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예레미야 23장 23-32절
거짓 선지자들의 죄악 ③
거짓 선지자들의 죄악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이 아니라 그들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전한다는 데 있습니다. 참되고 바른 것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헛되고 무익한 것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그들이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로부터 배우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기록된 율법으로부터 배우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킵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아야 할 말씀을 치우치게 만듭니다. 뿐만 아니라 말씀에 있어 가감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진노하실 수밖에 없는데, 죄를 범하면서도 재앙이 아니라 평안할 것이라고 말하는 그들에게 평안이 아니라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역시 거짓 선지자들의 죄악의 일면을 말씀해 주는데 저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고 있는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우선 23절과 24절을 보시면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이요 먼 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을 가까운 데에만 있고 먼 데는 계시지 않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가까운데 계셔서 가까운 것만 보실 수 있지, 먼 데까지 보실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보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제한적으로만 보실 뿐이라는 것입니다. 가까이에서 협소하게만 보실 수 있는 그런 분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가까운 데 계시면서도 먼 데도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이쪽에 계시면 저쪽에 계시지 못하는 분이 아니라, 어디에나 계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결코 제한적으로만 보실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문제는 이런 하나님에 대한 무지가 하나님조차 속일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여 자기 마음대로 행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런 저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숨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천지에 충만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데만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먼 데에도 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139편을 보면 다윗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139:1-4) 특히 2절에서 멀리서도 아신다고 할 때 단지 행위로만 아시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신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고백하는 것이 7절 이하의 고백입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139:7-10)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숨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몰래 무엇을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여기 있으면 저기에 없고, 저기에 있으면 여기에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은 보이는 것만 볼 뿐이지 보이지 않는 것은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겉으로 행하는 것을 보더라도 마음을 숨기고서 행할 수 있기 때문에 속일 수 있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며 우리의 안과 밖을 다 보십니다. 그리고 아십니다. 때문에 우리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어지는 25절을 보시면 하나님에 대한 무지 가운데 있는 거짓 선지자들의 죄악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에 내가 꿈을 꾸었다 꿈을 꾸었다고 말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고 말씀하십니다. 특히 여기 보면 내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내가 들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누구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있는 겁니다. 자신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있지만 그 예언은 거짓된 예언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마태복음 7장에서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한 것과 다를 바 없는 모습입니다.
그럼 거짓 예언은 무엇인가? 여기 보면 내가 꿈을 꾸었다고 말하는 그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구약 시대 때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꿈이라는 방식을 통해 알리시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꿈 자체가 문제라고 말씀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꿈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처럼, 혹은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 말씀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꿈을 꾸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처럼 해서 예언하는 것에 대하여 문제를 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 66권으로 계시가 완성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때문에 더 이상 새로운 계시는 없습니다. 새로운 계시가 없기 때문에 계시의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다거나 혹은 꿈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그런 방식 또한 더 이상 있지 않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길을 인도하실 때 꿈을 통해 알리시는 일이 있기도 합니다. 그것조차 부인하고자 함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이 보편적인 방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인도하신다고 해서 그것을 새로운 계시라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계시는 성경 66권의 완성으로 인하여 더 이상 없습니다. 조명, 즉 계시된 말씀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말씀인가를 깨닫게 하시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거부하여 새로운 계시가 있다고 말하면 결국 성경만이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라는 고백이 무색해지고 맙니다. 당연히 성경이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습니다. 직통계시 혹은 꿈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것처럼 말하는 일이 있게 됩니다. 그러나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구약 시대의 경우 꿈을 통해 말씀하시는 바가 있었지만, 오늘날 그런 방식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더 이상 없습니다. 계시의 완성으로 주신 이 성경 66권만이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입니다.
다시 25절로 오면 구약 시대 꿈을 통해 말씀하시는 바가 있었지만 꿈을 꾸었다고 해서 무조건 그 꿈이 하나님의 계시를 담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리십니다. 말씀 자체만으로도 거짓된 말씀을 말하는 자들이 있는 것처럼, 꿈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에도 거짓을 말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여기서도 분별을 요구합니다.
계속해서 26절 상반부를 보시면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언제까지 이 마음을 품겠느냐...”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참된 선지자를 통해 책망하시는 바가 있지만 그들은 돌이키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그들이 무지해서인가? 하나님에 대한 무지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금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거짓 예언에 마음을 쏟고 있다는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단순히 무지 때문에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마음이 거기에 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진리를 싫어하는 것이요, 거짓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26절 하반부를 보시면 “...그들은 그 마음의 간교한 것을 예언하느니라”고 하십니다. 지난주에 살폈던 말씀으로 하자면 여호와의 입으로부터 나온 말씀이 아니라 그들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을 전한다는 것입니다(렘23:16). 그런데 지난주 본문과 비교해 더 심각한 문제는 오늘 본문에서는 꿈을 통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데 있습니다. 기록된 율법을 해석하는 데 있어 잘못된 해석, 거짓된 해석도 심각한 문제이지만 마치 새로운 계시라도 되는 것처럼 말함으로 백성의 마음을 미혹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에는 더더욱 분명히 말할 수 있는데, 조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더 이상의 계시는 없습니다. 구약 시대 때는 새로운 계시가 있었지만 성경 66권으로 계시가 종결된 이후 더 이상의 계시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직통계시를 말한다거나 혹은 꿈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환상도 봤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로 오순절파나 은사주의에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속한 장로교에는 없는가?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국교회는 교파가 나눠져 있긴 하지만 교파만의 어떤 특징을 잘 나타내기보다는 이것저것 섞여 있는 모습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시대만이 아니라 교회 역사를 보면 이런 부류들은 계속해서 있어왔습니다.
문제는 저들이 직통계시를 말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실제로 들을 수 있다고 말함으로 인해 성경을 부정한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성경만이 신앙과 삶의 규범으로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고백하지 않습니다. 혹 외적으로 그렇게 고백할 수도 있겠지만 이미 성경 계시 외에 또 다른 계시를 말한다는 것은 성경 계시의 완성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은 기록된 성경보다 새로운 계시, 그 계시를 주시는 성령에 대해 더 강조합니다.
실제로 예전에 어느 교회에서 한 성도로부터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성령의 일하심을 제한하시 마십시오.” 이 말의 의미는 성령께서 말씀과 상관없이도 얼마든지 일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새로운 계시를 주실 수 없는가 할 때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계시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요한복음 16장 13절에 의하면 진리의 성령은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라는 책에서 이 구절과 함께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약속된 성령의 임무는 아직 들어 보지도 못한 새로운 계시를 만들어 내거나 어떤 새로운 교리 자체를 날조하여 용인된 복음의 교리에서 우리를 떠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복음이 말하는 바로 그 교리를 우리의 마음에 인 쳐주는 데 있는 것이다.”(1559, 1권 9장 1)
이런 이해 속에서 우리가 고백하는 바는 성령과 말씀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특히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과 20절을 보시면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라는 말씀이 있는데, 토마스 카트라이트라는 개혁자는 이 구절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왕의 직분으로 그의 백성을 통치하실 때 무엇을 수단으로 사용하시는가에 대해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다시 말해 성령과 말씀으로 통치하신다고 말합니다. 다만 성령 따로, 말씀 따로가 아니라 이러한 수단들을 분리하는 것을 결코 적법한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칼빈 역시 자유파 논박이라는 책에서 데살로니가전서 5장의 구절과 관련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을 통해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물러서는 것은 그의 성령의 빛을 끄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직접이든 간접이든 우리를 성경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모든 사람들을 마귀로 간주하고, 그들을 독처럼 피하자.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의 뜻을 명백히 나타낸 순전하고 단순한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르자. 그리고 하나님이 그의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그의 말씀을 심기를 원하시도록 기도하자. 그것이 그의 참된 임무이니까 말이다.”
이런 점에서 성령은 말씀과 상관없이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말씀과 함께 일하십니다. 앞서 제게 말했던 분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성령을 제한시키는 것처럼 말하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그렇게 역사하도록 하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결코 성령의 사역을 제한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말씀하신 바를 친히 이루시되 거짓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성령 하나님은 말씀과 상관없이가 아니라 말씀과 함께 일하시기를 기뻐하신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 객관적인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구약 시대 꿈을 통해 예언하는 방식이 분명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선지서가 율법과 전혀 다른 내용으로 예언한 것이 있는가? 없습니다. 즉 새로운 계시가 있다고 말하는 구약 시대조차 기록된 말씀을 벗어나서 말하는 바는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떠하겠습니까?
성령을 소멸하지 말고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고 말씀하실 때 성령이 앞섭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이 세상이 시작되고 난 뒤에 주신 말씀입니다. 때문에 성령이 앞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이 신앙과 삶의 규범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신앙과 삶의 규범이라고 고백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을 규범이라고 말하면 거기에는 성경을 분리시키는 일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혹 여러분이 경험한 바가 있더라도 성경보다 앞설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람은 경험이라는 것으로 객관성을 갖출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경험도 주관적일 뿐입니다. 유일한 객관성은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사도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가 변화산에서 예수님께서 변형되신 것을 친히 보았습니다.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이 경험이 단순히 개인적인 경험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보증하고 있는 경험임을 그의 서신을 통해 말할 정도입니다.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하늘의 보증을 받을 수 있는 그런 경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가 말한 것은 무엇입니까? 베드로후서 1장 19절입니다.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더 확실한 예언’은 이어 나오는 20절에서 성경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때문에 여러분, 성경이 말하지 않고 있는 경험은 거짓된 경험인 줄 아셔야 합니다. 내가 경험한 것으로 그것이 모든 것인 양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은사주의자들 가운데 천국과 지옥에 갔다 온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친히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 경험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줄로 압니다. 그러나 신앙과 삶의 규범인 성경이 그들의 그 경험을 보증할 수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지금 거짓 선지자들이 “내가 꿈을 꾸었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자신이 경험한바 셋째 하늘에 올라간 사실에 대해 말합니다. 셋째 하늘이란 어디입니까? 천국입니다. 둘째 날 하나님께서 궁창을 만드시는데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시면서 그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십니다. 여기가 첫째 하늘입니다. 새들이 날아다니는 곳. 그리고 해와 달과 별이 떠 있는 곳이 둘째 하늘입니다. 지금 우리가 표현하자면 대기권 밖입니다. 그리고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셋째 하늘이 바로 천국입니다. 그 천국에 바울이 갔다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천국에 대하여 묘사하지 않습니다. 바울 서신을 보십시오. 내가 천국 갔다 왔는데, 이런 곳이더라고 말하는 바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계속해서 율법과 선지자들의 교리를 연구하는 데 게으르지 않았고, 또한 그것을 가르쳤던 겁니다. 디모데에게는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딤전4:13)고 권할 정도입니다. 심지어 성경에 대하여 어떻게까지 말합니까?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3:14-17)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어 있다고 할 때 바울 당시 모든 성경은 신구약 성경이 아닙니다. 구약만입니다. 그런데도 그것만으로도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는 데 유익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출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무엇을 더할 수 있겠습니까?
감사한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신약을 더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또 다른 계시의 내용이 아니라 구약에서부터 말씀하셨던 바를 더 밝히 드러내신 것입니다. 모형과 그림자로 있던 것을 실체로 드러내신 것과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구약만이 아니라 신약까지 합하여 ‘모든 성경’으로 있는 겁니다. 더더욱 성경 외에 새로운 계시라고 하는 것을 더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강조하여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말씀, 성경 66권 외에 다른 것으로 우리를 미혹하는 모든 것은 거짓된 줄 아셔야 합니다. 그것은 간교한 것입니다. 27절을 보시면 “그들이 서로 꿈 꾼 것을 말하니 그 생각인즉 그들의 조상들이 바알로 말미암아 내 이름을 잊어버린 것 같이 내 백성으로 내 이름을 잊게 하려 함이로다” 여기 보면 거짓 선지자들끼리 서로 꿈을 꾼 것을 말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서로가 각자 자기들이 꾼 꿈을 말하는데, 공통점이 무엇인가 하면 꿈의 내용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잊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지 않고, 마치 이방신에게 마음이 가 있는 것처럼 꿈의 내용에 그 마음이 가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이 말씀은 꿈의 내용 때문에 말씀을 뒤로 밀어내는 것도 하나님의 이름을 잊게 만드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 신앙과 삶의 규범이 성경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모든 것이 거짓 선지자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는 이런 일이 없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행하지만 실상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기보다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쪽으로 가 있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의 예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진정한 복은 세상의 복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적인 복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것과 더불어 끊임없이 세상 복을 이야기합니다. 세상 복 받기 위한 방법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렇게 성경을 해석하여 내놓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만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말하는 모든 것, 거짓 선지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저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28절을 보시면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꿈을 꾼 선지자는 꿈을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겨가 어찌 알곡과 같겠느냐” 꿈을 꾼 선지자는 꿈을 말하라고 하십니다. 쉽게 말하면 “네 마음대로 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지난주 말씀에서처럼 진노하실 수 있으시지만 여기서는 물리적인 형벌로 보이는 일을 행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나 이것도 저들에게 내리시는 형벌임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로 하여금 죄에서 돌이키도록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예 방치하여 내버려두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회개의 기회도 박탈당하고 있는 겁니다.
혹 하나님께서 저들을 내버려 두심으로 인해 하나님의 백성이 피해를 입을 수 있는 것 아닌가? 물론 그런 일이 아예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결코 잃어버리시지 않습니다. 저들이 저들의 말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이 방해를 받는가? 전혀 방해를 받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진리를 뒤엎으려고 하는 자들이 많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자신의 진리를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그 일을 누구를 통해 하시는가? 거짓 선지자들이 아니라 참된 선지자들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시는 것이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성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 말씀답게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무엇을 더하거나 무엇을 빼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면 선지자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렇게 말씀하셨다면 저렇게 말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실하게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저 열심만 있으면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지난주에 로마서 10장에 있는 말씀을 언급한 바 있지만 열심은 있는데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성실한 것이 아닙니다(롬10:2 참조).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전하는 것,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전하는 것, 하나님의 뜻을 합당하게 전하는 것, 그것이 성실하게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겨가 어찌 알곡과 같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차이가 알곡과 겨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알곡과 겨가 함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알곡을 겨가 감싸고 있다는 것입니다. 알곡을 먹기 위해서는 겨를 벗겨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 인해 함께 취하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본성은 어디를 향합니까? 진리보다 거짓을 더 좋아합니다. 맨 첫 사람 아담을 보십시오. 그때는 타락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유혹 앞에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가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후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더더욱 참된 것보다 거짓된 것을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겨는 바람에 날려갈 뿐입니다. 알곡과 함께 겨가 섞여 있지만 타작하는 과정 가운데 겨는 결국 바람에 날려 사라져 버릴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알곡은 유익합니다. 알곡은 먹고 생명을 유지하게 합니다. 그러나 겨는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 합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겨가 어찌 알곡과 같겠느냐고 하십니다.
이어 29절에 보시면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고 하십니다. 본래는 하나님의 말씀이 알곡으로 있어서 유익하고 생명을 주는 것이지만, 그것을 멀리하거나 버릴 때 하나님의 말씀은 불과 같고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진리보다 거짓을 더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이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경건하고 신실하게, 그리고 유순한 믿음의 자세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양식이 되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동일한 말씀이 불과 같은 말씀으로 또한 방망이와 같은 말씀으로 그들을 불사르고 쳐서 부스러뜨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에서 그리스도가 믿는 자들에게는 보배이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부딪히는 돌, 거치는 반석이 된다고 할 때(벧전2:7-8) 동일한 그리스도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에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듯이 하나님의 말씀 또한 그렇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말씀을 전하는 자들은 성실함으로 말씀을 전해야 하는 반면, 말씀을 듣는 자들 역시 그 말씀을 성실함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불이 되고 방망이가 되어 심판하시는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말씀을 듣는 백성의 죄보다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의 죄가 크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0절을 보시면 “여호와의 말씀이라 그러므로 보라 서로 내 말을 도둑질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31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그들이 혀를 놀려 여호와가 말씀하셨다 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특히 30절에서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하여 ‘내 말을 도둑질하는 선지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들에 대하여 31절에서는 ‘그들이 혀를 놀려 여호와가 말씀하셨다 하는 선지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말로는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여호와의 말씀을 도둑질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것을 가르쳐야 하는데 그것을 도둑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도둑질해서 자기 자신도 유익하게 하지 못합니다. 세상에서 도둑질 하는 사람은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는 유익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도둑질 하는 자들은 자신도 유익하지 못하고 백성들도 유익하지 못합니다. 이런 저들을 향한 말씀처럼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없음)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23:13-15) 그래서 하나님은 저들을 치시겠다고 하십니다.
32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거짓 꿈을 예언하여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령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은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앞서 구약 시대에 꿈을 통해 말씀하시는 바가 있었다고 말했지만 거짓 선지자들의 꿈은 하나님이 주신 꿈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꿈에 대하여 거짓 꿈이라고 하십니다. 거짓 꿈으로 예언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말은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거짓을 말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말하는 저들에 대하여 자만하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높여주신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자신을 높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헛된 자만일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로 사르시고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릴 수 있는 방망이로 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다시금 분명히 말씀하시는데, 거짓 선지자들을 내가 보낸 바 없다고 하십니다. 명령하신 바도 없다고 하십니다. 그들이 아무리 꿈을 꾸었다고 말하고 예언을 말한다 할지라도 그들의 말이 백성을 유익하게 하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때문에 이 말씀을 듣는 유다 백성은 그들에게서 돌아서야 합니다. 돌아서지 않는다면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알곡이 아니라 29절의 말씀과 같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보면 유독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물론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해서 다 여호와의 말씀은 아닙니다. 거짓 선지자들 역시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그들의 말을 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을 통해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예레미야 당시 유다 백성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만족하고 있지 않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생각이 됩니다. 왜 북이스라엘에 이어 남유다가 멸망하는가?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말씀하는 이 말씀을 귀 기울여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꿈에 더 관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무엇에 귀를 기울입니까?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아와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꿈이나 환상, 이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는 방법 등에 관심을 둔다면 결국 여호와께서는 방망이를 드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만큼 두려워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혹은 꿈을 꾼 자는 꿈을 말하라고 하신 것처럼 내버려두실 수도 있습니다. 방치할 수 있습니다. 내가 가고 있는 길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느껴지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는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되물을 것입니다. 선지자들의 경우 주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았습니까? 백성들의 경우 주의 이름으로 듣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그러나 주의 이름으로 말하고 듣는 것이 다가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온 말씀인지, 아니면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나온 말씀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잊게 만드는 것,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지 않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억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올려 드리는 것만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말하고 우리가 들어야 할 내용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