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장 충장공 김덕령 장군 발자취]
靑山 손병흥
조선의 의병장이며 자는 경수(景樹)이고 시호는 충장(忠壯)이며 본관은 광산(光山)으로, 광주(光州) 석저촌(石低村)에서 출생을 하여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어려서부터 무예를 연마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덕홍(德弘)과 함께 담양지방에서 의병 5,000여명을 이끌고 출정하였으며, 임진왜란 당시에 담양부사였던 이경린과 장성현감이었던 이귀의 천거로 종군 명령이 내려졌을 뿐만 아니라, 전주에 있던 광해분조로부터는 익호장군(翼虎將軍)의 군호를 받았다.
1594년에는 의병을 정돈하였고 선전관이 된 후에는, 권율 장군의 휘하에서 의병장 곽재우와 협력을 하면서 진해와 고성에서 왜군들의 침략을 방어하였는데, 특히 1595년 경남 고성에 상륙을 하려는 왜병들을 기습하여 격퇴함으로써, 석저장군(石低將軍)으로 알려질 정도로 여러 차례에 걸쳐 왜병들을 격파하였다.
1596년에는 도체찰사였던 윤근수의 노속을 장살하여 체포가 되었으나 왕명으로 석방되자, 그때부터 왕의 신임을 질투하는 대신들과의 갈등이 시작되었고, 다시금 의병들을 모집하였지만, 때마침 충청도에서 일어난 이몽학의 반란을 토벌하려다가 이미 진압이 되어버려 도중에 회군을 하였는데, 오히려 이몽학과 내통을 하였다고 하는 신경행의 무고로 인해 체포·구금이 되었다가, 사후에 신원(伸寃)되어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혹독한 고문으로 인한 장독으로 그만 옥사를 하고야 말았던 그의 애국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975년 2월에는 ‘충장사’가 건립되었다.
1661년(현종 2)에 신원되어 관직이 복구되고, 1668년에는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1678년(숙종 4)에는 ‘벽진서원’에 제향이 되었고, 1681년에는 병조판서에 가증되었다. 영조 때 ‘의열사’에 형 덕홍과 아우 덕보와 병향되었고, 1788년(정조 12)에는 좌찬성에 가증되었으며, 그의 생애와 도술을 묘사한 작자와 연대 미상의 전기소설인 《김덕령전》이 있다.
1788년에 정조 대왕은 장군께 충장공(忠將公)의 시호를 내렸고, 그가 태어난 마을이었던 석저촌을 충효의 고을이라고 하여 충효리(忠孝里)로 바꾸도록 하였으며, 옥사하기 직전에 억울함을 이기지 못해 지었다고 하는 시조인 <춘산곡(春山曲)>이 《김충장공유사(金忠壯公遺事)》에 전해지고 있다.
▷ 김덕령의 문학
현가는 곧 영웅의 일이 아니니,
칼춤은 모름지기 옥장에서 추어야지.
다른 날 싸움을 끝내고 돌아간 뒤에는
강호에서 고기나 낚으리니, 다시 무엇을 원하랴.
춘산곡(春山曲)
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에 내 없은 불이 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그 당시 장문포에서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의 수륙연합작전으로 왜군을 크게 물리쳤고, 담양에서 왜군들을 무찌르는 등 망우당 곽재우 장군과 함께 ‘정암전투’에서 연합작전을 수행하였는데, 마치 제갈공명과도 같은 지혜와 관우와 같은 용맹스러움이 있다고 알려질 정도로 혁혁한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1596년에는 도체찰사 윤근수 종이 탈영하자 김덕령은 종의 아비를 잡아들였고, 윤근수가 눈감아 줄 것을 청탁하였으나 이를 거절하고 곤장을 때려 숨지게 하였기에, 못내 윤근수에게 체포가 되었지만 왕명으로 곧 풀려나게 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1596년 7월에 “이몽학의 난”과 더불어 반역자와 협력을 했다고 하는 모함을 받아 투옥이 되었으며, 종국에는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애석하게끔 그의 나이가 29세에 들어서 옥사를 하고야 말았으니, 그야말로 너무나 짧았던 그의 삶이 무척 애처로울 따름이다.
더군다나 그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비극은 자신의 죽음만으로 끝나지가 않았는데, 그것은 그가 죽은 지 이태 뒤에 발발했던 정유재란 때 왜군들에게 쫓기던 그의 부인 흥양 이 씨마저도, 담양의 추월산 8부 능선의 아슬아슬한 벼랑 위에 위치한 암자인 ‘보리암’의 까마득한 절벽에서 몸을 던지는 죽음으로 남편의 뒤를 따랐던 것이었다.
더욱이 역사의 기록이나 신록들을 살펴보면, 직접 싸움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던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선무 1등 공신으로, 적과 직접 싸우지는 않았지만 선조를 호위하여 의주로 피란을 다니는 동안에 임금의 말고삐를 잡거나 중국과의 외교 업무 등에 종사하는 나랏일을 하면서 임금을 보살폈던 사람들에게는 호종공신으로, 그 외에도 임진왜란 기간 중에 일어났던 여러 반란들을 제압하는 데에 공을 세웠던 사람들에게는 청난공신으로 확정을 하였지만, 그에 견줘서 여러 의병장을 비롯한 의병들과 조선군들에게는 오히려 배척을 하고야 말았는데, 그 일예를 들어 1601년 3월 14일자의 <선조실록>을 살펴보면, 선조는 "왜적을 평정한 것은 오직 명군의 은혜"라고 단정한 후에, "명군이 온 것은 모두 여러 신료들이 험한 길에 엎어지면서 의주까지 나를 따라와 명나라에 호소한 덕분"이라고 하였음이 기록되어져 있다.
또한 "우리 장수들은 적장의 머리 하나 베거나 적진하나 함락한 적이 없었다"라고 하며 멸시를 하고야 말았기에, 당연히 선조는 1604년 6월 24일 처음으로 공신 104명을 확정하면서도, 그 중에 무려 86명을 호종공신으로 채웠을 뿐만 아니라, 게다가 24명은 내시요, 6명은 임금의 말을 끄는 이마(理馬)였음에 비해, 곽재우·조헌·고경명·김천일 등과 같은 의병장들은 한 명도 공신에 넣지 않는 우를 범하고야 말았다.
참고로 보다 의병장 김덕령이 역적으로 몰려 죽게 된 까닭에 대한 좀 더 상세한 배경과 설명을 곁들이자면, 임진왜란 중에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의 부하가 잡혀온 일이 있었는데, 그때 그의 부하를 모질게 심문하다보니 그가 버티지를 못해서 대충 자기가 아는 의병장들의 이름을 대어버리는 물귀신작전에 억울하게도 말려들었기 때문이었다고 하며, 왜군들과 싸우고 있었던 그는 영문도 모른 채 잡혀와 옥에 갇혀서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끝내 죽음에 이르고야 말았다.
그 당시의 상황은 명나라의 참전 후인지라 긴 휴전협상으로 인해 임진왜란은 점차 소강상태에 빠져 들게 되었고, 한편 본국으로 물러나지 않은 채 우리나라에 주둔을 하고 있었던 왜군들 때문에 조선의 백성들은 큰 고통을 받게 되었지만, 어디까지나 명군의 허락 없이 단독으로 왜군들을 공격하는 것도 차츰 더 어려워졌는데, 이를 빌미삼아 조정에서는 의병들의 힘이 너무 커질까봐 이를 두려워하여 관군에 합류하라고들 하였지만, 당시에 조정에서조차도 지방들은 제대로 관리되지가 않았기에 여러 반란들이 일어나기도 하였던 그 와중에, 불운하게도 의병장 김덕령을 죽게 만든 반란이 일어나고야 말았는데, 그것이 바로 ‘이몽학의 난’이었다.
그러했던 선조의 입장과 처신에 대한 이면을 되새겨서 살펴보자면, 당시 의병장들은 수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기에, 혹시 나중에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겠다고 지레 짐작을 해서, 이를 방지하고자 사전에 미리 의병장들을 족족 잡아들였던 것도 그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1661년(현종 2)에 억울함이 밝혀져 관직이 복구되어 1668년에는 병조참의에 추증되었고, 1681년(숙종 7)에 병조판서로 증직되었으며, 1788년(정조 12)에는 의정부좌참찬에 증직되고 부조특명(不逝特命)이 내려졌는데, 1678년(숙종 4)에는 광주의 ‘벽진서원’에 제향이 된 후 이듬해에 ‘의열사(義烈祠)’로 사액이 되어 ‘충장(忠壯)’이라고 하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 후로 그의 후손들인 광산 김씨 문중에서, 1965년에 문중들의 무덤이 모여 있던 광주 무등산 이치(梨峙)로 묘를 이장하던 중에 그의 관을 열어보니, 그동안 묘소를 쓴지도 어언 400여년이 지났지만 그때까지도 살이 썩지 않았음이 전해지고 있으며, 이를 본 여러 사람들은 온통 그의 한이 서린 것이라고도 하였는데, 그가 입고 있던 옷과 철릭은 수습한 뒤에 그대로 보존시켜, 광주 무등산 자락에다가 복원한 ‘충장사(忠壯祠)’에 전시를 하였다.
그리하여 광주광역시에서는 익호장군(翼虎將軍) 김덕령의 충절을 기리고자 경제활동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으로 손꼽히는 일대를 일컬어 익호장군(翼虎將軍)의 시호인 충장공(忠莊公)의 명칭을 따서 ‘충장로(忠莊路)’ 라고 명명을 하였으며, 31향토보병 충장(忠莊)사단도 김덕령의 얼을 이어받아 지방을 사수한다는 기치를 들어서 ‘충장(忠莊)부대’라고 명명을 하였다.
그러했던 조상을 기리기 위한 대표적인 정자로 여겨지고 있는 ‘취가정’은, 이처럼 임진왜란 시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충장공 김덕령 장군이 억울한 누명으로 죽은 넋을 위로하고, 나아가 그 고귀한 얼과 정신을 이어받고자 후손들이 세운 정자로서 지금까지도 잘 보존 되어져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빛고을 광주를 대표하고 있는 ‘충장로’는, 김덕령 장군을 기념하여 그의 시호를 따서 만든 거리가 되었으며, 그리고 양림동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왜적들을 물리쳤던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시비(詩碑)가 조성이 되어져 있다.
그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충효동 장군 생가터’와 장군 일가족의 충·효·열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충효동정려비각(忠孝洞旌閭碑閣)’과, 억울하게 숨진 장군의 넋을 달래고자 충장공의 성장지에 지은 ‘취가정(醉歌亭)’, 장군의 동생인 김덕보(金德譜)가 장군을 기리기 위해 지었다고 하는 ‘풍암정(楓岩亭)’, 장군과 관련된 무기 제조창이었던 ‘금곡동 제철 유적지(金谷洞製鐵遺跡地)’가 남아있다.
아울러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송강로 13)에 조성된 ‘충장사’ 경내에는, 그의 영정과 교지가 봉안되어 있는 사우인 충장사, 동재와 서재, 은륜비각과 해설비, 유물관, 충효문, 익호문 등이 있고, 유물관에는 중요민속자료 제111호로 지정된 ‘김덕령 장군 의복’과, 장군의 묘에서 출토된 ‘관곽’과 ‘친필’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사당 뒤쪽 언덕에는 그의 묘와 묘비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