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계시록 20장 1-6절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의 복
요한계시록 12장을 살펴본 적이 있는데, 그때도 말씀을 드렸지만 요한계시록은 1장에서부터 22장까지 시간적인 순서로만 나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내용을 반복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을 취합니다.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에 보면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시간적인 순서로 해석한다면 일곱 인 이후에 일곱 나팔, 일곱 나팔 이후에 일곱 대접이 실행된다는 것으로 해석하겠지만, 그런 시간적인 순서가 아니라 동일한 내용을 마치 병렬적으로, 혹은 시각을 달리해서 설명해 놓은 것이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내용입니다. 의미하는 것, 뜻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 혹은 진술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요한계시록은 반복되는 성격이 있다는 것을 염두 해 두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시간적인 순서로 본다면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이후의 사건으로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앞에서 나온 내용을 다시금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내용으로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의 경우 앞에서 진술된 환상 계시를 포괄적으로 마무리하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요한계시록 20장은 앞에서 말한 내용을 최종적으로 반복해서 요약하고 있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왜 반복해서 말씀하시는가?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요한계시록 12장을 살필 때 말씀드린 것처럼 이런 반복을 통해 신자들이 깨어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있는 표현으로 하자면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제 재림하셔서 모든 것을 심판하실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깨어 있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이 땅에서 준비하도록 하기 위해서 반복의 형식으로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 1장 1절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보이신다고 할 때, 그러나 많은 부분 비유적으로 알리신다고 할 때 요한계시록을 통해 자주, 그리고 반복적으로 교회의 환난을 말하지만 그런 환난 속에서도 주님께서 다시금 오실 때까지 깨어있도록 이 말씀을 읽고, 듣고, 그리고 기록된 말씀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복이라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기에 앞서 우선 정리해야 할 것이 있는데, 본문의 경우 천년왕국이라는 이론의 근거가 되는 구절로 있습니다. 우리 입장은 아닌데, 본문으로 1절에서 6절까지 살펴보겠지만 2절에서 7절까지 각각 한 번씩, 총 여섯 번이나 ‘천 년’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 ‘천 년’을 실제 천 년으로 해석하면서 완성된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 전에 지상에서 천 년 동안 그리스도께서 다스린다는 이론을 말하기도 합니다. 특히 오늘 본문 5절과 6절에 나오는 ‘첫째 부활’을 주님의 재림 때 모든 시대의 죽은 성도들의 몸이 부활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이때 지상에 살아남은 성도들은 영화롭게 변모 되어 몸으로 부활한 성도들과 함께 연합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그들과 함께 주님께서는 지상에서 천년 동안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7절의 내용에 대해 천 년이라는 기간이 차면 사단이 잠간 놓임을 받아 세상 백성들을 유혹하고 거룩한 성 예루살렘과 성도들을 공격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리는 불로 파멸이 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후 모든 시대의 죽은 악인들이 다시 살아나 ‘둘째 부활’을 받고 마지막 심판 이후, 사단과 악한 천사들과 함께 지옥에 던져지며, 결국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면서 구원 받은 성도들의 미래 본향인 낙원이 임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책에서 시편 105편 8절 “그는 그의 언약 곧 천 대에 걸쳐 명령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라는 말씀에 근거해 “천 대를 모든 세대라고 해석하는 것 이상으로 좋은 해석은 있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20권, 7). 이런 측면에서 ‘천 년’은 ‘이 세계가 계속하는 전 기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창세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때까지를 천 년으로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칼빈의 경우 천년 왕국,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천 년 동안 다스릴 것이라고 믿는 것에 대해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천년왕국론자들이 뒤를 이어, 그리스도의 통치 기간을 천년 동안으로 제한하였다... 그들의 오류에 구실을 준 것이 계시록임이 분명하나, 그 계시록도 그들을 지지하지 않는다. 천이라는 수는(계20:4) 교회의 영원한 복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지상에서 수고하는 동안에 당할 각종 곤란에만 적용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창세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때까지를 천 년이라고 할 때 이 기간은 영원한 복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지상에서 수고하는 동안에 당할 각종 곤란과 관련된 기간이라는 겁니다. 이것을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고, 오늘 본문에서는 천 년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서는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라는 것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여기서 나오는 ‘때’를 1년으로 계산하면 삼년 반이 됩니다. 이것을 달로 계산하면 ‘마흔두 달’인데, 이 표현이 요한계시록 13장 5절에 나옵니다. 그리고 이것을 일로 계산하면 ‘천이백육십 일’이 됩니다. 이 표현 또한 요한계시록 11장 3절에 나옵니다.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라고 할 때 이 ‘때’를 반드시 1년으로만 계산해야 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일로 계산하면 ‘사흘 반’(11:9) 혹은 ‘삼 일 반’(11:11)도 되는데, 이런 표현 역시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옵니다. 표현 자체는 다르지만 의미하는 것은 다 같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날들은 환난의 때를 의미합니다.
이런 이해를 가지고 오늘 본문을 보면 우선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여기 보면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그가 손에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입니다. 무저갱이라는 말은 한 번 떨어지면 헤어나지 못하는 영원한 구렁텅이를 의미합니다. 문자적으로 ‘바닥이 없다’, ‘깊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끝이 없이 깊은 구덩이, 다시 말해 음부 혹은 지옥을 의미합니다. 음부 혹은 지옥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오늘 본문에서는 천사가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천사는 누군가? 요한계시록 1장 18절에 보면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라고 말씀합니다. 살아 있지만 내가 전에 죽었다고 말씀하시는 분, 그가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는데, 지금은 살아 있지만 전에 죽으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천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천사, 피조물로서의 천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가지고 계신데,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2절과 3절입니다.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간단히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탄을 결박하고 계시다는 겁니다. 여러분, 요한계시록은 많은 부분 비유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귀, 사탄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런 존재를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근다고 할 때 그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가 마귀, 사탄보다 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 혹은 힘, 권위는 마귀, 사탄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마귀, 사탄을 잡아 천 년 동안 결박한다고 할 때, 그래서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한다고 할 때 그리스도의 손에서 만국을 빼앗는 것을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리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4절 후반부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라고 하면서 6절 후반부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는 말씀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그러나 유혹도 할 수 없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에베소서 2장의 표현에서처럼 마귀, 사탄은 지금도 공중 권세를 잡은 자로 있기 때문입니다.
홍창표 교수님의 ‘천년왕국’이라는 책에서는 이러한 사단의 결박을 상대적-절대적인 결박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 28장 20절의 말씀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는 말씀에 근거하자면 마귀, 사탄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결박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귀, 사탄은 지금도 역사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어떤 말씀도 하시는가? 마태복음 10장 28절입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여전히 박해가 있고, 그런 박해 속에서 유혹이 있다는 것은 지금도 마귀, 사탄은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대상을 그리스도로부터 빼앗을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어떤 경찰관이 한 강도를 잡아 결박했을 때 그의 몸은 절대적으로 꼼짝 못하게 잡아 결박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의 마음이나 정신은 상대적으로만 구속이 가능하지 그 이상 어찌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 3절 마지막 부분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는 말씀은 어떤 뜻인가? 잠깐 놓이기 때문에 그분의 권세로부터 벗어났다는 뜻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마귀, 사탄이 그리스도의 권세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그가 모든 것을 이루시고 난 뒤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은 이후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 구약에서도 마귀, 사탄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았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 욥기입니다. 거기 보면 사탄이 욥을 시험하려고 할 때 자기 마음대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해주는 범위 안에서 무엇을 하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즉 사탄은 언제나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지만 활동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이지만 하나님과 동일한 권세를 가진 자로서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만 대적할 수 있는 그런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귀, 사탄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는 존재입니다. 그들은 피조물일 뿐입니다. 한번도 창조주보다 높은 권세를 가진 적이 없는 존재입니다. 유다서에 의하면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났다고 말하지만,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대적한 것처럼 있지만, 결코 하나님과 맞설 수 있는 그런 대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유다서가 잘 증거하는 바가 같습니다.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유1:6) 상대적-절대적 결박이라고 할 때 이것은 절대적 결박에 대하여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3절 마지막 부분,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권세로부터 벗어나는 때가 있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믿는 무리들을 죽이는 일들을 행사함으로 사탄이 잠시 승리자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더더욱 미혹하는 일이 강하게 나타나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귀, 사탄의 권세 아래로 들어가는 일이 있는가?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빼앗을 수 있는가? 결코 없습니다.
그런데 다시 2절 상반부를 보시면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내용을 상기시킵니다. 보통 천 년에 대한 이해를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으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하면서 이때를 천 년의 시작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천 년은 주님의 재림으로 끝이 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마귀, 사탄의 역사는 언제부터 있었는가?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고 표현하면서 이미 창세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립니다. 그것도 맨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자가 누구냐? 옛 뱀 곧 마귀요 사탄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내용을 창세기 3장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절에서 뱀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유혹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이것은 창세기 2장 16절과 17절을 의식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여자는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게 됩니다. 2절과 3절입니다.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하셨지만 여자는 죽을 수도 있다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했던 겁니다. 이런 여자의 말에 대하여 뱀은 마치 자신의 말이 옳은 것인 양 이렇게 말합니다. 4절입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결국 뱀의 유혹에 넘어지게 됩니다. 여자가 먼저 넘어지고 이후 남자도 넘어집니다. 그 결과 죄가 세상 가운데 들어오게 됩니다.
마귀, 사탄의 유혹은 세상이 시작되고 인류의 첫 조상인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마귀와 사탄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인류의 첫 조상인 아담과 하와는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마귀, 사탄의 말을 따름으로 죄가 세상 가운데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빼앗을 수 있는가?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신 것이 창세기 3장 15절입니다. 소위 원복음에 대한 말씀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그러므로 천 년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일로만 볼 수 없고, 어거스틴이 일찍부터 말한 것처럼 창세 이래로 그리스도께서 다시금 이 땅에 오실 때까지의 모든 시대를 일컫습니다. 그 모든 시대 가운데 마귀, 사탄은 끊임없이 유혹을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넘어뜨리기 위해 유혹을 합니다. 그래서 천 년을 환난의 역사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에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빼앗을 수 있는가? 결코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귀, 사탄의 권세는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마귀, 사탄의 권세가 크더라도, 에베소서 표현에서처럼 공중 권세를 잡은 자로 표현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권세는 그리고 때가 차매 인생을 취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심으로 하나님으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권세는 마귀, 사탄의 권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천 년 동안 결박이 되는 것으로 묘사하는 겁니다.
물론 잠깐 놓이는 때가 있지만, 그런 만큼 더더욱 강하게 유혹하는 일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손에서, 그리스도의 손에서 그의 백성을 빼앗아 갈 수 있는가? 없습니다. 오히려 마귀, 사탄의 궤계와 술수가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조차 사용함으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내십니다. 마귀와 사탄을 도구로 해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교회를 유익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2장에서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광야로 보내시면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있게 하시는데, 그 목적이 무엇인가 할 때 양육을 위한 것이라고 했던 겁니다(계12:6). 환난 가운데 있게 하시지만 환난의 목적이 무엇인가? 양육이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4절을 보시면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1절에서 3절까지의 내용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인데, 보좌는 존귀의 장소요, 통치의 장소요, 심판의 장소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앉아 계실 자리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누가 앉아 있느냐?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들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얼핏 보면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 그리고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라고 하면서 그들이 ‘살아서’ 이렇게 말하기 때문에 순교자를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한다고 하면서 5절에서 이것이 첫째 부활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이란 죽음을 전제로 하는데,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예수를 증언함,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로 말하기 때문에 순교처럼 보이지만 첫째 부활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그런 죽음을 전제로 한 표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단 예수 그리스도가 앉아 있을 보좌에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앉아 있는데, 이 표현들은 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떠한 자들인가? 예수를 증언하는 자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이고 또한 그럴 수 있는 자들입니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들이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짐승의 표를 받지 아니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보좌에 앉을 수가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 보좌에 앉아 그리스도와 함께 심판하는 권세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고린도전서 6장 2절과 3절에서 동일하게 증거 합니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우리말 번역에서는 ‘판단’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심판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즉 성도가 세상을 심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서’라고 말하기 때문에 죽었다가 다시금 살아난 뒤에 세상을 심판하는 것이냐? 지금까지의 설명으로 하자면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지상에서 환난을 받으면서도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4절 말씀은 영혼과 육체의 분리라는 의미에서 죽었다가 다시금 살아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주어진 영광의 부요함이 무엇인지를 알리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주어진 영광의 부요함이란 그리스도의 보좌에 앉아 세상을 심판하는 권세까지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누군가?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그리스도의 진리를 증언하고 그리스도의 진리 때문에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입니다. 당연히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않는 자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자입니다. 마태복음 10장 28절의 말씀으로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는 자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할 때 우리는 세상의 어떤 것도 두려워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의 표현으로 하자면, 그리고 방금 언급한 마태복음 10장의 내용으로 하자면 죽음도, 사망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대상은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또한 모든 것에 대하여 심판하실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을 두려워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그의 나라와 의로 인해 염려하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먹고 마시는 것으로 염려하고 기도하는 일이 더 많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자들이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창조주이요,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6:25-26,30-32)
교회는 바로 이런 하나님의 보호하심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더한 권세를 가진 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교회는 어느 누구도 흔들고 훼파할 수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이상 어떤 것도 교회에게 장애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장애가 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될 뿐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은총을 입은 자로 있습니다. 이런 교회이기에 만물과 만사는 교회에게 다스림과 통치를 받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판단한다, 심판한다는 것은 세상의 일들로 인해 우리가 목 메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보좌에 앉아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왕 노릇한다는 것인데, ‘살아서’라는 말 때문에 영혼과 육체의 분리를 뜻하는 죽음이 전제된다고 보기 싶지만 천 년 동안 왕 노릇한다는 것은 지상의 생애에서의 일로 있기 때문에 이때 ‘살아서’라는 말은 영혼과 육체의 분리를 뜻하는 죽음을 전제로 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일단 이 내용에 앞서 ‘살아서’와 반대되는 자들에 대하여 괄호로 설명합니다. 5절을 보시면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하나님의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 다시 말해 유기자들은 살아난 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다 죽은 자들입니다. 천 년이 차기까지, 다시 말해 창세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유기자들은 결코 살아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살아난다는 것은 죽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데, 간단히 말하면 그들은 죽은 자로는 있지만 살아나지 못한 자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살아서’라는 말은 죽었다가 살아난 자, 그래서 첫째 부활을 경험한 자입니다. 이때 죽었다는 것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라는 의미에서 죽었다는 게 아니라, 에베소서 2장 1절의 말씀처럼 허물과 죄로 죽었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첫째 부활은 영적인 의미에서의 부활을 뜻합니다. 영적으로 죽었다가 영적으로 다시금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 부활은 중생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거듭남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렇게 첫째 부활을 경험한 자에 대하여 오늘 본문 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첫째 부활에 참여했기 때문에,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중생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이를 가리켜 복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 이런 측면에서 성경이 말하는 궁극적인 복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입니다. 또한 거룩하다고 말하는데, 중생이란 결국 거룩과도 연결됩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죄의 결과로 있지만, 중생은 그 죄 문제를 해결하고 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자로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측면에서 중생의 은혜를 입은 자를 성도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다고 말하는데, 첫째 부활이 죽음을 전제로 한다고 할 때 이 죽음을 첫째 사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 다시 말해 중생의 은혜를 입은 자들은 더 이상 사망의 권세 아래 있지 않게 됩니다. 본문은 이것을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요한계시록 20장 10절의 내용으로 합니다.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이 14절입니다.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그러니까 둘째 사망은 무엇인가? 영원한 지옥 형벌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것이 첫째 사망이라면, 그런 죽음에서 부활하지 못했을 때 결국 둘째 사망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 첫째 사망은 경험했지만 사망에서 부활하게 된 자, 다시 말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더 이상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을 복되다고 하는가? 이런 면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즉 중생의 은혜, 그리고 그 결과 더 이상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는 것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와 더불어’란 표현을 주목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지상 생애는 결코 그리스도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의 말씀에 빗대어 설명하자면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리스도와 함께,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있을 때만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이 땅에서 왕 노릇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불어 중생의 은혜를 입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된다고 말하며, 또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게 된다고 말하는데, 베드로전서 2장에 있는 말씀으로 하자면 왕 같은 제사장과 동일한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중생된 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그럼 왜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셨는가?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때문에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이 땅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 4절에서는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 겁니다.
다만 오늘 본문의 강조는 제사장보다는 왕 노릇한다는 데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그리스도께서 마귀, 사탄을 잡아 천 년 동안 결박했다고 해서 그들이 전혀 활동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여전히 활동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의 말씀처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결박하신 이상 중생자들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은 그들의 손에 넘겨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할 수 있는 겁니다.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만이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할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대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고 있습니까? 세상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것이 아니라, 마귀와 사탄에 의해 다스림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다스리는 자로 있습니까? 오늘 본문 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고 도리어 말씀 때문에 죽음을 택하는 자로 있습니까? 사실 우리는 중생의 은혜를 받은 자로 있지만 실상 우리의 모습은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고 있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항상 유혹에 걸려 넘어지는 자로 있습니다. 그래서 죄를 짓습니다. 죄의 종이 아닌데, 죄의 종인 것처럼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베드로는 조금 전에 읽어드린 말씀에 앞서 “근신하라 깨어라...”라는 말씀을 권면합니다(벧전5:8). 우리는 근신해야 합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사도 요한으로 하여금 요한계시록을 기록하게 하셨고, 특별히 반복해서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시는 형태로 우리에게 주셨던 겁니다.
그러나 여전히 근신하지 못하고 깨어있지 못한 것이 우리의 모습으로 있지만,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의 복은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다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중생자는 아무리 못해도 영원한 지옥 형벌에 떨어지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나서가 아니라 못 난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친히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은혜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해야 하는 겁니다. 그 은혜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다스림을 받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세상을 다스려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유행, 세상의 사고방식을 따라서만 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에 따라 세상을 판단하면서 세상 앞에 진리의 빛을 드러내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세상이 할 수 있는 최대치는 우리의 목숨을 빼앗는 것 외에는 할 수 없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것조차 하나님의 뜻이 있지 않고는 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있어 우리의 목숨을 빼앗아 간다 할지라도 그들이 우리의 영혼을 영원한 지옥 형벌에 넣을 수 있는가? 어떤 경우에도 그런 일은 없습니다. 여기에 궁극적인 위로가 있습니다. 그럼 누가 영원한 지옥 형벌을 내리시는가? 창조주요 결국 모든 것을 심판하실 하나님이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그리스도의 몸 된 성도가 자리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대상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 외에 그 무엇도 두려워할 것이 없는 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앞에서는 얼마든지 담대할 수 있습니다. 비록 천 년이라고 표현된 내용 안에 환난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지만(시90:10), 그리스도께서 이미 승리한 것처럼 우리 역시 그 안에서 승리한 자로 있다는 것을 아시고, 모든 환난에 대하여 담대히 이겨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복이요, 이것이 우리의 부요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