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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914설교 / 이사야9장1-7절 / 만군의여호와의열심이이루리라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4.09.15|조회수543 목록 댓글 0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이사야 91-7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루리라

 

이사야가 활동하던 시대는 이사야 1장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웃시야에서부터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시대까지입니다. 보통 이사야는 웃시야 말년에서부터 그 사역을 시작했을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대략 50년에서 60년 정도 하나님 말씀을 대언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때쯤 유다 백성들의 상태는 이미 이사야 1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무수한 제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지만 마당만 밟고 가는 그런 형식적인 신앙의 모습이었습니다. 이걸 이사야 5에서는 어떻게 말하느냐? 좋은 포도를 맺기 위해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들포도만 맺혔다고 탄식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영적 상태, 그리고 그 실상은 예배를 드리고 제물을 드리지만, 그것도 무수한 제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지만 전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그런 모습이었던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소망의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무엇보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적 메시지를 증거 하게 하셨는데, 이사야 7에 보면 아하스 시대 때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임마누엘이라는 징조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이사야 9에서는 그 징조와 연관된 한 아이에 대한 내용을 주고 계시는 걸 보게 됩니다. 그리고 좀 더 넘기면 11에서도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날 것이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것 역시 동일한 메시야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러니까 징계에 대해서도 말씀하시지만 동시에 소망의 말씀도 주고 계시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에 앞서 이사야는 이렇게 말한 바가 있습니다. 8 20절 이하를 보시면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를지니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굶주릴 것이라 그가 굶주릴 때에 격분하여 자기의 왕과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쳐다보거나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가운데로 쫓겨 들어가리라”(8:20-22) 왜 이 땅에서 헤매며 곤고하며 굶주리는가?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마땅히 그 말씀을 따라야 하지만, 그렇지 않으니 하나님께서는 징계를 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내리신 외적인 축복도 다 빼앗아 가십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았지만 그 땅에서 헤매며 곤고하며 굶주릴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더욱 비참한 것은 궁극적으로는 무엇을 못 보게 하시느냐 하면 빛을 보지 못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빛을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이 흑암일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내리시는 진노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이렇게 말하는 걸 보게 됩니다. 1절과 2절을 보시면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전에는 고통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고통 받던 자들에게서 흑암이 없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옛적에는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했습니다. 왜 멸시를 당했는가? 그들의 죄 때문입니다. 실제로 구약 시대 이스라엘 지도를 보면 요단강 위에 갈릴리 호수가 있는데, 그 호수를 끼고 왼쪽 맨 위에 거주했던 지파가 납달리 지파였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스불론 지파가 위치해 있었는데, 그들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가운데서도 북쪽 변방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이방 나라가 침입해 오면 항상 많은 피해를 보던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방 민족과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이방의 풍조가 많이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단지 변방에 있기 때문에 이방 나라의 침입으로 많은 피해를 입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방의 풍조를 그만큼 받아들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로 이방 백성을 세우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후에는 어떤 일이 있느냐?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아무도 그곳을 침입하지 못하게 하시겠다는 것이고, 오히려 침입 받던 지파를 들어 영화롭게 하실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1절 마지막에 영화롭게 하셨다고 할 때 시제 자체는 과거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선지자는 미래 사건에 대한 예언적 선포를 하고 있습니다. 미래 사건을 마치 과거 사건인 것처럼 표현하는 것은 그 일이 반드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의미에서 선지자들이 종종 사용하는 표현인데,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이루시고야 말 것임을 알리고 있는 내용임을 드러내고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1절과 2절 말씀은 정확하게 어디서 인용이 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복음을 증거 하실 때 인용을 합니다. 마태복음 4 12절 이하에 보시면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4:12-14) 그리고는 15절과 16절이 바로 오늘 본문 1, 2절 말씀의 인용입니다. 그리고 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결국 오늘 본문에서 선지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 그러니까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 흑암이 없으리로다, 그리고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은 누구로 말미암아 그렇게 될 것이었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될 일이었음을 미리 선지자를 통해 알려주었던 것입니다.

특히 그들의 비참함은 단지 외적인 것이 빼앗겼다는 데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 앞에 있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말미암아 주신 땅에서 헤매게 되는 것, 그리고 그 땅에서 곤고하며 굶주리는 것, 분명 하나님께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셨지만 그들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곤고하고 굶주리는 것이 진정한 비참함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빛을 보지 못하는 것, 흑암 가운데 거하게 된 것, 그것이 저들의 진정한 비참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반복적으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5:21, 12:2, cf.43:8). 아모서 선지자를 통해서는 기근을 보낼 때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8:11). 바로 이런 차원이 비참함인 것입니다.

이런 그들에게 소망을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흑암 가운데 빛이 비춰지는 것이었습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에게 볼 수 있는 눈, 들을 수 있는 귀가 되도록 하시는 것,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었던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들을 통해 계속해서 그리고 반복적으로 들려지고 있지만 그것에 대하여 깨닫지 못하고 있는 그것이 더 비참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게 바로 본문인 것입니다. 누구를 통해 하시느냐? 참 선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러니 소망을 가지라는 것이고, 약속으로 주신 말씀을 붙들라는 것입니다. 혹 고통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또한 멸시를 당한다 할지라도 때가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복음의 빛이 비춰질 테니 소망의 불씨를 꺼뜨리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은 구약 백성과는 달리 이미 오신 그리스도를 소개받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용할 수 있는 것구약에서 볼 때 메시야에 대한 예언적인 말씀으로 고통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소망을 주었다면 오늘날 우리 역시 다시 오실 메시야, 즉 초림이 아닌 재림하실 메시야에 대한 소망을 여전히 가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받았지만 우리의 모습은 여전히 주님 앞에 부끄러운 모습, 아니 구약 이스라엘 백성과 다르지 않는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구약의백성과 다를 바 없다면 우리 역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를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자로 만들어 주신다면 그것보다 더 복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완성은 언제 이루어지느냐? 그리스도께서 다시금 재림하실 때 이루어집니다. 개인적으로는 개인적인 종말, 즉 죽음 이후에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상태에 들어가게 되지만,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를 짓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입니다. 때문에 성경은 모든 성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소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아무리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비참함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아니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결국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만 하면 그런 모든 죄의 문제는 해결된다는 것도 잊지 마셔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소망을 가진 성도들은 이 땅에서 어떤 자로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우리는 반드시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는 자로서 그런 소망만 가지고 있고, 이 땅에서는 마음대로 살아도 좋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런 말씀을 통해 소망의 메시지를 주고 계시다면 그런 소망을 품고 더욱더 죄와의 싸움을 싸워 나가야 합니다.

더불어 혹 우리를 어렵게 하는 어떤 현실 앞에서도 이것만은 분명하다는 걸 확신하셔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4 8절과 9입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현실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현실은 답답한 일이요, 현실은 박해를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합니다. 한편으로는 죄와 상관없기도 하지만 때로 죄와 상관이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런 일이 닥칠 때 싸이지 않고, 낙심하지도 않고, 버린 바 되지 않고, 망하지 않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결국 우리를 최종적으로는 영화롭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가 우리를 잠식시키려 하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결코 잠식되지 않는, 오히려 주님을 더욱 바라보게 되는 일이 교회와 성도에게는 있는 겁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기도 한 것입니다. 아무리 최악의 상황 가운데 놓이게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그러한 고통이 완화되고 진정이 될 수 있는 위로를 얻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는 어떤 자냐?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자이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할 수 있는 자이고, 또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인 것입니다(고후6:10). 이걸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와서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흑암이 없어지고,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신다고 말씀하실 때 예수 그리스도를 빛으로 비유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보통 빛이 비취면 흑암, 어두움은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 빛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흑암이 물러가고, 어두움이 사라졌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으로 가시면 요한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4절과 5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빛이 오면 당연히 어두움은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어두움이라고 할 때 단순히 빛이 없다는 의미에서의 어두움은 아니란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어두움은 빛이 비취지 않을 때를 어두움이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어두움은 빛이 비춰도 깨닫지 못하는 상태, 바로 그들 자신이 어두움으로 있다는 걸 드러내십니다. 선지자가 자주 반복적으로 말했던 것처럼 그들 자체가 어두움이었던 겁니다. 눈은 있지만 보지 못하고, 귀는 있지만 듣지 못하는 어두움, 바로 이스라엘 백성 자체가 어두움이었던 겁니다.

 

이런 어두움 가운데 빛이신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고, 그렇게 오셨을 때 요한복음에 의하면 그 빛을 깨닫지 못했다고 증거 합니다. 그럼 빛이신 예수님께서 오셔도 어두움이 깨닫지 못했다고 하기 때문에 예수님도 소용이 없다는 말인가? 분명 오늘 말씀은 회복의 말씀이고, 그 회복을 누구를 통해 이루실 것이냐?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 오셨지만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인간 스스로는 빛을 전혀 볼 수 없다는 걸 분명히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이성의 빛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다고 말합니다. 칼빈의 표현을 빌리자면 종교의 씨앗이 어느 정도 남아 있고, 그것이 남아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종교성을 가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들인 있는가? 없습니다. 지금 빛이신 예수님께서 오셨다고 말할 때 요한복음의 증거는 인간 스스로는 빛이신 예수님을 찾을 수 없다는 측면에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왜 그런가? 인간은 눈은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에스겔 선지자가 마른 뼈 환상을 통해 보았던 것처럼 철저히 하나님에 대하여 죽은 자와 같습니다(37). 허물과 죄로 인하여 죽은 자와 같기 때문에(2:1) 우리 스스로는 빛이 비춰진다고 해서 볼 수 있는 자가 아닌 겁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빛이 비췄다는 것은 단지 빛을 비췄으니까 그걸 보고 오라, 깨달으라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빛이신 예수님께서 왔다는 것은 그분이 그 빛을 드러내시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까지 담고 있는 내용이라 하겠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신 사역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이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그러나 이것은 외적인 것일 뿐이었습니다. 외적 선포에 지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같은 요한복음에 보면 사람의 거듭남에 대해 말할 때 무엇으로 말미암는다고 말하느냐?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3:5).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나 스스로 그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그리스도께로 오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를 부패된 인생이 할 수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인가 하면 성령을 그 마음에 부어주셔서 성령께서 내주하도록 하시고, 또한 네 속에서 역사하도록 하시는 일을 하고자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에게 어떤 말씀까지 하셨느냐 하면 마른 뼈 환상에 앞서 이런 말씀까지 증거하도록 하셨습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36:26-27)

결국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자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 마음이 있지만 하나님께로 그 마음이 가 있지 못하는 자로 하여금 회복시키는 방법이 뭔가? 성령을 우리 속에 부어주시고, 그 성령께서 우리의 눈 그리고 우리의 귀를 열어 주의 말씀을 받도록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굳은 마음에서 부드러운 마음을 만드시는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되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은 뭐라고 표현하느냐? 오늘 본문 7절 마지막에 있는 것처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입니다. 내가 하겠다. 너희는 스스로 할 수 없지만, 내가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실제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와 동일하게 사셨습니다. 물론 죄는 없으시지만 우리가 겪는 모든 일에 대하여 동일하게 겪으셨습니다. 심지어 그가 친히 나무에 달려 돌아가셨고, 또한 친히 부활하셨습니다. 성부에 의해서도 그 일이 행하셨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저 수동적으로만 있지 않으시고, 능동적으로 그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따라서 지금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란 성부만의 열심이 아니라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 하나님,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 일을 이루겠다는 겁니다. 내가 너희를 회복시킬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예수님께서 지상의 모든 사역을 마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러나 승천하셨다고 해서 그 사역을 끝낸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승천하셨지만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성령을 통하여 일하신 것이 사도행전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을 세워 복음을 증거 하게 하셨는데, 바로 사도들을 통해 지금도 일하시는 예수님의 내용이 바로 사도행전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도행전의 역사는 지금도 마찬가지로 있습니다. 여전히 주님은 우리를 위해 일하시고, 특별히 자기 백성들의 구원과 그 완성을 위해 일하고 계시다는 걸 잊지 마셔야 합니다. 나는 할 수 없는데 하나님이 하신다? 성도에게 이것보다 더 큰 위로는 없습니다. 나로서는 실패할 수밖에 없지만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하시기 때문에 반드시 이룰 수밖에 없다? 이것보다 더 든든한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힘은 하나님 자신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의 든든한 반석은 누구여야만 하는가? 하나님 밖에 될 수 없어야 합니다. 땅의 것을 빼앗아 갔다가 그것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이 우리의 든든함이 아니라 혹 그것을 빼앗아 갔다가 다시금 회복시켜 주시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만큼은 하나님께서 내 손을 놓지 않고 끝까지 잡고 계시는 것, 이것보다 더 복된 내용이 없는 겁니다. 당연히 성도는 이걸 진정한 복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 백성을 회복시킬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오늘 본문 3절과 4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이 말씀은 회복의 말씀이요, 그 회복은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영적인 의미가 좀 더 드러나는 내용입니다. 물론 장차 그들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주변국들을 들어 남유다를 치실 것입니다. 따라서 가깝게는 그들로부터의 회복이라는 초점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단순히 육적인 일에 대해서만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회복은 어떤 의미인가?”하는 영적인 의미가 더 강합니다.

예를 들어 남유다만 하더라도 아하스 그리고 히스기야 시대 때 앗수르에 의해 침략을 당하기도 하고, 또 이후로는 바벨론의 침략으로 인하여 남유다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회복하게 될 때 지금 이사야가 말씀하고 있는 것과 같은 내용이 외적으로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사실 그렇다고 보기는 어려운 면이 많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그저 외적인 부분에 대한 말씀이라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회복이 어떤 차원인가 하는 것을 알리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신다는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을 더 많게 하실 것이라 말씀합니다. 전 성경으로 보자면 육적 이스라엘 안에서만 제한된 의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게 아니라, 영적 이스라엘, 다시 말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께서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 불러내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다고 말하는데, 마치 어떤 즐거움과 같으냐 하면 그렇게 고생하면서 농사지은 것을 추수할 때의 기쁨, 그리고 전쟁에 나가서 승리하고 그 결과 그들이 가지고 온 전리품을 나눌 때의 즐거움과 같다고 얘기합니다. 본래는 어떤 자와 같았는가? 4절에 있는 것처럼 무겁게 멘 멍에, 어깨의 채찍, 압제자의 막대기가 우리 앞에 항상 놓여 있는 것과 같았습니다. 죄의 멍에, 그리고 그 죄로 인하 진노와 징계, 이런 것이 항상 우리를 친구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누가 꺾으시는가? 주님께서 꺾으십니다. 꺾으셔서 우리에게 즐거움을 회복하시는데, 그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이란 것입니다. 마치 추수하는 즐거움과 같고 또한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과 같습니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큰 기쁨이라고 한다면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다고 말씀하시면서 무리에 대해 불쌍히 여기셨던 바로 거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9:36-37). 다시 말해 주의 백성들이 죄와 비참함 가운데서 주께로 돌아오는 그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이 주께로 돌아오는 것, 그것이 주님의 즐거움인 것입니다. 나아가 주님은 죄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 달리 말하면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을 무엇보다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말씀까지 하시느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12:50)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본문 5절에서는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무슨 말인가?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을 불 태운다는 건 더 이상의 전쟁이 없다는 소리입니다. 승리했지만 또 다시 싸워야 할 승리가 아니라 완벽한 승리, 더 이상 군인으로서 싸우지 않아도 될 승리를 여기서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회복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차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러 모으실 것이고, 또한 그들의 모든 삶 가운데 즐거움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즐거움이 뭐냐? 단순히 육적인 부분을 채움으로 인한 즐거움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죄에서의 자유,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유는 결코 우리가 빼앗기지 않는 것으로 있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의 패배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히 승리했기 때문에 다시금 죄의 종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겁니다. 이것이 곧 성도의 즐거움인 겁니다.

그런데 그 즐거움을 누구 앞에서 누리는가? 3절 마지막 부분에 보시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바로 주님 앞입니다. 주님을 떠나서 즐거움이 있는가? 없습니다. 주님 앞에만참된 즐거움이 있습니다. 이걸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무엇과 같은가 하면 너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말씀과 같습니다(20:3) 주님 외에 다른 것을 갖다 두어선 안 되듯이 주님 앞에 주님의 즐거움이 되는 것 이외의 것을 즐거움으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세상의 것은 하나님 백성의 진정한 즐거움이 될 수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것, 그리고 그 백성이 주의 말씀에만 순종하여 승리를 맛보는 것, 그것이 곧 우리의 즐거움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영적인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그것도 하나님의 열심으로 인하여 이것을 주시기 위해 누굴 보내주실 것을 예언하고 있느냐? 6절과 7절에 보면 한 아기에 대해 소개를 하는데, 이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주에 다시금 말씀드리겠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우리의 모든 비참함은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해결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킬 유일한 길이며,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란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이루시는 분이 누구시냐? 바로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실제로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참된 성도라면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분리할 수 없는 몸으로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사실 이스라엘 백성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여전히 죄의 종처럼 생활하고 있고, 여전히 하나님의 뜻만을 양식으로 삼고 있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 때문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 때문입니다. 그분이 승리하셨기 때문에 우리 역시 승리가 보장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며, 그분이 우리를 결코 놓지 않고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것 때문에 비록 죄 가운데 거할지라도 다시금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은혜가 우리에게 있는 겁니다. 요한복음을 통해서도 확인했지만 빛이 와도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고 있을 때 깨닫지 못한다고 해서 복음을 증거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복음을 증거 하시되, 복음만 증거 하신 것이 아니라 특별히 자기 백성들의 마음에 성령을 통하여 깨닫는 마음까지 허락하심으로 눈이 제 역할을, 귀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신 역사인 겁니다.

이 사실 앞에 우리는 얼마나 주님 앞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까? 감사와 기쁨의 제사를 여러분은 얼마나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의 열심이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이 사실을 통해 선한 열심을 품으시되, 주의 은혜가 앞서는 줄 아시고, 더욱 주님께만 합당한 영광을 올려드릴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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