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짐승처럼 삽니다.
아삽은 정의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왜 의인은 역경을 겪는데 악인은 형통할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기도의 씨름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정의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보다 더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하나님의 나라가 정의가 완전히 실현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행동으로 나가기 전에 먼저 깊은 기도로 나아가야 합니다. 행동하기 이전에 기도, 올해를 지내면서 마음에 깊이 새겨두기 바랍니다. 만약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우매 무지함으로 자신을 짐승이라”고 고백하는 아삽의 고백을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입니다. 신정론의 문제에 대한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지 못하던 아삽은 결국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와서 만족스러운 해답을 찾게 됩니다.
짐승은 자기 배를 위해 사는 존재입니다. 난폭함과 탐욕으로 표현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가끔 우리도 일어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을 보고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라고 비난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어느 순간 우리도 자신이 짐승처럼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탐욕에 사로잡혀 살아가면서 폭력적인 언어와 행동으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바로 그 순간의 사람은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입니다.
자신이 세상의 중심에 서면 어느새 짐승이 됩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왕들이 출전하는 때에 궁에 있다가 오후 늦게 일어나 목욕하는 여인을 보았습니다. 그 여인이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서 싸우는 이방인이지만 충신이었던 헷사람 우리야의 아내라는 사실을 알고도 짐승이 되어 자신의 탐욕을 채웠습니다. 그 불륜이 드러나자 그 남편을 죽이라고 편지를 써서 요압에게로 보냈고, 요압은 짐승처럼 왕의 명령을 받들어 우리야를 죽였습니다. 우리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칼은 이 사람도 죽이고 저 사람도 죽인다.”는 말로 자신이 짐승이라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후에 다윗의 아들 암논은 이복 누이동생을 다말을 욕보이고 버렸습니다. 짐승처럼 행동한 것입니다. 그 일을 원한으로 품던 압살롬은 암논을 죽이고 아버지 다윗을 반역하고 궁에 남겨진 아버지의 후처들과 동침하는 일을 저질렀습니다. 짐승처럼 행동한 것입니다.
왜 성경에 등장하는 다윗의 자식들 가운데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다윗의 나쁜 본보기,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두지 않은 결과입니다. 우리 인생의 많은 문제들은 우리가 자기중심적인 생각으로 짐승처럼 살 때 일어납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모든 삶이 중심에 자리 잡을 때 비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토미 테니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로 사는 법 49가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끔찍한 대학살의 공포를 경험한 수많은 유대인들에게는 돌아갈 나라도, 안전한 피난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600만명이나 학살을 당한 박해속에도 그들은 “구름에 가린 태양이 있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기대했습니다.
1948년 5월 14일, 유대인들은 2,900년 만에 독립국가로서 이스라엘을 건국하게 되었습니다. 단 하루 만에 그들에게는 삶의 중심, 돌아갈 고국과 안전한 피난처가 생긴 것입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드로도 이것을 깨닫습니다. 예수의 부활을 목격하고도 낙담한 그는 밤새도록 절망의 먹구름과 씨름하며 고기를 잡으려 했지만 잡지 못했습니다. 통틀 무렵, 해변에서 한 낯선 남자가 그들에게 한 번 더 그물을 오른쪽으로 던지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그렇게 했는데 그물에 고기가 가득 차서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었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그의 삶에 ‘다시’중심을 예수님께 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해변에 서 있던 사람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처음에 그 분의 부르심은 그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었지만 그는 지금 다시 어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를 찾아와주신 예수님으로 인해 그는 다시 사람을 낚는 어부로 회복되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너무 나쁜 상황,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 끝날 것 같지 않은 절망이 밀려와도 절대 하나님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 밤새 제자들이 허탕을 칠 때 하나님은 그들의 회복을 위해 포기하지 않고 일하셨습니다. 그들이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자 고기를 잡았고, 예수님을 알아보았고, 다시 사랑으로 부르심에 초대받게 되었습니다.
왜 우리가 짐승처럼 살아 갈까요? 하나님을 떠나 자기중심적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올해는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한해가 되기를 당부합니다. 아삽이 세상속에서는 짐승처럼 행동했으나, 거룩한 성전에서 기도하며 해답을 찾았듯이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오른손을 붙들기 바랍니다. “나는 우둔하여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나는 다만, 주님 앞에 있는 한 마리 짐승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늘 주님과 함께 있으므로, 주님께서 내 오른손을 붙잡아 주십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의 특징은 육체와 마음이 쇠약해집니다.
여러분 자신을 믿으십니까? 질문을 바꿉니다. 여러분 자신을 의지하고 인생을 살수 있겠습니까? 사람이란 존재는 절대적인 의지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가 알 듯이 아무도 자기 육체의 건강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저도 혈전약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나빠진 것을 치료하기 위한 약이 아니라 현상 유지를 위한 약입니다.
어런 현실 앞에서 한번 꺽이게 되지만 그래도 정신력은 버틸 수 있다고, 강철같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어제도 독감 증상으로 앓았습니다. 체온이 40도를 넘어 집사람이 잠도 못자고 밤새 걱정하며 돌봤습니다. 육체가 꺽이면 정신력도 함께 꺽어지는 것이 사람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영육이 강건하게 됩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이야기중에 인간의 연약함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마귀의 졸개들이 리비아 사막에서 성인이 되려고 길을 떠난 한 순례자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이 순례자의 발걸음을 돌리게 하려고 세상의 온갖 아름다움과 엄청난 물질, 성적인 쾌락을 연상시키기는등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는데도 그는 예수님처럼 말씀안에서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졸개들이 마귀 대장에게 그 사정을 이야기하자 대장 마귀는 그 순례자에게 접근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귀에 뭔가를 속삭이자 갑자기 순례자는 얼굴 표정이 찌그러지며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말 한마디에 순례자를 무너뜨린 것을 본 부하들은 궁금했습니다. 대장 마귀는 말했습니다. “아주 간단해. 나는 순례자에게게 너의 동생이 방금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가 되었다고 했지. 그 친구도 질투는 못버렸거든”아삽은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자신을 붙들고 계시지만 이 세상에 마음을 두면 결국 자신이 실패할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육체와 마음이 쇠약해지지 않기 위해서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그는 땅의 영화가 아닌 하늘의 영광을 사모하며 살기를 결단했습니다. 새해에는 세상의 그 무엇이 아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의 반석이 되시고, 영원한 분깃(상급)이 되시는 삶을 살아서 영육의 강건함으로 세상을 이기는 믿음의 승리자로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에게 주시는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예배의 자리로 가까이, 말씀안에서 가까이, 기도의 깊은 영성안으로 가까이, 이웃사랑과 봉사를 통해서 가까이, 전도와 선교를 통해서 주께 가까이 가는 예신 가족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렇게 사는 우리에게 아삽이 고백했듯이 복을 주십니다.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의지의 대상)/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말씀으로 인도) /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의 영광)/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피난처가 되심)/ 새해에는 아삽이 받은 이 복을 함께 누리는 예신 가족들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