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창작수필

항일 의병장 신돌석(申乭石) 장군 이야기 / 손병흥

작성자스피치짱|작성시간17.03.02|조회수513 목록 댓글 0



항일 의병장 신돌석(申乭石) 장군 이야기

 

  대한제국 시기 항일의병운동의 평민출신 의병장이었던 신돌석(1878~1908) 장군은,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에서 출생을 하였고, 당시 기준으로는 영해(寧海)도호부지역이었으며, 현재 영덕군 축산면에 신돌석 장군 생가가 보존되어 있다.

 

  또한 구한말 조선의 의병장이자 중인으로 일본군에 맞서 싸운 사람이었으며, 본명은 신태호(申泰浩)이고 별명은 태백산 호랑이 이었던 데다, 더군다나 그의 띠도 호랑이띠였다

 

  어린 시절부터 몸이 무척 튼튼해 우람하고 용맹하기로도 소문이 났으며,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일제가 전선을 잇는 작업을 하는 것을 보고서, 단숨에 총을 가진 왜병들을 때려눕힌 뒤에, 나무로 만든 전신주 여러 개를 뽑아서 패대기치고 이내 사라졌다라고 할 정도로, 행동이 날쌔고 민첩하며 애국심과 의협심이 무척 남달랐다고 한다.

 

  당시 유생출신의 의병장들이 가졌던 제약을 극복할 수 있었던 그는, 지역주민들과의 긴밀한 협조 속에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일본군의 공격을 교묘히 피한 채 수십 차례의 유격전을 펼쳐, 이웃 고을인 진보의 이하현, 영덕의 정용기 의진(義陣)과도 일정한 연대를 가지면서, 영해읍과 평해읍을 차례로 점거한데 이어 울진읍으로 가면서 부터는 병력의 수효가 3천명을 헤아리게 되었으며, 이에 영향을 받아 영양청송의성봉화삼척정선강릉원주 등 경북강원도 일대 의병들의 활동도 함께 활기를 되찾게끔 해주었을 정도로, 신 장군은 영남지역 의병장 중에서도 가장 그 활약이 컸었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 이후 국권을 침탈해간 일제에 대항하여, 평민출신 의병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나, 그의 농민중심 병력은 산악지역에서 주로 유격전을 펼치면서, 지세에 능하지 못했던 일본군들을 상대로 하여 큰 성과를 보였는데, 참고로 처음 의병에 참여했던 시기는 그의 나이가 19세로 을미사변이 일어났던 1896년 다음해였지만, 그 이전의 뚜렷한 활약상과 전공들을 인정받아서, 을사조약(1905) 때 신분에 관계없이 평민출신 의병장이 될 수가 있었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 부터 항일의식이 남달랐고, 인근 마을에 있는 육이당(六怡堂)에 가서 틈틈이 학문도 연마하였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조국의 운명이 위급해지자 무력으로 적과 싸울 것을 결심하고서, 마침내 1906년 영해에서 의병300명을 불러 모아 일으켜 진군을 개시하였다.

 

  울진군 평해면으로 가서 다시 3,000여명의 의병을 재편하고 여러차례 일본군과 접전하였고, 경상도 강원도 일대와 동해의 해안선을 따라 기습적으로 많은 적을 사살하는 등 가는 곳 마다 큰 전과를 올렸으며, 그만큼 명성도 높아져 갔으나, 일본군의 병력이 점차 증원되어감에 따라 부득이 일월산과 백암산 등지로 퇴각을 하면서도, 일본군의 요소마다 큰 타격들을 입혔다.

 

  하지만 190712월 서울 공격을 목적으로 13도의 의병들이 연합하기로 하고서, 13도 창의군 교남창의대장으로 천거되어 양주에 모여들었을 때 신돌석은 평민출신이란 이유로 제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의병을 이끌고 영해로 돌아와 항전을 계속하였으며, 신출귀몰하게 게릴라전을 펼쳤던 그의 작전은 물론이거니와, 울진 앞바다에서 일본군 군함 9척을 침몰시켜버린 전공도 있었기에, 일본군은 그를 크게 경계하였을 뿐만 아니라, 회유책이나 현상금을 걸어서 그를 포획하려고 매우 혈안을 하고 있었는데, 그러다보니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현상금을 노렸던 한때 그의 부하이기도 하면서 고종사촌이기도 한 김상렬 형제가, 때마침 집을 찾아왔던 그에게 술과 고기를 극진히 대접한 뒤에 취해서 쿨쿨 잠을 자고 있을 때 살해를 한 뒤에 그의 목을 베어서 가져갔지만, 정작 일본군은 살아있는 신돌석을 잡아오랬지 죽은 신돌석은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보상 일체를 해주지 않았다고 하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그리하여 결국 선생은 자신보다도 굳게 믿어왔던 부하이자 친척의 손에 의해 무참히 살해가 되어, 애석하게도 1908111831세의 나이로 순국을 하고 말았으며, 이에 정부에서는 선생의 크나큰 공훈들을 기려서 1962년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신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95년도에 복원이 된 생가와 인근에 위치한 기념관은, 연중 수많은 방문객들이 꾸준히 찾는 유적지 탐방코스가 되었으며, 매년 6월과 8월에 열리는 신 장군 추모제가 열릴 때는 전국 각지에서 1,000여명이 방문을 할 정도로 인파들이 붐빌 정도인데다, 그의 생가와 기념관마저 정갈하게 잘 가꾸어 유지가 되고 있는 기념관 안에는, 일제의 침략 만행과 의병활동, 영덕군 지역의 항일운동, 일본군의 무기와 형장구 및 신돌석의 약력과 설화, 신돌석의 태백산전투, 그림으로 보는 신돌석의 일생, 신돌석의 전략과 전술, 신돌석 진의 조직도 등 그의 일대기가 기록되어 있고, 장도·화승총·창검류·처결문서 등 당시의 유물 18점도 전시가 되고 있다.

 

  하지만 그처럼 활발한 의병활동을 펼쳤던 그였으나,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작전(1907)때는, 양반의병장 중심의 창의군에서 안타깝게도 명목이 제외를 당하고 말았는데, 그 연유는 당시 의병장의 중심이 위정척사 사상을 가졌던 양반들이었기 때문이었다.

 

  1904년 당시 울진 평해의 월송정(越松亭)에 올랐던 스물일곱 살의 신돌석 청년은, 이곳에서 자신의 가슴에 맺힌 원한과 심정들을 절절하게 읊었던 시 한수를 남겼다.

 

누각에 오른 나그네, 문득 갈 길을 잊고서

낙목이 가로누운 단군의 터전을 한탄하노라.

남아 27세에 무슨 일을 성취하랴.

잠시 추풍에 비껴 앉아 감회에 젖네.

 

  이 시에서 그의 피가 끓는 심정을 살펴보기 전에 우선 유추하여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둘째 구절인 단군의 터전이 쓰러져 가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그것인데, 여기서 단군을 언급했다라고 하는 것은, 그가 민족적 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구절인데, 이것은 당시 중화 의식이나 척사 정신과 같은 주자학을 중심 사상으로 내세웠던 유림들과는 달리 전혀 다른 성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테면 단군을 애타게 찾고 부르짖으며, 단군의 후손이라고 하는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이었음과, 그가 월송정 누각에 올라 이 시를 읊었던 그해는, 러일전쟁 당시 중립을 선언한 대한제국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사전 허락 없이 상륙한 일본군이 우리 땅을 점령하다시피하면서 러시아와 전쟁을 치르는 통에, 우리 땅 전체가 전쟁에 화마에 휘말려 큰 고통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며, 이 무렵 조선에서는 단군을 역사의 무대로 다시 내세우려는 움직임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었는데, 그 결정체가 바로 민족을 보존하면 국가를 다시 회복할 수 있다는 신념 아래 모색이 된 민족혼 보존 방안 가운데 하나로서, 1908년 단군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단군교라고 하는, 즉 대종교의 탄생이었다

 

  특히 민족의 시조를 이러한 활동의 구심점으로 삼자는 주장을 펴서, 1910년대 중국 만주 지역이나 본토 지역의 독립 운동계는 대종교 조직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경우가 많았고, 이처럼 단군을 섬기는 일이 곧 민족 독립 방안을 모색하는 일로 인식이 된 것으로서, 박은식이나 신채호 등 민족지도자들이 대종교를 신봉하였음과, 이것을 중심으로 독립 운동을 펼쳐나간 것들이 그 대표적인 사례임과 동시에, 일제강점기인 1910년 이후 조선총독부가 미신 타파 운동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단군 죽이기에 나선 것도, 사실은 대종교를 중심으로 결성되었던 다수의 독립 운동 조직들을 붕괴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정책의 산물이었다

 

  이처럼 벼랑 끝에 매달린 민족과 국가의 운명을 바라보며 이에 대한 방책을 찾지 못해 애태우고 있는 스물일곱 살의 피 끓는 젊은이의 모습을 이 글은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그의 절망감과 울분이 눈에 선하게 떠오를 정도이고, 간악한 일제(日帝)의 강요에 따라 이른바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기 한 해 전인 1904년은, 일본이 러시아와 동아시아의 패권을 두고서 전쟁을 치룬 해였기에, 항일투쟁(抗日鬪爭)에 일생을 바쳐 경각에 치달은 나라의 운명을 한탄하던 젊은 우국지사의 분노와 절망감이 전해질 정도로, 그는 수많은 전설과 신화들을 남긴 민족의 영웅이었다.

 

  한편 신돌석 장군의 생가는 당시 초가집으로서 장군의 부친 신석주가 1850년경에 지었는데, 일본 관헌들이 우리민족의 독립의지를 꺾기 위해 1940년에 불태워버렸고, 이후 1942년에 그곳에다 일부를 새로이 세워 기와집으로 꾸몄다가, 다시금 1995년 초에 현재와 같은 초가집으로 복원을 하였다.

 

  현재 네 칸짜리 초가가 달랑 한 채인 신 장군의 생가는, 집 동편에는 부엌을 두고 방 한 칸과 대청 및 건넌방을 두었으며, 방과 마루는 앞으로 처마를 빼고 뒤로 물려서 비가 잘 들어 치지 못하게 하였고, 장독대들은 부엌 뒤편에 앞마당에는 돌우물이 있는, 그저 평범한 당시 농민들 집의 형태와 모습을 갖추고 있다.

 

  1999년에는 장군이 태어난 생가로부터 2.3km 떨어진 곳에 유적지가 교육관 1, 관리사 1, 화장실 2, 사당 1, .외삼문 2동 동.서재 2, 안내소 1, 초가 2, 충의공원 1동으로 전체 13동으로 조성되어졌으며, 이 곳에는 신돌석 장군에 대한 각종 자료들을 수집하고 보전하여서 전시를 하고 있는 곳으로, 문화 유적 탐방 코스와 장군의 정신을 되새겨볼 수 있는 곳으로 거듭나고 있다.

 

  이와 같이 거듭 각광을 받게 된 그 이면을 살펴보자면, 먼저 그토록 혈기왕성했던 젊은 나이에 평민으로서 의병대장이 되어 활약했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당시의 어려운 여건과 신분적으로 차별이 심했던 환경 속에서도 불구하고, 평민출신의 의병장으로서 국가의 위기를 몸소 지키고 구하려는 큰 활약을 하셨던 호국정신과, 목숨을 다 바쳐 나라를 지키신 그 분들의 나라사랑하는 애국심을 문화 유적지 탐방 코스로 삼아서 찾으려고 하는 발걸음들이 점차 많아졌기 때문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