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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140202설교 / 골로새서1장15-17절 / 하나님의형상이신그리스도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4.02.02|조회수429 목록 댓글 1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골로새서 115-17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

 

지난주까지 살핀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바울은 골로새 지역의 성도들의 신앙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신앙에 대해 칭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감사를 통해 그런 그들의 신앙의 실질적인 주체가 하나님인 것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신앙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였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신앙의 칭찬 받을만한 신앙이었지만 여전히 부족함이 있다는 것을 기도의 내용으로서 드러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그것을 이루실 실질적인 주체가 하나님인 것을 드러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은 신앙의 모든 것이 하나님만이 주체라는 것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지난 시간에 우리는 바울이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에 대해 설명하면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는 부분을 살폈습니다. 비록 짧은 구절이지만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떤 자리에서 어떤 자리로 옮겨졌는가 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 모든 일의 주체가 바로 하나님 홀로 행하신 역사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행하실 때 누구를 통해서 이 일을 이루셨느냐?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워 이루셨습니다. 14절에 있는 것처럼 그 아들 안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또한 그 아들 안에서 모든 것을 이루시는 방식입니다. 그럼 도대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 15절을 보시면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두 가지로 표현하는 걸 보게 됩니다. 하나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표현과, 다른 하나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라는 표현입니다.

 

먼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에 대해 살펴보자면,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이란 하나님의 존재가 영이시기 때문에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의미로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 18에도 보면 동일한 의미에서 이렇게 말하는 걸 보게 됩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처럼 육체를 가지고 계신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데, 어떻게 나타내시느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내십니다. 달리 표현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본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이 구절의 의미를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나타나시고 다른 방도로는 보이지 아니하신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때 주의해야 하는 것은 형상이라는 말을 통해 마치 하나님의 본질이 나타난 것처럼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분명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알 수 있지만, 형상이라는 말이 하나님의 본질 자체를 그대로 나타낸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형상이 본질 자체를 그대로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면 인간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표현을 쓰는데(1:27, 고전11:7), 인간이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진 존재라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성경이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존재이십니다. 그분은 스스로 계신 분이시고, 우리는 그의 피조물일 뿐입니다. 때문에 형상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말이 아니라, 우리의 이해를 위해 사용되고 있는 말이라고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때 인간이 지음을 받았을 때 부여받은 그 하나님의 형상’(1:27)과는 전혀 다른 의미라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기 때문입니다(1:3). 그래서 성경은 어떤 표현까지 하느냐? 요한복음 1 14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매튜헨리) 그런 의미에서 지금 바울은 우리와 같은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형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칼빈의 표현으로 하자면 피조물의 공유적 속성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완전하신 의와 인자, 지혜와 능력 등을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형상이라고 하니까 인간에게 돌리고 있는 그런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가지신 그 영광을 동일하게 가지셨다는 의미에서의 형상인 겁니다.

요약해서 정리하자면(칼빈) 하나님 자신, 하나님의 본래적인 엄위와 영광은 육신적인 눈으로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사고력을 통해서는 볼 수가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에게 나타내실 때 우리는 볼 수 있는데, 그때 보는 것도 어떤 형태로 보는 것과 같으냐? 마치 거울로 보는 것과 같이 그를 바라볼 뿐입니다. 본질을 보는 게 아니라는 것이요, 실체로서 보는 게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하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의와 인자를, 그리고 지혜와 능력을,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에게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 하나님을 보고 알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골로새서 23절은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말씀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우리가 매우 주의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형상에 관한 문제입니다. 특히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과 관련해 개혁주의 안에서의 해석을 깊이 새기셔야 합니다. 출애굽기 20 4절에서 6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이 두 번째 계명에 대한 해석을 구체적으로 다 살피지는 않겠지만,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은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위로 하늘에 있는 것, 그리고 아래로 땅에 있는 것, 또한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어선 안 되고, 그것들에게 절하거나 섬겨서는 안 된다는 명령입니다. 거짓된 신 자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좀 더 교묘한 형태가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을 형상화하여 예배하는 형태입니다. 그러니까 거짓된 신이 아니라 참되신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것에 대한 문제인데, 이 두 번째 계명은 그것도 거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 만들거나 그 형상에게 예배할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형태로 형상화한다는 것은 뭐냐? 하나님에 관해 거짓된 개념을 심어주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분의 영광을 어둡게 하고, 더럽히고, 파괴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런 형상들은 거짓된 신앙과 거짓된 확신과 거짓된 예배로 빠지게 만듭니다. 참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일반 교회들도 수긍을 하지만 인성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 괜찮은 것처럼 생각한다는 데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 그것 자체도 생각하지 못하는 교회들이 많아서 교회 안에, 그리고 가정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라고 해서 그림이나 또 다른 형태의 모양으로 걸려 있는 것들이 있지만, 2계명은 그것까지 다 거절되고 있다는 것이 개혁교회의 정당한 이해요, 말씀 해석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으로 이해하자면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나타낸다는 의미에서의 성육신이기 때문에 인성을 취하셨지만 개혁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까지도 거절했던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나타났기 때문에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볼 수 있는 형태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그려도 괜찮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나타났지만 나타난 의미가 무엇이냐 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이신 것입니다. 나타난 것, 보이신 것보다 더 중요한 게 뭐냐 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입니다(JS).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자면 비록 인성을 취하셔서 낮아지신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그분은 영광의 주님이십니다(고전2:8). 하나님의 형상이지만 우리와 같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요 그 본체의 형상이십니다(1:3).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분의 영광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입니다(1:14). 그렇기 때문에 제2계명에 대한 개혁교회의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를 형상화하는 것, 그리고 그림이나 다른 형태로 보이는 것을 거절한다는 입장입니다. 오늘날 보면 각종 성화에 아이들을 위해서는 그림 성경이라고 해서 예수님을 그려놓고 있지만, 그것은 다 하나님의 말씀이 명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아셔야 합니다. 당연히 그런 것들을 다 없애는 것이 신앙에 합당한 모습입니다.

개혁교회의 문답 가운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라는 게 있는데, 2계명을 해석하는 부분에서 이런 질문이 있습니다. 98 그렇다면 형상들을 평신도들을 위한 책처럼 여겨서 교회에서 허용할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거기에 대한 답변이 이것입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지혜로운 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말 못하는 형상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의 말씀의 살아 있는 선포를 통해서 가르침 받기를 원하십니다.” 왜 이런 질문이 나오게 되었는가? 오늘날도 그렇지만 당시 가톨릭에서는 형상에 대한 숭배가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형상만이 아니라 소위 성인들의 형상도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들은 뭐라고 말했느냐? 경배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평신도들을 위한 책처럼 여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교육용이란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에델베르크 요리문답 98문의 답변처럼 하나님보다 더 지혜로운 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금하시고 계시다면 그것이 가장 지혜로운 방식이라고 인정하셔야 됩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이렇게 하면 더 쉬운 방법처럼 보이고, 좀 더 성도들에게 접근하기 쉬운 것처럼 보이는 것일 수 있지만 그것은 우리의 방법이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2계명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식에 있어서 하나님이 명하지 않는 방식의 예배는 다 거절되는 것입니다. 소위 자의적 예배(will-worship)라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예배규범에 인간이 임의적으로 더하거나 빼는 것,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지 않으신 어떤 종교적 예배를 고안하여 미혹하거나 명령, 또는 사용하는 것은 다 불법인 것입니다. 가톨릭의 미사가 그러하고, 고해성사가 그러하고, 마리아숭배, 천사숭배, 성인(聖人)숭배가 그러합니다. 수도원생활, 심지어 오늘날 교회들이 앞장 서서 행하고 있는 성지순례 등도 거절되어야 합니다. 구약의 의식법을 행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림자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오셨기 때문입니다(합신 총회 공과-소요리문답2).

 

다시 오늘 본문으로 오시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했을 때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볼 수 있는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보고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시대뿐만 아니라 구약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 시대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럼 그들은 하나님을 보지 못한 자들인가? 하나님을 알지 못한 자들인가?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직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의 영이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은 보지 않는 자들에게 믿음을 주셔서 마치 그리스도를 보는 것과 동일하게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요한복음 20에 보면 도마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의심할 때 그 앞에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이 이것이었습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0:27) 그리고 덧붙어 말씀하신 것이 이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20:29) 비록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보지 않을 수 있지만, 그러나 믿음의 방식으로서 예수님을 보는 자들이 복된 자인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기 전이었지만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는 성령께서 무엇을 주셨느냐? 믿음을 주셨습니다. 믿음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보게 만들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본다고 말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믿음을 어떻게 정의하기까지 하느냐? 히브리서 11 1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비록 소망하는 것이고, 그래서 지금 당장 보이지는 않지만 그것이 실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 그것이 증거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믿음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에 살지 않았던 모든 자들, 예를 들어 구약이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이후의 모든 사람들은 믿음의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다고 말할 수 있다는 걸 기억하셔야 됩니다. 아니 예수님 당시도 실제로 예수님을 보았다고 해서 하나님을 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셔야 하나님을 보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달리 말하면 신구약 통틀어 하나님께서는 믿음이라는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보게 하셨고, 그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본다,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때문에 지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비록 실재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는 못하지만, 또 본 것은 아니지만 그를 보고 있는 것과 같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그를 보는 것과 같이 우리는 분명한 확신을 가지는 것입니다. 또한 그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보는 자, 하나님을 아는 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이제 두 번째 내용을 보자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했을 때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로서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 보면 피조물보다 먼저 나셨다고 말하고 있는데, 피조물보다 먼저 나셨다고 해서 예수님을 피조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 역사 안에 보면 아리우스라는 이단이 있었는데, 그는 이런 표현 때문에 성자에 대하여 존재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 1만 봐도 분명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때문에 성부가 스스로 계시다면 성자께서도 스스로 계신 분이시고, 성부께서 영원 무한 불변하신 분으로 계시다면 성자 역시 영원 무한 불변한 분으로 계십니다. 성부와 성자는 동일본질이십니다. 피조물인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6절에서는 어떤 말까지 하느냐 하면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라고 말합니다.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로서 말씀하고 있는가? 이런 표현 역시 형상이라는 말처럼 우리를 배려한 표현이요, 낮아져서 표현한 것일 뿐입니다. 특히 피조물보다 먼저 나셨다는 말은 성부와의 관계를 우리에게 알리고 있는 말로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누구신가 할 때 그분은 성부에게서 독생하신 분이라는 걸 의미하기 위해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존재하지 않은 때가 있었다 혹은 시간상으로 다른 피조물보다 먼저 창조된 그런 분이 아니라, 성부와의 관계에 있어 그분은 성부와 동일본질이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예수님을 소개할 때 그분은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피조물이 창조되기 전부터 존재하셨던 분, 먼저 나셨다고 말하기 때문에 나지 않을 때가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발생으로 계신 분, 그분이 바로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 오늘 본문 16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일단 여기 보면 하늘과 땅이라는 표현은 창조된 모든 만물에 대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 표현 안에는 어떤 것까지 다 포함되어 있느냐?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물질적인 세계뿐만 아니라 영적인 세계까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개역개정판에서는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이렇게 표현되어 있어 마치 이 땅에서 다스리는 자에 대한 표현처럼 보이지만, 개역한글 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물론 의미상으로는 다르지 않는 표현이지만 개혁자들의 대부분이 이것을 보이지 않는 것들, 즉 영적인 세상의 천사들로 이해하는 면이 있었습니다. 칼빈의 경우는 보좌들에 대해서만큼은 천사로 생각할 수 없고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엄위하신 처소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은 하지 않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뭐냐? 이 모든 것, 보이는 물질적인 세계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누가 창조하셨느냐? 성자께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표현하는 것이 다 그로 말미암고입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 3도 같은 의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어느 하나 그분으로 말미암아 지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창조가 되었다.

그럼 창조하신 목적은 무엇인가? 그를 위하여 창조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자신을 창조하신 자를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피조물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하면 자신을 창조하신 자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창조의 목적이 죄로 말미암아 가려졌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다면 이미 창조 자체를 통해서 우리의 모든 인생의 목적이 창조하신 자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하지만, 죄란 그런 목적을 잃어버리게 만들었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목적이 되지 못하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 무엇보다 자신의 영광을 위하는 방향으로 그 길을 옮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창조의 목적을 누구를 통해 회복시키시느냐?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받은 자들을 통해 회복시키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이후 말씀을 통해 나오는 것이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연결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구속의 목적도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셨는가? 결국에는 구속하신 자의 영광이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그러나 앞서 우리를 창조하셨다면 그 창조의 목적도 창조하신 자의 영광을 위함이라는 걸 기억하셔야 합니다. 때문에 창조주로부터 피조된 존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지 않는다면 그것보다 큰 죄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믿지 않는 자들은 바로 그런 죄가 그들에게 있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거부한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과 상관없는 길로 가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바로 죄의 길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17절에서는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고 말씀하시는데, 만물보다 먼저 계시다는 것은 15절 하반부 말씀에서 설명한 바가 같습니다. 피조물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표현일 뿐입니다. 피조물보다 선재하신 분, 먼저 계셨다고 말하기 때문에 계시지 않은 때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다고 말합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그분의 의해서 만물이 존재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질서를 유지하게 되는 것, 서로 충돌되거나 파괴되지 않는 것이 누구 때문이냐? 바로 창조주이신 그리스도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인가 할 때 창조주이신데, 그 창조의 성격 안에 무엇까지 들어 있느냐? 모든 만물에 대하여 다스리시는 것까지 들어 있습니다. 창조자요, 섭리자이신 겁니다.

 

다음 시간에도 예수님은 누구신가에 대해 살피겠지만, 지난 시간의 말씀과 함께 이해하자면 흑암의 권세 아래 있는 우리를 건져내기 위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로서 세우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어떤 분인가? 한 마디로 말해 창조주십니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 그러나 먼저 나셨다고 해서 나지 않은 때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계신 분! 그렇기 때문에 모든 만물이 누구로 말미암아 창조가 되었는가?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누구를 위해 이 땅에 오셨는가? 우리를 위해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것도 인성을 취하셔서 오셨습니다. 인성을 취하셔서 죽기까지 하신 겁니다. 바로 영원 전에 택하신 자기 백성들을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겠습니까? 실제로 로마서 8 32에서는 어떤 표현까지 하느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아들도 아끼지 않고 주셨기 때문에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준다는 것은 가치에 있어 아들 쪽에 그 가치가 더 크다는 의미입니다. 아니 실제로는 비교조차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핀 것처럼 예수님은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다스리시는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반면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준다고 할 때 그 모든 것은 결국 피조된 것을 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록 영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조차 피조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창조주와 피조물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이해를 따라 비교하자면 아들 쪽에 더 가치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들을 받았다면 다른 어떤 것도 아들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냐? 피조물에 목을 맵니다. 피조물에 목을 매되 이 땅에 것이 얼마나 우리 마음 가운데 크게 자리하는지 모릅니다. 창세기 151절로 하자면 하나님만이 지극히 큰 상급이시고, 하나님만이 지극히 큰 상급이시기 때문에 주어진 어떤 것도 주신 자보다 클 수 없는데, 우리는 그런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더란 것입니다. 아니 장차 우리가 받게 될 천국도 창조주 되신 그리스도보다 크지 않습니다. 천국의 가치는 다른 데 있는 게 아닙니다. 그곳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산다는 데 있지, 고통이 없고 아픔이 없고 죽음이 없다는 그런 것에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창조주 되신 주님과 함께 살아간다고 할 때 당연히 따라오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아들도 아끼지 않고 주셨다는 그 사실을 잊은 자처럼 그렇게 신앙생활을 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이 땅이 모든 것인 것처럼, 아니 좀 낫다면 천국이 모든 것인 것처럼!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것입니다. 이걸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길 가운데 여러 가지 일들을 만나게 되겠지만, 무엇만큼은 놓치지 마셔야 하는가?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고 내어 주셨다는 사실만큼은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런데 아들은 어떤 분이신가? 창조주라는 사실입니다. 창조주로서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친히 모든 만물을 만드시고, 다스리시지만 그들 가운데 일부를 위해 창조주이신 자신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그 일부가 누구냐? 바로 우리입니다. 영원 전에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창조의 목적대로 우리를 창조하신 분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를 구속하셨기 때문에 구속의 목적도 다르지 않다는 차원에서 본래 창조의 목적인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야 하는 것이 바로 성도의 삶의 방향인 것입니다. 이런 삶을 우리 모든 성도가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시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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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좋은군사 | 작성시간 21.08.27 자료 활용을 위해 퍼가기 허용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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