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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118설교 / 시편8편1-9절 / 사람이무엇이기에주께서생각하십니까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5.01.18|조회수1,486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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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81-9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일하심을 생각할 때 가장 쉽게 떠 올릴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천지 창조의 역사입니다. 창세기 11절에 기록된 것처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이 말씀 속에서, 그리고 이후 구체적인 창조의 내용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지혜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런 능력과 지혜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120절을 보면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따라서 창조된 모든 만물은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신 방편인 것입니다. 신학적인 용어로 하자면 일반계시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은 다윗의 시로서 인도자를 따라 깃딧에 맞춘 노래입니다. 깃딧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악기 혹은 음율이라는 견해가 있지만, 분명하게 이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찾을 수 없습니다. 다만 지금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그 찬양이 뭐냐? 1절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이 찬양은 그대로 9절에서 반복적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주의 이름, 이때 주의 이름이란 것은 어떤 특정한 이름을 의미한다기보다는 로마서 1장의 표현대로 그분의 속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그런 그분의 속성이 온 땅에 충만하며 아름답게 드러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세계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다는 그런 의미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창조와 섭리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보이셨지만, 인간의 타락은 창조와 섭리를 통해 알리신 그분의 능력과 신성을 결코 알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21절 이하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1:21-23) 분명 창조된 모든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보이셨기 때문에 핑계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올바르게 찾아갈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어떤 방향으로만 가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꿀 뿐입니다.

따라서 지금 다윗이 창조된 모든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으로 찬양을 하는 것은 창조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을 깨달은 것이 아니라, 구속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깨달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그를 자기 백성으로 삼아주셨기 때문에, 그리고 창조라는 일반적인 계시로서 자신을 알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특별한 계시로서 자신을 알려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다윗은 여호와 우리 주여이렇게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창조와 섭리를 통해 하나님의 속성의 아름다움과 그분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구속의 역사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창조의 역사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셨지만, 그것을 통해서는 결코 하나님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핑계할 수 없을지언정 하나님을 알 수는 없습니다. 오직 구속의 은혜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고, 또 그런 은혜를 얻은 사람만이 창조와 섭리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바르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 사람들은 만물 가운데 훌륭하고 아름다운 광경을 보면 감탄을 할 수 있으되,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속성과 그분의 영광은 보지 못합니다. 소위 태양이 뜬다고 말하고 진다고 말하는 것, 계절의 변화가 있는 것, 그리고 우리가 숨을 쉬는 모든 것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일하고 계시자만,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연을 보면서 감탄만 하고, 또 일상의 삶을 살아가면서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그것까지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지으셨으며, 지으신 모든 것을 친히 다스리시고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1절에 보시면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라고 말하면서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주의 이름이 온 땅에서 드러나 있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속성도 드러나지만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지만, 그런 주의 영광은 하늘을 덮고도 남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의 영광이 이 피조 세계에 제한이 되는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배우는 것은 신학적인 용어로 원형신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형신학을 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리시되, 하나님의 전달에 의하여 피조물 안에서 창조되거나 생산된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한이 무한을 받을 수 있느냐 하면 받을 수 없습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다 받을 수 없고, 또 유한한 이 세계가 무한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다 담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주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 규모에 대해 놀라움을 금하지 못합니다. 우주의 저 먼 곳까지 가보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미지의 세계를 정복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고, 혹 또 다른 생명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아셔야 할 것은 그 모든 우주도 피조 된 세계일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솔로몬의 고백처럼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왕상8:27) 하나님이 거하시겠다고 말씀하신 성전도 주를 용납할 수 없고, 심지어 하늘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이 피조 된 세계가 다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유한은 무한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의 고백이 그것입니다.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하늘을 덮었기 때문에 주의 영광이 하늘만큼만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덮고도 남을 만큼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표현 자체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는 표현으로 있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가 헤아리려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영광인 것입니다. 이 세계가 다 담을 수 없는 영광!

 

결국 오늘 우리가 읽은 이 1절 말씀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시간을 창조하셨지만 시간 안에 제한되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 자신이 공간을 창조하셨지만 그 공간에 제한되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의 영광은 결코 피조 세계에 제한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 안에 충만히 계셔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의 모든 만물 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것을 누가 깨달아 아는가? 오직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만 주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깨달아 알 수 있다. 때문에 성도는 모든 만물, 즉 창조와 섭리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절은 이런 하나님의 일하심과 관련해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우리가 시편 1편부터 차례대로 살펴보고 있지만 항상 등장하는 자들이 바로 대적자입니다. 그들은 어떤 자들인가? 시편 1편을 통해서는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하지 않는 자,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지 않는 자입니다. 시편 2편을 통해서는 여호와와 그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는 자, 그분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고자 하는 자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드높이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고자 하는 자! 한 마디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자들이 대적자들인 겁니다. 오늘 본문 1절과 함께 생각해 보자면 하나님의 창조를 인정하지 않는 자요, 하나님의 섭리도 부인하는 자, 그들이 대적자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이 만물 가운데 보여 지고 있지만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자, 이 세상 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하심과 그분의 돌보심이 분명 있지만 그것을 부인하는 자!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대적자들조차 하나님의 영광을 막거나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을 이렇게 알리십니다. 2절을 보시면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대적자들의 경우 하나님의 영광을 무엇으로 바꾸느냐 하면 사람의 영광과 피조물의 영광으로 바꾸려고 안달입니다. 로마서는 그것을 우상이라고 말 합니다. 그러나 대적자들의 그런 열심과 노력이 아무리 대단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서도 그분의 권능을 세우실 수 있는 그런 분이란 겁니다.

 

한 예로 다윗과 골리앗에 관한 사건만(삼상17) 보더라도 골리앗의 경우 이스라엘의 적이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그는 매우 큰 자입니다. 일반 사람보다도 훨씬 큰 사람입니다. 반면 다윗은 작은 소년에 불과합니다. 갑옷을 입기에도 불편할 정도로 몸집이 작고 힘이 약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어린 다윗을 통하여 골리앗을 물리치게 하셨습니다. 어쩌면 이 시편의 다윗 자신도 이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그는 자신의 무용담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셨다고 분명 말하기 위해 이렇게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예수님께서 친히 인용하시는 구절이 있는데, 마태복음 21에 보면 이런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2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결케 하시면서 맹인과 저는 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이때 종교 지도자라 할 수 있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어떤 모습으로 있었느냐 하면 이런 모습으로 있었습니다. 15을 보시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하시는 일을 이상히 여길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자들에 대하여 노한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뭐냐? 16 중간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오늘 본문에서는 권능을 세우신다고 말하지만, 여기서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의미로서는 동일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들의 반응, 즉 그리스도의 일에 대하여 이상히 여기는 것과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어린이들에 대하여 노할 때 예수님께서는 시편 82절을 인용하셨던 것입니다. 마치 시편 82절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라도 하듯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의 경우 그리스도에 대하여 찬양하지 않고 오히려 대적했다면, 어린이들을 통하여 호산나찬양을 받으셨던 것이 이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인용하셨던 겁니다.

 

특히 시편 8편에서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이란 말은 실제로 어린 아이와 젖먹이라는 의미이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비유적 표현과 같습니다. 마태복음 11으로 가시면 25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11:25-27) 여기 보면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과 어린 아이들입니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감추셨지만 어린 아이에게는 감추지 않고 드러내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하나님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만약 문자적으로만 이해하자면 어른들은 그리스도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의미가 아니라 어린 아이들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란 의미입니다. 자기 지혜와 자기의 슬기가 아닌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것을 받은 자들, 그들이 어린 아이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 본문이 의미하고 있는 바는 비록 대적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막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만, 하나님은 어린 아이들 그리고 젖먹이들, 다시 말해 실제로 그런 자들을 통해서도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실 수 있고, 또한 그들로 비유되는 자기 백성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에게 어떤 원인과 공로가 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어린 아이와 젖먹이라고 해봤자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없다는 의미가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일하신다. 그만큼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께서 실행하시는 모든 일에 대하여 인간이 막거나 부인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오늘 본문 2절이 마치 마태복음 21장에서 이루어지기라도 한 사실이 있다는 것을 염두 해 두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단지 기독교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안에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지도자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고, 종교지도자라 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원수처럼, 그리스도의 보복자처럼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보면 기독교 내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의 지혜가 동원되어야 하고, 우리의 능력이 동원되어야 한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조차 어떤 말이 나오기도 하느냐 하면 여러 사도들보다는 베드로, 베드로보다는 좀 더 똑똑한 바울이 하나님 앞에서 더 크게 쓰임 받았다는 말이 나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 사실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런 것을 구하기도 합니다. 지혜를 주옵소서. 능력을 주옵소서.

어떤 면에서 사람들의 인식 가운데 이런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자면 말 잘 하는 사람과 말이 좀 어눌한 사람이 있으면 누가 더 복음을 잘 전하는가? 당연히 말 잘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음을 복음답게 전하는 그 사람이 잘 전하는 것입니다. 혹 어눌하게 전해도 복음을 복음으로서 전하면 잘 전하는 겁니다. 역으로 아무리 말을 잘 한다고 해도 복음을 복음답지 못하게 전하면 하나님 앞에서 잘 전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인간의 자유의지를 높이고, 인간에게 어떤 결정권이 있는 것처럼 전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전한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잘 전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국교회가 가진 문제의 한 면이 이런 것입니다. 진리가 아니라 진리 아닌 다른 것을 주목하는 것! 그래서 교회의 외적인 규모를 봅니다. 설교자의 학력을 보고, 설교자의 언변을 봅니다. 그 교회가 바른 신학 위에 서 있는가, 설교자가 바른 말씀을 증거하고 있는가를 살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외적인 말은 하지만, 그 영광으로 다 자기 잘 되는 방향으로만 있습니다.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분명 적지 않는 많은 교회들이 이러한 방향 가운데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는 이 말씀을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주를 대적하는 자들이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을지라도, 그리고 그들의 세력이 마치 예수님 당시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같은 위치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보잘 것 없는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을 통해 그분의 권능을 세우시고 저들로 하여금 잠잠케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진리와 상관없이 나아가서는 결코 안 됩니다. 오히려 인간의 지혜와 지식을 다 버려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만이 드러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인간의 능력과 지혜로서 보충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홀로 역사하심으로 그 능력과 지혜가 드러난다는 것을 아는 자로서 서 있어야 합니다.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을 사용하셔서도 능히 그분의 권능을 드러낼 수 있는 분, 그분이 우리 하나님인 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3절을 보시면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1절에서 주의 이름이 온 땅에 그리고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다고 말했다면, 3절에서는 그런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한 부분을 다윗이 보면서 하나님을 묵상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늘을 보면서 그리고 그 하늘의 달과 별들을 보면서 그것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요, 또한 만드신 만물을 보존하시고 통치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란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단지 그런 고백을 위해서만 3절을 말한 것이 아니라, 3절은 4절과 5절을 비교하기 위한 목적으로 있습니다. 4절과 5절을 보시면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하늘을 보면서 그리고 하늘에 두신 달과 별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선하심을 볼 수 있지만, 그러나 사람에게 행하신 일을 보면 더더욱 그분의 능력과 지혜와 선하심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4절에 보면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라고 말합니다. 마치 2절에서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로 표현한 그런 의미와 같습니다. 실제로도 자연 만물 앞에서도 인간을 보십시오. 얼마나 나약한지 모릅니다. 가끔씩 자연 재해에 관한 뉴스들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지를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감각하는 것도 다른 피조물과 비교해 보자면 나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의 시각만 하더라도 우리가 보는 영역은 가시광선 영역에 제한이 되어 있습니다. 동물들의 경우 우리가 보지 못하는 영역까지도 보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맡을 수 있는 냄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청각, 우리의 미각, 어느 하나 비교해 보자면 뛰어난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타락 이후를 생각해 본다면 더더욱 비참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어떤 표현도 사용하느냐? 욥기 255절과 6절입니다. “보라 그의 눈에는 달이라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별도 빛나지 못하거든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랴이사야 4114절은 더 간단히 말합니다.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인간에 대하여 하나님은 생각하신다, 돌보신다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겁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만약에 자신의 위대성이나 위엄만을 생각하시고 고고하게 서 계시려 했다면 이 땅 위에 있는 인간들을 얼마든지 멸시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취급할 수 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했느냐 하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것처럼 그들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들을 돌보셨습니다. 칼빈의 주석을 계속해서 인용하자면 온 하늘에 가득 찬 위엄의 소유자인 영광스러운 창조주께서 그처럼 비천하고 더러운 벌레같은 인간이라는 피조물에게까지 접근해 오셔서 더없이 위대한 영광으로 단장하시고 인간을 헤아릴 수 없는 축복으로 부요하게 하려고 자비롭게 나오시는 그 점에서 하나님의 경이적인 선하심이 더욱더 휘황찬란하게 드러난다.”

 

그럼 그것을 어떻게 드러내셨는가? 5절에 있는 것처럼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이전 성경인 개역한글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아닌 천사로 번역하고 있는데, 원문을 보면 엘로힘’[!yhil~a>m]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이 엘로힘이라는 단어는 종종 천사로 번역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히브리어로 된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성경이 있는데, 그것이 70인역입니다. 70인역에서 이 단어를 어떻게 번역했느냐 하면 천사’[ajggevlou"]로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대해 히브리서 2장에서 인용을 하게 되는데, 거기서도 천사로 번역하고 있습니다(2:7).

사실 어떤 번역이든 의미로서는 큰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일단 하나님으로 번역된 오늘 본문을 그대로 생각해 보자면, 인간은 하나님보다 못한 존재임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조금 못하게 하셨다는 말이 과할 정도로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는데, 그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창조의 역사를 통해서 보자면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는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을 인간이 다스리도록 명령하셨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6절 이하 8절은 바로 그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그러나 서두에 말씀을 드렸지만 지금 다윗이 찬양하고 있는 이 내용은 성도들의 찬양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다시 말해 모든 인간에게 둘려질 수 있는 내용이 아닌 겁니다. 불신자들에게도 하나님의 형상의 일부가 남아 있고 또한 피조물을 다스리고자 하는 면에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지금 다윗이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내용인 것입니다. 2절에서 대적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그들에게도 이런 내용이 돌려질 수 있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창조된 상태로서만 이 내용을 이해하기란 합당하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창조를 통해서 분명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고 또한 모든 만물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인간 스스로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타락하게 됨으로 그 모든 질서가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우상화하고 또 우리가 다스려야 할 피조물을 우상화하는 형태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지금 4절 이하의 말씀은 구속받은 자들만의 특권이라 할 수 있고, 그런 특권을 주신 하나님을 창조와 섭리를 통해서 그리고 우리에게 행하신 일을 통해서 찬양하고 있는 것이 바로 시편 8편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럼 우리에게 행하신 일의 구체성은 뭔가? 히브리서 2으로 가시면, 오늘 본문을 인용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데 거기서 인용될 때는 우리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인용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6절에서 9을 보시면 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여기 보면 무엇보다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신 것과 관련해 그의 죽음의 고난으로서 표현하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비하의 신분으로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하의 신분으로만 계시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지만 다시금 살아나셨습니다. 부활하신 것입니다. 비하의 신분만이 아니라 승귀의 신분을 가지신 것이고, 실제로 모든 만물에 대한 통치권을 부여받으셨습니다. 빌립보서 2이 그것을 잘 증거 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2:6-11)

 

다시 오늘 본문으로 오시면 이런 의미에서 시편 8편은 그리스도를 예언한 시편인 것이고, 그런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그와 한 몸이 된 교회에 대한 말씀으로 볼 수 있는 겁니다. 소위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라 말하고 교회는 그의 몸이라 말하는데, 그런 분리할 수 없는 관계로서 드러나고 있는 본문이 시편 8편인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입으셨기 때문에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셨지만 결국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만물에 대한 통치권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머리이십니다. 교회는 그의 몸으로서 분리할 수가 없습니다. 당연히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우리 역시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그분과 함께 모든 만물을 통치할 때가 올 것입니다. 아니 이미 이 땅에서부터 그것을 실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우리는 분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구속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지금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8:9) 창조만이 아니라 구속의 역사를 통틀어 볼 때 주의 이름이 온 땅에 가득하다는 것이고, 그것이 아름답다는 겁니다. 그리고 주의 영광이 얼마나 큰지 하늘을 덮고도 남음이 있다는 겁니다.

칼빈은 그의 주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더없이 지고한 아름다움의 상태에서 비참하고 수치스러운 상태로 전락한 것이다. 이 타락의 결과로 다윗이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은덕은 최소한 인간이 그의 타락하지 않은 상태에서 비추던 광채와 영광으로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물론 그의 광채가 완전히 소멸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비참하게 넘어지고 타락한 잔재 속에 극소량의 빛밖에 남지 않았다는 점이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의 아들에게 모든 축복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완전하게 허용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은혜의 샘으로부터 물을 긷게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은 최상의 의미에 있어서 뛰어난 권리요, 영광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결국 종합적으로 보자면 이 시편 8편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 찬양인 것입니다. 창조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은 드러나지만, 무엇보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통해서 그 영광이 더욱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 일을 누가 행하셨는가? 하나님 자신이 행하셨습니다. 인간의 경우 한낱 피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창조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고 또 모든 만물에 대한 통치권을 받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여전히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피조물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죄를 지음으로 타락한 것입니다. 피조물의 으뜸이 아니라 피조물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구속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히브리서 표현으로 하자면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택자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게 되었고, 부활하심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어 하나님 앞에서 산 자로서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것보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선하심, 그분의 영광스러움이 드러나는 사건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은 찬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절과 9절을 통해 말하는 것처럼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찬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생각해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화와 관으로 씌우시기 때문에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부디 우리 인생도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생각하시면서 하나님을 찬송하며, 감사가 넘치는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구속받은 자로서 이 우주 만물을 통해 더더욱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하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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