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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07설교 / 예레미야17장5-8절 / 오직여호와를의지하라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8.01.07|조회수1,454 목록 댓글 0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예레미야 175-8

오직 여호와를 의지하라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은 내용 자체로는 어렵지 않고 오히려 명확한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의지하는 자는 결국 저주를 받게 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은 복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명확한 말씀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조차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않는 경우들이 굉장히 많기 때문입니다.

일단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보면 유다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말씀하시는데, 4절을 보시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네게 준 네 기업에서 네 손을 뗄 것이며 또 내가 너로 하여금 너의 알지 못하는 땅에서 네 원수를 섬기게 하리니 이는 너희가 내 노를 맹렬하게 하여 영원히 타는 불을 일으켰음이라쉽게 말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크게 진노하시는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땅에서 더 이상 살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의 원수라고 할 수 있는 자들에게 끌려가 섬기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럼 왜 이런 진노를 말씀하시느냐? 그들은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약속과 경고를 무시하였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것 한 가지를 말하자면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말씀 앞에서 그들은 이방신도 사랑하는 것처럼 그것들을 섬기는 형태로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진노를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사실을 2절에서 언급하는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자녀가 높은 언덕 위 푸른 나무 곁에 있는 그 제단들과 아세라들을 생각하도다특히 그들의 자녀가 이방신들을 생각한다는 것은 그들의 부모로부터 그것들을 물러받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본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만을 생각해야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아닌 거짓된 신들을 생각했고, 심지어 그런 죄악이 그들 자녀에게까지 이어져오고 있었던 겁니다.

결국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만을 섬겨야 할 자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던 것이고,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오히려 하나님이 아닌 다른 피조물들, 특별히 사람들을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그들의 죄악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드러내시는 것으로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저들의 죄악만 드러내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경고하시고, 경고를 통하여 돌이켜 돌아오길 원하시는 마음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5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여기 보면 사람을 믿는다, 육신으로 그 힘을 삼는다, 마음이 여호와를 떠났다는 말은 다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말입니다. 사람을 의지한다는 것은 사람이 믿음의 대상이 되며, 그렇기 때문에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떠날 수밖에 없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긴 말이 필요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이미 사람이 믿음의 대상이 되고 있고 사람의 힘을 의지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 마음을 하나님께 둘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람을 믿고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는 자는 그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날 수밖에 없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 대하여 선지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본문 앞에 있는 말씀과 함께 생각하자면 지금 그들이 살고 있는 땅에서 쫓겨나 이방인의 노예가 될 것이란 것입니다. 물론 성경이 저주를 선포할 때 그 일이 곧바로 일어나는 일로서 말씀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통해 경고하실 때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저주를 선포하심으로 너희가 계속해서 여호와를 떠나 있다면, 그래서 끝까지 회개하여 돌아오지 않는다면 결국 저주를 선포한 그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될 것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다고 해서 아직 저주가 임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호와를 떠난 그 자체,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는 그 자체, 그런 의미로서 사람들을 믿고 의지하는 것 자체가 이미 저주의 성격으로 있다는 것도 깊이 생각해야 될 부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완전히 떠났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 그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제사를 드렸습니다. 예배를 드렸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기회주의자들처럼 때로는 이쪽 때로는 저쪽을 의지하면서 자신들의 살 길을 그들 스스로가 모색하는 자로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만 의지해야 했지만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을 맞다보니 하나님보다 당시 그 나라 주위의 상황에 따라 강대국들을 더 의지하는 모습으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노골적으로 하나님은 필요 없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자신의 어려운 형편 속에서 당시 강국으로 있었던 앗수르나 애굽을 의지하면서 자기 살 길을 모색한 것처럼 우리 역시 그런 모습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것을 주의하셔야 합니다. 저들의 경우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 만큼 분명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있긴 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에 예배도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전적으로 섬기고 의지하였는가? 그렇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의지하되,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을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의지하는 것에 대하여 경고하시는 겁니다. 사람을 의지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과 같으며, 사람을 의지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반면 오늘 본문 7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라는 말과 여호와를 의뢰하라는 말은 같은 의미의 반복입니다. 한 마디로 오직 여호와를 의지하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5절에서 사람을 의지하는 자와는 반대적인 의미입니다. 따라서 지금 하나님께서는 무력한 인간들로부터 안전을 구하면서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자로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라고 강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자는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때 복도 저주와 관련해서 말씀드린 것과 연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즉 여호와를 의지했더니 어떤 문제가 해결되고, 여호와를 의지했더니 당장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뭔가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만 복이 아니라, 이미 여호와만을 의지하는 것 자체가 복으로 있다는 겁니다.

이런 이해는 매우 중요한데, 우리는 너무 문제 해결 자체에만 초점을 둘 때가 많습니다. 다시 말해 문제가 해결되면 복이고, 그렇지 않으면 저주인 것처럼 생각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미 여호와만을 의지하는 것 자체가 복이요,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는 것 자체가 저주인 겁니다.

그러나 동시에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고 끝까지 사람을 의지하는 자들의 결국은 저주를 받되, 영원한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의 결국은 복을 받되, 영원한 복을 받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저주와 복은 이 세상에서의 어떤 문제를 해결해 주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분명 아닌 겁니다.

 

어쨌든 오늘 본문 5절과 7절은 매우 분명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분명한 말씀 앞에서 우리가 과연 하나님만 의지하고 있는가를 물어본다면 사실 하나님 앞에서 감히 얼굴을 들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로 있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해야 할 것이 성도의 모습이지만, 우리가 그렇게 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가장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교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약속의 말씀을 믿는 것과 현실의 문제 앞에서 자주 현실의 문제가 이기는 형태로 있더란 겁니다. 현실의 문제가 이기다보다 약속의 말씀은 더 이상 믿지 못하는 것으로 결과 될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의 문제 앞에서 우리의 믿음이 연약하다는 것을 알고 믿음을 주시는 하나님께 믿음을 더해 달라고(9:24 참조) 항상 기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오늘도 믿음을 따라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하며, 특별히 어려운 상황 가운데 놓일 때 믿음과 상관없는 모습으로 반응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더불어 우리는 믿음이 들음에서,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부터 나온다는 가르침을 따라(10:17) 주의 말씀을 읽고 듣는 일에 더욱 부지런하셔야 합니다. 물론 세상 삶이 바쁘긴 합니다. 그러나 바쁜 가운데서도 말씀을 읽고 듣는, 그리고 들은 말씀에 대하여 자주 살피는 것은 분명 유익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말씀과 기도라는 방편들을 상용하지 않고 믿음이 증가되고 강화되는 것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41항 참조).

하나님만 의지해야 할 성도가 그렇게 하고 있지 못하다고 할 때 우리는 말씀 앞에서의 안일한 마음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당시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을지 모릅니다. 선지자를 통하여 계속해서 경고는 하시는데 경고하시는 말씀에 비해 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안일한 마음을 가졌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선지자를 보내시고 또 보내신다는 것은 그만큼 참고 또 참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경고의 말씀을 너무나도 안일하게 생각했습니다. 참된 선지자의 말보다는 거짓 선지자의 말, 죄를 범하고 그 죄 때문에 상처를 입고 있는데도 평강하다고 외치던 거짓 선지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던 것입니다(8:11 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말씀 앞에서 안일한 자세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경고하고 계시는데도 그런 경고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서 듣기만 하는 자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는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그리고 하나님께서 위협하시면 그런 위협에 대하여 떨며 두려워하는 마음을, 나아가 이생과 내생을 위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는 그것을 바라보며 소망하는 자세를 가져야만 합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42항 참조). 달리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로만 있어서는 안 되고, 듣고서 반응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1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서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읽기만 해서는 안 되고, 듣기만 해서도 안 되고, 읽고 들은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 거기에 진정한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는 하나님과 더불어 어떤 동반자를 함께 섬길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창조하신 모든 만물을 지금도 다스리시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잘못으로 인하여 죄가 들어 왔지만 그 죄조차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모든 선한 일들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최고의 주권자로 고백합니다. 그렇게 고백하는 자들이 그런 고백이 무색하도록 하는 어떤 동반자를 가질 수 있느냐? 없습니다.

마태복음 6으로 가시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6:24) 혹이라도 중히 여긴다, 경히 여긴다는 표현 때문에 하나님을 더 중히 여긴다고 말하고 싶은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쉽게 볼 문제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같은 설명으로 한 쪽을 사랑하면 한쪽은 미워하다는 것으로 분명히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성도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믿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된 믿음을 주시고 또한 그 믿음에 따라 산다고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미워하느냐는 겁니다. 최근 마태복음 설교를 통해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모든 사람에게는 아닐지라도 하나님은 부자 청년에게 모든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자신을 따를 것을 명하셨는데(19:21), 중히 여긴다는 것은 이런 말씀 앞에서도 실제로는 실천하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하느냐는 겁니다. 오히려 부자 청년처럼 근심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중히 여기고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은 경히 여겨야 한다고 할 때 더 많이 사랑하고 덜 많이 사랑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은 하나님만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께로 가야 할 사랑을 다른 것에 빼앗기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만큼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향해 베푸신 사랑처럼 동일하게 사랑을 요구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 두 주인을 섬긴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임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다른 것은 경히 여기지만 하나님은 중히 여긴다는 그 수준이면 족하다는 그런 뜻이 아닌 겁니다.

뿐만 아니라 조금 전에도 말씀을 드렸다시피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고, 또한 지금도 모든 것에 대하여 섭리로 다스리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때문에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 없이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뜻은 결코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하여 일어나는 일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자세는 어떠한가? 하나님께서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시지만,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특히 어떤 어려움에 봉착하면 더더욱 그렇게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마치 남유다 백성들처럼 어려울 때 하나님께 기도하기도 하지만 인생을, 그것도 힘이 있는 강대국을 의지하여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그런 마음이 우리 안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생각과 마음의 자세를 날마다 제거해야 합니다.

 

실제적인 문제를 좀 언급하자면 분명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저축을 하거나 보험을 들어놓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여러분 마음이 든든하다고 생각한다면 혹이라도 그것을 의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살펴보셔야 합니다. 혹 내가 아는 가까운 사람 중에 이 땅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그것으로 마음이 든든하다면 여러분은 바로 그 권력과 권력을 가진 사람을 의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돌아보셔야 합니다. 우리의 본성은 놀랍게도 물질이 있으면 있을수록, 그리고 어떤 권력이 있으면 있을수록 그것을 의지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부정하고 싶겠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없을 때보다는 있는 것이 더 든든하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번도 그 모든 것을 주시면서 그것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신 적은 없습니다. 이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욥기 1을 보시면 욥을 통해 우리는 놀라운 고백을 듣게 됩니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1:21) 달리 말하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언제든지 취하여 가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 본문과 함께 생각해 보자면 하나님 외에는 결코 의지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있다가 없어지는 것, 어떤 변화가 있는 것이 어떻게 의지의 대상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변화가 없습니다. 커지거나 작아지지도 않으며 많아지거나 적어지지도 않습니다. 야고보서 말씀에 의하면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십니다(1:17). 물론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마치 변하는 것처럼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적응하여 계시하시는 방식이 그러한 것이지, 계시하신 바가 그렇다고 해서 실체로서 하나님 안에 어떤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다른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의지해야 할 유일한 대상은 하나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의지하고 있느냐?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면서도 세상의 것, 즉 있다가도 없어지는 것들, 어떤 변화가 있는 것들을 의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어리석은 자들로 있는 겁니다.

 

욥기 내용을 좀 더 말씀드리면 사실 욥과 같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굉장히 드뭅니다. 자신의 모든 재산, 그리고 자신의 모든 자녀들을 한꺼번에 잃었는데 얼마나 큰 충격이겠습니까? 이런 충격적인 일 속에서 고백한 것이 바로 앞서 말씀드린 고백인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통해 증거하고 있는 분명한 사실은 이 모든 일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이고, 그러한 일조차 하나님은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그 모든 일을 행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일들 가운데 일부라도 우리에게 일어나는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선하심인가를 자꾸만 묻습니다. 나에게 있는 고통과 어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게 되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왜 그렇게 하시는가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즉 그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심으로 목적하시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욥기를 보면 사탄이 나와 욥을 괴롭히는 자로 있습니다. 그리고 사탄의 사주를 받아 실제로 재산을 빼앗는 자들도 등장하는데,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목적과 저들의 목적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악인과 사탄은 그 목적과 의도가 선하지 않습니다. 악할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같은 일을 하시면서도 선한 목적과 선한 의도를 가지십니다. 분명 외적으로는 고통과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있지만 그것을 통해 선한 목적과 선한 의도를 가지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욥기 마지막에 보면 욥이 어떻게 고백하느냐?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42:5) 바로 욥의 고백과 같은 일을 위하여 우리에게 어려움, 고난과 같은 일들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이것을 안다고 하면서도 마치 깨닫지 못하는 자처럼 행동하는가? 하나님만 의지하지 못하고 다른 무엇인가를 의지하고자 하는가? 우리의 눈이 하늘을 향해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땅을 향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에 대해 현실로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의 환경이나 조건과 상관없이, 혹 그것이 좋든 아니면 그것이 나쁘든 하나님만을 의지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환경과 조건에 따라 하나님을 의지하기도 하는가 하면 사람이나 어떤 힘을 의지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 우리가 어떤 어려움이나 고통 중에 있을 때 그것을 빨리 피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 모든 일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허락하신 모든 고통과 어려움의 일들은 결코 악한 목적과 악한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선한 목적과 선한 의도를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루십니다. 욥이 고백한 것처럼 이전에는 하나님에 대하여 귀로 듣는 자로 있었지만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는다고 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렇게 행하시는 겁니다. 때문에 당장 좋아지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것을 의지하여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인내의 열매를 맺으며 나아가는 것이 성도가 가야 할 길인 겁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은 어떤 의미에서 자주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예레미야 앞서 이사야 때만해도 이런 말씀을 하기도 하셨습니다. 이사야 31 1절부터 3입니다.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의 말씀들을 변하게 하지 아니하시고 일어나사 악행하는 자들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들을 치시리니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들의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펴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이런 말씀은 신명기를 통해서도 경고해 주신 말씀인데, 특별히 왕 된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17:16) 한 마디로 자기 힘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이요, 주변에 있는 강대국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는 이런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못 했습니다.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기고 또 말씀하셨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하는 자들, 무엇보다 왕 된 자들은 위기만 오면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자처럼 주변에 있는 강대국으로 도움을 청하러 갔던 것입니다. 물론 세상적으로 볼 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약소국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대국의 힘 아래 들어가는 것,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모든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분이 아니십니까?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쥐고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까? 반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는 뭐라고 말씀합니까? 애굽은 신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때문에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펴시면 돕는 자도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돕는 자가 넘어지는데 도움을 받는 자는 어떻겠습니까? 당연히 넘어지고 엎드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 함께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이란 존재는 미래라는 것으로 걱정을 하지만 그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것이 하나님 밖에 없다는 사실을 항상 망각하는 존재로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하십니다. 잠언 16 9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아무리 내가 계획을 세운다 할지라도, 그래서 미래에 대한 철저한 대비를 한다 할지라도 그 길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겁니다. 이 사실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사실 앞에서 내 미래를 위한 무엇을 한다고 할 때 그분의 뜻, 그분의 명령 밖에서 행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한 예로 학생들은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공부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미래를 위한 공부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가면서까지 해 나가는 것은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하는 거기에 멈출 뿐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가 여호와란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란 겁니다.

그럼 우리가 우리 자신의 길을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은 무엇인가? 주의 말씀을 따라 주일에는 6일 동안 하던 공부를 멈추어야 합니다. 혹 그 다음 날이 시험일지라도 미리 하든가, 아니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해야지 지금 당장 급하다고 해서 주의 명령조차 어기면서 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입니다. 출애굽기 3421절이 그것입니다. “너는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에는 쉴지니 밭 갈 때에나 거둘 때에도 쉴지며밭을 갈거나 거둘 때조차, 다시 말해 바쁘고 급할 때조차 안식일, 즉 오늘날로 주일에는 그 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월요일이 시험인데 월요일 전에 시험공부 하지 않으면 성적이 떨어질 것을 염려할 수 있습니다. 추수해야 될 때 하루라도 하지 않으면 그만큼 손해 볼 수 있다는 것으로 염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손해보다 말씀을 지켰다는 것이 여러분에게 복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복은 현실의 문제, 즉 주일에 시험공부를 해서 그 다음날 시험을 잘 보고, 추수 때 주일이라 할지라도 추수하여 더 많은 수확을 하고 하는 것이 복이 아니라, 말씀을 지키는 것, 그것이 성도의 복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리인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번 것 중에 십분의 일을 드리면 분명 물질 중 일부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십일조에 대해서도 너무 보상 개념으로 이해하고자 해서 십일조 하면 더 많은 물질을 줄 것이라고 말하지만, 항상 그런 방식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십일조를 드리면 드린 만큼 내가 쓰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더 주시고 덜 주시고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만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을 드리지 않는다면 물질적인 면에서는 이익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이 복은 아닌 겁니다. 주의 말씀을 따르는 그 자리, 그 자리가 성도의 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은 지금 당장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니까 뒷전입니다. 오히려 지금 당장 든든하고, 내게 유익이 될 것만 생각합니다. 미래를 생각하긴 하나 그 미래가 언제나 말씀보다는 내 현실이 앞서 있는 겁니다. 그런데 선지자를 통해 하시는 말씀은 그것이 바로 저주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당장 풀리지 않는 것 같고, 지금 당장은 어려운 것 같아보여도 말씀만을 지켜 나가는 삶,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삶이 진정한 복입니다. 눈앞에 이익이 있다 할지라도 그 이익을 붙잡는 것이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런 이익은 취하지 않는 자가 되셔야 합니다. 주의 말씀 안에서만 머무는 것, 이것이 성도의 삶이요, 방향이어야 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시면 6절과 8절은 앞선 말씀에 대한 비유를 들어 설명하는 내용인데, 사람을 믿고, 육신으로 그 힘을 삼고,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난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6절을 보시면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사막의 떨기나무 같다는 것은 열매가 없는 쓸모없는 나무와 같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마차 요한복음에서 말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15:5) 주님을 떠나 있는데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때문에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들이 거하는 곳은 결국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거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마디로 사람을 믿고, 육신으로 그 힘을 삼는 자는 모든 희망이 헛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혹이라도 의지했는데 뭔가 유익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그것이 헛되다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는 것들입니다. 유익되는 것처럼 보이나 하나님 편에서 볼 때 헛되다고 말씀하실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지금 당장 유익된 것, 거기에 눈이 멀어 하나님의 시각을 잃어버리면 결국에는 착각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남는 게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분명 하나님의 경고를 받고 있었습니다. 위협을 받고 있었고, 어느 정도 징계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돌이켜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거짓 선지자들의 말, 평강하다 평강하다는 말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거짓 선지자를 통하여 평강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실제로 평강이 있었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혹 외적으로는 평강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돌이키지 않고 하나님과 상관없이 그 길을 가는 이상 평강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 착각일 뿐이었던 겁니다.

 

반면 여호와를 의지하고, 의뢰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8절을 보시면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물가에 심어진 나무라고 할 때 우리가 착각하면 안 되는 것이 더위 자체가 없는 것처럼, 가무는 해가 없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물가에 심어졌기 때문에 만사형통만 있는 게 아니란 것입니다. 더위가 있을 수도 있고, 가무는 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갔지만 거기서도 위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이기 때문에 어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지상의 교회는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가정의 풍파와 개인적인 어떤 문제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서 시험 치면 다 붙고, 직장에서 승승장구하고 병도 없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가에 심어졌다는 것은 더위가 와도, 가무는 해에도 결실을 그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나라가 망해도, 교회적으로 어려움을 당해도, 가정의 풍파와 개인적으로 어떤 문제로 힘들어할지라도 그 가운데서 반드시 열매를 맺는 성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있는 말씀처럼,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5:22-23). 그러니까 주의 말씀을 따라 가고 주를 의지하는 자들은 이와 같은 열매를 맺지 못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은 바로 이러한 것들입니다. 세상적인 말로 남달리 사는 것이 복이 아니라, 주께서 나에게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그 영양분을 공급하시는 것, 그리고 그렇게 공급하시는 분이 하나님인 줄 알고 우리로서는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진정한 복인 것입니다.

 

시편 1을 보면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1절부터 3을 보시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무엇이 참된 복인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는 것,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는 것,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오히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 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앞서 요한계시록 말씀으로 빗대어 설명하자면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1:3). 어려움이 없는 게 아닙니다. 고난이 없는 게 아닙니다. 있을 수 있습니다. 아니 모세의 기도로 언급하고 있는 시편 90편에서는 칠십 혹은 팔십 인생을 살면서 자랑할 것은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고백할 정도입니다(90:10). 그렇기 때문에 현실을 보고 살라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약속하신 그 말씀을 붙들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 외에 어떤 것도 의지하도록 주시지 않습니다. 무엇을 주든지, 아니면 주지 않든지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 자신만 의지하라는 것을 말씀하실 뿐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약속하시는 것이 3절입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특별히 요셉을 통해 형통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말씀해 주셨습니다. 즉 국무총리라는 자리에 올라서야지만 형통이 아니라 감옥에 있을 때조차 형통하다고 말씀하셨는데, 바로 그런 곳에서도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에 형통하다고 말씀하셨던 겁니다. 환경의 문제, 세상적으로 볼 때 외적인 어떤 문제가 아니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 거기에 형통이 있는 겁니다. 그럼 하나님은 어떤 자들과 함께 하시는가? 오늘 말씀으로 하자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입니다. 예레미야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찾는 자에게 만나주시겠다고 하셨는데(29:13),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는 자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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