양으로 젖었다."(52 ∼ 53쪽) 아마도 한국문학사에서 오줌누는 대목을 이렇듯 집요할 만큼 상세하게 공들여 묘사한 소설은 없을 것이다. 오줌 누는 소리는 "크게" 울리고, 오줌 줄기는 아주 거세서 그것이 가 닿은 "마른 잎[은] 찢어지고 흙[은] 튀"어 오른다. 생명 억압적인 세상을 향해 논리로 대항할 수 없는 존재가 무언의 몸짓으로 자기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자의 오줌 누기는 죽음-불모성의 운명에 대한 힘찬 도발이자 거역이라는 상징적 함의를 머금고 있다. 김훈의 소설에서 여성은 생명성의 원형이자 죽음-불모성에 거역하는 욕망의 시원이다. 하지만 이 오줌누는 대목의 세세한 묘사는 서사의 필연적 맥락과는 별 상관이 없다. 이 대목은 여담에 해당한다. 여담은 서사의 필연성이나 수사학의 잣대로 보자면 방향을 잃은 과잉의 일탈이다. 이런 일탈은 서사의 구조적 이완이며, 플롯의 단절과 휴지라는 효과를 일으킨다. 이것은 작가의 부주의함으로 빚어진 서술의 오류가 아니라 여담에 의한 완곡 어법이라는 의도적 전략으로 보아야 한다.
아라가 오줌 누는 장면은 이 뒤로도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묘사된다. 아라는 오줌을 눌 때마다 발랄한 현존으로 살아난다. 오줌 누는 대목이 작중 인물의 몸에서 작동하는 힘찬 생명 현상을 보여주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서사의 자연스런 선조적 흐름을 끊으면서까지 반복해서 묘사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 "아라는 속곳을 내리고 바위 밑에 쪼그려 앉았다. 흰 엉덩이에 달빛이 비치었다. 아라는 가랑이를 벌렸다. 오줌줄기가 가랑이 사이에서 터져 나올 때 아라는 으스스 몸을 떨었다. 맑은 오줌줄기에 달빛이 스몄다. 아라는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한 가닥으로 모아지는 오줌줄기가 떡갈나무 마른 잎에 부딪쳐 서걱거렸다. 잎이 뒤집히고 물방울이 튀었다. 몸속 깊은 곳이 떨렸다. 살의 떨림이 오줌줄기를 타고 몸밖으로 뻗쳤다. 오줌줄기는 몸 쪽으로 쏘아져 나오면서 잦아졌다. 아라는 앉은 채 발을 굴러 가랑이 사이의 오줌방울을 털어냈다."(61쪽) 김훈의 소설들에 등장하는 대다수의 여성 인물들은 개별자의 내면을 갖지 못한 채 타자적 현상에 머문다. 아라 역시 개별화되지 못한 본능의 덩어리, 혹은 동물성의 원형질에 가까운 그 무엇이다. 아라는 대상화의 영역에 머무를 뿐 주체가 되지 못한다. 아라는 자신이 왜 순장을 당해야 하는지를 모른다. 아라는 그 운명의 납득할 수 없음에 생명의 본능으로 탈주한다. 그 탈주의 출발점에서 아라의 첫 번째의 행위가 오줌 누기이다. 여전히 아라의 오줌줄기에 "잎[은] 뒤집히고 물방울[은] 튀"어 오른다. 주체가 되지 못한 채 금수와 다를 바 없는 감각의 원형질에 머문 생명이지만 그 움직임은 어떤 생명보다도 힘차다. 바로 그 생명의 힘찬 파동으로 권력과 제도가 끝내 포섭할 수 없는 개별화의 지점으로 나아간다. 생사가 엇갈리는 긴박한 탈주의 여로에서 생리현상에 몰입하는 아라의 모습은 생명의 생명됨에 대한 자존으로 일견 평화스럽고 성스럽기조차 하다. "아라는 뱃전을 붙잡고 고물 쪽으로 갔다. 변소는 선창 옆에 붙어 있었다. 짚으로 가리개를 쳐놓고 뱃바닥을 뚫어서 구멍 아래로 물이 들여다보였다. 배가 흔들릴 때 물은 구멍 위로 튀어올랐다. 아라는 속곳을 내리고 쪼그려 앉아 가랑이를 벌렸다. 아라는 힘을 주어 아래를 열었다. 강물이 튀어올라 허벅지 안쪽을 적셨다. 강물 위로 오줌줄기가 뻗어나갔다. 아라는 으스스 쳤다."(148 ∼ 149쪽) 여담은 담론이 핵심에서 벗어난 횡설수설, 혹은 곁가지 이야기이다. 담론의 중심과 통제에서 벗어난 여담의 운명이란 "자가당착·변덕·경박한 자의성·허술함·혹·주변부·깜짝쇼·길 잃은 방황"이다. 여담은 "묘사, 곁줄거리, 훈사, 삽입 텍스트" 등으로 분화한다. 여담은 서사의 장애물로 소설읽기를 지속적으로 훼방한다. 김훈의 소설에서 여담은 아주 중요한 서사의 전략이었던 것이다.
2. 여담의 서사적 전략
란다 사브리는 『담화의 놀이들』에서 여담, 즉 곁가지 이야기가 텍스트에서 수행하는 탈중심화의 전략에 대해 쓴다. 지금까지 "여담을 공인된 문학적 기법으로 간주하"는 책을 한번도 읽은 적이 없기 때문에 나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여담에 부여된 주변적 지위는 그것을 건너뛰어 읽어도 괜찮은 것으로 여겨왔다. 란다 사브리는 텍스트의 미적 통일성에 균열을 일으키며, 담론의 진로를 바꾸고 탈선을 조장하는 비이성적 객설에 작가 스스로도 미처 인지하지 못한 깊은 서사의 전략이 숨어 있음을 밝혀낸다. 란다 사브리는 여담에 대한 앙리 모리에의 사전적 정의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 "여담 : 작가가 주제에서 멀어져서 어떤 일화나 추억을 서술하고 풍경이나 예술 작품 등을 묘사하여 거기에 의외의 전개부를 제공하는 담화의 전략. 여담은 다양한 의도에 부응할 수 있다. 그것은 이야기의 여백에 있는 이야기이다. 1)여담은 너무 메마른 주제로 피로해진 독자가 기분을 전환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한다. 2)작가는 행복이나 불행을 예고한 후 초조하게 그것을 기다리고 있는 독자를 애태우기 위해 여담을 일종의 정지법으로 사용할 수 있다. 여담을 조심하라. 여담은 사건들의 끈을 놓치게 하고 줄거리의 통일성 깨뜨리며, 때로는 독자를 지루하게 만든다. 하지만 여담은 다뤄진 주제에 격렬하거나 침착하게 도달하기 전에 기분 전환, 긴장 완화를 창출하고자 하는 변론가나 변호사에게 유용할 수 있다."
문학 담론들에는 주제나 형식에 꼭 들어맞지 않은 다소의 일탈이 있기 마련인데, 그것은 담론의 미학적 규범을 해치는 것으로 규정된다. 플롯에서 임의적으로 일탈해서 "샛길로 빠지고 담장을 넘는" 이야기는 서사의 여러 요소들이 하나의 핵심을 향하여 정렬하는 응집력을 가져야 한다는 서사의 규범을 정면으로 위반한다. 비평가들은 텍스트를 분석할 때 직선으로 진행하는 주제의 운동만을 따라갈 뿐 주제의 응집력을 풀어헤쳐 놓고 직선에서 일탈하는 여담적 현상은 무시해버린다.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주제를 벗어나는 요소들에 대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다. 여담의 거부는 그것이 주제에서 비켜 서 있는 뜻없는 행위의 결과물이며, 그것이 텍스트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는 잉여의 부분이라는 논리로 정당화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현대까지 수사학과 문학 이론가들은 주제에서 벗어나는 여담을 해석적 독서에 방해물이 된다는 이유에서 단죄하고 추방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여담은 텍스트의 다성성(多聲性)과 비결정성을 높이 평가하는 현대 비평가들에 의해 그 가치가 재발견되었다.
여담은 담론이 나타난 태초에서부터 담론의 내부에 존재하는 요소이다. 담론의 미학적 규범들로 분류되는 "질서·목적성·필연성·일관성" 들은 텍스트의 완성도에 기여하는 "이성 중심적 가치들"이다. 이성 중심적 가치들에 반기를 드는 여담·수다·잡담들은 텍스트의 통제되지 않은 무정부적인 요소들, 즉 언제나 불필요한 잉여, 혹은 무질서의 과잉으로 여겨진다. 여담의 존재론적 표상과 형태들은 "황당한 연상, 기억의 공백과 장애, 다소간 유용한 삽입구들의 미친듯한 증가, 불쑥 떠오른 훌륭한 생각들, 방향 상실, 갑작스런 단절로 귀착되는 표류, 어쩔 줄 몰라 내뱉는 "내가 어디까지 했지 ?"라는 말" 등등이다. 한마디로 담론 내부에서 여담이란 하위 범주에 위치한 샛길로 빠지는 이야기, 쓸데없는 군더더기이다. 란다 사브리는 그 무가치한 것으로 평가절하되는 여담이 텍스트의 내부에서 담화의 전략으로 기능하는 것을 논리적으로 밝히고, 여담을 서사의 중요한 전략으로 복권해낸다. 란다 사브리가 여담을 주목하는 것은 "한 텍스트 안에서 어떤 것도 무의미하지 않고 어떤 것도 우연적으로 그냥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여담을 통해 에둘러가기는 김훈 소설의 한 특징이다. 이때 여담은 주제를 향한 직선적 지향성에 딴지를 걸고, 작품의 선조적 진행에 대해 훼방을 놓으며, 결말을 끊임없이 유예한다. 텍스트 안에 기생하는 작은 텍스트들을 보여줌으로써 독자의 긴장을 누그러뜨리고, 결과적으로 주제에서 벗어나 느슨하고 풀어헤쳐진 일탈의 순간을 향유하게 한다. 여담은 중심에 대한 주변부의 깐죽거리기이고, 이성에 대한 비이성의 조롱하기, 질서에 대한 무질서의 도발이다. 그것은 미숙한 글쓰기의 결과물이 아니라 서사의 과잉, 단절, 불연속의 전략이 낳은 산물이다. 여담은 텍스트와 곁텍스트, 안과 밖, 현실과 픽션의 경계를 옮기며 궁극적으로 서사의 배열법의 엄격한 위계의 질서를 흩어 놓는 것을 목표한다. 몽테뉴에서 마르셀 프루스트를 거쳐 밀란 쿤데라까지, 아니 『은밀한 생』을 쓴 파스칼 키냐르, 그리고 김훈에 이르기까지 텍스트가 여담으로 뒤죽박죽 헝클어지며, 그것의 여담의 본질적 성격인 파편성과 불연속성으로 텍스트를 희롱하는 즐거움과 이점을 잘 알고 활용한 작가들이다. 아직은 작품활동이 일천한 김훈은 동인문학상(2001)과 이상문학상(2004)은 거푸 거머쥐는데, 이는 여담적 작가의 탄생에 내린 한국문학의 축복이다.
3. 『현의 노래』의 경우
봉건 왕조 국가에서 왕과 국가는 상호규정적 관계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국가와 그 이데올로기의 특정한 요구에 부응할 수 없는 개별자는 그 중심에서 일탈한 자의 고립감과 무중력 상태를 내면화한다. 가야인 우륵은 신라의 왕 앞에서 금(琴)을 뜯는데, 금은 상호규정적 관계의 중력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에서 저 홀로 그 떨림과 자취를 밀고 나간다. 김훈은 그 대목을 이렇게 쓴다 ; "우륵은 금을 무릎에 안았다. 우륵이 오른손으로 맨 윗줄을 튕겼다. 소리는 아득히 깊었고, 더 깊고 더 먼 곳으로 사라져갔다. 우륵의 왼손이 사라져가는 소리를 들어올렸다. 소리는 흔들리면서 돌아섰고, 돌아서면서 휘어졌다. 우륵의 오른손이 다음 줄을 튕겼다. 소리는 넓고 둥글었다. 우륵의 왼손이 둥근 파문으로 벌어져가는 소리를 눌렀다. 소리는 잔무늬로 번지면서 내려앉았고, 내려앉는 소리의 끝이 감겼다. 다시 우륵이 세 번째 줄을 튕겼다. 소리는 방울지면서 솟았다. 솟는 소리를 우륵의 왼손이 다시 들어올렸다가 내려놓았다. 내려놓고 더욱 눌렀다. 소리의 방울이 부서지면서 수많은 잔 방울들이 반짝이며 흘러갔다. 다시 우륵의 오른손이 맨 윗줄을 튕겼다. 깊고 아득한 소리가 솟았다. 솟아서 내려앉는 소리를 우륵의 왼손이 지웠다."(264쪽) 이 대목을 읽을 때 나는 그 절제된 아름다움에 문득 숨을 멎는다. 금의 소리가 발화되는 이 대목의 묘사에 작가는 오래 공을 들이는데, 주인이 따로 없고 "본래 스스로 흘러가"며, 본래는 있되 눈앞에는 "없는 세상을 열어내는 것"(251쪽)이란 소리의 운명에 순응하며 가야에서 신라로 흘러온 일흔 노인의 복잡한 감회를 그 묘사에 실어 나른다.
김훈은 칼에 의탁해 사는 자의 고단함과 슬픔을 쓴 데 이어, 악기에 의지해 제 삶을 견인하는 자의 비통함과 적요에 대해 쓴다. 『현의 노래』가 그것이다. 하지만 악기와 그것에서 울려나오는 소리로써 생계를 세우고 제 생의 불우함이 지닌 무게를 덜어내며 한 시대를 건너가는 악사의 이야기는 뒷전으로 물러나고, 서사의 전면에는 전장에서 도끼와 칼에 으깨지고 베어지며 죽은 자들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살점과 유혈의 비릿한 내음으로 자욱하다. 악기가 꿈꾸는 세상이나 병장기가 꿈꾸는 세상이 하나라는 뜻일까 ? 작중인물이 이순신에서 우륵으로 바뀌고, 시대 배경도 다르고 이야기도 다르지만, 두 소설은 아름다운 것은 필경 소멸하며, 소멸의 운명 속에서 산 자들의 삶은 덧없다, 는 한 주제로 맞닿아 있다.
악기는 사람의 몸이 내는 소리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열망이 낳은 도구이다. 사람들은 악기로써 제 한 몸이 빚어내는 희로애락을 표현하고 그것의 덧없음을 위로한다. 악기의 소리는 사람의 손과 입에 도움을 받아 소리를 울려내되 소리의 영역과 경계를 넓고 깊게 만들어 사람에게 되돌려준다. 몸과 함께 세상으로 나아가는 병장기가 호신(護身)과 공격의 도구로 운명의 불확정성을 최소화하는데 기여한다면, 악기는 사람 마음의 깊은 데서 울려나오는 소리의 개별성과 경계를 확정지으며 없는 세상을 열고 그 세상으로 삶을 견인하는 도구이다. 그 둘은 생명의 강령을 받들어 사람의 결핍을 보완하고 몸과 마음을 두루 이롭게 하는 도구로서의 소명을 다한다. 몸이 먼저이고 도구는 나중이었으되, 그것들은 몸에 기꺼이 굴복한다. 우륵이 적막의 끝 쪽을 향해 귀를 기울이다가 "몸속의 소리가 이리도 아득하니....... 멀어서 들리지 않는 소리가 몸속을 흘러가는구나. 아, 나는 살아 있구나."(83쪽)라고 독백할 때 소리는 악기 이전의 것으로 몸에 부속된 것임을 분명히 한다. 몸과 악기가 별개의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몸속의 소리를 받기 위해 악기가 뒤따른 것이다. 소리는 악기에게 와서 그 존재를 드러내며, 울림으로써 산 자의 생을 현재화하고 실감으로 살려낸다. 사람의 나고 죽음이 그러하듯 소리의 생멸도 가뭇없는 것이다. 소리의 발생과 사라짐 사이의 인과관계는 명료하지만 그 근원은 사람의 생의 근원이 그러하듯 아득하고 모호하다. 늙은 악사의 지혜에 의하면, 몸으로 된 생과 소리는 겹쳐지며 그 영고성쇠의 운명을 함께 한다 ; "몸은 소리에 실려, 없었던 새로운 시간 속으로 흘러나갔고, 흘러나간 몸이 다시 돌아와 줄을 당겼다."(264쪽) 이런 구절들은 불가피하게 소리의 발생과 그 덧없는 사라짐을 통해 산 것들의 생을 무한 중력으로 끌어당기는 허무를 각인하려는 소설가의 조급증을 드러낸다.
『현의 노래』는 소리의 발생의 내력과 그 순환의 궤도를 따라가지 않는다. 비록 작가가 소리의 현존과 그 울림들이 지어내는 마음의 가역반응을 그리는데 많은 공을 들이지만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펼쳐진 넓고 두터운 관계망 위에서 홀연 솟아났다가 사라지는 개별자의 운명의 덧없음에 대한 소설가의 편애 때문에 뒷전으로 밀려난다. 소설가는 우륵이나 제자 니문이 금(琴)에 의탁해 세상에 나아갔으나 금과 함께 하는 삶의 굴곡과 음영을 그리는 데 태만하다. 그들은 문득 서사의 중심에서 비켜선다. 그 대신에 서사의 중심에 있는 것은 소리이다. 소설가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이끄는 것은 소리의 자취와 떨림이다. 소리는 저 홀로 일어서서 홀로 저의 길을 가다가 저 홀로 스러지는 것의 한 상징이다. 소리는 왕의 것도 아니며 국가에 귀속되지도 않고, 홀로 자유롭다. 땅위의 모든 것이 왕의 것이고, 국가의 자산으로 귀속되는 시대에도 소리는 왕의 길과 무관한 독자적 내면과 소명을 따른다. 소리는 울릴 때만 소리일 수 있으며, 사람들이 "그 덧없는 떨림에 마음을 의탁해"(139쪽) 저의 삶의 덧없음을 견디는 방식으로서만 유효하다. 소설가는 소리의 발생의 근본과 그것이 흘러가는 자취를 집요하게 따라가며 묘사한다. 가야가 망하기 직전 우륵은 신라에 귀순해 제 삶을 의탁하며 우륵은 말한다. "나를 그저 내버려두시오. 신라가 가야를 멸하더라도, 신라의 땅에서 가야의 금을 뜯을 수 있게 해주시오. 주인 있는 나라에서 주인 없는 소리를 펴게 해주시오."(252쪽) 소리는 경계를 가로질러 어디든지 간다. 그것은 어떤 제도나 이념으로 묶어둘 수 없는 자유자재의 것이다. 소리의 운명에 우륵의 삶이 겹쳐지며 한 길을 간다. 가야인 우륵이 신라로 망명하는 것이 현실과의 타협이 아니다. 그게 소리의 소명에 제 삶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장인이 따라야할 자연의 법인 것이다.
소설의 전반부는 가야의 늙은 왕 곁에서 시중을 드는 시비(侍婢)인 아라에게 초점이 맞춰진다. 아라는 순장될 제 운명에 거역하고 궁을 빠져나와 탈주한다. 소설의 전반부가 힘차고 생기 있는 것은 아라의 도주의 동선(動線)을 따라 힘차게 굽이쳐 가기 때문이다. 병들고 노쇠해 겨우 생을 이어가는 왕과 쇠멸의 기미를 드러내는 가야 왕국의 국운은 한데 겹쳐진다. 아라는 노쇠와 쇠멸이 기미에 대한 생명의 도발이다. 생명을 인위적으로 끊고 죽이는 순장의 관례는 미개하며, 그 미개함으로 개별자를 억압하는 권력의 권능이 무소부재로 편만해 있는 국가는 부도덕하다. 국가에 불복종하며 제 생을 저 낯선 시간 속으로 밀고 나아가는 아라의 현존은 위기에 빠진 현존이지만, 저의 생명을 탈취하려는 왕과 국가에 맞선 발칙한 생기로 빛난다. 그 생기는 산 자를 죽은 자와 함께 매장하는 전근대적 국가의 야만성에 맞서는 산 자의 본능에 내장된 강령의 신성한 굳건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김훈의 소설에서 흔히 여성들은 주체로 서지 못한 비이성적 감각의 존재이다. 아라는 이성의 기획이 아니라 본능 위에 제 실존을 세우는 살아 있는 것의 대표적 기표이다. 본능은 자연의 능력이다. 김훈은 허무에 침윤되지 않는 아라를 통해 자연의 생생함을 그려낸다. 아라는 날것의 정보로 들어온 자연에 의해 감각의 외연이 확대되고 마침내 인식론적 깨달음의 영역으로 넘어가며 존재의 질적 변환을 겪는다. 소설가는 그 순간의 놀라움을 이렇게 묘사한다. "아, 여기가 세상인가, 아라는 세상이 놀라워서 바람이 스치는 팔에 소름이 돋았다. 이것이 물이로구나, 물은 길고 넓고 멀어서 저편 끝에서 하늘에 닿는데, 물은 흘러서 바람과 같구나, 바람이 사람을 밀고 물이 사람을 띄워서 사람이 바람에 흘러가고 산들도 출렁거리면서 잇닿는구나, 바람이 몸속으로 불어 들어와 몸이 세상으로 퍼지고 산과 강이 몸속으로 스미는구나."(146쪽) 아라는 우륵과 니문 일행과 우연히 만나 제 삶을 땅의 중력으로 정착하려고 할 즈음 돌연 붙잡혀 죽은 태자와 함께 순장됨으로써 소설 무대에서 퇴장한다.
소설의 후반부를 잇는 것은 신라의 장수 이사부이다. 이사부는 군대와 병장기에 의존해 가야의 여러 고을들을 쓰러트리고 백제와 고구려를 물리쳐 신라의 영토를 넓혀간다. 많은 세월을 전장에서 보내지만 이사부는 우주의 섭리와 자연의 변화 속에서 나고 죽는 일을 반복하는 생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전장의 철학자이다. 하지만 가야에서 신라로 귀순하는 악사 우륵은 살리되, 가야인으로 가야에 반역하며 신라를 도운 대장장이 야로 부자(父子)는 부하를 시켜 칼로 베어버리는 대목에서 칼의 진리에 제 생을 의탁하는 무신의 비정함이 드러난다. 왕이 중심인 국가에서 전장은 변방이며, 지리적 이격(離隔)의 소외감에 순응하며 전장에서 늙는 이사부는 운명적으로 변방의 인물이다. 이사부는 기질적으로 변방의 운명에 이끌리는 소설가의 편애와 지지를 받는다. 이사부는 김훈이 그려낸 이순신의 정체성과 그 내면에서 겹쳐지는 동일자이며, 그 외면에서는 변주라 할 만하다. 서사의 전반부와 후반부는 이야기는 불연속적으로 끊겨 있다. 이 단절을 가까스로 접합하며 이어가는 것은 가야의 늙은 악사인 우륵과 니문, 혹은 가야의 풍부한 쇠들로 병장기를 제조해서 이사부의 군사를 돕는 야로 부자의 이야기들이다.
어쩌면 『현의 노래』의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빛과 소리와 냄새이다. 빛과 소리와 냄새들은 그것들의 본디 있던 자리에서 질펀하게 번져 나와 사람의 감각 기관에 비벼대며 이야기의 현전(現前)을 이끌고, 서사에 실감과 부피를 불어넣는다. 김훈은 이렇게 쓴다 ; "비화의 날숨에서는 자두 냄새가 났다. 잠에서 깨어나는 아침에, 비화의 입속에서는 단감 냄새가 났고, 잠을 맞는 저녁에는 오이 냄새가 났다. 귀 밑 목덜미에서는 잎파랑이 냄새가 났고 도톰한 살로 접히는 겨드랑이에서는 삭은 젖 냄새가 났다. 바람이 맑은 가을날, 들에서 돌아온 비화의 머리카락에서는 햇볕 냄새가 났고 비 오는 날에는 젖은 풀 냄새가 났다. 비화의 가랑이 사이에서는 비린내가 났는데, 그 냄새는 초승에는 멀어서 희미했고 상현에는 가까워지면서 맑았고 보름에는 뚜렷하게 진했고 그믐의 가까우면 다시 맑고 멀어졌다."(63쪽) 우륵의 처인 비화는 냄새의 생생함 속에서 살과 피를 얻는다. 소리가 그러하듯 냄새 역시 한번 사라지면 가뭇없다는 점에서 생의 덧없음에 대한 은유이다. 덧없는 것에 실감을 부여하려는 소설가의 몸짓은 허망하다. 그 허망함을 글로써 증명하려는 게 소설의 운명이다.
김훈의 소설은 대체적으로 미학적 소명이 서사의 규범에 우선한다. 『현의 노래』는 인물과 인물 사이에 인과론적인 핍진성이 희박하고,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의 종속과 대등절의 헐겁고 느슨한 이음 때문에 독백의 범람으로 다가온다. 인물과 인물 사이, 혹은 이야기와 이야기의 단절된 틈으로 잠언들이 흘러간다. 이를테면 이런 잠언 ; "소리는 제가끔의 길이 있다. 늘 새로움으로 덧없는 것이고, 덧없음으로 늘 새롭다."(285쪽) 김훈의 소설은 여담의 잦은 끼어들기로 인해 서사 구조의 이완과 불균형을 초래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소설이 잘 읽히는 것은 잠언들과 문체에 구현된 소설가의 도저한 미적 자의식이 얼개의 성김을 넘치게 메꾸는 까닭이다. 독자들은 서사구조의 성김에 투덜거리기 이전에 김훈 문체의 놀라운 탐미성과 활력으로 보상받는다.
4. 『칼의 노래』의 경우
탄핵 소추 중인 대통령 노무현이 『칼의 노래』를 읽는다고 화제가 되었다. 착잡한 심경에 있을 노무현은 왜 굳이 『칼의 노래』를 붙들고 있는 것일까 ? 위정자들은 왜 이순신을 좋아할까 ? 박정희도 이순신을 좋아했다. 세종로 한 복판에 이순신의 동상을 세우고 현충사를 성대하게 중건한 게 바로 박정희다. 어디 그뿐이랴 ! 『난중일기』 국보지정, 이순신 이야기의 교과서 등재, 현충사의 성역화, 현충사의 국민 참배와 수학여행 의무화, 탄신 기념일 제정, 국가 제사 등 박정희의 머릿속에서 기획된 이순신 성웅화는 국가적으로 뻑적지근하게 진행한 일종의 국민 의식개조사업의 일환이었다. 박정희가 이순신을 성웅화한 것은 저의 존재 위에 이순신이 가진 구국 영웅의 이미지를 덧씌워 그것을 무단 전유하려는 무의식의 욕망 때문이다. 박정희의 이순신과 노무현의 이순신은 한 인물이되 다르다. 전자가 성화(聖化)된 이순신이라면, 후자는 생사와 존망의 위기 속에서 모멸과 치욕으로 살이 저며지는 저의 처지를 차가운 이성으로 관조하는 인간 이순신이다. 『칼의 노래』 속에서 이순신은 말한다 ; "알 수 없었고 벨 수 없었고 조준할 수 없었다. 벨 수 없는 것들 앞에서, 나는 다만 적의 종자를 박멸하려 했다."(1권, 71쪽) 이건 영웅의 입에서 발음될 수 있는 말이 아니라 제 운명에 버거움을 느끼는 범부의 입에서나 나올 수 있는 말이다. 여기에는 무(武)를 천하에 펼쳐 난세를 치세로 평정하려는 대의는 없고, 오로지 제 운명의 버거움을 힘겹게 헤쳐나가는 자의 버거움만 강조되어 있다. 대타적 세계와의 되먹임의 고리가 끊긴 곳에 실존의 자리를 세운 자는 필경 허무주의자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만인 대 일인의 전쟁에서 만인을 상대하는 일인은 고립감과, 그 고립감으로 체화된 실존적 허무를 피할 수 없는 까닭이다. 때때로 허무주의자는 생존상의 가치가 결여된 선택과 행동으로 나아간다. 왜 상대를 베야 하는지 모른 채 적을 베는 자의 도덕은 그 허무주의자의 무도덕이다. 이순신이 허무주의자라는 물증은 뚜렷하지 않다. 다만 이순신은 히데요시의 칼끝과 조선 조정의 칼끝 사이에서 제 한줌 생존이 겨우 숨쉬고 있다는 투명한 자각을 저의 무도덕 위에 세울 뿐이다.
김훈의 『칼의 노래』는 이전의 이순신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설이나 영화와는 크게 다르다. 김훈의 이순신은 인간 이상으로 비범하게 부풀려진 "성웅(聖雄)"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실물대의 "인간"이다. 이순신의 인간 됨은 몸을 고되게 부린 뒤에 나타나는 식은 땀과 저절로 흘러내리는 코피에서 풍부한 실감을 얻는다. 그것의 절정은 감각의 생생한 현존 속에서 보다 선명하게 나타난다. 전장에서 너무나 많은 시체들이 썩는 냄새에 멀미를 느낀 이순신은 포유류의 누린내를 감당하기 버거워하며 한동안 고기를 먹지 않는다. 세상에는 생을 버겁게 만드는 얼마나 많은 누린내들이 범람하는가 ! 이순신은 그 누린내들 속에 고립무원으로 내동댕이쳐 있다. 타자와 세계는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맡는 시각 청각 촉각 후각 기관에 밀려와 저의 있음을 증명해낸다. 감각 기관들에 비벼지는 그 물성에 의해 생물의 감각은 환하게 열린다 ; "내가 바다에 당도했을 때, 연안의 바람은 끈끈했고, 간고등어 썩는 냄새가 자욱했다."(1권, 21쪽) 특히 후각 기관을 자극하는 온갖 냄새들은 이 소설 전편을 덮는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그 점은 두드러진다 ; "전선들이 다가오자 연기 냄새는 더욱 짙었다. 죽은 여진의 가랑이 사이에서 물컹거리던 젓국 냄새와 죽은 면이 어렸을 때 쌌던 푸른 똥의 덜 삭은 젖냄새와 죽은 어머니의, 오래된 아궁이 같던 몸냄새가 내 마음속에서 화약 냄새와 비벼졌다."(1권, 156쪽) 오감에서 감각적 질료의 지각이 탄생한다. 아무것도 믿을 게 없고 의지할 게 없이 고립에 처한 인간에게 저의 오감은 인식의 세계에 가 닿을 수 있는 유일한 매개이자 의지처다. 그 감각의 매개에 의해 지각이 열리고, 그 지각 속에서 나와 세계의 있음과 있어야 함의 상호적 관련은 추상과 관념의 껍질을 벗고 드러난다.
이순신은 저의 바깥에서 출렁이며 밀려오는 죽음의 물결을 향해 칼을 겨누지만, 그것은 벨 수 없는 적이다. 또한 그 적의 적의의 근본은 모호하다. 더 무서운 것은 적의는 모호하되 피아(彼我) 간에 맡은 바 소임은 자명하다는 사실이다. 그 자명함의 전면에서 이순신은 삶이 그 근본으로 가진 모호한 관념과 추상 때문에 진저리를 친다 ; "임진년의 바다에서는 알 수 없는 일이 많았고, 지금도 역시 그러하다. 가장 확실하고 가장 절박하게 내 몸을 조여오는 그 거대한 적의의 근본을 나는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었으나, 내 적이 나와 나의 함대를 향해 창검과 총포를 겨누는 한 나는 내 적의 적이었다. 그것은 자명했다. 내 적에 의하여 자리매겨지는 나의 위치가 피할 수 없는 나의 자리였다."(1권, 71쪽) 이순신이 느끼는 혼돈과 모호함은 저를 둘러싸고 있는 힘들의 예측불가성과 맹목성에서 비롯된다. 이순신의 실존은 그것들 속에 포박되어 있다. 그 포박 속에서 이순신은 알 수 없는 바깥의 힘과 의지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압력 속에서 저의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의지대로 움직인다.
젊은 왜군 포로를 앞에 두고 신문하며 갈등할 때 이순신의 인간됨은 또다시 섬광처럼 드러난다 : "내 속에서 나 아닌 내가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아베를 죽여서는 안 된다는 울음과 아베를 살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울음이 내 몸 속에서 양쪽 다 울어지지 않았다. 몸 속 깊은 곳에서 징징징 칼이 울었다."(1권, 175쪽) 갈등은 사유하는 자의 몫이고 사유는 인간됨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칼은 인간의 사유에 따르지 않고 저의 타고난 바 숙명대로 움직인다. 칼의 움직임을 칼의 숙명으로 용납하지 않을 때 그 칼은 적이 되어 나를 벤다. 먼저 베지 않으면 제가 베이는 게 칼의 숭고한 운명이다. 칼은 피아와 선악을 분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칼이 따르는 강령은 무도덕이다. 칼은 베는 것으로 저의 소임을 다한다. 분별하는 것은 칼의 몫이 아니고 사유하는 인간의 몫이다. 칼을 든 자는 존망의 기로에서 사유를 가로질러 나아가는 칼의 무도덕을 비극으로 체화한다. 그 순간에 일어나는 사유는 잉여적인 것일 따름이며, 감정의 사치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지 않는 개별자의 내면을 가진 이순신의 비극은 두 겹이다. 그 하나는 전쟁에 함몰된 자가 칼의 원리에 따르지 않고 사유의 원리에 제 삶을 비끄러매려는 헛된 시도를 하는 것이고, 그 두 번째는 봉건 왕조제의 어둠 속에서 너무 일찍 근대적 자아의 횃불을 들고 나아가려고 한 점이다. 따라서 이순신의 곤경은 자업자득이다. 제 생의 경영을 오로지 저의 책임 아래 두려고 했다는 점에서 이순신은 명약관화한 그 곤경을 스스로 불러들인 셈이다. 이순신은 제가 선택한 곤경이 칼로 베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죽음을 선뜻 받음으로써 그 책임의 전부를 제 실존으로 수납한다.
『칼의 노래』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이순신의 모습은 사유하는 인간이다. 이순신은 칼에 제 운명을 기대면서 그 칼과 길항하는 사유에 깊이 침윤됨으로써 파국에 필연의 중력을 부여한다. 이순신은 임금의 명령에 따르되 맹목적인 종속은 거부한다 ; "나는 다만 임금의 칼에 죽기는 싫었다. 나는 임금의 칼에 죽은 죽음의 무의미를 감당해 낼 수 없었다."(1권, 71쪽) 그것은 주체의 선택과 행동의 원리를 타자에게서 구하지 않고 자율성이라는 규범의 확대를 통해 실현하려는 근대인의 자아에 합당한 자의식의 발현이다. 전근대의 세계에서 근대인의 자의식으로 살려는 자는 당대 권력에 대한 반동으로 튕겨나간다. 임금이 이순신에게 수군통제사를 맡기면서도 끝까지 신임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조선 조정도 이순신이 충(忠)의 이데올로기에 무조건적으로 복무하지 못하는 사람, 다시 말해 봉건 왕정제 시대의 신하로서는 불충한 근대적 자의식으로 가득 찬 사람이라는 걸 꿰뚫어 본 것이다. 이런 이순신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소통할 수 없는 세계 속에서 저의 실존적 의미를 저의 사유의 힘만으로 일구어내려는 근대적 이성의 탄생을 엿본다. 김훈의 『칼의 노래』는 너무 일찍 근대적 자의식을 품은 자가 부르는 절망과 환멸의 노래다. 아니다. 김훈의 바로크적 과잉을 지양하는 비장식적인 문체 속에서 절망과 환멸은 날줄과 씨줄로 소설이라는 피륙을 짠다. 그렇게 짠 피륙 속에서 울려나오는 것은 노래가 아니라 울음이다. 실존적 갱신의 한계에 부닥쳐 절망과 환멸로서 성대를 울리는 것은 노래가 아니라 울음이라는 게 논리적으로도 맞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노래"가 아니라 "울음"으로 읽혀야 마땅하다.
5. 탈주의 마지막 풍경
김훈은 이 소설들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 우선 김훈은 국가와 그 권력에 포섭되지 않는 개별자의 내면에 주목한다. 이순신과 우륵, 그리고 아라는 표면에서 국가와 그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지만, 개별자의 내면에서는 그것에서 이반(離反)한다. 그들은 국가와 그 이데올로기로부터, 순장으로부터, 죽음으로부터 끊임없이 탈주한다. 그들은 국가의 내부로 포섭되지 않고 바깥으로 미끄러져 나가며, 그렇게 함으로써 실존의 정체성을 외부적인 것, 소수, 주변부에 둔다. 그들에게 탈주의 운명은 불가피한 것이다. 그 탈주는 이중의 배반의 산물이다. 그 하나는 다수가 따르는 대의명분과 인습에의 배반이며, 다른 하나는 개별자의 내면에서 나오는 자율성을 악으로 규정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배반이다. 일체의 외부적 구속에의 저항과, 개별자의 내면에 가해지는 도덕적 압력에 대한 반동에서 허무주의의 근본적 성격을 찾는다면, 김훈의 소설은 허무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훈의 소설들은 욕망의 덧없음, 더 나아가 나고 죽는 것, 즉 생멸의 무의미함을 말할 때 치열해지며 생기가 돈다. 김훈의 문체가 죽음과 만날 때 도달하는 삼엄한 아름다움은 멸절하는 것들에 영원성을 덧씌워 드러내려는 소멸과 허무의 미학의 한 정점이다.
때로 김훈은 잔혹한 리얼리스트이다. 『현의 노래』의 도입부에서 만나는 순장의 묘사는 장엄하면서도 냉혹하다. "왕의 관이 석실로 내려올 때, 문무의 두 순장 중신들은 흰 수염을 가지런히 하고 눈을 감았다. 군사들이 석실이 돌뚜껑을 덮을 때 쇠나팔이 길게 울렸다. 순장자들의 구덩이마다 배치된 군사들이 일제히 돌뚜껑을 들어올려 구덩이를 덮었다. 구덩이를 덮을 때, 울음소리나 비명소리가 한 줄기도 새어나오지 않으면, 백성들은 그 적막을 죽은 왕이 덕으로 칭송했다. 간혹 구덩이 뚜껑을 덮을 때 흑, 흑 젊은 여자들의 웃음인지 비명인지가 새어나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 불경하고 요망한 일을 입에 담지 않았다. 또 돌뚜껑이 덮이는 순간, 뚜껑을 밀치고 구덩이 밖으로 뛰쳐나오려는 자들도 더러는 있었다. 군사들이 달려들어 몽둥이로 사지를 부러뜨려 구덩이 안으로 밀어 넣었는데, 그 일도 사람들은 애서 기억하지 않았다. 때로는 장례 전날 밤, 소복을 입은 채 달아난 처녀들도 있었다. 군사들이 갈대숲과 바위 틈을 뒤져 처녀들을 붙잡아 여러 토막으로 베었다. 군사들은 처녀의 몸 토막을 우물에 던지고 흙으로 메웠다. 처녀들의 부모들이 쇠터의 노비로 끌려갔고 살던 집을 헐렸다. 처녀들의 도망은 없었던 일로 바뀌었는데, 세월이 지나도 사람들은 그 참람한 일을 일절 입에 담지 않았다."(15 ∼ 16쪽) 순장에 대한 꼼꼼한 묘사는 일견 권력과 제도의 야만스러움을 소름끼치도록 사실적으로 보여주려는 것 같다. 산 자들을 구덩이에 처박거나, 뛰쳐나오려는 자들의 사지를 부러뜨리거나, 도망간 자들을 붙잡아 몸을 토막내는 순장 관습의 가차없음과 무자비함을 드러내는 문체는 전형적인 리얼리스트의 문체이다. 순장 관습은 사람이 사람에게 저지르는 폭력의 가장 극악한 한 형태이다. 그것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권력의 처지에서 보자면 순장에 저항하며 벗어나려는 산 자들의 일체의 기획은 "불경하고 요망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듯 권력과 제도는 자연 그대로의 있음을 지배/피지배의 구도 속으로 포섭해서 제약하고 생명의 약동을 탈취하는 억압기제이다. 권력과 제도 앞에서 그것에 포섭되기를 거부하는 개별자의 내면은 무력하다. 그 무력감 속에서 우연적 존재에서 필연적 존재로, 즉자적 존재에서 대자적 존재로 전환할 수밖에 없는 게 개별자의 운명이다. 그 개별자들에게 이 세상은 아수라의 지옥이다. 이때 주체에게는 두 개의 선택지가 있다. 하나는 아수라의 지옥에서 탈주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 안에서 버티고 견디는 것이다. 『현의 노래』에서 아라가 탈주의 길을 택한다면, 우륵과 니문은 소리의 위안에 기대어 아수라의 지옥에서 사는 것의 덧없음을 잠재우려 한다. 『칼의 노래』에서 이순신은 우륵과 니문이 그랬듯 저와 운명을 함께 하는 칼에 의탁해 그 덧없음을 버티고 견뎌낸다.
인간은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이다. 삶을 추동하는 욕망은 그 자체로 옳거나 그르거나 하는 선악의 분별과 가치판단 너머에 있는 것이다. 『칼의 노래』나 『현의 노래』에서 가장 빛나는 대목은 욕망의 덧없음으로 묘사할 때이다. 욕망의 덧없음은 주검의 풍경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주검이란 욕망을 소진한 자의 몸이 아닌가 ? 죽음 앞에서 구차하게 생의 며칠을 도모하기 위해 국물로 제 창자를 덥히는 산 자의 욕망은 참담하고 비루하거나 ; "아라는 재첩국 국물을 왕의 입속으로 흘려 넣었다. 앞니가 모두 빠진 왕의 입속은 캄캄했고 그 어둠 속에서 시궁창 냄새가 피어올랐다. 재첩국 국물은 그 어둠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국물을 넘길 때, 왕의 목울대가 흔들렸다. 국물은 왕의 마른 창자에 스몄다. 엷고도 아득한 국물이었다. 아득한 국물은 창자 굽이굽이와 실핏줄 속으로 깊이 스몄다. 국물은 연기처럼 퍼졌다."(40쪽), 여자의 구멍에 제 정기를 쏟아내는 남자의 욕망은 여자의 몸이 그렇듯 모호하고 정처 없으며, 아울러 허무하고 하염없다 ; "여자들의 비릿하고 물컹거리는 속살을 야로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 속살들은 늘 깊이를 알 수 없이 모호했고 정처 없어 보였다."(112쪽), "이 질퍽거리는 구멍은 대체 무엇인가. 이 빨아당기는 속살이 어째서 왕의 무덤 속에 들어가 쇠와 함께 썩어야 하는가. 야로는 식음땀을 흘리며 기진맥진하였다."(117 ∼ 118쪽) 산 자의 질척거리는 욕망의 비루함에 비해 꽃, 물, 갈대, 바다, 바람 따위의 자연이 보여주는 무욕한 풍경은 그 뜻없음의 의연함으로 생기를 뽐낸다. "사람과 말의 시체들이 뒤엉켜서 썩어가고 있었다. 엎어진 시체의 겨드랑이나 사타구니 틈으로 봄풀이 돋아 올라 흰 꽃을 피우고 있었다. 꽃들은 바람에 흔들렸다. 독수리가 파먹던 창자에 구더기가 슬어 날벌레들이 들끓었다. 갈대숲 속에는 더 많은 시체들이 물을 향해 머리를 처박고 죽어 있었다. 시체들은 머리가 깨어졌거나 옆구리가 터졌고, 등판이 화살이 박혀 있었다. 싸우던 군대들이 물러간 저녁 무렵에 부상자들은 물가로 기어나와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나서 죽은 모양이었다. 부상자들이 기어온 자리를 따라서 갈대가 쓰러져 있었다. 들판의 북쪽 언덕에 저수지가 있었고 저수지 뒤쪽은 야산이었다. 시체는 저수지 뚝방과 수로를 뒤덮고 산속에까지 널려 있었다. 저수지에는 주름지는 봄 물 위에 수련의 새잎이 빛났고 굵은 붕어들이 물 위로 치솟았다."(30 ∼ 31쪽) 몸의 불투명성과 실존의 비결정성은 몸의 죽음과 함께 하나의 타자적 현상으로 영원히 고착되고 봉인되어버린다. 몸이 살아 있을 때 누린 감각의 향연, 감각의 사치는 이 주검들 위에서 신기루처럼 어른거린다. 몸에서 욕망이 떠나자 주검은 무욕한 자연의 일부로 귀속한다. 주검은 자연과 한데 어우러져 풍경의 고요한 아름다움에 도달한다. 주검들의 겨드랑이나 사타구니 틈으로 봄풀은 돋아 올라 흰 꽃을 "피우고" 바람에 "흔들렸다." 시체가 널려 있는 저수지에서 새로 돋은 수련의 새잎은 "빛났고" 몸피를 키운 굵은 붕어들은 물 위로 "치솟았다." 존재를 꽃 피우고, 흔들리며, 빛나고, 치솟는 것은 모두 자연에 속하는 것들이다. 자연은 스스로의 있음 속에서 신생을 이루며 유구한 존재임을 보여준다. 그 자연에 군림하며 욕망으로 떨던 인간들은 주검으로 엎어져 썩어간다. 주검으로 썩어가며 몸의 욕망의 비루함과 몸의 욕망의 덧없음을 증거한다.
김훈은 "나는 내 당대의 어떤 가치도 긍정할 수 없었다."(『칼의 노래』, 책머리에)고 그 도저한 부정과 허무의 정신을 새기고 있다. 이 부정과 허무의 정신의 바탕에는 이보다 더 나쁜 세상은 없다,는 판단이 굳건하게 들어서 있다. 김훈의 인물들의 탈주 동기는 낙원에의 열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보다 더 나쁜 세상은 없다는 확신에서 비롯된다. 개별자의 내면과 저의 심미적 본능을 절대화하는 것은 당대 가치들에 대한 지독한 회의와 부정의 산물이다. 아무것도 믿고 따를 게 없다면 저의 감각과 느낌, 저의 내면의 판단에 기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 그들은 개별자의 내면으로 사람의 의지의 작용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제 실존을 옮겨가기 위해 지금-여기에서 탈주한다. 그들은 탈주자들이다. 그들은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음을 희구한다. 김훈은 『칼의 노래』에서 이순신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죽음을 죽음으로써 각오할 수는 없었다. 나는 각오되지 않는 죽음은 두려웠다. 내 생물학적 목숨의 끝장이 두려웠다기보다는 죽어서 더 이상 이 무내용한 고통의 세상에 손댈 수 없게 되는 운명이 두려웠다."(2권, 55쪽) 그들이 즐겨 죽음을 인식적 소유물로 삼는 데서 그 희구는 무의식적으로 드러난다. 김훈 자신이 그렇고, 우륵과 이순신이 그렇다. 우륵과 이순신 들은 온갖 이데올로기와 대의명분의 허구와 위선을 꿰뚫어보고 당대와 불화하게 된 자가 불화와 그 불화의 결과인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음을 희구하는 저의 내면으로 탈주해버린다. 그들의 이름은 영웅의 그것이 아니라 탈주자의 기표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여기서 『칼의 노래』와 『현의 노래』가 영웅주의의 서사물이 아니라는 증거는 명백하다. 그 탈주의 끝은 어디인가 ? 소설가는 소설의 한 화자의 입을 빌어 묻고 또 한 화자의 입을 대답을 한다. 니문-독자는 우륵에게 묻는다. "떨림의 끝은 어디이옵니까 ?" 우륵-소설가는 답한다. "그 대답은 인간세(人間世) 안에 있지 않을 것이다. 떨림의 끝은 알 수 없되, 떨림은 시간과 목숨이 어우러지는 흔들림이다. 그래서 목숨은 늘 새롭고 새로워서 부대끼는 것이며, 시간도 그러하다."(140쪽)
― 김훈론
1. 김훈의 소설은 왜 읽기가 쉽지 않은가 ?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나는 아주 힘들게 읽었다. 그 소설을 읽는데 한달 쯤 걸린 듯 한데, 내 책읽기의 습관으로 보자면 매우 예외적인 현상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단숨에 읽었다는 사람을 만나면 괜히 주눅이 들었다. 내가 머리가 나쁜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던 것이다. 내가 그 소설을 힘들게 읽은 것은 이야기의 선조적(線條的) 진행에서 자꾸 곁길로 빠져나가 밑도끝도 없이 형이상학적 진술을 풀어내는 밀란 쿤데라의 서사 전략이 지루하고 낯설었던 탓이다.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장르의 경계가 희미한 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을 읽을 때도 다시 그 어려움은 되풀이되었다. 끼냐르의 소설은 줄거리가 아예 없거나 아니면 아주 어렴풋하고 모호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소설이다. 문장과 문장 사이를 연결하는 의미의 맥락은 아주 성글고,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단절과 휴지(休止)의 여백들이 가로놓여 있다. 핵심 언표들은 하나의 의미의 맥락으로 꿰어지지 않은 채 문장들 사이로 잘게 쪼개져 흩어져 있다. 끼냐르는 돈호법과 중단법이라는 기법으로 선조성(線條性)에서 벗어난 각각의 문장들에 여담의 주제들을 분배함으로써 이야기의 흐름을 의도적으로 분절하고 지연시킨다. 그때 문장 속에 흩어진 핵심 언표들은 전체 주제에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대신에 저마다의 소리를 낸다. 하지만 겁먹을 필요는 없다. 시간이 좀더 필요할 뿐이다. 나는 단상의 포식자가 되어 키냐르의 소설들을 천천히 씹어 삼킨다. 위에 언급한 두 소설이 나쁜 소설인 것은 아니다. 두 소설을 읽을 때 나는 여담의 서사적 전략에 대해 무지했던 것이다.
김훈의 소설도 읽기가 쉽지 않다. 이를테면 무수한 격언구들이 플롯의 중심축에서 떨어져 나와 저 혼자 놀고 있는 김훈의 첫소설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을 나는 끝까지 읽지 못했다.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에서 서사물에게 요구되는 규범적 얼개에 균열과 빈틈들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문장들은 최소한도의 의미의 접합력으로 이어져 문장과 문장 사이는 헐거웠다. 조급한 자는 그 헐거움을 견디지 못하고 소설을 삼분의 일쯤 읽다가 밀쳐뒀는데, 그 뒤로 서가에서 사라졌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 소설을 읽지 못했다. 나는 왜 그 소설을 끝까지 읽지 못했을까 ? 오래도록 그 까닭을 알지 못하다가 『현의 노래』를 읽다가 문득 그 까닭을 짐작할 수 있었다. 소설의 앞부분에서 독자들은 느닷없이 한 작중인물의 오줌누는 대목과 만난다. 무정형한 것으로 흩어져버리고 말 사소한 경험의 문체적 복원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대목이 그 깨달음을 일으킨 부분이다. "아라는 치마를 올리고 속곳을 내렸다. 엉덩이를 까고 주저앉아 가랑이를 벌렸다. 허벅지 안쪽에 풀잎이 스치자 팔뚝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아라는 배에 힘을 주어 아래를 열었다. 쏴 소리를 내면서 오줌줄기가 몸을 떠났다. 떡갈나무 마른 잎에 부딪칠 때 오줌줄기는 물방울로 흩어지면서 탁탁 튀는 소리를 냈다. 침전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불을 땔 때, 마른 삭정이가 타들어가는 소리와도 같았다. 덜 마른 밤나무 잎에 부딪힐 때 오줌소리는 젖어서 낮아졌고 돌멩이 위에 낀 이끼에 부딪힐 때 소리는 돌 속으로 스미자, 오줌줄기가 몸을 떠나서 쏴 ― 소리가 크게 울렸다. 몸속에서 살이 울리는 소리가 가랑이 사이의 구멍으로 퍼져나오고 있었다. 오줌을 눌 때마다 그 소리는 낯설고 멀게 들렸고, 소리를 내고 있는 살구멍의 언저리가 떨렸다. 아라는 놀라서 오줌줄기의 방향을 바꾸었다. 마른 잎이 찢어지고 흙이 튀었다. 아라는 가랑이를 벌려서 오줌줄기를 펼쳤고 가랑이를 오므려서 오줌줄기를 모았다. 땅은 부채 모양으로 젖었다."(52 ∼ 53쪽) 아마도 한국문학사에서 오줌누는 대목을 이렇듯 집요할 만큼 상세하게 공들여 묘사한 소설은 없을 것이다. 오줌 누는 소리는 "크게" 울리고, 오줌 줄기는 아주 거세서 그것이 가 닿은 "마른 잎[은] 찢어지고 흙[은] 튀"어 오른다. 생명 억압적인 세상을 향해 논리로 대항할 수 없는 존재가 무언의 몸짓으로 자기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자의 오줌 누기는 죽음-불모성의 운명에 대한 힘찬 도발이자 거역이라는 상징적 함의를 머금고 있다. 김훈의 소설에서 여성은 생명성의 원형이자 죽음-불모성에 거역하는 욕망의 시원이다. 하지만 이 오줌누는 대목의 세세한 묘사는 서사의 필연적 맥락과는 별 상관이 없다. 이 대목은 여담에 해당한다. 여담은 서사의 필연성이나 수사학의 잣대로 보자면 방향을 잃은 과잉의 일탈이다. 이런 일탈은 서사의 구조적 이완이며, 플롯의 단절과 휴지라는 효과를 일으킨다. 이것은 작가의 부주의함으로 빚어진 서술의 오류가 아니라 여담에 의한 완곡 어법이라는 의도적 전략으로 보아야 한다.
아라가 오줌 누는 장면은 이 뒤로도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묘사된다. 아라는 오줌을 눌 때마다 발랄한 현존으로 살아난다. 오줌 누는 대목이 작중 인물의 몸에서 작동하는 힘찬 생명 현상을 보여주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서사의 자연스런 선조적 흐름을 끊으면서까지 반복해서 묘사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 "아라는 속곳을 내리고 바위 밑에 쪼그려 앉았다. 흰 엉덩이에 달빛이 비치었다. 아라는 가랑이를 벌렸다. 오줌줄기가 가랑이 사이에서 터져 나올 때 아라는 으스스 몸을 떨었다. 맑은 오줌줄기에 달빛이 스몄다. 아라는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한 가닥으로 모아지는 오줌줄기가 떡갈나무 마른 잎에 부딪쳐 서걱거렸다. 잎이 뒤집히고 물방울이 튀었다. 몸속 깊은 곳이 떨렸다. 살의 떨림이 오줌줄기를 타고 몸밖으로 뻗쳤다. 오줌줄기는 몸 쪽으로 쏘아져 나오면서 잦아졌다. 아라는 앉은 채 발을 굴러 가랑이 사이의 오줌방울을 털어냈다."(61쪽) 김훈의 소설들에 등장하는 대다수의 여성 인물들은 개별자의 내면을 갖지 못한 채 타자적 현상에 머문다. 아라 역시 개별화되지 못한 본능의 덩어리, 혹은 동물성의 원형질에 가까운 그 무엇이다. 아라는 대상화의 영역에 머무를 뿐 주체가 되지 못한다. 아라는 자신이 왜 순장을 당해야 하는지를 모른다. 아라는 그 운명의 납득할 수 없음에 생명의 본능으로 탈주한다. 그 탈주의 출발점에서 아라의 첫 번째의 행위가 오줌 누기이다. 여전히 아라의 오줌줄기에 "잎[은] 뒤집히고 물방울[은] 튀"어 오른다. 주체가 되지 못한 채 금수와 다를 바 없는 감각의 원형질에 머문 생명이지만 그 움직임은 어떤 생명보다도 힘차다. 바로 그 생명의 힘찬 파동으로 권력과 제도가 끝내 포섭할 수 없는 개별화의 지점으로 나아간다. 생사가 엇갈리는 긴박한 탈주의 여로에서 생리현상에 몰입하는 아라의 모습은 생명의 생명됨에 대한 자존으로 일견 평화스럽고 성스럽기조차 하다. "아라는 뱃전을 붙잡고 고물 쪽으로 갔다. 변소는 선창 옆에 붙어 있었다. 짚으로 가리개를 쳐놓고 뱃바닥을 뚫어서 구멍 아래로 물이 들여다보였다. 배가 흔들릴 때 물은 구멍 위로 튀어올랐다. 아라는 속곳을 내리고 쪼그려 앉아 가랑이를 벌렸다. 아라는 힘을 주어 아래를 열었다. 강물이 튀어올라 허벅지 안쪽을 적셨다. 강물 위로 오줌줄기가 뻗어나갔다. 아라는 으스스 쳤다."(148 ∼ 149쪽) 여담은 담론이 핵심에서 벗어난 횡설수설, 혹은 곁가지 이야기이다. 담론의 중심과 통제에서 벗어난 여담의 운명이란 "자가당착·변덕·경박한 자의성·허술함·혹·주변부·깜짝쇼·길 잃은 방황"이다. 여담은 "묘사, 곁줄거리, 훈사, 삽입 텍스트" 등으로 분화한다. 여담은 서사의 장애물로 소설읽기를 지속적으로 훼방한다. 김훈의 소설에서 여담은 아주 중요한 서사의 전략이었던 것이다.
2. 여담의 서사적 전략
란다 사브리는 『담화의 놀이들』에서 여담, 즉 곁가지 이야기가 텍스트에서 수행하는 탈중심화의 전략에 대해 쓴다. 지금까지 "여담을 공인된 문학적 기법으로 간주하"는 책을 한번도 읽은 적이 없기 때문에 나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여담에 부여된 주변적 지위는 그것을 건너뛰어 읽어도 괜찮은 것으로 여겨왔다. 란다 사브리는 텍스트의 미적 통일성에 균열을 일으키며, 담론의 진로를 바꾸고 탈선을 조장하는 비이성적 객설에 작가 스스로도 미처 인지하지 못한 깊은 서사의 전략이 숨어 있음을 밝혀낸다. 란다 사브리는 여담에 대한 앙리 모리에의 사전적 정의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 "여담 : 작가가 주제에서 멀어져서 어떤 일화나 추억을 서술하고 풍경이나 예술 작품 등을 묘사하여 거기에 의외의 전개부를 제공하는 담화의 전략. 여담은 다양한 의도에 부응할 수 있다. 그것은 이야기의 여백에 있는 이야기이다. 1)여담은 너무 메마른 주제로 피로해진 독자가 기분을 전환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한다. 2)작가는 행복이나 불행을 예고한 후 초조하게 그것을 기다리고 있는 독자를 애태우기 위해 여담을 일종의 정지법으로 사용할 수 있다. 여담을 조심하라. 여담은 사건들의 끈을 놓치게 하고 줄거리의 통일성 깨뜨리며, 때로는 독자를 지루하게 만든다. 하지만 여담은 다뤄진 주제에 격렬하거나 침착하게 도달하기 전에 기분 전환, 긴장 완화를 창출하고자 하는 변론가나 변호사에게 유용할 수 있다."
문학 담론들에는 주제나 형식에 꼭 들어맞지 않은 다소의 일탈이 있기 마련인데, 그것은 담론의 미학적 규범을 해치는 것으로 규정된다. 플롯에서 임의적으로 일탈해서 "샛길로 빠지고 담장을 넘는" 이야기는 서사의 여러 요소들이 하나의 핵심을 향하여 정렬하는 응집력을 가져야 한다는 서사의 규범을 정면으로 위반한다. 비평가들은 텍스트를 분석할 때 직선으로 진행하는 주제의 운동만을 따라갈 뿐 주제의 응집력을 풀어헤쳐 놓고 직선에서 일탈하는 여담적 현상은 무시해버린다.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주제를 벗어나는 요소들에 대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다. 여담의 거부는 그것이 주제에서 비켜 서 있는 뜻없는 행위의 결과물이며, 그것이 텍스트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는 잉여의 부분이라는 논리로 정당화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현대까지 수사학과 문학 이론가들은 주제에서 벗어나는 여담을 해석적 독서에 방해물이 된다는 이유에서 단죄하고 추방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여담은 텍스트의 다성성(多聲性)과 비결정성을 높이 평가하는 현대 비평가들에 의해 그 가치가 재발견되었다.
여담은 담론이 나타난 태초에서부터 담론의 내부에 존재하는 요소이다. 담론의 미학적 규범들로 분류되는 "질서·목적성·필연성·일관성" 들은 텍스트의 완성도에 기여하는 "이성 중심적 가치들"이다. 이성 중심적 가치들에 반기를 드는 여담·수다·잡담들은 텍스트의 통제되지 않은 무정부적인 요소들, 즉 언제나 불필요한 잉여, 혹은 무질서의 과잉으로 여겨진다. 여담의 존재론적 표상과 형태들은 "황당한 연상, 기억의 공백과 장애, 다소간 유용한 삽입구들의 미친듯한 증가, 불쑥 떠오른 훌륭한 생각들, 방향 상실, 갑작스런 단절로 귀착되는 표류, 어쩔 줄 몰라 내뱉는 "내가 어디까지 했지 ?"라는 말" 등등이다. 한마디로 담론 내부에서 여담이란 하위 범주에 위치한 샛길로 빠지는 이야기, 쓸데없는 군더더기이다. 란다 사브리는 그 무가치한 것으로 평가절하되는 여담이 텍스트의 내부에서 담화의 전략으로 기능하는 것을 논리적으로 밝히고, 여담을 서사의 중요한 전략으로 복권해낸다. 란다 사브리가 여담을 주목하는 것은 "한 텍스트 안에서 어떤 것도 무의미하지 않고 어떤 것도 우연적으로 그냥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여담을 통해 에둘러가기는 김훈 소설의 한 특징이다. 이때 여담은 주제를 향한 직선적 지향성에 딴지를 걸고, 작품의 선조적 진행에 대해 훼방을 놓으며, 결말을 끊임없이 유예한다. 텍스트 안에 기생하는 작은 텍스트들을 보여줌으로써 독자의 긴장을 누그러뜨리고, 결과적으로 주제에서 벗어나 느슨하고 풀어헤쳐진 일탈의 순간을 향유하게 한다. 여담은 중심에 대한 주변부의 깐죽거리기이고, 이성에 대한 비이성의 조롱하기, 질서에 대한 무질서의 도발이다. 그것은 미숙한 글쓰기의 결과물이 아니라 서사의 과잉, 단절, 불연속의 전략이 낳은 산물이다. 여담은 텍스트와 곁텍스트, 안과 밖, 현실과 픽션의 경계를 옮기며 궁극적으로 서사의 배열법의 엄격한 위계의 질서를 흩어 놓는 것을 목표한다. 몽테뉴에서 마르셀 프루스트를 거쳐 밀란 쿤데라까지, 아니 『은밀한 생』을 쓴 파스칼 키냐르, 그리고 김훈에 이르기까지 텍스트가 여담으로 뒤죽박죽 헝클어지며, 그것의 여담의 본질적 성격인 파편성과 불연속성으로 텍스트를 희롱하는 즐거움과 이점을 잘 알고 활용한 작가들이다. 아직은 작품활동이 일천한 김훈은 동인문학상(2001)과 이상문학상(2004)은 거푸 거머쥐는데, 이는 여담적 작가의 탄생에 내린 한국문학의 축복이다.
3. 『현의 노래』의 경우
봉건 왕조 국가에서 왕과 국가는 상호규정적 관계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국가와 그 이데올로기의 특정한 요구에 부응할 수 없는 개별자는 그 중심에서 일탈한 자의 고립감과 무중력 상태를 내면화한다. 가야인 우륵은 신라의 왕 앞에서 금(琴)을 뜯는데, 금은 상호규정적 관계의 중력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에서 저 홀로 그 떨림과 자취를 밀고 나간다. 김훈은 그 대목을 이렇게 쓴다 ; "우륵은 금을 무릎에 안았다. 우륵이 오른손으로 맨 윗줄을 튕겼다. 소리는 아득히 깊었고, 더 깊고 더 먼 곳으로 사라져갔다. 우륵의 왼손이 사라져가는 소리를 들어올렸다. 소리는 흔들리면서 돌아섰고, 돌아서면서 휘어졌다. 우륵의 오른손이 다음 줄을 튕겼다. 소리는 넓고 둥글었다. 우륵의 왼손이 둥근 파문으로 벌어져가는 소리를 눌렀다. 소리는 잔무늬로 번지면서 내려앉았고, 내려앉는 소리의 끝이 감겼다. 다시 우륵이 세 번째 줄을 튕겼다. 소리는 방울지면서 솟았다. 솟는 소리를 우륵의 왼손이 다시 들어올렸다가 내려놓았다. 내려놓고 더욱 눌렀다. 소리의 방울이 부서지면서 수많은 잔 방울들이 반짝이며 흘러갔다. 다시 우륵의 오른손이 맨 윗줄을 튕겼다. 깊고 아득한 소리가 솟았다. 솟아서 내려앉는 소리를 우륵의 왼손이 지웠다."(264쪽) 이 대목을 읽을 때 나는 그 절제된 아름다움에 문득 숨을 멎는다. 금의 소리가 발화되는 이 대목의 묘사에 작가는 오래 공을 들이는데, 주인이 따로 없고 "본래 스스로 흘러가"며, 본래는 있되 눈앞에는 "없는 세상을 열어내는 것"(251쪽)이란 소리의 운명에 순응하며 가야에서 신라로 흘러온 일흔 노인의 복잡한 감회를 그 묘사에 실어 나른다.
김훈은 칼에 의탁해 사는 자의 고단함과 슬픔을 쓴 데 이어, 악기에 의지해 제 삶을 견인하는 자의 비통함과 적요에 대해 쓴다. 『현의 노래』가 그것이다. 하지만 악기와 그것에서 울려나오는 소리로써 생계를 세우고 제 생의 불우함이 지닌 무게를 덜어내며 한 시대를 건너가는 악사의 이야기는 뒷전으로 물러나고, 서사의 전면에는 전장에서 도끼와 칼에 으깨지고 베어지며 죽은 자들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살점과 유혈의 비릿한 내음으로 자욱하다. 악기가 꿈꾸는 세상이나 병장기가 꿈꾸는 세상이 하나라는 뜻일까 ? 작중인물이 이순신에서 우륵으로 바뀌고, 시대 배경도 다르고 이야기도 다르지만, 두 소설은 아름다운 것은 필경 소멸하며, 소멸의 운명 속에서 산 자들의 삶은 덧없다, 는 한 주제로 맞닿아 있다.
악기는 사람의 몸이 내는 소리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열망이 낳은 도구이다. 사람들은 악기로써 제 한 몸이 빚어내는 희로애락을 표현하고 그것의 덧없음을 위로한다. 악기의 소리는 사람의 손과 입에 도움을 받아 소리를 울려내되 소리의 영역과 경계를 넓고 깊게 만들어 사람에게 되돌려준다. 몸과 함께 세상으로 나아가는 병장기가 호신(護身)과 공격의 도구로 운명의 불확정성을 최소화하는데 기여한다면, 악기는 사람 마음의 깊은 데서 울려나오는 소리의 개별성과 경계를 확정지으며 없는 세상을 열고 그 세상으로 삶을 견인하는 도구이다. 그 둘은 생명의 강령을 받들어 사람의 결핍을 보완하고 몸과 마음을 두루 이롭게 하는 도구로서의 소명을 다한다. 몸이 먼저이고 도구는 나중이었으되, 그것들은 몸에 기꺼이 굴복한다. 우륵이 적막의 끝 쪽을 향해 귀를 기울이다가 "몸속의 소리가 이리도 아득하니....... 멀어서 들리지 않는 소리가 몸속을 흘러가는구나. 아, 나는 살아 있구나."(83쪽)라고 독백할 때 소리는 악기 이전의 것으로 몸에 부속된 것임을 분명히 한다. 몸과 악기가 별개의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몸속의 소리를 받기 위해 악기가 뒤따른 것이다. 소리는 악기에게 와서 그 존재를 드러내며, 울림으로써 산 자의 생을 현재화하고 실감으로 살려낸다. 사람의 나고 죽음이 그러하듯 소리의 생멸도 가뭇없는 것이다. 소리의 발생과 사라짐 사이의 인과관계는 명료하지만 그 근원은 사람의 생의 근원이 그러하듯 아득하고 모호하다. 늙은 악사의 지혜에 의하면, 몸으로 된 생과 소리는 겹쳐지며 그 영고성쇠의 운명을 함께 한다 ; "몸은 소리에 실려, 없었던 새로운 시간 속으로 흘러나갔고, 흘러나간 몸이 다시 돌아와 줄을 당겼다."(264쪽) 이런 구절들은 불가피하게 소리의 발생과 그 덧없는 사라짐을 통해 산 것들의 생을 무한 중력으로 끌어당기는 허무를 각인하려는 소설가의 조급증을 드러낸다.
『현의 노래』는 소리의 발생의 내력과 그 순환의 궤도를 따라가지 않는다. 비록 작가가 소리의 현존과 그 울림들이 지어내는 마음의 가역반응을 그리는데 많은 공을 들이지만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펼쳐진 넓고 두터운 관계망 위에서 홀연 솟아났다가 사라지는 개별자의 운명의 덧없음에 대한 소설가의 편애 때문에 뒷전으로 밀려난다. 소설가는 우륵이나 제자 니문이 금(琴)에 의탁해 세상에 나아갔으나 금과 함께 하는 삶의 굴곡과 음영을 그리는 데 태만하다. 그들은 문득 서사의 중심에서 비켜선다. 그 대신에 서사의 중심에 있는 것은 소리이다. 소설가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이끄는 것은 소리의 자취와 떨림이다. 소리는 저 홀로 일어서서 홀로 저의 길을 가다가 저 홀로 스러지는 것의 한 상징이다. 소리는 왕의 것도 아니며 국가에 귀속되지도 않고, 홀로 자유롭다. 땅위의 모든 것이 왕의 것이고, 국가의 자산으로 귀속되는 시대에도 소리는 왕의 길과 무관한 독자적 내면과 소명을 따른다. 소리는 울릴 때만 소리일 수 있으며, 사람들이 "그 덧없는 떨림에 마음을 의탁해"(139쪽) 저의 삶의 덧없음을 견디는 방식으로서만 유효하다. 소설가는 소리의 발생의 근본과 그것이 흘러가는 자취를 집요하게 따라가며 묘사한다. 가야가 망하기 직전 우륵은 신라에 귀순해 제 삶을 의탁하며 우륵은 말한다. "나를 그저 내버려두시오. 신라가 가야를 멸하더라도, 신라의 땅에서 가야의 금을 뜯을 수 있게 해주시오. 주인 있는 나라에서 주인 없는 소리를 펴게 해주시오."(252쪽) 소리는 경계를 가로질러 어디든지 간다. 그것은 어떤 제도나 이념으로 묶어둘 수 없는 자유자재의 것이다. 소리의 운명에 우륵의 삶이 겹쳐지며 한 길을 간다. 가야인 우륵이 신라로 망명하는 것이 현실과의 타협이 아니다. 그게 소리의 소명에 제 삶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장인이 따라야할 자연의 법인 것이다.
소설의 전반부는 가야의 늙은 왕 곁에서 시중을 드는 시비(侍婢)인 아라에게 초점이 맞춰진다. 아라는 순장될 제 운명에 거역하고 궁을 빠져나와 탈주한다. 소설의 전반부가 힘차고 생기 있는 것은 아라의 도주의 동선(動線)을 따라 힘차게 굽이쳐 가기 때문이다. 병들고 노쇠해 겨우 생을 이어가는 왕과 쇠멸의 기미를 드러내는 가야 왕국의 국운은 한데 겹쳐진다. 아라는 노쇠와 쇠멸이 기미에 대한 생명의 도발이다. 생명을 인위적으로 끊고 죽이는 순장의 관례는 미개하며, 그 미개함으로 개별자를 억압하는 권력의 권능이 무소부재로 편만해 있는 국가는 부도덕하다. 국가에 불복종하며 제 생을 저 낯선 시간 속으로 밀고 나아가는 아라의 현존은 위기에 빠진 현존이지만, 저의 생명을 탈취하려는 왕과 국가에 맞선 발칙한 생기로 빛난다. 그 생기는 산 자를 죽은 자와 함께 매장하는 전근대적 국가의 야만성에 맞서는 산 자의 본능에 내장된 강령의 신성한 굳건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김훈의 소설에서 흔히 여성들은 주체로 서지 못한 비이성적 감각의 존재이다. 아라는 이성의 기획이 아니라 본능 위에 제 실존을 세우는 살아 있는 것의 대표적 기표이다. 본능은 자연의 능력이다. 김훈은 허무에 침윤되지 않는 아라를 통해 자연의 생생함을 그려낸다. 아라는 날것의 정보로 들어온 자연에 의해 감각의 외연이 확대되고 마침내 인식론적 깨달음의 영역으로 넘어가며 존재의 질적 변환을 겪는다. 소설가는 그 순간의 놀라움을 이렇게 묘사한다. "아, 여기가 세상인가, 아라는 세상이 놀라워서 바람이 스치는 팔에 소름이 돋았다. 이것이 물이로구나, 물은 길고 넓고 멀어서 저편 끝에서 하늘에 닿는데, 물은 흘러서 바람과 같구나, 바람이 사람을 밀고 물이 사람을 띄워서 사람이 바람에 흘러가고 산들도 출렁거리면서 잇닿는구나, 바람이 몸속으로 불어 들어와 몸이 세상으로 퍼지고 산과 강이 몸속으로 스미는구나."(146쪽) 아라는 우륵과 니문 일행과 우연히 만나 제 삶을 땅의 중력으로 정착하려고 할 즈음 돌연 붙잡혀 죽은 태자와 함께 순장됨으로써 소설 무대에서 퇴장한다.
소설의 후반부를 잇는 것은 신라의 장수 이사부이다. 이사부는 군대와 병장기에 의존해 가야의 여러 고을들을 쓰러트리고 백제와 고구려를 물리쳐 신라의 영토를 넓혀간다. 많은 세월을 전장에서 보내지만 이사부는 우주의 섭리와 자연의 변화 속에서 나고 죽는 일을 반복하는 생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전장의 철학자이다. 하지만 가야에서 신라로 귀순하는 악사 우륵은 살리되, 가야인으로 가야에 반역하며 신라를 도운 대장장이 야로 부자(父子)는 부하를 시켜 칼로 베어버리는 대목에서 칼의 진리에 제 생을 의탁하는 무신의 비정함이 드러난다. 왕이 중심인 국가에서 전장은 변방이며, 지리적 이격(離隔)의 소외감에 순응하며 전장에서 늙는 이사부는 운명적으로 변방의 인물이다. 이사부는 기질적으로 변방의 운명에 이끌리는 소설가의 편애와 지지를 받는다. 이사부는 김훈이 그려낸 이순신의 정체성과 그 내면에서 겹쳐지는 동일자이며, 그 외면에서는 변주라 할 만하다. 서사의 전반부와 후반부는 이야기는 불연속적으로 끊겨 있다. 이 단절을 가까스로 접합하며 이어가는 것은 가야의 늙은 악사인 우륵과 니문, 혹은 가야의 풍부한 쇠들로 병장기를 제조해서 이사부의 군사를 돕는 야로 부자의 이야기들이다.
어쩌면 『현의 노래』의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빛과 소리와 냄새이다. 빛과 소리와 냄새들은 그것들의 본디 있던 자리에서 질펀하게 번져 나와 사람의 감각 기관에 비벼대며 이야기의 현전(現前)을 이끌고, 서사에 실감과 부피를 불어넣는다. 김훈은 이렇게 쓴다 ; "비화의 날숨에서는 자두 냄새가 났다. 잠에서 깨어나는 아침에, 비화의 입속에서는 단감 냄새가 났고, 잠을 맞는 저녁에는 오이 냄새가 났다. 귀 밑 목덜미에서는 잎파랑이 냄새가 났고 도톰한 살로 접히는 겨드랑이에서는 삭은 젖 냄새가 났다. 바람이 맑은 가을날, 들에서 돌아온 비화의 머리카락에서는 햇볕 냄새가 났고 비 오는 날에는 젖은 풀 냄새가 났다. 비화의 가랑이 사이에서는 비린내가 났는데, 그 냄새는 초승에는 멀어서 희미했고 상현에는 가까워지면서 맑았고 보름에는 뚜렷하게 진했고 그믐의 가까우면 다시 맑고 멀어졌다."(63쪽) 우륵의 처인 비화는 냄새의 생생함 속에서 살과 피를 얻는다. 소리가 그러하듯 냄새 역시 한번 사라지면 가뭇없다는 점에서 생의 덧없음에 대한 은유이다. 덧없는 것에 실감을 부여하려는 소설가의 몸짓은 허망하다. 그 허망함을 글로써 증명하려는 게 소설의 운명이다.
김훈의 소설은 대체적으로 미학적 소명이 서사의 규범에 우선한다. 『현의 노래』는 인물과 인물 사이에 인과론적인 핍진성이 희박하고,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의 종속과 대등절의 헐겁고 느슨한 이음 때문에 독백의 범람으로 다가온다. 인물과 인물 사이, 혹은 이야기와 이야기의 단절된 틈으로 잠언들이 흘러간다. 이를테면 이런 잠언 ; "소리는 제가끔의 길이 있다. 늘 새로움으로 덧없는 것이고, 덧없음으로 늘 새롭다."(285쪽) 김훈의 소설은 여담의 잦은 끼어들기로 인해 서사 구조의 이완과 불균형을 초래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소설이 잘 읽히는 것은 잠언들과 문체에 구현된 소설가의 도저한 미적 자의식이 얼개의 성김을 넘치게 메꾸는 까닭이다. 독자들은 서사구조의 성김에 투덜거리기 이전에 김훈 문체의 놀라운 탐미성과 활력으로 보상받는다.
4. 『칼의 노래』의 경우
탄핵 소추 중인 대통령 노무현이 『칼의 노래』를 읽는다고 화제가 되었다. 착잡한 심경에 있을 노무현은 왜 굳이 『칼의 노래』를 붙들고 있는 것일까 ? 위정자들은 왜 이순신을 좋아할까 ? 박정희도 이순신을 좋아했다. 세종로 한 복판에 이순신의 동상을 세우고 현충사를 성대하게 중건한 게 바로 박정희다. 어디 그뿐이랴 ! 『난중일기』 국보지정, 이순신 이야기의 교과서 등재, 현충사의 성역화, 현충사의 국민 참배와 수학여행 의무화, 탄신 기념일 제정, 국가 제사 등 박정희의 머릿속에서 기획된 이순신 성웅화는 국가적으로 뻑적지근하게 진행한 일종의 국민 의식개조사업의 일환이었다. 박정희가 이순신을 성웅화한 것은 저의 존재 위에 이순신이 가진 구국 영웅의 이미지를 덧씌워 그것을 무단 전유하려는 무의식의 욕망 때문이다. 박정희의 이순신과 노무현의 이순신은 한 인물이되 다르다. 전자가 성화(聖化)된 이순신이라면, 후자는 생사와 존망의 위기 속에서 모멸과 치욕으로 살이 저며지는 저의 처지를 차가운 이성으로 관조하는 인간 이순신이다. 『칼의 노래』 속에서 이순신은 말한다 ; "알 수 없었고 벨 수 없었고 조준할 수 없었다. 벨 수 없는 것들 앞에서, 나는 다만 적의 종자를 박멸하려 했다."(1권, 71쪽) 이건 영웅의 입에서 발음될 수 있는 말이 아니라 제 운명에 버거움을 느끼는 범부의 입에서나 나올 수 있는 말이다. 여기에는 무(武)를 천하에 펼쳐 난세를 치세로 평정하려는 대의는 없고, 오로지 제 운명의 버거움을 힘겹게 헤쳐나가는 자의 버거움만 강조되어 있다. 대타적 세계와의 되먹임의 고리가 끊긴 곳에 실존의 자리를 세운 자는 필경 허무주의자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만인 대 일인의 전쟁에서 만인을 상대하는 일인은 고립감과, 그 고립감으로 체화된 실존적 허무를 피할 수 없는 까닭이다. 때때로 허무주의자는 생존상의 가치가 결여된 선택과 행동으로 나아간다. 왜 상대를 베야 하는지 모른 채 적을 베는 자의 도덕은 그 허무주의자의 무도덕이다. 이순신이 허무주의자라는 물증은 뚜렷하지 않다. 다만 이순신은 히데요시의 칼끝과 조선 조정의 칼끝 사이에서 제 한줌 생존이 겨우 숨쉬고 있다는 투명한 자각을 저의 무도덕 위에 세울 뿐이다.
김훈의 『칼의 노래』는 이전의 이순신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설이나 영화와는 크게 다르다. 김훈의 이순신은 인간 이상으로 비범하게 부풀려진 "성웅(聖雄)"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실물대의 "인간"이다. 이순신의 인간 됨은 몸을 고되게 부린 뒤에 나타나는 식은 땀과 저절로 흘러내리는 코피에서 풍부한 실감을 얻는다. 그것의 절정은 감각의 생생한 현존 속에서 보다 선명하게 나타난다. 전장에서 너무나 많은 시체들이 썩는 냄새에 멀미를 느낀 이순신은 포유류의 누린내를 감당하기 버거워하며 한동안 고기를 먹지 않는다. 세상에는 생을 버겁게 만드는 얼마나 많은 누린내들이 범람하는가 ! 이순신은 그 누린내들 속에 고립무원으로 내동댕이쳐 있다. 타자와 세계는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맡는 시각 청각 촉각 후각 기관에 밀려와 저의 있음을 증명해낸다. 감각 기관들에 비벼지는 그 물성에 의해 생물의 감각은 환하게 열린다 ; "내가 바다에 당도했을 때, 연안의 바람은 끈끈했고, 간고등어 썩는 냄새가 자욱했다."(1권, 21쪽) 특히 후각 기관을 자극하는 온갖 냄새들은 이 소설 전편을 덮는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그 점은 두드러진다 ; "전선들이 다가오자 연기 냄새는 더욱 짙었다. 죽은 여진의 가랑이 사이에서 물컹거리던 젓국 냄새와 죽은 면이 어렸을 때 쌌던 푸른 똥의 덜 삭은 젖냄새와 죽은 어머니의, 오래된 아궁이 같던 몸냄새가 내 마음속에서 화약 냄새와 비벼졌다."(1권, 156쪽) 오감에서 감각적 질료의 지각이 탄생한다. 아무것도 믿을 게 없고 의지할 게 없이 고립에 처한 인간에게 저의 오감은 인식의 세계에 가 닿을 수 있는 유일한 매개이자 의지처다. 그 감각의 매개에 의해 지각이 열리고, 그 지각 속에서 나와 세계의 있음과 있어야 함의 상호적 관련은 추상과 관념의 껍질을 벗고 드러난다.
이순신은 저의 바깥에서 출렁이며 밀려오는 죽음의 물결을 향해 칼을 겨누지만, 그것은 벨 수 없는 적이다. 또한 그 적의 적의의 근본은 모호하다. 더 무서운 것은 적의는 모호하되 피아(彼我) 간에 맡은 바 소임은 자명하다는 사실이다. 그 자명함의 전면에서 이순신은 삶이 그 근본으로 가진 모호한 관념과 추상 때문에 진저리를 친다 ; "임진년의 바다에서는 알 수 없는 일이 많았고, 지금도 역시 그러하다. 가장 확실하고 가장 절박하게 내 몸을 조여오는 그 거대한 적의의 근본을 나는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었으나, 내 적이 나와 나의 함대를 향해 창검과 총포를 겨누는 한 나는 내 적의 적이었다. 그것은 자명했다. 내 적에 의하여 자리매겨지는 나의 위치가 피할 수 없는 나의 자리였다."(1권, 71쪽) 이순신이 느끼는 혼돈과 모호함은 저를 둘러싸고 있는 힘들의 예측불가성과 맹목성에서 비롯된다. 이순신의 실존은 그것들 속에 포박되어 있다. 그 포박 속에서 이순신은 알 수 없는 바깥의 힘과 의지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압력 속에서 저의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의지대로 움직인다.
젊은 왜군 포로를 앞에 두고 신문하며 갈등할 때 이순신의 인간됨은 또다시 섬광처럼 드러난다 : "내 속에서 나 아닌 내가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아베를 죽여서는 안 된다는 울음과 아베를 살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울음이 내 몸 속에서 양쪽 다 울어지지 않았다. 몸 속 깊은 곳에서 징징징 칼이 울었다."(1권, 175쪽) 갈등은 사유하는 자의 몫이고 사유는 인간됨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칼은 인간의 사유에 따르지 않고 저의 타고난 바 숙명대로 움직인다. 칼의 움직임을 칼의 숙명으로 용납하지 않을 때 그 칼은 적이 되어 나를 벤다. 먼저 베지 않으면 제가 베이는 게 칼의 숭고한 운명이다. 칼은 피아와 선악을 분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칼이 따르는 강령은 무도덕이다. 칼은 베는 것으로 저의 소임을 다한다. 분별하는 것은 칼의 몫이 아니고 사유하는 인간의 몫이다. 칼을 든 자는 존망의 기로에서 사유를 가로질러 나아가는 칼의 무도덕을 비극으로 체화한다. 그 순간에 일어나는 사유는 잉여적인 것일 따름이며, 감정의 사치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지 않는 개별자의 내면을 가진 이순신의 비극은 두 겹이다. 그 하나는 전쟁에 함몰된 자가 칼의 원리에 따르지 않고 사유의 원리에 제 삶을 비끄러매려는 헛된 시도를 하는 것이고, 그 두 번째는 봉건 왕조제의 어둠 속에서 너무 일찍 근대적 자아의 횃불을 들고 나아가려고 한 점이다. 따라서 이순신의 곤경은 자업자득이다. 제 생의 경영을 오로지 저의 책임 아래 두려고 했다는 점에서 이순신은 명약관화한 그 곤경을 스스로 불러들인 셈이다. 이순신은 제가 선택한 곤경이 칼로 베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죽음을 선뜻 받음으로써 그 책임의 전부를 제 실존으로 수납한다.
『칼의 노래』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이순신의 모습은 사유하는 인간이다. 이순신은 칼에 제 운명을 기대면서 그 칼과 길항하는 사유에 깊이 침윤됨으로써 파국에 필연의 중력을 부여한다. 이순신은 임금의 명령에 따르되 맹목적인 종속은 거부한다 ; "나는 다만 임금의 칼에 죽기는 싫었다. 나는 임금의 칼에 죽은 죽음의 무의미를 감당해 낼 수 없었다."(1권, 71쪽) 그것은 주체의 선택과 행동의 원리를 타자에게서 구하지 않고 자율성이라는 규범의 확대를 통해 실현하려는 근대인의 자아에 합당한 자의식의 발현이다. 전근대의 세계에서 근대인의 자의식으로 살려는 자는 당대 권력에 대한 반동으로 튕겨나간다. 임금이 이순신에게 수군통제사를 맡기면서도 끝까지 신임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조선 조정도 이순신이 충(忠)의 이데올로기에 무조건적으로 복무하지 못하는 사람, 다시 말해 봉건 왕정제 시대의 신하로서는 불충한 근대적 자의식으로 가득 찬 사람이라는 걸 꿰뚫어 본 것이다. 이런 이순신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소통할 수 없는 세계 속에서 저의 실존적 의미를 저의 사유의 힘만으로 일구어내려는 근대적 이성의 탄생을 엿본다. 김훈의 『칼의 노래』는 너무 일찍 근대적 자의식을 품은 자가 부르는 절망과 환멸의 노래다. 아니다. 김훈의 바로크적 과잉을 지양하는 비장식적인 문체 속에서 절망과 환멸은 날줄과 씨줄로 소설이라는 피륙을 짠다. 그렇게 짠 피륙 속에서 울려나오는 것은 노래가 아니라 울음이다. 실존적 갱신의 한계에 부닥쳐 절망과 환멸로서 성대를 울리는 것은 노래가 아니라 울음이라는 게 논리적으로도 맞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노래"가 아니라 "울음"으로 읽혀야 마땅하다.
5. 탈주의 마지막 풍경
김훈은 이 소설들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 우선 김훈은 국가와 그 권력에 포섭되지 않는 개별자의 내면에 주목한다. 이순신과 우륵, 그리고 아라는 표면에서 국가와 그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지만, 개별자의 내면에서는 그것에서 이반(離反)한다. 그들은 국가와 그 이데올로기로부터, 순장으로부터, 죽음으로부터 끊임없이 탈주한다. 그들은 국가의 내부로 포섭되지 않고 바깥으로 미끄러져 나가며, 그렇게 함으로써 실존의 정체성을 외부적인 것, 소수, 주변부에 둔다. 그들에게 탈주의 운명은 불가피한 것이다. 그 탈주는 이중의 배반의 산물이다. 그 하나는 다수가 따르는 대의명분과 인습에의 배반이며, 다른 하나는 개별자의 내면에서 나오는 자율성을 악으로 규정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배반이다. 일체의 외부적 구속에의 저항과, 개별자의 내면에 가해지는 도덕적 압력에 대한 반동에서 허무주의의 근본적 성격을 찾는다면, 김훈의 소설은 허무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훈의 소설들은 욕망의 덧없음, 더 나아가 나고 죽는 것, 즉 생멸의 무의미함을 말할 때 치열해지며 생기가 돈다. 김훈의 문체가 죽음과 만날 때 도달하는 삼엄한 아름다움은 멸절하는 것들에 영원성을 덧씌워 드러내려는 소멸과 허무의 미학의 한 정점이다.
때로 김훈은 잔혹한 리얼리스트이다. 『현의 노래』의 도입부에서 만나는 순장의 묘사는 장엄하면서도 냉혹하다. "왕의 관이 석실로 내려올 때, 문무의 두 순장 중신들은 흰 수염을 가지런히 하고 눈을 감았다. 군사들이 석실이 돌뚜껑을 덮을 때 쇠나팔이 길게 울렸다. 순장자들의 구덩이마다 배치된 군사들이 일제히 돌뚜껑을 들어올려 구덩이를 덮었다. 구덩이를 덮을 때, 울음소리나 비명소리가 한 줄기도 새어나오지 않으면, 백성들은 그 적막을 죽은 왕이 덕으로 칭송했다. 간혹 구덩이 뚜껑을 덮을 때 흑, 흑 젊은 여자들의 웃음인지 비명인지가 새어나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 불경하고 요망한 일을 입에 담지 않았다. 또 돌뚜껑이 덮이는 순간, 뚜껑을 밀치고 구덩이 밖으로 뛰쳐나오려는 자들도 더러는 있었다. 군사들이 달려들어 몽둥이로 사지를 부러뜨려 구덩이 안으로 밀어 넣었는데, 그 일도 사람들은 애서 기억하지 않았다. 때로는 장례 전날 밤, 소복을 입은 채 달아난 처녀들도 있었다. 군사들이 갈대숲과 바위 틈을 뒤져 처녀들을 붙잡아 여러 토막으로 베었다. 군사들은 처녀의 몸 토막을 우물에 던지고 흙으로 메웠다. 처녀들의 부모들이 쇠터의 노비로 끌려갔고 살던 집을 헐렸다. 처녀들의 도망은 없었던 일로 바뀌었는데, 세월이 지나도 사람들은 그 참람한 일을 일절 입에 담지 않았다."(15 ∼ 16쪽) 순장에 대한 꼼꼼한 묘사는 일견 권력과 제도의 야만스러움을 소름끼치도록 사실적으로 보여주려는 것 같다. 산 자들을 구덩이에 처박거나, 뛰쳐나오려는 자들의 사지를 부러뜨리거나, 도망간 자들을 붙잡아 몸을 토막내는 순장 관습의 가차없음과 무자비함을 드러내는 문체는 전형적인 리얼리스트의 문체이다. 순장 관습은 사람이 사람에게 저지르는 폭력의 가장 극악한 한 형태이다. 그것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권력의 처지에서 보자면 순장에 저항하며 벗어나려는 산 자들의 일체의 기획은 "불경하고 요망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듯 권력과 제도는 자연 그대로의 있음을 지배/피지배의 구도 속으로 포섭해서 제약하고 생명의 약동을 탈취하는 억압기제이다. 권력과 제도 앞에서 그것에 포섭되기를 거부하는 개별자의 내면은 무력하다. 그 무력감 속에서 우연적 존재에서 필연적 존재로, 즉자적 존재에서 대자적 존재로 전환할 수밖에 없는 게 개별자의 운명이다. 그 개별자들에게 이 세상은 아수라의 지옥이다. 이때 주체에게는 두 개의 선택지가 있다. 하나는 아수라의 지옥에서 탈주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 안에서 버티고 견디는 것이다. 『현의 노래』에서 아라가 탈주의 길을 택한다면, 우륵과 니문은 소리의 위안에 기대어 아수라의 지옥에서 사는 것의 덧없음을 잠재우려 한다. 『칼의 노래』에서 이순신은 우륵과 니문이 그랬듯 저와 운명을 함께 하는 칼에 의탁해 그 덧없음을 버티고 견뎌낸다.
인간은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이다. 삶을 추동하는 욕망은 그 자체로 옳거나 그르거나 하는 선악의 분별과 가치판단 너머에 있는 것이다. 『칼의 노래』나 『현의 노래』에서 가장 빛나는 대목은 욕망의 덧없음으로 묘사할 때이다. 욕망의 덧없음은 주검의 풍경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주검이란 욕망을 소진한 자의 몸이 아닌가 ? 죽음 앞에서 구차하게 생의 며칠을 도모하기 위해 국물로 제 창자를 덥히는 산 자의 욕망은 참담하고 비루하거나 ; "아라는 재첩국 국물을 왕의 입속으로 흘려 넣었다. 앞니가 모두 빠진 왕의 입속은 캄캄했고 그 어둠 속에서 시궁창 냄새가 피어올랐다. 재첩국 국물은 그 어둠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국물을 넘길 때, 왕의 목울대가 흔들렸다. 국물은 왕의 마른 창자에 스몄다. 엷고도 아득한 국물이었다. 아득한 국물은 창자 굽이굽이와 실핏줄 속으로 깊이 스몄다. 국물은 연기처럼 퍼졌다."(40쪽), 여자의 구멍에 제 정기를 쏟아내는 남자의 욕망은 여자의 몸이 그렇듯 모호하고 정처 없으며, 아울러 허무하고 하염없다 ; "여자들의 비릿하고 물컹거리는 속살을 야로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 속살들은 늘 깊이를 알 수 없이 모호했고 정처 없어 보였다."(112쪽), "이 질퍽거리는 구멍은 대체 무엇인가. 이 빨아당기는 속살이 어째서 왕의 무덤 속에 들어가 쇠와 함께 썩어야 하는가. 야로는 식음땀을 흘리며 기진맥진하였다."(117 ∼ 118쪽) 산 자의 질척거리는 욕망의 비루함에 비해 꽃, 물, 갈대, 바다, 바람 따위의 자연이 보여주는 무욕한 풍경은 그 뜻없음의 의연함으로 생기를 뽐낸다. "사람과 말의 시체들이 뒤엉켜서 썩어가고 있었다. 엎어진 시체의 겨드랑이나 사타구니 틈으로 봄풀이 돋아 올라 흰 꽃을 피우고 있었다. 꽃들은 바람에 흔들렸다. 독수리가 파먹던 창자에 구더기가 슬어 날벌레들이 들끓었다. 갈대숲 속에는 더 많은 시체들이 물을 향해 머리를 처박고 죽어 있었다. 시체들은 머리가 깨어졌거나 옆구리가 터졌고, 등판이 화살이 박혀 있었다. 싸우던 군대들이 물러간 저녁 무렵에 부상자들은 물가로 기어나와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나서 죽은 모양이었다. 부상자들이 기어온 자리를 따라서 갈대가 쓰러져 있었다. 들판의 북쪽 언덕에 저수지가 있었고 저수지 뒤쪽은 야산이었다. 시체는 저수지 뚝방과 수로를 뒤덮고 산속에까지 널려 있었다. 저수지에는 주름지는 봄 물 위에 수련의 새잎이 빛났고 굵은 붕어들이 물 위로 치솟았다."(30 ∼ 31쪽) 몸의 불투명성과 실존의 비결정성은 몸의 죽음과 함께 하나의 타자적 현상으로 영원히 고착되고 봉인되어버린다. 몸이 살아 있을 때 누린 감각의 향연, 감각의 사치는 이 주검들 위에서 신기루처럼 어른거린다. 몸에서 욕망이 떠나자 주검은 무욕한 자연의 일부로 귀속한다. 주검은 자연과 한데 어우러져 풍경의 고요한 아름다움에 도달한다. 주검들의 겨드랑이나 사타구니 틈으로 봄풀은 돋아 올라 흰 꽃을 "피우고" 바람에 "흔들렸다." 시체가 널려 있는 저수지에서 새로 돋은 수련의 새잎은 "빛났고" 몸피를 키운 굵은 붕어들은 물 위로 "치솟았다." 존재를 꽃 피우고, 흔들리며, 빛나고, 치솟는 것은 모두 자연에 속하는 것들이다. 자연은 스스로의 있음 속에서 신생을 이루며 유구한 존재임을 보여준다. 그 자연에 군림하며 욕망으로 떨던 인간들은 주검으로 엎어져 썩어간다. 주검으로 썩어가며 몸의 욕망의 비루함과 몸의 욕망의 덧없음을 증거한다.
김훈은 "나는 내 당대의 어떤 가치도 긍정할 수 없었다."(『칼의 노래』, 책머리에)고 그 도저한 부정과 허무의 정신을 새기고 있다. 이 부정과 허무의 정신의 바탕에는 이보다 더 나쁜 세상은 없다,는 판단이 굳건하게 들어서 있다. 김훈의 인물들의 탈주 동기는 낙원에의 열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보다 더 나쁜 세상은 없다는 확신에서 비롯된다. 개별자의 내면과 저의 심미적 본능을 절대화하는 것은 당대 가치들에 대한 지독한 회의와 부정의 산물이다. 아무것도 믿고 따를 게 없다면 저의 감각과 느낌, 저의 내면의 판단에 기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 그들은 개별자의 내면으로 사람의 의지의 작용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제 실존을 옮겨가기 위해 지금-여기에서 탈주한다. 그들은 탈주자들이다. 그들은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음을 희구한다. 김훈은 『칼의 노래』에서 이순신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죽음을 죽음으로써 각오할 수는 없었다. 나는 각오되지 않는 죽음은 두려웠다. 내 생물학적 목숨의 끝장이 두려웠다기보다는 죽어서 더 이상 이 무내용한 고통의 세상에 손댈 수 없게 되는 운명이 두려웠다."(2권, 55쪽) 그들이 즐겨 죽음을 인식적 소유물로 삼는 데서 그 희구는 무의식적으로 드러난다. 김훈 자신이 그렇고, 우륵과 이순신이 그렇다. 우륵과 이순신 들은 온갖 이데올로기와 대의명분의 허구와 위선을 꿰뚫어보고 당대와 불화하게 된 자가 불화와 그 불화의 결과인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음을 희구하는 저의 내면으로 탈주해버린다. 그들의 이름은 영웅의 그것이 아니라 탈주자의 기표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여기서 『칼의 노래』와 『현의 노래』가 영웅주의의 서사물이 아니라는 증거는 명백하다. 그 탈주의 끝은 어디인가 ? 소설가는 소설의 한 화자의 입을 빌어 묻고 또 한 화자의 입을 대답을 한다. 니문-독자는 우륵에게 묻는다. "떨림의 끝은 어디이옵니까 ?" 우륵-소설가는 답한다. "그 대답은 인간세(人間世) 안에 있지 않을 것이다. 떨림의 끝은 알 수 없되, 떨림은 시간과 목숨이 어우러지는 흔들림이다. 그래서 목숨은 늘 새롭고 새로워서 부대끼는 것이며, 시간도 그러하다."(1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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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