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욥기 1장 20-22절
주신 자, 거두신 자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크고 작은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어려움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어려움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배우게 됩니다. 목적이 있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가 있습니다. 특별히 이런 어려움 앞에 하나님이 목적 하신 바 중에 한 가지는 인내를 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려움 앞에서의 인내는 결국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때로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두도록 하시기 위해, 그리고 인내라는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 어려움을 주기도 하십니다. 문제는 인생에 있어 어려움이 있을 때 인내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가 보게 되는 욥이란 인물은 어쩌면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보다 훨씬 더한 어려움 가운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내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가?
먼저 20절을 보시면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13절 이하 19절을 보면 욥은 참으로 많은 불행한 기별을 듣습니다. 소와 나귀가 스바 사람들에 의해 강탈당하고 소와 나귀를 돌보던 욥의 종들은 스바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또한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양과 양을 치던 종이 다 죽습니다. 뿐만 아니라 갈대아 사람들이 약대를 빼앗고 종을 죽이며, 심지어 대풍으로 인해 맏형 집이 무너졌는데, 거기서 음식을 먹던 자기 자녀들이 다 죽게 되는 소식을 한꺼번에 듣게 됩니다. 세상적인 말로 하자면 알거지가 되는 정도가 아니라 저주도 이런 저주가 없다고 생각해야 옳을 정도로 큰 사건을 연거푸 만나게 됩니다. 아니 웬만해선 기력을 잃고 쓰려져야 옳습니다. 소위 요즘 표현으로 하자면 멍을 때리고 있든지, 아니면 미쳐가든지 해야 오히려 정상으로 볼 정도의 사건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욥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매우 큰 충격을 주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소위 오늘날로 하자면 자기가 가지고 있던 전 재산을 다 날린 것입니다. 그 전 재산도 동방에서 아주 큰 부자였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손에 꼽히는 그런 재산을 가지고 있는 자였습니다. 그것을 다 날린 것입니다. 거기다 자녀들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다 하루아침에 죽었다는 건 더더욱 충격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오늘 본문에서는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그런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이란 어떤 존재입니까? 적어도 인간은 나무토막이나 돌과 같은 존재는 아닙니다. 나무토막이나 돌은 무생물이고 무생물에게는 고통이나 아픔이 전혀 없지만, 인간이란 존재는 나무토막이나 돌과 같은 무생물이 아니기 때문에 고통이나 아픔이 있는 그런 존재입니다. 또한 인간은 짐승과도 다른 존재입니다. 짐승의 경우 사람처럼 감정이란 것이 있어 고통이나 아픔을 느낍니다. 그리고 슬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슬픔 때문에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경우는 과연 있을까? 만약 있다고 해도 그것은 인간과는 다를 것입니다. 존재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어떤 존재냐? 고통과 아픔이 있다면 슬퍼할 수밖에 없고, 또 그 슬픔이 원망이나 불평이 되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과 아픔의 어떤 일을 만나게 되면 종종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불평하게 되는 일이 있기도 한 것입니다.
지금 욥의 상태가 고통과 아픔의 상태요, 그로 인해 슬퍼할 수밖에 없는 상태입니다. 욥이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었다는 것은 동방의 풍습에 따라 크게 슬퍼하거나 분을 낼 때의 표시라고 주석가들은 말합니다. 그만큼 욥은 그 감정에 있어 슬퍼하고 있는 것이고, 한편으로는 분을 낼만한 상태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외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이 한 일은 그 마음을 추스르고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한 일이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 경배했다는 것 때문에 그 마음이 슬퍼하지 않았다든가, 고통과 아픔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분명 크게 슬퍼하고 고통과 아픔을 느끼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을 추슬러서 하나님을 경배했던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짧게 하나의 행동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분명 극심한 고통과 슬픔의 일이었음을 인지상정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하루아침에 재산이 다 거덜 나고, 내 부모나 내 자녀가 하루아침에 다 죽는 일이 있다면 그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지금 욥의 심정이 이와 같음을 성경은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었다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 고통과 슬픔이 원망과 불평으로 떨어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자신을 제어하고 통제하여 환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많은 괴로움에 모든 일을 포기해야 하는 지점에서도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지키고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내입니다.
여러분, 인내라는 말은 사람들이 마취당하여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또 슬픔을 갖지 않거나, 어떤 환난을 겪을 때 마음에 전혀 상처를 받지 않는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욥의 모습처럼 자신을 제어하고 통제하여 환난 중에서라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것, 많은 괴로움이 있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지점에서도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지키는 것을 바로 인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욥의 신앙은 적어도 이 시점에서만큼은 인내로써 하나님을 바라 본 신앙이었다는 것을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 인생의 길에 있어 어려움, 환난과 같은 것들을 당할 때 그것에 의한 슬픔이 우리를 삼켜 우리가 마땅히 바라 봐야 할 대상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하는 것에 대해 매우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실제 우리 삶은 전도서가 말하는 것처럼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가 오랜 인생을 산 것은 아니지만 이 짧은 인생 속에서도 울 때와 웃을 때가 있었던 것을 경험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여기 앉아 있는 초등학생에게도 물어본다면 울 때와 웃을 때가 있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예수 믿기 때문에 항상 기쁘다?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그렇지만 삶의 다양한 양상을 보자면 꼭 그렇지만 않은 것을 보게 됩니다. 마치 전도서가 인생에 대해 말할 때 이럴 때가 있고 저럴 때가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전도서가 삶의 여러 양상 속에서도 우리에게 주고 있는 교훈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가르칩니다(전 3:14). 웃을 때도 하나님을 경외하지만 울 때도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인생의 모든 일이 오직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더욱 더 경외하는 길로서 주시는 것들이지,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만 주목하게 된다면 믿음을 가진 자로서 합당한 신앙의 모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특히 지금 욥기를 통해 우리에게 교훈하고 계시는 것처럼 어려움, 환난과 같은 것들을 당할 때 우리의 슬픔이 마치 하나님 없는 자들처럼 과도하게 슬퍼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 모든 일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 없이 일어나는 일은 없다는 것을 알고 인내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가지는 신앙의 내용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 단계 더 나아가 환난을 당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경우 어떤 어려움이나 환난을 당할 때 그 이유가 무엇인지 묻기보다는 그 어려움에서 속히 벗어나길 원합니다. 그래서인지 그 어려움에 대한 생각들로부터 멀어지길 원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마음 자세입니다. 쉽게 말해 빨리 해결되든가 아니면 마음이 무디어져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어려움을 당할 때 세상 사람들이 술을 먹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술을 먹음으로 취하게 되고, 그래서 그 어려움에 대해 잊어버리게 되는 것!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려움이나 환난을 주실 때는 그렇게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다 알 수 없는 것도 있지만, 또 때로는 그 어려움과 환난에 대해 깊이 생각하길 원하십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이 어려움을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바가 무엇인가? 혹시 내가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께서 이것을 통해 무엇을 더 나타내고자 하시는가? 이런 것들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5장 5항 섭리에 대한 부분을 보시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가장 지혜로우시고 의로우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때때로 그 자녀들을 많은 시험과 그 마음의 부패함에 얼마 동안씩 버려두시는 데, 이는 그들의 옛 죄를 징계하시거나 혹은 저희 마음 속에 있는 부패와 사기의 숨은 힘을 드러내어 저들로 겸비케 하기 위함이요, 또한 저희로 더욱 가까이 끊이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기 위함이요, 저희로 장차 죄지을 경우를 대비하여 깨어 경성하게 함이요, 그 외에 여러 가지 공의롭고 거룩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려움과 환난을 주시는 이유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옛 죄를 징계하시는 이유도 있고, 혹은 마음 속에 있는 부패와 사기의 숨은 힘을 드러내셔서 겸비케 하기 위함이기도 하고, 나아가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도록, 그리고 깨어 경성케 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려움과 환난을 주기도 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려움을 허락하시고 환난을 허락하실 때면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는 습관을 길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뜻은 반드시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그리고 우리의 유익을 위함인 줄 알고 인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의 내용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편에 의하면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자를 어리석은 자라고 말합니다(시14:1). 하나님이 분명히 계신데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어리석은 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된 성도가 이런 어리석은 일을 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신다고 할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어려움과 고난까지도 주관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때 그 사람은 어리석은 자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시지만 결코 죄의 저자가 아니시면서도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으로 하나님의 택자들을 향하여 선하게 이끌고 계시기까지 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도 어리석은 자입니다. 성경은 어리석은 자를 향하여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고 말하며, 하나님을 부르지도 않는다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어려움, 환난이 우리 앞에 닥칠 때 만약 예수를 믿고 있는 우리가 하나님을 찾지 않고, 하나님을 부르지도 않는다면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자들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물론 믿는 자들의 경우 하나님의 존재는 인정하겠지만 칼빈이 지적한 대로 표현하자면 ‘실천적 무신론자’와 같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이 없다”, 때문에 어리석은 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당연히 찾아야 하는데도 하나님을 찾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데도 하나님을 부르지 않는 것은 실천적인 의미에서 무신론자와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욥은 극심한 어려움과 환난 속에서, 그리고 충분히 과도하게 슬픔에 잠길 수 있는 상황 속에서, 나아가 슬픔에 못 이겨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고 불평할 수 있는 상황 속에서 땅에 엎드려 경배하고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께 충성을 드린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행동입니다. 다시 말해 그는 그런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을 욕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부여잡고 있으며, 인내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바로 이런 자리에 가 있도록 훈련을 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정작 어려울 때 하나님이 없는 자처럼 행동하지 마시란 겁니다. 어려움 가운데 놓여질 때 슬퍼할 수 있지만 본문의 욥의 행동처럼 땅에 엎드려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세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인내요, 참신앙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서 이런 신앙을 가지게 되었으며, 어떻게 해서 이런 인내의 열매를 맺을 수 있었는가? 물론 근원적으로 보자면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붙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믿음을 주시되, 그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그런 믿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붙잡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저 하는 말이 아니라 전 성경을 통해 이해하자면 반드시 고백될 수밖에 없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말할 때 그가 수고한 것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했던 것처럼(고전15:10) 모든 선한 열매, 그리고 성령의 열매는 말 그대로 성령께서 맺게 하시는 열매이지 우리로부터 나오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니 우리로부터 나올 수 있다고 한다면 악한 열매 외에는 없다는 게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아담 이후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욥이 이런 고백과 더불어 인내의 열매를 맺었다는 것은 욥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고 함께 해 주셨기 때문이라는 결론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타난 그의 고백을 보면 어떤 면에서 가까운 원인으로서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다시 말해 그의 고백 속에는 그가 어려움과 고난에 처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인내했는지, 그리고 그렇게 인내할 수 있었던 근거가 무엇인지를 매우 짧지만 깊은 내용으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걸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1절을 다시 보시면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여기 보면 두 가지의 내용이 병행되어 고백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인간을 아는 지식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예전 성경인 개역한글에서는 ‘알몸’을 ‘적신’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붉은 몸이란 뜻입니다. 어린 아이가 태어날 때 피 묻은 채로 태어나는 모습을 상기할 수 있는데, 쉽게 말해 맨몸이라는 뜻입니다. 그걸 오늘 본문에서는 알몸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알몸으로 왔다가 알몸으로 돌아간다는 욥의 고백은 인간이 올 때도 뭔가를 가지고 온 존재가 아니며, 갈 때도 뭔가를 가지고 가는 존재가 아니란 걸 말해 줍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인간이란 존재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는 걸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무엇 하나 가지고 온 것도 없고, 가지고 가지도 못하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오고 가는 문제도 나 스스로가 결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것 역시 하나님께서 보내 주셔야 이 땅에 올 수 있고, 또한 하나님께서 데리고 가고자 하시면 어느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만큼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닌 존재, 성경의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마치 티끌과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흙으로 지으셨다고 하는데, 원문에 더 적합한 번역은 티끌이라고 합니다. 티끌로 만들어진 존재, 어떤 면에서는 그만큼 하찮은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고백 안에는 알몸으로 온 인간이 이 땅을 살아갈 때 받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까지도 고백하는 그런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욥의 경우 잃어버린 소와 나귀, 양과 약대 그리고 종 심지어 자녀들까지 하나님께서 주신 줄 알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에 내 것이냐? 일반적으로는 선물을 주면 그 선물은 내 것이고, 또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바가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거기서 좀 더 나아가는 바가 있습니다. 즉 선물로 줬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거두어 가시고자 하시면 언제든지 가져가실 수 있는 것이 이 땅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에 대한 개념입니다. 이미 살핀 바 있지만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믿음을 줬다가 빼앗는, 그래서 유기자가 되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영원한 것이 아닌 것, 이 세상에서 한시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 그것에 대해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실 때는 분명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내게 주셔서 내게 머물 때까지만 내 것입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그것을 취하고자 하시면 우리는 선물로 받은 것이라 할지라도 내려놓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궁극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은 실제로는 내 것이 아니라 그분의 것입니다. 우리가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실 때까지만 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 땅을 살게 하시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 즉 땅의 선물의 본질인 것입니다.
결국 인간을 아는 지식과 관련해서는 알몸이라고 표현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 욥의 고백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관련해서는 그런 인간에게 하나님은 많은 것들로 채워주고 계시다는 걸 고백합니다. 아니 채워 주셨다가도 다시금 가져가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다시 가져간다고 해서 하나님께 잘못이 있는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고백하는 것이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바로 이 고백인 것입니다. 가져간다고 해서 하나님 잘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악된 본성을 가진 우리의 사고는 어떻습니까? 우리 인생은 알몸으로 와서 뭔가를 얻었다고 할 때 그것이 자신 힘으로 얻은 줄 아는 존재입니다. 내가 열심히 공부했고, 내가 열심히 일했고, 내가 열심히 모았다. 그렇기 때문에 내 것이다. 그리고는 이것이 매우 이성적인 사고인 줄 착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공부의 지식, 일할 수 있는 힘은 내가 네게 준 것이며, 심지어 네가 열심히 할 수 있었던 것도 내가 너에게 열심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8장 17절과 18절입니다.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이제 얼마 안 있으면 가나안에 들어가게 될 텐데,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광야에서는 하나님께서 다 책임져 주셨기 때문에 그나마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에서는 기적을 통해 얻게 되는 방식이 아니라, 노력에 의해 얻게 되는 방식입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하나님이 아닌 내 힘과 노력으로 얻게 되었다고 말하게 되는 일이 있게 되더란 겁니다. 그러나 성도는 무엇을 기억해야 하느냐? 기적의 방식이든, 아니면 일반적인 방식이든 모든 것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재물을 얻게 될지라도, 그것조차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이지, 인간이 최종적인 원인자로 있는 건 아니란 것입니다. 지금 욥이 정확하게 그 고백을 하고 있는 겁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참된 인간 지식은 알몸으로 왔다가 알몸으로 가는 존재인 것을 아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참된 하나님 지식은 알몸인 존재가 무엇인가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다 선물이요, 그 선물은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야 이것을 모릅니다. 인간이 알몸으로 왔다가 알몸으로 가는 그런 존재라는 걸 잊고 삽니다. 그리고 알몸으로 온 자에게 뭔가가 있다면 그것은 선물이며, 그 선물은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사실도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주신 것에 대해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불평, 불만하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를 통해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을 수밖에 없는 것(약1:15)이 바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입니다.
그러나 저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정당한 하나님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이 없다면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도 마찬가지라는 걸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원망하고 불평한 모습이 죄로 지적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대해 만족하지 않아서입니다. 그들의 불평은 무엇입니까? 애굽에서는 더 잘 먹을 수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광야에 나와 이 꼴 뭐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놓치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면서 먹을 수 있는 것을 얻었지만 사실은 그것조차 그들에게 주신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란 사실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비록 환경이 바뀌어 광야 생활을 하고 그 광야 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기적과 같은 손길로 노동력 없이 먹지만, 노동력 없이 먹는다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노동력을 가지고 먹을 것을 얻는다하여 자신이 얻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환경의 변화도 하나님께서 주시지만, 변화된 환경 가운데서 먹을 것, 입을 것을 주시는 분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신 겁니다. 애굽에서 먹는 것이 광야보다 풍부했다면 비록 자신들이 노예처럼 노동해서 얻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주신 자가 여호와시며, 광야에 나와 애굽에 있을 때보다 못 먹어도 그렇게 거두어 가신 자도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신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광야에서 가나안에 들어가면 이제 열심과 노력이 동반될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배제하지 않는다는 차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겁니다.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런 하나님 지식, 인간을 아는 지식이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없었던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불평하여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는 모습이었던 겁니다.
여러분, 우리 역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걸 기억하셔야 합니다. 왜 어려움 가운데 인내하지 못하는가? 왜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만을 의뢰하지 못하는가?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기 때문이며, 그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자입니다. 그러나 야고보서에 따르면 실천하지 않는 앎은 실제 앎이 아닙니다. 지식이 있는 것 같지만 참된 지식으로 와 있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칼빈의 말처럼 실천적 무신론자와 같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배우셔야 합니다. 그리고 훈련을 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우리는 알몸으로 와서 알몸으로 돌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먹을 것을 주시고, 입을 것을 주신다면 그것은 비록 우리가 열심을 다해 얻은 것이라 할지라도, 또한 우리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라 할지라도 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에 불과합니다. 내 노력도 나의 것이 아니라 그분의 것이기에 우리는 내가 노력한 것으로도 자랑을 삼을 수 없으며, 오히려 나의 노력을 통해 얻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도로 가져가신다 할지라도 나의 것을 가져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가져갔다는 사실로 인정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한순간에 우리 생애 전체를 통해 누릴 수 있었던 모든 것을 빼앗으신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손해를 끼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이걸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로 닥쳐지면 그런 현실 자체를 인정하시 싫어하는 것이 우리의 본 모습일 것입니다. 아무도 이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욥의 고백은 고사하고 어쩌면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원망 불평하는 것이 일반적일 것입니다. 아니면 막 따지고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아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하신 것의 일부만 빼앗아 갈지라도 우리는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손해를 끼치는 것처럼 여기며 반응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실 때 우리가 저항하고, 원망어린 말을 내뱉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을 멈추시냐? 그렇지 않습니다. 앞서도 우리가 봤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을 위해서 또 우리가 열매 맺도록 하기 위해서 때로는 고통과, 때로는 곤란도, 때로는 억울한 일도 겪게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실 때 욥과 같은 인내의 훈련을 해야만 한다는 걸 반드시 기억하고 계셔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거두어 가실 때 그것이 우리의 것이 아님을 인정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추스르고 또 추슬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욥과 같은 고백을 하도록 평소에 이런 훈련을 잘 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어떠한 일이든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하십니다. 주시는 것도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고, 거두어 가시는 것도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는 말씀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배제시켜 놓고 우리를 대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다면 비록 그것이 우리가 보기에 좋지 못한 일이라 할지라도 그분의 선하심과 의로우심이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 일로 인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한 과정에 불과합니다. 더불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분의 영광을 위한 일은 반드시 성도들에게는 선하고 유익을 위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9장이 그걸 가르치지 않습니까! 거기 보면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누구의 죄 때문인가? 그 사람의 죄 때문인가?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인가? 그런데 예수님은 달리 말씀하십니다. 누구의 죄 때문도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다. 생각해 보십시오. 날 때부터 소경된 그 사람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리고 그의 부모, 그리고 가족은 또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날 때부터 소경이 되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많은 손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혹 “하나님 왜 우리 가정에 이런 일이 있는 겁니까?”라고 불평하지 않았겠습니까? 내 자녀가 있는데 날 때부터 세상 말로 장애가 있다고 판정된다면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의 위로는 병이 낫고, 자녀들이 세상에서 잘 되고, 또 부자가 되는 등 거기에 우리의 위로가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행하시는 모든 일이 우리의 위로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하나님께서 주시기도 하시지만 거두어가시기도 하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아니 좀 더 직접적인 위로는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세상에서 받을 수 없는 가장 큰 것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 자신을 선물로 받은 존재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이 세상의 것을 때로 거두어 가실 때도 있지만 하늘에 있는 것들은 결코 거두어 가시지 않으십니다. 그 중 가장 큰 상급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자신 아니십니까?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 자신을 주셨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그분보다 클 수 없는데, 그분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성경의 표현으로 하자면 아들까지 아끼지 않으신 이가 무엇을 더 아끼시겠습니까? 아무리 우리에게 주신 세상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간다할지라도 하나님 한 분이 우리와 함께 하는 이상 우리는 부요한 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 성도의 정체성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욥을 도우셔서 이런 고백을 남기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이런 고백을 받기 원하십니다. 주신 자도, 거두신 자도 하나님이시다. 때문에 주실 때도 하나님께 영광이지만, 거두어 가실지라도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셔야 합당하다. 거기에 우리는 인내라는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자로 서 있게 되는 것입니다.
22절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원과는 전혀 반대되는 것들을 허락하실 때, 그 일이 단순히, 아니면 까닭 없이 그렇게 하시는 게 아니라 분명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거두어 가신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극심한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잔인하시거나 무관심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깊은 지혜로 그 일을 행하십니다. 특별히 개역한글 성경에 보면 원망하지 않는다는 말 앞에 ‘어리석게’라는 말이 붙어 있는데, 무엇이 진정한 어리석음인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보지 못하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의뢰하지 못할 때, 그래서 원망할 때 그걸 어리석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셔야 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하나님만이 모든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만물을 맡겨주셨을지라도 만물의 주인은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잠깐 맡은 존재일 뿐입니다. 때문에 우리 마음에 항상 하나님께서 가져가시더라도 본래 하나님 것을 찾으신 것이라는 마음의 자세를 가지도록 많은 훈련을 하셔야 합니다. 주실 때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그러나 거두어 가실 때, 그것이 아무리 적은 것이고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거기서부터 감사하시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는 항상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로 걱정하는 저 이방인과 별로 다르지 않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죠!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1-33) 심지어 바울을 통해서는 이렇게까지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무엇을 하든지’에 바로 주셨다가도 거두어 가시는 내용이 들어 있을 수 있는 겁니다. 그때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가 하나님이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말하고 행동해야만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이 정당하게 있으시되, 단순히 지식적으로만 알지 마시고 정말 이 지식이 하나님만을 의뢰하고, 하나님만으로 모든 어려움에서 이겨내는 신앙으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이 신앙인 줄 아시고 그렇게 훈련하는 법을 우리의 작은 어려움과 실패 속에서 배우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