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시편 17편 8-15절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다윗은 1절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들어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였습니다. 이때 ‘의’란 자기 스스로 이룬 의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기 스스로 이룬 의를 가지고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으로서 조금의 죄도 용납할 수 없으신데, 인간 스스로 이룬 의란 점과 흠이 없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를 말할 때 그 의란 결코 인간 스스로 이룬 의가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이룬 의,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값없이 주신 의를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지난주 이 부분을 살피면서 다윗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를 받았기 때문에 그 의를 위하여 힘써 싸우는 자로서 자신의 의를 말한다고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구한다고 할 때, 그것도 악인의 손에서 구원해 주시기를 간구한다고 할 때, 하나님의 의를 따르지 않고 죄악을 따르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본성에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윗은 분명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신 의를 따르는 자로서 힘써 의를 쫓는 싸움을 싸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다윗이 의를 위하여 힘써 싸웠다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은총을 베푸신 결과로 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다윗은 3절에서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내게 오시어서 나를 연단하셨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말 번역에서는 감찰하셨다고 되어 있지만, 원문의 의미는 연단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흠을 찾지 못하셨다고 말하였는데,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이루신 결과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 결과 때문에 다윗은 입으로 범죄 하지 않을 것을 결심할 수 있었던 겁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사람의 행사를 따라서도 부끄럽지 않다는 것을 말하였는데, 특히 그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라 스스로 삼갔다고 말하였습니다. 말씀을 따르는 자로 있었지, 말씀과 상관없이 마음대로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좀 더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붙들어 나로 하여금 주의 말씀을 따라 살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주의 길을 굳게 지킬 수 있었고, 실족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 자기 백성을 위하여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고, 그런 확신을 가지고서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7절에서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난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있는데,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인식하고 있느냐? 주께 피하는 자들을 보호하시는 분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하여 치는 자들을 심판하시는 분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다윗은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 주십사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었던 겁니다.
오늘 본문 8절과 9절은 7절 말씀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는데, 이렇게 기도합니다.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 내 앞에서 나를 압제하는 악인들과 나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여기 보면 다윗 자신을 눈동자 같이 지켜달라고 구합니다. 우리 신체를 보면 여러 부분들이 있지만 눈은 그 가운데서도 가장 예민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예민한 눈동자를 우리는 본성적으로 보호하는데, 다윗은 지금 하나님께 자신을 보호하시되 다른 어떤 것보다 더 귀한 존재로 보호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춰달라고 구합니다. 마태복음 23장 3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니까 지금 다윗은 주님께서 자신을 지켜 보호하시되, 마치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아 지켜 보호해주시는 것처럼 그렇게 해 주시기를 요청하고 있는 겁니다. 7절에서 다윗이 주께 피한다고 할 때 바로 이런 의미에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럼 일어나 치는 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다윗은 다윗 자신을 압제하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압제한다는 것은 압박한다, 혹은 파괴한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일어나 치는 자들은 무엇을 위해서 다윗을 치느냐 하면 다윗을 파괴하기 위해서 치는 겁니다. 동일한 의미로 다윗은 저들에 대해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이라고도 표현합니다. 한 마디로 다윗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서 일어나 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자들에게서 다윗은 지켜 보호해 달라, 저들로부터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겁니다.
특별히 7절을 다시 보시면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라고 말할 때 다윗은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님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난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분명 힘으로 하자면 다윗은 약자의 위치에 속합니다. 다윗의 고백처럼 일어나 치는 자들은 저들이고, 다윗은 일어나 치는 자들로부터 당하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피하는데, 주님은 어떤 분이시냐?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단순히 왼쪽과 다른 의미에서의 오른쪽이 아니라,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능력을 지니셨다는 의미입니다. 8절을 보면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어 달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피하는 것, 지켜주는 것으로만 인식될 수 있지만, 그 이상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실 수 있는 분이란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내용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계속해서 10절을 보시면 다윗을 압제하는 악인들, 다윗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이 어떤 자들인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는데,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의 마음은 기름에 잠겼으며 그들의 입은 교만하게 말하나이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그들의 마음이 기름에 잠겼다고 되어 있지만 원문에 의하면 마음으로 번역할만한 단어는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육체적으로 기름에 잠긴, 다시 말해 힘없고 약한 자들에게서 착취한 것으로 배불려 살찐 것을 기름에 잠겼다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자기 힘으로 다른 사람의 것을 착취하여 살찌운다는 겁니다. 그리고 저들의 교만에 대해 말하는데, 쉽게 말하면 그들은 그들의 입으로 자신을 높이는 자들이라는 겁니다. 자신 위에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요,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되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온갖 모욕적인 말을 서슴지 않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칼빈의 경우는 기름에 잠겼다는 것을 육체적으로 살찐 것으로 해석하기보다는 뒤에 나오는 교만함을 좀 더 드러내는 것으로 말하는데, 다음과 같이 주석하고 있습니다. “나는 ‘기름’이라는 말이 마치 비계 덩어리로 꽉 차서 뚱뚱하게 된 사람처럼, 그들을 채우고 있는 교만을 지칭하는 것으로 본다.” 쉽게 말하면 저들은 교만으로 똘똘 뭉쳤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속에 있는 지방질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뚱뚱한 사람들에게 비유하면서 그들의 마음이 교만으로 꽉 차 있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은 아주 적절하고 인상적인 표현 방식이다. 다윗은 그들이 그들의 재물과 쾌락에 들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우리가 보는 대로 불경건한 자들은 그들이 더욱더 포식할수록 더욱더 난폭하고 교만하게 행동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는 이 ‘기름’이라는 말에 내면적인 악, 곧 그들이 사방으로 오만과 뻔뻔스러움으로 에워싸여 있으며 그들이 온갖 종류의 인정에 대해서 철저한 이방인이 되고 말았다는 내용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요컨대 그의 의도는 그들이 내면적으로 교만에 부풀어 있으며, 그들이 내뱉는 기고만장한 말들에서 엿볼 수 있듯이, 조금도 그것을 숨기려 들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윗을 압제하는 악인들, 다윗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은 어떤 자들인가? 한 마디로 말하면 저들은 교만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교만으로 똘똘 뭉친 자, 그가 악인이요, 원수들인 겁니다. 교만하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에게도 함부로 대합니다. 자기 자신의 힘을 믿고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마음대로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11절이 그러한 내용을 잘 말해주고 있는데, 이렇게 덧붙입니다. “이제 우리가 걸어가는 것을 그들이 에워싸서 노려보고 땅에 넘어뜨리려 하나이다” 5절에서 다윗은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라는 말을 했는데, 그가 걸어가는 길은 주께서 명하고 계신 그 길만 걸어가고자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냐? 교만한 자들입니다. 저들은 다윗의 표현처럼 우리가 걸어가는 것을 노려봅니다. 특히 에워싸서 노려본다고 할 때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우연한 계기가 되어 노려보는 것이 아니라 고의성이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우리가 걸어가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에워싸서 노려보고 있는 겁니다. 그것을 다윗은 땅에 넘어뜨리려 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데, 우리가 걸어가는 것을 더 이상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백성으로서 주께서 명하시는 길을 걸어간다고 할 때 이처럼 방해하는 자들 있다는 것을 염두 해 두셔야 합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말씀대로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고의적으로 그렇게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있을 때 우리는 우리가 걸어가는 그 길을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12절도 보시면 “그는 그 움킨 것을 찢으려 하는 사자 같으며 은밀한 곳에 엎드린 젊은 사자 같으니이다” 여기 보면 저들을 사자와 같은 맹수로 비유하고 있는데, 움킨 것을 찢으려 한다는 것은 그만큼 잔혹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9절에서 다윗은 저들에 대하여 ‘나를 압제하는 악인들’로 표현한 바가 있는데, 압제한다는 것은 압박한다, 파괴한다는 의미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움킨 것을 찢으려 한다는 것도 다르지 않는 내용입니다. 한 마디로 저들은 다윗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은밀한 곳에 엎드린 젊은 사자와 같다는 것은 그만큼 교활하다는 것입니다. 쉬운 예로 하자면 지금 저들이 다윗을 죽이려고 할 때 아무도 모르게 죽이려고 하거나, 아니면 공개적일지라도 분명한 명분을 만들어서 죽어도 마땅한 것처럼 해서 죽이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결코 자기에게 해가 되는 방식으로 행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교활한지 다윗에게는 해악을 끼치지만 자신에게는 그런 해악이 오지 않는 방식으로 행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편을 보면 가끔 다윗이 하나님께 호소한다고 할 때 자신에게 닥쳐진 상황들이 매우 답답한 것처럼 부르짖는 경우들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윗은 분명 악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절대적인 의미에서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사울의 횡포에도 다윗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자주 다윗의 선에 대하여 악으로 갚는 모습으로 있었습니다.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저들을 향하여 은밀한 곳에 엎드린 젊은 사자와 같다고 할 때 다윗 편에서는 굉장히 답답해 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길에서 은밀하게 우리를 해하려 한다고 해서 다시금 뒤로 물러날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걸어가는 길에서 벗어나 다른 길을 걸어갈 것인가?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상황으로 보자면 답답할 수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 합니다. 더딜 수 있습니다. 답답함 때문에 걸어가고 있는 것 같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딜지라도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는 저들의 잔혹함이 더욱 심해질 때, 그리고 저들의 교활함이 더욱 은밀해 질 때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더욱 가깝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더욱 하나님을 찾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13절을 보시면 “여호와여 일어나 그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여기서 “여호와여 일어나소서”라는 말은 더 이상 잠잠히 계시지 말아 달라는 간청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키시는 분으로서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시121:4). 그러나 많은 부분 악인들의 횡포를 내버려두실 때가 많습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부르짖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되,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도움으로만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좀 더 분명하게 알리시기 위해서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어려움에 대하여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혹 하나님께서 더디 응답하시는 것 같다면 한편으로는 인내함으로 계속해서 하나님께 간구해야 하겠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는 일어나 주의 선한 역사가 있기를 위하여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실제로 하나님께서 일어나 악인들을 치실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선한 뜻을 따라 행하시되,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백성들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항하는 자들에 대하여 넘어뜨리는 분으로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주의 백성들의 영혼을 구원하시는 분으로 계십니다. 다윗은 동일한 뜻을 7절에서도 말했습니다.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악인들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분이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확신해야 할 내용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하나님의 백성을 버리시지 않습니다. 악인의 손에서 그냥 내버려두는 법이 없습니다. 물론 외적으로 보자면 악인의 손에서 죽는 일도 있습니다. 선지자들 중에 그런 사람이 있었고, 사도들의 대부분은 순교로 생을 마쳤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키시지 않은 것인가? 그들을 구원하지 않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악인의 손에 의해 그들이 죽었지만 하나님은 성도의 죽음을 귀중히 보시기 때문입니다(시116:15 참조). 달리 말하면 육체는 이 땅에서는 악인들에 의해 죽음으로 끝났지만 영혼만큼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품에 품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악인들의 경우 육체를 해하였다는 것 때문에 기뻐할지도 모릅니다.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확신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영혼을 죽일 수 있는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하여 구원의 완성에 더욱 근접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놀라운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내용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하셨던 겁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10:28)
오늘 본문의 경우 7절이든, 13절이든 악인들의 심판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은 악인들의 경우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 대하여 심판하실 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때로는 악인들의 악행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도 심판하시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러한 형태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박국 선지자나 시편 73편의 기록을 보면 악인의 형통에 대하여 의문을 던지는 일도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는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 심판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래서 이 땅에서 육체적으로 살찌운다고 해서 그것이 영원토록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들의 최종적인 심판의 자리가 우리의 구원을 더욱 분명히 하는 자리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때문에 성도는 하나님의 구원을 의심해서도 안 될 것이고, 비록 오늘 본문을 통하여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저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더불어 오늘 본문 13절에서 다윗이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는 마음으로 기도했다면, 우리 역시 악인의 횡포 속에서, 그리고 그런 종류의 여러 가지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유일한 피난처는 하나님 외에 없기 때문입니다. 13절에 의하면 ‘주의 칼’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7절에서 ‘오른손’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표현입니다. 오른손이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한다면 주의 칼 역시 그런 능력을 의미합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조금 더 강한 표현, 좀 더 적극적인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일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서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14절을 보시면 “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 주는 자니이다” 하나님께 자신을 구원해 주십사 기도하면서 덧붙이는 말이 이것입니다. “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한 마디로 세상 사람으로부터 구원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으로부터 구원해 달라고 할 때 세상 사람을 수식하는 말을 유의해서 보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저들이 어떤 자들인지를 밝혀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14절을 보시면 ‘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세상 사람들은 무엇을 자기 소유로 여기느냐?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받게 되는 것을 자기 소유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10절에서 기름에 잠겼다는 표현이 있었지만 마음이 아니라 육체적으로 기름에 잠긴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래서 그 의미가 힘없고 약한 자들에게서 착취한 것으로 배불려 살찐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들은 한 마디로 이 세상의 재물이 우상이 되고 있는 자들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저들은 이 세상에 속한 것들만 바라고 소망하는 자들이라는 겁니다.
그럼 성도는 어떤 자들입니까? 히브리서 11장 8절에서 10절을 먼저 보시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여기서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갔다는 것은 가나안 땅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으로 나아갈 때 갈 바를 알지 못하였지만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을 믿고 나아갔다는 내용입니다. 심지어 가나안 땅에 거류할 때도 그 땅이 자기 땅이 아니라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는 자로 있었는데, 아브라함 및 이삭, 야곱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면서 거기 거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그렇게 했다는 것인데, 구약을 오해할 때 어떤 것이 있느냐 하면 외적인 것으로 구약 백성들의 복을 말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 자체를 복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8절에서 10절의 내용만 보면 아브라함의 경우 가나안 땅, 다시 말해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을 바라고 소망하는 자로 보일 수 있는 것처럼 이해할 수 있을지 몰라도, 곧이어 어떤 말씀을 하시는가? 13절 이하 16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분명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및 이삭, 야곱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만 바라본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였다고 합니다. 바로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이 모든 것인 자들입니다. 특히 이 세상은 무엇으로 대표가 되고 있는가? 재물입니다. 돈입니다. 그래서 재물이, 돈이 우상이 되고 있는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이것 때문에 다투고, 이것 때문에 싸웁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 세상에 있는 것이 모든 것이 아닌 자들입니다. 오히려 가나안을 약속 받았지만 가나안만을 바라보면서 소망한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였던 것처럼, 성도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자들입니다. 바로 하늘에 있는 것을 소망하는 자라는 겁니다.
때문에 성도는 결코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이 모든 것이 될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마음을 품지 말라고 하십니다. 위엣 것을 생각해야지 땅의 것만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보면 그렇지 못한 성도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이 세상이 모든 것인 양 그렇게 살아갑니다. 물질이 우상이 되고 있고, 교회조차 그런 사고방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소위 교회의 규모가 크고, 사람들이 많으면 그가 바로 하나님의 큰 종이라는 사고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도는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것으로 복을 말하는 자들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것들만 바라고 소망하는 자가 아니라, 이 세상의 것과 상관없이 더 나은 본향만을 바라보고 소망하는 자들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를 생각해 보십시오. 외적으로는 거지입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입니다. 외적으로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로부터는 조롱을 받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가 간 곳은 어디입니까? 천국입니다. 달리 말하면 이 세상의 것은 천국에 들어가는 데 단 1%도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니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물질이 많으면 좀 더 신앙생활 잘 할 것처럼 생각합니다. 좋은 직장을 다니면 신앙생활이 좀 더 풍성할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때문에 신앙생활을 자꾸 세상의 것이 있고, 없음에 따라 더 잘할 수 있고,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습관을 버리셔야 합니다. 오히려 성도의 복은 어디 있느냐? 물질의 많고 적음을 떠나 주의 말씀만을 따르는 것, 거기에만 있습니다.
다시 14절을 보시면 세상 사람들 입장에서는 전혀 납득하지 못하는 표현이 있는데, 여기 보면 세상 사람들조차 그들의 분깃을 받은 것으로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란 겁니다. 그러나 저들은 그것을 모릅니다. 저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 스스로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행12:23) 동일한 방법으로 죽지는 않겠지만 죽음 외에 기다리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단지 육체의 죽음만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과 영원히 단절되는 것, 바로 그런 심판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14절의 나머지 부분을 보시면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 주는 자니이다”라고 말합니다. 방금도 말씀을 드렸지만 저들이 가지고 있는 재물은 다 주님의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것으로 배를 채우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자녀로 만족합니다. 심지어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준다고 되어 있는데, 쉽게 말하면 재산의 상속으로 악인들은 계속해서 번성하는 것처럼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 우리가 꿈꾸는 것이 이런 내용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물질의 풍부함과, 그것이 넘쳐 우리 자녀들에게까지 물려주는 것! 물론 성도는 항상 가난한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 중에도 하나님께서 물질의 복을 주시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14절은 악인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여기에 부러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비교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들은 이렇게 잘 사는데, 우리는 뭔가?”하면서 비교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길만 걸어가면 되는 자들입니다.
분명한 것은 저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기 배만을 위할 뿐입니다. 자녀들에게 물려주는 것도 다 그런 정신 아래에서 물려줄 뿐입니다. 예수님 말씀으로 하자면 저들은 자신의 보물을 땅에 쌓아 둘 뿐입니다(마6:19).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여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을 쌓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성도는 어떤 자들이어야 하는가? 우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자입니다(마6:20). 비록 동일하게 이 땅에 살지만, 그리고 이 땅의 것으로 우리 육신을 유지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하늘에 소망을 두는 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3)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25절 이하 33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가 살펴본 바 있는 말씀이지만 우리 삶에 비춰본다면 이 말씀과 너무나도 멉니다. 매일 매일 염려로 가득한 것이 우리의 일상일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 염려의 많은 부분이 우리의 육체와 관계있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염려가 없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으로 염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육체에 속한 것은 하나님께서 다 아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다 이방인들이나 구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달리 말하면 너희는 그런 것은 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연약함을 따라 구할 수도 있습니다. 주기도를 통해 일용할 양식에 대하여 구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육체를 위하여 구하는 것을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할 때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구하느냐는 것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구하고 있는 것이냐는 겁니다. 오늘날 적지 않은 성도들의 문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와 관련해서만 구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것만 구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만 구한다는 그것만 염려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염려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반드시 해결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5절로 오시면 바로 그런 차원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1절에서부터 말씀을 드렸지만 여기서 말하는 의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를 받은 자로서 의를 향해 나아가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이처럼 성도가 그리스도의 의를 받은 자로서 의를 향해 살아간다고 할 때 비록 세상에서 보이는 것은 악인들의 잘되는 모습들만 있는 것 같지만, 성도는 무엇을 보는 자로 있는가? 주의 얼굴을 보는 자로 있습니다. 주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은혜와 사랑을 받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는 바로 그 은혜와 사랑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주의 형상으로 만족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하는 인생, 그가 바로 성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가끔, 아니 자주 우리는 우리의 입으로 하나님 앞에 불평을 토로합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밖에 살 수 없습니까? 하박국 선지자나 시편 73편의 기록처럼 왜 악인들이 더 형통합니까? 왜 그들이 더 평안하게 사는 것처럼 보입니까? 그러나 여러분, 비교하지 마셔야 합니다. 부러워하지도 마셔야 합니다. 저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주의 얼굴을 봐야 합니다. 주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얼마나 크신 은혜를 베풀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또 확인하셔야 합니다.
실제로 하박국 선지자는 주의 얼굴을 보고서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 바울의 고백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3:7-8) 동일하게 모든 성도 역시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이, 그리고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으로 말하자면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바로 이것입니다.
특히 깬다는 것은 자고 난 뒤의 일입니다. 칼빈은 다윗이 잠든 것이 악인들의 박해로 말미암아 힘들고 지쳤기 때문인 것으로 표현합니다. 달리 말하면 마음의 고통을 잠자는 것으로 비유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깰 때 주의 형상으로 만족한다는 것은 주께서 주의 얼굴을 비추셨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주셨다는 것이고, 그의 사랑을 더욱 분명히 알리셨다는 것입니다.
성도에게도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낙심할 수 있습니다. 지칠 수 있고, 그래서 잠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잠든 채로만 있지 않습니다. 깨어납니다. 그러나 그냥 깨어나지 않습니다. 깨어날 때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얼굴을 비추십니다. 때문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자들인지, 그리고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어떤 은혜와 사랑을 베푸시는지를 알고, 더욱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며 사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이것을 위하여 기도한 것처럼 우리 역시 더욱 주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그분의 형상으로만 만족하는 성도가 되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