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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901설교 / 시편1편3-6절 / 의인의길,악인의길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3.09.01|조회수361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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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3-6

의인의 길, 악인의 길

 

지난 시간 우리는 복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했을 때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는 자,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는 자,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자가 복되다 말했습니다. 오히려 어떤 자가 복이 있다고 말했는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일반적으로라면 물질이 많아지거나 건강해지는 것, 혹은 명예를 얻거나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을 복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 된 자들의 복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여 그 율법을 읽고 듣는 자, 그리고 그 말씀의 바른 뜻을 깨달아 아는 자, 또한 알게 된 말씀을 행하는 자, 그래서 율법의 말씀이 그에게 신앙과 삶의 규범이 되는 자가 복된 자인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악인의 길이 아닌 의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 길을 걸어가는 자, 그가 복된 자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3절은 복 있는 자의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여기 보면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 되어 있는데, 이것은 사시사철 물의 공급이 중단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나무가 자라기 위해, 그리고 열매를 맺기 위해 필수 조건 중 하나가 물입니다. 어떤 면에서 물은 생명과 직결됩니다. 물이 없으면 나무가 자랄 수도 없고, 열매를 맺을 수도 없습니다. 아니 자라지 못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시들어 죽게 됩니다. 그런데 복 있는 자는 마치 어떤 상태에 있는 것과 같으냐?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습니다. 물의 공급이 중단되지 않기 때문에 오늘 본문의 표현처럼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잎사귀가 마르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다고까지 말합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은 나무에 물이 공급되는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고 있는 자들입니다. 본래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생은 어떤 자로 있게 되었는가? 생명을 잃은 자로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을 때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2:17). 그리고 그 말씀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을 때 하나님과 단절되는 영적인 죽음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고 난 뒤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을 때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는 표현이 있는데(3:8), 이것은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과의 교통을 잃어버렸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이후 에덴 동산에서 추방이 되는데, 이것 역시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된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생명을 주시지 않는 한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 교통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은 뭐라고 말하느냐? 허물과 죄를 죽었다는 표현까지 쓰고 있습니다(2:1a). 바로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생은 생명을 잃은 자로 있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육적인 죽음도 맞이하게 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이 뭐냐?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단절된 상태에 있게 된 것, 즉 하나님에 대하여 죽은 자로 있게 된 것입니다. 지난주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분명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능력과 신성을 그가 만드신 만물을 통해 보이셨지만(1:20), 하나님과 단절되었기 때문에 그 스스로 뭐라고 말하느냐?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14:1). 아니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인생보다 못한 피조물을 섬기는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본래 인간은 모든 피조물을 다스려야 할 존재이지만, 타락 이후 오히려 다스려야 할 피조물을 섬기는 형태로 있는 것이 인간의 모습으로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인생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택하신 자들, 즉 자기 백성들을 불러내셔서 살리시는데, 이걸 뭐라고 말하느냐? 신학적 용어로 거듭남 혹은 중생이라고 말합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를 다시금 살리시는 것, 그래서 하나님과 다시금 교통할 수 있게 된 것을 말합니다.

이 거듭남, 중생과 관련해 요한복음 3에서는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3:5). 이 일의 시작이 우리로부터 결코 시작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누구로부터 시작되는가?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성령과 분리할 수 없으신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거듭남이란 단어가 원문에 의하면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느냐? 위로부터 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a[nwqen 아노덴 : 위로부터, 높은 곳에서부터, 새롭게, 다시).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도 있지만, 좀 더 정확하게 그 의미를 살피자면 위로부터 난 자가 거듭나는 자인 겁니다.

더불어 이 거듭남, 중생을 생각할 때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시금 살리신다고 할 때 무엇을 사용하셔서 살리시는가?” 이 부분입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야고보서 1 18에서는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실 때 무엇을 통해 거듭나게 하시는가?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베드로전서 1 23도 보면 동일하게 증거합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그러니까 우리의 거듭남이 무엇을 말미암아 되었는가? 썩어질 씨가 아닌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인데, 썩지 아니할 씨가 뭐냐?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에 대하여 죽었던 우리를 살려 새로운 생명을 가지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과 분리할 수 없으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겁니다. 그럼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중생만 말씀으로 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신명기 8장에서는 이런 말씀도 하십니다. 신명기 8 3입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여기 보면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육신의 생명을 위해서는 떡을 먹고 살아야 하지만, 인간은 어떤 존재냐? 영적인 존재입니다. 물론 자연인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영적으로 죽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의 말씀으로 다시금 살리셨다면, 영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인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하는 자들은 떡으로만 살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니 떡으로서는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무엇으로 사는 자라고 말씀하시느냐?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자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JS 참조).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나무에 물이 공급되는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고 있다고 할 때 반드시 기억해야 될 부분이 이 부분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떠나지 않습니다. 한번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셨다면 결코 그 은혜를 거두시지 않습니다. 사탄이나 세상의 유혹, 그리고 그들 속에 남아 있는 강력한 부패성, 또는 자신의 보존을 위한 방편들을 게을리 함으로 심각한 죄에 빠지거나 얼마동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음으로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키고, 성령을 탄식케 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택자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거두시는 법이 있는가?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분의 은혜를 어떤 방편을 통해 주시느냐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신다는 걸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다시 말해 영적인 생명이 유지되기 위해 무엇을 주시는가? 거듭날 수 있도록 하신 그 말씀을 끊임없이 공급하셔서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도록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교통케 하심으로 생명을 유지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왜 시편 기자가 복 있는 사람에 대해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말하는가? 여호와의 율법이 우리의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육적인 생명이 아니라, 영적인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에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되다 말씀하시는 겁니다. 신명기 8장으로 하자면 사람은 떡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먹고 살아야지만 영적인 생명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그 말씀을 즐거워 하는 자, 그리고 주야로 묵상하는 자를 복되다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그분의 말씀을 끊임없이 공급받을 때 오늘 본문은 비유적으로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과 같다고 말씀합니다. 즉 영적인 공급을 계속해서 받기 때문에 영적인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열매가 성령의 열매라 할 수 있는데, 갈라디아서 5 22절과 23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그러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끊임없이 그분의 말씀을 공급받으면 어떤 열매들이 끊이질 않느냐?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열매들이 끊이질 않는 겁니다. 이걸 시편 기자는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될 것은 철을 따라 열매를 맺고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한다고 말한 후 그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다고 말을 합니다. 형통하다고 하니까 이 형통을 세상이 생각하는 그런 형통으로 생각하실 수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이미 성령의 열매 가운데 뭐가 있느냐? 오래 참음이 있습니다. 오래 참는다는 건 무엇과 연관이 있느냐? 환난, 어려움 이런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과 삶의 규범으로 삼고 그 말씀대로 따라가게 되면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는 게 아닙니다. “예수 믿으면 행복합니다.” 물론 맞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 안에 예수 믿으면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무조건 잘 되는 쪽으로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환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러한 가운데서도 형통을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빌립보서 말씀을 전체적으로 봤지만 바울을 보십시오. 복음을 위하여 살다가 어떻게 됩니까?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다른 성경 구절을 통해서는 매를 맞기도 했다고 말합니다. 복음을 위해 이곳 저곳을 오고 가다가 죽을 위험을 여러 번 넘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시편 기자는 그런 모든 것까지 형통하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왜 그런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보다 복된 것은 없고, 또한 그렇게 따라가면서 말씀으로 인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 형통이라는 말을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되는 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성경이 형통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느냐, 계시지 않느냐와 관련해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보자면 형통한 것 같을 수 있습니다. 일이 잘 풀려 모든 환경이 좋아지는 것, 세상은 그것을 형통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는다면 성경은 그것을 형통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세상적으로 보자면 형통한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성경은 그것을 형통이라고 말합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형들에 의해 종으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종으로 팔려간 집에서조차 누명을 쓰게 됨으로 감옥에까지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성경은 요셉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는가? 우선 창세기 39 1절 이하 3입니다.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여기 보면 요셉이 종으로 팔려오게 됩니다. 그런데 요셉으로 인하여 그 집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뭔가 잘 풀리는 일이 있는 것처럼 표현합니다. 그럼 잘 풀려서 형통하다고 말하는가? 그렇게만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요셉 입장에서는 종으로 있는 것 자체가 결코 잘 풀려서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성경은 그 집안이 형통하게 되었다는 것보다 앞서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말하는 걸 주목하셔야 합니다. 그 집안이 잘 풀리는 것보다 앞서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게 중요하고, 그와 함께 하심으로 그 자신이 형통한 자가 되었다는 게 중요합니다. 같은 장 23도 마찬가지입니다. 애굽의 종으로 팔려간 집에서 잘 있다가 억울한 누명으로 감옥에까지 갇히게 됩니다. 그런데 그때도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여기서도 일이 잘 풀리는 것을 형통이라고 합니다. 간수장이 어떤 일을 요셉에게 맡겼는데 요셉이 그것을 잘 해 내더란 겁니다. 그것을 형통이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일이 잘 풀리려면 감옥에까지 오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한 집안의 아들에서 종으로, 종에서 이제는 죄수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행하는 모든 일이 잘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형통이라는 말은 세상적인 판단의 내용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느냐, 함께 계시지 않느냐로 생각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지만 환경적으로는 좀 못해질 수도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으면서 잘 지내다가 종으로 팔려갈 수 있습니다. 종으로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다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까지 갇히는 죄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면 그런 상황 속에서도 형통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으로 삼을 때,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아간다고 할 때 세상적인 형편으로는 그렇게 좋다고 말할 수 없는 형편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말씀을 따라 가는 것 때문에 때로 세상의 것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이미 그것 자체가 형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삶이라는 걸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특히 로마서 5 3절과 4에서는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말씀하시는데, 외적인 환경은 어려울 수 있지만 그때도 하나님께서 이런 열매를 맺게 하신다면 그것 자체가 하나님 편에서 볼 때 형통하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임을 잊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반면 오늘 본문 4절은 악인의 상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여러분, ‘라는 건 벼나 보리와 같은 곡식을 찧어 벗겨 낸 껍질을 통틀어 이르는 말입니다. 벼나 보리를 벗겨 낸 껍질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작은 바람에도 날아가 버립니다. 악인이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3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과 삶의 규범으로 여기며 따르는 자는 마르지 않는 샘 곁의 나무와 같다고 했습니다.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는 자는 어떤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마치 주인이 알곡만 남겨두고 겨는 바람에 날려버리려고 하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쓸모없는 자가 악인의 삶인 것입니다.

물론 앞서 말씀드린 것과 연관해서 생각해 보자면 외적으로는, 세상적으로는 뭔가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뭔가 있어 보이고, 뭔가 이룬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열매와 관련해서 말하자면 하나님 없이도 뭔가 선한 열매를 맺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법 없이도 살만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맺는 열매가 아니라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삶이 아니라면 그 모든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걸 기억하셔야 합니다. 열매 차원에서 법 없이 살만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죄의 영향력 아래 있고, 죄의 영향력 아래 있기 때문에 점과 흠을 가지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심지어 성경은 어떤 말씀까지 하느냐?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라고 말씀하십니다(14:23b). 믿음 안에 있지 않는 이상, 그리고 그 믿음이 가르치는 바 그리스도의 의를 받지 않는 이상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서 선이 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악인에 대해 성경은 어떤 결과를 말해주느냐? 5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쉽게 말하면 악인들의 결국은 파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가 있을 것이고, 심판하실 때가 되면 선악 간에 심판을 받게 되는데, 심판의 결과가 무엇이냐? 믿음 안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 산 인생이기 때문에, 심지어 그들의 모든 방향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방향으로 있기 때문에 심판 앞에서 견디지 못하는 자로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영원히 의인들의 모임에서 제외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시편 73도 동일하게 말합니다. 여기 보면 시인이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무엇 때문에 시험에 빠지는가? 1절부터 보시면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73:1-9) 12에서는 이렇게도 말합니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짓을 행하고, 남의 것을 착취하고, 불법을 행하고 해서 승승장구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성실히 행하는 것으로만은 살 수가 없는 시대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다보니 그들과 비교해 보면 의인으로서 사는 삶,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이 어리석은 삶처럼 비춰질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17에서 시인은 뭐라고 말하느냐?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쉽게 말해 하나님께서 계신 곳,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곳에서 그들의 종말에 대해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현실로서는 누가 더 좋아 보이느냐?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는 자가 더 좋아 보일 수 있습니다. 뭔가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고,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 것 같아 보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보십시오. 율법과 관련해 죄에서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는 자들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들입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죄인줄 모를 때가 많습니다. 두 번째 돌판에 기록된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만 보더라도 분명합니다. 마음으로 행하는 것을 누가 죄라고 하겠습니까? 아니 죄를 짓고 있는 줄도 모르는 것이 세상입니다. 마음으로 미워하고, 마음으로 음욕을 품는다고 할 때 그것을 죄라고 해서 처벌하는 법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외적인 것만이 아니라, 내적인 부분도 다 아시기 때문에 죄를 지으면서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 돌판에 기록된 부분이 그렇다면 첫 번째 돌판에 기록된 부분은 더더욱 그러한 것입니다. 이미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섬기지 않고 있는 것 자체가 죄인데, 죄인 줄 모르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없다고 말할 뿐입니다. 철저히 하나님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 스스로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통하여 확인되는 저들의 종말은 뭐냐? 멸망외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견디지 못하고, 또한 영원히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자로서 여러분에게 주어진 인생길을 걷고 있습니까? 의인의 길입니까? 아니면 죄인의 길입니까? 만약 여러분이 지난주 확인했던 2절 말씀처럼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 있다면,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되, 하나님의 은혜로서 그 말씀의 뜻을 바르게 깨닫고 있다면, 나아가 깨달은 말씀을 실제로 행하는 자로 있다면 여러분은 의인으로서 합당한 길을 걷고 있는 자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도 여전히 말씀을 따른 삶이 아니라 세상의 꾀를 따라 가는 자로 있다면 의인으로서 합당한 길을 걷고 있지 못하다는 걸 깨달으셔야 합니다. 오히려 그것은 악인들의 꾀요, 죄인들이 길이요, 오만한 자들의 자리라는 걸 명심하셔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은 무엇을 의식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심판을 의식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인생을 심판하실 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2에서는 어떤 말씀도 하시느냐?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12:4-5)

여러분은 무엇을 두려워하며 사십니까?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두려워하고 있는 건 아닙니까?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하고 있는 건 아닙니까? 하나님보다 돈을 더 두려워하고 있는 건 아닙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아니라, 악인들의 꾀를 따르며 죄인들의 길에 서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아 있는 자일 것입니다. 역으로 주의 은혜를 따라 말씀만을 따라간다면, 그래서 말씀을 따라가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말씀을 따라가다가 망하기도 한다면 우리는 결코 최후 심판주이신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런 자를 복되다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조차 하나님은 형통하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할 때가 올 것이라는 걸 기억하시면서 사셔야 합니다.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할 날이 올 것이라는 걸 기억하시면서 사셔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지금 당장은 악인이 번성하는 것 같고, 악인에 비해 의인은 초라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의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은 결국 모든 욕심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 때문에 내려놓아야 할 일도 많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주일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온다고 한다면 그나마 일주일에 한 번 쉬는 사람들에게는 쉬고 싶은 것도 쉴 수가 없습니다. 토요일에 일찍 자면 괜찮지만 늦게 자면 늦게 잘수록 피곤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충전의 기회가 되기도 하지만, 주의 말씀을 따르기 때문에 그것조차 내려놓아야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교회의 상황이라면 우리가 지향하는 교회는 개혁교회가 아닙니까? 개혁교회로서 주일을 지키되, 좀 더 거룩하게 지키고자 한다면 그만큼 절제해야 될 부분이 많은 것입니다. 일단 주일에 세상의 일을 끌고 오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하던 모든 사업적인 것을 멈춰야 합니다. 또한 오락과 같은 것도 멈춰야 합니다. 일주일동안 해 오던 일을 구별하여 지키는 주일에까지 끌고 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오히려 경건의 의무, 자비의 의무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 그리고 이웃 사랑의 정신과 걸맞은 일들을 주의 말씀을 따라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의 말씀대로 행하자면 실제로 우리가 내려놓아야 할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삶이 형통한 삶인 줄 분명히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적으로 잘 되는 것이 형통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이 형통한 삶이라는 걸 인정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의인과 악인들을 구별하는 가운데 심판을 행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지금 현재는 그것이 부분적일 뿐입니다. 최후 심판 때는 양과 염소가 나뉘는 것처럼 그렇게 분명히 나눠질 것입니다. 때문에 이 땅에서 혹 심판하시는 일들을 보게 된다면 하나님의 공의로 말미암아 위로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혹 이 땅에서 심판하시는 것을 못 본다 하더라도 최후 심판이 있다는 걸 알고 인내하시면서 오로지 말씀만을 먹고 마시는 삶으로서 여러분의 인생길을 걸어가셔야 합니다. 이것이 의인된 자들이 걸어가야 할 길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 6절은 이렇게 결론을 짓습니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길은 어떤 길이냐? 의인의 길입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 자, 달리 말하면 하나님 말씀만을 내 신앙과 내 삶의 유일한 규범으로 여기며 사는 자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알기 원하고, 그 말씀대로 행하길 원하는 자들, 바로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인정하시는 겁니다. 반면 악인에 길에 대해선 망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멸망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멸망한다고 하니까 망해서 없어져버리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성경이 말하는 멸망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절, 즉 영원토록 지옥에서 고통 받으며 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악인이 최후가 바로 이러하다는 겁니다. 그럼 악인과 대조되는 의인은 어떠하겠습니까? 영원한 천국에서 이 땅에서는 한번도 안식할 수 없었던 영원한 안식을 하나님과 함께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결국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그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인생의 길 가운데는 두 가지 길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의인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악인의 길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7 13절과 14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많은 사람들이 어떤 길을 선호하느냐? 큰 문이 있는 곳, 넓은 길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이라는 걸 잊지 마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이 가야할 길은 어디인가? 좁은 문이요, 좁고 협착한 길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하자면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명하는 길로만 가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갈 수 있는가? 없습니다. 아니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눈길도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떻습니까? 우리 속에 성령께서 항상 거주하고 계십니다. 그 성령께서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말씀만으로 살도록 이끌어 가십니다. 말씀을 주시면서 네 스스로 해 보라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그 말씀을 사용하시기 위해 주십니다. 그래서 어떤 길을 걷게 하시느냐? 좁은 길을 걷게 하십니다. 의인으로서 합당한 길을 걷게 하십니다. 마치 무엇과 같으냐? 오늘 본문 3절에 있는 말씀처럼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과 같습니다. 요한복음 155절로 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그렇기 때문에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되다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사모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금보다 더 귀하게 여기야 할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꿀보다 더 단 말씀이기 때문에 이것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고 고백하셔야 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낳으셨는가? 진리의 말씀, 살아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게 하셨다는 걸 놓치지 마십시오. 말씀 없이 중생도 없습니다. 그럼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말씀으로 살리신 것으로 끝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생명을 위하여 무엇을 주시는가? 말씀을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오직 말씀만으로 사는 줄 알게 하기 위하여 광야 길 속에 만나를 주신 것처럼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평생을 무엇만을 먹고 마셔야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면 사는 존재라는 걸 배우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생이 이러한 생이 되도록 주의 은혜를 따라 노력하시고 또 노력하셔야 합니다. 악인의 아닌 의인의 길로 가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만 가야 한다는 걸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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