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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26설교 / 시편18편37-50절 / 구원의하나님을높일지로다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9.05.26|조회수756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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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837-50

구원의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시편 181절에서부터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 다윗은 하나님만이 자신의 힘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만이 반석이요, 하나님만이 요새요, 하나님만이 방패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표현 이면에는 다윗이 처한 상황이 그렇게 좋지 못하다는 것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이것은 이미 표제를 통해서도 분명히 밝혔던 사실입니다. 즉 수없이 많은 원수들의 박해가 있었지만 그들로부터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구원하신 분이 누구냐? 하나님이란 겁니다.

특히 지난 시간에 살핀 내용 속에서는 단지 지키시고 보호하신 하나님으로만 소개한 것이 아니라, 다윗으로 하여금 원수들과 싸울 수 있도록 힘과 능력도 주신 하나님으로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33절과 34절인데, 다시 한번 보시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나의 발을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 활을 당기도다원수들과 싸우기 위해서 빠른 발을 주실 뿐만 아니라, 손으로 싸울 때 놋 활을 당길 수 있는 힘 또한 주셨다는 겁니다. 그만큼 원수들과의 싸움에서 능하게 하셨다는 겁니다.

 

이런 내용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계속해서 이어지는데, 우선 37절과 38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내 원수를 뒤쫓아가리니 그들이 망하기 전에는 돌아서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그들을 쳐서 능히 일어나지 못하게 하리니 그들이 내 발 아래에 엎드러지리이다시편 초반부에는 이런 고백이었습니다. 4절과 5절을 보시면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한 마디로 원수들로부터 박해를 받아 쫓기는 신세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힘과 능력을 주시자 이제는 원수들이 도망하고 다윗이 그들을 뒤쫓는 자가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한 때는 다윗이 패배자인 것처럼 묘사되었지만 이제는 저들이 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다윗은 어떤 마음으로 그들을 뒤쫓는가? 그들이 망하기 전에는 돌아서지 아니할 것이라는 마음입니다. 철저히 그들을 무너뜨리겠다는 것입니다. 철저히 그들을 진멸하겠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일어설 수 없도록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이 다윗의 발아래에 엎드러진다는 것인데, 3940절에서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이는 주께서 내게 전쟁하게 하려고 능력으로 내게 띠 띠우사 일어나 나를 치는 자를 내게 굴복하게 하셨사오며 주께서 또 내 원수들이 등을 내게로 향하게 하시고 내게 나를 미워하는 자를 끊어 버리게 하셨음이니이다한 마디로 맨 처음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이 다윗의 힘으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다윗이 강조하고 있는 핵심은 자신의 모든 승리의 원인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호의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분명히 해야 될 것이 있는데, 다윗 당시에는 37절 이하 40절의 내용이 실제 전쟁의 역사를 상기시키는 것으로 있습니다. 이때 그들을 쳐서 능히 일어나지 못하게 하겠다, 나를 미워하는 자를 끊어 버리게 하셨다는 표현이 매우 가혹한 말로 들릴 수 있습니다. 마치 다윗이 피 흘리기를 즐겨 하는 잔인한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다윗의 전쟁 역사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으로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고, 그런 만큼 하나님께서 저들의 악에 대하여 다윗의 손을 빌어 심판을 행사하시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내용을 통하여 영적 전쟁에 대하여 가르치고자 한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다윗의 나라는 바로 그리스도의 나라를 예표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도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지만 그리스도의 나라가 처음에는 미미해 보일 수 있습니다. 보잘 것 없고 매우 작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기도 했고(13:31-32), 또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은 누룩에 비유하기도 했던 것입니다(13:33). 그러나 그런 겨자씨가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씨앗 중에서 가장 작다고 할 수 있는 겨자씨이지만 자란 후에는 얼마나 큰지 처음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룩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루 서 말과 거기에 넣은 누룩은 비교 자체가 안 됩니다. 그러나 누룩으로 인하여 부풀게 되는데, 가루 서 말도 많지만 부풀게 된 양은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나라가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어려움이 없는가? 있습니다. 어려움 때문에 그리스도의 나라가 작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 속에서 패배하는 일이 있는가? 없습니다. 외적으로는 패배한 것처럼 보이는 모습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십자가상에서 죽었을 때 그리스도의 나라가 무너진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도 패배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사흘 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몸 된 교회 역시 동일한 결과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을 다윗은 오늘 본문 37절 이하 40절로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내 원수를 뒤쫓아가리니 그들이 망하기 전에는 돌아서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그들을 쳐서 능히 일어나지 못하게 하리니 그들이 내 발 아래에 엎드러지리이다 주께서 나를 전쟁하게 하려고 능력으로 내게 띠 띠우사 일어나 나를 치는 자들이 내게 굴복하게 하셨나이다 또 주께서 내 원수들에게 등을 내게로 향하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들을 내가 끊어 버리게 하셨나이다

물론 지상의 교회가 완전한 승리를 맛보는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상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로 있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교회가 아니라 불완전한 교회란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패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도 있습니다. 아니 자주 그렇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원수들의 박해가 있고 저들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장인이 그를 박해한 것처럼, 다윗의 아들이 그를 반역한 것처럼 때로는 내 식구가, 내 친척이, 내가 아는 가까운 사람이 마치 나를 시험하는 것처럼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힘들 수 있고, 답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교회가 완전히 넘어져 일어서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가? 없습니다.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리스도께서 다시금 일으키십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이루실 것입니다. 철저히 저들을 끊어버리시고, 더 이상 일어서지 못하도록 만드시는 겁니다.

 

계속해서 41절을 보시면 그들이 부르짖으나 구원할 자가 없었고 여호와께 부르짖어도 그들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셨나이다맨 처음 다윗이 원수들로 인하여 박해를 받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6절을 보시면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고 고백합니다.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이제 반대로 다윗이 그들을 진멸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다윗이 그들을 뒤좇으며 끊어 버리려고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들도 하나님을 부르짖는다는 겁니다. 실제로 다윗의 전쟁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장인인 사울도 있었고 그의 아들 압살롬도 있었습니다. 즉 외적으로 볼 때 하나님을 모르는 자가 아니었던 겁니다. 그래서 어려움이 있으면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사울을 보십시오. 어려울 때면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죽었던 사무엘 선지자까지 불러올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는가? 다윗은 응답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여러분, 시편 145 18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동일하게 예수님께서는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7:7-8)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는가? 시편 145편의 내용에 따르자면 진실한 간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려움이 닥쳐 하나님을 찾긴 하지만 참된 믿음과 참된 회개로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진실함 없이 자신의 안위만을 위하여 하나님을 부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기도를 거절하시는 겁니다. 이것을 야고보서에서는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4:2-3) 하나님의 영광, 이웃의 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정욕을 위해서 구하기 때문에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사울의 기도에 대해 하나님께서 무조건 거절하셨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이해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응답이 그들의 기도가 앞서기 때문에 응답하시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앞서기 때문에 응답하실 뿐입니다. 그러니까 외적으로는 사울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처럼 있지만 그것보다 앞서 하나님의 뜻이 거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사울의 기도에 응답하신 것은 사울을 기뻐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의 기도가 진실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참된 믿음과 참된 회개로 기도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거절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에 마치 들어주시는 것처럼, 응답하시는 것처럼 있을 수 있는 겁니다.

비교적인 측면에서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세상이 만든 신들은 들을 수가 없습니다. 지난 시간에 시편 115편의 내용을 봤지만 우상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합니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를 맡지 못합니다.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고,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소원을 빈다고 해서 소원대로 들어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현상적으로 보면 마치 소원을 들어준 것처럼 보이는 일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있는가? 거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뜻을 다 헤아려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만 말씀드린다면 우상처럼 우상에게 비는 자 역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도록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무지함에 무지함을 더하여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을 거절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일하시기도 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부르되 진실함으로 불러야 함을 배우셔야 합니다. 참된 믿음을 가지고 불러야 하며, 우리의 허물과 죄악에 대하여 회개하는 마음으로 불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의 기도를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구하고 찾는 자들에게 반드시 응답하실 것입니다.

 

계속해서 42절을 보시면 내가 그들을 바람 앞에 티끌 같이 부숴뜨리고 거리의 진흙 같이 쏟아 버렸나이다하나님은 분명 자기를 부르는 자들의 기도에 응답하시지만, 진실하게 부르지 않는 자들의 기도는 거절하십니다. 왜냐하면 이전에 그들이 행했던 일은 하나님의 백성을 고통스럽게 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기도를 거절하실 뿐만 아니라, 여기서는 그들의 죄에 대하여 보응하시는 것을 말씀하시는데, 한 마디로 구원 받기를 바랐지만 오히려 다윗의 손에 철저히 부셔지는 모습으로 있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사실에 대해여 이미 다윗은 앞서 이렇게 말한 바가 있습니다. 25절 이하 27절입니다. “자비로운 자에게는 주의 자비로우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니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진실하게 부르는 자들의 기도를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진실이 아니라 거짓되게 부르는 자들, 하나님의 이름만 부를 뿐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 자들, 지금 닥쳐진 상황만 해결해 보자는 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합당하게 부르지 않는 자들, 바로 그들의 기도에는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들의 거짓됨, 악함에 대하여 벌을 내리십니다. 사악한 자에게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셔서 교만한 그들의 눈을 낮추십니다. 아니 낮추는 정도가 아니라 42절에서는 완전히 진멸하는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다윗으로 하여금 승리를 맛보게 하셨습니다. 이 승리로 말미암아 다윗의 나라는 모든 나라 위에 서게 됨을 말하는데, 43절에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께서 나를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여러 민족의 으뜸으로 삼으셨으니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지금 시편 18편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구원하시되, 다윗의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주신 것을 생각하면서 쓴 시입니다. 여기에는 사울이라는 인물도 있습니다. 단지 이방인만 의식한 것은 아닙니다. 주께서 나를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셨다고 할 때 칼빈은 이스라엘 나라 안에서의 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여러 민족의 으뜸으로 삼으셨다는 것은 내전이 아니라 이방인들과의 싸움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데, 이 모든 일들 속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시편 18편 안에서 누누이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든 이방인들 가운데 이스라엘 나라를 으뜸으로 삼으셨는데, 자신은 알지도 못하던 백성이 자신을 섬긴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의 나라가 모든 나라들 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다윗의 나라는 솔로몬 왕 이후 둘로 쪼개졌고, 북이스라엘이나 남유다나 다 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윗의 왕위를 그리스도께서 이어 받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앞서도 말했지만 그런 측면에서 다윗의 나라는 바로 그리스도의 나라를 예표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이방인들 가운데 이스라엘 나라를 으뜸으로 삼으셨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나라가 모든 나라 위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싸움에서 승리하시고 난 뒤 그리스도의 나라는 그만큼 영광스럽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서는 완전한 승리를 취하지 않는 모습으로 있습니다. 모든 나라 위가 아니라 마치 모든 나라 아래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만큼 별 볼일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의 나라가 모든 나라 위에 서는 것처럼 우리 역시 모든 나라 가운데 으뜸으로 서게 될 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그렇게 만들어 가실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때문에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는 다윗의 고백처럼 하나님만을 힘으로 삼고, 그분만의 의지해야 합니다.

나아가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긴다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쉽게 말하면 그리스도의 나라에는 유대인만이 아니라 다윗이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앞서는 이방인들에 대한 진멸을 언급했지만 진멸한다고 할 때 공의의 심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을 향해서는 긍휼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러한 내용은 맨 처음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약속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창세기 12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12:1-3).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는다는 것은 복음이 유대인들에게만이 아니라 이방인에게까지도 확장될 것을 예언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은 단지 육적인 자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자손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임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할 수 없고, 이방인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를 통해서는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9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19:5-6)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셨는가? 그들을 하나님의 소유로 삼아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라 제사장 나라가 되도록 하는 데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유대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방 나라까지 자기 백성으로 삼고자 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셨던 겁니다.

 

지금 다윗의 시편을 통해서 알리고자 하는 것이 이러한 말씀들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이 44, 45절을 통해 언급합니다. “그들이 내 소문을 들은 즉시로 내게 청종함이여 이방인들이 내게 복종하리로다 이방 자손들이 쇠잔하여 그 견고한 곳에서 떨며 나오리로다여기 보면 내 소문을 들었다고 말합니다. 어떤 소문입니까?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이기게 하신 소문입니다. 어딜 가든지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시니까 그를 대적할 자가 아무도 없다는 소문입니다. 싸움을 해봤자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오히려 항복하고 복종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의 나라의 경우 이방인들이 복종하게 된 이유가 이길 수 없다는 두려움 때문이라면, 그리스도의 나라는 단지 두려움 때문에만 복종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소문을 들었다, 그리고 그 소문에 즉시로 청종하여 복종하였다는 것은 그것이 복된 줄 알고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칼빈의 주석을 보면 이것은 그리스도에게 더욱 더 잘 적용된다.”고 하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수단으로 세상을 복종시키며 이전에는 자신에게 반항했던 자들을 이름만 듣고도 순종하게 만드신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에게 약속된 지배의 서곡이자 준비 단계에 불과했으니 이 그리스도의 지배 영역은 세상의 가장 구석진 곳까지 확대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니까 칼빈은 이 말씀에 대해 복음전파를 통해 이방인들이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 굴복하게 되는 내용으로 이해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이어 나오는 구절에서는 이방 자손들이 쇠잔하여 그 견고한 곳으로 떨며 나온다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떨며 나온다는 것은 두려움에 대한 표현입니다. 복음에 그런 것이 있는가? 사실 복음은 좋은 소식이요, 기쁨의 소식입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 두려워해야 할 내용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죄 문제를 직시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이 부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복음도 마찬가지로 믿지 않는 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굴복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무서운 공포로 그들을 후려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예언의 능력, 곧 바울이 고린도전서 1424절에서 증거하고 있듯이 인간의 양심을 확신시키고 그들의 은밀한 마음을 들춰냄으로써 과거에 반역자인 자들로 하여금 무서워 엎드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그것이 바로 예언의 능력, 즉 말씀의 전파이다.”

정리하자면 그리스도의 나라가 그분의 말씀으로 전파된다는 것이요, 그 말씀을 들은 자들은 한편으로는 죄 문제로 인하여 두려워하지만 이내 그리스도께서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그의 말씀에 순종하게 된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이미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실 때부터 약속하신 말씀을 여기서도 드러내고 계신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유대인에게만 제한된 것이 아니라 사마리아, 땅 끝까지 증거 하도록 명하셨고, 오늘날까지 성취가 되고 있는 것으로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그가 하시 말씀에 대하여 신실하다는 것이고, 말씀하셨다면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신 겁니다.

그런 하나님이 다윗을 통해 알리시는 바가 무엇인가?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라는 말로 시작하는 이 시편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가 너희의 힘이라고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만을 힘으로 여겨야 합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방패로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만을 방패로 여겨야 합니다. 한 마디로 다른 것을 믿고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본 시편을 통해 말씀하고자 하시는 사실이요, 나아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또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계속해서 46절을 보시면 자신을 높여주신, 영광스럽게 만들어주신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데, 이렇게 표현합니다. “여호와는 살아 계시니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하나님을 높일지로다여기서 살아 계시다는 표현은 살아서 역사하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시편 115편에서 언급한 것처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그런 우상과는 같지 않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지고 계시지는 않지만 인간의 이해로 하자면 입으로 말씀하실 수 있는 하나님,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 귀로 들을 수 있는 하나님, 손과 발로 얼마든지 행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란 겁니다.

그 하나님이 다윗에게 어떤 분으로 계시느냐? 반석이 되시며 구원이 되신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살핀 내용으로 하자면 원수들로 말미암은 박해와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응답하셨는데, 바로 그런 어려움과 원수들의 박해로부터 구원해 주셨다는 겁니다. 구원할 뿐만 아니라 그들 위에 세우시고 영광스럽게까지 하셨는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반석이 되신다고 말하는 것은 그만큼 든든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위험 속에서도 하나님은 얼마든지 구원을 베푸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은 찬송을 받아 마땅한 분으로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 그분만이 높임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와 허물에서 우리를 구원하셨고,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일하십니다. 성령을 통하여, 그리고 말씀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일하십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왕이시기에 우리는 마땅히 그분께 복종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우리의 본성을 말씀으로, 그리고 그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십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역사, 하나님의 역사가 없다면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포기하는 법이 없으십니다. 한번 자기 백성으로 부르신 이상, 아니 한번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신 이상 반드시 이루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께, 그 그리스도를 보내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만을 올려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47절과 48절에서는 왜 하나님을 찬송해야 하는지, 왜 하나님을 높여야 하는지 조금 더 자세하게 그 이유를 설명하는데, 이미 살핀 내용의 반복입니다. “이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보복해 주시고 민족들이 내게 복종하게 해 주시도다 주께서 나를 내 원수들에게서 구조하시니 주께서 나를 대적하는 자들의 위에 나를 높이 드시고 나를 포악한 자에게서 건지시나이다간단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원수들, 즉 다윗을 대적하는 자들의 손에서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특히 여기 보면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보복해 주셨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폈던 내용을 토대로 하자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힘과 능력을 주셔서 원수들을 짓밟은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을 보복해 주셨다고 표현합니다. 얼핏 잘못 이해하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복수가 가능한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복수에 대하여 하나님께 맡기라고 명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219절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그렇다면 시편을 통해 말씀하시는 이 내용은 어떤 의미인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위임하셔서 행하게 하신 것, 앞에서도 말했지만 저들의 죄와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다윗이 대신하여 행한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어떤 사람이 손해를 입자마자 복수심에 앙갚음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직분을 횡령하는 것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다시 말해 사적으로 복수하는 것은 신앙의 열매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뜻을 우리에게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악에 대하여 선으로 갚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있습니다. 저들이 죄악을 버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란 것입니다.

때문에 다윗의 이 말은 개인적인 복수가 아니라 공적인 성격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보면 위정자를 통하여 공적으로 그 일을 처리하도록 칼의 권세를 주셨는데, 그것만이 합법적이라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누구를 위하여 일하고 계시느냐? 다윗을 위하여 일하고 계십니다. 오늘날 교회를 위하여, 성도를 위하여 일하신다는 겁니다. 수없이 많은 원수들, 그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자들이 있지만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그들의 손에 넘기시지 않습니다.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다윗은 다시금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이유를 밝히는데, 49절과 50절입니다. “여호와여 이러므로 내가 이방 나라들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이다 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원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49절의 경우 46절의 반복입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이방 나라들 중에서 주께 감사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43절 이하 46절을 바탕으로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이방인들에게까지 주의 복음이 전파되어 그들이 주의 백성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하나님이 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찬양하는 것이 그들에게까지 퍼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더불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구원을 큰 구원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셨다고 말씀하는데, 역사적인 측면에서 생각하자면 사울을 이어 다윗에게 주어진 왕권이 결코 부당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한 대목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여 죽이려고 했지만 사울을 이어 다윗을 왕으로 삼으신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란 사실이고, 그렇기 때문에 사무엘을 통해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왕으로 삼으셨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기뻐하기로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에게 원수들과 그를 대적하는 손에서 계속해서 건져주셨던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구절을 보시면 인자를 베푸시는데, 누구에게 베푸시는가? 영원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 베푸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나뉘었습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망하게 되고, 남유다 역시 바벨론에 의해 짓밟히게 되는 그런 역사를 구약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인자를 영원토록 베푸신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나 계속해서 말씀드리는 것처럼 다윗은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다윗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고, 그런 측면에서 영원토록인자를 베푸신다고 할 때 단지 다윗이라는 인간의 나라가 아니라, 참 하나님이시요 참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나라를 두고 말하는 내용임이 분명합니다. 실제로 마태복음 1장에서 그리스도를 어떻게 소개합니까?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1:1)

따라서 영원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 인자를 베푸신다는 것은 다윗의 나라가 아니라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나라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그 후손이란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인 겁니다. 그러나 교회론적으로 하자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확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다윗과 그 후손이라고 되어 있지만 그리스도의 나라에서는 다윗도 그리스도의 나라의 백성이고, 좀 더 앞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모세도, 아브라함도 다 그리스도의 나라에 속하는 자들입니다. 바로 그들에게 인자하심을 영원토록 베푸시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그들이 인자하심을 받을만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자하심을 보이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잘나면 얼마나 잘났습니까? 저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입니다. 연약함을 가진 자요, 점과 흠이 있는 자입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로 말미암아 믿음의 길을 걸어갔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모습으로 있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다윗에게 영원토록 인자하심을 베풀어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인자하심을 영원토록 베풀어주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으로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분만을 높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하고 높이되 주의 인자가 영원하다, 끝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우리의 찬송 또한 영원토록, 끝없이 찬송하고 높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시편 18편의 내용을 여러 차례 나눠서 살폈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은 힘이시고, 방패이십니다. 힘이시고 방패이시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원수, 아무리 센 원수라 할지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로부터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심지어 그들 위에 세우기까지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로 그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다른 것이 믿음의 대상, 의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물질을 의지해서도 안 되고, 사람을 믿고 의지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해야 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는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분임을 경험한다면 마땅히 하나님만 찬송하며 그분을 높여드려야 할 것입니다. 특히 모든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주체로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너무나도 당연히 하나님만을 찬송하고 높여드려야 함이 마땅하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죄를 짓는 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런 우리를 원수와 싸우게 하십니다. 원수와 싸워 승리를 맛보게 하십니다. 힘도 주시고, 능력도 주셔서 그렇게 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어떻게 찬송하지 않을 수 있으며, 높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모든 삶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를 위해 지금도 싸우고 계시는 하나님 한분만을 높여드려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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