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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130407설교 / 빌립보서1장21-26절 / 죽음의유익과삶의방향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3.04.07|조회수429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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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1장 21-26절

죽음의 유익과 삶의 방향

 

바울은 앞선 내용에서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된다면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다고 말했습니다(20). 그의 모든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었냐 하면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하는 데 있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말했던 것처럼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삶, 그것이 그의 인생의 목적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런 목적을 가지게 되었나?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21). 다시 말해 바울은 자신 안에 누가 산다고 말하느냐 하면 그리스도가 산다고 말했습니다. 내 삶의 주인이 ‘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주인은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삶을 사는 것은 바울이지만, 바울은 누구의 명을 따라 사는 자냐? 그리스도의 명을 따라 사는 자입니다. 때문에 그분을 위해서라면 살아도 좋지만, 혹 죽는 것이 그리스도의 뜻이라면 그것 역시 좋다고 여겼던 겁니다.

그런데 21절을 보시면 이런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단순히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이 내게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특히 여기서는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해서 죽는 것이 유익한가?

일반적으로 죽음이라는 말 자체는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것 같습니다. 유익한 것이 아니라, 무익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죽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없고, 죽음 자체를 소망하는 사람도 없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뿐만 아니라 죽음은 육적이고 세상에 속한 사람들에게 큰 손실을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도 그렇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육적이고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특징 중 한 가지가 뭐냐 하면 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이것은 말세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할 뿐만 아니라, 돈을 사랑합니다(딤후3:2). 돈을 사랑하는 정도가 마치 돈의 노예가 되어 살아갈 정도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경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고자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갑작스레 죽음이 찾아오게 되면 어떻게 해서든지 더 오래 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을 놓아두고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육적이고 세상에 속한 사람들에게 죽음이란 세상에 있는 것을 빼앗아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부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죽음이란 부정적입니다. 유익한 것이 아니라, 무익하다고 생각합니다. 죽음 자체를 위로로 생각하지 않으며, 죽음 자체를 희망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죽음이라는 걸 선택하는 사람, 소위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사람을 생각해 보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한편으로 보자면 이 땅에서의 삶이 너무나도 절망적이기 때문에 자살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자살을 시도한다고 할 때 죽으면 위로를 받고, 뭔가 희망이 있기 때문에 자살을 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너무나도 절망적이기 때문에, 오로지 그것을 끊고자 하는 마음에서 자살할 뿐입니다. 죽음 이후에 그것이 위로가 되고, 그것이 희망이 된다고 생각하여 자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 자살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부정적이라고 말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그러나 죽음이 유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점에서는 동일하게 부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죽음이요, 죽음에 대한 자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죽음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무익하다고 보지도 않습니다. 죽음에 대해 위로가 없다, 희망이 없다고 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왜 그런가?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자,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기 위해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는 죽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3절을 보시면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8절도 동일하게 말합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물론 이 땅의 삶 속에서도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다 마치시고 승천하시면서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이 이것이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것보다 더 유익된 것이 뭐냐? 죽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 고린도후서 5장으로 가셔서 8절 앞에 있는 부분을 좀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1을 보시면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여기 보면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란 표현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육체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육체가 무너진다, 우리의 육체가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때문에 1절 말씀을 쉽게 풀자면 우리가 죽음에 이르게 된다 할지라도 예비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즉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다고 말하는 내용입니다. 특히 여기 보면 땅과 하늘을 대조적으로 설명합니다. 즉 땅에 있는 집을 장막 집으로 표현하되 무너지는 것을 특징으로 설명한다면, 하늘에 있는 집은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이 육체는 무너지는 장막 집과도 같습니다. 여기 있는 아이들이야 점점 젊어진다는 표현을 쓰기도 하지만, 모든 육체는 무너지는 장막 집과 같습니다. 비록 어린 아이라 할지라도 아픔이 있고, 고통이 있고, 힘듦이 있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땅이 아닌 하늘에서 입게 될 육체는 어떠한가? 무너지는 장막 집이 아니라 영원한 집입니다. 무너지지 않습니다. 튼튼하고 견고합니다. 아픔도 없고, 고통도 없고, 힘듦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2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이 땅에서의 삶을 한 마디로 말하라고 한다면 탄식을 하며 사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탄식하기 때문에 무엇을 사모하느냐?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를 간절히 사모한다고 말합니다. 시편의 고백과도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90:10) 그래서 하늘에 있는 처소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4도 보시면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도 탄식한다고 되어 있는데, 왜 탄식하는가? 짐을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짐이 무엇과 연관이 있느냐? 죽을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는데(롬6:23),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 짐을 죄의 짐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의 삶은 끊임없이 죄의 짐을 지고 사는 삶이기에 탄식할 수밖에 없는 삶인 것입니다.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라고 탄식했던 것처럼, 그런 탄식으로 사는 삶이 이 땅에서의 삶인 것입니다. 성도는 이런 탄식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반면 하늘에서의 삶은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어 사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본래는 죽을 것이지만, 그것이 무엇에 의해 삼켜졌느냐? 생명입니다.

여러분, 성도가 이 땅을 살아갈 때 죄와 상관없이 사는 삶이 있느냐? 없습니다. 성경은 어디까지 말하느냐 하면 모든 율법을 지키다가 하나만 범해도 모두 범한 자가 된다고 말할 정도입니다(약2:10). 아니 우리가 율법 하나를 지키는 그 속에도 점과 흠이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점과 흠이 없는 선이 있을 수 있는가? 이 땅에서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셨느냐? 이런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본래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죄와 함께 하실 수 있느냐 하면 죄와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분으로서 죄를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게 되었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우리 대신하여 다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뭐냐 하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지만, 이 땅에서는 여전히 죄 아래 살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완성된 것으로 이 땅에서 끝나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미완성된 채로 이 땅에서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뜻을 다 헤아려 알 수는 없지만, 몇 가지만 말씀드리자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얼마나 죄인 된 존재인가? 죄가 끊임없이 나오는 존재인가?” 알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런 죄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면 그 은혜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죄보다 크다는 것을 우리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 땅에서는 여전히 죄 아래 살지만, 그런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조금씩 성화되어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을 따라 택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성도는 비록 구원의 은총을 입었지만 죄 아래 살 수밖에 없습니다. 죄의 짐을 지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만, 어떤 면에서는 온전한 연합을 이루며 사는 삶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떻게도 말하느냐? 고린도후서 5장 6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쉽게 말해 부활체를 입기 전까지는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는 것도 사실이지만, 부활체를 입을 때와 비교하자면 주와 따로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할 정도의 삶이 지금 이 땅에서의 삶인 것입니다. 아직까지 미완성의 모습이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임마누엘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부활체로 있게 될 것과 비교해 보자면 그것조차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게 아니라고 말할 정도인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무엇을 소망하는가? 8입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오늘 우리가 읽은 빌립보서의 말씀은 바로 이런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21절을 보시면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왜 바울이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말하는가? 육신의 장막을 벗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는 끊임없이 죄로 인하여 탄식할 수밖에 없지만, 죽음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미 살폈지만 19절로 올라가시면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이렇게 말하는데, 이때 구원의 의미도 동일합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죽게 된다고 할지라도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았지만, 바울이 말하는 의미는 구원을 이루어가야 할 내용으로서의 구원이 아니라, 더 이상 이루지 않아도 될 구원, 몸의 부활만 기다리면 되는 그 구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하자면 죽음이 완전성화를 이루는 일이기 때문에 죽음조차 유익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죽음 전에는 다 뭐냐? 성화를 이루어가야 할 과정으로 있는 겁니다. 그 과정 속에는 죄와의 싸움이 있기 때문에 치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싸움을 싸우지 않는 자들의 경우 치열하다고 느끼지 못하겠지만, 성도는 죄와 싸우는 자이고, 죄와 싸우기 때문에 치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죽기까지 싸우라고 말하는 것이 죄와의 싸움인 것입니다(cf.히12:4). 그러나 그런 싸움 속에서 무엇을 고백할 수밖에 없느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그런데 죽음이 무엇을 주느냐? 사망의 몸에서 생명의 몸으로 나아가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죽음조차 유익하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죽음에 대한 성도의 자세는 결코 두려움이 되어선 안 된다는 걸 교훈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20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그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담대히 전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죽음은 끝이 아니라, 완성으로 나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경우 이 세상에 있는 것을 놓아두고 가야 할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성도에게 죽음이란 이 세상의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것을 얻는 것이기 때문에, 아니 바울의 고백처럼 주와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더 본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2절로 오시면 ‘그러나’ 이렇게 연결됩니다.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비록 죽음도 유익하지만, 그래서 죽음 앞에서라도 담대히 복음을 전파할 수 있지만, 만일 육신으로 살게 하신다면 그것 역시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열매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무슨 말인가 하면 바울에게는 죽음과 삶 사이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23절 이하에 보면 그것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우선 23절을 보시면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그러니까 바울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을 더욱 소망하는 자였습니다. 비록 복음을 전하지만 여전히 죄에 대한 탄식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바울은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24절을 보시면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지난주에 본 말씀과 함께 이해하자면 그의 삶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삶이기 때문에, 그리고 빌립보 성도들과 교회에 대해 유익을 준다는 의미에서 육신으로 있는 것도 좋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 받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을 소망하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이 세상의 것에 집착하여 하늘을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만 그러했던 것이 아니라, 참된 신앙을 가진 성도라면 다 그러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3절부터 보시면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11:13-16) 여기 보면 이 땅에서의 그들의 삶을 뭐라고 표현하느냐? 외국인과 나그네의 삶이었다고 말합니다. 외국인과 나그네로서 본향을 찾는 자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본향이 어디냐? 구약으로 말하자면 가나안 같지만, 가나안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더 나은 본향, 바로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구약에 보면 가나안에 대한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은 하늘에 대한 모형일 뿐,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시는 실체는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에게는 가나안 정복 이후 그 땅을 분배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레위 지파에게는 땅을 분배해 주지 않았습니다. 물론 레위지파가 살 수 있도록 각 지파별로 4개씩, 48개의 성읍을 주어 살도록 하셨습니다만, 레위 지파에게 땅을 분배해 주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의 기업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 13장 33입니다.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모세가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심이었더라” 그러나 여러분, 레위 지파의 기업은 하나님이고, 다른 지파는 하나님이 기업이 되지 않으시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당연히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기업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왜 유독 레위 지파에게만 땅을 기업으로 주시지 않느냐? 땅을 기업으로 받은 백성들이 레위인을 보면서 그들의 기업은 땅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임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레위인들을 어디에 살게 하시느냐 하면 각 지파의 성읍 속에 레위인들 모두가 살게 하셨던 겁니다. 각 지파는 각 지파별로 땅을 분배했지만, 레위인은 한 곳에 같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각 지파의 땅에 흩어져 살았던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았지만, 실제 기업은 가나안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심을 그런 방식으로 알리고자 하셨던 겁니다. 마치 이것과 같습니다. 신명기 8장에 보면 광야 40년 동안 만나를 먹이셨다고 말씀하시는 내용이 있습니다. 만나를 먹이시지만 그것을 통해 교훈하고자 하시는 것은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존재라는 걸 교훈하시기 위해 만나를 주셨던 겁니다. 가나안이 정확하게 그런 의미입니다. 가나안을 주시지만 가나안이 최종적인 안식처가 아닌 겁니다. 이 땅에서는 결코 영원한 안식을 맛볼 수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죄 가운데 살아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로 인하여 탄식이 있을지언정 영원한 안식은 이 땅에서는 맛볼 수 없습니다. 때문에 가나안에 살지만 참된 신앙을 가진 자들은 다 무엇을 사모하였는가? 하늘을 사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원한 안식처,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는 곳! 구약의 백성들이 그러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의 백성들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더더욱 하늘을 소망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그것을 소망하는 자로 살아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에 비해 신약의 백성들은 더욱 판명하게 그 말씀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구약의 백성들보다 신약의 백성들이 말씀에 대한 은혜를 더욱 누리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겁니다. 당연히 하늘에 대한 소망이 구약 백성들보다 더 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성도들 가운데 이런 자세로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가? 말세에 이런 일이 있다고 하면서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한다고 되어 있는데(딤후3:2), 성도들 역시 여기서 벗어나지 않다는 게 현실로 와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좋은 대학 가려고 하는가? 왜 좋은 직장에 가려고 하는가? 아니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가는 걸 나쁘게 보자는 게 아닙니다. 그런 목표를 삼는 것 자체를 비틀고자 함이 아닙니다. 그런 목표가 무엇과 맞물려 있는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는 정신과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그럽니다. 그러나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생각하느냐? 지난주 말씀드린 것처럼 좋은 대학에 가지 않는 것도 주를 존귀하게 할 수 있고, 좋은 직장에 가지 않는 것도 주를 존귀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냐?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대학에 떨어지면, 또 좋은 직장에 들어가지 못하면 일단 부끄러워하는 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정신, 그리고 돈을 사랑하는 정신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이 땅에 있는 것을 사모할 뿐, 하늘에 대한 사모함이 우리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영원한 안식처를 사모하지도 않으며,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 하고자 하는 소망도 어떤 면에서는 없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이 세상에 속하여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 바울의 모습을 통해 교훈하시는 바를 깊이 새기셔야 합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죽는 것도 유익하다. 삶과 죽음 사이에 놓여있지만 나의 소망은 오로지 주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정신을 우리가 가져야 됩니다.

 

그러나 이런 정신 때문에 우리의 목숨을 아무렇게나 대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자 하는 것 때문에 단순히 죽고 싶다는 투의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죽고 싶은 심정으로 살기 때문에 이 땅에서의 삶을 소홀히 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24절에 있는 것처럼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달리 말하면 너희 유익을 위하여 살고자 한다. 너희 유익을 위하여 더욱 애쓰고자 하는 바가 있다고 알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성도들 역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을 소망할 뿐 아니라, 혹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살게 하신다면 지난주에 살폈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존귀하도록 하는데 힘써야 하며, 나아가 성도와 주위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는 데 힘써야 한다는 걸 배우셔야 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자 하는 마음은 결코 이 땅에서 나태한 자로 살아가도록 하지 않습니다. 소위 예정론에 대해 오해하는 사람 가운데 이런 생각 때문에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 대해 구원하시기로 하셨다면 반드시 구원하실 것 아니냐! 그럼 전도를 하지 않아도 되겠네!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겠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최종적인 구원만 결정해 놓으신 게 아니라, 최종적인 구원으로 가는 구원의 서정도 결정해 놓으셨습니다. 믿음도 없는 자들을 선택하셨다는 이유로 무조건 구원시키는 게 아니라, 선택하셨기 때문에 믿음을 주시며,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며, 의롭기 때문에 성화를 위하여 죄와 싸우게 하시며, 결국 죽음을 통해 완전성화, 그리고 영화로운 단계까지 나아가게 하십니다. 특히 이 땅에서 어떻게 살라고 명하시느냐 하면 “전도하지 말라, 아무렇게나 살아라!” 이렇게 말씀하신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오히려 전도하라,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디모데후서에서는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4:2)고까지 말씀하실 정도입니다. 또한 열심을 다해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빌립보서의 말씀대로 하자면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하실 정도입니다(빌2:12). 달란트 비유로 하자면 적은 일에 충성한 것을 칭찬하실 정도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충성을 요구하십니다(마25:21,23).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생명을 유지하고 계시다면 여러분의 삶은 마땅히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사람들에게는 유익이 되는 삶을 사셔야 합니다.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지도 못한다면 헛된 삶일 수 있습니다. 아니 믿는 자로서 그렇게 살아간다면 도리어 일찍 죽어 주께로 가는 것이 더 나을법한 삶이란 걸 명심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있다는 걸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뭐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라는 것이고, 나아가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 25절과 26절에 보시면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걸 보게 됩니다.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 보면 바울 자신이 살 것에 대해 확실히 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것에 대해서도 확실히 안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바울은 하나님의 계시를 따라 하나님께서 그를 데리고 가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았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주의 말씀을 따라 소망을 가지고 있다는 걸 이런 식으로 표현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는 하나님 안에서 살게 될 때 그 모든 소망이 어디 있었느냐 하면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믿음의 진보, 그리고 기쁨을 위하여 함께 거하고자 한다는 데 있었습니다. 심지어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한다고도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믿음이 진보하게 되며, 또한 기쁨이 넘쳐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할만한 것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배우게 될 때 반드시 믿음의 진보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열매로 인하여 기쁨도 있어야 합니다. 탄식이 있는 삶이지만 말씀을 실행하며 행하는 자로 있을 때 기쁨이 넘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내용과 연결해서 설명하자면 이 세상에 대한 욕심은 점점 죽어가야 하며, 하늘에 대한 소망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더욱 많아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 땅을 살면서 하늘에 대한 소망을 가진 자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다. 위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아래로는 사람들에게 유익을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 앞에 자랑할 만한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저 세상에 있는 것으로 자랑을 삼으셔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모든 자랑은 주 안에의 자랑이어야 합니다. 주님이 자랑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주님의 것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물질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지만, 이 땅에서만 주어질 뿐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가지도 못하는 걸 자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때문에 변화된 삶의 내용이 실제 우리의 자랑꺼리가 되셔야 합니다. 믿음의 진보, 그리고 믿음의 진보로 말미암은 기쁨이 우리의 자랑의 내용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죽음이 두렵다면 기도하십시오. 죽음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을 주시고, 오히려 죽음을 소망하게 해 달라고 기도 하셔야 합니다. 이것은 죽음 자체를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그것을 소망하라는 것입니다. 죽었는데 그리스도와 함께 하시 못한다면 결코 그 죽음은 영광스러운 죽음이 아닐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부자로 죽지만 하나님 앞에 영광스럽지 못한 죽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지 나사로의 죽음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거지로 죽었지만 그의 죽음은 영광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소망해야 한다고 할 때 바로 이러한 죽음을 소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이 땅에 살지만 우리의 눈은 어디를 바라봐야 하느냐 하면 하늘을 바라봐야 합니다. 좀 더 정확히는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 것을 소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계속해서 살게 하신다면 우리의 삶의 전 방향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무엇보다 말씀으로 말미암은 믿음의 진보가 여러분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때 믿음의 진보란 우리에게 닥쳐지는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면서 인내와 소망을 가지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5장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1-4) 그리고 그 안에서만 맛볼 수 있는 참된 기쁨도 여러분에게 넘쳐나야 할 것입니다. 고난이 있기 때문에 기뻐할 수 없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빌립보서의 배경이 그것을 잘 말해 줍니다. 감옥에 갇혀 있지만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기뻐하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 기쁨을 맛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삶을 사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여러분의 자랑이 되셔야 합니다. 고난이 없는 것이 자랑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서도 인내하며, 소망이 있는 삶, 그리고 그러한 삶 속에서 기뻐할 수 있는 삶! 부디 여러분의 삶 가운데 이런 열매가 풍성한 삶을 사셔서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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