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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818설교 / 누가복음16장19-31절 / 죽음,그리고그이후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3.08.18|조회수379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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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619-31

죽음, 그리고 그 이후

 

누가복음 1613절을 보면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말씀하시면서 14절 이하 18절에서 바리새인의 특징 중 두 가지를 언급합니다. 첫째는 1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고, 둘째는 1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은 어떤 자인가 하면 돈을 좋아하기 때문에 앞서 13절 말씀에서 읽은 것처럼 하나님보다는 재물을 더 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재물을 중히 여긴다는 것은 달리 표현하자면 재물을 섬기는 자입니다. 또한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기 때문에 사람에게는 칭찬을 받을지 몰라도 결코 하나님께는 칭찬을 받을 수 없는 자가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이런 바리새인을 의식하면서 교훈하고자 하셨는지 오늘 본문은 나사로라 이름한 거지와 한 부자의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기록을 해 놓고 있습니다. 종교적 형태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만 실상은 이 세상의 것, 특별히 돈을 섬기며 자신을 섬기는 자에게 죽음이 있음을 가르치고 또한 죽음 이후의 삶이 있다는 걸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무엇보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매우 큰 부자와 그와는 대조적인 거지를 들어 설명합니다.

먼저 이들의 지상에서의 삶은 어떠했는가? 부자에 대해서는 이렇게 소개를 합니다. 19절을 보시면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얼마나 부자였는지 의식주에 있어서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의식주 때문에 근심하고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호화롭게 즐길 수 있는 수준, 그것도 날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넉넉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12:22) 이것으로 고민하며 살지 말라고 하시는데, 내용적인 면에서는 틀리지만 정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않는 사람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한 부자의 모습입니다. 아니 먹고 입는 것이 넉넉하기 때문에 또 다른 의미에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고민하면서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는 매우 큰 부자이며, 매일 매일이 호화로운 잔치의 연속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반면 나사로의 경우 이렇게 소개합니다. 20절과 21절을 보시면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나사로의 삶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부자와는 너무나도 극명하게 차이가 납니다. 일단 거지입니다. 빌어먹는 사람! 그러나 일을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나중에 어디로 가느냐 하면 천국에 갑니다. 천국에 간다는 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믿는 자이고, 믿는 자에게 명하고 계신 말씀 중 하나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3:10)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당한 신앙을 가졌다면 일할 수 있는데도 거지로 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는 어떤 면에서 몸이 많이 좋지 못한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 20절에서 헌데 투성이로 부자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로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몸 상태가 좋지 못한 상태에서 대문 앞에 버리진 채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구걸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있을 때 매일 매일 잔치를 베푸는 이 부자의 집 앞에서 남는 것, 버리는 것으로 주린 배를 채우려고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오늘 본문에 보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고 되어 있는데, 그만큼 비참한 처지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렇듯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삶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그런 삶입니다. 아마 세상의 극과 극을 비교해 보라고 한다면 지금 부자와 나사로의 삶으로 비교해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대조적인 삶과 더불어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부자의 경우 매일 매일 잔치를 하여 많은 음식물들이 남았을 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면 분명 율법의 정신을 따라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사랑 때문에 이웃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집 대문에 있는 거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자에 대해 거지를 배려했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이웃 사랑의 정신이 없는 것입니다. 아니 이웃 사랑의 근거라 할 수 있는 하나님 사랑이 그에게는 없는 것이고, 하나님 사랑이 없는 만큼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임이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니 일반은총의 면에서만 보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어려운 사람을 보면 도와주고자 하는 것이 그나마 보편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모습도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이 부자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조차 상실한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부자요, 자기만 아는 자, 부자로서 어려운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 자, 그가 오늘 본문에 나오고 있는 부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칼빈의 경우 재밌는 해석을 하기도 하는데, 다음과 같이 이 부자를 평합니다. “그의 극한 불경건과 짐승보다 더한 잔혹성은 그로 하여금 이 개들이 베푸는 자비조차도 본받지 못하게 했다무슨 말인가 하면 개의 경우 헌데를 핥았습니다. 그런데 그 핥는 행위를 뭐로 생각하느냐 하면 마치 개가 아픈 곳을 핥아 위로해 주는 것으로 해석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부자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자는 개만도 못하다고 해석해 놓고 있는 것입니다. 개만도 못한 사람, 그가 바로 이 부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런 극과 극으로서의 삶, 그것도 지상에서의 삶이지만 오늘 본문은 동일하게 찾아오는 것이 있다고 우리에게 알립니다. 그것이 뭐냐? 죽음입니다. 거지인 나사로에게도 죽음이 찾아왔고, 그렇게 호화롭게 생활하던 부자에게도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22절과 23절을 보시면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결국 죽음이라는 문제는 거지건, 부자건 인간에게 있어서는 피할 수 없는 과정으로 찾아오는 것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가난하고 어렵게 살아도, 반대로 아무리 부자로서 떵떵거리며 살아도 죽음이라는 문제는 누구를 막론하고 다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5에 보시면 아담의 계보가 나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보다 훨씬 더 오래 살았습니다. 대표적으로 몇 사람만 언급하면 아담은 930(5:5)까지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가 가장 오래 산 사람 므두셀라는 969(5:27)를 살았습니다. 노아의 아버지인 라멕은 777(5:31)를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창세기 5장이 주는 교훈 가운데 한 가지가 무엇인가 하면 그렇게 오래 산 사람이라 할지라도 에녹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다 죽음을 피하지 못하더란 것입니다. 마치 죽음이라는 것이 인간이 반드시 지나가야 할 과정, 결코 피할 수 없는 과정으로 있다는 걸 알려주기나 하는 것처럼 몇 세를 살고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이렇게 반복해서 기록해 놓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죽음의 궁극적인 원인은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 명령을 통하여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 사실이 그대로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원죄, 그리고 그 원죄로 말미암은 자범죄 때문에 죽음이라는 형벌을 면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삶이 있다는 데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죽음 이후의 삶은 죽음 이전의 삶과 같이 유한한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시간, 아니 시간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없는 영원한 삶을 살게 된다는 걸 말씀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불교처럼 인생이 돌고 도는 것이 아니며, 또 어떤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죽음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의 삶이 있고, 죽음 이후의 삶이 이 세상처럼 유한한 것이 아니라 무한하다, 영원하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나사로의 경우 22절에서 본 것처럼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의 품이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이 장차 안식할 처소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라는 말을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그와 함께 살아가게 될 그런 처소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천국을 일컬어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거지 나사로는 그의 삶이 거지로서 가장 비참하다면 비참할 수 있는 삶을 이 세상에서 살았지만,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인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비유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비유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이들도 있는데,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 세상에 대하여는 가진 것이 없는 자, 바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통칭이 거지 나사로인 겁니다. 그러나 부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입니다. 일반은총의 면에서 보더라도 인간성이라는 걸 상실한 그런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사로와는 전혀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세상에서는 남부럽지 않게 살았지만, 죽음 이후 부자가 간 곳은 어디냐? 음부, 즉 지옥에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고통 가운데 살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참된 복이란 무엇인가? 그저 세상의 복을 참된 복이라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잘 살아봐야 죽음 이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인생이라면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그런 복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땅의 모든 나라를 차지하는 것보다 영원한 행복이 있는 곳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지더라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면 그것은 진정한 축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면 영원한 고통의 운명에 처하는 것은 백 개의 생명을 대신 주고라도 구속되어야할 두려운 일이다. 가장 큰 복 중의 한 가지가 뭐냐? 천국을 소유하는 복입니다. “...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15:1)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가장 큰 복으로 있는 것이고, 그분과 영원히 살아갈 수 있는 천국이 어떤 면에서 우리에게 복의 내용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잊지 말아야 될 중요한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아무리 거지같은 인생이라도, 이 세상에서의 삶이 마치 거지와 같이 고생하고 어렵게 지낸다 할지라도 그것 자체가 영원한 저주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아니 그런 삶은 이 세상에서의 저주도 아니라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지일지라도, 또한 거지와 같은 삶을 살아간다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에 대한 소망은 이 땅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아는 자로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최고 상급이시고, 그런 분을 우리 주님으로 모시고 살기 때문에 세상에 대하여 거지인 것이 저주는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없더라고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자!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최고 상급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가진 이상 우리는 다 잃어버려도 모든 것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이 부자처럼 산다고 해서 그것이 곧 영원한 축복으로 생각하지도 마셔야 합니다. 아무리 부자일지라도 죽음 이후에 그것을 가지고 갈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좀 나은 삶이기에 복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주고 있는 교훈입니다. 이미 우리가 살폈지만 빌립보서가 그것을 말했던 것 아닙니까?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3:8). 이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더불어 성도들이 교정해야 할 것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바로 죽음에 대한 생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오래 사는 걸 축복으로 생각합니다. 반면 일찍 죽는 걸 불쌍하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사할 때 어른들에게 이렇게 인사하기도 합니다. “오래 사세요!”, 혹은 오래 오래 건강하게 사세요!” 장례식만 가보더라도 죽었다는 것 때문인지, 아니면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다는 것 때문인지, 믿지 않는 사람들의 대성통곡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그만큼 죽음 자체에 대해 부정적인 면이 강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 확인하는 것은 성도에게 죽음은 결코 부정적으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성도에게 있어서 죽음은 이 땅에서의 고생과 고통을 영원히 잠재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지 나사로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몸이 좋지 못했습니다.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먹어가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사람들의 눈치는 얼마나 받았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삶을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그에게 나타난 것은 하늘의 영광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때문에 성도에게 있어서 죽음은 그렇게 부정적인 것만은 아닌 것입니다. 비록 죄로 인하여 죽음이 왔지만, 그래서 죽음이 형벌의 한 형태이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죽음은 성화의 완성이요, 이 세상의 모든 수고와 슬픔에 대한 이별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죽음 앞에서 한없이 슬퍼할 수만 있는 것은 아닌 사람들입니다. 이걸 명심해야 합니다.

간혹 성도들의 장례식장에서도 한없이 슬퍼하는 유가족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물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단지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다는 차원에서의 아쉬움이 아니라, 죽음 자체가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모습이 있다면 그것은 죽은 사람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그렇게 슬퍼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성도는 잊지 마셔야 합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성도에게 있어 죽음은 부정적이지 않습니다. 죽음이 비록 인생에 있어서는 이 땅에서의 이별이고 그래서 슬퍼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의 다름은 성도의 죽음이 결코 부정적이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오히려 더욱 소망을 부여잡을 수 있는 기회인 것입니다. 이걸 놓치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나사로에게 있어 죽음은 매우 영광스러운 것이지만, 부자에게 있어서 죽음은 매우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 22절에 보면 나사로도 죽고, 부자도 죽었다고 표현하고 있지만 부자의 경우 장사되었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그가 부자였기 때문에 그의 장례식 역시 성대하게 치러졌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와서 그의 장례식을 지켜봤을 것이고, 장례식 자체도 가장 비싸게, 또 무덤 또한 가장 좋은 곳으로 안치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눈 뜬 곳은 지옥이었습니다.

이 지옥에서 부자는 이렇게 요청합니다. 24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지옥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한지 물 한 방울만이라도 찍어줬으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물론 천국과 지옥 사이에 대화가 가능한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저 비유의 성격과 같이 내세의 생활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설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설명하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지옥의 고통을 성경이 다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지옥의 고통, 형벌에 대하여 매우 희미하게만 보여주고 있을 뿐입니다.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계시록이나 다른 성경에 보면 천국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온갖 보석의 모습으로 묘사가 되는데, 저는 그것 역시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천국은 성경이 표현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아름다운 곳일 것입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계시의 방식으로서 그렇게 묘사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해 달라는 이 표현은 지옥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곳인가 하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표현이지만, 지옥의 고통을 다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극심한 고통이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극심한 고통으로 인하여 갈증이 나서 물 한 방울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부탁하게 됩니다.

그러나 부자의 요청에 아브라함은 이렇게 답변합니다. 25절을 보시면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혹 이런 말씀 때문에 오해하시면 안 되는 것 중 하나가 이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을 받았다고 무조건 지옥에 가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역으로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으면 다 천국에 가는가? 그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을 받았다고 무조건 지옥 가는 것은 아니며,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았다고 무조건 천국에 가는 것도 아닙니다. 거지 나사로가 부요한 아브라함 품에 들어간 사실은 그가 거지였기 때문도 아니며, 가난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비록 고통 가운데 있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택하여 주신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였기 때문에 천국에 갈 수 있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천국의 문이 모든 부자들에게 닫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은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물론 누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하나님의 백성인 것 같아 보여도 아닌 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하나님의 교회 밖에 있어 자기 마음대로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선택하셨다면 반드시 불러내고야 마십니다. 히스기야의 아들인 므낫세의 경우 남유다의 왕들 가운데 가장 악한 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왕이었지만, 결국 그의 말년에 회개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역사가 택자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5절에서 너는 살았을 때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다고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에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열매라는 차원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 부자이면 자신의 부를 자기만을 위해 사용하고, 자기만이 즐기는데 사용하는 것을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부를 바르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비록 거지같은 인생과 같다고 여겨지더라도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기에 인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처럼 성도가 가야 할 길은 바로 고난의 길이요, 십자가의 길임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비록 세상에 대하여는 거지같은 인생, 히브리서에서 말하고 있는 대로 하자면 나그네요 외국인과 같은 인생이지만, 그래서 그 인생길이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지만, 천국의 소망이 있는 한 그것보다 복된 길은 없다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내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 부자처럼 인생의 쾌락과 즐거움에 온통 빠져서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대한 관심이 없거나, 오히려 경멸하는 자는 결국 태만에 대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알려주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의 모든 재미난 것, 좋은 것 다 누리며 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란 걸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예정론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은혜와 지혜를 말하고 난 뒤 실천적으로 이렇게 권면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12:1)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 몸을, 우리의 전인격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는 것인가? 곧바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12:2) 이 세대가 추구하는 방향으로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한일서에서는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2:15)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없다고까지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대, 이 세상에 있는 것을 너무 본받으려고 하지 마셔야 합니다. 그쪽으로 너무 좇아가지 마시고, 그쪽으로 너무 발달되지도 마셔야 합니다.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향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것들을 죽이면서 가야 합니다. 신앙생활하면 할수록 세상에 대하여는 죽어가는 인생, 그것이 성도가 걸어가야 할 삶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은 어딘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12:2) 바로 이 방향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 바로 기록된 말씀이 방향만이 우리의 길인 것입니다. 가난할지라도 인내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기록된 말씀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역으로 부하면 그것이 자랑의 내용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데 도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록된 말씀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인 것입니다.

 

계속해서 26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합니다.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한 마디로 더 이상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있는 자들과 지옥에 있는 자들은 결코 왕래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이 땅을 살아갈 때뿐이라는 걸 잊지 마셔야 합니다. 기회가 있다는 것은 이 세상을 살 때뿐입니다. 죽음 이후로는 더 이상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특별히 바리새인들을 의식하면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시다면 적어도 하나님의 백성들만큼은 이 세상에 정신이 팔려 기회를 주고 계신데도 그 기회를 놓치는 자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걸 교훈으로 말씀해 주고 계시다는 걸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오히려 이 세상을 살면서도 죽음 이후 영원한 삶이 있다는 걸 알리시며, 그 영원한 삶을 준비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걸 교훈하고 계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 27절 이하 31절 말씀은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을 우리에게 줍니다.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여기 보면 부자가 나사로를 보내어 아직 살아 있는 다섯 형제에게 이 모든 사실을 증거 하게 하여 그들만큼은 비참하고 무서운 곳에 오지 않게 해 달라는 간청을 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천국과 지옥 간의 대화는 있을 수 없을뿐더러 지옥 간 사람이 실제로는 이 세상에 있는 형제들을 위해 자비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는가? 없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교훈하고자 하십니다. 무엇에 대한 교훈인가?

지금 부자는 형제들을 구원하기 위해 죽은 자가 살아나 증언하면 믿을 것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이란 구약을 통칭하는 말로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말씀이 있기 때문에 또 그 말씀을 증거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에 그 말씀이 들려질 것이고, 그 말씀이 들려진다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에(10:17) 믿음을 가지는 데 전혀 다른 무엇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경험이라는 것이 얼마나 강력한지 하늘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인데도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서 증거 하면 말씀을 듣는 것보다 더 분명히 믿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통해 주고 계시는 말씀은 동일한 말씀입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죽은 자가 살아난다 할지라도 결코 권함을 받지 않으리라.

결국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록하여 남기신 성경이 우리로 하여금 믿어 구원을 얻게 하는 방편으로 충분하다고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어떤 기적이 동원되고 또 어떤 경험을 해야만 믿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앞서 이 세상을 살면서도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이 있다는 것을 알리며, 그 영원한 삶을 준비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어떻게 하면 영원을 준비하며 사는가? 마찬가지입니다. 주의 말씀 밖에서 찾으면 안 됩니다. 말씀만으로 족합니다. 말씀만으로 충분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이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일에 있어, 그리고 믿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어떤 체험을 통해서, 어떤 경험을 통해서 확인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누군가 체험을 하거나 경험을 하게 되면 그런 미혹에 끌려 다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리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기적도, 체험도, 경험도 기록된 성경 이상의 것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런 식의 기대는 하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이러한 사실은 베드로후서만 보더라도 분명합니다. 베드로 자신이 변화산 사건에서 예수님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보았다고 말합니다. 마태복음 172절에 말씀하는 것 같이 예수님은 세 제자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은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소리를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17:5) 이 사건을 베드로는 베드로후서에서 소개를 합니다. 그가 경험한 것이고, 또한 성경이 이를 증명할 정도로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그의 서신에서 뭐라고 말하느냐? 베드로후서 1 19입니다.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우리는 어떤 기적이 있어야지만, 어떤 체험과 경험이 있어야지만 예수를 믿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이 있어야 뭔가 신앙 생활하는 데 힘이 있을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보다 더 확실한 예언, 곧 성경이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규범이라고 말씀합니다. 성경만이 유일한 권위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 제쳐놓고 다른 데 관심을 두지 마십시오. 가끔 보면 어떤 분이 천국에 갔다 왔다. 지옥에도 갔다 왔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는데, 속지 마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천국에도 갔다 올 수 있고, 지옥에도 갔다 올 수 있다는 걸 증거해 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후반부에서 분명히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말씀을 제쳐놓고 다른 데 관심을 두지 말라. 달리 말하면 천국에 갔다 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지옥에 갔다 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그것보다 더 확실한 예언은 기록된 성경, 즉 우리가 받고 있는 신구약 66권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의 신앙을 위하여 말씀이 중심이 되지 않는 곳에 기웃거리지 마셔야 합니다. 아니 말씀이 중심이라고 하더라도 바른 말씀이 증거되고 있는가 살피고 또 살피셔야 합니다. “과연 그러한가?” 특히 한국교회를 보면 기도에 대한 강조가 많습니다. 물론 기도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말씀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기도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무엇보다 주의 말씀에 대한 정당한 가르침이 여러분 안에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의 내용도 말씀으로 풍성하게 해야 합니다. 기도하라고 하니까 아무렇게나 기도해도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으로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말씀보다 앞서지 않도록 주의하셔야 합니다. 요한복음 17 3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영원한 생명, 이 영원한 생명은 지옥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합니다. 지옥에서 영원히 사는 것에 대해 성경은 영벌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런 영생은 어떤 과정을 통해 얻어지게 되는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 때 얻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 지식과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알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신 것이 뭐냐? 성경입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겁니다. 기도 하다가 환상을 보고, 성경 계시가 아닌 또 다른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면 이미 그것 자체가 성경과 상관없는 길로 가고 있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만족은 어디에만 있어야 하는가? 오직 성경에만 있어야 합니다. 기록된 성경, 그것도 하나님께서 특별한 섭리 가운데 남겨두신 신구약 66권만이 우리의 신앙과 삶의 규범인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입니다. 스스로를 의롭다 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너무나도 세상적입니다. 그런 그들을 의식하면서 말씀하신 것이 오늘 말씀입니다. 여러분, 죽음이 있다는 걸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죽음 이후의 삶이 있다는 걸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 땅의 것이 영원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이 땅의 것만 모으다가 하나님께서 불러 가시면 그렇게 모으던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맙니다. 아니 이 땅의 것으로는 영원을 결코 보장받지 못합니다. 이 땅의 것으로 영원을 살 수 있는가? 없습니다. 그럼 누가 영원을 보장하는가?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원을 보장하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영원한 삶을 준비하도록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는가? 기록된 말씀을 주셨습니다. 때문에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셔야 합니다. 세상에서 살기 때문에 세상의 것으로만 준비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의 삶의 방식일 뿐입니다. 성도는 무엇을 준비하면서 사는가? 죽음 이후를 준비하면서 사는 자입니다. 비록 이 땅에서 살지만 이 땅에서의 삶이 다가 아니라, 죽음 이후가 있다는 걸 알고 하나님에 대하여 더욱 부요한 자로 살고자 소망하는 자가 바로 성도의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말씀처럼 가난한 자로 있다면 가난이 여러분의 신앙의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하나님을 더욱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단순히 물질로서 가난한 것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여러분에게 좀 모자란 것이 있다면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되지 마셔야 합니다. 오히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말씀했던 것처럼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배설물로 여기도 좋다고 생각하셔야 합니다(3:8). 역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부하게 하셨다면, 물론 이 때도 단순히 물질적인 개념으로만 생각하지 마시고, 세상적으로 볼 때 좀 더 많은 부분 주신 것이 있다면 그것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열매가 맺히도록 노력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서 이웃 사랑의 실천이 더욱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모습으로 있든지 분명한 사실은 세상에 있다고 해서 세상의 것으로만 준비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하여 더욱 부요한 자가 되어 그분의 뜻을 따라 살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것이 죽음 이후의 삶이 있다는 걸 알고 이 땅에서 준비하는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부디 우리 모든 성도가 이런 삶으로서 준비하는 삶이 되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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