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장석주의 책장

[스크랩] 기호의 제국

작성자참기쁨|작성시간10.01.03|조회수510 목록 댓글 0
표면이 곧 심층인 문화
『기호의 제국』, 롤랑 바르트, 김주환·한은경 옮김, 산책자, 2008


『기호의 제국』은 1970년에 나온 책이다. 롤랑 바르트의 책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다. 좋아하기 때문에 나는 이 책을 되풀이해서 읽는다. 첫 한국어 번역판은 1997년에 김주환·한은경의 공동번역으로 민음사에서 나왔다. 그 뒤에 같은 번역자의 책이 2008년에 산책자에서 재출간되었다. 롤랑 바르트는 1966년에 일본을 여행하면서 구조주의 기호학에 대한 강연을 한다. 일본을 거대한 기호의 진열장으로 본 바르트는 일본에서 서구문화와는 다른 무엇을 보고 즉각 매혹당한다. 바르트에게 일본은 ‘깊이’가 없고 ‘표면’만 있는 나라로 비쳤는데, 이때 깊이란 내용이고 의미이고 중심이다. 바르트는 일본 문화에서 대상에서 의미를 추출하고 기표에서 기의를 찾아내야만 하는 의미와 중심의 강박에 사로잡힌 서구와는 달리 그것에서 자유로운 문화의 원형을 찾은 것이다. 이 책은 일본이라 불리는 기호의 체계에 대한 매혹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보여줄 뿐이지 일본이 갖고 있는 윤리적 함의를 비판하지는 않는다.

바르트는 선, 하이쿠, 무, 파친코, 꽃꽂이, 요리, 서예, 정원, 집, 얼굴, 젓가락, 스키야키, 사시미, 분라쿠, 전학련 등 일본의 드러난 것들을 가로지르며 그것들을 기호학적으로 분석한다. 아니 분석이라는 말은 정확한 언어가 아니다. 바르트는 분석하는 게 아니라 일본문화의 무수한 틈으로 스며들고 다시 밖으로 미끄러지듯 빠져나온다. 그 과정에서 정수를 빨아들이고 즐길 뿐이다. 기표가 기의를 압도하는 일본 문화에서 서구와 다른 그 무엇을 느끼고 서구의 기호학자는 즐거움을 느낀다. 일본 문화를 알면 알수록 제 안에 고착된 서구적 강박관념이 드러나는 까닭이다. 예를들면 서양의 포크와 나이프가 음식물을 자르거나 찔러 절단하며 ‘약탈’한다면 젓가락은 음식물을 고르고 뒤집으며 뒤섞고, “이미 분리되어 있는 물질을 새 모이로 변형시키고 밥도 흐르는 우유로 변형”시킨다는 것이다. 바르트가 본 일본 문화는 풍부하고 흥미로운 기표들로 넘쳐나는데, 그 기표들 아래에 마땅히 있어야 할 기의는 없다. 달리말하면 표면이 곧 심층인 문화가 바로 일본문화다. 서구의 이성중심주의에 길들여진 바르트에게 기호체계로서의 일본문화는 어떻게 비쳐졌을까 ? “일본에서 기호는 강력하다. 그 기호는 훌륭할 정도로 규칙적이고 과시적이며, 각기 알맞은 자리에 배치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그 기호는 토착화하거나 합리화하지 않는다. 일본의 기호는 비어 있다. 그 기의는 도망가며, 군림하는 기표의 신과 진리와 도덕으로 나타난다.”

롤랑 바르트는 내용물을 담는 구실을 하는 포장에 정성을 들이는 일본인의 관습에 주목한다. 선물을 감싼 포장의 화려함은 아무것도 아닌 포장 그 자체를 황홀경으로 바꿔놓는다. 포장의 황홀경 속에서는 포장 아래에 숨은 선물보다도 포장 그 자체가 더 중요한 것으로 전환한다. 포장은 그 아래 숨은 선물의 즐거움을 한없이 유예하는 기능으로 작용한다. 포장의 화려함에 비하자면 그 안의 선물은 너무 조악하거나 빈곤하다. 포장은 최종적 기의에 이르는 것을 유예시키며 기표 그 자체의 즐거움을 취하게 하는 것이다. 상징적으로 말하자면 기표만 있고 기의는 텅 비어 있는 것이다. 바르트는 일본의 포장술에서 기표적인 것이 기의를 압도하는 현상을 흥미롭게 관찰한다. 그리하여 “포장의 기능이 공간상 보호하는데 있지 않고 시간을 늦추는 데 있는 것인 양 포장에 에워싸고 기호화하는 의미가 훨씬 나중까지 오랫동안 연기된다. 포장지에 제조의 노동이 투자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로써 물건은 자신의 존재를 상실하고 신기루가 된다. 기의는 포장지에서 포장지로 도망 다니고 마침내 당신이 그것을 붙잡게 되면 그것은 하찮고 어처구니없으며 시시한 것으로 전락하고, 기표의 영역인 즐거움은 사라진다.” 기표[포장]만 있고 내용[기의]은 없으므로 그것은 텅 비어 있는 것이 된다. 기의가 증발해버린 물건은 본질에서 없는 것, 즉 신기루다.

바르트는 하이쿠를 알고 그 매력에 흠뻑 빠진다. 일체의 기의를 증발시키고 기표만 남기는 하이쿠를 좋아해서 『기호의 제국』에서 꽤 길게 분석하고 있다. 하이쿠는 최소한도의 언어를 지향한다. 하이쿠는 5 / 7 / 5 음절의 구성을 가진 17자의 일본 운문이다. 그것은 말의 단순한 축소형 포착이 아니라 차라리 “딱 맞는 형식을 단번에 발견해낸 간결한 사건”이다. 하이쿠는 묘사도 의미의 지시도 없다. 서구의 고전적 글쓰기와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텅 빈 무엇이다. 롤랑 바르트는 “사진을 찍을 때의 섬광이지만 카메라에 필름 넣는 것을 잊어버린 상태”라고 말한다. 그것은 씌어지기 위해서 씌어질 뿐 애써 의미를 포획하려는 일체의 노력을 무화시킨다. 그런 까닭에 하이쿠는 “가장 기이한 의미의 유예상태”에 머문다. 롤랑 바르트는 하이쿠에서 선(禪)의 정신을 보았다. 선은 의미에 고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판단정지 상태에 이르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래서 선은 의미에서 도망간다. 선은 의도적이고 극단적으로 의미를 방기하는 행위다. 역설적으로 의미를 버림으로써 의미를 취한다. 하이쿠 역시 마찬가지다. 하이쿠는 하염없이 의미에서 도망간다. 하이쿠는 의미의 포착이 아니라 즉각적인 의미의 면제 행위다. 하이쿠는 그저 “상징의 텅 비어 있음 그 자체”를 겨냥한다. 마치 거울과 같이. 그래서 “하이쿠는 주체도 신도 없는 형이상학을 통해 진술된 것으로, 불교의 무나 선의 깨달음에 상응한다.” 선의 깨달음은 궁극적으로 무언어의 상태다. 해탈이 바로 그것이다. 하이쿠는 언어의 간결성이나 함축이 문제가 되는 게 아니다. 언어는 그 근본에서 불완전한 의미작용이다. 하이쿠가 보여주는 언어의 간결성과 함축은 의미작용을 하는 언어를 버리려는 몸짓의 표상이다. 하이쿠는 언어를 최소한도를 쓰면서 내부적으로는 그 언어를 지우는 운문 형식이다. 하이쿠는 어떤 심층의 의미도 겨냥하지 않는다. 아예 심층이 없다. 기의를 배제한 기표만의 놀이가 곧 하이쿠다. 그래서 하이쿠에서는 표면이 곧 심층이다. 하이쿠는 즉각적인 것이므로 이차적 사고는 당연히 폐기될 수밖에 없다.

이 책의 앞부분에 無(무)라는 붓으로 쓴 글씨가 한 면을 차지하고 있다. 문자 쓰기를 예술로 승화한 서예는 서양에는 없는 예술이다. 그랬으니 바르트의 눈에 그것은 경이롭게 비쳤을 것이다. “서예는 문자의 안무이며 의식의 표의문자적 발레다.”(정화열) 기표/기의, 혹은 표면/내용이 한 몸으로 되어 있는 이 無(무)자는 아마도 바르트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 그 모든 것의 집약일 터다.
다음검색
스크랩 원문 : 장석주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