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시편

130915설교 / 시편2편7-12절 / 그의아들에게입맞추라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3.09.15|조회수1,010 목록 댓글 0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시편 27-12

그의 아들에게 입 맞추라

 

지난 시간 우리는 세상에 있는 모든 나라와 민족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형태로 있음을 살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속박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임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이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죄의 결과라는 걸 분명히 아셔야 됩니다. 본래 인간은 모든 만물의 으뜸으로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피조물로서 마땅히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의 뜻 아래 있어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그것을 파괴시키고 말았습니다. 아니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파괴시킨 것이 죄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 아래 있지 않겠다이것이 죄인 것입니다. 창세기 34절과 5절에서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했을 때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함으로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 그것이 죄인 것입니다. 이 죄로 말미암아 세상에는 죄악이 관영해졌고, 나라들마다 그리고 그 나라를 다스리는 군왕들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습으로 그들의 방향이 있게 되었던 겁니다. 아니 모든 사람이 그러한 방향으로 있게 되었던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대적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들에 의해 손상을 입기라도 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저들은 다 땅에 있을 뿐입니다. 아무리 땅에서 많은 나라가 동맹을 맺고, 군왕들이 협력을 할지라도 저들이 하늘에 닿을 수 있는가? 없습니다. 아니 비유적으로 말해서 그렇지 하나님의 능력은 말씀으로 모든 만물을 지으셨기 때문에 말씀 한 마디면 모든 만물을 다 무()로 돌릴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땅에서 하나님을 대적한다고 동맹을 맺고, 협력을 한다고 해 봐야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오히려 그들을 비웃을 뿐입니다. 아니 비웃다가도 때가 되면 분을 발하시고 진노를 내리실 뿐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영원 전에 선택한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그들을 다스릴 한 왕을 세운다는 데 있습니다. 그것이 6절입니다.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오늘 우리가 보게 되는 7절 이하의 말씀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부분이 더욱 부각되어 설명되는 내용입니다. 우선 7절 말씀을 보시면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방금 우리가 6절 말씀도 읽었지만 6절에서도 내가란 단어가 나오고, 7절에서도 내가란 단어가 나옵니다. 그러나 6절에서의 내가7절에서의 내가는 다릅니다. 2절에 보면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에 대한 내용이 있는데, 6절의 내가는 여호와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그리고 7절의 내가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중보자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중보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시겠다, 교회의 머리로, 또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왕으로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시는 부분이 6절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세워진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호와의 명령은 전하노라하면서 말씀하시는 내용이 7, 그리고 8절과 9절까지 연결이 되고 있는 겁니다.

일단 오늘 본문 7절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는 자로서 세워졌다는 것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6절에서 분명 여호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거룩한 산 시온에 왕으로 세웠다고 말씀하시지만, 여호와의 뜻과 상관없이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 여호와의 뜻과 부합되어 다스리는 왕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인성을 취하셨을 때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시고 행하신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뜻과 부합되는 것만 말하고 행했습니다. 몇몇 구절만 말씀드리면 요한복음 4 34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한복음 5 30에도 보면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한복음 6 38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심지어 요한복음 7에서는 어떤 말씀까지 하셨느냐? 18입니다.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모든 일은 자신의 영광을 구한 일이 아니라, 자신을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일이었던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만 전하고, 하나님의 뜻만 성취하고자 했던 것이 인성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방향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가장 먼저 말씀하시는 내용이 뭔가? 자신의 존재에 관한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여러분, 예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물론 성경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아들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시편 2편을 기록한 다윗과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다윗과 언약을 맺으실 때 다윗으로부터 태어날 자, 가깝게는 솔로몬과 관련해 이런 말씀을 하기도 했습니다. 사무엘하 7 14절과 15입니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여기 보면 사울이 나오는데, 사울의 경우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궁극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경우 아들로 불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요, 솔로몬은 아들인 것입니다. 이런 관계이다 보니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범죄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약속하신대로 사람의 매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기도 했습니다. 징계하시되 사울처럼 하나님의 은총을 빼앗지는 않았던 겁니다. 바로 하나님은 아버지시요, 그의 백성들은 아들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은 누구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들이라고 하는 것하나님의 백성 된 자들에 대해 아들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차이냐? 하나님의 백성들은 양자로서 아들입니다. 입양된 자!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 본성적인 의미에서의 아들이십니다(JS 참조).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이 그림자인 다윗을 가리켜 말씀하고 있는 내용이라면 입양된 자로서의 하나님 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바로 본성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겁니다. 특히 오늘 본문 7절 말씀을 히브리서 15절에서 인용하는데, 그 부분만 읽어드리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천사보다 뛰어나신 분이시란 걸 알리는 것이 히브리서 1장의 내용인데, 거기서 뭐라고 말하느냐? 천사 중에 아들이라는 호칭을 돌린 대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시냐? 아들로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인용된 말씀의 앞뒤 부분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피조물 가운데 으뜸, 피조물 중에 가장 먼저 창조된 그런 분으로 말씀하지 않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이단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이단이 아리우스주의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지만, 피조된 아들, 피조물들 가운데 가장 먼저 창조되신 자로 이해를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며, 창조하신 모든 만물을 친히 다스리시고 보존하시는 분이라고 말씀합니다(1:2-3). 모든 천사들이 경배해야 할 대상이시며(1:6), 주의 손으로 지은 피조 세계는 멸망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자신은 영존하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분으로 말씀하십니다(1:11). 요한복음 1 1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여기서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하면서 하나님과는 구별된 존재임을 말씀하시지만, 곧바로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바로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분명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신명기 64절에 보면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분 하나님 안에 세 위격이 존재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이것이 성경을 통해 계시하신 하나님의 존재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세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정통 기독교 신앙은 한 분 하나님 안에 세 위격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성부도 하나님이시요, 성자도 하나님이시요, 성령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세 하나님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성부가 무한, 영원, 불변하신 분으로 계시다면, 성자 역시 무한, 영원, 불변하신 분으로 계시고, 성령 역시 무한, 영원, 불변하신 분으로 계십니다. 성부의 영광과 성자의 영광, 성령의 영광이 다르지 않으며, 성부의 권능과 성자의 권능, 성령의 권능이 다르지 않습니다. 영광과 권능이 동등합니다. 다만 성경이 우리에게 계시할 때, 다시 말해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어 말씀하실 때 어떤 위격에 대해서 아버지로, 또 어떤 위격에 대해서는 아들로, 또 어떤 위격에 대해서는 성부와 성자가 보내시는 분으로 표현하면서 하나님의 영 혹은 그리스도의 영, 직접적으로 성령으로 말씀하시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 이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이 너는 내 아들이라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천사들에게 돌려지지 않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을 때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과는 다르다는 것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양자로서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의 속성상 무한, 영원, 불변하신 분이시고, 영광과 권능 또한 동일합니다. 그런 분을 어디에 세우셨는가? 시편 26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왕으로, 교회의 머리로 세우신 겁니다.

 

그럼 그런 분을 세우셔서 무엇을 하시는가? 8절을 보시면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앞서 7절이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에 대한 부분이라면,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무엇인가? 이방 나라를 유업을 삼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이방 나라를 자신의 소유로 삼는 일인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지난주에 살핀 것처럼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밉니다(1).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기를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합니다(2).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는 마음으로 살아갈 뿐입니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그들 가운데서도 자기 백성을 불러내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무엇이 필요하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셔야 했습니다. 신성으로서는 본래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창조주 하나님이시지만, 인성을 취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권세를 받아야 했던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 8절은 어떻게 시작하느냐? “내게 구하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성으로서는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시지만, 인성을 취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한다는 이해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유대인, 이방인 할 것 없이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인성을 취하셔서 오셨고, 이 땅에서 주의 뜻을 따라 모든 일을 성취하셨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내어놓으셨고, 내어놓으실 뿐 아니라 죽었다가 다시금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오르시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본래 신성으로서는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모든 만물을 친히 다스리는 분이시지만, 인성을 취하시고 난 뒤에는 그의 모든 사역을 마치셨을 때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받으셨습니다.

이것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말씀이 빌립보서 2인데, 거기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2:6-11) 특히 여기 보면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도록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자만이 아니라, 죽은 자들까지 포함한 모든 피조물의 주인으로서의 권세를 받으신 겁니다. 모든 피조물들을 심판하실 수 있는 권세를 받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겁니다.

 

이런 권세이기에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만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이 아닌 자들에 대해서는 심판하실 수 있는 것을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9절을 보시면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비록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함이긴 하지만,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마치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리시고 질그릇 같이 부수는 그런 진노가 반드시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 있어 주의해야 할 것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린다, 질그릇 같이 부순다고 하니까 이 땅에서 마치 그리스도께서 저들과 전쟁을 하듯 그렇게 진노하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잡혀 가실 때 베드로가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자른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뭐냐?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26:52) 이 말씀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빌리도 앞에서는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18:36) 그런 분이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들에 대해 칼로서 저들에게 진노하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럼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뭐냐? 이 부분을 이해하기 먼저 요한계시록 19 15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예리한 검이 나와 철장으로 다스린다고 하는데, 그것이 어디로부터 나오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입으로부터 나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 8로 가시면 그분의 입으로 무엇을 하시느냐?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결국 하나님의 입으로, 그리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렇게 하겠다고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일을 하시되, 특별히 하나님과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에 대하여 분노하며 헛된 일을 꾸미는 자, 그리고 대적하는 자,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려고 하는 자들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만으로 능히 깨뜨리고 부술 수 있다고 알리고 계신 겁니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증거 하실 때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복음이 증거 되지 않았다면 그나마 자기 자신의 본성대로 살아가겠지만, 복음이 증거가 되었다는 건 뭐냐? 그들의 실상이 밝혀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이 죄인이라는 것, 그들이 지금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다는 것, 심지어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대적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지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 자체이신데, 그런 말씀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다는 것은 장차 있을 심판을 더욱 확고히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복음을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은 이미 그것 자체가 심판과도 같은 것입니다. 말씀으로 깨뜨린다, 말씀으로 질그릇같이 부순다는 것은 이런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 자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그분의 복음을 거부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진노요, 하나님의 심판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그분의 통치는 자기 백성들에게만큼은 항상 은혜와 사랑으로, 그리고 온유하심으로 대하신다는 것도 이런 말씀의 이면으로 볼 때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세우신 것, 그것도 거룩한 산 시온에 세우신 것은 바로 그의 백성들을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백성들을 위해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또한 자기 백성들을 위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또한 자기 백성들을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럼 거기까지만 하셨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 백성을 위해 다시금 살아나셨습니다. 자기 백성을 위해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자기 백성을 위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권세로서 지금도 모든 만물을 친히 다스리고 계시는 겁니다. 비록 세상의 군왕들과 관원들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를 대적하지만, 그런 그들까지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에 교회는 결코 두려워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방 나라가 분노하며 민족들이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한다고 하더라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라는 걸 아셔야 합니다. 아니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머리이시기 때문에 몸 된 교회에 대해서도 분명 세상은 분노하며 대적하는 일이 있습니다. 아니 원리적으로 볼 때 세상의 방향은 언제나 그리스도와 교회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혹 교회가 이웃 사랑의 정신을 따라 뭔가를 할 때는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시편을 통해 말씀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위해 이 땅에 오셨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온 세상 곳곳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불러낼 것이다. 그러나 그를 거부하는 자들은 진노와 심판 외에는 없다복음을 전하게 되면 반드시 분노하며 대적하는 일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외적으로 그런 모습을 가지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와 그의 몸 된 교회를 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현상이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은 이미 영원 전에 택하신 자기 백성들만큼은 반드시 죄악 가운데서 건지시고, 하나님의 왕국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그런 모습을 볼지라도 하나님 앞에는 질그릇과 같다는 것도 기억하셔야 합니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요, 하나님의 백성들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최후 심판을 위하여 다시금 재림하실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지만, 장차 그 권세로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때문에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가 없는 것처럼,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는 자가 잘 되는 것처럼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최후의 날에도 반드시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리시고, 질그릇 같이 부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저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때는 단지 말씀으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몸 된 교회는 이 땅에서 인내함으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성취될 때까지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기다리되 대적자가 있으니까 벌벌 떨면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왕 되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만물에 대한 통치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그리고 그 통치권으로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실 것이기 때문에, 좀 더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이미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승리가 우리의 것으로 있기 때문에 두려움 없이, 오히려 그분을 믿고 의지하는 마음으로 담대하게 가다릴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엄중한 진노와 심판이 있다는 걸 알리면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10절을 보시면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재판관들아 너희는 교훈을 받을지어다지금까지 여호와를, 그리고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자를, 또한 그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교회를 대적하는 자로 있었지만, 더 이상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 지금도 심판하시지만, 최후 심판이 오게 되면 더 이상 회개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회가 주어질 때,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듣게 될 때 회개할 것을 요청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특히 여기 보면 군왕들아 지혜를 얻으며 재판관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아무리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고 아무리 어떤 것에 대하여 판단할 수 있다 하더라도 주의 교훈만이 참된 지혜라는 걸 말씀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주의 교훈을 통해 참으로 지혜로운 자는 어떤 사람이냐 했을 때 오늘 본문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역으로 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 어리석은 자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않는 자, 그도 역시 어리석은 자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을 섬기되, 경외함으로 섬기는 자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에 즐거워할 수 있지만, 그런 즐거움이 하나님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즐거워할 수 있는 자가 지혜로운 자인 겁니다. 구원과 관련해서 이해하자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으로만 안심하는 문제가 아니라, 빌립보서 2장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하신 것처럼(2:12) 항상 자신을 살피는 자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인 겁니다.

특히 여호와를 섬긴다고 할 때 그의 아들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바른 섬김이 될 수 없다는 것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섬긴다 할지라도 아들을 통하여 섬기지 않는 이상 그것은 참된 섬김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여러분, 입을 맞춘다는 말은 신하들이 그들의 왕에게 바치는 존경에 대한 엄숙한 의식이나 상징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경의를 표하는 것이요, 그의 신분과 권세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중보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웠다면 그분을 인정하라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자 한다면 반드시 누구를 믿어야 하느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 6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누구를 통해서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느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중보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가톨릭의 경우 예수 그리스도 외에 마리아, 그리고 여러 성인들이 중보자 노릇을 하고 있고, 심지어 사제들조차 중보자나 되는 것처럼 고해성사를 받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우신 아들 외에 다른 중보자를 세우는 것, 다 불법일 뿐입니다. 요한복음 5 23에서는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말씀하시는데, 아들 외에 다른 중보자를 세우는 것은 이미 아들에 대한 공경도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하자면 그의 아들에게 입 맞추되, 거짓된 입맞춤일 뿐입니다. 존경에 대한 엄숙한 의식이 아니라 거짓된 의식일 뿐입니다.

실제로 가룟 유다가 그렇게 했던 것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넘길 때 누가 예수인가를 알려주기 위해 입을 맞추었습니다(26:48-49). 그러나 그 안에는 존경에 대한 엄숙함은 전혀 없었습니다. 거짓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가톨릭이 그러한 길을 걷고 있는 겁니다. 아니 오늘날 WCC라고 해서 세계교회협의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말로는 화합, 일치, 관용, 평화, 사랑이라는 말을 내 걸고 있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 예수 그리스도께 입 맞추고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종교 단체와 입 맞추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의 아들에게 입 맞추지 않을 때, 혹은 입 맞춘다고 하더라도 가룟 유다와 같이 거짓된 입맞춤일 때 진노 외에는 없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셔야 합니다. 다시 12절을 보시면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진노하시되 길에서 망한다는 것은 어떤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지만, 그런 목적지에 다다르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망하게 하신다는 그런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급하게 진노하시는지, 길을 가다가 마치 벼락에라도 맞은 것처럼 망하게 되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런 말씀이 있다고 하여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생각하지 못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에게 입 맞추지 않는 자들에게 진노보다 오래 참으심으로 대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오래 참으신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오래 참으시는 건 아니라는 걸 아셔야 합니다. 이미 9절에서 심판을 경고하시면서 10절을 통해 회개할 것을 알리셨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라고 말씀하셨고, 여호와를 경외하기 위해 그의 아들에게 입 맞추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진노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평온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 하나님께서 불러 가실지 모르는 것입니다. 더 이상 회개할 기회가 없게 되는 때가 있다고 경고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시편 2편을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물론 여호와께 피한다고 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 피하는 자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피하는 자, 그가 복된 자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인생에 있어 가장 큰 복은 뭐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가장 큰 복입니다. 하나님 외에 우리가 의지할 분이 없다는 걸 알고, 그분만을 의지하는 것이 가장 큰 복인 것입니다.

세상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자 합니다. 오히려 우리가 이미 살폈던 것처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자유요, 복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서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더 의지하고 있는 것이 모든 인생들의 공통된 모습 아닙니까!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물질입니다. 물질이 많으면, 통장에 잔고가 넉넉하면, 그리고 이런 보험 저런 보험 많이 들어놓으면 마음에 안심이 되는 것 아닙니까! 다 무엇의 노예냐? 물질의 노예인 것입니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죄의 노예인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결코 그것을 복으로 생각해선 안 됩니다. 오늘날 어떤 교회들은 기복주의 신앙에 빠져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자체가 복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했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복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참된 복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자체입니다. 창세기 151절로 하자면 하나님만이 지극히 큰 상급이십니다. 하나님이 지극히 큰 상급이시기 때문에 주어진 어떤 것도 주신 자보다 크지 않다는 걸 기억하셔야 합니다. 혹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간다고 하니까 천국이 가장 큰 상급으로 생각하신다면 그것도 착각입니다. 천국보다 더 큰 상급이 하나님 자신입니다. 이걸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천국도 그러하다면 세상의 것은 어떻겠습니까?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11절과 12절이 우리의 복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경외함으로 그를 섬기는 것, 또한 그분 앞에서 떨며 즐거워하는 것, 여호와만을 의지하는 것, 이것이 성도의 복입니다. 혹 이런 복된 자로 있지만 세상적으로 볼 때 좀 넉넉지 못할 수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좀 약할 수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좀 모자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상관없이 여호와를 경외하고 있다면, 또한 경외함으로 그를 섬기고 있다면, 나아가 그분 앞에서 떨며 즐거워하는 자로 있다면 그것보다 큰 복은 없다는 걸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복을 누구에게 주시느냐?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세상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하지 않는 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비웃으실 뿐입니다. 비웃으시면서 무엇을 준비하고 계시느냐? 심판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때문에 교회는 그런 세상에 대해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걸 기억하셔야 합니다.

오히려 교회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누구냐?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입 맞추어야 할 대상은 오직 그의 아들밖에 없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아들 외에 다른 것에 입 맞추게 된다면 진노 외에는 없습니다. 아니 아들에게 입 맞추는 것처럼 하면서 다른 마음을 품는다면 그것 또한 합당하지 않다는 걸 기억하셔야 합니다. 무엇만이 참된 복이냐?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 그것만이 참된 복입니다. 이 복을 참된 성도로서 누리며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