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빌립보서 4장 14-18절
향기로운 제물
지난 시간 우리는 바울이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에 대하여 기뻐한다는 것에 대해 잠시 살폈습니다. 왜 바울이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을 기뻐했는가? 바울 자신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바울의 쓸 것을 보내줌으로 기뻐한다고 말했습니다. 얼핏 보면 물질과 쓸 물건을 보내줬기 때문에 기뻐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의미의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 스스로 내가 궁핍해서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바울은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말하면서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대한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궁핍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내게 능력을 베풀어 주신다면 그것조차 인내하며, 견딜 수 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은 그런 바울일지라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기회가 되지 않아 잠시 멈춘 듯 보인 때는 있었지만 여전히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은 바울의 복음 사역에 동참하는 자로 있었습니다. 그걸 오늘 본문에서는 뭐라고 표현하느냐? 14절을 보시면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특히 여기 보면 ‘내 괴로움’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복음으로 말미암은 고난입니다.
앞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복음으로 말미암은 고난이나 괴로움이 없는가? 그렇지 않다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면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문맥을 통해 보자면 궁핍 속에서도 인내하며, 견딜 수 있기 때문에 아무런 괴로움을 느끼지 못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우리가 욥에 대해서도 살폈지만 자녀를 다 잃고, 또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날렸을 때 평소 훈련이 잘 되어 있다고 해서 괴로움이 없는 건 아니었습니다.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었습니다. 괴로움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괴로움 속에서도 하나님께 경배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괴로움은 있지만 견딜 수 있다는 것입니다. 괴로움은 있지만 인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일하다가 맞게 되면 괴롭고 아프지만, 복음을 위하여 일하다가 궁핍해지면 굶기도 하고 그것을 통해 힘든 것도 있지만, 그러나 견디며 인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붙드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은 그런 바울을 보고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울의 괴로움에 함께 참여했습니다.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한 것이고, 복음의 고난에도 동참한 것입니다. 물론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은 물질로 바울을 도왔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마치 무엇과 같은가? 복음을 위한 고난에 함께 참여하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에 대해 바울은 잘 했다고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바울은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이 얼마나 자신을 위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복음을 위했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15절과 16절을 보시면,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복음의 시초부터 바울을 도왔던 곳이 어디냐? 빌립보 지역의 교회와 성도들이었습니다. 특히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바울을 도왔던 교회는 빌립보 교회밖에 없었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그만큼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은 물질로서 후원하는 데 특별한 열심이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쓸 것을 보냈을 정도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9절에 보면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비용이 부족하였으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였음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고 또 조심하리라” 여기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빌립보 지역의 교회와 성도들입니다. 그러니까 고린도 지역에서 사역할 때 비용적으로 부족한 것이 있었지만, 고린도 교회에서 그 부족함을 채운 것이 아니라 빌립보 지역의 교회와 성도들을 통해 그 부족함을 채웠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15절에서도 언급되고 있지만 목회자와 교회와의 관계 속에서 주고 받는 일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칼빈의 말을 빌리자면 이 둘이 서로 평행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한편 교회들은 바울이 생활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공급할 책임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고린도전서 9장으로 가시면 이렇게 설명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11일입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7절에서는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복음을 전하는 자는 그들이 생활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마땅히 공급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8절에 의하면 사람의 예가 아니라 율법도 그것을 말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바울은 12절 중반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영적인 것을 공급했을 때 물질적인 것으로 채움 받는 것이 마땅한 권리로 있지만, 바울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보면 목회자들은 영적인 일에 더욱 집중하기 위해 세상의 일을 갖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인 것을 공급하는 자들에 대해 교회는 물질적인 것으로 채워주는 것이 마땅한 일로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될 것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도록 하기 위해 마땅한 권리도 포기한 것처럼 반드시 절제되어야 할 부분도 있다는 걸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좀 더 살펴봐야 할 부분 있고, 어디까지를 말해야 되는지에 대해 좀 조심스러운 면이 있어 많은 말씀은 드리지 않겠지만, 오늘날 교회 내 문제 가운데 한 가지가 물질이라고 한다면 이런 물질 때문에 어려움이 되지 않도록 목회자나 교회나 매우 조심할 필요는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목회자가 물질에 너무 연연한다든가 하는 것은 그렇게 좋은 모습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교회 형편과 상관없이 생활에 대한 비용을 많이 요구하는 것도 주의해야 하고, 나아가 교회가 크다는 이유로 터무니없이 많이 받는 것도 결코 좋은 모습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으로 교회가 터무니없이 생활비도 안 되게 주는 것도 주의해야 합니다. 소위 담임 목회자에게는 넉넉하게, 반면 부교역자에게는 모자라다는 인식이 되도록 주는 경우들도 허다한데, 이런 부분에 있어서도 우리는 좀 더 많은 생각을 해야 할 것입니다.
어쨌든 빌립보 교회는 다른 교회들과는 달리 바울의 쓸 것을 꾸준히, 그리고 넉넉히 보내었고, 그것을 통해 복음 사역에 동참하는 자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것에 대해 잘하였다고 칭찬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기억해야 될 사실은 뭐냐? 물질로 도움을 얻고 있고, 또한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 역시 물질로 돕는 자로 있지만 바울의 관심은 물질 자체에 있지 않았습니다. 지난주에도 살폈지만 오늘 본문 17절도 보시면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그러니까 바울의 모든 관심은 어디 있었느냐? 선물이 아니었습니다. 선물로 인해 넉넉하게 되는 바울 자신에게 있지도 않았습니다. 지난주 말씀에서도 바울은 물질이 있든, 없든 상관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붙들고 있었고, 또한 그런 능력으로 말미암아 많은 훈련을 이어왔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바울은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의 유익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 일을 통해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이 풍성한 열매가 맺기를 원하는 데 있었습니다. 단순히 물질로 심었기 때문에 물질로 거둔다는 식의 어떤 열매가 아니라, 영적인 열매가 풍성하기를 구했던 것입니다. 심은 것은 물질이지만 그것을 통해 영적인 열매가 더욱 확인이 되길 원했던 것입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누가복음 16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심는 것은 물질인데, 그것을 통해 영적인 열매가 더욱 확인되길 원한다고 할 때, 그 의미는 무엇인가? 여기 보면 한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는 어떤 사람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리가 주인에 귀에 들리게 되었습니다. 주인의 소유를 낭비하는데 좋아할 주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더 이상 청지기의 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 청지기가 어떤 생각을 하느냐?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눅16:3-4) 그러면서 한 일이 주인에게 빚진 자를 불러 그 빚을 자기 마음대로 탕감해 주었습니다.
여러분, 내 옆에 내 것을 가지고 이렇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미칩니다. 결코 좋은 마음을 품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를 왜 하시느냐? 일단 누가복음 16장 8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이 청지기에 대해 분명 옳지 않은 청지지가로 말합니다. 행동 자체는 분명 옳지 않은 행동인 것입니다. 그러나 칭찬할만한 것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뭐냐? 일에 있어서는 지혜롭게 대처했다는 것입니다. 즉 이 세대의 아들들, 그러니까 믿지 않는 자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 이 빛의 아들들은 성도를 의미하는데, 그런 성도보다 더 지혜롭게 대처했다는 것입니다. 행동 자체는 옳지 않지만 자신의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 일에 있어서는 지혜롭더란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9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여러분, 불의의 재물은 무엇입니까? 재물을 불의함으로 모았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조를 이루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셔야 합니다. 8절에서는 무엇이 대조를 이루는가? 이 세대의 아들들과 빛의 아들들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자와 믿는 자가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대의 아들들은 적어도 이 땅에서 어떻게 대처하며 사는가? 자신의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 일이 있더란 것입니다. 그럼 빛의 아들들은 무엇을 준비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영원을 준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9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영주할 처소, 영원한 처소를 준비해야 합니다. 단지 이 땅에서 살 것만 준비하는 게 아니라, 영원을 준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준비를 하는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책망이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9절인 겁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이렇게 볼 때 불의의 재물과 대조를 이루는 것이 뭐냐? 영주할 처소, 영원한 처소와 대조를 이루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불의의 재물은 영원한 것과 대조를 이루는 이 땅의 재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 땅의 재물을 가지고 무엇을 준비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가? 영원을 준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오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10절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그리고 13절에서는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여러분,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한다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이 땅에서의 삶의 자세를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살아갈 때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충성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충성한다는 것이 재물이 주인이 되도록 살아간다는 말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도에게 있어 유일한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주인은 하나님이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한다는 말은 하나님께 충성하되,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께서 충성하면서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삶이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가? 이 땅의 재물을 가지고 영원을 준비하면서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물질을 많이 바치면 구원도 보장하고, 영원한 삶도 보장한다”는 식으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이 땅을 위해서만 살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영원을 준비하는 자로서 너희가 영원한 처소에 들어갔을 때 너희의 것으로 유익을 얻은 사람들이 너희를 영접할 수 있도록 그렇게 사용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복음을 위한 일에 자신의 물질이 사용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질을 주신다고 할 때 분명 나를 위해 쓰도록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게 될 때 그것은 마치 무엇과 같은가? 세상적인 것으로만 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하기만 하면 다 되는가? 그렇지도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하는 것, 윤리적으로 보자면 참 괜찮은 일입니다. 세상은 선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고서는 아무런 선이 될 수 없다는 걸 기억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선행 안에는 항상 점과 흠이 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어떤 선도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물질 가운데 복음을 위하여 드리는 일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드릴 때 그것 자체가 너희 자신에게 유익이 되고, 너희 자신에게 풍성한 열매와도 같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헌금을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목사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란 걸 아셔야 합니다. 매주일 나올 때 헌금을 하는 것, 목사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목회자의 생활적인 면을 돌아보는 것도 분명 있습니다. 우리가 고린도전서 9장의 내용을 봤던 것처럼 영적인 부분을 채워주는 자들에게 생활할 수 있도록 물질로 채워주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까지 무엇을 위해서냐? 복음을 위한 일인 줄 아셔야 합니다. 누가복음 16장으로 하자면 이 땅의 재물로 영원을 준비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땅의 재물로 영원한 삶을 보장받는다는 게 아니라, 영원한 삶을 보장받은 자들로서 그러한 삶의 열매를 이 땅에서부터 맺는 것입니다. 물질로 복음의 유익을 위한 것, 물질로 어려운 교회를 돕는 것, 물질로 어려운 성도를 돕는 것, 물질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율법의 명령을 실천하는 것 등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5장에는 어떤 말씀까지 하시느냐? 마지막 심판 때 하나님께서 택자와 유기자를 나누셔서 한쪽은 오른편에, 다른 한쪽은 왼편에 세우시는데, 세우실 때 무엇을 근거로 세우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느냐? 35절과 36절입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것이 의인들에 대한 말씀이라면, 악인들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2절과 43절입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러니까 심판주로 오신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뭐냐 하면 의인들에게 대해서는 내가 주릴 때, 내가 목마를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마시게 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악인들에 대해서는 그 반대입니다. 악인들에 대해서는 더 보지 않겠지만, 이런 말씀에 대해 의인들이 뭐라고 묻게 되는 일이 있느냐? 37절과 38절입니다.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이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뭐냐? 39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주님께 직접 행한 일은 아니지만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앞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이 말씀 역시 이런 선행을 했기 때문에 구원을 말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성경 전체가 모순을 일으키게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들의 합당한 열매, 마땅히 맺어야 할 열매는 무엇인가를 더욱 드러내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이 사람이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걸 인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즉 그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자들에게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 된 자들을 영접하고, 헐벗은 자들에게 옷을 입히는 등의 선행을 한 것입니다. 물론 이 때 선행은 세상이 말하는 선행이 아닙니다. 이 일을 하되 주께 하듯 하는 마음을 한 선행입니다. 복음 때문에 한 선행이고, 율법을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한 결과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이 일을 누구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느냐? 내게 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을 주님은 영원한 삶을 살도록 오른편에 세우십니다. 34절에 근거하면 이미 복을 받은 자들이고,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이지만, 이런 선행으로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임을 확인하듯 인 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은 바로 그 일을 한 것입니다. 단순히 물질로서만 도운 것이 아닙니다. 물질을 드릴 때 어떤 자세로 드렸는가? 주께 드리듯 드렸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드렸습니다. 율법의 실천을 따라 드린 것입니다. 그런 삶이 무엇과도 같은가? 너희에게 유익이 되고, 풍성한 열매가 확인되는 자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불어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말씀이 있는데, 사도행전 20장 3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여기 보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일반적으로 보자면 물질을 주면 주는 쪽에 유익이 있는 게 아니라, 받는 쪽에 유익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는 물질을 주는 쪽보다는 물질을 받는 쪽이 복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물질을 받는 쪽에 복된 것이 아니라, 물질을 주는 쪽이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달리 말하면 물질을 심으니까 물질로 보상을 받아야지만 복이 아니라, 물질로 베풀 수 있는 것 자체가 복이라 말하고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소위 오늘날 물질로 얼마는 투자하면 투자한 것보다 더 많이 받는다는 논리를 가진 교회들도 있지만, 이미 물질을 주는 것 자체가 복된 것이고, 유익한 것이라고 말씀하는 걸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풍성한 열매란 그들이 물질로 돕는 것 자체가 이미 그들의 열매로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복인 줄 아셔야 합니다. 세상은 더 많이 가지는 걸 복이라고 합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걸 복이라고 합니다. 성경도 심는 대로 거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9장 6절에 보면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분명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왜 그렇게 말하는지 이유를 아셔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심는 대로 거둔다는 말씀을 거둔다는 말씀에만 초점을 둔다면 성경의 사고로서 심는 것이 아닙니다. 심는 대로 거둔다는 말씀은 그 앞에 무엇과 함께 나오느냐 하면 이런 말씀과 함께 나옵니다. 고린도후서 9장 5절 “그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게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그리고 7절도 보시면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그러니까 심는 대로 거둔다는 말씀은 거둔다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니라 심는 것에 초점이 있습니다. 심는데 어떻게 심느냐? 준비된 마음으로 심는 걸 말합니다. 마음에 정한 대로 심는 것,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심되 즐겨 내는 걸 말합니다. 결코 거둔다는 것에 초점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에게 어떤 말씀을 하시느냐? 고린도후서 9장 9절입니다. “기록된 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누가복음 16장이나 마태복음 25장과 같은 말씀을 여기서도 하시는 겁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을 통해 너희 의가 확인이 되는 자리라.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기 때문에 그것이 의라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의 의를 가졌지만 그것이 열매로서 드러난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때문에 성도에게 참된 복은 물질로 베풀 수 있는 자체가 복인 것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줄 때도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겨 내는 자체를 복되다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걸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오시면 18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선물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한다고 말한 후 그것을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다. 그리고 풍부하다. 왜냐하면 너희가 에바브로디도 편을 통해 준 것을 내가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쓰고 있는 것은 너희에게 다시금 선물을 구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받은 바가 있고, 그것으로 풍족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풍족하기 때문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내가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나만 감사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베푼 너희의 도움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과 같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앞서 마태복음 25장의 말씀도 봤지만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는 말씀과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39). 비록 주님께 직접 행한 일은 아니지만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일을 주께 하듯 하고 복음을 위한 삶으로서, 또한 율법을 실천하는 삶으로서 그렇게 한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기쁘게 받으시는 것입니다.
더불어 우리가 함께 생각할 말씀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으로 가시면 연보와 관련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1절부터 보시면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8:1-2) 여기 보면 마게도냐 교회들이 나오는데, 빌립보 지역의 교회들이 이 지역 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떤 일을 했는가?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넘치는 기쁨을 가졌을 뿐 아니라,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자기보다 더 어려운 교회를 돕기 위해 풍성한 연보를 했던 교회들이었습니다. 3절에서는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했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이런 연보 속에서 주목해야 할 점이 뭔가 했을 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5절을 보시면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단순히 물질만 드린 것이 아니라 물질을 드리기 전에 먼저 자신을 주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연보는 어떤 연보인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려야 합니다. 자신을 주께 드리지 않고 드리는 연보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먼저 주께 드렸을 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연보를 해야 합니다. 단순히 물질만 드리면 다 받으시고, 하나님께서 흡족해 하시느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들이 드린 것이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단순히 물질로서만 하나님께서 향기로운 제물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주께 하듯 했기 때문에, 복음을 위해서 드렸기 때문에, 그리고 율법의 실천으로서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물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겁니다. 나아가 더 중요한 것은 뭐냐? 그들 자신을 주께 드렸기 때문입니다. 드린 것은 물질이지만 그것보다 먼저 무엇을 드렸느냐? 자신을 먼저 주께 드렸습니다. 주께 하듯 한 것, 복음을 위해 드린 것, 율법의 실천으로서 드린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드린 것이라면, 그것보다 앞서 자신을 주께 드리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서 자신을 주께 드릴 수 있었는가? 고린도후서 8장 1절을 다시 보시면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어 낸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이 하나님께 자신을 드릴 수 있는가?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자신을 바칠 수 있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신 분입니다. 반면 우리는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입니다. 성도가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 타락의 모습이, 죄의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있는가? 없습니다. 우리 편에서 어떤 방법을 사용하여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가? 그것도 없습니다. 아니 성경은 하나님께서 먼저 일하시기 전에는 우리 편에서 뭔가를 해보고자 하는 마음도 품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를 세우셨고, 또 그 중보자를 통하여 항상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과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을 연결시키기 위해 하나님임과 동시에 사람이신 유일한 중보자,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통해 우리의 죄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릴 수 있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없이 우리가 드려질 수 있는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을 누가 친히 행하셨는가? 하나님께서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하는가? 은혜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럼 여기서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우리가 매 주일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를 드릴 때 예배의 요소로 찬송과 기도, 그리고 말씀을 읽고, 듣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 외에도 헌금의 순서도 있습니다. 물론 헌금 순서 자체를 가지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배에 있어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도록 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미리 헌금을 준비하도록 하고 있고, 예배 시간이 되어 들어올 때 헌금을 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헌금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마음으로 드립니다. 그럼 어떻게 해서 하나님께서 받으십니까? 대부분 우리는 우리의 정성이라는 논리를 가지고 나옵니다. “마음을 다하여 드리기 때문에, 또는 미리 준비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받으실 것이다.” 물론 마음을 다하여 드리고, 미리 준비하여 드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드린다고 할 때 그런 부분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헌금을 받으신다고 할 때 더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그리스도 때문에 받으신다는 원리입니다.
헌금뿐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나와서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 몸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으신다고 생각하시면서 드립니다. 그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우리의 정성을 다하여 드리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리스도 없이 우리의 정성을 다하여 드린다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받으시지 않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정성을 다해서 드려도 그 정성 안에 뭐가 있느냐? 점과 흠이 있습니다. 죄가 있고, 더러움이 있습니다. 완전히 깨끗한 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면 받으시는 이유가 뭔가?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죄를 깨끗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완전한 모습으로 받아질 수 있도록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린도후서 8장을 확인하고 있지만 자신을 먼저 주께 드린다는 것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물질보다 자신을 먼저 드리는 것이 일차적인 내용으로 있고, 자신을 먼저 드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드려지는 역사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없이는 결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을 하실 때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따라 행하시기 때문에, 인간으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이 바울을 도왔던 것은 바로 이런 의미가 들어 있다는 걸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단지 바울이 어려우니까 도왔다는 것으로만 끝나는 내용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향기로운 제물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자신을 먼저 주께 드린 일이 있습니다. 자신을 드릴 때 그저 자신의 정성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드리는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주께 드릴 뿐만 아니라 주의 뜻을 따라 그렇게 했습니다. 복음을 위해 드린 것이고, 율법의 실천을 따라 드린 것입니다. 율법을 따라 드릴 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마땅한 마음으로 드린 것입니다. 아까운 마음으로 드린 것도 아니며, 인색함으로 드린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하는 마음으로서 드린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헌금을 하실 때 이런 정신을 가지고 하셔야 합니다. 물질을 드리지만 나를 드린다. 그리고 물질을 드릴 때 주의 뜻을 따라 드린다. 주일에 나올 때 헌금을 하니까 아무런 생각 없이 그렇게 드려선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선물이 아니라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한다고 되어 있는데, 저 역시 여러분에게 이런 풍성한 열매가 맺혔으면 좋겠습니다. 단지 물질을 드리기 때문에 물질의 보상이 있길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내용이 여러분에게 확인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 그렇게 줄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다. 뿐만 아니라 그 은혜 안이 있는 자로서 단지 이 땅에서만 살아갈 자로 있는 게 아니라 영원을 준비하면서 살아갈 자이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고, 또한 받고 있는 자라면 그 은혜에 감사하는 자가 되셔야 합니다. 물질 얘기가 나왔기 때문에 물질로 감사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분명히 알라는 차원에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부디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금 생각하시면서 그 은혜에 감사하시되, 무엇보다 자신을 먼저 주께 드리십시오. 물론 드리실 때 주님 안에서 드리셔야 합니다. 그리고 주의 뜻을 따라 주는 자로서 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성도의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