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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05설교 / 시편18편20-27절 / 내의를따라갚으셨도다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9.05.05|조회수684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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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820-27

내 의를 따라 갚으셨도다

 

시편 18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자신의 힘이라고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다윗을 대적하는 원수들이 수없이 많은 방법으로 다윗을 해하려 했지만 하나님은 그때마다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힘이라고 고백하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을 반석으로, 요새로, 피할 바위로, 방패로, 구원의 뿔로, 산성으로 묘사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원하셨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지난 시간 살핀 내용 속에서는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심판하시고야 마시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원수들을 향하여 진노를 발하시는데, 그 진노하심이 마치 땅에서는 지진이 나고 하늘에서는 우박과 번개 등이 내리는 것처럼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두렵고 떨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한편 원수들을 향한 하나님의 이런 진노하심은 역으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구원의 은혜요 위로와 감사의 내용이 아닐 수 없는데,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19절에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넓은 곳으로 인도하신다고 표현합니다. 원수들의 핍박과 환난에서 완전히 벗어나 안전하게 거할 수 있는 장소, 더 이상 그들의 위협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장소, 그것을 넓은 곳이라고 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시편 23편의 표현대로 하자면 푸른 풀밭,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신다는 겁니다(23:2).

물론 이 땅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푸른 풀밭,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지만 시편 18편의 경우 영적인 내용으로 이해할 때 영화의 자리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분으로 계시는가? 우리로 하여금 영화의 자리에 앉히시기 위해서 모든 원수들로부터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셔서 결국 구원을 이루시는 분으로 계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으로 오시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넓은 곳으로 인도하신다고 할 때 우리가 어떤 자로 있어야 하는가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우선 2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 내게 갚으셨으니얼핏 보면 다윗이 내 의를 따라 상을 주셨다고 말하기 때문에 상을 주시는 이유가 다윗의 의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이때 다윗의 의란 다윗 자신에게 근거한 의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19절에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기뻐하셨다고 할 때 기쁨의 원인이 다윗에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칼빈이 말한 것처럼 사울을 버리시고 다윗을 왕의 직분으로 선택하신 것, 다윗을 선택하시되 사울처럼 버려도 되는 것으로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결코 버리지 않을 자로 선택하신 것,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뜻, 그분의 의지에 달린 문제라는 것입니다. 실행의 역사가 아니라 이런 내용을 영원한 하나님의 작정을 따라 생각해 보자면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실 뿐만 아니라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기로 하셨는데, 이런 하나님의 뜻이 다윗을 기뻐하셨다고 말할 수 있는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다윗 스스로가 고백한 것도 생각해 보면 지금 그가 자신의 의를 말한다고 할 때 결코 자신의 공로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상을 주신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편 51 5에 보면 다윗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그런데 이런 고백을 한 배경이 무엇인가?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 자신의 죄를 깨닫고서 지은 시가 시편 51편입니다. 이것만 봐도 다윗은 결코 다윗 자신의 의, 그것이 공로라도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칼빈은 이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이 보상이나 보응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경우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빚지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려는 뜻에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행위에 무슨 공로나 가치가 있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은 무근거하고 잘못된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을 제외하고는 우리 안에 보상을 받을만한 어떤 의를 발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행위에는 점과 흠이 항상 있습니다. 소위 사람들이 선하다고 말하는 행위 속에서는 점과 흠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점과 흠이 없을 뿐만 아니라 가장 순결하시고 완전하신 분으로서 점과 흠이 있는 것은 받으실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1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그리스도가 우리의 의로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것 외에는 답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다윗이 내 의를 따라 상을 주시고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 갚아주신다고 할 때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생각하지 않고서는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의 행위에 뒤섞여 있는 죄악이 용서를 받지 못한다면 그 어떤 행위도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다윗의 이런 고백, 즉 하나님께서 그 행위 때문에 베푸시는 보상처럼 보이는 이 구절은 그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값없고 과분한 은혜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차원에서 상을 주신다고 할 때 공로에 대한 상은 분명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개혁자들이 말한 것처럼 이 상 역시 은혜의 상인 것입니다.

 

오늘날 적지 않은 사람이 이런 구절에 대하여 다윗의 공로로 생각합니다. 다윗의 인생을 볼 때 실수한 부분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만한 행동을 했고, 그래서 성경조차 다윗에 대하여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증거 했다고 말합니다(13:22). 그러나 한 번의 실수건 두 번의 실수건 율법은 하나를 범하면 나머지를 다 범하는 성격으로 있습니다. 야고보서 210절의 증거가 그것입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그리고 다윗의 범죄는 결코 가벼운 죄가 아닙니다. 실제적인 간음이요, 살인까지 주동했던 인물입니다. 성도의 인생에 있어 이런 죄를 어떻게 가볍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오늘 본문처럼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결코 다윗 자신 안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값없는 용서, 그러나 값없는 용서는 우리 편에서 볼 때 그렇지 하나님 편에서는 우리 죄를 대신하여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0절은 이 사실을 놓치기 되면 결코 정당한 해석으로 자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본문을 통해 좀 더 생각해야 할 것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의를 전제해야만 한다는 것으로 본문을 다 설명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도에게는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었을 때 그 의를 따라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었다는 이유로 아무렇게 살아도 되는 것처럼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측면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과 삶의 규범으로서의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 21절 이하 23절을 보십시오.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그의 모든 규례가 내 앞에 있고 내게서 그의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또한 나는 그의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다윗이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을 주셨다고 할 때 분명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전제가 있지만, 그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려고 했던 것, 악하게 하나님을 떠나지 않으려고 했던 것, 그리고 모든 규례가 자신 앞에 있어서 그의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려고 했던 것, 죄의 유혹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런 죄악에서 스스로를 지키려고 했던 것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말하게 되면 이런 부분은 말할 수 없는가? 이미 성경이 이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부분도 놓치지 말고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다윗이 여호와의 도를 지켰다고 할 때, 그것도 23절에서는 내가 그의 앞에서 완전하였다고 하는데,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은 결코 절대적인 의미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모습으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럼 이런 표현들은 다윗의 거짓인가? 그렇게 봐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지금 시편의 내용을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도대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만큼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자 노력했다는 것이요, 성도들 역시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살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교훈을 위해서 이렇게 기록한 것입니다. 노력하되 어떤 자리까지 가야 하는가? 내가하나님 앞에서 완전하다고 할 수 있는 자리까지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시금 말씀을 드리지만 지금 다윗은 자신이 율법을 지켰다, 바로 이것이 내 의로 있고 하나님께서는 내게 상을 주신다는 의미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이것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본문의 외형이 이런 식으로 표현되어 있다고 해서 그렇게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의는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의를 따라 내게 상을 주신다고 말하는 이유, 그 이유로서 특별히 하나님의 율법을 지켰다는 것을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교훈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너희의 마땅한 자리가 어디인지 알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 21절 이하 23절을 통해서 내 의는 이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다윗의 본을 통해서 주의 율법을 따르는 것이 우리의 의무임을 교훈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았다고 해서 율법과 상관없이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게 하셨다면 그 의에 걸맞은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다윗은 바로 그런 부분에 있어서 노력했던 것이고, 비록 점과 흠이 있었지만 그리고 심각한 실수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율법을 따라 살려고 했다는 점을 본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21절에 보면 다윗이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원수들의 행보가 언제나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도록 만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22절에서는 하나님의 모든 규례가 다윗 앞에 있어서 그의 율법을 버리지 아니하였다고 하는데, 원수들의 행보는 결국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23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기 위해서 모든 죄악에서 자신을 지켰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역으로 원수들의 행보가 결국 다윗으로 하여금 죄악에 빠지도록 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유혹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수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도록 하기 위해서 율법을 버리게 만들고, 율법과 상관없는 죄를 저지르게 만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수들의 유혹입니다. 달리 말하면 죄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과 상관없이 사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 14문의 답변처럼 죄는 하나님의 법을 순종함에 있어서 어떤 결핍이 있거나 혹은 그 법을 범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율법을 버리고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주의 율법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 사랑이 힘입어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특히 이웃 사랑에 있어 이웃의 범주에 어떤 자도 있느냐? 원수까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원수들은 우리에게 어떤 자로 있습니까? 우리의 규범인 율법을 지키지 못하도록 수없이 유혹합니다. 우리를 넘어지게 만들기 위해서 온갖 유혹을 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외적으로, 때로는 내적으로 흔들어 놓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의 교훈을 따라 배우고 실천해야 할 것은 율법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버리는 것이 죄요, 그 결국은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의 본을 따라 여호와의 도를 지켜야 합니다. 여호와의 도를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모든 규례를 내 앞에 있도록 해야 합니다. 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 수 있겠습니까?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들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또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일을 위해서 매일 일정 시간을 세상으로부터 단절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의 있는 것들, 보고 싶다고 해서 다 보고 듣고 싶다고 해서 다 들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앞에 항상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해야 합니다.

시편 18편에 이어 시편 19편은 하나님의 말씀의 탁월성과 유용성에 대하여 언급하는데, 7절 이하를 보시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19:7-10) 그러니까 우리의 영혼을 소성시킬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없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지혜롭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으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쁘게 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영원까지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11절에서는 어떻게까지 말씀하시는가?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물론 공로에 대한 상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을 주시는데,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고 지키는 자들에게 상을 주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오셔서 2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그의 목전에서 내 손이 깨끗한 만큼 내게 갚으셨도다오늘 본문 20절에 대한 반복입니다. 21절 이하 23절처럼 행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의롭다하시는 것이고, 그 의를 따라 갚으신다는 것입니다. 시편 19편의 11절 말씀으로 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 상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고 지키는 것이 우리의 의무요 마땅한 바라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율법을 사랑하고 지키되 어디까지 사랑하고 지켜야 하는가? 2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까지 그렇게 해야 합니다. 물론 이 땅에서 완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성을 취한 그리스도 외에는 이 땅에서 율법을 완전히 지켰던 사람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교훈의 성격으로 우리에게 이 말씀을 주시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윗이 지금 이 시편을 기록하였지만 다윗은 완전하게 율법을 지켰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 역시 자기 육신의 연약함으로 죄악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이미 우리가 언급한 것처럼 시편 51편과 같은 내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따라 살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경건을 추구하는 길에서 벗어나고자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교훈은 바로 이런 자세인 것입니다.

 

더불어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은 하나님은 우리를 돕는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돕는데 어디까지 도우시는가? 율법을 지키라고 명하시지만 명하신 바를 그가 친히 다 이루실 정도로 돕는 분이십니다.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은 하고 내가 할 수 없는 부분만 돕는 분이 아니라, 나는 전적으로 할 수 없지만 할 수 없는 우리를 하게 만드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다 하신다면 왜 우리에게 명령을 하시는가? 명령이 있다는 것은 명령을 받은 자가 행해야 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나 여러분, 타락 이후 인간은 어떤 명령이 주어지더라도 그 명령에 대해 완전히 순종하는 일은 결코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질문하는 것은 마치 명령에 문제가 있고 명령하시는 분에게 문제가 있는 것처럼 질문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명령을 받는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하여 어떤 명령에도 순종할 수 없는 것이 문제로 있습니다. 바로 그런 인간들 가운데 일부, 즉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순종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시기로 하셔서 지금도 일하시는데, 이것이 어떻게 잘못된 것인 양 따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명령 하시지만 명령하신 바를 친히 이룬다고 할 때 이것조차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명령이 있다는 것은 명령 받은 자가 행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식으로 따질 문제가 아닌 겁니다. 왜냐하면 명령이 있더라도 그 명령 앞에 우리는 행할 수 있는 실력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명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리시는데, 이것은 결코 무익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명령하시는 바를 알지 못하면 결국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명령의 형식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알리셔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하십니다. 제시하심과 동시에 우리 스스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시고 친히 역사하셔서 이루어가십니다.

혹 이런 질문을 할지도 모릅니다. 그럼 왜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역사하셔서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만 행하게 만들지 않는가? 물론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명령을 완전하게 지키며 살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상에서의 삶을 그렇게 인도하지 않기로 하셨는데, 왜냐하면 명령에 불순종하거나 순종하는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자인지를 알게 하시고, 그런 우리가 하나님이 전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면서 하나님만 의뢰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런 방식을 통하여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자 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좋다고 여기시는데 피조물인 우리가 어떻게 왈가불가할 수 있겠습니까? 분명 그분의 지혜가 우리보다 훨씬 높고 깊다는 사실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11:33)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우리의 이성을 앞세우고 우리의 논리를 갖다 붙일 것이 아니라, 더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주의 명령을 따르고자 해야 합니다. 다윗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않도록 해야 하고, 그의 모든 규례가 내 앞에 항상 있도록 그래서 그의 율법을 버리지 않도록 해야 하며, 나아가 그의 앞에서 완전하기까지 스스로를 죄악에서 지키고자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의무인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오늘 본문 20절 이하 24절은 반드시 다윗의 의 자체로 풀어서는 안 됩니다. 무엇이 전제되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의를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교훈의 성격과도 맞물러 있다는 것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의를 따라 상을 주신다고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행하는 거기에 상이 있다는 것을 알고 부지런히 율법에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때도 우리 스스로 행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셔야 합니다. 우리를 돕되 전적으로 도우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전체적인 내용 속에서 무엇만이 남는가? 내 의도 아닙니다. 의에 따른 상급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명령이라는 형식 때문에 오해를 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은혜 외에는 말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것만 남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계속해서 25절과 26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합니다. “자비로운 자에게는 주의 자비로우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니” 20절 이하 24절의 맥락과 동일합니다. 외적으로 보자면 마치 사람에게 원인이 있고 그 결과를 하나님께서 나타내시는 것처럼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보자면 실제로는 그 반대입니다. 주의 자비를 따라 우리가 자비함을 나타내는 것이고, 주의 완전하심을 따라 우리가 완전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주께서 깨끗하지 않은데 어떻게 주의 백성인 우리가 깨끗함을 나타내 보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도 말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열매를 맺는 자로 있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주의 자비를 원한다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주의 완전하심을 보고자 한다면 너희 역시 완전한 자가 되라는 것이요, 너희가 주의 깨끗하심을 보고자 한다면 너희 역시 깨끗한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악한 자로 있다면 너희가 보는 것은 주의 거스르심 외에는 볼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에 보면 동일한 뜻으로 이렇게 말씀하기도 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6:7-8) 너희가 무엇을 심느냐에 따라 심은 그대로를 거둔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대입하자면 자비를 심으면 하나님은 너희에게 자비로우신 분이 되는 것이고, 율법을 온전히 지켜 행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완전하신 분으로 항상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달리 생각하면 왜 하나님이 완전하지 않는 것처럼 불평하고 불만을 품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완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깨끗하면 하나님도 우리에게 깨끗한 분으로 나타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우리가 원인이 되어 하나님도 그런 분으로 결과 되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본래 자비로운 분이시고, 완전하신 분이시고, 깨끗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자체가 우리가 그런 자로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자비하신 분으로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있다면 마땅히 자비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교훈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분으로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있다면 마땅히 완전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동일하게 하나님은 깨끗하신 분으로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있다면 마땅히 깨끗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악한 자로 있으면 하나님은 너희에게 거스르는 분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으로 죄에 대하여 벌하실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로 의인이라고 칭해주시는 하나님의 백성은 결코 그런 자리로 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혹 우리가 주의 자비하심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그런 분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비를 나타내지 않기 때문임을 분명히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완전한 분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만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자로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깨끗하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비롭고, 완전하고, 깨끗하신 분이시지만 우리가 그렇게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그런 자로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광야에서 얼마나 많은 불평과 불만을 쏟아 냈습니까? 하나님이 부족한 분이라서 그렇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 입장에서 장차 들어가게 될 가나안 땅에서나, 들어가기 전 광야에서나 하나님은 언제나 풍성한 분으로 계십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맛보지 못하는 것처럼 그렇게 불평, 불만을 품는 것은 하나님이 풍성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그런 자로 있지 못하기 때문에 불평하고 불만을 품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주의 자비를 따라 자비로운 자가 되게 해 달라고 해야 합니다. 주의 완전하심을 따라 완전한 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의 깨끗하심을 따라 우리 역시 깨끗한 자가 되게 해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의 말씀처럼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가 되지 않도록, 오히려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가 되도록, 그래서 성령의 열매가 우리의 것이 되도록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27절을 보시면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즉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따라 자비를 나타내는 자,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따라 완전함을 나타내는 자, 하나님의 깨끗하심을 따라 깨끗함을 나타내는 자, 바로 그들을 구원하신다는 겁니다. 특히 그런 자들에 대하여 곤고한 백성이라고 말하는데, 곤고하다는 것은 가난한 자, 고통 가운데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지만 그 과정 속에서는 곤고한 자로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수없이 많은 원수들에게 둘려 쌓이기도 하고, 그들의 날카로운 칼에 찔리거나 베이기도 하고, 그들이 쏘는 화살에 맞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분으로 계시는가? 반드시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으로 계십니다. 구원하시기 때문에 25절과 26절로 교훈하자면 너희는 자비를 잃지 말아야 한다, 완전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깨끗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눈을 낮추시는데, 누가 교만한 자인가? 26절 말씀에 있는 것처럼 사악한 자입니다. 사악하다는 것은 21, 22절에 근거하면 하나님을 떠난 자들, 하나님의 율법을 버린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자기 기준으로 사는 자들, 그들이 교만한 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를 높입니다. 주의 은혜가 아닌 자신의 공로를 말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들은 낮추십니다. 그런 자들의 교만을 꺾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말씀에 근거하여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현실은 우리가 구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들을 낮추신다고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말씀하신 하나님은 말씀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십니다. 곤고한 자들을 구원하실 것이고, 교만한 자들에 대해서는 낮추실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인내와 소망으로 주의 은혜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의 은혜를 따라 자비로운 자로, 완전한 자로, 깨끗한 자로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런 열매를 주시도록 구하고 또 구해야 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는 것이든, 아니면 우리에게 명령을 하시는 것이든 하나님의 은혜는 유일한 원인입니다. 명령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명령을 통하여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은혜를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명령 안에는 우리의 의무가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은혜가 있다는 것 때문에 우리의 마땅한 바를 소홀히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 결코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를 행했을 때 그것이 교만의 내용으로 자리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의 자세는 다음과 같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710절의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를 행하고서도 우리는 내가 해야 될 일을 했을 뿐 공로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어떤 자인지, 그리고 어떤 자리로 가야 할지를 알고 주의 은혜를 구하면서 주의 뜻을 따라 나아가는 주의 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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