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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130414설교 / 빌립보서1장27-30절 / 복음에합당하게생활하라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3.04.14|조회수716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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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127-30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듯이 바울은 바울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인생 목적은 오직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되는 데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살든지 죽든지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특별히 바울은 죽음의 위기 가운데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옥게 갇힌바 되었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가운데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두려워했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죽음조차 유익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비록 옥에 갇혀 있지만, 그래서 죽을 수도 있겠지만, 복음이 매이고 복음이 사라질 수 있는가? 없다는 의미에서 유익한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죽는다고 해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지 않느냐?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에 살핀 것처럼 성도에게 죽음이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에 유익하다고 하였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끝나지만 이제는 영원한 삶을 살 뿐만 아니라, 그 영원을 누구와 함께 사느냐?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 때문에 유익하다고 본 것입니다. 죄의 짐 속에서 탄식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죄의 짐이 삼킨바 되어 더 이상 죄와 상관없이, 오히려 영광스럽게 사는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죽음조차 유익하다고 고백하였던 겁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이 땅에서의 삶을 등한시 했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한편으로는 그것을 소망하는 자로 살았지만, 그런 소망 때문에 이 세상의 삶을 아무렇게 살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는 소망까지 가졌고, 그런 확신을 가진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왜냐하면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 때문이고, 나아가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그리고 성도의 유익을 위해서 그러한 소망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유익, 성도의 유익이라 했을 때 바울은 믿음의 진보와 기쁨, 심지어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더욱 풍성해 지길 원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오시면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27절 상반부를 보시면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여기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단어는 시민답게 살라, 시민으로서 책임을 다하라는 뜻입니다. 특히 빌립보서 320절에서 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말하기 때문에 하늘 시민답게 살라, 하늘 시민으로서 책임을 다하라고 권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실제로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의 시민권을 땅에서 하늘로 옮겨놓습니다. 본래 어디에 속한 자인가? 땅에 속한 자였습니다. 달리 말하면 하늘을 바라보지 않는 자, 오로지 땅만을 바라보며 사는 자였습니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했고,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로 있었습니다. 에베소서 2장에 있는 표현으로 하자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자였습니다(2:2).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는 자, 그래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2:3). 그런데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2:4-5). 살리실뿐만 아니라 에베소서 26절은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219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그러니까 복음이 우리를 하나님의 시민으로, 하나님의 권속으로 옮겨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옮겨놓은 것으로 끝이 아니라, 성경은 옮겨놓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시민으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권속으로서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가르칩니다. 달리 표현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은 자들,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자들은 믿는 자답게 생활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에베소서 41절에서는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복음과 복음에 따른 삶이 다른 것이 아니라, “복음과 복음에 따른 삶이 일치가 되도록 하라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성경 전반을 통해 강조하고 또 강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구약에 보면 선지서가 굉장한 분량으로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에서부터 말라기까지만 하더라도 대략 구약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선지서를 한 마디로 요약하라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왜냐하면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대상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불리는 자들이었고, 그들에게 전할 때 대부분 그들의 예배와 그들의 삶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설교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는가?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바로 이 방향입니다. 혹 교리적인 부분을 설교한다고 할지라도 방향은 이 방향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향하는 바가 우리의 삶을 돌아보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는가? 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는가? 우리의 구원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의 구원이라고 할 때 그 구원은 최종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그 구원만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최종적인 구원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할 모든 과정을 다 포함한 구원입니다. 빌립보서 2장에 있는 것처럼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어가야 할 내용으로 있는 겁니다(2:12). 심지어 예정론을 분명하게 말하는 에베소서 1장도 보면 왜 우리를 선택하셨는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에베소서 16“...그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로 하여금 이 땅 가운데 무엇을 지향하며 살게 하시는가? 에베소서 1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바로 이 방향인 겁니다. 그러니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삶을 살아가야 하지만, 그 영광을 위하여 무엇을 돌아보며 살도록 하시느냐? 우리의 삶이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가를 돌아보게 하십니다.

따라서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이 말씀은 사실 많은 내용을 품고 있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원의 최종적인 완성까지 구원을 이루어가야 할 것으로 있기 때문에 평생 이 내용이 우리의 삶의 방향으로 있어야 할 내용입니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할 때 우리가 놓치지 말고 살펴야 할 것이 뭐냐?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느냐?” 이것을 돌아보셔야 합니다. 그저 말씀을 듣고 지식으로만 충족하는 자로 있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개혁교회를 지향한다고 할 때 소위 교리만 있고, 삶이 없다는 말을 들어선 안 될 것입니다. 교리가 있기 때문에 삶 역시 교리에 합당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교리와 삶과 관련해 오늘날 한국교회를 돌아보게 되면 특별히 교리의 부재 가운데 있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뭐냐? 교리의 총서라 할 수 있는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이 가르쳐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희 교단의 경우 항존직과 관련해 직분을 줄 때 반드시 이것을 고백하게 합니다. 첫째가, ,구약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요 또한 신앙과 삶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한 규칙으로 믿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고백하는 것이 본 장로회 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대,소요리문답, 나아가 장로회 정치와 권징조례, 예배모범에 대해 받아 신종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다 살폈는지에 대해 물어본다면 장로, 집사뿐만 아니라, 사실 목사조차 다 살피지 못하고 고백하는 이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성경이야 그렇게 고백하는 것이 거짓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두 번째 부분에 대한 고백은 어떤 면에서 거짓된 고백을 하고 있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살피지도 않고 그것을 신종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만큼 교리가 가르쳐지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리가 꼭 필요하냐? 성경만 가르치면 된다, 성경을 통해 삶만 가르치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교리라고 해서 뭔가 성경과 상관없는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성경 자체가 교리를 가르치고 있고, 성경 자체가 교리에 따른 삶을 가르치고 있다는 걸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고백과 같은 내용들은 단순히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성경을 따라 고백한 내용이요, 성경에 대한 해석의 산물이라는 점에 있어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신앙고백과 같은 내용을 가르치지 않는 교회에 교리를 찾아 볼 수 없는가?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런 교회들 역시 그리스도의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말하고, 하나님의 속성과 일하심에 대해서도 가르칩니다. 교리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교리가 있고, 그 교리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총체적인 의미에서 볼 때 오늘날 한국교회는 교리의 부재 속에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교리 없이 삶만을 이야기하는 기독교라면 감히 말씀드리지만 일반 건전한 종교와 다를 바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니 참된 교리에서 벗어난 가르침 가운데 있는 교회들은 삶에 대해서도 반드시 왜곡된 정신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자명합니다. 왜냐하면 삶의 모든 근거는 교리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가장 흔한 예를 들자면, 소위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에 대한 강조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이웃 사랑만 강조하게 되면, 그것이 참된 기독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이웃 사랑의 정신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건전한 타종교도 다 가지고 있는 정신입니다. 그럼 그들과 우리의 차이가 무엇인가? “이웃 사랑의 근거가 뭐냐?” 하는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겁니다. 역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부터 이웃 사랑이 나오지 않는 이상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 아니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럼 여기서 끝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이냐?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십계명으로 설명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구속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하실 수 있는 겁니다. 심지어 참된 교리는 어디까지 나아가는가? 이런 명령을 우리 스스로 실행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셔서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고 할 때 그 명령을 실행할 수 있는가? 없다는 것까지 나아갑니다. 비록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누리는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전적인 역사가 없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그 사랑에 근거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할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무엇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는가? 고린도전서 15 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저는 감히 말씀드리지만 이것이 교리의 핵심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빌립보서 1에 있는 내용으로 말씀드리자면 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그런데 오늘날 이런 내용이 설교 가운데 충만하게 증거가 되는가? 어려운 것입니다. 아니 충만하게 증거가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거짓된 가르침이 더욱 팽배해 있는 현실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삶의 열매도 무엇으로 연결이 되는가? 거짓된 가르침, 거짓된 교리와 맞물러 있을 수밖에 없는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공로주의, 그리고 그에 대한 상급이 바로 그러한 것들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 있듯이 끊임없이 역사 안에 있었던 알미니안주의, 펠라기안주의 그리고 반펠라기안주의가 우리 가운데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할 때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건 어떤 면에서 이런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삶을 말하되, 그 삶이 복음에 합당한가? 나아가 바른 복음이 걸맞는 것인가? 달리 말하면 외적으로만 행하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그 삶에 있어 어떠한 마음, 어떠한 자세까지 가지고 있는가도 함께 살피도록 요청받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이웃 사랑만 증거가 되면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외적인 것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함께 보시기 때문입니다. 외적으로 이웃 사랑을 하면 된다가 다가 아니라, 이웃 사랑을 하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해야 하고, 하나님 사랑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고, 또한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사랑할 수 있는 힘도 공급하시는 분이라는 걸 인정하는 자로서 이웃 사랑의 정신이 나타나야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삶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인간의 공로를 말할 수 있는 게 있는가? 근본적으로는 없다가 답입니다. 삶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알미니안, 펠리기안, 그리고 반펠라기안이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그리고 그 은혜를 구하는 마음으로 주께서 명하신 것을 행하는 자로 있어야 하는 겁니다. 행하되, 그것이 주의 명령이기 때문에 기쁨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행하는 자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했을 때,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이 말 자체로는 많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따라 두 가지만 말씀드리면, 먼저 27절 중반부에 이렇게 권합니다.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 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그러니까 바울은 자신이 빌립보 성도와 함께 있든, 아니면 함께 있지 않든 너희가 반드시 행해야 할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뭐냐? 한 마음과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입니다. 여기 한 마음이라는 단어를 직역하면 한 영으로’, 그리고 한 뜻으로라는 단어를 직역하면 한 혼으로이렇게 번역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영과 혼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드릴 수는 없지만 개혁신앙 안에서는 인간의 구성 요소를 이분설로 봅니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이 되어 있다. 영과 혼을 나누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의 경우 영과 혼을 나눠, 삼분설을 주장합니다. 그런데 삼분설의 가장 큰 문제가 뭐냐 하면 인간에게는 타락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고 말하는 데 있습니다. 부패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 따라서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선행을 행할 수 있다. 그것이 내 공로가 되는 것이고, 어떤 경우 신인협력설까지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습니다. 타락하지 않은 부분이 하나도 없습니다.

삼분설 입장도 성경에 근거를 두고 주장하는데, 가장 대표적인 말씀이 이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 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여기 보면 영과 혼과 몸,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영과 혼과 몸으로 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영과 혼을 나눠 설명할 때는 영과 혼이 떨어져 있다는 의미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보면 영을 혼으로, 혼을 영으로 쓸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방금 읽어드린 데살로니가전서의 경우는 인간은 세 가지로 구성이 되어 있다는 걸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 흠 없이 보전되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온 영과 혼과 몸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전체를 강조하여 설명하고자 할 때 똑같은 말이지만 다른 표현을 써서 강조하기도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너희 전 부분을 다 지켜 보전하여 지키실 것이다. 저들이 인용하는 말씀 중 히브리서 4장의 말씀도 있는데, 그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4:12)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말씀인가? 인간의 모든 부분을 변화시킬 수 있는 말씀이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삼분설 입장을 지지해 주는 구절이 아닙니다. 한 마음으로, 그리고 한 뜻으로입니다. 달리 표현하라고 한다면 전심으로입니다(JS). 전심으로 어떻게 하라고 하는가?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라.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되 전심으로 그렇게 하라고 권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사실 함께 교제하고 있고, 또 많은 부분 배움을 주시는 정목사님으로부터 자주 듣는 내용 가운데 한 가지가 신앙의 성격은 하나님 앞에서 나 홀로라도 가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모두가 진리가 아닌 방향으로 갈지라도 진리라면 혼자라도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도는 진리를 따르는 자이지, 사람을 따르는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혹 목회자 가운데 진리를 증거 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목회자가 진리 아닌 것을 증거 하기 때문에 그것을 받는 것이 아니라, 분별하여 진리만을 받는 자로 서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그 자리에 머물 수 없어 나오기도 해야 합니다. 한국교회를 보면 일부 어릴 때부터 그 교회에서 신앙생활 했다는 이유로 진리가 들려지지 않고 있는데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답답해하면서도 그렇게 하고 있는 겁니다. 아니면 어떤 관계 때문에 떠나지 못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자들이란 걸 명심해야 합니다. 말씀을 따르되, 혼자서라도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것도 말한다는 걸 잊지 마셔야 합니다.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라, 협력하되 전심으로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는가? 28절과 연결해서 생각해 보자면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복음을 믿는다고 할 때 혼자만이라도 복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홀로 걷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걷는 걸음이긴 합니다만, 다른 사람이 편들지 않고 다수가 다른 편에 서 있다고 해도 홀로 진리를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마치 엘리야와 같아야 합니다. 당시 바알을 섬기는 선지자와 아세라를 섬기는 선지자들이 850명이었습니다(왕상18:19). 엘리야는 그들 편에 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서 그들과 대결을 했습니다. 우리의 방향이 이러한 방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홀로 그 길을 걷는다는 것은 참으로 외로운 싸움입니다. 힘든 싸움이기도 합니다. 엘리야의 경우 850명과 싸워 승리하였지만, 이내 영적인 침체가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이겼지만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기도 했습니다. 성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홀로 이 길을 걷는 것은 매우 외로운 일입니다. 모두가 이 방향으로 가는데, 그 길을 가지 않는 것은 철저히 외로움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길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엘리야 홀로 남은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자 칠 천을 남겨 두셨습니다(왕상19:18).

오늘 본문에서 바울의 경우 빌립보 지역에 있는 교회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통해 한 신앙에 대해 배웠습니다. 이미 살핀 바 있는 것처럼 그들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1:5). 그러나 그런 교회 앞에 대적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박해라는 외형으로, 거짓 복음이라는 외형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교회 안에 혼란스러운 일들이 있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권면하면서 첫 번째로 말하는 게 뭐냐? 한 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라는 말입니다. 쉽게 이해하자면 이런 뜻입니다. 전도서 4 9절 이하의 말씀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그 부분을 읽어드리면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4:9-12) 그러니까 혼자라면 넘어질 것을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 준다는 의미에서, 또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된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때도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단순히 사람이 나에게 힘이고, 사람이 나에게 위로가 된다는 그런 의미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그가 바른 복음 가운데 있고, 그가 바른 진리 가운데 있는 것이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게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정목사님의 설교를 약간 참고하여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기 위해서는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히브리서 10 25입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왜 모이기를 힘써야 하는가? 그 모임을 통해 주의 진리와 복음이 증거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여러분이 주일에 있는 이 공적 모임, 주일 예배에 반드시 참석하도록 하셔야 합니다. 혹 공적으로 모이는 수요일 예배가 있다면 그 모임 또한 빠지지 않도록 부단히 애를 써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은 세상 속에서의 삶입니다. 그 속에는 믿는 자들도 있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도 반드시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믿지 않는 자답게 말하기도 하고, 또 믿지 않는 자답게 행동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우리의 본성이 그런 말과 행동을 따라 가려고 한다는 데 있습니다. 오늘날 보면 유행이라고 해서 TV 속에 여러 가지 유행들을 그대로 따라 하고자 하는 것처럼 우리의 본성이 이미 세상을 따라 살고자 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만 살게 되면 반드시 세상을 본받아 살게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세상에서 사업을 하거나, 아니면 어떤 일을 하게 될 때 우리 입장에서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죄를 짓는 경우들이 더러 있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정직을 요구하지만, 세상에서의 삶이 항상 정직할 수 있는가? 우리 모두는 없다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세상이 그렇게 해서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 이미 세상이 거짓투성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이미 세상에서의 삶 자체가 뭐냐? 복음에 합당한 삶이 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만약 주일 예배까지 참석하지 않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복음을 들을 기회를 가지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주의 진리를 따라 이 세상을 분별해야 하고 또한 내 마음을 살펴야 하는데, 그것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이걸 여러분이 조심하셔야 합니다. 특히 히브리서 10장의 경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데, 어떤 경우라도 주일을 지키지 못하도록 하는 모든 방식에 대해 여러분이 거부하셔야 합니다. 또한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말하는데, 이 때 그 날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종말이 가까워오면 올수록 더욱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모이기만 힘쓰면 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에 있어 전념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4 13입니다.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방금도 말씀을 드렸지만 왜 모이느냐? 주의 진리와 복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이기만 하고 주의 진리와 복음에 전념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유익이 되는가? 전혀 되지 않습니다. 달리 말하면 주일에 예배에 참석하는 것만 있어선 안 되고, 예배를 통하여 들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들어야 합니다. 어제까지 세상일에 찌들리다 보니 피곤해서 말씀을 듣는 시간에 졸면서 참석하는 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어떤 목사님의 경우 참석하는 것 자체로 잘 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주의 말씀을 듣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듣고 이해하는 자로 있어야 하고, 그런 이해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와 앉아 있어야 합니다. 당연히 주일 전에 주일을 준비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내일이 주일이니까 주일 전 늦게까지 이런 일, 저런 일로 주일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준비를 하는 마음이라면 예배 시간이 다 되어 오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일찍 나와야 하고, 또한 일찍 나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앉아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을 예배할 때 전심으로 예배하게 하시고, 또한 주의 말씀 앞에 깨닫는 마음을 주옵소서.” 이 기도가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럼 주일에만 말씀을 듣는 자로 있으면 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읽는 것과 권하는 것, 그리고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고 말합니다. 읽는다는 것은 저희 교회처럼 설교 외에 성경을 꾸준히 봉독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개인적인 연구에 대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바울은 지금 디모데라는 목회자에게 이 편지를 일차 대상으로 쓰고 있긴 하지만, 단순히 개인적인 편지를 넘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고 있다는 걸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목회자만 하나님의 말씀은 연구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연구를 하셔야 합니다. 주일에만 말씀을 듣는 자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매일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읽으셔야 합니다. 읽고 그 말씀에 대한 이해가 있도록 연구도 하셔야 합니다.

출애굽기 35에 보면 성막을 짓도록 하나님께서 사람을 세우시는데, 그들이 누구냐 하면 브살렐과 오홀리압입니다. 그런데 거기 보면 어떤 기록이 되어 있느냐 하면 30절 이하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시고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금과 은과 놋으로 제작하는 기술을 고안하게 하시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나무를 새기는 여러 가지 정교한 일을 하게 하셨고 또 그와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감동시키사 가르치게 하시며 지혜로운 마음을 그들에게 충만하게 하사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조각하는 일과 세공하는 일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로 수 놓는 일과 짜는 일과 그 외에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고 정교한 일을 고안하게 하셨느니라”(35:30-35) 여기 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사를 줬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그들에게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그들에게 지혜와 총명, 지식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말이 나오느냐 하면 32절에 금과 은과 놋으로 제작하는 기술을 고안하게 하시며라고 말합니다. 어떤 면에서 확 와 닿지 않을 수 있는데, 이전 성경인 개역한글 성경으로 하자면 이런 의미입니다. 31절과 32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케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공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일하게 하시며하나님의 신이 그들에게 충만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는데, 거기에 뭐가 있느냐 하면 공교한 일을 연구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았기 때문에 아무런 연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성령 충만 가운데서도 연구하는 일이 있더란 것입니다. 이미 충만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이 있었지만, 그것을 가지고 뭘 하느냐? 연구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보면 성령 충만하기만 하면 아무 것도 안 해도 되는 것처럼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일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이라는 것은 그것 자체로 끝이란 의미가 아닙니다. 말 표현으로는 충만이기 때문에 끝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 땅에서 끝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때도 뭘 하도록 요청받고 있느냐 하면 연구하도록 요청을 받고 있는 겁니다. 노력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총명과 지식을 따라 연구하는 게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한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결코 모이는 것으로만 다 됐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더욱 하나님 지식에 있어 충만해져야 합니다. 충만해질 뿐만 아니라, 충만해져도 더욱 연구가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는 걸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고, 권하는 것 그리고 가르치는 모든 것에 대해 전념해야 합니다.

실제로 예배 외에도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을 공부하는 것, 나아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해석해 놓은 것이 있다면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 성경을 더욱 잘 배우고, 또한 성경이 말하는 바 하나님은 누구신지, 그리고 하나님은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시는지를 좀 더 깊이 배울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이 일에 더욱 착념하셔야 합니다.

더불어 여러분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부모로 있다면 자녀들의 신앙이 교회뿐만 아니라 여러분에게도 그 책임이 있다는 걸 반드시 기억하셔야 합니다. 자녀를 위해서 학교도 보내고, 학원도 보내면서 신앙에 대해 아무런 가르침이 없다면 그것 역시 전심으로 복음을 위하여 협력하고 있다고 할 수 없을 겁니다. 복음을 위하여 협력하라고 할 때 어느 성도도 제외되지 않습니다. 모든 성도들, 어른뿐만 아니라 아이까지 다 복음의 일을 위하여 협력하도록, 때문에 함께 모이고, 함께 연구하는 일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여기까지 내용을 정리하자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할 때 첫 번째가 복음을 위하여 협력하는 일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협력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뭔가? 첫째가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둘째가 읽는 것, 권하는 것, 가르치는 것에 대해 전념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복음으로 말미암은 한 신앙을 가지게 되는 것이고, 혹 우리를 대적하는 자들이 우리를 위협할지라도 능히 그것에 대해 맞서 싸우되, 혼자가 아닌 한 신앙을 가진 자들이 함께 싸워 이겨낼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 28절을 보시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할 때 두 번째로 이렇게 말합니다.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그러니까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할 때 대적자들 앞에서 우리가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초대교회 당시만 해도 박해가 간헐적으로 있었습니다. 빌립보 지역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히게 된 이유가 뭐냐? 그가 법을 어겼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범죄자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로지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복음을 반대하는 방법 가운데 한 가지가 박해입니다. 초대교회에 보면 박해 외에도 이단들이 나오기도 했는데, 복음을 반대하는 방법 가운데 가장 잔인한 방법이 뭐냐? 박해입니다. 옥에 가두기도 하고, 때로는 죽이기도 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대적자들의 박해에 대해 뭐라고 말하느냐?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지난주 우리가 살핀 내용으로 하자면 성도의 죽음은 죽음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이런 말씀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0 28입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왜 박해자들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들은 우리의 몸을 죽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을 죽일 수 있는가? 아무도 없습니다. 영혼은 누구만이 지옥으로 멸하실 수 있는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 몸을 상하게 하는 것들은 어떤 것도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탄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성도들을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박해를 통해서, 그리고 이단들을 통해서, 나아가 우리의 생활환경을 통해서도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욥에게 있었던 시험의 내용처럼 있는 것들을 다 빼앗아 가기도 하고, 예수님을 시험한 것처럼 세상에 있는 온갖 것을 다 준다고 하면서 시험하기도 합니다. 무엇만 빼앗으면 되는가? 말씀만 빼앗으면 됩니다. 진리만 빼앗으면 됩니다. 복음만 빼앗으면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게 있습니다. 사탄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몸은 상하게 할 수 있지만, 우리의 영혼은 건들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누가 보존하시느냐? 하나님이 친히 자기 백성들의 영혼을 보존하십니다. 혹 몸을 공격하기 때문에 아플 수 있습니다.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몸이 아프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하여 탄식하며, 때로는 베드로처럼 부인하는 외형을 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택하신 백성들의 영혼을 버려두지 않습니다. 반드시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이사야 41 10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때문에 대적하는 자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는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누구신가? 오직 하나님 한분밖에 없습니다.

창세기 15 1입니다. “...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우리의 방패십니다. 어떤 공격이 온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막아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가장 큰 상급이십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하나님보다 클 수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을 잃어버려도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않는 이상 우리는 잃어버린 자가 아닌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뭐라고 말하느냐?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만이 방패요, 하나님만이 가장 큰 상급이시기 때문에 그런 분을 하나님으로 모시고 있는 이상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두려워 할 이유가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그런 말이 자신에게 들리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라. 무엇보다 한 마음으로, 그리고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들리기를 원한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두려워하지 말라고만 말씀하고 있지 않고, 핍박하는 자들, 박해를 일삼는 자들은 이미 그것 자체가 멸망의 증거라고 말씀합니다. 오히려 핍박을 당하는 자, 박해를 당하는 자, 물론 이때 핍박과 박해의 이유는 복음 때문입니다. 복음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하는 자는 이미 그것 자체가 구원의 증거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일이 누구로부터 말미암았는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말하느냐? 29절을 보시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로마서 8 17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왜 복음으로 말미암아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상속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장차 있을 영광이 보증되어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이유는 단지 믿는 자로 있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장차 있을 영광을 소유하기 위하여 고난도 잠시 동안 받도록 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복음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복음을 배척하는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대로 살고자 하면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참된 믿음은 무엇이 있을 수밖에 없는가? 고난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과 고난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이유는 믿고 고난을 받으라는 것에만 제한되지 않습니다. 고난을 받지만 그런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까지 약속하신다는 것도 잊지 마셔야 합니다.

 

30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모든 성도들에게 이런 싸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외된 자들이 있는가? 없습니다. 이미 바울 자신이 그런 일을 겪고 있고, 그 일에 대해 증거하다고 알립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고난이 찾아온다고 해서 두려워하지 마셔야 합니다. 오히려 복음 때문에 고난 받는 걸 당연한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고난 속에서도 우리가 멸망당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혹 몸은 죽일 수 있을지 몰라도 결코 영혼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게 있는가? 없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8:35)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요, 은혜인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대적하는 자들과 싸우셔야 합니다. 싸운다고 하니까 육적인 싸움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먹으로 싸우고, 발로 싸우는 게 아닙니다. 에베소서 말씀대로 하자면 이 싸움은 우리 육신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 영적인 싸움입니다. 영적인 싸움이기 때문에 무엇으로 무장해야 하는가? 에베소서에서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고 하면서 여러 가지 내용을 말합니다. 진리의 허리 띠, 의의 호심경, 평안의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6:14-17). 심지어 그 뒤에는 기도할 것까지 말씀합니다(1:18). 그러나 총체적으로 보자면 다 무엇과 관련이 있느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무기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싸우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모여서 주의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전심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를 맛보게 할 것이요,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게 할 것입니다. 부디 우리 모두가 이 일에 더욱 힘쓰셔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다운 자녀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며 사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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