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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140112설교 / 골로새서1장9-12절 / 너희를위하여구하는것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4.01.12|조회수477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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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19-12

너희를 위하여 구하는 것

 

골로새서는 옥중서신으로서 바울을 통해 복음을 들은 것이 아니라 에바브라란 목회자를 통해 복음을 들은 사람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그들에게는 칭찬할만한 신앙의 내용이 있었는데, 무엇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모든 성도들에 대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는 참된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이웃을 향해서는 사랑이 있었는데, 특별히 모든 성도들에 대하여는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는 하늘에 대한 소망도 있었는데, 비록 이 땅에서 살아가는 자이지만 이 땅에 소망을 둔 것이 아니라 하늘에 대한 소망을 두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의 삶을 나그네처럼, 외국인처럼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들의 본향은 어디인가? 하나님께서 성도를 위하여 예비해 두신 곳, 바로 그곳이 그들의 본향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이런 저들의 신앙을 듣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감사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됩니다. 하나님께 감사했다는 것은 뭐냐? 그 출처가 성도가 아니란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했다는 것은 그 출처가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믿음을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요, 사랑을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요, 소망을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이라는 선물을 주셨고, 하나님께서 사랑이라는 선물을 주셨고, 하나님께서 소망이라는 선물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럼 어떤 방편을 통해 그것을 주셨는가?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듣게 하심으로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들을 때 하늘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었고, 진리의 말씀을 들을 때 그리스도 안에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가질 수 있었던 겁니다. 유일한 원인, 구분을 위해 말씀을 드리자면 먼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나 가까운 원인으로서는 무엇을 방편으로 해서 이런 것들을 주시는가? 바로 진리의 말씀을 통해 이런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보게 되는 내용은 기도의 내용입니다. 9절 상반부를 보시면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그러니까 저들의 신앙의 내용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할 뿐만 아니라, 이제는 저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고자 하는 내용이 오늘 본문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되는 것은 아무리 믿음과 사랑, 그리고 소망에 있어 칭찬 들을만한 신앙의 모습일지라도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께 간구하여 받아야 할 만큼 부족한 자로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잘한다고 해서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잘하지만 여전히 기도함으로 받아야 할 존재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잘하고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지 않으면 결코 잘한다고 들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인생인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우리의 자녀 가운데 한명은 잘하고 다른 한명은 좀 못한다고 할 때 잘하는 자녀는 그냥 두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알아서 잘 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못하는 자녀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지며 잘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물론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이해하자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잘한다고 해서 더 이상 받지 않아도 될 만큼 잘한다, 완성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완성되어져 가는 자로 있기 때문에, 그리고 완성되어져 간다고 할 때 그렇게 완성해 가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끊임없이 기도하길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한다고 말하는데, 하나님은 우리가 끊임없이 기도하길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부족함을 채우실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길 원하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붙들어 주실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길 원하십니다. 기도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나는 부족한 자입니다. 나는 연약한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만한 것이 나에게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바울이 골로새 지역의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기도한다고 할 때 기도라는 말 자체 속에 이런 의미가 전제되어 있는 겁니다. 감사를 통해서는 감사의 내용이 본래 나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출발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 기도는 무엇이냐? 감사할 것이 많지만 여전히 나에게는 부족함과 연약함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결코 채울 수도 없고, 붙들어지지도 않는다. 달리 말하면 결코 완성될 수 없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는 기도하고 받는 것만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로마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우리는 때로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자주 그러한 자로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성경은 분명 기도하라고 말씀하시고, 오늘 본문처럼 기도의 내용도 가르쳐주시지만 하늘에 대한 소망이 아니라 이 땅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엇을 기도해야 될지 모른 채 기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히려 엉뚱한 기도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런 부분까지 다 헤아려 아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고까지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하고 받는 것보다 기도하지 않으면서도 받는 경우들이 더 많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기도하고 있지 못할 때도, 아니 기도한다고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기도가 아니라 엉뚱한 기도일 때도 하나님은 바로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일하시고, 또한 주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도하는 자로 있을 때 과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할 수 있는 자인가? 결코 교만할 수 없는 자임을 이런 말씀을 통해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교만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망각이 교만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본래 자기 것인 양 착각하는 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때문에 감사한다고 할 때도 교만할 수 없지만 기도한다고 할 때도 교만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정당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는 자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즉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줄 아는 자입니다. 아니 주셔서 채움을 받았지만 여전히 채워야 할 만큼 부족하다는 것을 아는 자, 그가 바로 기도하는 자인 것입니다. 기도하기 때문에 결코 교만할 수 없는 자인 것입니다.

 

그럼 바울이 골로새 지역에 있는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한 내용은 무엇인가? 먼저 9절 하반부에 보시면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바울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는 인생의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 있어 가장 기본적으로 구비되어야 할 것이 뭐냐? 이런 의미에서 바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달라고 말할 때 언제나 그 원리는 말씀 밖으로 넘어갈 수 없다는 것도 아셔야 합니다. 여기 보면 신령한이라는 말이 있는데, 간혹 이 신령한이라는 말을 어떤 신비적인 것으로 오해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고 할 때도 보면 말씀 밖으로 넘어가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고자 할 때가 간혹 있는 걸 보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오히려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해 달라고 할 때는 지난 시간에 본 것처럼 복음, 곧 진리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알게 해 달라는 기도와 같은 것입니다. 기준은 말씀이요,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성도가 가장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9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해 달라고 말할 때 모든 지혜와 총명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혜와 총명이라고 할 때 세상적인 것과 연결시키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지혜를 달라, 총명을 달라고 하면 고등학생이 대학교 갈 때 많이 구하곤 합니다. 아니면 간혹 직장에서 승진 시험을 볼 때 그렇게 구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지혜와 총명이라고 말하면 다소 세상적인 것과 맞물러 생각할 때가 많지만, 성경의 방향은 그런 쪽에 있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지혜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솔로몬의 경우만 보더라도 솔로몬이 구한 지혜의 성격은 정확하게 이것이었습니다. 열왕기상 3 9을 읽어드리면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그러니까 솔로몬의 지혜의 성격은 하나님의 많은 백성들을 다스릴 때 선악 간에 분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악인지 분별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선한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 주십사 기도할 때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 달라는 것은 단순히 세상 삶을 살아가면서 더 똑똑해지고 그래서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직장 가는 쪽으로 있는 게 아니라, 철저히 선과 악을 분별하게 해 달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말 어순을 보면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해 달라고 하니까 마치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따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따로, 혹은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덧붙여지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다르지 않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모든 지혜와 총명의 핵심은 뭐냐? 바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데 있는 것이고, 그 뜻은 부분적이긴 하지만 결국 선과 악을 분별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달라는 그러한 내용입니다.

심지어 지혜와 총명이라고 말할 때 신령한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는 걸 잊지 마셔야 합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신령하다는 건 신비적인 것이 아닙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 속한 것, 그런 의미에서 육적인 것이 아닌 것, 성령께서 주고자 하는 지혜와 총명, 성령께서 주고자 하시기 때문에 결코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이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때문에 지금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해 달라는 것은 이런 성격의 것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단순히 우리의 진로나 혹은 매일같이 고민하는 의식주의 문제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인지, 그런 의미에서 지금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해 달라고 저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런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는 것은 의식주가 없는 것보다 더 심각한 기갈이요, 망하는 것과 같다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기도 하셨던 것입니다. 아모서 8 10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는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호세아 4 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여러분, 교회의 가장 큰 피해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해 무지한 것 그래서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악인지 분별하지 못하는 것, 그것이 가장 큰 피해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이 정당하게 들려지지 않는 곳에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성도에게 큰 피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정당하게 들려지지 않을 때 그 길은 곧 망하는 길과 같습니다. 외적으로는 망하지 않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교회 건물이 크고, 또 화려하고, 많은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만약 하나님의 말씀다운 말씀이 들려지지 않는다면 영적 기갈이요, 망함인 것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10절을 보시면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하나님의 뜻을 알아감으로 결국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어디인가?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 그리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는데 있습니다. 앞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에 대해 말씀 밖으로 넘어갈 수 없다고 말씀드렸는데, 하나님의 뜻을 알아감으로 우리의 방향이 이러한 방향이라면 말씀 안에 있는 모든 내용도 사실 다르지 않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과 복음으로 대표되는 이 신구약의 말씀을 주신 이유는 무엇인가? 10절 말씀과 동일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주를 기쁘시게 하는 데 있고, 또한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때문에 성경을 통해 확인되지 않는 모든 방식과 방법은 성도의 것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성경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이상 그것은 선한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미국교회들 가운데 구도자 예배라 하여 새로 나온 사람들에게 복음을 좀 더 쉽게 접하게 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들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드라마도 보여주고, 영화도 보여주는 등 뭔가 좀 더 접근하기 쉬운 방법으로 불신자들에게 접근하고자 다양한 방법들을 시도한다고 합니다. 이런 방식들이 한국에까지 들어와 전도 축제나 새생명 축제를 할 때면 그런 미디어를 사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말씀 사역자가 아닌 자를 불러 간증을 하기도 하는 걸 보게 됩니다. 말씀이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생 경험을 통해 뭔가 감동을 주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복음을 좀 더 쉽게 증거한다고 하는데, 과연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이 맞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다 착각입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방식이 아닙니다. 그런데 누가 앞서 행하느냐? 목사가 행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물론 그들의 마음은 할 수만 있다면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열심도 있을 것이고, 많은 고민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보다 더한 열심은 베드로의 열심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음과 부활에 대해 처음으로 말씀하실 때 베드로가 뭐라고 그랬습니까?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17:22) 선생님을 위한 마음, 주님을 위한 마음, 진실된 마음으로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너머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17:23) 그런데 그 일을 교회들이 앞서 하고 있습니다. 저도 듣기만 들었는데 어떤 교회는 주일 예배 시간에 영화를 틀어주면서 그 안에서 기독교적인 내용을 설명한다고 합니다. 과연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방식인가?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배를 위해 한 날을 따로 구별시켜 두신 하나님의 뜻과는 달리 주일성수의 개념도 성경이 말하는 바와 너무 멀어진 오늘날 시대를 보게 됩니다. 저 때만 해도 주일학교 교육현장에서 얼마나 주일성수를 많이 가르쳐주시던지, 제가 고신측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는데 주일에는 사먹는 것도 금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무조건 사먹지 말라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제가 부모님을 통해 배울 땐 적어도 토요일 미리 주일을 준비하는 정신으로 그렇게 말씀하셨던 기억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이렇게 주일을 준비하는 마음도 덜하고, 주일날만 해도 주일오전 예배로 끝내는 성도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온종일 주일성수라는 개념이 없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단지 주일성수 뿐만이 아닙니다. 율법의 요약이라 할 수 있는 십계명 자체만 보더라도 우리가 얼마나 주께 합당히 행하지 못하고 있는지 잘 드러납니다. 하나님만이 참 신임을 알지만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다른 신과 더불어 섬깁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고는 언제나 물질과 맞물려서 생각할 때가 많지, 하나님과 맞물려서 생각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것을 보게 됩니다. 탐심이 곧 우상숭배라고 하는데, 우리 속에 탐심은 얼마나 많습니까?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맺는 것이라고는 성령의 열매와 멀 때가 많은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골로새 지역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당시만 해도 그렇습니다. 골로새서의 배경을 보면 당시 거짓 선생들이 들어와 헛된 가르침을 가르치게 되었고, 그 결과 성경이 요구하지 않는 방식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록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골로새서 2 8을 보시면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는 말씀이 있는데, 거짓 선생들의 경우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오히려 사람의 전통을 세워 그것을 따르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16절과 17을 보시면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그러니까 구약의 절기들은 다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그림자와도 같은 것입니다. 실체가 나타난 이상 그것은 다 폐지되는 성격으로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실체를 붙들지 않고 그림자를 붙들고 있었던 것이 거짓 선생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때문에 바울은 지금 골로새 지역의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을 아는 데 있어 저들이 채워지게 하시고, 그래서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그리고 모든 선한 일에 있어 열매를 맺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성도는 철저히 말씀에만 매인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오직 성경입니다.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하는 모든 것이 말씀으로부터, 말씀 안에서, 말씀과 함께, 말씀을 통해서, 말씀을 향하여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자리가 있는 겁니다. 물론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기질과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이 여러분에게 맞춰지는 게 아니라 우리가 성경에 맞춰야 합니다. 혹 우리 기질과 맞지 않고 우리 성품과 맞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의 기질을 바꾸면 바꾸었지 성경을 우리의 아이디어로 바꿀 순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사고방식은 성경 아래 있어야지, 오늘날 말하는 것처럼 색다른 아이디어, 획기적인 방법 이런 것에 우리의 마음이 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로지 성경이 명하고 있는 그 자리만을 고집해야 할 자가 바로 성도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리로 나아가면서 모든 일에 선한 열매를 맺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특히 오늘 본문 10절 하반부에 보면 다시금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고 해 달라고 기도하는데, 굳이 구별하자면 앞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달라는 기도이고, 여기서는 하나님 자신에 대해 더 깊이 알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바로 하나님 자신과 그분의 속성에 대한 지식입니다. 물론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속성,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보다는 좀 더 깊은 하나님 지식을 요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11절을 보시면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바울은 주께 합당히 행하여 주를 기쁘시게 그리고 모든 일에 선한 열매가 맺히길 기도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성도가 연약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맨 처음에도 말씀드렸지만 이미 기도 자체가 우리는 부족한 자요, 연약한 자라는 걸 전제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아야 할 자로서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지금 여기서 기도하는 내용이 그것입니다. 주께 합당히 행하여 주를 기뻐시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또한 선한 열매가 맺히길 기도하지만 기도한다는 것 자체로서 이미 부족함과 연약함이 있다는 걸 인정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길 원하는데, 그 능력을 덧입기 위해 무엇이 전제로 있어야 하느냐?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는 그 힘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하면 하나님의 영광과 맞물러 있을 때 그것이 곧 능력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일치하지 않는 것은 결코 능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부합되는 것만이 능력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영광과 맞물려 있는 것은 뭐냐?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의 영광과 맞물려 있는 것은 뭔가? 혹 창조는 아닌가? 왜냐하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것만큼 큰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기적의 역사인가? 기적을 생각하면 당연히 능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만물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은 드러납니다. 기적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의 최고 내용은 바로 십자가로 알리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7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에 앞서 대제사장적 기도를 하시는데, 1에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쉽게 말하면 이제 십자가를 져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는데, 그 십자가가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란 겁니다. 동시에 그 일이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일이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창조의 역사, 그리고 좀 더 확장해서 보자면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이 말하는 기적과 은사와 같은 신비적인 일에만 하나님의 능력이 있는 게 아닙니다.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 죽을병에서 낫게 하시는 것, 그리고 그런 은사를 가지고 있다면 얼마나 능력이 큰 것이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하나님의 능력의 절정을 복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것, 그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신 것, 그래서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말했던 겁니다(고전1:18). 물론 창조주나 구속주나 동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대상과 관련하여 말씀하실 때 그 영광의 절정은 어디에 있느냐?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다고 알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적지 않은 교회들이 여기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11절 하반부에 나오는 것처럼 십자가의 능력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러야 하는데, 십자가는 없고 영광만을 취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그 길을 걷고자 합니다. 예수 믿으면 고난이 올 수밖에 없고, 그러한 고난조차 주께서 주시는 힘으로 능히 이겨내는 자가 성도인데, 복음을 마치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이나 되는 것처럼 그렇게 잘못 인식하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 부유해지고, 예수 믿으면 건강해지는 등 이런 식으로 잘못 이해되고 있기도 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채워져야 할 능력은 외적인 힘이 아닙니다. 강한 바람, 지진, 불과 같은 게 아닙니다. 엘리야 시대 때 강한 바람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아니 계셨으며, 이후 지진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아니 계셨으며, 지진 이후 불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아니 계셨습니다. 그럼 어디에 계셨는가? 세미한 소리 가운데 계셨습니다. 예수 믿어 축복 받았다, 십일조를 많이 낸다는 것은 결코 능력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참된 말씀이 있는 곳,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자리, 거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음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때론 십자가를 지기에 앞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던 것처럼 이 잔을 옮겨 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펼쳐지는 자리, 그래서 힘들고 어려울 수 있지만 주의 뜻이기 때문에 능히 오래 참고 견디는 그 자리, 그것도 기쁨으로 감당하는 그 자리가 우리의 능력인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기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자리로 우리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기도를 마무리 합니다. 12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결국 이런 방향으로 나아갈 때 성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해 두신 기업의 부분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어둠이 아닌 빛 가운데서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는 겁니다.

무엇보다 12절 마지막 부분에 있는 표현을 주목하셔야 되는데, 여기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쉽게 말해 지금 바울이 이 전반적인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은 골로새 지역의 성도들을 위해서입니다. 그 기도를 누구에게 하느냐?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저들을 위해 기도할 때 9절 이하 12절의 내용을 위해 기도하지만 결국 어디에 초점이 있느냐 하면 저들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길 원하면서 이런 기도를 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 혼자 이런 사고를 가지길 원하지 않고 골로새 지역에 있는 모든 성도들 역시 동일한 신앙의 내용을 가지길 원하면서 이 편지를 저들에게 써 보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표현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면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아버지께 감사하기를 원한다고 말하지 않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한다는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기도의 내용을 통해 저들도 하나님께 감사하기를 원하지만, 궁극적으로 이 문제 역시 누구에게 달려 있느냐? 바로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그 기도의 내용대로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십사 그렇게 기도를 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간혹 이런 착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감사의 내용을 주시면 우리는 능히 감사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표현으로 하자면 감사의 내용이 주어질 때 감사하는 것조차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하게 하시지 않으면 할 수 없습니다. 감사의 내용이 있다고 해서 감사할 수 있는 마음과 힘이 우리로부터 나오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적으로 좀 좋은 일이 있게 되면 누구나 감사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성도라면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감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내용과 함께 생각해 보자면, 예를 들어 12절 바로 앞에 있는 11절만 생각해 봐도 감사한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11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그러니까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감사하게 하지 않고는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견딘다, 참는다고 할 때 당연히 고난이 동반되는데, 그걸 감사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때문에 바울은 9절 이하 12절의 내용으로 저들이 감사하길 원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조차 하나님께 달려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부분인 것입니다. 그만큼 지금 바울은 철저히 하나님을 주체로 생각하여 이 편지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감사할만한 내용이 있지만 그런 내용조차 내 힘이 아니며, 내 열심도 아니라는 것, 그래서 결코 나를 자랑할 수 있는 그런 내용이 아닌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그의 기도를 통해 여기까지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할 때 이런 전반적인 내용을 염두해 두시면서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비록 받았다 할지라도 여전히 부족한 자라는 것, 아니 실제로는 받은 것조차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누리고 있다는 것, 나아가 받았지만 여전히 더 받아야 할 자로 있다는 것, 그러나 그 받은 것이 세상이 보기에는 감사할만한 것이 아닐지라도 하나님께서 성도를 향하여 진정으로 주고자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성도들이 이것으로 감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기도 가운데 있어야 할 중요한 자세인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골로새 지역을 향하여 기도한 내용은 모든 교회가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모든 성도가 동일하게 받아야 할 내용이요, 실제로 우리가 구해야 할 기도인 것입니다. 무엇보다 한 말씀, 한 말씀 이 기도를 누구에게 올리고 있느냐를 주의하여 보시길 바랍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맨 처음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만이 열쇠를 쥐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을 통하여 비록 신앙생활을 잘하고 계시더라도 여전히 부족하고 연약한 자인 줄 아시고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시되,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게 해 달라고,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주를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되,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또한 혹 고난과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이 있는 성도가 괴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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