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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었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작성자리안|작성시간18.01.26|조회수586 목록 댓글 0


고려 때 일연 스님(1206~1289)이 지은 『삼국유사』는 민간에 전해오던 여러 사서나 비문 등의 기록을 그대로 옮겨 적었습니다.『삼국유사』는 총 아홉 편으로 제1편「왕력편王曆篇」은 삼국의 연대표입니다.


제2편은「기이편紀異篇」으로 상고시대 여러 나라, 그리고 삼국과 가야의 역사에 대한 기록이고, 3편 「흥법편興法篇」에서 9편 「효선편孝善篇」까지는 불교 역사에 관한 기록입니다.


왕력편은 연대표이므로 실제 본문은 기이편부터 시작되는데 그 첫 부분이 바로 단군조선에 관한 기록입니다. 바로 여기에 『고기古記』라는 책이 등장합니다.

일연 스님은 환국과 단국檀國(배달)을 거쳐 단군조선까지,『고기古記』에 실렸던 기록을 옮겨 적었습니다.






그런데 사대주의 사관을 갖고 있었던 김부식은『고기古記』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고기古記』의 내용을 알고 있으면서도『삼국사기』 편찬에 참고하지 않은 것입니다. 반면 일연은 우리 건국과 관련한 설화나 전설까지도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수집하는 데 정성을 들여 김부식과는 생각이 전연 달랐습니다.『 삼국유사』의「 기이편」 서문에 그런 그의 생각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김부식은『삼국사기』「열전(列傳)」 설총전 말미에 ‘김대문(金大問)이 지은『고승전(高僧傳)』,『화랑세기(花郞世記)』,『악본(樂本)』,『한산기(漢山記)』가 아직도 남아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김부식은『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수집한 당대까지 남아 있던 사책(史冊)을 모두『고기(古記)』라고 지칭하면서 당대(當代) 유가(儒家)의 가치관과 상이相異하다는 이유로 그 많은 서책(書冊)을 거의 무시를 한 것입니다.






김부식이 삼국사 편찬을 마치고 임금에게 그것을 진상하면서 「진삼국사표進三國史表」라는 글을 붙여 올렸습니다. 이 글은 그 문장이 훌륭하다 해서 나중에 15세기, 조선 성종 때 간행된 문선집文選集인 『동문선東文選』에도 실렸습니다(제44권).


여기서 김부식은『삼국사기』 편찬의 이유들을 들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로『고기古記』의 내용이 만족스럽지 못하다,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나는 『고기古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김부식의 주관적인 평가입니다. 특히‘ 문자가 거칠고 졸렬하다’(文字蕪拙)는 표현은 김부식이 이 책에 대해 반감까지 갖고 있었음을 짐작케 합니다. 우리 상고사를 기록한 『고기古記』의 내용이 유학자의 사대주의 사관으로 볼 때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겁니다.




일연 스님의『삼국유사』는 그 당시 내려오던 정통사서 <고기古記>를 인용하면서 우리 역사의 뿌리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삼국유사> ‘고조선기’입니다.








古記에 云 昔에 有桓國하니 庶子桓雄이 數意天下하야 貪求人世어늘 父知子意하시고 下視三危太伯하시니 可以弘益人間이라 乃授天符印三箇하사 遣往理之하시니라


古記에 云 昔에 有桓國하니,『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

庶子桓雄이 數意天下하야 貪求人世어늘....,『고기古記』라는 책 이름을 언급하거나 그 내용을 인용한 사례들로 미루어 고려말까지 세간에는 널리 알려졌던 책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를 직접 언급한 일연 스님 뿐 아니라 김부식도 이 책을 알고 있었으니가요.












































공민왕 때 재상을 지낸 행촌 이암도 『단군세기』 서두를 『고기古記』 가운데 일부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원동중의『삼성기』에도『고기古記』의 기록이 인용되어 있는데“ 파내류산 아래 환인씨의 나라가 있으니 천해의 동쪽 땅을 또한 파내류국이라 한다. 그 땅의 넓이는 남북으로 5만리요, 동서로 2만여리이니 통틀어 환국桓國이라 했다.”는 대목이 그것입니다.


이처럼 간접적인 정황들을 통해『고기古記』에는 우리 시원역사에 대한 소중한 내용들이 담겨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다만 그 책이 지금까지 전해오지 않는게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계연수 선생이 1911년 우리 사서들을 묶어 내면서『 환단고기(桓檀古記)』라 이름붙인 것도 그『고기古記』라는 책을 염두에 둔 것이었습니다.



『고기古記』의 내용은 일연 스님보다 더 자주적自主的 역사관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행촌 이암과 원동중에게는 더더욱 귀한 기록이었을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행촌 이암은 고려 때 재상을 역임했고 단군조선의 역사를 담은 『단군세기』를 편찬했습니다. 원동중은 한민족의 상고사, 환단桓檀 시대를 다룬 『삼성기』를 쓴 인물입니다. 이들의 글에 『고기古記』가 인용되고 있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을 겁니다.

 


일연이 그 책을 인용해‘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 했는데, 신라 고승 안함로의 『삼성기』상권은 ‘우리 환족이 세운 나라가 가장 오래 되었다(吾桓建國最古)’로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이 환국은 7대 환인씨에 걸쳐 통치되었다고 기록됐습니다.


고려 때 인물로 추정되는 원동중도 『삼성기』하권서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昔有桓國)’고 쓰고 있습니다.

나아가‘ 환국의 통치자인 환인은 하늘을 대행해 널리 교화를 베풀어 싸움과 굶주림과 추위가 사라지게 되었고 백성들은 풍요롭고 인구가 많았다’고 그 시대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원동중은 안함로와 달리 초대初代 안파견 환인을 비롯해 7대 환인들의 이름을 들고 있습니다. 또 앞서말한 『고기古記』를 인용해 ‘환국의 위치가 파내류산 아래이고 그 강역이 남북 5만리, 동서 2만여리에 걸쳐있으며 비리국, 수밀이국 등 12국으로 구성돼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선 중종 때 찬수관을 역임한 일십당 이맥이 편찬한 『태백일사』에도 환국에 관한 기록이 나옵니다.「환국본기」라 해서 환국에 관한 옛 기록들을 모아놓은 것입니다. 이맥 자신이 쓴 게 아니라 『조대기朝代記』와 『삼성밀기三聖密記』라는 두 책의 환국에 대한 기록을 옮겨놓은 것입니다. 대다수 우리 사서들처럼 이 두권의 사서 역시 전해지지 않습니다.



『태백일사』에는 또 구약성서 「창세기」에 비견할 수 있는「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라는 글이 실려 있습니다. 여기에도 환국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환국의 통치자인 환인을 백성들이 추대하였다, 환인을 안파견이라고도 불렀다’면서 안파견의 뜻이 ‘하늘을 받들어 아버지의 도道를 확립시킨다’고 풀이했습니다.


나아가 「환국본기」는 『전傳』이라는 책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삼신의 후예를 환국이라 부른다’했습니다. 이는 환국의 백성이 하늘이 내린 민족 곧 천손족天孫族을 자처하는 사람들이었음을 분명히 드러낸 것입니다.

 


환국이 실제로 있었다는『 환단고기』의 기록을 뒷받침하는 기록은『삼국유사』의「 고조선 」기가 인류 최초의 나라인 환국에 대한 유일한 역사기록입니다. 적어도 그 기록을 통해 환국-배달-단군조선으로 이어지는 국통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삼국유사>는 당시에 원나라가 들어서면서 ‘우리 자주역사 의식을 드러내야 겠다’ 는 반성을 가지고 중국의 위서(魏書)를 인용하고 그 당시 내려오던 정통사서 <고기古記>를 인용하면서 우리 역사의 뿌리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삼국유사> ‘고조선기’입니다.



魏書에 云 乃往二千載에 有壇君王儉이 立都阿斯達하시고 開國하사 號朝鮮하시니 與高同時니라.

 

<위서魏書>라는 것은 삼국시대 조조의 위나라의 왕침王沈이 쓴 책인데 이것을 인용을 해서 우리 한민족의 고대역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쓰신 일연스님의 높은 뜻을 잘 봐야 하는데, 결론은 무엇인가?



바로 우리나라에는 “乃往二千載에 有壇君王儉이”, 단군왕검이 계셨다는 것입니다. 



“立都阿斯達하시고 開國하사 號朝鮮하시니 與高同時니라” 
이 말씀의 결론은 누가 어디에 어떤 나라를 세웠느냐는 역사의 구체적인 건국 주체와 나라 수도에 대해서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핵심이 다 들어 있습니다.








단군왕검이 계셨고, 아사달에 도읍을 정했고, 그리고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고 했다. 중국의 요임금과 같은 때라는 것입니다.




古記에 云 昔에 有桓國하니(謂帝釋也) 庶子桓雄이 數意天下하야 貪求人世어늘 父知子意하시고 下視三危太伯하시니 可以弘益人間이라 乃授天符印三箇하사 遣往理之하시니라



왜 일연스님이 다시 <고기古記>를 인용하냐면  바로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단군세기><삼성기><태백일사><북부여기>를 보면 이<고기古記>에 대한 모든 전적(前績)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이 <고기古記>는, 옛날의 기록에 이런 내용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모든 초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는 <삼국유사> ‘고조선기’를 번역본으로 실어놓고서 다 부정합니다.



將風伯 雨師 雲師하시고 而主穀 主命 主病 主刑 主善惡하시며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하사 在世理化하시니라

時에 有一熊一虎가 同穴而居러니 常祈于神雄하야 願化爲人이어늘 時에 神遺靈艾一炷와 蒜二十枚하시고...



여기에 보면 “時에 有一熊一虎가 ... 願化爲人이어늘”, ,우리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 이 ‘일웅일호一熊一虎’인데. 그런데 이것은 무슨 최면이 걸려서 그렇게 해석을 하는지. 저 시베리아,  북만주, 남북 아메리카 땅,  그리고 일본 북해도에 가보면  아이누 민속촌이 있습니다. 거길 가보면 곰토템을 섬기는 그런 문화가 있습니다.  실제로 그 사람들도, 지구촌 그 어떤 사람도,  한국인 이외에는 일웅일호(一熊一虎)를 한 마리 곰과 호랭이로 해석을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맹호부대가 월남에 파병 갔다면 그사람들은 호랑이가 파병간 것으로 해석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이게 진짜 동물로서의 호랑이와 곰이라면 백두산 호랭일 것입니다. 마늘 쑥을 주면서 백일 동안 태양빛을 보지 말고 수행을 해라.


동물이 사람이 된다는 것도 그렇지만 호랭이가 소처럼 풀뜯어 먹는다는 소리는 이건 애초부터 그렇게 해석을 하면 그 구조가 신화로도 성립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내용이 원동중의 <삼성기> 下 에 “웅호이족(熊虎二族)”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일웅일호(一熊一虎)라고 하는 이 대목의 글자는 똑같은데 구체적으로 “웅호이족(熊虎二族)”, 웅족과 호족이라는 것입니다. 이 웅족과 호족중에 한사람씩 와서 저희도 천지의 광명을 체험한 백성이 되게 해 달라고 서원을 한 것입니다. 한마리 곰과 호랭이가 사람이 되겠다고 서원한 것이 아니라,  곰(熊)과 호랑이(虎)를 토템으로 하는 족속이었습니다. 이게 진짜 동물이 아닙니다.


 


일제의 역사왜곡 저본이 <삼국유사>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그걸 살펴보면. <삼국유사>는 환국과 신시배달, 환웅과 사람으로 변신한 웅녀가 결혼을 해가지고 거기서 단군을 낳았다고 돼 있습니다. 이 내용이 환인,환웅,단군을 아버지와 아들과 손자, 3대 역사로 축약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단군이 1908세를 살다 아사달로 들어가 산신이 돼 버렸다고. 한 사람이 2천년을 살았던 것으로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충렬왕 1281년, <삼국사기>로부터 136년 뒤에 쓰여진 이 <삼국유사>를 보면  그 때까지만 해도 역사의 시원사가 단절될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구조적인 이유가 있었는데, 불교 스님의 색안경을 끼고 보니까 이것이 해석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일연스님이 주석을 단 것을 보면 환국 옆에다가 “謂帝釋也(위제석야)라”, 불교의 제석신의 나라다,라고 주석을 달았습니다. 그 다음에 배달 신시와 단군 조선이라는 것도 환웅이, 곰이 사람으로 둔갑한 여인과 결혼해서 단군을 낳은 것처럼 그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일제가 삼국유사라는 역사책을 없애지 않았습니다. 


이 <삼국유사>의 역설이라는 건 무엇인가? 

그것은 일연스님이 불교의 신화적인 사고로 그런 주석을 붙여서 이 책이 살아남았다는 것입니다.





한국사 왜곡은 일본인 식민사학자가 『삼국유사』의 ‘석유환국昔有桓國’에서 ‘국國’ 자를 ‘인因’ 자로 변조해 환국의 존재를 지워버렸습니다. 이후 그것이 현재의 강단사학까지 지배하고 있고요.


그러나 앞서 예를 든 것처럼 적어도 고려 때까지 우리에게는 환국의 실체, 환국의 존재에 대해 기록하고 전하는 사서들이 여럿 존재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환국에 대한 기록이 담긴『 조대기』나『 삼성밀기』만 해도 조선의 사서수거령(유교와 입장이 다른 우리 사서들을 수거, 폐기한 일) 때 분명히 언급된, 엄연히 실재했던 책들입니다.

‘환국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증거는, 환국을 이루던 12개 나라 이름들 가운데 상당수가 후세의 사서에도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가령 중국 사서인 『진서晉書』의 「사이전四夷傳」에는 비리국, 양운국, 구막한국, 일군국 등 환국에 속했던 나라 이름들이 기록돼 있습니다.


* 비리국은 … 2만호를 다스린다. 양운국은 … 2만호를 다스린다. 구막한국은 … 5만여호를 다스린다. 일군국은 막한莫汗에서 다시 150일 갈거리만큼 떨어져 있다[裨離國 … 領○二萬. 養雲國 … 領○二萬. 寇莫汗國 … 領○五萬餘. 一○國去莫汗又百五十日].『 _진서』「 사이전」

 



지금은 우리가 중동中東이라 부르는 저 수메르인들의 역사기록이나 유물을 통해서도 환국이 실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수메르인은 스스로‘ 우리가 안샨(Anshan, 천산天山)을 넘어왔다’고 말합니다. 환국에서 건너왔다는 이야기죠. 또 실제로 수메르 역사의 숱한 기록과 유물들은 환국과의 놀라운 연관성을 보여줍니다.



『장자』에도 보면 상고(시대)의 혁서 제왕을 거론합니다. 그러면서 그때 백성들은 편안하고 배불리 먹고 배를 두드려가며 근심 걱정 없는 평화로운 생활을 누렸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혁서 제왕은, 환국의 제2세 혁서 환인천제와 이름이 같습니다. 또 당시 태평성대의 삶 또한 환국의 백성들이 누렸던 생활과 부합합니다. 과연 이런 것들이 그저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까요.





수메르라면 흔히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다, 그렇게들 알고 있는데, 서양문명이 발원했다는 수메르 문명은 물론 지리로 보면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의 지역(※이를 그리스어로 ‘메소포타미아’라 한다)에서 탄생한 것입니다. 하지만 거꾸로, 지리가 아닌 사람을 중심으로 보면,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바로 수메르인의 문명을 계승한 것입니다.



기원전 2350년경 셈족族에 속하는 아카드인들이 북쪽에서 내려와 수메르를 정복했습니다. 그때 아카드인들의 왕이 사르곤입니다. 바로 이 아카드인들이 수메르를 정복하고 이미 앞서 있던 수메르 문명을 그대로 계승합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이후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수메르-아카드 문명이라고도 합니다.


함무라비법전으로 잘 알려진 바빌로니아 문명도 수메르―아카드 문명을 계승한 것입니다. 실제 함무라비 법전도 아카드어로 기록됐고 그 법전의 내용 또한 수메르 법전의 그것과 대동소이합니다. 이처럼 수메르의 원래 도시국가들, 또 아카드 제국과 바빌론 제국에 의해 계승된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점차 그리스로 전파되어 결국 서양문명의 원류인 그리스 문명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리스 문명이 애초에 자생적으로 생겨나고 발전한 것이 아니란 사실은 수많은 역사가들이 말합니다. 그리스 문자만 해도 페니키아인에게서 받아들였고 천문학, 수학도 메소포타미아 문명으로부터 배워서 발전시켰습니다. 이런 까닭에 역사학에서 수메르 문명이 서양문명의 원천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고요.

 


수메르 문명이 대단히 일찍 발달한 것이지만 그 또한 아주 갑작스럽게, 앞선 문명이 전혀 없이 독자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무엇보다 먼저 수메르인들은 우리가 안샨을 넘어왔다, 우리는 머리 뒷부분이 평평한 검은 머리의 인종이다, 스스로 자신들에 대해 말합니다.




수메르인의 점토판을 해독해 그들의 생김새, 사회제도, 풍습, 언어 등을 연구한 크레이머 박사는 “수메르인들이 동방에서 왔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한韓사상을 연구해온 우리나라의 김상일 교수는 최남선의 불함문화론을 바탕으로 “고대 수메르인과 한민족은 불함문화라는 공통 문화권에 살다 갈라져 나갔다”고 주장합니다.



‘불함문화권이란, 중앙아시아에서 몽골에 이르기까지 산악 이름중 상당수가 공통적으로 박〔밝·白〕자를 쓰는 것에 착안해 최남선 선생이 동북아 문화권에 붙인 이름입니다. 이 불함문화권이 바로 환국을 가리킵니다. 학자들은 수메르인이 ①높은 산에서 신에게 예배하는 민족이라는 점과 ②그 언어가 우랄알타이어 계통이란 사실을 들어 그들이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했다고 추정합니다.


또 수메르인들은 우주를 안키Anki(천지)라 불렀습니다. 우주는 둥근 하늘인 ‘안’ 그리고 평평한 ‘키’로 이루어졌다고 믿은 것입니다. 이는 동양의 천원지방天圓地方(하늘은 원만하고 땅은 방정하다) 사상과 다르지 않습니다.


수메르인들의 언어 역시 우리 한국어처럼 주어나 목적어 같은 체언體言에 조사(토씨)가 붙는 교착어膠着語입니다.


지구상에서 교착어는 한국어와 한국어의 영향을 받은 일본어 그리고 알타이어뿐입니다. 게다가 수메르의 경우 우리말과 어순語順까지 거의 같습니다. 아빠, 엄마 등 아예 단어 자체가 같은 게 100여 가지나 됩니다.


이밖에도 동북아의 60갑자甲子처럼 60진법을 사용한다거나, 결혼 전 신부가 될 집에 함을 지고 가고 씨름을 즐기는 등 의식주 문화나 생활 풍습에서도 적잖은 동질성이 나타납니다. 특히 주목할 것은 동방 한민족의 독특한 머리형인 상투의 흔적이 발견된다는 점입니다. 1923년 우르Ur 지역의 한 묘지에서 왕의 유골을 발굴했는데, 황금투구를 쓰고 있었던 그 왕은 머리카락을 뒤에서 묶어 상투를 틀고 있었습니다.


수메르인들이 스스로 (동방에서) 천산을 넘어왔다고 할 때, 또 수메르를 연구한 학자들이 수메르 문명은 동방에서 발원했다고 할 때 그 ‘동방’은 어디를, 누구를 지칭하겠습니까. 일찍이 환국의 서남쪽에 자리 잡았던 환족 사람들이 이란의 산악지대를 거쳐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남하해 수메르 문명을 개척했다…, 결국 수메르인과 수메르 문명의 원래 고향은 환국이라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음양 문화는 역사성으로 보면 2, 3천 년이나 4, 5천 년 전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흔히 음양론의 원 뿌리, 연원을 하도河圖, 낙서洛書로 말하는데, 그 근원을 추적해서 들어가 보면, 최소 1만 년 전까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갑니다.


선사시대 때의 유물이나 사람들이 살던 주거 터, 동굴 벽화 같은 자료들을 분석해 놓은 것을 보면, 태고시대의 사람들이 음양적 사고를 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음양론이 정리된 첫 작품이 『천부경天符經』입니다.


 

『천부경』이 음양론의 출발점이며, 실제 그것을 문명화한 진리의 원본이 5,600년 전, 태호 복희씨가 삼신 상제님께 천제를 올리고 받아 내린 하도河圖입니다. 그 하도河圖에서 팔괘 문화, 주역 문화가 나온 것입니다. 결론은, 음양론은 인류 문화의 원형인 신교(神敎, 以神說敎)의 우주론입니다. 다시 말하면 음양오행법칙은 신교神敎의 우주관입니다.
 

『 태백일사太白逸史 』<소도경전본훈> 88쪽을 보면 ‘『천부경(天符經)』’ 의 유래가 나와 있습니다. 천부경은 “천제환국구전지서야(天帝桓國口傳之書也)”라. 천부경은 환국(桓國)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한 글입니다.


환웅천왕의 배달국 때 신지혁덕(神誌赫德)에게 명해 녹도문(鹿圖文)으로 기록하게 하셨는데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선생이 신지(神誌)가 남긴 전고비문(篆古碑文)을 보고 작첩(作帖)을 복원해서 傳於世者也라. 세상에 전하게 된 것입니다.


 

환국 시대부터 전수되어 내려온『 천부경(天符經) 』,여기에는 우주론을 바탕에 깔고 하늘과 땅과 인간의 일체관계에 대한 인성론의 문제가 담겨있고, 환국 다음에 배달국의 개창자 배달환웅이 열어주신 우리 한민족의 신관, 신학의 원전『 삼일신고(三一神誥) 』가 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 재상 을파소를 통해 내려온 366가지 인간이 지켜야 될 윤리덕목을 기록한『 참전계경(參佺戒經 ) 』 이것이 우리민족의 3대 소의경전입니다.







강화도 마리산을 비롯해 태백산, 황해도 구월산, 평양의 기림굴 등에 천제를 올린 제천단祭天壇이 있었습니다.

『태백일사』를 보면 제천의례는 환인천제로부터 “새 시대를 열어 가르침을 세우고 신교神敎의 진리로 교화하라”는 명을 받은 환웅천황께서 나라의 의례로 자리잡았습니다. 해마다 음력 10월 중 정기적으로 봉행되던 천제는 후대로 가면서 봄과 가을 한차례씩 거행되었습니다.  이 같은 제천의례 또는 종교의식이 단순히 종교나 신앙차원에 머문 것이 아닙니다.















신교神敎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개개인의 수행修行, 참된 인간이 되기 위한 구도求道의 성격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신교神敎가 가르치는 온전한 인간, ‘참나(진아眞我)’는 본래 조물주께서 내려주신 내 안의 신성神性과 광명을 회복해서 내 자신이 바로 삼신상제님이 머무시는 그릇(궁궐)이 되는 데 있습니다. 제천祭天의식은 그러한 목표를 향한 수행이며 다짐이었습니다.


삼신상제님을 받들고 내 본성을 찾아 ‘참나’가 되고(性通), 나아가 그 깨달음을 삶 속에 실천하면서 나와 이웃이 협력해 상생의 새 세상을 이룩하는 것(功完)이 신교神敎의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런 가르침을 줄여서 표현한 것이 바로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입니다.



개천절은 우리민족에게 가장 의미 있는 국경일입니다. 그런데 이 개천절만 아니라 홍익인간, 제세이화, 광명이세 등 시원문화 코드가 많이 왜곡되어 있습니다. 개천절은 본래 양력이 아닌 음력 10월 3일입니다. 그리고 홍익인간, 재세이화는 단군 조선의 건국이념이 아닙니다.

 


5,800여 년 전, 백두산에서 나라를 개창했던 배달국 환웅천황의 개국이념이 바로 홍익인간, 재세이화, 광명개천이었습니다. 이 사상은 환국의 통치자에게서 전수받은 국통 계승의 정통성을 밝히는 개국이념입니다. 이것은 한민족 시원 문화와 역사를 계승한 것이지 단군 조선의 개국 이념이 아닙니다. 




천부경을 보면 1, 2, 3이 나오고, 운삼사運三四(3, 4) 나오고, 성환오칠(成環五七)에서 5, 7이 나오고, 生七八九 생 7, 8, 9가 나오고, 일적십거(一積十鉅)에서 10까지 해서, 수의 원리가 1에서 10까지 다 드러난 것입니다.

1만 년 전에 1에서 10의 수의 체제를 가지고 있었단 말입니다. 이 지구촌 인류문화사상 처음으로 1에서 10수의 자연수를 발명을 한 것입니다. 이게 무슨 아라비아인들 또는 중동 인도 유럽에서 처음 나온 게 아닙니다.


지금의 동지,소한,대한,입춘,우수,경칩...24절후와 해시계 규표를 태호복희(BC3528 ~ BC3413)씨가 처음 발명한 것입니다. 이것을 시간 공간의 구성 원리로 다시 한 번 계시를 해주신 것이 무엇이냐 하면 도서관(圖書館)이라는 말의 어원이기도 한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원리에 의해서, 1에서 10수의 구성 원리를 보는 것입니다. 『 낙서(洛書) 』에는 1에서 9까지 수가 배열되어 있는데 2 7 6, 9 5 1, 4 3 8, 이것을 서양에서는 마방진魔方陣magic square이라 하며 교과서에도 나옵니다.



미국의 수학자 프랭크 슐츠F.Swetz는『낙서洛書의 유산Legacy of the Luoshu』에서 ‘낙서洛書는 비단길을 통해 동서양을 왕래한 아랍인들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가 인도, 동남아, 중동, 유럽 문화 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서양 문명의 뿌리를 추적해 봤더니 이슬람 문화권에도 낙서가 전달됐고 유대문화에도 낙서가 들어 있더라는 얘기입니다. 2,500년 전 그리스 수학자 피타고라스도 이것을 받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피타고라스가 자연수의 체계에 눈을 뜬 것입니다. 화이트헤드는 오늘의 서양 과학문명은 끊임없이 피타고라스로부터 영감을 받아왔다고 했습니다.

 

서양문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피타고라스는 “모든 것은 수(數)에 의해 규정된다(All things are ruled by numbers).”는 유명한 얘기를 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동서양 문명의 뿌리가 바로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라는 얘기입니다.

낙서洛書의 수를 그대로 옮기면 3차 마방진이 되는데, 가로·세로·대각선의 합계가 모두 15가 됩니다. 마방진은 한마디로 숫자 속에 숨겨진 우주의 질서와 균형을 의미합니다.

 

 

낙서(洛書)는 4,300년 전, 중국에서 9년 홍수가 일어나 우(禹) 임금이 치수공사를 하던 중에 물 속에서 나온 거북이 등에 있는 무늬를 보고 낙서洛書를 그리게 되었습니다. 당시 단군 성조의 맏아들 부루(扶婁) 태자가 아버지 단군 성조의 명을 받고 우(禹)에게 치수 비법을 전해주었습니다. 그 사실이 중국 역사책 『오월춘추』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책을 보면 ‘창수사자(蒼水使者)’가 나옵니다. 창수(蒼水)는 지금의 황해 바다 북쪽에 있는 발해(渤海)입니다.



사자使者가 발해를 건너가서 금간옥첩(金簡玉牒), 금옥과 같이 아주 잘 만들어진 함에다가 치수비법을 넣어 전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행원리로 되어 있어서 ‘오행치수지법(五行治水之法)’이라고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禹)가 9년 홍수를 다스리고 요순시대를 이어 하(夏)나라를 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복희씨가 받아 내린 하도(河圖)와 우(禹)임금이 받아 내린 낙서(洛書)가 중동과 그리스 지역에까지 전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로 인해 서양에서 이미 2,500년 전에 수(數)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서양의 근대 과학 문명과 오늘날 컴퓨터 문명까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서양에서 이진법은 17세기초에 고안되어 나왔는데,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가 주역 이론에 이진법이 함축되어 있는 것을 보고 체계를 정립시켰습니다. 그는 1697년 ‘파리 과학 학술원’에서「이진법 정수론 주해」 라는 논문을 발표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역사적인 논문의 부제가 ‘고대 동양의 태호복희의 괘상에 나타난 이진법 산술이 갖는 의미와 그 효용성에 관한 고찰’ 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나의 불가사의한 이진법의 새로운 발견은 5천여 년 전 고대 동양의 복희왕이 발견한 철학서이며 문학서인 주역의 원리에서 나온 것이다.” 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고 1709년에 복희팔괘와 함께 이진수를 나타낸 분석표를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면서, “주역은 모든 과학의 열쇠이다.” 라는 말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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