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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104설교 / 누가복음18장1-8절 / 세상에서믿음을보겠느냐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5.01.05|조회수771 목록 댓글 0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누가복음 181-8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일반적으로 끈질기게 기도해야 한다는 의미로 오해되고 있는 본문입니다. 끈질기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신다. 물론 끈질기게 기도하라는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시면 항상 기도하고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는데, 그 안에는 끈질긴 기도의 의미가 들어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런 끈질긴 기도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들으십니다. 그러나 끈질긴 기도가 우리의 소원하는 모든 것에 응답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과 부합하지 않는 이상 우리의 기도가 아무리 간절하다 할지라도, 또 그것이 매우 끈질긴 요청이라 할지라도 들어주시지 않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끈질긴 기도라는 말 속에서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기도 응답을 미루실 수 있다는 것도 염두해 두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때가 되기까지는 응답이 미루어질 수 있다는 소리입니다.

이런 것들을 먼저 생각하지 않으면 기도하되 항상 기도하면서도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빨리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쉽게 낙심할 수 있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비유를 보면 앞서 이런 전제를 두고 시작한다는 것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1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그러니까 이후에 나오는 불의한 재판장과 한 과부의 비유는 항상 기도를 하되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나오고 있는 내용이라는 사실입니다.

 

비유의 내용을 보면 한 재판장에 대해 이렇게 소개를 합니다. 2절을 보시면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그는 어떤 사람인가? 무엇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또 그의 위치가 사회적으로 볼 때 좀 높은 위치에 있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사람을 무시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그에 대해 예수님은 6절에서 불의한 재판장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반면 한 과부가 있는데, 3절에 보면 그가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그러니까 그 과부에게는 어떤 억울한 일이 있었던 겁니다. 그 억울함에 대해 재판장에게 가서 호소를 하고, 또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여러 번 간청을 했습니다. 그러나 재판장이 그 과부의 요청을 들어줬느냐 하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번번히 과부의 요청을 거절하거나 피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후에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되었느냐 하면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4절과 5절입니다.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한 마디로 말하면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지 않으면 계속해서 자기를 괴롭힐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 원한을 풀어줬다는 비유입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6절 이하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18:6-8a) 그러니까 한 과부가 불의한 재판장에게 간구하는 것을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으로 비교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동시에 하나님 자신을 불의한 재판장과는 다른 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택한 백성과 과부를 동급으로 보고 있고, 불의한 재판장과 하나님을 대조적으로 보고 있는 것이 이 비유의 내용입니다.

 

먼저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과부를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과 비교를 합니다. 불의한 재판장에게 자기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부르짖는 과부, 동일하게 하나님께 밤낮 부르짖는 택자들의 원한, 이렇게 비교하고 있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6 10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역개정에서는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이렇게 번역하고 있지만, 예전 성경인 개역한글 성경에서는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신원이라는 말이 무엇인가 하면 가슴에 맺힌 원한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원통한 일에 대하여 풀어 달라는 말입니다. 마치 오늘 본문의 과부와 같습니다. 과부도 불의한 재판장에게 부르짖고, 성도들도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물론 과부의 원한이 무엇이고, 택자들의 원한이 무엇인지 오늘 본문을 통해 말씀하고 있지는 않지만 택자들이 이 비유에서 과부와 같다고 말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 과부는 어떤 자입니까? 남편이 없는 자입니다. 남편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의지할 대상이 없는, 구약 식으로 말하자면 고아와 함께 돌보아 주어야 할 대상 제1순위가 바로 과부입니다. 어떤 면에 있어서는 가장 연약하고 피해를 입기 쉬운 자요, 힘 있는 자의 폭력에 희생되어 억울함을 당하기 쉬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과부와 동일시되고 있는 인물이 누구냐? 택자입니다. 다시 말해 택자도 이 세상에 대하여 과부인 셈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어딜 둘러봐도 의지할 곳 없으며, 세상에 대하여 피해를 입기 쉬운 자요, 세상의 힘 앞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무기 외에는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6에도 보시면 예수님은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그 대상이 부자와 거지로 극단적인 이야기인 것 같지만 실제로 하나님을 믿는 자가 세상에 대하여 어떤 자인지를 잘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해 서로가 죽일 듯 혈안이 되어 있지만, 우리는 세상의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따로 가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세상에 대하여서는 가난한 자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아니 실제로 물질적으로 부유하더라도 그 심령은 가난한 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거지로 살 수 밖에 없는 자입니다. 세상이 자기를 위하여 살 때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살며, 세상이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로 이 땅에서 삽니다. 세상이 즐기는 것은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면 우리의 즐거움은 하나님 자신이며, 세상이 바라보게 하는 모든 것은 이 땅에 우리의 눈을 머물게 한다면 우리는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사모하는 자로 여기에 있는 자들입니다. 당연히 세상과 우리의 삶은 원리적으로 다르며, 때문에 세상은 우리를 반길 수 없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언제나 외국인이요, 나그네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호소하거나 의지할 데가 없는 외로운 길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걷는 길인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하여 과부와도 같은 존재입니다.

이런 우리의 존재가 이 땅에 의지할 자가 없다면 누구에게 의지하겠습니까? 당연히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시며, 모든 소망의 대상이신 하나님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 1절에 나오는 항상 기도하라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너희는 세상을 의지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다. 세상에 의지할 어떤 것도 없는 자들이다. 따라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라는 의미에서 항상 기도하라는 말씀이 있는 겁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에 보시면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여기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의미는 방금 본 항상 기도하라는 내용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문자적인 의미 그대로 24시간 계속해서 기도하라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물론 에베소서 말씀에 있는 것처럼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6:18)하라는 의미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의미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3:6)는 뜻입니다. 쉴 세 없이 기도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의지해야 하는 대상이 바로 하나님밖에 없다는 차원에서 항상 기도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말이 등장하는 겁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기도는 능력이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는 말을 듣게 되는데, 그 때 사용하는 의미는 대부분 기도하는 자, 기도하는 자의 능력에 초점을 두고 있는 듯 한 뉘앙스가 많습니다. 특별히 마가복음 9에서 벙어리 귀신 들린 아들을 고쳐주는 사건에서 아이의 아버지가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9:22)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9:23) 그리고 이 사건의 결말을 이런 말씀으로 하십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9:29) 그러면서 이 마가복음의 본문을 기도는 믿는 자의 능력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마가복음의 본문은 전혀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닙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실 때는 언제나 이런 뜻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기댈 곳이 없고, 우리의 모든 어려움과 억울함을 하나님께만 아뢴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기도하는 자가 아니라 기도를 들으시는 대상에 초점이 있는 겁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9:29)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이런 능력이 나갈 수 없다는 겁니다. 자생적으로는 능력을 만들어 낼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시지 않으면 할 수 있는 자가 없기에 하나님께 기도하는 겁니다. 때문에 기도는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수 없는 것을 인정하는 우리의 자세인 겁니다. 우리를 도우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한 순간도 이 세상을 살아갈 힘이 없는 자라는 자세가 바로 기도라는 것입니다.

 

오늘 날 한국 교회는 기도를 이야기할 때 자세보다는 기도하면 해결되는 식의 능력 차원에서 이야기 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언제나 기도의 능력이라 할지라도 기도하는 자가 아니라 기도를 들으시는 자의 능력을 이야기 할 뿐입니다. 초점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인 겁니다. 만약 기도하는 자에 관해서 말할 때는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능력이 아니라 자세일 뿐입니다. 하나님! 우리의 원한을 풀어주소서.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기도 많이 했다고 자랑하는 모습을 가지기도 하는데 얼마나 우스운지 모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기도가 주를 의지하는 행위라고 할 때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한다고 해서 그것이 내 자랑일 수 있습니까? 주를 더 많이 의지한다는 것은 내 쪽에 어떤 능력이 없다는 것이며, 때문에 더더욱 겸손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가는 것이 신앙의 정당한 길입니다. 그런데 기도가 자랑으로 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왜 기도하라고 명령하고 계시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 본문 이후에 나오는 바리새인의 기도와 전혀 다르지 않은 기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저 종교적인 행위만 있을 뿐인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기도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기도하시되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자세는 항상 하나님만을 의지한다는 자세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했기 때문에 능력이 나타날 것이다. 기도했기 때문에 그것이 내 자랑이다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겸손히 주를 의지하는 마음으로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신앙을 가진 자의 바른 기도관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오늘 본문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과부와 택자의 비교만을 말씀하고 있지 않고 과부가 부르짖었던 대상과 하나님의 백성이 부르짖는 대상을 대조시킵니다. 본문에서 과부가 부르짖었던 대상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장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부르짖는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기 때문에 과부가 부르짖었던 대상인 재판장이 불의하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부르짖는 대상은 불의한 재판장과는 대조적으로 의로우십니다. 의로우실 뿐만 아니라 장차 이 세상에 대하여 선악 간에 심판하실 분이시며, 지금도 이 땅의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비록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불의한 재판장이라 할지라도 끊임없이 찾아와 자신의 억울함에 대해 호소를 하면 귀찮은 나머지 들어주고 마는데, 하물며 의로우신 재판장으로 계신 하나님은 어떠하시겠느냐? 이것이 본문을 통해 드러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과부가 부르짖었던 대상은 불의한 재판장이며, 우리가 부르짖는 대상은 의로우신 하나님이란 사실만을 말씀하고 있지 않고, 과부와 불의한 재판장의 사이가 귀찮은 존재라면 우리와 하나님 사이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까지 대조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불의한 재판장의 과부에 대한 태도는 어떻습니까? 4절 중간부터 다시 보시면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18:4b-5)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한 마디로 이렇게 표현합니다. 7절을 보시면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여 주셨다는 사실은 매우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특별히 누가복음 15을 보면 세 가지 비유가 나오는데, 양 일백 마리 중 하나를 잃었을 때 찾으러 나간 목자, 그리고 열 드라크마 중 하나를 잃었을 때 그것을 찾고자 애쓰는 여인, 집 나간 둘째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은 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여기시는가를 보여주는 비유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를 통해 가장 먼저 전제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면 양 일백 마리 중 한 마리를 잃어버렸지만 본래 목자의 것이었다는 것과 열 드라크마 중 하나를 잃어버렸지만 본래 여인의 것이었다는 것, 심지어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 나갔지만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는 끊어질 수 없는 그런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허랑방탕해도 아들은 아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택자라는 것은 이런 관계 속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번거로운 존재, 괴롭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아무리 잘못을 저질러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만 하면 받아 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란 사실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억울함에 대해 귀찮게 여기시는 것이 아니라 더욱 적극적으로 들으시는 분이시며, 결코 그 일에 대해 무관심할 수 없다는 것을 대조적으로 알리고 계십니다. 불의한 재판장의 경우 귀찮은 존재, 안 들어 주면 번거롭게 하고 괴롭게 하는 존재이지만 불의한 재판장과 대조를 이루는 하나님은 결코 그런 분으로 계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언제든지 들을 준비가 되어 있으며,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매우 좋아하십니다.

결국 항상 기도하라는 말씀은 단순히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무조건 하나님께 계속해서 기도하라. 끈기 있게 기도하되 그 기도가 이루어 질 때까지 멈추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의 불의한 재판장과는 달리 너희에게 항상 귀 기울이시며, 듣고 계신 분이시란 사실을 알려주시는 내용입니다.

 

여러분, 이런 하나님 앞에 우리가 못할 기도가 어디 있겠습니까? 물론 기도의 모범으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가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6:9b-10)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지만, 동시에 같은 마태복음 안에 이런 말씀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6:31-32) 필요를 따라 구하지만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섭리를 부정하면서까지 구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께 불평하며 따지듯 구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깊은 고민 가운데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나약하고 연약한 모습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다 들은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다. 비록 이방인처럼 구하는 기도라 할지라도 우리를 향하여 귀를 기울이시며 들으신다는 겁니다. “집 나갔기 때문에 넌 내 자식 아니야!”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돌아올까 항상 마음을 쏟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처럼 그렇게 우리를 대하시는 겁니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들고 하나님 앞에 가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아니 이것은 의무가 아니라 아들 된 자의 특권입니다. 어떤 문제가 터질 때만 하나님을 찾는 게 아니라 모든 삶의 모습 속에서 항상 기도하는 삶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지 종교적 형태만 띄라는 게 아닙니다. 항상 기도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처럼 범사에 그를 인정하는 삶, 이것이 바로 기도를 통해, 또한 삶의 모습을 통해 드러나야 할 모습인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시면 항상 기도하라고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런 말씀이 덧붙여져 있다는 데 좀 더 주의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1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그러니까 전체 비유의 핵심은 기도하되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데 결론의 내용이 있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 8절을 다시 보시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18:8a) 말씀하시고 난 뒤 이렇게 연결시킵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18:8b) 무슨 말씀입니까? 불의한 재판장일지라도 원한에 대해 끊임없이 찾아와 호소하면 귀찮아서라도 들어주시지만, 하나님은 그 원한을 들으시긴 하나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이끌지 않으실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원한을 풀어 주신다고 하면서 그 결론이 그러나로 연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되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시며,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여러분, 세상이 아무리 험악할지라도, 불의가 횡행하는 시대를 살아간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의로서 이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물론 시편 73편이나 하박국 선지자의 물음을 물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데 왜 이렇게 세상은 불의합니까? 세상을 보십시오. 살인과 간음과 도둑질과 거짓투성이입니다. 열심히 살고자 해도 불의와 불법이 난무한 세상입니다. 올바르게 가고자 하나 올바르게 가지 못하도록 이미 사회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공평하게 판단해야 할 재판장은 없고, 오늘 본문에 나온 불의한 재판장이 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 듯 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지금 본문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의로 다스리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믿으라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여전히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며, 그 창조하신 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의한 곳에서 살면서 의지할 대상은 하나님 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요청하고 있는 겁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의로우시기 때문에 이 세상이 의로서만 다스려질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우리 생각대로 되지 않을 수 있다고도 말씀하십니다. 때문에 기도하되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무엇을 가지고 사는 것이냐? 세상이 불의하다 할지라도 그 불의한 세상을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대로 다스려지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사는 자입니다. 그리고 그걸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에게 말씀하신 게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 보고 사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산다고 말씀하셨던 겁니다. 누구에 대한 믿음입니까? 바로 선하시고 의로우신, 그러면서 그 선과 의가 불변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동일한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기도하되 항상 기도하고, 결코 낙심치 말라고 교훈하시는 겁니다.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결국 오늘 본문 전체 맥락 속에서 이 말씀은 이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믿음으로 사는 자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세상은 더욱 불의하며, 부패해 간다는 것을 알리시는 겁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그저 불의한 세상 탓만 하며 살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비록 세상은 불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믿음이 있으십니까? 어쩌면 우리는 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과 다를 바 없습니다. 다 하나님에 대하여 외인처럼, 하나님에 대하여 이방인처럼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들보다 더 할 때가 많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전적인 은혜로 우리를 택하여 주셨음에도, 그리고 그 은혜 없이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어려움이 닥칠 때만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 어려움이 조금만 지속되면 인내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원망, 불평하기 일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비록 세상이 불의할지라도 하나님은 선하시며, 의로우시다는 것, 또한 그분의 뜻으로부터 실행되는 모든 역사가 우리가 보기에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걸 믿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이요, 믿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으로 사는 자가 그렇게 찾아보기가 어렵단 겁니다. “인자가 올 때 세상에 믿음을 보겠느냐이것이 우리에게는 도전이 되고 각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 되는 또 다른 한 가지 사실은 세상이 점점 더 강퍅해져 가고, 불의해 져 간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맨 처음 창조 이후 첫 범죄로 인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해 주셨지만 그 죄의 세력이 얼마나 강했던지 창세기 6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6:5) 그래서 홍수 심판으로 인하여 다 쓸어버리셨던 것 아닙니까? 그러나 홍수 심판 이후도 죄악은 근절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8장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8:21b) 점점 죄악이 관영해 간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당장 심판을 받아 마땅한 모습인 겁니다.

예수님 시대 때도 예수님은 이스라엘 나라를 보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10:15) 예수님 당시가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럼 지금은 어떻습니까? 더욱 더 악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믿는 자들 역시 믿는 자답게 살지 못하는 시대! 심판을 받아도 아무 말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심판하지 않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약속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 모든 것에 대하여 심판하실 때가 있다고 말씀하시기도 하십니다. 지금은 그냥 내버려 두고 있는 것 같고, 지금은 하나님의 역사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분명한 사실은 간헐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표현되고 있으며, 종국에는 반드시 선악 간에 심판을 하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점점 죄악이 관영해 가지만 그러한 중에라도 믿음으로 살아라, 하나님 말씀만을 붙잡고 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세상의 죄악 속에서 그들과 동일하게 살라는 게 아니라, 저들과는 다른 자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땅히 택자들이 가져야 할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며, 하나님에 대한 정당한 지식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그 때부터 성경은 말세라고 말을 합니다. 언제 어느 때에 주님이 오실는지 알지 못하지만, 분명한 것은 세상은 점점 악해져 간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 세상을 의지하기보다 모든 일에 있어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존재들입니다. 세상은 육체를 위해 먹을 것을 먹지만 우리는 똑같이 먹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존재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은 이런 우리들이 믿음으로 살기를 바라십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세상이 너무 악하여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찾아볼 수 없고, 그러한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또한 악한 세상에서 홀로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그래서 그것이 매우 힘들게 느껴지더라도, 그것이 마치 고아와 과부와 같은 처지에 있는 듯 생각된다 할지라도 여전히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우신 통치는 변함이 없다는 사실과 결국 주께서 오실 인자의 때에는 선악 간에 모든 것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18:8b) 어려운 삶이고, 억울한 삶일 수 있습니다. 대접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다보니 세상에서 밀릴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씀에 순종하면 무조건 잘된다고만 가르치지만, 그것은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우리의 마음이지 실제로 그러한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땅한 자리가 어디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순종해도 잘 되지 못한다면 순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성도의 길인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럴 때일수록 더욱 더 주를 의지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치는 대로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부지런히 기도해야 하고, 기도함에 있어 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했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것 때문에 낙심하지 말란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완성시키시기 위해 그것까지도 선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낙심될 때 더더욱 믿음으로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면서 묵묵히 주의 말씀만을 따라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길이요, 이것이 신앙을 가진 자의 마땅한 본분인 겁니다. 올 한해도 이런 삶을 살 수 있도록 주의 은혜를 구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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