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사무엘상 2장 11-26절
여호와 앞에서 자라난 사무엘
지난 시간에 엘리와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에 대해 살폈습니다. 홉니와 비스하스의 경우 제사장 겸 사사로 활동하던 자들이었지만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고 할 정도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 행실이 나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행실이 나쁜 원인 가운데 한 가지가 무엇인가 할 때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한 까닭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예배를 소홀히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 맺어야 할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하는 원인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원인 가운데 한 가지를 아비인 엘리의 자세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비록 그들의 행위에 대해 듣고 책망은 했지만, 자녀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여 책망했다기보다는 여전히 자녀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마음으로 책망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엘리의 행실도 보면 제사장으로 있으면서 자기 배만을 위해 살았다고 지적되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이미 그 자신부터가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위한 삶이었기 때문에 자녀들 역시 그런 영향 아래 동일한 행동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런 영향 아래 있다 할지라도 자신의 죄에 대해 아버지 핑계를 댈 수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죄는 모방처럼 보일지라도 본래 그 속에서부터 있는 것이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었을 때 누구 탓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이미 그 스스로가 그것을 선택하여 짓기 때문에 누구 탓을 돌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더더욱 드러내주는 인물이 누구냐 하면 오늘 보게 되는 사무엘인 겁니다.
우선 11절을 보시면 “엘가나는 라마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그 아이는 제사장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니라” 앞선 내용에 보면 한나의 기도가 나옵니다. 사무엘이 출생하고, 그 출생으로 말미암아 감사의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내용을 보면 감사 이상의 내용이 있지만, 기본적인 이해로 하자면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무엘이 어릴 때부터 누구 앞에서 자라났느냐 하면 엘리입니다. 11절 하반부에 보시면 “...그 아이는 제사장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느라” 어떤 면에서 엘리의 두 아들이 아버지를 본만큼 사무엘도 어릴 때부터 엘리의 모습을 봤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8절로 넘어가시면 “사무엘은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섬겼더라” 여기 보면 세마포 에봇을 입었다고 말하는데 소위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종교의식을 드릴 때 입는 옷입니다. 그리고 여호와 앞에서 섬겼다는 것 역시 여호와의 전에서 레위인으로서의 직무를 감당하고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혹시라도 오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말씀드리지만 사무엘상 1장으로 가시면 사무엘의 아비인 엘가나가 어디에 살았느냐 하면 에브라임 산지에 살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혹 엘가나는 에브라임 지파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역대상 6장에 보면 레위인의 자손들을 기록하면서 엘가나와 사무엘, 그리고 사무엘의 아들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27-28, 34), 엘가나는 레위 지파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레위인들은 가나안에 들어와 정복하고 정착할 때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한 자들이고, 오히려 각 지파별로 흩어져 살았기 때문에 레위인으로서 에브라임에 거주하고 있었던 것이 엘가나 집안의 모습인 것입니다. 때문에 사무엘이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를 섬겼다고 할 때 에브라임 사람으로서 여호와의 전에서 봉사한 것이 아니라는 걸 염두해 두셔야 합니다. 오히려 율법이 명한대로, 레위인으로서 여호와의 전에 봉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 사무엘은 레위인이며, 레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봉사하되, 정당한 소명을 따라 봉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사무엘은 아직 레위인의 직무를 수행할 나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에봇을 입었다고 해서 레위인의 직무를 나이와 상관없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수행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여호와 앞에서 섬겼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어린 사무엘의 봉사를 받으셨다는 말인데, 율법이 명한 바를 어기면서 행하는 걸 받으셨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때문에 어쩌면 제단 주변에서 엘리가 시키는 사소한 일들이 그에게 맡겨졌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성경은 뭐라고 말하느냐 하면 여호와 앞에서 섬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달란트 비유로 하자면 어릴 때부터 작은 일에 충성하고 있는 사무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 실질적인 제사장은 누구였느냐 하면 엘리가 아닌 홉니와 비느하스였습니다. 사무엘상 1장 3절에 보면 그것을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맡겨지기는 엘리에게 맡겨지고, 당시 제사장으로 있었던 사람은 누구였냐 하면 홉니와 비느하스였던 것입니다. 당연히 사무엘은 엘리 밑에서 자라면서 엘리 뿐만 아니라, 홉니와 비느하스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 다 보고 자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엘리처럼 되지도,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되지도 않았습니다. 외적으로는 사무엘을 돌보는 것이 엘리였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엘리의 영향 아래 두시지 않았습니다. 제사장의 직분에 대해 보고 있는 것은 홉니와 비느하스였지만, 그들을 답습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씀하스냐 하면 여호와 앞에서 섬겼다고 말씀합니다. 한편으로는 여호와의 전에서 엘리가 시키는 일을 감당했지만, 그 의무를 감당하는 모습이 적어도 엘리의 영향 아래 있던 홉니와 비느하스와 같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누구 앞에서 섬겼느냐? 바로 여호와 앞에서 섬겼습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본 말씀 17절을 보시면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그리고 나오는 게 18절 사무엘에 관한 내용입니다. “사무엘은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섬겼더라” 홉니와 비느하스는 여호와 앞에 그들의 죄가 심히 크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섬겼다, 봉사했다 이렇게 대조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의 경우 외적으로 보자면 여호와를 섬기는 직분으로 있었지만 실제로는 여호와를 대적하고 있었다면, 사무엘은 그의 소명을 따라 그리고 그의 직분을 따라 정당하게 하나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그럼 사무엘이 여호와 앞에서 섬길 수 있었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지난주 홉니와 비느하스의 경우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했기 때문에 악을 행했다, 여호와 앞에서 그 죄가 심히 큰 행동을 했다고 했는데, 사무엘의 경우 홉니와 비느하스와는 대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반대로 생각해야 하는가? 다시 말해 그가 여호와를 섬겼다고 말할 수 있는 원인이 여호와의 제사를 소중히 여겼기 때문인가? 그 스스로 여호와의 제사를 소중히 여길 수 있었기 때문인가? 그가 그만큼 괜찮은 사람이기 때문인가?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이 남달라서인가? 물론 사무엘은 어릴 때부터 그의 충성심이 남달랐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 성경을 통해 이 문제를 먼저 살피자면 사무엘이 여호와 앞에서 섬길 수 있었던 원인이 사무엘 자신에게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담 이래로 정상적인 출생으로 태어나는 모든 후손들에게는 전적인 타락, 전적인 부패성이 그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달리 말하면 인간이 인간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가? 아무도 없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6장 4항에 보면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 본래적인 부패로 인하여, 우리는 모든 선을 전적으로 싫어하고, 선을 행할 수 없으며, 선을 대적하게 되었고(롬5:6, 7:18, 8:7, 골1:21), 전적으로 모든 악에로 기울어져서(창6:5, 8:21, 롬3:10-12), 모든 실제적인 죄들을 생겨나게 하기에 이르렀다(약1:14,15, 엡2:2,3, 마15:19).” 단지 사람이 만든 신앙고백이 그렇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을 말하기 때문에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구절만 말씀드리면 로마서 3장 10절에서 12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이게 타락한 본성을 가진 인간의 모습입니다. 아담 이래로 모든 인류가 여기에서 예외 된 인물이 없습니다. 모두가 다 여기에 속합니다. 유일하게 속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사무엘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는가? 그것도 엘리와 그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를 보면서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가? 오늘 본문 맨 마지막에 있는 26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 어떻게 보면 뉘앙스 자체가 사무엘이 자랄 때 바로 앞 구절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홉니와 비느하스와 같이 아니하기 때문에 하나님도, 사람도 그를 인정해 주는 듯 보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한편을 보면 그렇게 말하기도 하는 구절들이 있고, 이 말씀 역시 그렇게 생각해 볼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무엘이 자랄 때, 특별히 엘리 밑에서 그리고 홉니와 비느하스를 보면서 자랄 때 그들과 같은 자로 자라지 않은 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에 달린 문제라고 알리고 있는 것이 전 성경의 대답이고, 오늘 본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먼저 앞서는 것이고, 그 은혜가 그를 붙들었기 때문에 홉니와 비느하스와 같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혹 여기서 좀 혼동스러워 하시는 분들이 있을까 말씀드리지만 사람이 뭔가 잘하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가 앞서기 때문이고, 사람이 좀 못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안 주셔서 그렇다고 말하기보다는 지난 주 본 것처럼 그들에게 잘못이 있다고 말하는 것을 혼동스러워 하지 마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이런 형태로 진술하는 것이 보편적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의 자녀들과 사무엘을 비교해 보면 분명 다른 모습이 있습니다. 그리고 좀 있다가도 살피겠지만 엘리와 엘가나 가정만 보더라도 분명 차이기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차이가 근본적으로 사무엘이나 엘가나 가정의 탁월함이나 자랑꺼리로 등장하는 것은 아님을 성경으로부터 배우셔야 합니다.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가 저들과 함께 하시고, 보호하시며, 지켜주시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반면 엘리나 홉니와 비느하스의 경우 사무엘과 반대적인 면이 있기 때문에 은혜를 못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해야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면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은혜를 주고자 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만 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악에 대해서는 악을 행한 그 사람의 죄악 때문이라고 분명히 밝혀 말한다는 걸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보다 앞서 죄에 대하여 회개할 기회를 주기도 하시지만, 결국 그 스스로 회개하지 않는 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그 자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사무엘이 자라면서 계속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 앞에서 섬길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지키고, 보호했기 때문입니다. 자주 말씀드리지만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 보면 바울을 통해 말씀하시는 유명한 고백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시작도 은혜고, 그 과정도 은혜입니다. 그래서 오직 은혜일 수밖에 없습니다. 시작부터 과정, 그리고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하나님 앞에서 참되게 섬길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시작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이걸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종종 온전한 사람,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사람이라고 표현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노아에 대해 말할 때 성경은 그렇게 기록하고 있고, 또한 욥에 대해 말할 때 성경은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표현은 그들이 본래부터 괜찮은 존재라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란 걸 아셔야 합니다. 무엇이 선행하느냐?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도록 한 하나님의 은혜가 앞서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걸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들 스스로 그런 존재로 있을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성령의 놀라운 사역으로 말미암아 그런 존재로 세움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임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들이 잘나서, 그들이 남달라서가 아니란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모 된 자로서 우리가 우리 자녀를 위해 해야 할 일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외에는 없기 때문에 그 은혜를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그들의 신앙의 위해 노력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그 노력도 헛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녀를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일은 한시도 멈출 수 없다는 걸 인정하셔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리고 내 노력과 내 열심으로서는 어떤 선한 열매를 맺도록 만들 수도 없기 때문에 무엇보다 자녀를 위하여 기도하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걸 철저히 인정하셔야 합니다. 믿는 부모로서 기도하지 않는다? 그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 없다고 무언으로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기도의 일차적인 내용은 내가 할 수 없다는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이것이 기도입니다.
그리고 기도의 내용으로는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자라갈 수 있도록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세상 앞에서가 아닙니다. 사람 앞에서가 아닙니다. 누구 앞에서냐? 하나님 앞에서입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우리 자녀를 세상 앞에서 살아가도록 한다면 결국 세상에서 이름을 날리는 자로 있어야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연히 세상의 가치 평가 기준이 그 사람의 가치 평가 기준이 될 것입니다. 무슨 대학을 나왔는가? 어떤 직장을 다니는가? 몇 평의 집에서 살며, 무슨 차를 타고 다니는가? 그러나 성경은 그 방향이 아닙니다. 또한 우리 자녀를 사람 앞에서 살아가도록 한다면 죄악된 본성으로 인하여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하는, 마치 외식주의자와 다를 바 없는 인생으로 치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방향도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누구 앞에서 살아가는 자로 있어야 한다고 말하느냐? 하나님입니다. 비록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보이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존재하시되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시기 때문에 언제든 어디서든 우리를 주목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까지도 관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 앞에서 살아간다는 건 그저 행동만이 아니라 우리 마음까지도 살피는 그런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녀를 위해 기도해야 할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도록 해 주시옵소서. 그런 은혜를 더해 주시옵소서” 소위 라틴어로 ‘코람데오’(Coram Deo)라고 하는데, 하나님 앞에서 살도록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과 연계되어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 보이지 않지만 이 말씀을 통해 알려주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바로 말씀 교육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난주 말씀드린 것처럼 그런 의미에서 예배의 소중함을 교육해야 하고, 또 말씀을 중심으로 교육하는 일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부모로서 말씀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는 삶, 그리고 그것 때문에 부단히 애쓰고자 하는 삶의 모습이 모범으로 자녀들에게 비춰져야 한느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하면 다 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하기만 하면 무조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것이다.”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사무엘도 보면 자녀를 낳게 되고, 그 자녀들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게 됩니다. 그런데 그 아들들은 어떤 자들이냐? 사무엘상 8장으로 가시면 이런 대목을 만나게 됩니다. “사무엘이 늙으매 그의 아들들이 이스라엘 사사로 삼으니 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삼상8:1-3) 여러분, 사무엘은 우리가 방금 본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 심지어 나중에 사무엘 스스로 어떤 말까지 하느냐 하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치 않겠다.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이라”(삼상12:23)고까지 말한 그였습니다. 그렇다면 분명 그의 생에 있어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기도했을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하되 끊임없이 권하는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당연히 그 안에는 누구도 포함되어 있느냐? 그의 자녀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녀를 위하여 기도히며, 자녀들이 잘못할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하는 일이 반드시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나 사무엘상 8장에서 어떻게 말하느냐? 자녀들이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아 판결을 굽게 한다고 말합니다.
그럼 사무엘 역시 엘리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인가? 그도 역시 자녀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했는가? 그렇게 볼 수는 없습니다. 결과가 같기 때문에 원인도 같을 것이란 사고는 그저 결과주의 사고밖에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엘리가 책망을 받은 것처럼 사무엘이 책망을 받았는가를 봐야 합니다. 성경에 그런 내용이 있는가? 없습니다. 특히 사무엘과 엘리, 혹은 홉니와 비느하스를 대조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때 사무엘이 잘못했다면 분명 그것에 대한 기록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기록이 없다는 것은 사무엘이 하나님보다 자녀를 더 사랑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오히려 자녀를 위하여 기도하고, 말씀으로 권면했지만 사무엘의 아들들은 그들 스스로 아비의 길을 버리고 죄악된 길을 걸어갔다는 것으로 보여주고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한편으로는 엘리가 어느 정도 원인으로 있는 경우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무엘처럼 기도하면서 가르쳤는데도 올곧게 자라지 않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게 뭔가? 엘리의 경우에서는 부모 된 우리 자신을 잘 돌아봐야 하는 것이고, 사무엘을 통해서는 돌아보되 그래도 내 마음대로, 부모 마음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마음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그냥 있어야 하는가? 그건 부모로서의 의무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녀를 맡기셨다면 사무엘이 말하는 것처럼 마땅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것이 부모로서 마땅한 의무입니다. 엘리처럼 자녀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해선 안 되는 것이고, 자기 배를 채우는 자로 있어선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무엘처럼 하나님 앞에서 신앙과 삶을 영위해 나가야 합니다. 정직해야 하고 성실해야 하며, 기도하는 자로서 겸손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자녀의 문제가 우리 마음대로 되는 문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참 신앙의 부모라면 더더욱 기도할 수밖에 없는 자인 겁니다. 하나님께 달리 문제기 때문에, 우리에게 달린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만 기도하는 자인 겁니다. 그래서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께서 저들 마음속에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도록 기도하는 자로 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방치한다? 지난 시간 말씀드린 신명기 6장의 말씀에서처럼 자녀를 신앙 안에서도 키우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이웃을 향하여 흘러갈 수밖에 없고, 이웃에게 흘러가는 사랑이라면 마땅히 식구, 친척과 같은 자들에게는 더더욱 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앙을 가진 부모로서 하나님을 참되게 사랑한다면 자녀를 사랑하되 그 자녀를 위해 기도하며, 또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교육하셔야 합니다.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그리고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항상 말씀을 교육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성경의 사고가 나의 사고가 되도록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성경의 사고가 우리 자녀들의 사고가 되도록 노력하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 19절 이하를 보시면 사무엘의 부모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먼저 19절을 보시면 “그의 어머니가 매년 드리는 제사를 드리러 그의 남편과 함께 올라갈 때마다 작은 겉옷을 지어다가 그에게 주었더니” 비록 기도함으로 마치 응답을 주신 것처럼 보이는 아들이었지만, 그것도 그렇게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얻은 아들이었지만 한나는 사무엘을 온전히 여호와께 드렸습니다. 그러나 드린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기 보면 매년 드리는 제사를 드리러 그의 남편과 함께 올라갔다고 말합니다. 결코 정해진 절기에 소홀함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되 경외함을 가지고 나아오는 저들의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엘가나 가정의 모범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올라갈 때 작은 겉옷을 지어다가 사무엘에게 주었다고 말합니다.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렸지만 여전히 관심의 대상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관심의 대상인가? 물론 부모로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특히 여기에 겉옷을 지어다가 주었다고 말하기 때문에 어떤 면에선 육적인 필요에 대해 채워주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인가? 그렇지 않다고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사무엘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때 그렇게 그 마음을 드리면서 기도했던 것이 한나의 모습으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귀한 아들을 하나님께 다시금 드렸습니다. 본래 구별된 레위 지파 출신이지만, 다른 의미에서 하나님께 드린 것이 한나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께 드린 사무엘에 대한 관심이 단지 육적인 것만을 채우는 자로 있었을까? 오히려 낳기를 위해 기도한 것처럼 그가 하나님께 드려진 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세워지기를 기도하지 않았을까? 당연히 사무엘을 위하여 기도하는 자가 바로 한나요, 그 남편인 엘가나였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지금 목회자로서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 부모님 마음에 목회의 길을 갔으면 하는 마음을 주셨고, 어릴 때부터 그것을 듣고 자랐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런 과정 속에 저를 이곳까지 인도하셨습니다. 그럼 목회자가 되었기 때문에 끝이냐? 목회자가 되고 나서도 저희 부모님이 저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겠는가? 당연히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바른 목회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개척도 했기 때문에 물질의 필요도 민감하신 듯 하지만, 물질에만 민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쓰임 받기를 기도하시는 겁니다.
엘가나의 가정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매년제를 드릴 때 사무엘이 필요한 옷만 지어 입힌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지어 입혔지만 그를 위해 분명 기도하는 가정으로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사무엘도 기도하는 자였지만 이미 그에게는 어떤 은혜가 있었느냐 하면 기도하는 가정을 만난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하는 부모, 기도하는 자녀!
심지어 하나님께선 이 가정 위에 놀라운 축복도 하시는데, 20절과 21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엘리가 엘가나와 그의 아내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게 다른 후사를 주사 이가 여호와께 간구하여 얻어 바친 아들을 대신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니 그들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매 여호와께서 한나를 돌보시사 그로 하여금 임신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물론 지난 시간에 본 것처럼 엘리는 제사장다운 제사장의 모습은 아닙니다. 열매에 있어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선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을 통해 축복하십니다. 달리 말하면 비록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아들의 아비요, 심지어 그조차 자기 배만을 위한 인생이요, 하나님보다 아들들을 더 사랑한 그런 사람이지만 그런 그조차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막을 수는 없다는 걸 더욱 확실히 보여주고 있는 내용인 겁니다.
여러분, 성경에 보면 간혹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데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는 것처럼 말하는 경우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무엘이 죽은 뒤 사울이 누굴 찾아가는 일이 있느냐 하면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는 일이 있었습니다. 찾아가서 뭘 하느냐? 사무엘을 불러내라고 요청합니다. 그래서 불러냅니다. 물론 불러냈다고 할 때 실제 사무엘을 불러낸 것이 아니라, 악한 영이 사무엘 모양으로 나타났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그 악한 영이 어떻게 말하느냐? 실제 사무엘이 사울에게 했던 말을 동일하게 합니다. 물론 무조건 똑같이 말한다고 해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말을 누가 하느냐가 중요하긴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은 악한 영이라 할지라도 결코 막을 수 없다는 걸 보여주는 단적인 예인 것입니다.
때문에 비록 엘리 자신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분명 흠이 많은 자였지만 그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특별히 여기 보면 엘가나 가정을 축복하게 됨을 보여줍니다. 무엇보다 자녀의 복을 더하셨고, 또한 하나님께 바친 아들 사무엘이 누구 앞에서 자라게 되느냐 하면 여호와 앞에서 자라는 그런 은혜를 받았던 것입니다.
여기서도 우리가 좀 생각해 볼 내용이 있습니다. 자녀의 축복이라고 해서 무조건 자녀는 다 축복이 아니라 그 자녀가 어떻게 자라나는가가 중요합니다. 구약 당시만 해도 자녀가 없는 것이 매우 서러움을 당할 정도로 자녀 자체가 축복이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이미 사무엘상 1장을 통해서도 그것이 잘 드러납니다. 한나가 아이를 가지지 못할 때 브닌나로 인하여 괴로울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분명 자녀가 축복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자녀가 어떻게 자라는가?” 이것이 더 중요합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녀의 복을 더하셨다고 할 때 단지 자녀의 복, 숫자 상에서 복을 더하셨다고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사무엘이 여호와 앞에서 자란 것처럼 나머지 자녀들도 그런 모습으로 자라났을 것이고, 그것이 지금 엘가나 가정 가운데 임한 하나님의 복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무엘은 하나님 앞에서 섬길 뿐 아니라 그런 섬김이 한시적이지 않았습니다. 여기 보면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라고 되어 있는데, 자라면서 쭉 여호와 앞에서 행하는 그런 모습이 되었습니다. 이런 복을 누가 받았느냐? 엘가나 가정이 받은 것입니다.
저는 이 복이 믿음의 가정 가운데 더욱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여호수아를 통해 고백하게 하신 것처럼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수24:15)는 그 고백이 1세대뿐 아니라 2세대, 3세대 계속해서 이어져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성경 어딜 봐도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한쪽은 하나님을 향하여 발을 담구고 있지만 또 다른 한 쪽은 세상을 향하여 여전히 담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 사랑해야 하는데, 하나님도 사랑하는 그런 혼합주의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녀에게 하나님만이 가장 큰 복이라 가르치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복이라고 가르칩니다. 아니 직접 가르치지는 않지만 우리가 몸소 그렇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보다 더 관심이 그들의 미래를 결정하는 듯 보이는 공부에 가 있습니다. 오늘날 외모지상주의가 판을 치고 있기 때문에 키는 몇 센티, 몸무게는 몇 키로를 따지기도 합니다. 그걸 위해 기독교에서 받을 수 없는 요가까지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미 범신론적인 사상의 뿌리를 두고 있지만 그것이 아무런 거리낌이 되지 않습니다. 오로지 각선미를 만들고 복근을 만들기만 하면 되는 결과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이게 오늘날 기독교인의 현실입니다. 세상에 대해선 부지런하지만 신앙에 대해선 너무도 게으른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의 백성인데도 세상에 대해서만 부지런합니다. 매우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욥이란 인물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욥기 1장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4절과 5절을 보시면 “그의 아들들이 자기 생일에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의 누이 세 명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더라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욥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그렇게 자기 자녀들의 영적인 상태를 살피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은혜가 오늘 말씀을 통해 여러분에게 있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잔치도 하지 말라. 이걸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운동도 하지 말고 육체를 위하는 모든 일을 폐하라. 이걸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가? 여러분의 영혼이 더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더 중요하다면 여러분의 자녀의 영혼도 중요함을 잊지 마시란 것입니다. 때문에 부모가 되었다는 건 무엇보다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살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걸 누가 했느냐? 욥이 한 것입니다. 반면 영적인 상태를 살핀 듯 보이지만 결국 자신의 영혼을 살피지 못한 사람이 누구냐? 엘리입니다. 그래서 세상적인 유익을 따라 나아갔고, 자녀들 역시 세상적인 유익을 따라 나아가는 그런 자들로 있었음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여러분, 부모의 소명은 낳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낳고 키우셔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자녀가 육신만 입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역시 영적인 존재란 걸 명심하셔야 합니다.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영적인 필요를 채워줘야 할 책임이 부모에겐 있는 겁니다. 무엇보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랄 수 있도록 애쓰셔야 합니다. 세상 앞도 아닙니다. 사람 앞도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이지 않는다고 아니 계신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계시는 그 하나님 앞에서 자라가도록 애쓰셔야 합니다. ‘코람데오’(Coram Deo)
그러기 위해 여러분이 달라지셔야 합니다. 엘가나와 한나처럼 기도하는 부모가 되어야 할 것이고, 또한 사무엘이 그 백성들을 향하여 선하고 의로운 길을 가르칠 것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그렇게 가르쳐야 합니다. 그것이 부모의 의무요, 나아가 교회의 의무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러한 의무를 육신이 바쁘다는 것으로 핑계 삼지 마십시오. 육신이 바쁘면 그 바쁜 육신을 내려놓을 줄도 아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쁜 육신으로 인하여 영혼이 죽어가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0장 28절입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부디 이 사실 앞에 우리 영혼이 더욱 살 찌도록 말씀으로 채우시고, 나아가 우리 자녀들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도록 더욱 노력을 기울이는 성도의 가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