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욥기 40장 10-14절
네가 너를 구원할 수 있느냐
욥기를 전체적으로 이해함에 있어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평가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욥이라는 인물을 생각할 때 괜찮은 인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한 인물,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악에서 떠난 인물(욥1:1), 그가 욥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받았을 때는 정당한 하나님 지식과 더불어 인간을 아는 지식으로서 매우 훌륭하다고 할 만한 신앙의 고백을 한 그였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었던 재물 그리고 그의 자녀들이 하루아침에 다 그를 떠났지만, 그는 알몸으로 왔다가 알몸으로 가는 존재가 인생인 줄 알았던 것이고 또한 그 가운데 주신 이도 여호와시고 거두신 이도 여호와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욥1:21). 심지어 자기 몸에 종기가 나서 심하게 가려울 때도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욥2: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친구들이 찾아와서 논쟁을 하게 되었을 때 그는 끊임없이 자기의 의를 변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세 친구들의 말에 의하면 욥에게 일어난 이 일은 욥이 뭔가 잘못했기 때문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욥과 세 친구와의 변론이 욥기 3장부터 31장까지 계속됩니다. 그리고 이후 세 친구 외에 그들보다 나이가 어린 엘리후라는 인물이 나와서 말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32장부터 37장까지고, 38장부터는 하나님께서 직접 욥과 세 친구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맥락 속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욥에게도 말씀하시고, 세 친구에게도 잠시 말씀하시지만 엘리후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이미 살폈지만 욥기 40장 2절에서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욥의 자세를 트집 잡는 자, 그가 전능자와 다투는 것인 양, 하나님을 탓하는 것인 양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8절에서는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 마치 욥 자신에 대한 변호가 하나님의 공의를 부인하는 것처럼, 욥 자신을 의롭다 말하는 것이 마치 하나님은 악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있다는 그 지적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욥기 마지막 장인 42장으로 가시면 욥의 세 친구 역시 책망을 듣습니다. 욥기 42장 7절과 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가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 이렇게 볼 때 욥과 세 친구 사이의 변론에서는 분명 하나님께서 욥의 손을 들어 주셨습니다. 욥도 책망을 받지만, 욥과 세 친구의 변론을 비교해 보자면 세 친구들의 말이 정당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도 책망을 받는다는 것이 욥기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조금 전에 하나님께서 욥에게도 말씀하시고 세 친구에게도 말씀하시지만 엘리후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왜 엘리후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았는가? 어떤 면에서 엘리후는 하나님의 대변인과 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엘리후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전에 어떤 말을 했느냐? 욥기 32장 1절부터 보겠습니다. “욥이 자신을 의인으로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이 말을 그치니 람 종족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화를 내니 그가 욥에게 화를 냄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또 세 친구에게 화를 냄은 그들이 능히 대답하지 못하면서도 욥을 정죄함이라”(욥32:1-3)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평가가 여기에 이미 다 나타난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 욥을 책망하시는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를 의롭다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욥기 40장 8절처럼 욥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마치 하나님을 악한 것처럼, 불의한 것처럼 여기기 때문입니다. 물론 욥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하나님을 악하다, 하나님은 불의하다고 말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의를 변호하게 될 때, 그래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옳지 못한 것처럼 말을 하게 될 때 그것이 하나님께 대하여 다투고, 하나님 탓을 하는 것인 줄 그는 알지 못했던 겁니다. 세 친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세 친구들을 책망하시는가? 능히 대답하지도 못하면서 욥을 정죄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런 전반적인 내용 속에서 욥이라는 인물을 다시금 생각해 볼 때 분명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이었지만, 그것으로 그가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는 걸 반드시 주목하셔야 합니다. 어떤 면에서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서, 그리고 악에서 떠난 자로서 자신을 변론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의 자기 변호는 결국 어떤 방향으로 흘러 갔느냐 하면 욥 스스로를 의롭다 하는 자리로 흘러갔던 겁니다. 그것이 엘리후의 평가요, 하나님의 평가였습니다. 그가 의도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그의 모든 변호는 결국 어떤 결과만 낳게 되었느냐? 그 스스로도 의롭다 할 수 있는 그런 결과만 낳게 되었던 겁니다.
그럼 여기서 질문을 하나 하면 사람이 그 스스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가? 정당한 신앙의 내용을 가진 자라면 당연히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미 지난주에도 살펴봤지만 고린도전서 4장에서 바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4:4)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지만 그것이 사람을 의롭게 하느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자책할 것이 없으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욥처럼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라면 그것이 마치 그의 의로 여겨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욥기의 전반적인 내용은 그것을 깨뜨리는 데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선 10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위엄과 존귀로 단장하며 영광과 영화를 입을지니라” 얼핏 보면 하나님의 책망 이후 이제는 위엄과 존귀로 단장하라, 영광과 영화를 입으라는 말씀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너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해 봐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14절에 가서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하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 지금 여기 나오는 ‘그리하면’이라는 말은 앞에 있는 내용을 다 받는 말입니다. 10절부터 13절 말씀을 받는 말인데, 네가 10절부터 13절까지 할 수 있다면, 10절 말씀처럼 네가 위엄과 존귀로 단장하며 영광과 영화를 입을 수 있다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 있는 말씀을 생각하지 않고 지금 이 14절만 생각해 보더라도 사람이 그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있느냐?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것을 가르쳐주신 적이 없습니다. 때문에 지금 10절의 말씀 그리고 그 이후의 말씀은 실제로 그렇게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할 수 없다는 것을 하라고 말씀하심으로 역설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내용인 겁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지난주 본 말씀과 동일한 맥락 속에서 연결되고 있는 본문인 겁니다.
다시 10절을 보시면 “너는 위엄과 존귀로 단장하며 영광과 영화를 입을지니라” 네 스스로 위엄과 존귀로 단장할 수 있다면 해 보라는 겁니다. 네 스스로 영광과 영화를 입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해 보라는 겁니다. 그러나 사람이 위엄과 존귀, 영광과 영화를 그 스스로 가질 수 있느냐? 없습니다. 아무리 착한 사람도, 아무리 법 없이 살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위엄과 존귀, 영광과 영화는 결코 가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도 예외 없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자책할 것이 없다고 하는 사람도 여전히 죄인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혹 세상에서 위엄과 존귀, 그리고 영광과 영화를 누리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란 전제를 가진다는 걸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세상의 위엄, 세상의 존귀, 세상의 영광, 세상의 영화가 하나님의 위엄과 존귀, 영광과 영화와 비교될 수 있는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위엄과 존귀, 영광과 영화는 어떤 의미인가? 세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수준에서입니다. 왜냐하면 14절에서 말씀하시는 구원은 결코 세상적인 의미에서의 구원으로 말씀하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법 없이 살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라도 인간이 입고 있는 옷, 인간이 단장하고 있는 그 옷은 다 더러운 옷과 같습니다. 이사야 64장 6절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근본적인 상태입니다. 바울이 자책할 것이 없다고 말했을 때 그것이 의롭게 되지 못한다고 할 때는 이 내용이 함께 있는 겁니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과 같으며.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 위엄과 존귀와 영광과 영화의 옷을 입을 수 있는가? 그것도 스스로 그것을 입을 수 있는가? 없습니다. 아니 단장하고 입는다 한들 하나님 앞에서 그것이 얼마나 위엄과 존귀와 영광과 영화로운 옷이겠습니까? 오히려 이사야가 말한 대로 부정한 자이기 때문에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과 같을 뿐입니다. 아무리 깨끗해도, 고린도전서 4장 4절 말씀처럼 자책할 것이 하나도 없어도 그것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착각은 어디에 있느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살피지 않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살피지 않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뭐라고 말합니까?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창6:5).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사람이 아느냐? 모른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렘17:9). 그러다보니 자신을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좀 괜찮은 모습을 하고 있으면,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들으면 그것이 곧 자기 의로 착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위엄과 존귀로 단장하며, 영광과 영화로 입어 보아라.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위엄과 존귀로 단장할 수 있고, 영광과 영화로 옷 입을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에 대해 매튜 헨리는 이렇게 주석하고 있습니다. “만일 네가 하나님과 비교해 보고자 하며, 더 사랑스러운 모양을 나타내어 보이려면, 너의 가장 훌륭한 의복을 입으라. 네 스스로 위엄과 존귀로 꾸며라. 네가 가진 온갖 군복의 화려함과 네 모든 근사한 제왕의 복장으로 나타내 보아라. 너를 돋보이게 할 것이라면 무엇이든 최대한 이용해 보아라. 네 스스로 영광과 화미를 입어 보아라. 네 원수들을 위압시키며, 네 친구들을 매혹시킬 수 있는 영광과 화려함의 옷을 입어 보아라.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위엄과 아름다움에 비하면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이 그의 강한 힘으로 나아가실 때에는 태양과 다투는 개똥벌레의 빛에 불과하다.” 여러분, 우리의 의란 바로 이와 같습니다. 밝은 태양과 다투는 개똥벌레의 빛에 불과합니다. 아니 그것으로 비교하는 것조차 ‘감히’라는 말을 써야 할 정도라고까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분의 위엄과 존귀, 영광과 영화가 무한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위엄과 존귀, 영광과 영화는 아무리 빛나 봐야 유한한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무한과 유한! 그런데 어떻게 이것을 비교하겠습니까? 그러나 굳이 비교하자면 마치 비유적으로, 낮추고 또 낮추어서 비교하자면 밝은 태양과 개똥벌레의 빛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좀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인간의 위엄과 존귀, 영광과 영화는 하나님 앞에서 위엄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 존귀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 영광과 영화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들이라는 걸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도대체 인간이 하나님께만 있는 그 위엄과 존귀, 영광과 영화를 어떻게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전적으로 타락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만 있는 위엄과 존귀, 영광과 영화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로부터는 이런 것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이걸 분명히 인정하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앞서 욥은 이렇게 말한 바가 있습니다. 욥기 29장 14절입니다. “내가 의를 옷으로 삼아 입었으며 나의 정의는 겉옷과 모자 같았느니라” 물론 욥의 행실로 보자면 의로운 모습으로 삶을 살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15절 이하 17절을 보시면 이 말씀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나는 맹인의 눈도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의 발도 되고 빈궁한 자의 아버지도 되며 내가 모르는 사람의 송사를 돌보아 주었으며 불의한 자의 턱뼈를 부수고 노획한 물건을 그 잇새에서 빼내었느니라” 우리 가운데 이렇게 행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의가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느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자는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면 그것으로 인하여 생명이 보장된다고 말씀하시지만(레18:5)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다 지켜 행할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아니 정확하게는 어느 율법 하나도 온전히 지킬 수 없는 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입니다. 욥의 경우 하나님의 율법을 지킨 것은 사실이나 엄밀한 의미에서 보자면 그 안에도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는 점과 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위엄과 존귀로 단장할 수 있으며, 영광과 영화를 입을 수 있겠습니까?
계속해서 11절 이하 13절에서는 하나님의 공의와 관련해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너의 넘치는 노를 비우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모두 낮추되 모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낮아지게 하며 악인을 그들의 처소에서 짓밟을지니라 그들을 함께 진토에 묻고 그들의 얼굴을 싸서 은밀한 곳에 둘지니라” 일단 우리가 보고 있는 개역개정판은 ‘너의 넘치는 노를 비우고’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뉘앙스가 욥이 마치 넘치는 노를 발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비우라는 것으로 생각되는 내용입니다. 만약 그렇게 번역할 경우 욥의 자기 변호는 앞선 본문보다 더 심각하게 말씀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지난주 우리가 살폈지만 욥기 40장 2절에서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탓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더 강한 어조입니다. 넘치는 노를 발하고 있다. 마치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기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이 부당한 것인 양 하나님을 향하여 힐난한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계신 겁니다. 그러나 전반적인 내용이나 몇몇 주석을 참고해 볼 때 개역한글번역이 더 나은 번역 같습니다. ‘너의 넘치는 노를 쏟아서’ 물론 이렇게 번역할 때도 욥은 여전히 넘치는 노를 발하고 있다는 지적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즉 욥이 자신의 의를 주장할 때 그것이 마치 무엇과 같은가 하면 하나님 앞에서 넘치는 노를 발하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노를 하나님의 공의의 잣대로 한번 삼아보라는 것입니다. 네가 의롭다고 하다면 공의를 행사해 보라. 그래서 교만한 자를 발견하면 모두 낮추되 모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낮아지게 하며, 악인을 그들의 처소에서 짓밟아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함께 진토에 묻고 그들의 얼굴을 싸서 은밀한 곳에 둬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간이 공의를 시행할 수 있는가? 그것도 완벽하게 공의를 시행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이미 인간에게 후회라는 단어가 있다는 것은 모든 판단에 있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는 반증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이 세상의 재판관들을 볼 때도 그들이 항상 옳은 판단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불의한 재판관처럼 그런 재판관이 있기도 하고, 또한 올바르게 판단하려고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들 때문에 옳은 판단을 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항상 옳은 것이 아니라, 옳지 못할 때도 있는 존재, 아니 어떤 면에서는 옳지 못할 때가 더 많은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인간의 본성으로 하자면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판단은 의를 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를 향해 있다고 봐야 할 정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처럼 공의를 시행할 수 있겠습니까?
욥의 경우 어떤 면에서 옳게 행동하려고 했습니다.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시험을 받기 전 그에 대한 소개에서 자녀들이 생일로 인하여 잔치를 하게 되면 그들의 잔치 속에서 하나님께 범죄한 일이 있지나 않을까 해서 항상 잔치가 끝나면 불러다가 성결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렸던 그였습니다(욥1:5).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낱 인간에 지나지 않는 존재입니다.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존재입니다. 때문에 이런 하나님의 말씀에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런 답변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 본문 11절 이하 13절의 경우 욥에게 그렇게 할 수 있다면 해 보라는 그 말씀은 욥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는 분으로서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는 것도 우리는 놓치지 말고 봐야 될 중요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진노를 쏟으시되, 누구에게 그 진노를 쏟으시느냐? 교만한 자에게 쏟으십니다. 악인들에게 쏟으십니다. 교만한 자는 낮추시며, 악인들은 반드시 짓밟으십니다. 단순히 외적으로 볼 때 교만한 자, 악인 그런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서 실수 없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렇게 하십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될 것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모든 진노를 다 쏟지는 않는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와 악인들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단련하실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욥기의 시작도 그것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악의 원흉이라 할 수 있는 사탄을 사용하십니다. 그리고 악인들을 사용하십니다. 악인들과 사탄의 경우 그들의 악한 마음 그대로를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악도 선으로 바꾸사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욥은 그 단련을 받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 땅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로 그 단련 가운데 있는 겁니다. 그러나 악인은 반드시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서는 천국도 부럽지 않을 정도로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없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고 계시다는 걸 보여줄 뿐입니다. 그렇게 오래 참으시고 참으시다가 결국 마지막 때 공의의 심판을 행하십니다. 성도는 바로 그런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하는 겁니다.
결국 이런 맥락 속에서 오늘 본문 14절은 ‘그리하면’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그리하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 그러나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인간이 스스로의 구원을 이룰 수 있는가? 없습니다. 이미 우리가 살폈지만 하나님께서 물으실 때 욥은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욥기 40장 4절을 보면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오늘 말씀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위엄과 존귀로 단장하며, 영광과 영화를 입어보라고 해도 욥은 입을 가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네가 시행해 봐라. 교만한 자를 낮추고, 악인들을 짓밟아 보아라. 그러나 그때도 욥은 입을 가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네가 네 스스로 구원할 수 있느냐? 오늘 본문으로 하자면 위엄과 존귀로 단장하며, 영광과 영화를 입을 수 있느냐? 공의를 시행할 수 있느냐? 그때 우리는 입을 가려야 합니다.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말을 한다면 우리 스스로는 구원을 이룰 수 없다고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구원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라고 말해야 됩니다. 위엄과 존귀, 영광과 영화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고 말해야 하고, 오히려 우리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말해야 합니다(딤전1:15).
그러나 오늘날 입을 가리지 않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히려 인간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는 걸 보게 됩니다. 아니 전적으로 우리에게 속한 일은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도움으로 인하여 우리가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걸 조심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50%, 인간 50% 이 사고를 주의하셔야 합니다. 아니 하나님 99%, 인간 1%라고 말할지라도 그것도 성경적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조금이라도 위엄과 존귀, 영광과 영화를 돌린다면 욥처럼 자신의 의를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하나님처럼 공의를 행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자들에 대해 교회 역사는 다 이단으로 정죄하였습니다. 사람이 정죄했기 때문에 이단이 아니라, 이미 성경의 시각으로 볼 때 그런 내용은 참된 교회 안에서 바른 교리로 자리 잡을 수 없었습니다. 펠라기안주의, 반펠라기안주의, 알미니안주의 등이 그러합니다. 그들은 다 신인협력을 주장했고, 공로사상을 말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가톨릭의 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는가?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행위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다보니 얼마나 공로주의가 강한지 모릅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협력하는 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말씀하셨던 그 말씀을 그들에게도 하고 계시다는 걸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너는 위엄과 존귀로 단장하며 영광과 영화를 입을지니라...모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낮아지게 하며 악인을 그들이 처소에서 짓밟을지니라” 질문 형태로 하자면 “네가 위엄과 존귀로 단장하며 영광과 영화를 입을 수 있느냐? 모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낮아지게 하며 악인을 그들의 처소에서 짓밟을 수 있느냐?” 이 질문에 대해 우리는 욥처럼 아무런 말을 할 수 없는 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입을 가리는 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아니 함부로 입을 여는 자가 되어선 안 될 것입니다. 입을 열어 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엄청난 교만임을 아셔야 합니다.
시편 115편 1절만 보고 정리하겠습니다.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 여러분, 모든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돌아가야 할 내용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그리고 대요리문답 제1문에서 인생의 목적에 대해 분명하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겁니다.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 하는 것인가? 성경 전체가 그것을 가르치지만, 저는 다시금 욥기 1장의 말씀으로 여러분을 권면하길 원합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 인간이란 어떤 존재냐? 알몸으로 왔다가 알몸으로 가는 존재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인간은 아무 것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하자면 위엄과 존귀도 가지고 있지 못하며, 영광과 영화도 가지고 있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아니 존재 자체도 본래 무(無)였습니다. 그런데 유(有)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에 있는 것처럼 모든 사람에게 해를 비춰주시며 비를 내리워 주셨습니다. 소위 일반은총이라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겁니다. 그리고 특별히 택자들에게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도 더하여 주셨습니다. 아담 이래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지만, 택자들에게만큼은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를 주셨고, 또한 구원의 서정에 속하는 내용들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거기에 인간이 어떤 보탬이 된 것이 있는가? 없습니다. 단 1%도 없습니다. 의도 하나님이 주시고, 거룩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위엄과 존귀로 단장하며, 영광과 영화로 옷 입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공의로 행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죄인 된 우리에게는 말이 되지 않는 내용인 겁니다.
여러분, 모든 선한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다시금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야고보서 1장 17절 말씀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비록 우리 스스로는 위엄과 존귀로 단장하며 영광과 영화로 옷 입을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가 되도록 주셨고, 그리스도가 우리의 거룩이 되도록 주셨습니다(고전1:30). 하나님께서는 지금 욥에게 네 스스로 그렇게 해 보라고 말씀하시지만, 네 스스로 해 보라고 말씀하실 때는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위엄과 존귀로 단장할 수 있고, 영광과 영화로 옷 입을 수 있는 게 바로 성도에게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인 겁니다. 심지어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날에 심판하실 때 우리도 그런 심판권을 가진 자처럼 대우하신다고까지 말씀하십니다(계3:21). 본래 죄인이었는데, 마지막 심판 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 판결을 받고, 그리스도께서 앉으신 보좌에 함께 앉게 되는 그런 영광을 얻게 되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을 온전히 주시는 분이 누구시냐? 하나님이신 겁니다. 이런 하나님께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내 의를 변호하는 말이겠습니까? 내가 의롭다고 말함으로 하나님을 마치 불의하다고 하는 것이겠습니까? 아니 우리는 욥과 같은 자도 아닙니다. 한참 못 미치는 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얼마나 많은 말들을 합니까? 원망과 불평,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 마치 옳지 못한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고 말을 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 모든 것에 감사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찬송하는 소리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우리의 약함을 따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소리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모든 선한 것들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 은혜를 잊지 마셔야 합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만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세상 것에 대하여서는 주셨다가도 거두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택자들에게 있어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에 대해서는 결코 빼앗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때문에 우리로부터 나오는 선하다고 할 수 있는 단 1%도 우리의 것이 아님을 분명히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욥기 41장으로 가시면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도 하시는 겁니다. 11절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그 말은 바로 이 사실을 아는 자로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고백하는 자로 있는 겁니다.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의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선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평생의 고백이 되셔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며 사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