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골로새서 1장 18-20절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지난 시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인가 했을 때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부분을 살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볼 수 없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셨습니다. 물론 지금 우리 시대나 구약 시대 속에서는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고 또 볼 수 없지만, 믿음이라는 방식으로 마치 실제로 보는 것과 같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신다는 것까지 말씀을 드렸습니다.
나아가 예수님은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라는 것도 살폈습니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셨다고 말하기 때문에 나지 않은 때가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일본질로서의 독생자라는 의미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일본질이시기 때문에 그분은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 또한 어떤 일을 행하고 계시는가? 이 세상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고, 또한 그 만드신 모든 만물에 대하여 섭리하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만물에 대하여 주권적으로 통치하시는 분,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오늘 본문에서는 어떻게 소개가 되고 있느냐? 교회의 머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18절을 보시면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사실 앞선 본문에서 예수님은 모든 만물에 대하여 주권적으로 통치하시는 분이심을 분명 말했습니다. 때문에 교회 역시 통치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고 하는 말은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창조를 통하여 모든 만물이 창조하신 분의 통치 아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창조 후 죄로 말미암아 마치 하나님을 향하여 대적하는 문제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우리가 살폈지만 13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할 때 모든 인류는 태어날 때부터 누구의 권세 아래 태어나느냐 하면 흑암의 권세 아래 태어나는 것입니다. 흑암의 권세 아래 태어나기 때문에 누구의 통치권 아래 있느냐? 사탄의 통치권 아래 있습니다. 엄밀하게는 그때도 여전히 창조주의 통치권 아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과 상관없다는 차원에서 그리고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차원에서 창조주의 권세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의 권세 아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에 택하신 자들을 건져내고자 누구를 보내시느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세우시고, 그분의 모든 공로로 말미암아 죄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13절의 표현처럼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 놓으신 것입니다. 더 이상 죄의 권세 아래 있는 자가 아니라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의 권세 아래 있다는 의미에서 지금 성경은 무엇을 말하느냐?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겁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시기 때문에 교회는 그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머리요 교회는 그의 몸이기 때문에 교회는 누구의 명령만을 받느냐? 오직 그리스도의 명령만을 받는다는 차원에서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 시간에 창조의 목적에 대해 잠시 말씀을 드렸습니다. 창조의 목적은 무엇인가? 창조하신 분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창조하신 분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 그것이 창조의 목적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창조의 목적은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철저히 부패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니 이미 죄를 짓는 그 자리에서 그 마음의 성향이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생각하는 자로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느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7) 그러나 유혹이 있을 때 말씀을 가감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창3:3)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고 가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탄이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3:5) 말하자, 하나님과 같아지기 위하여 먹게 된 것이 선악과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하는 자가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는 마음을 가질 때, 비록 죄는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실질적인 첫 범죄의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마음의 성향은 이미 죄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 죄의 역사는 말할 수 없는 비참함으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에 대하여 잘 설명해 주는 것이 로마서 1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21절부터 보시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2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으로 우상화시킨 것이 죄의 비참함인 것입니다. 26절 이하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롬1:26-32) 인간의 비참함이란 이런 것입니다. 사형에 해당한다는 걸 알면서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고까지 하는 그런 비참한 처지까지 내려가게 된 것입니다. 흑암의 권세 아래 있다는 말은 바로 이렇게 살아가는 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창조의 목적을 잃어버린 자, 그래서 하나님을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21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자, 그리하여 하나님의 법이 아닌 것을 법으로 삼는 자, 하나님의 법과 위배되는 것을 법으로 삼는 자, 그가 바로 흑암의 권세 아래서 살아가는 자입니다. 자신을 창조하신 자의 통치와는 전혀 상관없이 사는 자, 그가 바로 흑암의 권세 아래서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를 누구를 통해 건져주셨느냐? 그리스도를 통해 건져주셨습니다. 죄의 권세를 끊어내셨고, 이제 누구의 통치를 받는 자로 세우셨느냐? 우리를 구속하신 구속주의 통치를 받는 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속하시고자 중보자로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교회의 머리라고 하는 겁니다. 당연히 교회는 누구의 말씀만 들어야 하느냐? 그리스도의 말씀만 들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만을 들어야 합니다. 좀 더 나아가 말씀을 드리자면 오늘날 기록된 성경 66권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리스도의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에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성경만이 교회의 유일한 권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 선배들은 이 성경을 무엇으로 고백했느냐?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으로 고백을 했습니다. 이것 외이 다른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던 겁니다. 유일한 규범, 즉 우리의 모든 신앙도 여기에 있고, 또한 신앙에 따른 삶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그리스도의 말씀이요,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 이 말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역사 안에 어떤 일이 있었느냐?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성경의 권위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지는 것처럼 행동했던 자들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가톨릭의 교황이었습니다. 마치 교황이 교회의 머리라도 되는 것인 양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5장 교회에 관한 항목에서 이런 교황에 대하여 어떤 말까지 돌리느냐?
6항.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시다(골1:18, 엡1:22). 로마의 교황은 어떤 의미에서도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다.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자신을 높이는 자나, 하나님이라고 불리우는 모든 자들은 적그리스도요, 죄의 사람이요, 멸망의 자식이다(마23:8-10, 살후2:3,4,8,9, 계13:6).
교황을 뭐라고 하느냐? 적그리스도요, 죄의 사람이요, 멸망의 자식이라고 말합니다. 교황뿐만이 아닙니다. 오늘날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들, 그러면서 자신을 높이는 자들, 또 하나님이라고 불리우는 자들, 소위 이단들이나 그와 같은 사고를 가진 자들. 그들은 유일한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적그리스도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 교회의 유일한 머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를 구속하신 분,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친히 육신을 취하셔서 이 땅에 오신 분, 그리고 우리와 같아지기 위하여 율법 아래서 모든 율법을 완성하신 분, 그러나 죄는 없으신 분, 죄가 없기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친히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 그가 바로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아 창조가 되었기 때문에 창조주를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마땅하다면, 흑암의 권세 아래서 건짐을 받은 자들은 더더욱 우리를 구속하신 그리스도를 위한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시기 때문에 교회는 그분의 통치에 순종하는 것만이 그리스도를 위한 삶,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삶인 줄 아셔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제2계명에 대한 이해가 이런 면에서 여러분에게 있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의 형상을 그릴 수 없는가? 왜 인성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그릴 수 없는가? 과연 성경이 그것을 명하고 있는가?” 여기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이 그것을 명하고 있다면 마땅히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거기에 내 생각이나 내 판단, 내 소견 이런 것은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머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유일한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배의 방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위 자의적 예배(will-worship)라고 하여 하나님의 명령이 아닌, 사람들에게 맞추기 위하여 명하지 않는 것을 가감하는 일들이 참으로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전통이라고 부르는 것, 그런 전통을 탈피하여 현대 감각에 맞춘다는 식으로 말할 때가 있습니다. 시대를 말하고,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또 어떤 경우는 세상적인 말로 효과에 대해서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명한 바가 아니라면, 그것을 찾아볼 수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생각, 판단, 그런 소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아무리 그리스도를 위한다는 말을 할지라도, 그래서 세상적인 말로 어떤 효과를 볼 수 있다 할지라도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명령이 아니라면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려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시기 때문에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에만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 18절로 오시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교회의 머리라고만 말하지 않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근본이라는 말은 말 자체로는 틀리지 않지만, 달리 번역하자면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시작입니다. 어떤 시작이냐? 18절을 보시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바로 그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셨다는 의미에서의 시작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부활의 첫 열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활이라는 말은 죽음이 전제가 된 말입니다. 부활을 위해서는 죽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죽음이 오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죄 때문입니다. 앞서 창세기 2장 17절을 언급했는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바로 이 말씀대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죄를 지음으로 죽음이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도 자신의 죄 때문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십니다. 때문에 죄가 없으신 예수님의 경우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택자들의 죄로 말미암아 대신해서 죽었습니다. 그리고는 부활하셨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죽으시고,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새로운 시작이요, 새 창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시작을 누가 하셨는가?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해 “...그가 근본이시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풀어야 할 숙제가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보다 먼저 부활한 자들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하는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나사로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분명 죽었습니다. 성경이 죽었다고 말하고(요11:14), 죽은 지 나흘이라 냄새까지 났다고 말합니다(요11:39). 썩어가는 냄새요, 부패한 냄새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그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요11:44).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하는데, 예수님보다 앞서 부활한 이 사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되는가?
분명한 것 한 가지만 먼저 말씀드리면 부활의 첫 열매라는 것은 단순히 시간적인 의미가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성취와 그 성취로 말미암은 적용의 문제에 있어 구약은 성취보다는 적용이 먼저 된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은 분명 육신을 취하시고 난 뒤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구약은 예수님께서 육신을 취하시기 전의 역사입니다. 육신을 취하지 않았다는 것은 죽음과 부활이 아직까지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구원을 위하여 성취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표의 방식으로, 그리고 그것을 믿음이라는 방식으로서 먼저 적용한 것이 구약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백성들도 우리와 동일한 죄 사함을 얻는 것입니다. 그들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과 우리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다르지 않습니다. 동일하게 적용이 됩니다. 때문에 부활의 첫 열매도 그런 의미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비록 시간적으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먼저 있었을지라도 모든 성도의 부활은 누구의 부활에 근거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생명의 회복은 누구로 말미암는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그 생명의 회복이 있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죽었다가 다시금 살아난 사람들이 지금까지 살아 있는가? 다시 말해 그들의 부활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부활체를 입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죽었다가 다시금 살아났지만 그들은 지금 현재 죽어 있는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부활체란 더 이상의 죽음이 없는 걸 말합니다. 부활하고도 다시금 죽는 경우라면 그것은 진정한 부활체의 모습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다시 살아났다가 다시금 죽게 되는 일이 있다면 우리가 어떻게 영원한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살아가겠습니까? 때문에 그리스도의 부활에 앞서 부활한 자의 부활은 본질적인 의미에서 다른 부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부활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보다 앞선 부활은 이런 의미에서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이십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가 근본’이십니다. ‘그가 시작이시오, 죽은 자들 가운데 먼저 나신 분’이십니다.
이런 그리스도에 대해 오늘 본문 18절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만물에 대하여 최고의 권세를 가지셨다, 만물이 그리스도의 다스림 가운데 있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20장 1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에 앞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는 말이 있는데, 그런 의미입니다. 본래 창조주로서 모든 만물을 다스릴 권세가 있으셨고 지금도 그러하지만, 이 말씀은 구원자로서 구속의 모든 것을 성취하시고 난 뒤 받으신 권세라 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첫 열매로서 모든 만물에 대하여 최고의 권세를 가지신 것입니다.
특히 죄의 문제와 관련해 성경은 어떤 말씀까지 하느냐? 로마서 8장 21절과 22절입니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행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러니까 죄로 인하여 모든 만물이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이 성경의 표현입니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은 이런 모든 만물에 대한 회복인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모든 만물에 대하여 다스리시며 심판하실 권세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회복한다고 하니까 모든 만물의 회복을 택자든, 유기자든 모두를 구원한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 20절 후반부에도 보면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고 말씀하는데, 이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와 화목되기를 기뻐하신다고 해서 택자와 유기자 할 것 없이 다 화목하게 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면에서 이 부분을 다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그 구원의 성취가 우주적인 것만은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주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구원은 놀라운 일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가 받는 구원이라는 것이 우주적이라고 할 만큼 놀랍고 신비로운 것입니다.
더불어 그분이 모든 만물의 으뜸, 모든 만물을 다스리신다고 할 때 모든 만물이 그의 다스림 가운데 있기 때문에 결국 그분의 영광을 위한 목적으로 이끌어 가실 것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조의 목적이 창조하신 분의 영광이라면, 구속의 목적 역시 구속하신 자의 영광을 위함인 것이고, 그 일을 위하여 모든 만물을 다스릴 권세를 받았다면 그 역시 동일한 목적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9장으로 하자면 유기자의 경우 그분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시는 목적으로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고, 택자의 경우는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시는 목적으로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롬9:22-23).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 먼저 나셨다고 할 때 오늘 본문 19절과 20절은 이렇게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간단히 말하면 그분의 기뻐하심이 원인입니다. 에베소서 1장 5절에 보면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말하는데, 우리를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으로 삼으신 것은 그분의 기뻐하심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1장 9절 후반부부터 10절을 보면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말씀하시는데, 오늘 본문과 다르지 않는 표현입니다. 원인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의 기뻐하심음을 따라입니다. 그분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예정하시고, 예정하신대로 성취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아버지께서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신다고 되어 있는데, 에베소서 1장으로 하자면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 3절로 하자면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그 안에만 있다는 말입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을 의롭다고 말하는가? 왜 하나님의 백성을 거룩하다고 하는가? 진짜로 거룩해서 거룩하다고 하는가? 또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 왜 영광스럽다고 말하는가? 다 그리스도 때문인 것입니다. 그분 안에 은혜가 있고, 그분 안에 생명이 있고, 그분 안에 의가 있고, 그분 안에 거룩이 있고, 그분 안에 영광이 있기 때문에 몸 된 교회를 향하여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모든 신령한 복으로서 충만케 하셨기 때문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르 그 안에만 두셨기 때문에 몸 된 교회를 향하여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으로 가시면 이 부분과 관련해 이렇게도 말씀하시는데, 22절과 23절입니다.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여기서도 보면 모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복종케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누구의 머리시냐? 만물 위의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만물보다 위에 있는 것이 교회요, 교회의 머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의 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교회를 향해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이라고 말씀합니다.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즉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만물이 회복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의 충만이 누구냐 할 때 교회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충만은 교회가 없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없으면 마치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그렇게 표현될 정도인 겁니다. 모든 만물보다 더 큰 관심을 어두에 두시느냐? 교회를 향해 두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비록 모든 만물의 으뜸이라고 말씀하시고, 또한 모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 되기를 기뻐하시지만, 궁극적으로는 그의 몸 된 교회가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라는 걸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그분이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서 충만함을 가지셨다면 그분의 몸 된 교회도 그것으로만 충만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셔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계신 것으로 교회가 충만해야지, 그리스도가 가지고 계시지 않는 것으로 충만하다면 그것은 몸 된 교회로서 마땅한 바가 아닌 겁니다. 그것은 우리를 구속하신 구속의 목적과도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 아닌 것으로 충만해 지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의 충만함을 빼앗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죽으셨는가?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그 죄를 해결하시고,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나눠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단지 돈 때문에 죽고, 건강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재정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우리의 건강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끊어졌던 그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끊어져 버렸고 또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지만,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십자가의 피는 끊어졌던 그 관계를 회복시키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을 우주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까 말씀드렸던 20절 후반부입니다.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바로 이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 내어 주셨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모든 만물의 으뜸으로 세우실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그분을 교회의 머리로 세우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의 화목은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결코 없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 안에는 우리가 취해야 할 모든 충만함이 다 들어 있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그리스도를 얻었다면 결코 더 이상 얻지 않아도 될 만큼 우리는 충만으로 가득하다는 걸 이런 의미에 반드시 기억하셔야 합니다. 결코 더 많이 받아야지만 그것이 복인 자가 아닌 겁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다 받은 자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하느냐?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우리를 옮기셨다고 말합니다(골1:13). 달리 말하면 이 땅에서부터 이미 그리스도의 나라의 백성으로서 그 삶을 살아가도록 부름 받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땅이 본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나라가 우리의 본향인 겁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어디에 있느냐?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기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은총 외에 이 땅에 것을 더 많이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겠습니까? 모든 것을 충만히 그 안에 소유하고 계신 그리스도를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족하다, 여전히 가진 것이 없다, 그러면서 여전히 이 땅에 것으로서 불평, 불만투성이라면 하나님 앞에서 목이 곧은 백성은 아닌가 돌아보셔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존재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머리이시기 때문에, 또한 그리스도는 오로지 그의 몸만을 생각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충만을 교회에게 주고자 하십니다. 이 충만을 소유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을 소망하시길 바랍니다. 빌립보서 3장에 있는 말씀 한 구절만 읽고 마치겠습니다. 7절에서 9절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길 수 있는 자리까지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가야 할 신앙의 자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이 쌓이면 쌓일수록 여러분이 가야 할 방향은 이러한 자리임을 명심하시고, 주의 은혜를 따라 함께 이러한 자리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