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누가복음 19장 1-10절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
본문은 삭개오의 구원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구원의 문제를 이해함에 있어 주의할 내용은 구원이 인간의 결정에 따라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소위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해서 하나님의 은혜는 주고자 하시는 자에게 줄 뿐만 아니라, 그 은혜를 인간이 거부할 수 있느냐의 문제에 대해 인간은 결코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을 통한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만약 인간이 그 은혜를 거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결국 구원의 최종적인 결정자는 인간 자신이라고 말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성경으로부터 그런 사고를 받을 수 있는가? 없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삭개오의 구원에 대해 오늘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삭개오 자신 안에서 구원을 이해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삭개오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 위해 나무에까지 올라가는 간절한 소망에 의한 것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전 성경으로 볼 때 이런 해석은 용납될 수 없는 해석입니다. 물론 그는 예수님을 간절히 보기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소망이 그로 하여금 다 큰 어른으로서는 부끄러울 수 있는 행동도 마다하지 않고 행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구원은 오늘 본문 10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처럼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는 말씀 가운데 있음이 분명합니다. 삭개오가 예수 그리스도를 찾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삭개오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의외로 성경을 대할 때 이런 부분에 있어 약점이 있습니다. 굳이 인간의 열심, 인간의 노력이 구원에 이바지 할 수 있다고 보지 않으면서도 성경이 그런 뉘앙스의 표현을 하게 되면 꼭 전 성경의 이해를 따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단어 그대로 해석할 때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결론짓게 되는 것이 뭐냐? 인간이 열심, 인간의 노력이 구원에 이바지할 수 있는 것처럼 나아가게 되더란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내용이 결국 인간으로 하여금 교만하게 만들고, 우리의 자랑거리를 확보해 놓는, 그래서 결국 공로주의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 현실로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해가 성경을 통해 가능한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미 누가복음 18장을 보았지만 주의 도움 없이는, 주의 은혜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자가 성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의를 이루기 위해 한 일이라곤 하나도 없다는 것이 우리의 존재성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분은 누구시냐?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인생길을 통해 우리는 무와 같지만 유를 창조하시듯 그렇게 역사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신 겁니다.
오늘 본문도 다르지 않습니다. 1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세상 사람의 말로는 우연찮게 여리고로 들어갔다고 볼지 모르겠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결코 우연이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요, 섭리보다 앞서 하나님의 뜻하신 바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여리고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10절과 연결해서 생각해 보자면 바로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 여리고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누가 있었는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삭개오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2절에 보시면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여기 보시면 그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 할 때 세리장이라 말합니다. 여러분, 이미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예수님 당시 세리는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매국노와 같은 자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으로 있었고, 그래서 일정량의 세금을 로마에 바쳐야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세리는 일정량만 거둔 것이 아니라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 더 많은 세금을 거둬들이는 자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는 매국노요,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죄인 중에 죄인으로 취급하였습니다. 이미 살핀 바 있는 누가복음 18장에서 바리새인의 기도가 그 증거입니다.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18:11) 그러니까 당시 세리는 바리새인의 기도와 같이 죄인으로 취급을 하였던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7절 보시면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느냐?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오늘 본문에 보면 삭개오의 경우 단순히 세리가 아니라 세리장입니다. 일반 세리도 세금을 일정량 이상으로 거뒀다면 세리장의 경우 더 많은 이익을 남겼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후 삭개오가 회개하면서 회개의 열매로서 다른 사람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다면 4배를 갚겠다고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눅19:8), 이런 부분과 함께 생각해 보자면 그나마 정직하게 하려고 했던 사람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세리의 역할을 생각해 볼 때면 완전히 정직한 자로서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이 되어 집니다. 그리고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세리장으로서 꽤 부요한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런 그에게 어떤 소식이 들려졌느냐 하면 예수에 관한 소식이 들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 자기가 살고 있는 이 여리고를 지나가신다는 걸 접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인파가 몰렸습니다. 특히 이 삭개오는 키가 매우 작은 사람이었습니다. 3절에 보시면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취한 방법이 뭐냐? 4절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맨 처음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삭개오는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자신의 체면은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세리장이라고 하면 자신의 체면을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은 일반적으로라면 피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편에서 볼 때 로마의 앞잡이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앞잡이로 생각되는데 사람들이 반겨줄 리가 만무합니다. 당연히 이스라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은 꺼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보면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부르시고 네 집에 거하겠다고 말씀하실 때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하느냐? 조금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7절에서 사람들끼리 수군거리면서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 많은 사람들이 세리에 대해 매우 적대적인 감정, 그를 죄인으로서 취급을 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삭개오가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실 때 오직 한 가지 소망만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것,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볼 수 있다면 체면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소망이 그의 구원의 원인은 아니라는 걸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다시 말해 그가 예수님을 간절히 보기 원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그에게 구원을 베푸신 게 아니란 것입니다. 오히려 여기에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분명하게 있음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삭개오의 마음에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은 분명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일어난 마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분을 보기 원하고, 그분에게로 나아가길 원하는 것처럼 그런 마음이 그에게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을 주시는 이가 누구시냐?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의 은밀한 역사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에 보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의 소원이 있다고 해서 다 구원을 얻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무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만 결국 그 무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데 앞장서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 많은 무리들이 예수를 보기 위해 나와 있지만 그들 모두가 구원의 대상은 아니란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삭개오의 구원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싶어 하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소망이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가를 잘 살피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 5절을 보시면 예수를 보기 위해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 삭개오를 향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여러분, 예수님은 이미 삭개오의 이름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것도 매우 신비로운 일입니다. 어떻게 삭개오의 이름을 알았을까? 그분은 단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나무 위에 오른 삭개오를 쳐다보셨습니다. 그 광경이 신기해서 쳐다보신 것이 아니라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시기 위해서, 그리고 그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푸시기 위해서 부르신 것입니다.
본래 삭개오가 나무에 올라간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한번 보는 것으로 족하겠다는 심정이었습니다. 거기에 올라가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가 예수님을 한번이라도 꼭 보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은밀하게 그 마음을 붙들고 계신 까닭입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구원의 문제에 있어 단판을 짓거나 할 의향으로 올라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그를 누가 보셨냐 하면 예수님께서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부르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이처럼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을 찾아오시고, 찾아내십니다. 그리고는 부르십니다. 10절 말씀처럼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 찾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처음에 갈대아 우르에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우상을 섬기는 도시에서 살고 있었고, 그의 아버지 역시 우상을 섬기는 자였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아브라함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그를 누가 먼저 찾아가셨는가? 하나님이십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뿐 아니라 하란에 머물렀을 때도 하나님께서 다시금 찾아가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12:1-2) 모든 인생이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 그러니까 이미 영원 전에 택하신 자기 백성들을 먼저 찾아가십니다. 그리고는 부르십니다.
특별히 삭개오를 향한 부르심은 구원을 위한 유효적 부르심인 걸 알 수 있습니다. 6절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부르시자 삭개오가 이렇게 반응합니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분명 외형적으로 볼 때는 자기 집으로 예수님을 초대한 것이지만 주께서 먼저 그를 부르시고, 그 부름에 대한 응답이 바로 이런 반응인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부르심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외적 부르심이 있고, 다른 한 가지는 내적 부르심이 있습니다. 외적 부르심은 쉽게 말해 복음의 선포와도 같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부르심은 그 대상이 모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내적 부르심은 그런 외적 부르심이 반드시 효과를 발휘하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3장을 통해 배운 것처럼 성령이 그 속에서 역사하여 믿도록 하는 것! 그래서 내적 부르심을 다른 말로 유효적 부르심이라고 하는데, 대상은 반드시 영원 전에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으로 제한이 되어 있습니다.
지금 삭개오를 향한 부르심이 바로 유효적 부르심입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께서 나무에서 내려오라고 말씀하실 때 그리고 내가 네 집에 거할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 즉시 순종하여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것은 성령의 능력과 인도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칼빈).
이렇게 볼 때 삭개오의 구원은 그 자신의 열심, 그 자신의 노력, 그 자신의 간절한 소망이 원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밀한 역사가 선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과 관련하여 칼빈이 주석을 할 때 반복적으로 이런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선 전체적으로 요약하면서 “그는 하나님에 의해 감동되어 그리스도를 보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을 가졌으며 이 소원은 즉시 성취되었다” 또한 5절과 6절을 주석하면서 “주님께서는 성령의 은밀한 역사에 의해 그를 자신에게로 이끌고 계셨으므로”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을 이해할 때 인간으로부터 무엇인가 출발하는 것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도록 매우 주의를 하셔야 합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거기에는 인간이 어떠한 공로를 조금이라도 더하는 것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이야기 하자면 여리고로 지나가신 것도 우연이 아니라 삭개오라는 한 사람이 목적이 되어 가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키 작은 삭개오가 볼 수 없었을 때 그로 하여금 예수님을 보고 싶은 소망을 가진 것도, 그리고 그 소망 때문에 나무에 올라가 보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붙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시는 게 10절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누군지 알아 찾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무엇을 위해 오셨는지 알지 못합니다. 알고자 하는 소망도 사실 없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빛이 왔으되 사람들이 깨닫지 못했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성령의 은밀한 사역을 통해,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으로 찾아가시고, 부르시고, 결국 자기 백성들을 불러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게 된 경위를 보면 여러 가지 모습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모님께서 믿으셔서 모태신앙으로 시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일학교 때 친구 따라 갔다가 쭉 믿을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학생 시절, 어떤 사람은 대학생 때 복음을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아니면 남편 때문에, 아내 때문에, 혹은 자녀들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다양성 가운데 동일한 것은 우리가 먼저 믿기 위해 찾아 나선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외형으로는 그렇게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전도로 인해 결국 내가 믿기로 했다. 그러나 보이진 않지만 성령의 은밀한 일하심이 우리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아니 좀 더 드러난 형태로 답변하자면 로마서 10장 13절 이하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롬10:13-15a) 결국 한 사람이 믿기 위해서는 주님의 이름을 참되게 불러야 하는데, 부르기 위해서 믿음이 있어야 하고, 믿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복음에 대한 들음이 있어야 합니다. 듣기 위해서는 누군가 전파해야 하는데, 전파하는 자들은 다 어떤 자냐? 누군가 보내셨기 때문에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럼 누가 보냈는가?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위한 부르심이 있었을 때 삭개오는 성령의 조명을 통해 그 부르심에 응답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의 반응은 그렇게 좋은 반응은 아닙니다. 다시 7절을 보시면 “뭇 사람이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그러나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놀라운 반전이 삭개오에게 있게 됩니다. 사람들은 다들 세리에 대해 죄인이라고 취급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을 통해 그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을 때 마치 회개와 더불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듯 그렇게 다짐하는 것을 보여주게 됩니다. 8절을 보시면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달리 말하면 그가 구원을 받은 증거가 외적인 표징으로 인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삭개오가 구원을 받은 것은 8절에서처럼 그가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믿었기 때문에, 회개했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 회개가 구원의 원인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구원받은 자로서의 열매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결국 어디까지 드러나야 하는지에 대해 알리고 있는 말씀입니다. 단순히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으로 우리의 신앙 내용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다면 마땅히 구원받은 자로서의 삶, 행실, 그리고 거기에 합당한 모습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물질과 관련하여 본문이 드러내고 있는 것은 물질이 어떤 면에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 바로 앞에 있는 누가복음 18장 18절 이하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어떤 관리가 묻기를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계명을 지키라” 특별이 율법의 두 번째 돌판에 대한 부분을 언급하십니다. 이런 답변에 그 관리는 다 지켰다고 대답합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느냐 하면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문제는 이 관리가 큰 부자여서 주님의 말씀 앞에 근심하고 돌아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교훈하시기를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눅18:18-25)
이 말씀은 부자는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걸 말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는가?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계명을 지킬 수 없습니다. 부자 관리 역시 다 지켰다고 말하지만 그에게 부족한 점이 분명 있습니다. 아니 실제로는 너무 많다는 것이 정확한 답변일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 말씀하십니다. 물질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왜 이렇게 말씀하셨는가? 다 지켰다고 생각하지만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께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고 말씀하신 것, 그리고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 물질이 구원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다 버려도 괜찮다는 의미도 함께 함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게 있는 소유를 다 팔아서 나눠 줘도 영생을 얻는 일에 있어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JS 설교 참조).
오늘 본문은 어떤 면에서 이 부분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는 것,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다는 것은 그의 전 재산을 다 내어놓은 것과 같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이런 부자들도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때 그에게 있는 물질이 구원에 있어 1퍼센트라도 이바지 하는 것이 있느냐?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 본문은 그의 구원이 회개했기 때문에, 그리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었기 때문이 아니라 누가복음 18장에서 보여줬던 것처럼 구원과 물질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걸 더욱 더 드러내는 성격이 있는 것입니다. 앞서 물질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대표한다고도 말씀드렸는데, 그렇게 보자면 이 세상의 어떤 것도 구원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걸 알리는 것과 같습니다. 삭개오의 이런 행동은 철저히 구원의 결과요,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8장에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 말씀하실 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뭐냐 하면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눅18:27) 말씀하셨던 겁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매우 주의해야 될 것은 세상의 어떤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잘 드러낸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사고방식을 빨리 버리셔야 합니다. 세상의 것이 구원의 1%도 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세상의 것이 하나님의 영광의 1%도 이바지 하는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물질이 많으면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이 되고, 좋은 직장에 다니거나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드러낸다고 착각합니다. 아닙니다. 세상의 것이 영적인 것에 영향을 주는 경우는 어떤 것도 없습니다. 그것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무엇입니까?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입니다. 거지 나사로의 경우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몸도 아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그의 신앙을 붙들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답시고 세상의 것을 구하는 모든 것을 우리는 빨리 내려놓으셔야 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을 일이킨 사건이 나옵니다. 그때 그들은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말했습니다. 달리 말하면 은과 금은 그들의 자랑거리가 아니란 소리와도 같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그에게 준 것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못 걷게 된 사람을 일으켰다는 거기에 강조점을 두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핵심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그에게 줬던 겁니다. 걷고 안 걷고는 이차적인 문제입니다. 은과 금은 더더욱 취급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떤가? 연약하다는 이유로 물질을 채워주면, 건강을 회복시켜 주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역사하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수준이라는 것이 이런 것만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데 심각성이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여러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물질을 잃었는데 하나님의 은혜요, 감사한 적이 있습니까? 건강을 잃었을 때 그것조차 하나님의 은혜요, 감사로서 하나님 앞에 선 적이 있습니까? 진리 때문에, 말씀 때문에 손해를 보는 것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한 적이 있느냐는 겁니다. 다 누구와 같으냐 하면 근심하고 돌아간 부자 관리와 같이 지금 삭개오와 같지는 않은 겁니다. 주의 은혜가 지금 오늘 본문을 통하여 드러나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그 은혜 앞에 근심하는 자로 있을 뿐 삭개오에게 임했던 은혜의 내용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서라도 주를 쫓겠다는 각오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은 증거로서 물질을 말하는 방식, 꼭 물질이 아니더라도 내 자녀가 잘되는 쪽으로 생각하는 방식, 사업이 잘 되는 쪽으로 생각하는 모든 방식은 이런 면에서 진리를 훼손하고, 복음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는 내용이라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매우 조심하셔야 합니다.
지난번에 누가복음 18장 1절 이하 8절 말씀을 통해 우리의 연약함을 따라 어떤 기도든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과부와 불의한 재판장과의 관계와는 전혀 다른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오해하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정당화하시면 절대로 안 됩니다. 여러분이 이런 말씀 앞에 있다면 반드시 좀 더 믿음의 자리, 부르심에 합당한 자리로 나아가셔야 합니다. 그것이 은혜의 증거인 것입니다. 기도했더니 물질이 생기고, 기도했더니 좋은 대학에 가고, 기도했더니 직장의 문제가 풀리더라. 물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겸손히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 은혜라고 생각하는 걸 내려놓으셔야 합니다. 기도했는데도 물질이 안생기고, 기도했는데도 좋은 대학 못하고, 기도했는데도 직장의 문제가 풀려지지 않을 때 그때도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여전히 은혜를 베푸심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이걸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래서 잠언을 보면 자주 금과 은보다 뭘 구하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구하라고 말합니다. 한 말씀만 읽어드리면 잠언 8장 10절과 11절입니다. “너희가 은을 받지 말고 나의 훈계를 받으며 정금보다 지식을 얻으라 대저 지혜는 진주보다 나으므로 원하는 모든 것을 이에 비교할 수 없음이니라”
물질에 대한 문제가 나왔기 때문에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면 삭개오가 구원받은 자로서 구원과는 상관없는 물질로서 열매를 맺고 있다면 물질을 달라고만 기도하지 마시고 정말 여러분의 여유를 주의 선한 일들을 위해서, 그래서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어떤 사람의 경우 하나님께서 분명 다른 사람들에 비해 많은 물질로 채워주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좀 편안하게 사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물질을 주신 것은 여러분들이 편안하도록 하기 위해 주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정말 큰 착각입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주신 것도 있습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분복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위의 사람들, 혹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여러분에게 주실 수 있다는 걸 열어놓으셔야 합니다. 실제로 구약에 보면 밭을 소유한 사람이 있지만 그 밭에 있는 곡식을 거둘 때 떨어진 것은 다시금 줍지 말도록 말씀하기도 합니다. 또한 밭의 귀퉁이는 다 거두지 말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내 소유이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내게 주신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보면 물질이 정말 하나님인 양 그렇게 의지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을 보게 됩니다. 보험도 한, 두 가지가 아니라 몇 가지 이상 들어놔야 안심입니다. 우리의 알지 못하는 일에 대하여 대비하는 게 잘못이라는 게 아니라, 이미 우리 마음에 하나님보다 그것을 더 의뢰하는 마음으로 있다면 그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질은 주신 것은 결코 의뢰하라고 준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셨다면 주는 자가 받은 자보다 복되다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복됨을 드러내시는 자로 계실 뿐입니다(행20:35). 그리고 그런 삶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총을 받았다면 구원과는 상관없는 이 물질에 대하여 필요한 자에게 흘러가도록 자주 손을 펼 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디나 계시다는 것을 그런 방식으로 여러분이 사셔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합당한 열매인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삭개오의 구원은 그의 열심, 그의 노력이 아닙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성령의 은밀한 역사에 있습니다. 회개했다는 것조차 구원의 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 회개했다는 것은 이미 주의 은혜로 말미암아 결과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 9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말씀하시니까 마치 그의 회개, 그리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그의 구원을 보장해 주는 것처럼 이해되고 있지만, 이 말씀은 회개,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그가 구원받았다는 보증으로서 말씀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의 구원의 그의 행동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뭐냐? 10절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 원인이 있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부디 이런 말씀 앞에서 신앙에 있어 내 쪽에서 원인으로 삼는 걸 주의하시고, 오히려 주께서 먼저 일하심으로 나의 나됨을 있는 줄 아셔서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성도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세상의 것에 대한 모든 탐심을 속히 버리십시오. 골로새서에 의하면 탐심은 곧 우상숭배와도 같습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될 수 없으며, 세상에 있는 일부도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을 구하시고, 그 하나님으로 인하여 자족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삶이 되기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