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누가복음 17장 11-19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참 믿음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11) 일어난 사건입니다. 한 마을로 들어가셨을 때 거기서 누굴 만나게 되느냐 하면 열 명의 나병환자를 만나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이라면 이전 번역인 문둥병자가 더 익숙한 표현일텐데, 그들이 마을로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12절과 13절을 보시면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통 나병, 혹은 문둥병을 한센병이라고도 합니다. 설교를 약간 돕는다는 의미에서 성경 신학 입장으로 있는 저희 교단 교수님이셨던 김성수 목사님의 설교집을 보면, 이 나병을 천형(天刑)이라 하여 하늘이 벌을 내린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보편적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겪는 질병 중 치료가 어려운 고질병이요, 처참하고 끔찍한 질병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이 병이 무서운 것 중 하나는 이 병에 걸리게 되면 감각을 느끼지 못하게 됨으로 자기 몸이 썩어 가는데도 그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얼굴이 일그러지고, 썩어 문드리지며, 수족이 떨어져 나가는 그런 흉측한 몰골이 되는데도, 어떤 조치도 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심지어 옛날에는 오늘날처럼 과학과 의술이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나병환자들이 그 흉측함과 전염성 때문에 어느 사회나 할 것 없이 격리되어 사람과의 접촉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적한 곳, 사람이 살지 않는 곳, 외진 곳에 버려졌던 대상이 바로 이들이었습니다. 당연히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소외당하여 살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던 것이 바로 나병환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나병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순히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질병에만 머무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레위기 13장과 14장에 보면 나병에 대한 판별과 정결의식에서 이 병은 곧 사람을 부정하게 하는 것,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더러운 자로 만드는 가장 대표적이고, 심각한 원인으로 취급하였습니다. 그래서 레위기 13장 45절과 46절에 보면 나병에 걸렸을 때 어떻게 하라고 명하고 있는가 하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부정하고 더럽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의 거룩한 백성으로부터 끊어진 자라는 깊은 절망 가운데 살아가야 했던 자가 바로 나병환자였던 것입니다. 특히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은 선민사상이 대단했던 민족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민족이요, 그 스스로 구별된 백성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자들 속에서 끊어져 나간다는 것은 그만큼 비참한 상태가 되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기에 나병에 걸리게 되면 매우 심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에 있는 한 마을에 몇 명이 있었느냐 하면 열 명이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들이 거주했던 마을에 누가 지나가시게 되었느냐? 바로 예수님이 지나가시게 되었던 겁니다. 아마 이들은 예수님에 대해 알았던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나중에 다시금 말씀드리겠지만,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고 소리치게 되었습니다. 일반인과 가까이 할 수 없는 형편이었고, 또 마을에서도 분명 떨어져 살아야 했기 때문에 멀리서 소리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이들이 예수님에 대해 불렀던 호칭이나 그들의 자세를 보면 이들 모두가 약간의 신앙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생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가르침을 베푸는 자에 대한 칭호이긴 하지만, 여기서는 단순히 가르침 이상의 뭔가를 베풀어 주십사 요청하기 위해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선생으로 부르면서 불쌍히 여겨 달라는 것은 예수님이 그들의 병을 낫게 하실 수 있는 분으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통해서도 그들에게 신앙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14절을 보시면 상반부에 이렇게 명하십니다.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러자 저들은 한결같이 모두 제사장에게로 쫓아갔습니다. 달리 말하면 저들은 모세의 율법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레위기에 보면 나병과 관련해 제사장에게 가는 두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것이 나병인지 아닌지 확인하도록 하기 위해 나아갔습니다(레13장). 다른 하나는 나병에 걸렸다가 나았을 때 나았는지의 여부를 확인하고자 할 때 제사장에게 나아갔습니다(레14장). 그러니까 정상적으로 생활하다가 피부에 뭔가 이상이 있다고 생각하여 혹 나병인가, 아닌가 그 진단을 받고자 할 때 제사장에게로 나아가야 했던 것이고, 또 나병에 걸린 자가 다시 회복하여 정결한지, 아닌지를 확인받고자 할 때 제사장에게 나아가야 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지금 나병에 걸리 자로 하여금 제사장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 한 것은 병이 나을 것을 어느 정도 믿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이들 대부분은 유대인으로서 최소한 신앙의 외형은 갖춘 자들이었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후 말씀에 있습니다. 14절 하반부를 보시면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는 말씀이 있고, 그 중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하였습니다. 15절과 16절을 보시면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이게 무슨 문제냐? 방금도 말씀드렸지만 열 명 중 정확하게 몇 명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 유대인이었을 가능성이 많다고 주석합니다. 한명 외에는 유대인이었을 것이다. 혹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다 율법에 매어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다 같이 제사장에게로 쫓아갔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하고 오늘 본문은 구원이 누구에게만 있다고 하느냐? 다시금 돌아온 이 한 사람, 그것도 사마리아 사람인 이 한 사람에게만 있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문제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17절에서 19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물론 이 때 주의해야 할 것은 이 구원을 단순히 나병에서 깨끗해졌다는 의미로만 이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아홉은 구원 받은 자가 아니라는 게 드러나는 것이고, 오직 한 명만이 구원을 받았다는 걸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은 어떤 의미에서 아홉과 한 명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보편적인 의미로 보자면 아홉 명의 유대인과 한 명의 사마리아인, 바로 이 두 부류를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열 명 모두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외쳤지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들은 자는 열 명 모두가 아니라, 오직 한 명 뿐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일단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얼핏 보면 열 명의 나병환자가 다 고침을 받았지만, 한 명만 예수님 앞에 나아와 감사하고 영광을 돌렸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은 것처럼 오해할 수가 있습니다. 나병환자들이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부르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여 제사장에게로 가다가 병이 나았습니다. 그리고 그 중 한 명에 예수님께로 와서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렸습니다. 열 명 중 한 명만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 한 명에 대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뭐냐 하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마치 성경을 쭉 읽어내려 가다보면 구원의 원인이 예수님께 대한 감사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여기 보면 사마리아 사람이 돌아와 감사하고 난 뒤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하면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하면서 믿음과 구원에 대해 말하기 때문에 더욱 구원의 원인이 감사인 것처럼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의 구원이 어떤 행위에 대한, 다시 말해 그가 감사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것은 전 성경으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감사가 은혜를 받은 원인이 아니라, 은혜를 받은 자가 그 결과로 감사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특히 구원과 관련해서는 인간이 어떤 원인과 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언제나 선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물론 우리가 구원을 말할 때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래서 전도할 때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 받습니다” 이렇게 전합니다. 믿음을 강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구원과 관련해 믿음만 말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 믿음을 말할지라도 어떤 의미에서의 믿음을 말하느냐? 에베소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데, 이 믿음이 우리 속에서부터 난 것이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누가 주시는 것이냐?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 말씀합니다. 그럼 이 믿음을 누구에게 주시는가? 아무에게나 주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1장에서 분명히 밝혀 놓기를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예정하신 자들,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선택하신 자들, 바로 그들에게만 이 선물을 주신다고 알리십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그때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걸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방금 에베소서 2장 8절을 읽어드렸지만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데, 앞에 어떤 말이 있느냐 하면 ‘너희가 그 은혜에 의하여’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에 있어 궁극적인 원인은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그렇게 은혜를 베풀기로 정하신 하나님의 뜻에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구원을 말한다고 할 때 그 구원이 마치 감사한 행위에 있다고 보는 것은 결코 바른 이해가 아닙니다. 감사는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결과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감사를 한다고 하는 것은 감사할 수 있는 원인이 있는 것이고, 그 원인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까지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특별히 지난주에 앞선 본문을 살폈지만, “하나님의 은혜 앞에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무엇인가?” 했을 때, 마치 종과 같은 자세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누가복음 17장 9절과 10절처럼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는 것은 이미 그것 자체로 은혜입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혜인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순종을 요구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종의 입장에서 마땅한 바인 겁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가지고 순종한 것으로 내 공로를 삼고, 순종한 것으로 자랑꺼리로 삼는다면 그것은 은혜를 받은 자의 올바른 자세가 아니라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 중 한 명만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감사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에게 예수님께서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때 그의 구원은 전 성경의 이해로 하자면 엄밀하게 그 자신을 원인으로 삼지 않는 걸 아셔야 합니다. 다시 말해 그의 구원은 감사로 말미암아 비로소 구원을 받았다는 게 아니라, 구원 받은 자로서의 합당한 자세를 칭찬하고 계신 것으로 봐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의 구원의 선포는 이때서야 비로소 구원을 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구원 받은 자로서 구원의 합당한 열매에 대해 칭찬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다른 자들은 유대인으로서 구원 받은 자인지에 대한 합당한 열매를 찾아볼 수가 없다면, 지금 돌아온 한 사람, 그것도 사마리아인이라고 하는 이 사람은 구원의 표를 가지고 있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18) 말씀하셨던 겁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 이런 사고가 있는 걸 보게 됩니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져야 한다.”, “입술에 감사를 달고 살아야 한다.” 물론 입술에 감사를 달고 사는 것, 그리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으며, 그런 섭리는 결국 모든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반드시 선한 목적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감사하는 것, 그리고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 때문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물론 제가 긍정적인 마인드라고 할 때 조엘 오스틴처럼 하나님도 없는 긍정,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사고방식 자체가 내가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그런 긍정은 아닙니다. 이런 부분에 있어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다만 이렇게 하나님 때문에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또한 감사를 한다고 할 때 한국교회 안에 은근히 들어온 사고가 뭐냐 하면 “긍정적인 사고방식, 그리고 우리 입술에 감사를 달고 살면 그것이 원인이 되어 하나님께서 긍정적으로 사고하는 만큼, 그리고 우리가 감사하는 만큼 복을 허락하실 것이다”고 생각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로서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져야 한다, 입술의 감사의 열매가 넘쳐야 한다고 말하는 걸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열매로서 우리의 됨됨이를 확인하는 자이지, 열매로서 상급을 요구하고 보상을 요구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열매로서 내가 참된 신자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을지언정, 열매로 상을 달라고 말할 수 있는 자는 아닌 겁니다. 우리의 합당한 자세는 오늘 본문 앞에 있는 종의 자세여야 합니다.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 그리고 그런 자세로 하나님 앞에서 충성하게 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겁니다. 우리는 이런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좀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시 19절에 보시면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여기 보면 ‘믿음’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하자면 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주신 믿음보다 앞서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이고, 왜 선택하셨느냐 할 때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만이 궁극적인 원인입니다. 그러나 근원적인 의미에서 접근하기보다는 가까운 원인에서도 좀 생각해 볼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외적으로 볼 때 그들 모두가 신앙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다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불렀고(13), 그렇게 불렀을 때 그들을 불쌍히 여겨주시길 바랬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나병이 낫기를 바란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제사장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을 때도(14) 그들은 순종하는 자로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는 율법의 규례를 알고 있었고,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조차 깨달았다고 말할 수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만약 병이 낫지도 않는다고 생각했다면 그들은 제사장에게로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사장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라고 하셨다면 그들은 분명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줄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열 명 중 한 명만 돌아와 감사했다고 할 때, 그리고 그것으로 인하여 한 명만 구원받은 자로서의 표를 드러내 보였다고 할 때, 외적으로는 신앙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돌아와 감사한 이 사람의 믿음은 분명 아홉과는 다른 믿음을 가진 자임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믿음’이라는 것에 초점을 두고 과연 아홉 명이 가진 믿음과 이 한 명이 가진 믿음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는 것을 좀 생각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아홉 명의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달리 표현하자면 믿음은 믿음의 대상과 관계되고, 그 대상을 아는 지식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과연 아홉 명은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있었나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들도 마찬가지이지만 누가복음 안에서 이것을 좀 살펴보면, 누가복음 4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고 난 뒤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실 때의 내용입니다. 14절과 15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돌아가셨을 때 그에 대한 소문이 퍼졌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다른 복음서들과 연결해 보면 그의 가르침이 당시 그들을 가르쳤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달랐고, 또한 예수님은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 소문이 빨리 퍼졌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문의 대부분은 가르침보다는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등의 현실 문제 해결과 관련이 있었다는 걸 짐작 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요한복음 6장입니다. 거기 보면 오병이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최소 오천 명 이상을 먹이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이적을 보고 임금을 삼으려 쫓아다녔다고 알리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으로 있었고, 속국으로 있는 만큼 힘든 현실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권세 있는 가르침을 가르치실 뿐 아니라, 놀라운 이적을 많이 행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 가운데 어떤 생각이 있었느냐 하면 예수님이 이 땅의 임금이 된다면 모든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을 것이라 봤던 겁니다. 정치적인 문제도 해결하고, 물질적인 문제도 해결하고, 심지어 육신의 모든 고통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본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대한 소문은 많은 병자들, 그리고 많은 약한 자들에게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누가복음 7장 17절에 보시면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는 말씀도 있는데, 이 말씀이 어떤 사건 이후에 기록되고 있느냐 하면 나인이라는 성에서 죽은 자를 살리고 난 뒤의 말씀입니다. 죽은 자도 살리시는 놀라운 능력을 보이신 이후 그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졌던 겁니다. 병도 고치고, 죽은 자까지 살리는 놀라운 분, 그분이 누구냐? 바로 예수 그리스도란 소문이 퍼졌던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과 동등하신 하나님으로 알기보다는 선지자 중 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방금 누가복음 7장 17절을 봤는데, 바로 앞에 있는 16절을 보시면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물론 여기 ‘큰 선지자’는 모세 시대 때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일으키실 그 선지자를 말합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도 그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 할 때 동일한 말을 했습니다.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요6:14) 바로 모세 시대 때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일으키신다고 하신 그 선지자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그들은 어떤 자세로 예수님을 대했는가? 방금도 말씀드렸지만 세상의 임금을 삼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이 널리 퍼졌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과 동등하신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 선지자, 어떤 면에서 모세와 같이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듯 그렇게 이끌어 줄 수 있는 그런 분으로서만 알았던 것이 무리들의 모습이었던 겁니다. 당연히 누가복음 7장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7장 19절을 오시면 어떤 내용으로 연결이 되느냐 하면 옥에 잡혀 있는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어 이렇게 묻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쉽게 말하면 “예수님, 당신은 우리가 기다리고 있던 그 메시야가 맞습니까?” 이렇게 묻게 되었던 겁니다. 세례 요한의 경우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난 자요, 이 세례 요한을 통해 주의 길을 예비케 하셨는데, 그런 세례 요한이 뭐라고 묻느냐 하면 “예수님, 당신은 우리가 기다리고 있던 그 메시야가 맞습니까?” 이렇게 물었던 겁니다. 세례 요한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가? 옥에 갖힌 세례 요한의 귀에 들리는 소문은 다 뭐냐 하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보다는 어떤 면에서 맹인을 고치고, 못 걷는 사람을 걷게 하고, 나병환자를 깨끗케 하는 일만이 그의 귀에 들렸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영적인 일보다는 육적인 일만을 하는 것처럼 소문이 들렸기 때문에 지금 그 예수님에 대해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 맞는가?” 이런 의구심을 갖게 되었던 겁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누가복음 9장으로 가시면 예수님께서 노골적으로 제자들에게 묻게 됩니다.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8) 그때 제자들이 말합니다. 19절을 보시면 “대답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살아났다 하나이다” 그러니까 이 말 속에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성육신하신 하나님 자신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걸 알리는 것과 같습니다. 반면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20) 이 때 베드로의 유명한 고백이 있게 됩니다. 베드로가 고백했지만 베드로를 대표로 한 제자들의 고백인데, 바로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20) 마태복음에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이 고백에 대해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누가복음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마태복음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
결국 오늘 본문에서 이 아홉이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했을 때 지금까지 살핀 무리들의 인식과 다르지 않은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 아홉은 단순히 영적인 문제에 인식이 있었다기보다는 철저히 육신의 문제만으로 은혜를 입길 원했다는 걸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을 선생님, 그것도 가르치는 것 이상의 의미에서 선생님으로 부르고 있지만, 또한 율법의 규례도 알아 제사장에게 보여 나았음에 대한 판결을 받아야 한다는 것도 알았지만, 지금 그들에게 임한 나병의 원인이 단지 육신적인 것 이상의 영적인 문제임을 절감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분명 나병이 죄의 대가로 하나님께서 내리신 형벌이라고 기록하고 있음에도, 이 유대인 아홉은 전혀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반면 사마리아인 한 사람은 가다가 나음을 입은 것을 알았습니다. 제사장에게 보였는지, 보이지 않았는지는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칼빈의 경우 제사장의 판결을 받고 다시금 돌아왔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의 판결이 없이는 아무렇게나 돌아다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나음을 입었을 때 이 한 사람은 자신의 나음이 단지 육체의 나음 이상의 것임을 깨달았다고 볼 수 있다는 겁니다. 나음을 입은 것은 육신이지만, 단순히 육신의 문제 이상의 문제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볼 수 있었던 겁니다. 베드로를 대표로 제자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처럼, 이 사마리아 한 사람에게도 그런 은혜가 있었던 것입니다. 나병이 영적인 문제와 관계 되어 있다는 걸 알았던 것이고,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신 예수님은 영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참 하나님으로 알았던 겁니다.
여러분,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단순히 어떤 육체적인 부분만 치료하시는 분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아셔야 합니다. 영적인 부분, 즉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홉의 믿음과 이 한 명의 믿음은 전혀 다른 믿음이었던 겁니다. 외형으로 보자면 분명 믿음의 내용이 있는 듯 보일 수 있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나 저들이 고백은 예수님을 참 하나님으로, 예수님을 메시야로, 예수님을 죄와 비참함에서 건지시는 유일한 구주로 알고 고백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우리에게 귀한 경각심을 일으킨다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외형으로 보면 믿음 생활을 하고 있고, 또 어느 정도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아홉 명의 나병환자들처럼 예수님을 단순히 가르치는 분 이상으로 여겨 선생님이라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율법의 규례를 알고 있듯이 우리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철저히 육신의 해결만을 생각했던 자들이었습니다. 지금 현재 당하고 있는 것이 육신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 육신만 해결되면 다 되는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혹 여러분이 예수 믿는 것도 여기에만 머물러 있다면 참으로 두려운 일이라는 걸 반드시 아셔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육신의 복을 말하게 됨으로 영적인 복이 무엇인지를 자꾸만 놓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 요한삼서 1장 2절에 있는 말씀,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는 말을 오해해 예수 믿으면 3박자 복을 얻는다고 알리는 일이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으면 무엇이 잘 되는가? 첫째는 영혼이 잘 되고, 둘째는 범사가 잘 되고, 셋째는 육신의 건강을 복으로 받는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의미를 알리기 위해 사용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이 세 가지가 예수 믿는 자의 복이라고 한다면 대부분은 예수를 잘 믿지 못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구약만 보더라도 외적인 복을 얼마나 많이 말합니까? 가장 대표적인 예가 신명기 28장입니다. 1절부터 보시면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28:1-6) 여러분, 읽으시면서 이런 복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런 복을 말씀하는 이유는 여기에 초점을 두라고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복에 초점을 두고 있는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그럼 어디에 초점이 있느냐? 1절입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요한삼서 1장 2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말투를 보면 영혼이 잘 되었기 때문에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네 영혼이 먼저 잘 되어야 한다는 게 더 초점으로 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삼서 1장 3절과 4절에서는 무엇을 말하느냐?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이렇게 알리는 겁니다. 그런데 한국교회 중 일부가 영적인 복과 육적인 복을 함께 누리는 방식으로 성경을 대하고 있고, 그러다보니 보이는 육적인 복이 마치 영적인 복을 받은 것인 양 착각까지 하게 되는 현상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병든 자, 약한 자를 고치시긴 했지만 그것이 본질은 아니습니다. 오히려 세례 요한이 물을 때 답변하신 것은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눅7:22, cf.사61:1)는 것이었습니다. 맹인이 보고, 못 걷는 사람이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는다면 육적인 일이 아닙니까? 그리고 이것 때문에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답변이 애매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셨을 뿐이었습니다. 즉 비록 육신의 사역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이사야의 말씀을 성취하고 있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육신의 치료는 단지 육신의 치료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 다시 말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단절된 것을 회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으로 알리고자 하셨던 겁니다.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다가 아니라, 이것은 곧 내가 구약에서부터 예언하던 메시야라는 걸 알리는 도구였을 뿐이라는 겁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도 보시면 이런 의미를 드러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1) 누구를 구원하느냐? 이미 영원 전부터 정하신 자기 백성들입니다. 그럼 어디서 구원하느냐? 저희 죄에서의 구원입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가난에서 구원하고, 병들었기 때문에 병에서 구원하고, 이 세상에서 없는 자로 있기 때문에 없는 것에서부터 구원하여 뭔가를 채우는 그런 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던 겁니다.
혹 여러분이 예수 믿는다고 할 때 단지 육적인 부분에서만 생각을 한다면 잘못 믿고 계시다는 걸 확인하셔야 합니다. 오히려 예수를 믿는다고 한다면 여러분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가 하는 것을 발견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죄에서 구원할 자는 이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음을 믿음의 내용으로 가지고 계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홉 명의 믿음은 바로 이런 외형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왜 나병이 걸렸는지, 이 병이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영적인 죽음의 상징이라는 걸 저들은 전혀 몰랐던 겁니다. 아니 지식적으로는 알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에게만 가서 보이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인 한 사람은 그의 병이 단지 육신의 병으로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오늘날 모든 병이 이런 차원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런 면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죄가 이 땅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우리가 병에 걸릴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병을 진단하게 되면 소위 귀신론이라고 말하는 이단과 같은 사상으로 있게 될 것입니다. “모든 병의 원인은 귀신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병을 그렇게만 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성경 안에서의 이 나병은 단지 육신의 병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를 가진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마리아인은 육신의 병이 나음으로 자신의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실 분도 바로 예수님인 걸 알고 돌아왔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감사를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바로 이런 내용이 펼쳐져야 할 장소요, 이것 외에 다른 것을 주목하는 것은 다 이 아홉과 다를 바 없는 길을 가고 있다는 걸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빌3:8)는 빌립보서의 고백은 이런 차원에서 사실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바로 이러한 방향이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세상의 것으로 벗을 삼기보다 영적인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알리고자 하신 뜻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뜻 안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길 원하시는지 확인하셔서 더욱 믿음의 견고한 인생이 되시길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단지 세상의 것이 채워지고, 세상의 것이 해결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영적인 복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며, 그 복과 은혜 안에서 무한히 감사하며 사는 인생, 그것이 바로 성도가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내용인 것입니다. 부디 이런 자로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길을 걸어가시고, 그 인생 길 가운데 오로지 하나님께만 영광을 올려드리는 믿음으로서 여러분의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