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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실재를 보는 것 같이 인식하는 믿음

작성자아비가일 R|작성시간10.02.04|조회수62 목록 댓글 0

영적 실재를 보는 것 같이

인식하는 믿음

2008. 3. 23 주일 (1교)

 

  이 세상의 사물은 대개는 눈에 보입니다. 그리고 이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는 보암직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아름다움 경치라든지 매력적인 이성이라든지 금은보석이나 고급차나 집과 같은 것,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죠? 보암직한 것이 굉장히 많습니다. 인간의 눈은 마음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견물생심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인간은 보는 것에 끌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욥기31장 1절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마태복음 5장 27절 이하 “또 간음치 말라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를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어 버리라. 네 백체 중에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함이요.” 다윗은 성군입니다. 다윗은 거룩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이 지붕을 거닐다가 밧세바가 목욕하는 것을 봤어요. 보지 말아야 될 것을 봤어요. 그때 다윗이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보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외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영성을 믿을 게 못됩니다. 보는 것을 조심해야 됩니다. 지금 이 시대는 배나 더 보는 것을 조심해야 됩니다. 여러분, 지금은 옛날하고 다릅니다. 안방에 있어서도 세상이 되어 가는 일을 다 볼 수가 있습니다. 텔레비전을 통해서 비디오를 통해서 인터넷을 통해서 안방에 있으면서도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습니다. 거기는 봐야 되는 것도 있지만 보지 말아야 되는 많은 것도 있습니다. 꼭 여러분 인터넷에서 극단적인 것 아니더라도 텔레비전만 해도 보는 것도 있지만 보지 말아야 하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사탄이 곳곳에 덫을 설치해 놨다는 것입니다. 텔레비전에도 비디오에도 인터넷에도 덫을 설치해놓고 거리거리마다 이제 무서운 계절이 오고 있습니다. 점점 자꾸 올라갑니다. 올라가고, 올라가고 저 높은 곳을 향해서, ㅎㅎㅎ 천국 길을 가야하는데 자꾸 치마길이가 올라가고 무서운 시대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무서운 계절이 오고 있습니다. 사탄이 곳곳에 덫을 설치해놨기 때문에 보는 것을 조심해야 됩니다.

그런데 보는 것만 조심해가지고는 안됩니다. 적극적으로 봐야 될 것을 봐야 됩니다. 인식해야 될 것을 인식해야 됩니다. 소극적으로 조심하는 것만 가지고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적극적으로 봐야 될 것을 봐야 됩니다. 그럴 때 눈에 보이는 것으로 유혹을 받는 것처럼 역으로 이제는 긍정적인 도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도전을 받게 되어서 하나님이 주시는 배고픔과 목마름, 소원과 열정으로 타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의지적으로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의지적으로 말씀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단계를 넘어서서 정말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던 것처럼 정말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그리고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정말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지 단순히 의지적으로 죄 안 지으려고 노력하고 의지적으로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참 힘든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자가 되는 것은 봐야 되는 것을 봐야 그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고 영광을 보고 적극적으로 봐야 그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보이지 않는 영적 실재를 보는 것같이 사실적으로 느끼는 믿음에 관해서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리고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로 참된 믿음에 관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믿음장이라고 불리는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그랬습니다. 티 엘 오스본은 이 말씀에 근거해서 믿음에 관해서 이렇게 정의를 내렸습니다. “믿음은 당신이 소망하는 것들에 대한 권리 증서이고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증거 해 주는 것이다. 믿음은 당신의 소유로 알고 있는 재산, 설혹 아직 그 재산을 보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 재산에 의한 권리 증서이다.” 이렇게 믿음에 관해서 정의를 내렸습니다.

이것을 좀 더 풀어서 설명해드려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여기서 실상이라는 것은 우리의 감각으로 감촉될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볼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고 맛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즉 물체성이요, 만져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그랬어요. 바라는 것은 소망을 말하는 것인데 이 소망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 안에 실상이 없습니다. 소망에는 우리가 볼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고 맛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소망은 소망일뿐이지 소망은 실상이 아닙니다. 소망한다고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실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소망에다가 믿음을 더할 때 실상, 물체성, 만져서 알 수 있는 것을 주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로 되는데 영, 혹은 마음속에서 실상이 되는 것이고요. 그다음에는 육체, 현실 속에서 실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믿음은 보이지 않는 영적 실체를 실제로 눈으로 보지는 않지만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사실적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에 의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증거라는 말은 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증거 혹은 증명이라고 하는 것은 그 대상이 현실로 나타날 때까지 그 증거 혹은 그 증명이 되는 것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쉽게 말해서 집을 보지 못했지만 집문서를 보고 이것이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 집이 내 것이라는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 실체를 보지는 못했지만 또 땅문서를 보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것이 단지 미래이기 때문에 현재 보이지 않는 것뿐만이 아니고 영적인 실재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여기에도 적용이 된다고 믿습니다. 병이 낫는 것 기도가 응답되는 것 이것은 미래에 되는 것이잖아요. 현재 믿을 때 믿고 난 다음에 미래에 이것이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안 보이지만 약속의 말씀을 가지고 이걸 실상으로 우리가 영으로 받아들이고 믿게 될 때 기적이 일어나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런 것만 대상이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 하나님은 눈에 안 보이시잖아요. 천국과 지옥도 눈에 안 보이잖아요. 눈에 안 보이는 것에 대해서도 이 믿음이 그렇게 적용이 된다는 것입니다. 눈에 안 보이는 것에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눈에 안 보이는 것의 실상, 눈에 안 보이는 것에 우리에게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믿음의 국면에 대해서 가장 잘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은 오랄 로버츠 목사님 책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글입니다. “나는 성경의 모든 것을 믿습니다. 성경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도 매우 실제적인 것들에 대한 증거를 말해 줍니다. 실제로 당신은 당신이 볼 수 있는 것들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필요로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믿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해 놓은 것들이 있으되 우리의 육신의 눈과 귀로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 이것을 즉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는 이러한 것들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함이니라. 너희의 내적인 자아, 즉 영으로만 보고 들을 수가 있느니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보이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많은 불신자들은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신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단순히 존재한다. 이렇게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보다 더 나아간 것입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처럼 실재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실재인 것처럼 반응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습니다. 또 성경이 진리라는 것도 믿습니다. 내세가 존재한다는 것도 믿습니다. 그런데 변화가 안 됩니다. 그것을 안 믿은 불신자와 차이가 없고 그것을 안 믿는 불신자와 똑같이 반응하며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그냥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을 뿐이지 실재적인 인식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실재적인 인식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믿음이고 그것을 통해서 사람이 바뀌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이 이해할 수 있도록 예를 하나 들어보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신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보고 계신다. 이것은 다 믿지요? 그런데 문제는 뭐예요?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시고 하나님이 항상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고 믿는데 우리는 마치 하나님이 그 자리에서 안 계신 것처럼 마치 하나님이 그 자리에서 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서는 사람들이 실재이기 때문에 그 사람을 인식합니다. 그래서 사람 앞에서는 감히 죄를 못 짓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 계시고 은밀한 중에 우리를 보시는 분인데 하나님이 거기에 실재해 계시고 실재로 우리를 보고 계신데 우리는 그 하나님이 보고 계신 것과 생각 없이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신앙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다고 그래서 믿음이 아니고 이것은 불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는 것뿐만 아니라 참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그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실재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느냐 안 보느냐 그것과 상관없이 적어도 영으로, 마음으로 하나님이 거기에 실재하시고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신다는 것을 그것을 사람이 있는 것처럼 실재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이고 이런 믿음에 의해서 사람은 죄를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결해 질 수 있는 것이고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믿음을 사모해야 됩니다. 그냥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실재로 계신다. 이런 사변적인 믿음이 아니고 사람을 우리가 인식하는 것처럼 그분이 거기에 실재로 계시고 나를 보고 계신 것을 이것이 허상이 아니라 실상인 것으로 이것을 실재로 인식할 수 있는 그런 믿음을 사모해야 될 줄 믿습니다. 그런 믿음을 가져야 될 줄로 믿습니다. 반드시 그런 믿음을 갖는 저와 여러분이 되도록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번째로 계시가 실재감을 주는 것입니다. 계시를 말하기 전에 사실과 진리에 관해서 설명을 드려야겠습니다. 사실과 진리가 어떻게 다를까요? 사실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육의 세계의 실상입니다. 진리라는 것은 무엇이냐? 눈에 안 보입니다. 눈에 안 보이는데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영의 세계의 실상입니다. 실상이 아니면 비 진리인 것입니다. 눈에는 안 보이지만 그것이 실재예요. 그것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 바로 진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과 진리는 눈에 보이고 보이지 않고 이것만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고 보이지 않고 이것만 차이가 나지만 둘 다 실상인 것입니다. 사실이고 실재인 것입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진리가 사실보다도 오히려 더 실상입니다. 사람들은 거꾸로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니까 사실이 더 실상처럼 생각하는데 사실은 여러분 진리가 사실보다 훨씬 더 실상입니다.

찰스 캡스가 이것을 잘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영이신 그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 지금 우리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영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눈에 보이는 이것이 진짜 세상이고 영의 세계는 어쩐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육신의 눈으로 영의 세계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의 세계가 진짜 세계이고 우리 눈에 보이는 이것이 진짜세계가 아니다. 성경은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라고 말씀하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 이것이 창조되기 전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존재하고 계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이 홀로 존재하고 계셨고 그것이 사실이었고 실상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만드셨고, 이것이 영원한 것이 아니고 태양도 영원한 것이 아니고 땅도 바다도 영원한 것이 아니고 언젠가는 뜨거운 불에 다 녹아지고 풀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한 것입니다. 태양이 더 이상 빛을 발하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은 영원히 변함없이 존재하실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는 것입니다. 천지가 없어질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이것은 영원한 진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세상에 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진리가 말하고 있는 영의 세계는 더 사실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진리가 말하고 있는 영의 세계는 더 실상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 세상에 사실을 무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있다고 한다면 그는 정신이상자일 것입니다. 정신이상자는 사실을 무시하죠? 우리는 모두 사실에 주의하며 거기에 올바로 적응하며 반응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진리를 무시하는 사람은 얼마나 많습니까? 진리를 무시하는 사람은 굉장히 많습니다. 사람들은 마치 진리가 실상이 아니라 허상인 것처럼 진리를 무시하면서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늦기 전에 반드시 눈에 보이지 않는 실상인 진리의 눈을 떠야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실상이 마치 눈에 보이는 사실처럼 실재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 이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냐하면 각성이라고 부릅니다. 각성이 일어남으로서 우리는 두려워하게 됩니다. 아무리 설교를 들어도 각성이 일어나야 됩니다. 이것이 지식이 아니라 실재라는 인식이 우리에게 와야 됩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이것이 단순히 천국이야기가 아니고 지옥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이것이 실재라는 인식이 와야 그 영혼이 실제로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회개에 이른다고 하는데 그 영혼이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고 고민하게 됩니다. 그리고 회개하게 됩니다. 그리고 거룩하여지고 변화되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제 일차 대각성 운동 때 쓰임 받은 조나단 에드워드라는 분이 있죠? 이분의 사역은 각성이 어느 것인지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가 쓴 <진노한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죄인들> 이런 소책자가 있습니다. 이것은 한편의 설교인데 1741년에 조나단 에드워드가 이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설교를 하는데 설교가 끝나기도 전에 사람들이 울부짖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울부짖으면서 얘기를 했습니다. 심지어는 당장 바닥이 꺼지고 지옥 불에 떨어질 것 같아서 건장한 남자들이 교회기둥을 막 끌어안고 원숭이처럼 매달려서 울면서 자기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자비를 구했습니다. 그러면 이런 일이 왜 일어나게 되었느냐? 이것이 일어나게 된 것은 히스테리가 아닙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 하면 조나단 에드워드의 설교가 당장이라도 영원한 지옥 불에 던져질 수 있는 죄인들의 위급한 상태. 그것이 항상 사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날마다 사람들이 죽기 때문에 실제로 날마다 사람들이 죽고 날마다 지옥 불에 던져지고 영원한 운명으로 돌이킬 수 없는 운명으로 정해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모든 영혼들에게 있는 실상임에도 불구하고 실재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잊어버리고 삽니다. 그것을 무시하고 망각하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름부음 받은 강력한 설교를 통해서 그런 영적인 실재에 대해서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에게 영의 각성이 일어나서 두려워하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제 2차 대각성 운동 때 쓰임 받은 찰스 피니라는 분이 있어요. 이분의 사역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찰스 피니의 날이 선 것 같은 말씀을 들은 청중들은 쓰러져서 혼절하거나 아니면 집에 가서도 마당에서 뒹구르며 땅을 치고 가슴을 치고 머리를 땅에 쥐어박으면서 울부짖으면서 처절하게 회개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찰스 피니의 기름부음 받은 설교를 통해서 성경이 말하고 있는 진리와 영의 세계의 실상을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영으로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에 사실적으로 그것을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런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고 거듭나고 거룩하여지고 그리고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준비되어지는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단순히 강해설교 반지르르하게 잘하고 제자훈련 잘하고 많은 정보를 주고 뭔가 세련되게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이것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적인 세계에 실재성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좌우에 날선 검과 같은 메시지, 그런 설교자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영적인 실상을 물질적인 실상과 같이 현실적인 것으로 보고 반응할 수 있는 그런 각성이 이 시대에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사람들을 회개시킬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하게 하는 비결이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쓰임 받게 할 수 있는 비결인줄 믿습니다. 이처럼 실재감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따라 해 보시기 바랍니다. “실재감이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래서 영적인 실재감을 줄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사람들에게 영적인 실재감을 줄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17장 3절에 보니까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여기서 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는 것은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1장 25절에서 27절에 보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또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 17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그러므로 비결은 계시인 것입니다. 어떻게 사람에게 실재감을 줄 수 있느냐? 어떻게 눈에 보이는 실상처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진리가 말하는 영적인 실상에 대해서 사람들이 실재감을 갖게 만들 수 있느냐? 그리고 두려워하고 그리고 회개하고 그리고 거룩을 추구하고 이렇게 변화되게 만들 수 있느냐? 그것이 바로 계시입니다. 지식만 가지고 안 되는 것입니다. 지식적인 설교가지고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만 잘하는 것 가지고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잘 설명하는 것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역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고 성령이 기름 부으시고 성령이 역사함으로 말미암아 설교가 단지 지식이 아니고 정보가 아니고 설교가 심령 속에 계시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설교가 듣는 사람 심령 속에 계시가 되게 될 때에 이런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식과 계시의 차이가 뭡니까? 계시는 실재감을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지적인 말씀과 계시적인 말씀의 차이가 그것 아닙니까? 분명히 계시는 실재감을 주는 것이고. 그래서 지적인 설교를 하지 않고, 계시적인 설교를 했던 존 웨슬리, 조나단 에드워드, 조지 휘트 필드, 찰스 피니를 통해서 1차 대 각성 운동이 가능했던 것이고 2차 대 각성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이 권면한대로 성경 지식만 좇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에 능통하고 성경을 이해해야 되지만 우리는 성령이 필요한 것을 인식해야 됩니다. 성경의 한계를 알아야 됩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으면 말씀이 성령의 검이기 때문에 제대로 역사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을 사모하고 구해야 됩니다. 목회자들도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을 사모하고 구해야 됩니다. 성도들도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을 사모하고 구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단순히 주님에 관해서 아는 것이 아니고 지혜와 계시의 영을 통해서 우리 마음눈이 밝아져서 꼭 환상을 보거나 꼭 입신해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 눈이 밝아져서 적어도 영으로 적어도 마음으로 주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자가 되어야 됩니다. 시편 27편 4절에 보면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그랬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 17절 18절에 보면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임하니 이는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이다. 이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원하는 것이 지식입니까? 우리가 원하는 것이 단순히 은사나 어떤 신령한 영적 체험입니까? 무슨 천국을 보고 경험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의 아름다움을 보고 주의 영광을 보고 주님의 형상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우리가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하려고 하면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지혜와 계시의 영을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주님의 아름다움을 보고 주님께 점점 끌려야 됩니다. 주님의 영광을 보고 점점 주님을 가까이 하는 자가 되어야 됩니다. 그럴 때 저와 여러분이 정말로 예수님 닮은 사람으로 변화되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 귀한사람이 될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믿음의 눈이 열린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성경을 보게 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세계의 실재를 보거나 혹은 실제로 본 것처럼 행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이것이 환상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니까요. 입신 얘기하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보거나 혹은 실제로 본 것처럼 행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그들의 믿음을 보면서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먼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부자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오늘날로 말하면 일정의 사업가였어요. 그러나 여러분 땅의 기업을 위해서 살지 않았어요. 그는 번영이나 성공을 목적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 이하를 보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에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을 더불어 장막이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 일컬음을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이렇게 써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땅에서 대단한 성을 소유하기 위해서 산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성을 받기 위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본향에서 받을 것을 위해서 본향에서 번영을 위해서 그는 위엣 것을 추구하면서 살아간 것입니다. 토마스 아캠피스가 쓴 장미 동산이라는 책에 보면 이런 말이 나와 있습니다. “영원한 것을 구하고 일시적인 것을 경시하라. 바로 여기에서부터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지혜가 시작된다.” 또 리처드 백스터가 쓴 회심이라는 책에 보면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천국보다 세상을 하나님보다 육지의 만족을 더 사랑하는 자는 누구든지 악인이요, 회심하지 못한 사람이다. 회심한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들이 허무한 것이며 하나님만이 영혼을 만족시켜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불이 위로 타올라 가고 자석의 방향이 자석의 영향을 받은 바늘이 북쪽을 향하는 것처럼 회심한 영혼은 하나님을 향하는 성향을 지닌다.” 또 그의 책에 보니까 다른 곳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악인은 출세하고 세속적인 목표를 달성하는 것을 인생 최고의 중요한 일로 삶는 자들이다 비록 그는 성경을 읽거나 듣고, 신앙의 의무들을 형식적으로 많이 행하며 부끄러운 죄를 짓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부수적인 것이며 그는 결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한 영광을 얻는 것을 자기 삶의 가장 중요한 일로 삶지 않는다. 반대로 그는 하나님을 떠나 세속적인 것들을 즐기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육신을 더 아낀다. 왜냐하면 그는 천국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회심한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구원 받는 것을 자기 삶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와 일로 삶는 사람이다. 그는 거룩한 삶을 사랑하며 거룩하게 되기를 열망한다. 그는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하며 죄를 미워한다. 그는 죄를 짓지 않으려고 소망하며 기도하며 노력한다. 그는 하나님을 위하여 살려고 하는 경향과 성향을 가진다. 만일 그가 죄를 짓게 된다면 그것은 그의 마음과 삶의 반대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다시 일어나서 죄 범한 것을 회개하고 기꺼이 알고 있는 어떤 죄에서도 떠나려고 한다. 이 세상에서는 그에게 매력적인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을 위해서 포기할 수 있으며 하나님과 영광과 소망을 위해서 버릴 수 있다.” 아브라함이 보이는 성을 바라본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성을 바라봤던 것처럼 여러분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렇게 사는 사람입니까? 세상에 성공이 목적이 아니고 여러분이 실제로 얼마나 많은 분들이 보이지 않는 것들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런 사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보여준 참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을 소유하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음은 꿈의 사람 요셉입니다. 그는 마치 모세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 같이 해서 참은 것처럼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사람처럼 실재적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39장 9절에 보니까 “그러니 내가 어찌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그는 하나님이 단순히 계신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단순히 보고 있다는 그런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겠느냐? 그것이 그의 경건의 비결이고 경건의 능력이었습니다.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사람 모세입니다 히브리서 11장 24에서 27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람이라.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오늘날은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보화를 위해서 세상의 재물을 얻기 위해서 믿음을 저버리고 양심을 저버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모세는 반대로 했어요. 모세는 정 반대의 결정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원동력은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다는 말씀에 나타난 것처럼 눈에 보이는 실재보다 더 실재인 눈의 보이지 않는 실재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그것을 주목하고 선명하게 인식한 것입니다 그것이 애굽의 모든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그 엄청난 것을 다 포기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몇 번 정도는 들어보셨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탈리아의 밀라노성당에는 세계의 아름다운 아치의 문이 있습니다. 한 문에는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움 장미의 문향이 새겨져 있어요. 그 밑에는 이름들이 쓰여져 있습니다. “기쁘게 해주는 모든 것들을 잠시뿐이다.” 또 다른 문에는 십자가가 새겨져 있는데 그 밑에는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그 모든 것들도 잠시뿐이다.” 마지막 세 번째 문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오직 영원한 것만이 중요할 뿐이다.”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도 잠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도 잠시고 그러므로 오직 중요한 것은 영원한 것뿐이다. 여러분은 무엇에 초점을 맞추세요? 기쁨을 얻는 것에 초점 맞추면 안 됩니다. 고통을 피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안 됩니다 그것은 불신자들도 그렇게 살아요. 우리는 영원한 것에 초점을 맞춰야 됩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에 초점 맞추고 살아가야 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이해할 때 바울이 왜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우려고 했는지 알 수 있어요. 기쁨을 좇아간 것이 아니라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의 몸에 채우려고 했어요. 모세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위해서 받는 고난은 애굽의 모든 보화와 재산을 합한 것보다도 더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런 삶을 살아가야 됩니다. 단순히 기쁨을 추구하는 자가 아니고 단순히 어려움이나 고통이나 어려움을 받거나 고통을 받거나 조롱당하는 것을 피하려고 타협하는 자가 아니고 뒤로 물러서는 자가 아니고 우리는 영원한 것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 사람이 지혜 있는 사람이고 복 있는 사람입니다.

다음으로 갑절의 영감을 받은 엘리사입니다 엘리사는 도단성에 있을 때 아람군대가 그 성을 둘러쌓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전혀 동요하거나 두려워 떨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그보다 더 훨씬 더 많은 불 말과 불 병거가 자기 자신을 진치고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실상을 인식하는 자는 어떠한 환경에서도 열악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실상을 인식하고 있는 자는 어떠한 환경에서도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거 우리가 걱정하고 우리가 노심초사하고 우리가 염려하는 거 그것의 80~90%는 눈에 보이는 것을 잃지 않으려는 우리의 자기 본능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잃지 않으려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정말 눈에 보이는 것을 위해서 살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영원한 것을 위해서 산다고 그러면 누가 영원한 것을 빼앗아 갈 수가 있어요? 땅에 있는 보화는 도적이 구멍을 뚫고 훔쳐가고 동록이 해할 수 있지만 하늘에 쌓은 보화를 누가 빼앗아 갈 수 있습니까? 우리가 땅의 것을 위해 살지 않고 이 세상 것을 위해 살지 않고 우리가 영원한 것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위해서 산다고 그러면 우리는 요동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동할 이유도 두려워할 이유도 불안에 떨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가 육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적이기 때문에 쉽게 두려움과 염려에 사로잡히는 것이고 영적인 사람이 되기를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영의 실재를 인식하고 하늘의 것을 추구하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고난당하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고난당할 때 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반합니까? 여러분 눈에 보이는 고문과 죽음만 보기 때문에,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실재를 봐야 됩니다. 배신하면 영원히 던져져서 나올 수 없는 지옥의 형벌을 봐야 됩니다. 고문을 보는 것이 아니라 배신하면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지옥의 형벌의 그 실상을 우리가 실재를 인식해야 되고 또 승리 했을 때 하늘나라에서 면류관을 쓰고 영원히 받게 될 그 상급과 영광을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실재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보다 더 실재에 주목하고 거기에 초점을 맞춰야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담대함이 나오는 것이고 결단이 나오는 것이고 타협하지 않게 되는 것이고 승리하게 되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그런 믿음을 갖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으로 사도중의 사도인 바울입니다 바울은 단지 셋째 하늘에 이끌려 올라가는 경건한 사람이 아닙니다. 바울은 단지 많은 환상과 계시를 받는 그런 사람에 지나지 않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바울의 위대성은 입신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바울의 위대성은 많은 환상과 계시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울의 위대성은 육의 세계보다 영의 세계를 더 실재적으로 인식하면서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육의 세계보다 영의 세계를 더 현실로 인식했어요. 그가 감옥에 갇혔을 때 채찍에 맞고 고통 중에 있는데 어떻게 찬양을 부를 수가 있겠습니까? 깊은 감옥에서 어떻게 찬양을 부를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도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 진리가 말하고 있는 영의 세계의 실재를 바라봤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기뻐하라.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니라.” 그가 말씀대로 그는 감옥 속에서 채찍에 맞고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즐거워할 수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보다도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그에게는 더 실재였습니다. 입신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환상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영적 체험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입신하고 환상 본다고 영적인 것이 아닙니다. 진짜 영적인 것은 진리가 말씀하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세계의 실상을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실상보다도 더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더 실재적으로 인식하며 거기에 반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영적인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8절에 보면 바울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바울은 실제로 보이는 것을 추구하지 않았고 오직 위에서 부르는 상을 위해서 달려갔습니다. 바울처럼 우리도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마치 보는 것처럼 인식해야 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이지 않는 천사와 귀신들 보이지 않는 천국과 지옥 보이지 않는 면류관과 상급 이것을 보는 것처럼 영적으로 실재적으로 인식해야 됩니다. 이것이 경건의 능력이고 이것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입니다. 이것이 자기 자신을 극복할 수 있는 힘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있어야 손익계산이 제대로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손익계산이 제대로 안 됩니다.

골로새서 3장1에서 5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었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더 실재인 진리가 말하고 있는 영의 실상을 실재로 인식을 해야 합니다. 손익계산이 제대로 되서 하늘의 지혜가 와서 정말 무엇이 유익한 것인지 제대로 알고 땅의 것을 추구하는 자가 되지 않고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면서 탐욕을 물리치고 위엣 것을 위해서 사는 자가 될 줄로 믿습니다. 웨인 마이어스가 이런 말을 했어요. “당신의 인생에서 행하고 있는 것이 영혼과 결부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당신은 인생을 헛되이 하고 있다.”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이 영혼과 결부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이 땅에서 잠시 높아지고 잠시 성공하고 잠시 명예를 갖고 권력을 갖고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라면 당신은 당신의 인생을 헛되이 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헛된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남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가치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모든 일을 영혼과 결부시켜서 해야 될 줄 믿습니다. 그것이 영원한 것이 되도록 해야 됩니다. 예수님께 옥합을 깨트려서 머리털로 발을 씻겼던 그 여인의 행위에 대해서 “이것을 영원히 기념하리라.” 그랬습니다. 복음이 전파될 때 계속기념하리라. 지나가는 것이 아니고 영원한 일이 되어야 됩니다. 지나가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일이 영원한 열매가 되어야 됩니다. 믿습니까? 여러분이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될 줄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릭 조이너의 책을 보면 자주 이런 말이 나옵니다. 최근에는 모닝스타 코리아저널의 인사말에도 보면 또 다시 그 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영역 안에 충분히 거함으로써 이 영역에서의 삶이 자연적인 영역에서의 삶보다 훨씬 더 편안하게 느껴져야 된다.” 우리가 영적인 영역 안에서 충분히 시간을 보냄으로써 이 영적인 영역이 자연적인 영역보다도 편안해야 됩니다. 영적인 영역이 자연적인 영역보다도 더 자연스러워져야 됩니다. 영적인 영역이 자연적인 영역보다도 우리에게 더 실재적인 것이 되어야 된다.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영성인줄로 믿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 아무도 눈에 보이는 실상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정신이상자나 무시하지요 트럭이 달려오는데 그 실상을 무시하고 달려갔다가는 박살이 나고 죽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세상의 실상을 무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요. 그 실상에 주의하고 그 실상에 바르게 반응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실상을 무시하는 사람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물질세계의 실상은 무시하지 않는데 영적인 실상은 눈에 보이는 실상보다 더한 실상인데 이것이 마치 허상인 것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진리를 무시하고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고 심판을 무시하고 천국과 지옥을 무시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이 사람들은 머리가 미친 사람이 아니고 마음이 미친 사람들입니다. 대부분 미친 사람들은 머리가 미친 것입니다. 뇌에 문제가 생기면 미치는 것입니다. 대부분 미친 사람들은 머리가 미친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미친 사람들이 있어요. 머리는 멀쩡해요. 공부도 잘할 수 있고 박사가 될 수도 있고 대학교수가 될 수도 있고 총장이 될 수도 있어요. 직장생활도 가정생활도 사회생활도 잘할 수 있어요 그런데 마음이 미쳤어요. 머리는 멀쩡한데 마음이 미친 사람들이 이 시대 안에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전도서 9장3절에 보면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일반인 그것은 해아래서 모든 일 중에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머리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후에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이런 사람들이 오늘날 너무나 많기 때문에 오늘날 바른 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오히려 비정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동성연애가 가증한 것이요. 동성연애가 죄악이라는 것은 하나님 말씀이 밝히고 있는 바요, 인간의 양심이 알고 있는 바입니다. 이것은 새로 규정할 문제가 아니고 조상대대로 누구나 인간이라면 아는 문제예요. 누구나 인간이라면 인식할 수 있는 문제예요. 세상이 얼마나 미쳐가고 있는지 동성연애가 죄가 아니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오히려 동성연애를 말하는 사람들은 편협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동성연애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의롭고 바른 사람이 되고 건전한 사고방식의 소유자가 되고 동성연애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편협한 사람들이 되고 잘못된 사람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미쳤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머리는 미치지 않았지만 그들의 마음이 미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미친 사람들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 서울시는 정신병원과 같습니다. 대한민국도 정신병원과 같습니다. 이 지구도 정신병원과 같습니다. 머리가 미친 사람은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음이 미친 상태에서 대통령도 장관도 국회의원도 사장도 교수도 음악가도 되고 마음이 미친 상태에서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고 이 땅을 살아가고 있어요. 이제는 정상이 비정상으로 보이는 그런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누가 정말 미친 것인지 누가 정말 바른 정신을 가진 것인지 심판 날 모든 것이 백일하에 드러날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궤변, 학자들 머리에서 나온 방송인 언론인의 머리에서 나오는 모든 궤변은 햇볕아래서 안개가 쓰러지는 것처럼 다 쓰러질 것입니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동성연애 같은 극단적인 케이스만이 아니고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미친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지나가는 것인데 이 세상은 나그네와 행인처럼 지나가는 것인데 이 세상은 그림자와 같은 것인데 안개와 같은 것인데 여기에 영원히 존재할 인간이 자기의 온 마음을 쏟고 온 노력을 여기에 투자하고 시간을 투자하는 것. 이것은 분명히 그 마음이 미친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그 마음이 미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상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사모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을 사모하고 우리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해야 됩니다. 우리는 순간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추구해야 됩니다.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를 실재로 인식하고 사도 바울처럼 위엣 것을 추구하고 사도 바울처럼 위에서 부르는 부름의 상을 위해서 쫒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이 미쳤다고 해서 여러분도 같이 미치지 마세요. 여러분의 주변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미쳤다고 해서 같이 미치지 마세요. 목사가 미쳤다고 같이 미치지 마세요. 기독교인들이 미쳤다고 같이 미치지 마세요. 정상적인 사람이 되세요. 정상적인 사람들답게 실재를 인식하세요. 진리가 말하고 있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영의 세계는 허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실상입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실재보다도 더한 실재입니다. 그것을 바르게 인식하십시오. 거기에 바르게 반응하십시오. 거기에 바르게 반응하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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