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Bing Image〉
'금요일의 문장' 『매일경제/시가 있는 월요일』2022.10.24. 금요일의 문장 / 정정화 여름 산책은 길어졌습니다 죽은 화분들이 동그랗게 앉아 있습니다 테이블은 창가를 생각합니다 골목을 지나가는 족제비 이름을 부르면 붉은 꼬리라도 생길까요 더 어둬질 때를 기다려야 하는데 오래 펼쳐진 잠과 얼룩들은 소나기에 젖은 책처럼 부풀고 창문이 만져지는 구름은 그러나 보이지를 않는군요 물 항아리처럼 출렁이는 오후를 멀리서 그냥 듣기만 할 거예요 난 고작 빈 병 같아서 자주색 달개비의 새끼발가락 하나 뜯어 꽂아 둘 뿐이니까요 최대한 많은 이름을 여름에 빌려주고 싶었지만 아주 간절해지는 것들은 때로 지루해져 구두를 벗습니다 책장에서 여름의 목록을 정리하고 저녁이 내리는 오후의 테이블은 이제 낭독회를 열 준비를 합니다 금요일입니다 오늘은 마지막 페이지 한 문장에서 미열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신이 두고 간 책장 사이에서 수많은 글자들을 뽑아 붉은 혀끝에 올려놓겠지요 아무래도 그대로인 오늘은 당신과의 만남이 늦어질 것 같습니다 |
시 낭독회를 준비하고 있는 작은 서점의 금요일 풍경인 듯싶다. 시 낭독회를 기다리며 찾아낸 문장들이 한 줄 한 줄 모두 온도를 지니고 있다. 간절했던 것들마저 지루해지는 나른한 금요일 오후 시인은 자기만의 음계를 찾은 듯싶다. 자기만의 목록을 정리하며 낭독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시인에게 세상은 모두 문장으로 구성된 유화다. 혼잣말하듯 쓴 시를 읽으며 개성 넘치는 감수성에 무릎을 친다. 그래, 금요일 오후 우리는 모두 빈병일지도 몰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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