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영성 이야기

[스크랩] 제 2의 축복 `거룩`

작성자주님의 편지|작성시간11.05.23|조회수155 목록 댓글 0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1:15-16절)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의로움을 얻어 죄 사함과 영생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제1축복이라면 거룩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의 속성이 나타나는 제2의 축복이 되고, 그 거룩에 의해 영광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여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은 제3의 축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과정을 두고 성화 또는 성숙,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까지 자람 등으로 표현한다. 그런데 오랫동안 율법적인 신앙의 패턴이 이어져 오다가 복음주의가 등장하여 외식적인 경건과 맹목적인 충성과 미신적인 신앙에 대한 저항으로 은혜의 복음을 전파해 왔다.

 

그로인해 기본적인 구원 곧 제1축복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보편화 된 것 같으나 너무 값 싼 은혜와 책임 없는 자유를 전파하다 보니 그리스도인들이 아주 버릇이 없는 손자 꼴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외하기 보다는 친숙한 아저씨같이 보게 되었다. 죄를 미워하고 세상을 미워하는 하나님 보다 한량없이 참아주고 기다려 주는 친구 정도로 생각할 뿐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만족과 도취를 위해 필요한 영적인 나르시시즘의 사악한 경건(제임스 패커)이 되고 말았다. 겨우 하는 일은 율법이냐 은혜냐 믿음이냐 행위냐 거듭났냐 아니냐 주일이냐 안식일이냐 등의 논쟁만 치열하다.

 

 그러다가 제2의 축복인 거룩에 다다르지 못하고 있다. 당연히 교회와 성도에게서 하나님님의 영광의 면류관의 카리스마와 사랑의 기운이 나타나지 않는다. 제3의 축복으로 가는 징검다리인 거룩을 실종해 버렸기 때문이다. 차라리 초기 청교도 때에나 중세의 수도원 중심 신앙 때에는 세상과 분리와 구별이 된 성결이라도 있었는데 겨우 거듭남, 죄 사함, 구원, 영생을 강조한 복음주의가 오히려 하나님의 거룩에 민감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현재의 누림만 강조하다가 경건을 강조하기만 하면 반 은혜주의의 저급한 발상인 양 몰아버린다. 인터넷에서 아주 마녀 사냥하듯 한다.

 

 한 때는 생명력이 있어 선교의 동력이 왕성하던 복음주의가 이젠 거룩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걱정거리가 되고 말았다. 경건의 능력과 거룩에 대한 배고픔 보다 교회개혁이나 사회와 경제정의를 따지고 있다. 비근한 예로 일본의 대지진에 대해 하나님의 진노라고 말한 목사가 기독교 카페에서 난도질을 당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일본의 각료들 중에는 그들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했지만 하나님이 자연을 통해 일으킨 재앙이라고 인정하는 분위기이다. 불가항력이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한국의 기독네티즌들은 하나님의 의와 거룩과 영광의 잣대를 그들에게 대기를 싫어한다. 이는 그들이 휴머니즘에 푹 빠지고 말았다는 증거이다.

 

 빛과 어둠, 생명과 사망, 세속과 거룩은 극단임에도 이를 간과하고 박애의 하나님으로 자리매김하려 한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오직 사랑만 베푸실 수 밖에 없는 분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하셔서 산 소망이 있게 한 다음엔 바로 거룩하라고 말씀하신다. 주의 십자가의 사활의 은총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거룩하게 되었으니 이제 거룩하게 살아라 하신다. 그 이유는 육체는 풀과 같고 세속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벧전1장) 거룩하지 않은 것에 목숨 걸지 말라는 말씀이다.

 

 거룩하게 되었으니 거룩하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거룩하라. 거룩한 집 곧 성전이 되었으니 거룩하라. 무디는 배는 바다에 있어야 하나 바다(물)가 배 속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말을 했다. 세상이 교회 속으로 들어오면 안 된다. 교회가 성결한 성도보다 기능을 가진 사람, 신앙보다 활동이 왕성한 성도를 선호한다면 그건 세상의 물이 방주 안으로 스며들고 있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부정함에 대해 저항을 해야 할 때이다. 성도의 저력은 거룩에서 나온다. 거룩하지 않고는 구원의 완성인 사랑으로 나아갈 수 없다. 거룩은 영광과 사랑을 잇는 가교이다.

 

 주님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기도의 주소를 제대로 앞세우고는 바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신다. 또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길 세상에 있는 동안 보존되기 위해 진리로 거룩하게 하시옵소서(요17:17) 하신다. 거룩은 주님의 기도이며 우리의 기도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 대해 철저히 못 박혔음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거룩함이 없이는 거룩한 삶과 영광스러운 사랑의 사람으로 진화될 수 없다. 거룩은 성도들의 취미가 아니다. 일부 사람들의 전유물도 아니다. 거룩함을 입은 은혜 안에서 마땅히 나아가야 할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에 의한 의와 더불어 핵심적인 축복이다.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 될 수 없다. 하나님과 하나 되지 않고는 들은 바 복음의 말씀이 사랑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사랑이 없는 기독교는 거룩을 잃어버린 탓이다. 거룩하게 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함을 입은 자로 굳게 서라. 거룩의 허리띠를 띠고 거룩의 신발을 신고 거룩의 지팡이를 짚어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세상에 대해 못박혔음을 순순히 수용하라. 주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에 세례로 순종하고 그 생명을 먹고 거룩함에 나아가 그 영광을 획득하여 사랑을 이루는 경건에 자신의 몸을 헌신하라. 거기서 거룩한 자에게 임하는 신기한 능력과 영광의 축복을 만나게 될 것이다.

 

http://cafe.daum.net/3lmission

 

다음검색
스크랩 원문 : 큰믿음교회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