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시편 4편 1-8절
주의 얼굴을 비추소서
지난 시간에 본 시편 3편은 표제가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라고 되어 있음으로 시의 배경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반면 오늘 보게 되는 시편 4편은 표제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현악에 맞춘 노래” 따라서 정확하게 어떤 배경을 가지고 이 시가 기록되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울의 박해를 받던 시기나, 아니면 시편 3편처럼 그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이미 살핀 시편 3편처럼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는 상황이고, 그런 부르짖음은 다윗이 어떤 어려움 가운데 처했음을 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칼빈의 경우 본 시편의 문맥을 보게 되면 다윗이 도망자나 망명자로 있을 때 이 시를 썼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배경으로 사울의 박해를 받던 시기로 생각하고 있는데, 특히 2절에서 ‘어느 때까지’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 그를 향한 박해가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는 걸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압살롬의 반역보다는 사울의 박해가 이 시의 배경에 더 가까울 것으로 추측하고 있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배경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없다 할지라도 본문의 내용을 통해 지금 다윗이 어려움 가운데 처해 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이미 살핀 시편 2편이나 시편 3편처럼 다윗을 대적하는 무리들로부터 어려움에 처해 있는 것이고,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고 구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고 있는 것이 시편 4편의 내용인 것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오늘 본문의 내용을 살피자만, 우선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여기 보면 ‘내 의의 하나님이여’라고 부릅니다. 성경의 다른 번역본을 보거나 혹은 주석들을 보면 이 부분이 두 부분으로 나눠 설명이 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의’가 하나님을 수식하는 쪽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의’가 다윗을 수식하는 쪽입니다. 참고적으로 말씀드리면 저희 교단에 계신 김성수 목사님의 책을 보면 이 부분과 관련해 ‘나의 의로우신 하나님이라’는 뜻인지, 아니면 ‘나의 의가 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인지 명확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두 가지 의미가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는데, 매튜 헨리 주석을 보면 이 부분과 관련해 이중적인 의미를 다 사용하고 있는 걸 보게 됩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내가 의롭게 되도록 하시는 분!’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이 ‘내 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때 두 가지를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의로우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판단은 참됩니다. 하나님의 판단에 거짓이 있을 수 있는가?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이런 ‘의’는 모든 일에 대하여 선악 간에 심판하실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이 됩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만이 이 세상의 유일한 심판자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런 ‘의’는 행하시는 모든 일에 있어서도 불의함, 죄악됨이 있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은 언제나 옳을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는 다윗 스스로도 자신을 의롭다고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때 의는 그 스스로의 의로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 의의 하나님’, 즉 나에게 의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란 사실을 드러내고자 한 말입니다. 실제로 모든 인간은 누구도 예외 없이 의롭다 할 수 있는 자가 없습니다. 로마서 3장 10절의 말씀처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인입니다. 다윗만 보더라도 그가 간음이라는 죄, 그리고 살인이라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때서야 비로소 죄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편 51편에서 그가 고백하기를 태어날 때부터, 아니 태어나기 전 모태에 있을 때부터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시51:5). 그런 그가 의롭다고 한다면 그 의는 그 스스로의 의는 아닌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내 의의 하나님이여’라고 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고 해 주셨기 때문에 의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음으로 의를 소유하게 되었다는 그런 의미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지금 다윗은 의의 하나님을 부르면서 자신의 의로움에 대해 호소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어려움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의 배경으로 추측하고 있는 사울과의 관계로서 이해하자면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 사울에게 의로운 마음, 그리고 충성된 마음을 가졌지만 사울의 경우 오히려 불의함으로 대하기 때문에 의의 하나님을 불러 자신의 의로움에 대해 호소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1절 중반부를 다시 보시면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다윗의 인생은 이미 여러 차례 곤란한 가운데 있었고, 그런 곤란한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서 너그럽게 대하신 일이 있었음을 상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그런 은혜의 역사를 베푸신 것처럼 지금의 상황 속에서도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것이고, 나의 기도에 응답해 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여러분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역사가 있다면 결코 그 은혜를 잊어버려선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생이라는 것이 얼마나 망각을 잘 하느냐? 원수에 대해서는 절대로 잊어버리질 않습니다. 잊어버린 것 같아도 불쑥불쑥 뛰어나올 때가 얼마나 자주 있는지 모릅니다. 가깝게는 부부 사이에서도 잊어버려야 할 것들은 잊지 않고 부부 싸움 가운데 꼭 튀어나오게 만드는 그런 기억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에 대해서는 얼마나 쉽게 잊어버리는지 모릅니다.
실제로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잘 잊는지 몇 일전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도 잊어버리고 원망, 불평하는 내용이 자주 등장합니다. 물론 어떻게 보면 기억하지 못했다고 말하기보다는 그들 속에 있던 죄악된 모습이 원망과 불평으로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광야 1세대가 죽고 난 뒤 2세대를 향하여 말씀하실 때 자주 말씀하신 내용 가운데 한 가지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 하나님께서 과거 너희를 향하여 베푸신 그 역사를 잊지 말라. 예를 들어 신명기 7장 18절과 1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로와 온 애굽에 행하신 것을 잘 기억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여 내실 때에 네가 본 큰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강한 손과 편 팔을 기억하라...” 우리가 잘 아는 신명기 8장 2절도 이렇게 말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그리고 만나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8:3b) 신명기 9장 7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때문에 여러분 인생에 있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신 바가 있다면 그것을 기억하여 더욱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혹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원망, 불평이 끊이질 않게 되는 겁니다. 아니 처음엔 부르짖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으면 금방 낙심하게 되는 모습으로 반응하게 되는 겁니다. 반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한다는 것은 오늘 본문의 다윗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비록 어려움이 찾아 온다할지라도, 또한 곤란한 상황 가운데 놓인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기억한다면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로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방향이 여기에 있어야 합니다.
특히 성도는 누구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다 경험한 자들입니다. 세상적인 어떤 일에 있어서는 경험한 바가 다를 수 있지만, 세상적인 일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적인 의미에서는 누구도 예외 없이 동일한 은총을 다 경험한 자들입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를 얻은 자이며, 그런 의 때문에 의인이라고 불리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으며, 그런 양자로서 장차 있을 심판 가운데 주님과 함께 왕노릇까지 하는 자입니다. 에베소서 표현으로 하자면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성도라면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다 받은 자들입니다. 이런 은총의 내용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우리에게 어려움과 곤란한 일이 생긴다면, 그리고 그런 일이 하나님의 섭리 아래서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안다면 이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찾고 구해야 하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바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이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찾고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절로 오시면 다윗은 시각을 돌려 인생들을 향하여 외치게 되는데, 칼빈은 이 부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의 기도의 행복한 결과는 그가 용기를 되찾은 가운데, 원수들이 분노를 저지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또한 도전하는 가운데 그들의 모든 음모를 두려움없이 무시해버릴 수 있었다는 데 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될 때 원수들에 대하여 두려워하던 마음이 이제는 용기를 얻어 그들을 향하여 외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다윗이 저들을 향하여 외쳤던 말은 뭔가?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 (셀라)” 일단 다윗이 ‘나의 영광’이라고 할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영광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영광은 다윗의 왕권과 관계된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들, 즉 다윗의 대적자들이 끊임없이 하는 일은 뭐냐?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은 뭐냐?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겠느냐?” 쉽게 말하면 아무리 하나님께서 주신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려고 해도, 심지어 그 일에 있어 끊임없이 시도하고 또 시도한다고 해도 헛수고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저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려 할지라도 하나님 편에서는 헛된 일이요, 거짓된 일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한번 주시기로 한 영광은 어떤 인생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미 시편 2편을 통해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민다고 했을 때, 그 일에 대하여 하나님은 웃으실 뿐이라는 걸 살폈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는 방향으로 있지만, 하나님은 그때도 여전히 비웃을 뿐이라고 살폈습니다. 모든 인생이 하나님께 대하여 반대편에 서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떤 말씀까지 하시느냐?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도 요한에게 보여주시는데,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있지 않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계21:1). 달리 말하면 천지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정확하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면 말씀 한 마디로 유(有)에서 무(無)로 돌릴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신 겁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영광을 주기로 했다면 그 일에 있어 실패할 수 있는가?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려 하는 자들이 많다고 해서 그것이 실패할 수 있는가?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 1절과 관련하여 보자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의를 주셨다고 할 때,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로서 일방적으로 주셨다고 할 때 의롭다고 하는 것 자체가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광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런 의를 세상이 빼앗을 수 있는가? 결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의는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목숨을 내어주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고, 그가 살아나심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하지 않는 이상 결코 우리의 의를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 인생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아니 세상을 주관하고 있다고 표현하기도 하는 그런 사탄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성으로서는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인성으로도 이미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만물에 대하여 다스릴 권세를 부여받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8절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신 의를 빼앗아 갈 수 있는 길은 어디에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 헛된 일이며,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인생들은 그런 헛된 일을 행하길 좋아합니다. 그리고 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거짓된 일을 행하길 기뻐합니다. 단순히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된 일 행하는 걸 기뻐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일이 그들의 사명인 것처럼 모든 열정과 열의를 다 쏟아 부을 정도입니다. 이것이 바로 악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물론 이런 악인들로 인하여 때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영광이 땅에 떨어져 버린 듯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악인들이 성공한 줄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우쭐대기도 하고, 거만스럽게 잘난 체 하면서 버릇없이 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영광은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잠시 그 영광이 감춰져 있는 듯 보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아예 없앨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저들을 향하여 뭐라고 말하느냐? 그것은 헛된 일이요, 거짓된 일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3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2절에서 인생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신 영광을 빼앗을 수 없다. 빼앗고자 한다면 그것은 헛된 일일 뿐이다”고 했다면, 이제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택하시되, 누구를 위하여 택하셨는가? 자기를 위하여 택하셨다고 말씀하실 정도입니다. 그들의 경우 분명 헛된 일임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끊임없이 대적하고 또 대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과 관련된 일이 단지 그들 자신의 일로서 여기질 않는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들의 일은 곧 하나님 자신과 관련된 일로서 반응하십니다. 간단히 말해 하나님의 백성들의 실패는 곧 하나님의 실패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결코 자기 백성들의 영광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를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은 매우 큰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의를 주시고 그냥 내버려 두신다면, 그래서 의로움이 아니라 불의함으로 나타나게 되고, 결국 불의함으로 생을 마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떤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이 실패한 것과 같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의를 주신 자들에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결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결코 실패할 수 없는 분이시기도 하시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자신의 영광을 두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영광에 훼손이 가도록 하는 일이 있는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자신을 위하는 것이 바로 자기 백성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자기 백성들에게 주신 영광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시는 겁니다.
특히 오늘 본문 3절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택하셨다는 말은 구별되다는 말과 같습니다. 구별하여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생들, 즉 하나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려는 자들과는 분명히 구별하여 세우신 것입니다. 그럼 구별하여 세우실 때 그들이 경건하기 때문에 경건한 자를 세웠다고 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다 죄인입니다. 경건한 자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그들 가운에 일부를 선택하셨는데, 바로 그런 선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친히, 그리고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구별시키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여기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 가운데 자기 백성으로서 선택한 자들이 있다는 것이고, 그런 택자들 역시 인생의 역사로 보자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고 말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그들을 구별하여 경건한 자로 세워가고 계신다는 걸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 3절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했을 때, 지금 다윗은 “너희가 아무리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려고 해도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위하여 택하신 이상 결코 그 일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알리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위하여 택하셨기 때문에, 또한 자기를 위하여 구별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자기 백성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분으로 계시다”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에게 주신 영광을 거두어 가시는 법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는 자들이 있을지라도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이 욕된 것이 될 수 있는가? 없습니다. 한번 의롭다 하시면 그 의를 빼앗아갈 자가 없다는 것이요, 한번 선택하셔서 구별시키셨다면 결단코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죄의 영향력 아래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래서 경건한 자로 있어야 하지만 마치 불경건한 자처럼 비췰수는 있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끝까지 지키시고 보호하셔서 구별된 자로 세워가고야 말겠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내용 앞에서 잊지 말아야 할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적어도 세상적인 표현으로 하자면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영예가 우리를 따라 다니고 있다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소위 우리가 뭐 하나 잘못했을 때 나뿐만 아니라 부모님까지 욕을 먹이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 된 자의 자리가 바로 그런 자리에 있다는 걸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데 게으르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게 하셨다면 그 의를 위하여 힘써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베푸신 은혜의 내용으로 보자면 다윗처럼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되기 위하여 부단히 주를 가까이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처럼 어려움과 곤란한 상황이 온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먼저 찾고 구하면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무엇인지 다시금 상기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택하셨다, 자기를 위하여 구별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자기 백성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신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다윗은 더더욱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걸 고백합니다. 3절 하반부에 보시면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내가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확신에 찬 내용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구할 때 가져야 할 것이 바로 이런 확신입니다. 내가 부를 때 그가 들으신다는 확신, 하나님을 찾고 구하면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확신! 그런데 그 확신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이냐? 1절에서 보자면 ‘내 의의 하나님’께 있습니다. 3절로 보자면 나를 선택하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리고 나를 선택하셨다면 반드시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실 수밖에 없다는 그 내용 가운데 있습니다. 아무리 대적자들이 조롱하고 핍박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한번 택하셨다면 결코 버리지 않는다는 그것이야 말로 기도 응답의 확실한 근거인 것입니다.
다윗은 계속해서 인생들을 향하여 말합니다. 4절을 보시면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셀라)” 다윗은 대적자들이 혹시라도 그들의 잘못에 대하여 회개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범죄하지 말 것을 요청합니다. 무엇보다 ‘떨며’라는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란 먼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나 위기의식이 반드시 동반될 수밖에 없음을 알리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역으로 말하자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지 않는 자, 끝까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주신 영광을 욕되게 하고자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대한 두려움이나 위기의식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들은 끝까지 자신들의 악한 행로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 대적자들, 악인을 향하여 하시는 말씀은 너희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죄를 범치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주신 영광을 욕되게 하는 일은 헛된 일이며, 거짓된 일이기 때문에 그런 일에 대해서 속히 멈춰야 한다고 알리십니다.
특히 여기 보면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라는 말이 있는데, 보통 낮에는 이런 저런 일을 하며 사람들과의 만남도 있기 때문에 이런 일에 대해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래서 잠자리에 누울 때, 이제 좀 한적해 지면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길 바란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너희의 행동을 깊이 생각해 보라는 그런 의미인 것입니다.
사실 이런 권면을 지금 다윗을 통하여 대적자를 향하고 하고 있지만 우리도 여기서 예외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의인으로 부름 받은 우리가 여전히 죄를 범하며 살아가는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이런 죄에 대해선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 두려워 할 필요는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죄를 범치 않는 자리로 더욱 나아가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좀 더 세심히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 다윗을 통하여 말씀하실 때 대적자, 악인을 향하여 하고 계신 말씀이고, 그런 의미에서 5절 말씀 역시 4절 말씀의 연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5절을 보시면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일반적으로 보자면 악인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올 때 결국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하나님만 더욱 의뢰해야 한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나 칼빈은 이 부분을 좀 더 깊은 내용으로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즉 지금 이 부분을 다윗과 사울이라는 입장에서 보자면 좀 더 엄밀한 의미를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은 그가 도망자로서 광야의 굴속과 험한 산속을 헤맬 때, 그리고 자기의 고국을 떠나 외지를 헤맬 때 언뜻 하나님의 교회로부터 유리된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사실 그때 사람들은 그를 성도의 조직과 교제에서 떨어져나간 회원으로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언약궤조차 그를 대적하는 대적자들의 손에 있었습니다. 제사의 주도권이 다윗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울에게 있었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고국을 떠났기 때문에 예배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던 겁니다. 때문에 그들은 위선자들이 우쭐대고 뻔뻔스럽게 행동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참 예배자의 행세를 했겠지만, 그러나 정작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만하게 남용할 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제사를 받지도 않으셨던 겁니다. 따라서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뢰할지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들의 위선을 질책하며 터무너없는 자랑을 하지 말라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것으로 칼빈은 해석합니다. “너희들은 건방지게 허세를 부리며 마음대로 제단에 제물을 바칠 수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너희들 편에 있는 것으로 자랑하지 말라. 내가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어 성전에 가까이 갈 수 없다고 해서 너희들은 내가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오히려 너희들이 하나님의 손에서 무슨 혜택을 바란다면 너희들은 전혀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너희들은 하나님의 제단을 부정한 제물로 더럽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오히려 그러한 제사에 대해 진노하실 뿐이다”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지 말라,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깨닫고 회개하여 하나님 앞에 의의 제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만을 진실하게 의뢰하라는 말씀인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적자의 반응은 어떤가? 6절을 보시면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그러니까 대적자, 악인들은 이미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선이 나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 때 선은 악에 대한 반대적인 측면보다도 그들이 최종적으로 구하는 최고선, 철학적인 의미에서 이해하자면 “인간 행위의 최고의 목적과 이상이 되는 행위의 근본 기준이 되는 선”을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선에 대해 결국 저들의 생각과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의 생각은 다를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악인이 생각하는 선은 무엇입니까?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한 것, 이것이 저들의 선입니다. 쉽게 말해 세상적으로 잘 사는 것, 잘 되는 것, 이것이 그들의 선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악인들의 물음에 답변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그리고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춰달라고 간구하는 자의 최고선에 대한 고백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세상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한 것으로 저들의 기쁨을 삼지만, 다윗의 기쁨, 성도들의 기쁨은 그것보다 훨씬 더 좋은 기쁨,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췰 때만 주어지는 기쁨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좀 길지만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윗은 마음에 불고 있던 단 한 가지 소원을 거의 모든 인간들이 홀려 있는 여러 가지 소원과 대조시키는 것으로 나는 확신한다. 그리고 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호의에 관심있는 자들이야말로 참으로 행복하며 소망과 인내를 통해서 때가 찰 경우에 더 나은 생활을 얻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이방인으로 살아야 옳다는 원칙을 주장하면서도 그것을 실천하지 않으므로 그들은 좋기는 하지만 멸망하고 없어질 것들로 만족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외적인 번영만 누린다면 하나님에 대한 큰 관심에 대해서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들이다...다윗의 말에는 먼저 번영을 원하면서 하나님의 호의를 무시하는 자들이 모두 얼마나 바보짓을 하는지가 암시되어 있다...그는 보다 더 높은 것을 생각하지 않고 육신의 안이와 쾌락에 전적으로 치우치고 이것을 누리는 것만으로 안주하거나 만족하는 천하고 지상적인 사람들의 악을 질책하고 있다...반대로 다윗은 자신에게 비록 모든 좋은 것이 결핍된다 하더라도 하나님 아버지로서의 사랑 하나면 나머지 모든 것은 다 잊어버려도 그 이상 충분히 보충하고도 남는다는 점을 증거해 주고 있다...이 구절은 확고부동한 결심으로 하나님 안에 포근히 쉬게 되고 그 안에서 모든 지상적인 혜택이 흘러넘침에도 불구하고 그분 안에서 만족을 취하지 못하는 자들은 비참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반면에, 신실한 자들이 비록 무수한 역경에 처하여 이리저리 밀려다니지만, 그들이 행복한 것은 오직 흑암을 빛으로 변화시키는, 아니 사망 그 자체마저도 생동하는 생명으로 부활시키는 하나님 아버지의 얼굴의 광채가 그들에게 비취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자들입니까? 1절 이하에서부터 쭉 봐왔지만 우리의 영광은 세상에 있지 아니합니다. 우리의 영광은 나를 의롭게 하신 하나님, 그리고 나를 선택하신 하나님, 그리고 세상이 줄 수 없는 그런 기쁨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광은 하나님 자신이며, 그런 의미에서 다윗은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 자신을 구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영광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을 영광으로 생각합니까? 지금 다윗을 대적하는 자들이 생각하는 곡식과 새 포도주에 우리의 마음이 빼앗겨 있는 것은 아닙니까? 성경은 결코 세상의 부귀영화를 영광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걸 잊지 마셔야 합니다. 우리의 영광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가 받아 누리고 있는 의롭다 하심, 그리고 우리를 선택하신 것,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아니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영광인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우리는 이미 선물로 받은 존재인 것입니다. 때문에 그 어떤 세상의 영광으로도 우리는 마음이 빼앗길 수 없는 자들이란 걸 명심하셔야 합니다. 아니 그것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 마음에 동요가 있을 수 없는 자들이란 걸 명심하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 8절로 오시면 바로 이런 자로서 다윗은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됩니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비록 대적자들이 있고, 그들이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미 우리가 지난주에 살폈지만 시편 3편 6절을 보시면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다르지 않는 말씀입니다. 천만인, 아니 그것보다 몇 배, 몇 십 배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둘러 진 친다 할지라도, 심지어 시편 2편에서 이방 나라들, 그리고 민족들이 합심하여 몰려온다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인 이상 그 가운데서도 안전하게 살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이 성도의 고백인 것입니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마셔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세상의 기쁨인 돈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세상의 기쁨인 명예나 권력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기뻐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다윗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하는 것, 하나님만이 우리의 최고 상급이 되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의 목적을 말할 때 우리의 신앙 선배들은 이렇게 고백한 바가 있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 “인생의 제일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답 “인생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즐거움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자신에게 있고,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들에 있습니다. 성도의 마땅한 바는 바로 여기에 항복해야 합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바로 하나님 때문에 이겨낼 수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 8절의 고백이 그 고백인 것입니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부디 주의 얼굴만을 구하시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것 외에 세상의 것으로 우리의 기쁨을 삼는다면 그것은 이미 시편 1편에서 본 것처럼 악인들의 꾀를 좇는 것이고, 죄인들의 길에 서는 것이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인생입니다. 이것을 명심하시고, 다윗처럼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라는 고백이 우리에게 끊이지 않는 인생으로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