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골로새서 1장 13-14절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
바울은 골로새 지역의 성도들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참된 믿음과 모든 성도들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에게는 하늘에 대한 소망도 있었는데, 이 모든 것이 무엇을 방편으로 주신 것이냐 할 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인하여 주어졌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가질 수 있었지만,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 “듣는 자에게 원인이 있어서냐?” 할 때는 그렇지 않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한 예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지만(롬10:17) 이미 말씀드린 바 있는 것처럼 들을 만한 능력으로 말미암는 것도 아니요, 듣는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루터). 실제로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했다는 것은 뭐냐? 하나님이 궁극적인 원인자로 있다는 걸 알리는 내용입니다. 믿음을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요, 사랑을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요, 소망을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골로새 지역의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칭찬받을만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더 이상 받지 않아도 될 만큼 완성된 모습으로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기도했느냐?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앎으로 하나님 기쁘시고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그리고 때로는 어려움도 있지만 그 가운데서 성령의 열매가 맺히길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자가 되기를 바랐는가? 빛 가운데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위해 누구에게 기도하느냐?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때문에 이러한 것들조차 누구의 주권 아래 있느냐?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내가 스스로 취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셔야지만 받을 수 있는 것, 그래서 성도는 기도하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오시면 13절과 1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 여기서 ‘그’란 12절 마지막에 있는 ‘아버지’를 받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아버지라고 할 때 모든 피조물의 근원으로서의 아버지를 생각한다면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속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6:9)라고 부를 때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단지 성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 즉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는 좀 주의해야 되는데(JS 참조), 왜냐하면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라는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좀 쉽게 설명하자면 12절에 나오는 아버지를 피조물의 근원으로서의 아버지, 즉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이해를 한다고 한다면 성부뿐만 아니라 성자와 성령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조 속에서 그런 이해가 가능하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성부의 아들로서 성자를 말하지, 성자의 아들 성자 혹은 성령의 아들 성자로 표현한 곳이 한 군데도 없습니다. 때문에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라고 할 때 위격 상호간의 관계를 따라 성부의 아들 성자 그리고 성자의 아버지 성부로서 표현되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 ‘그’란 12절의 아버지를 받는 말이지만, 이 때 아버지는 피조물의 근원으로서의 아버지가 아니라 위격 상호간의 관계를 따라서 성자의 아버지인 성부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가?”가 오늘 본문 13절과 14절인 겁니다.
물론 오늘 본문 13절과 14절을 보면 성부의 일하심과 관련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하여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게 되었다. 그러면 그 일이 성부만의 일하심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부 성자 성령은 분리될 수 없고, 그분의 역사도 분리되지 않은 채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비록 여기에서 성부의 일하심으로서 소개가 되고 있긴 하지만, 성부만의 독특한 사역이 아니라 성자와 성령과 더불어 일하신 결과를 여기에서 소개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럼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을 하셨는가? 1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우리는 어떤 자였는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본래 흑암의 권세 아래 있던 자였습니다. 에베소서 2장 2절과 3절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그러니까 우리의 주인은 우리 자신이 아니었던 겁니다. 비록 외형은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기 때문에, 그리고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기 때문에 마치 우리가 우리의 주인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우리는 누구의 소유였는가?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를 따르는 죄의 종이였던 겁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보면 12절에서도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하시는데, 본래 우리는 어떤 자였는가? 빛 가운데 거하는 자들이 아니라 어둠 가운데 거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어둠 가운데 거하기 때문에 볼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디를 향해 가야 할지 모르는 자들이었습니다. 세상적인 말로 하자면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사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뚜렷한 목적 없이 헤매는 자들이 바로 우리였던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8절은 이것보다 좀 더 강한 어조로 말하는데, 거기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어둠 가운데 거하는 자가 아니라 어둠 자체인 것입니다. 너무 어두워서 보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어둠 자체이기 때문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는 자 그래서 열매라고 하면 어떤 열매만 맺느냐?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열매만을 맺는 자였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으로 하자면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할 정도로(요1:5) 철저히 그리고 심각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 우리의 모습이었던 겁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 보면 흑암의 권세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우리로서는 그 권세를 끊을 수가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아니 그런 권세 아래 있는 줄도 모르는 자들이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부패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흑암의 권세가 우리를 붙들고 있는지도 모르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그 권세가 얼마나 강력한지도 모르는 자였습니다.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어떤 이들은 죄의 권세, 흑암의 권세에 대하여 깨달은 바가 있어 그 스스로 그 권세를 끊고자 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굳이 기독교 안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들 속에서는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내가 이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보겠다.” 그래서 소위 도를 닦는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런 수행을 쌓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스스로 죄의 권세, 흑암의 권세를 끊어낼 수 있었는가? 사람들은 그렇다고 생각할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성경은 결코 죄의 권세, 흑암의 권세를 끊어낼 자가 아무도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강력한 것이 죄의 권세, 흑암의 권세인 것입니다. 로마서 7장 19절 이하에 보면 믿음 생활을 하고 있는 바울조차 어떤 고백을 하느냐?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롬7:19-21) 그러면서 우리가 잘 아는 고백을 합니다. 24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런데 그런 권세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신 분이 누구시냐? 하나님께서 건져주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인하여 건져주신 것입니다(엡2:3b-4).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한 함께 일으켜 주신 것입니다(엡2:5-6a). 비록 믿음 생활을 하고 있는 신자에게도 여전히 죄의 본성이 남아 있어 죄를 짓는 것은 사실이지만, 더 이상 흑암의 권세 아래 있는 자가 아니라, 거기서부터 자유를 얻은 자로 우리를 건져주셨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신지를 확인하셔야 합니다. 이미 앞선 말씀들을 통해서도 우리가 확인했지만 우리로부터 나오는 모든 선한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들입니다. 믿음도 하나님의 것이요, 사랑도 하나님의 것이요, 소망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할 때도 이미 기도 자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무엇을 행하셨는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게 건져주셨습니다. 인간의 역사를 통틀어 살펴봐도 이 권세를 이길 힘이 인간 자신에게는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그 권세를 깨뜨리시고 우리에게 죄의 종이 아니라 죄에서 자유함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능력과 흑암의 권세가 어떤 비등한 힘 겨루기 끝에 하나님이 승리했다는 것은 결코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언제나 흑암의 권세보다 월등하게 그 능력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아니 비교 자체가 되지 않습니다. 욥기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사탄이 하나님의 뜻 없이 뭐 하나 할 수 있는가 할 때 결코 그럴 수 없는 존재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경성케 하기 위해 흑암의 권세가 하나님을 대항할 뿐 아니라, 또한 그의 백성을 넘어뜨리기 위해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두루 찾는다고 말하기 때문에(벧전5:8)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보다 클 수 있는가? 없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능력과 비교조차 할 수 없습니다. 비록 인간은 흑암의 권세 아래 놓여 그 스스로는 그 권세를 깨뜨리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능력과 지혜로 흑암의 권세를 깨뜨리고 우리를 건져주신 것입니다. 이것보다 놀라운 은혜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본문은 단순히 흑암의 권세를 끊고 우리를 건져주셨다고만 말하지 않는다는 걸 더욱 중점적으로 보셔야 합니다. 흑암의 권세를 끊고 우리를 건져주셨다고만 말하는 게 아니라 우리를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흑암의 권세에서 왜 우리를 건져주셨는가? 우리로 하여금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시기 위해서입니다. 조금 전에 에베소서 2장 부분을 인용하면서 말씀드렸지만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또한 함께 일으켜 주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라 덧붙여 말씀하시는 것이 있는데 이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엡2:6b).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혀진 존재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이 땅에 있지만 우리는 이미 하늘에 앉혀진 존재로서 이 땅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14절에서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다고 말씀하시고 난 뒤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창조주로서의 설명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의 머리로서의 설명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늘에 앉혀진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그분과 우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함께 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표현을 반복해서 쓰느냐? 에베소서 2장 5절과 6절을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반복되는 내용이 뭐냐 하면 ‘함께’입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누구와 함께 살리셨느냐? 그리스도와 함께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와 함께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뭐냐? 그리스도와 우리를 연합시키셨습니다.
지금 바울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설명하면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게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할 때 이런 내용도 들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연합시키사 그분으로 말미암아 죄로 죽은 우리를 살리시고, 또한 일으키시고, 하늘에 앉은 자로서 이 땅을 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까지 얻은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흑암의 권세가 미치지 못하는 곳, 어떤 죄의 유혹도 없는 곳, 오로지 그리스도의 통치만이 가득한 곳, 그곳으로 옮겨놓으신 것입니다. 때문에 흑암의 권세가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는 자리까지 이미 우리는 가 있는 존재인 겁니다.
조금 전에 로마서 7장에 대해서 언급했지만 우리의 죄악된 본성은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뭐냐? 흑암의 권세가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두루 삼킬 자를 찾는 것은 사실이지만(벧전5:8)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의 은총을 얻은 이상 유혹만 할뿐 완전히 넘어뜨리는 일은 결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흑암의 권세가 뛰어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사탄이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말도 과한 말입니다. 대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서는 뭐 하나 할 수도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대적이라는 말도 우리 편에서 좀 더 쉽게 이해하도록 하는 말일 뿐입니다. 그런 존재가 하나님의 능력을 넘어 우리를 삼키는 일이 있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5장에서는 어떤 말까지 하느냐? 18절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우리가 그런 존재인 것입니다. 흑암의 권세에서 놓임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다는 것은 더 이상 흑암의 권세 아래 있는 자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비록 이 땅에서 죄를 짓고 살지만 죄를 짓고 산다고 해서 우리가 흑암의 권세 아래 있는 자는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아셔야 됩니다. 성경이 이미 그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 때문에 더 이상 흑암의 권세 아래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흑암의 권세 아래 있지 않다는 것으로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단시 흑암의 권세 아래 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건져내는 것만 목표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어디에 우리를 앉혀 놓으셨느냐?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곳이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에덴 동산을 허락하셨습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 아담과 하와가 생활했던 곳, 어떤 면에서 피조물의 공격성도 없는 곳,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아름답고 살기좋은 곳이 그곳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도 영원한 안식처는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죄로 말미암아 그곳에서 쫓겨났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곳이 영원한 안식처였다면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난 뒤 에덴으로 돌려보내겠다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그곳이 영원한 안식처는 아니란 소리입니다.
가나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나라 중 이스라엘을 먼저 부르셨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으로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건져내신 사건은 마치 오늘 말씀처럼 흑암의 권세로부터 놓임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영적 교훈을 역사적인 사실로서 보여주신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출애굽하게 된 것은 단지 출애굽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출애굽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바로 가나안까지 가도록 하기 위해 출애굽시키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나안이 최종적인 안식처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들어가서도 여전히 싸움이 있고 해야 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가나안에서 쫓겨나도록 하시는 역사도 있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가나안도 역시 영원한 안식처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안식처는 어디인가?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입니다. 거기가 최종적인 자리요, 영원한 안식처이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우리는 그곳을 향해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흑암의 권세가 지배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고, 그러한 삶 가운데 구별된 인생으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미 바울의 기도의 내용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고, 그 뜻을 따르면서 주 앞에서 합당하게 행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선한 열매가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우리 스스로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러한 삶을 살도록 구해야 합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분명 고난과 고통의 때가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모든 견딤과 오래 참으로서 살아야 할 자들이 바로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이걸 한마디로 뭐라고 하느냐? 빛 된 삶이라 하는 겁니다. 골로새서 1장 12절에 있는 것처럼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도록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지만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마땅한 바가 바로 이 방향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오물 속에서 건져냈으면 씻고 또 씻고 깨끗함을 유지해야 되는데, 우리의 실상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여전히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행하게 됩니다. 문제는 육체와 마음에 원하는 바가 성령을 통해 주시는 마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시는 마음이 아니라 세상 욕심이요, 우리 육체의 욕심이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흑암의 권세로부터 건져내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의 모든 시각은 우리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 계신 그곳에 있는 것이지, 결코 이 땅에 있지 않다는 걸 반드시 기억하셔야 됩니다.
오늘 본문 13절에서 한 가지를 더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그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실 때 그냥 그의 아들의 나라라고 하지 않고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라고 표현하는 부분입니다. 이 사랑의 아들이라는 말은 복음서에서도 하나님께서 직접 음성으로서 들려주신 말이기도 한데, 먼저 마태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난 뒤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 말씀하셨습니다. 또 마태복음 17장에서 예수님께서 변형되신 사건이 있었는데, 거기서도 동일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17:5) 왜 성부께서는 성자이신 예수님에 대하여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는가?
일차적으로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가 우리와 같은 그런 관계는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비록 영원 전에 택하셔서 사랑을 주실 대상이긴 하셨지만, 그러나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부와 같은 신성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성경 계시를 따라 한 분 하나님 안에 삼위로 존재한다고 할 때 위격 상호간의 관계를 따라 성부께서 성자를 낳으셨기 때문에 사랑할 수밖에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심지어 그의 사역만 생각해봐도 하나님의 모든 뜻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아가 칼빈의 주석을 통해서도 생각할 수 있는 바가 있는데, 칼빈은 이런 설명을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라고 말한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의 영이 만족으로 누리고, 또 그를 통해서 다른 모든 사람들이 사랑을 받기 때문이다.” 제 이해가 틀리지 않다면 단지 하나님과의 관계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의 관계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는데,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말함으로 그분을 통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사랑을 받을 수 없다는 것까지 말씀하고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다고 알리고 있는 부분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마련하신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다른 어떤 길도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나아오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겠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7장에서는 구약을 대표하는 두 사람, 모세와 엘리야가 타나났지만 그들은 다 물러갔던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느냐?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비록 율법의 대표인 모세가 나왔고, 또한 선지자의 대표로서 엘리야가 나왔지만 그들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모든 핵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그의 음성을 통해 들려주셨던 것입니다. 때문에 구원을 누구를 통해서만 가능하냐?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인 것입니다.
바로 그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흑암의 권세 아래에서 우리를 건지셨는가? 어떻게 구원을 이루셨는가? 구원을 위해 가장 먼저 하신 것이 무엇인가?” 했을 때 오늘 본문 1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포괄적으로 이해하자면 하나님께서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시기 위해 그의 아들도 아끼지 아니하셨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로마서의 표현으로 하자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 이겁니다. 아들도 주셨는데 아들의 나라를 주는 것은 무엇이 아깝겠는가?
특히 ‘구속’이라는 말은 죄를 사하기 위해 그 죄 값을 지불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공짜가 아니라 우리의 죄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누구를 통해 그렇게 하셨는가? 죄 없으신 예수님을 내어주심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 구속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 사람을 얻게 되었습니다. 본래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의 값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죄의 값은 죽음입니다. 사망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대신하여 누가 죽으셨는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겁니다. 신성으로는 죽으실 수 없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지시되, 죄는 없으신 상태로(히4:15)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그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자유함은 이처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의한 결과라는 걸 잊지 마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원한 지옥 형벌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흑암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시기 위하여 그의 아들까지 아끼지 않고 주신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이 자리에 와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보다 감사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비록 두 절밖에 되지 않는 짧은 구절이지만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의 전반적인 것을 반드시 기억하셔야 합니다. 본래 우리의 상태는 어떠했는가? 그런 우리를 어떤 자리까지 올려놓으셨는가? 그리고 그 일을 위해 누구를 희생하셨는가?
여러분, 우리의 본래 상태는 흑암의 권세 아래 있는 자였습니다. 그런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하여 견져 주셨습니다. 본래 죄 값을 우리가 지불해야 하지만, 그것으로는 우리가 살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육신을 입고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 값을 친히 지시고 죽으셨습니다. 죄의 값을 지불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졌습니다. 그럼 거기서 끝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의 사랑의 아들이 나라로 옮겨주셨습니다. 더 이상 죄의 권세가 미치지 못하는 곳, 더 이상 흑암의 권세가 우리를 위협하지 못하는 것으로 옮겨 놓으신 것입니다. 때문에 이 땅을 살면서 구원의 문제로 걱정할 필요가 있는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여전히 우리가 이 땅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죄의 본성을 따라 살 수밖에 없는 자로 있다는 인식을 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죄와의 싸움을 싸우면서 살아가야 할 자로 있다는 것은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놓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나아가는 방향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에베소서는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고 말하는 것이고(엡1:4), 베드로후서에서는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개역한글: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1:4) 말씀하시는 겁니다.
부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더욱 살피시고, 또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이 모든 일에 대하여 무한히 감사하시되, 거기에 우리가 한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줄 아시고 더욱 겸손히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