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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담(閑談)] 트리니트론의 푸른 불빛,그리고 남겨진 거인의 뒷모습

작성자강수원(순천)|작성시간26.06.15|조회수63 목록 댓글 0
오늘 이 아련한 생각이 문득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은, 마침 화면에 흘러나오던 네덜란드와 일본의 월드컵 중계 한 장면 때문이었습니다,사정없이 요동치는 그라운드의 열기 속,화면 구석에 간간히 모습을 드러내는 소니(SONY)의 메인 중계
카메라, 그 묵직하고도 고고한 자태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노라니,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해묵은 기억의 파편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며 서정적인 단상 하나가 그리움처럼 피어올랐습니다.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보면, 화질의 깊이를 탐해온 이들의 가슴 한구석엔 언제나 지워지지 않는 서늘한 푸른 불빛 하나가 남아 있습니다. 이름만으로도 가슴을 뛰게 했던 그 시절의 절대 권력, 바로 '소니
트리니트론(Trinitron)'의 불빛입니다.

70년대 말과 80년대 초, 세운상가와 남대문 도깨비시장의 컴컴한 골목을 기웃거리며 마주했던 그두꺼운 브라운관 TV의 위용을 기억하십니까 남들은 둥근 구멍 사이로 흐릿한 빛을 뿜어낼 때,소니는 세로로 곧게 뻗은 칼날 같은 슬릿 사이로
숨이 막힐 듯 쨍한 빛을 뿜어냈습니다. 검은 화면위에 새겨지던 서슬 퍼런 선예도와 눈이 시리도록 선명했던 원색의 텍스처, 그것은 가전제품이 아니라 인류가 빛을 통제하기 시작했다는 일종의 위대한 선언이었습니다.

그 시절 소니는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전자 왕국'이었습니다. 전 세계 방송국의 엔지니어들이 소니 모니터를 보며 화면을 깎고 다듬었고 ,안방의 안목있는 이들 역시 "방송국에서 쓰는 소니니까"라며 거금의 엔화 값을 치르고 그 무거운 상자를 집안 가장 귀한 자리에 모셨습니다. 촬영하는 카메라부터 보여주는 TV까지, 세상의 모든 화질은 소니라는 거인의 손바닥 안에서 피고 졌습니다.

그 찬란했던 메카의 중심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잊지 못할 풍경을 목도하곤 했습니다. 왕국의 자부심을 가슴에 품고 단정한 소니 조끼 유니폼을 입은 채 움직이던 당시 소니 코리아와 서비스센터 직원들의 뒷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 남색 조끼 깃에 새겨진 로고는 단순한 직장의 표식이아니라, 당대 최고의 기술을  만진다는 은근한 선민의식이자 화질의 정점을 다룬다는 거룩한 자부심의 훈장이었습니다. 동네 전기집 아저씨들은 감히 범접하지도 못하던 그 복잡하고 거대한 트리니트론의 내부를 묵묵히 조율하던 기술자들을,우리는 마치 세상의 가장 정밀한 비밀을 다루는장인을 대하듯 경외(敬畏)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습니다.내 집 거실의 화질을 지키기 위해 찾아온 왕국의 메신저들을 향해 보내던 그 순수하고 뜨거웠던 동경의 시선은, 그 시절 소니의 푸른 빛을 사랑했던 이들만이 공유할 수 있었던 낭만이 가득한 특권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원할 것만 같던 왕국의 성벽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균열이 시작되었습니다,자신이 쌓아 올린 트리니트론의 영광이 너무나 완벽했던 탓일까요. 거인은 다가오는 '얇은 평판(LCD)'의 시대를 한낱 흐릿한 유행으로 치부하며 자만의 덫에 걸려들고 말았습니다.뚱뚱한 브라운관의 마지막 자존심을 붙잡고 머뭇거리는 사이, 세월의 수레바퀴는 사정없이 굴러갔고 왕좌는 차갑게 식어버렸습니다.

그 찬란했던 은하계가 저물고 당도한 지금의 시대는,참으로 야속하리만치 어지럽고도 차갑기만 합니다.가전 매장과 인터넷의 바다를 서성이다 보면 오만가지
OLED니,미니LED니, 혹은 RGB 미니 LED다 하여 이름조차 낯선 차세대 미아크로 미니 LED 같은 현란한 마케팅 용어들과 무미건조한 수치들이 전쟁하듯 쏟아져 나옵니다.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하여 손가락만 한 두께에 수천 니트의 눈부신 밝기를
뿜어내지만, 어쩐지 마음 한편이 공허해지는 것은 감출 수가 없습니다. 과거 기술 하나에 온 영혼을 빼앗길 수 있었던 고고한 독보함도, 브랜드를 향해 보냈던 무조건적인 신뢰의 낭만도  사라진 채,오직 가성비와 차가운 스펙 싸움만 남은 황량한
전쟁터가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유수(流水)같은 세월의 흐름 속에 그 시절의 뜨거웠던 열정을 되새기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눈시울이 시큰 거리는것은 바로 순수했던 시대의 상실에 대한 아련한
향수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2026년의 거실 풍경을 바라보면 참으로 기묘하고도 쓸쓸한 미소가 지어집니다.

이제 안방의 벽면을 압도하는 85인치의 거대한 화면 위에는 소니 대신 TCL 이나 하이센스 같은 낯선 대륙의 이름들이 선명하게 박혀 있습니다.수천 개의 미니 LED 불빛을 촘촘히 박아 넣고 무서운 화질을 자랑하는 그들의 역습을 보고 있노라면 , 한 시절을 호령했던 트리니트론의
가문이 이토록 허무하게 뒤안길로 사라졌나 싶어 묘한 격세지감이 밀려옵니다.하드웨어 패권은 그렇게 바다를 건너 완전히 넘어가 버린 것처럼보입니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그 중국산 대형 TV가 뿜어내는 화려한 월드컵 중계의 '알맹이'를 쫓아가 보면 결국 다시 그 거인의 냄새가 짙게 풍겨 나온다는 점입니다.

오늘 네덜란드의 오렌지빛과 일본의 푸른
유니폼이 그라운드 위에서 격돌할 때, 그 
숨막히는 땀방울을 잡아내는 메인 카메라에도,중계차 안에서 화질의 법전을 세우는 마스터 모니터에도 여전히 'SONY'라는 네 글자가 서슬 퍼렇게 살아 숨쉽니다.안방의 안락한 TV 자리는 내주었을 망정, 세상의 모든 빛을 비추는 '눈'의 지위만큼은 빼앗기지 안겠다는 거인의 마지막 고집처럼 말입니다.

TCL이 깔아놓은 거대한 캔버스 위에, 소니가 깎아 만든 날카로운 소스가 얹어져 완성되는 2026년의 월드컵 화질.

영원한 강자도, 영원한 약자도 없는 이 냉혹한 디스플레이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어쩌면 몰락한 거인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여전히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기이하고도 흥미로운 연극을 보고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트리니트론의 그 푸른 불빛은 바랬지만, 거인이 남긴 화질의 집념은 여전히 우리가 보는 화면 위에서 뜨겁게 요동치고 있습니다.
(아래 KBS HD 화면과 NHK 4K HDR(HLG)
화면 입니다.사진 채증은 한계가 있습니다.실제는 엄청난 화질 차이를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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