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시편

141005설교 / 시편7편1-10절 / 의로우신재판장하나님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4.10.05|조회수743 목록 댓글 0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시편 71-10

의로우신 재판장 하나님

 

우리가 오늘 보게 되는 시편 7편은 그 표제로서 다윗의 식가욘, 베냐민인 구시의 말에 따라 여호와께 드린 노래로 되어 있습니다. 식가욘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그 의미가 정확하지 않지만, 일반적으로는 일정한 멜로디나 노래의 종류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표제에서는 이것보다 더 중요한 배경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베냐민인 구시의 말에 따라 여호와께 드린 노래로서 지금 이 시편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럼 구시는 누구인가? 사실 성경에 보면 이 구시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오늘 본문이 밝히고 있는 것처럼 그는 이스라엘 초대 왕인 사울과 같은 베냐민 출신의 사람으로서만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한 말은 다윗에 대한 중상모략이라 할 수 있습니다. 4절 말씀과 함께 생각하자면 화친한 자에 대해 악으로 갚거나 대적에게서 까닭 없이 빼앗은 일이 없는데, 마치 그렇게 행한 자처럼 모함하는 일이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 억울함을 누구에게 호소하느냐 하면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여러분, 사무엘하 16에 보면 시므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사울의 친족 중 한 사람으로서 다윗을 저주했던 인물입니다. 그의 저주 내용을 보면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이어서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기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느니라...”(삼하16:7-8) 뿐만 아니라 사무엘하 20에서는 베냐민 출신의 세바 역시 반란을 일으키는 내용이 있는데(삼하20:1-2), 이런 내용과 함께 생각해 볼 때 지금 구시 역시 사울과 같은 베냐민 출신이고, 다윗에 대하여 중상모략한 자로 있기 때문에 사울을 따르는 자, 혹은 사울의 친족 중 한 사람으로 추측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구시의 중상모략은 다윗을 대적함과 동시에 사울을 위한, 그리고 자기 동족을 위한 것으로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세우시고 사울을 폐하실 뜻을 가지고 계셨지만, 그런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 동족이라는 이유로 무분별하게 사울 편만 드는 것이 구시라 할 수 있는 겁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다윗은 먼저 이렇게 말합니다. 1절을 보시면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아오는 모든 자들에게서 나를 구원하여 내소서여기 보면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라고 부르고 있는데,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생각하도록 하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부를 때 다양한 수식어로서 하나님을 부릅니다. 창조주 하나님, 구속의 하나님,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 의로우신 하나님 등, 동일한 하나님을 그분의 속성이나 혹은 그분의 일하심을 생각하면서 부릅니다. 혹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도 하게 되는데, 지금 다윗이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면에서 생각해 보자면 다음과 같은 뜻으로서 하나님을 부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으로서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는 우리와는 다른 분이시지만, 그런 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속으로 나를 불러주신 것이 하나님! 달리 말하면 은혜언약 안에 있는 자로서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고, 나는 그의 백성이라는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자신의 부르짖음이 아무런 관계가 없는 분에게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또한 어떤 신이든지 자신의 부르짖음에 응답하는 자가 내 하나님이 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를 그의 백성 삼아주신 하나님, 오늘날로 말하자면 성경을 통해 계시된 바로 그 하나님께 다윗은 아뢰고 있는 겁니다.

그럼 다윗이 하나님께 아뢰고 있는 내용은 무엇인가? 본래 구시의 말 때문에 이 시편을 기록하고 있지만 단지 그 한 사람만이 다윗의 대적자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위시하여 그와 같은 사고를 가진 자, 즉 사울의 편에 서서 다윗을 대적하는 모든 자가 다윗을 해하려고 쫓아온다고 말합니다. 죽음의 위기 가운데 있다는 것이고, 많은 무리들이 쫓아오기 때문에 마치 사방이 대적자들로 가득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다윗은 누구에게 피하느냐? 하나님께 피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외에 나를 구원할 자가 아무도 없다는 의미에서 1절을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을 보호하고 안전히 지킬 수 있는 분이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을 부르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다음절에서 더욱 분명히 고백하는데, 2절을 보시면 건져낼 자가 없으면 그들이 사자 같이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여기 보면 대적자들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하면 사자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 한글 번역은 그들이라고 번역함으로 복수로서 말하고 있지만, 본래 원문에서는 이 단어가 단수입니다. 그러니까 1절에서는 복수로 되어 있고, 2절에서는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2절에서는 1절 복수로 표현되고 있는 그들 가운데 특히 구시라는 인물이 더더욱 사자같이 달려들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구시 역시 사울을 따르는 인물로서의 대표성을 의미하기 때문에 지금 대적자는 단지 구시만이 아니라 사울을 따르는 많은 무리들로 생각해도 무방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에 대하여 다윗은 무엇으로 비유하고 있느냐 하면 사자로 비유하고 있고, 사자로서 비유하기 때문에 그만큼 강력하며 잔인하다는 것을 드러내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볼 때 지금 다윗이 고백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외에는 자신을 구원할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아뢰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 스스로도 사자와 같은 자들에게서 벗어날 수 없고, 또 사자와 같은 자들에게서 다윗은 건져낼 수 있는 사람도 없기 때문에 다윗은 누구를 찾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 외에는 건져낼 자가 없고, 하나님 외에는 자신을 보호할 자가 없기 때문에 가장 먼저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간청하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런 말씀 때문에 대적자가 있어야지만 그리고 어떤 사람의 도움도 더 이상 없을 때만 하나님을 찾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3:6). 때문에 시편의 이런 기록들이 어려울 때만 하나님을 찾도록 한다고 보시면 안 됩니다. 오히려 범사에 그를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그러나 어려움 가운데 놓일 때는 더더욱 하나님을 찾고 불러야 한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도 항상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자로 살아가야 하지만, 혹 우리 삶 가운데 어려움이 찾아온다면 더더욱 하나님을 찾고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오늘 본문 3절 이하 5절을 보시면 자신의 무고함을 아뢰면서 구시의 말이 중상모략임을 하나님께 아뢰게 됩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런 일을 행하였거나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내 대적에게서 까닭 없이 빼앗았거든 원수가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게 하고 내 영광을 먼지 속에 살게 하소서 (셀라)여기도 보면 1절과 마찬가지로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그가 하는 말이 뭐냐? 그의 말처럼 내가 행하는 자로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나의 영혼을 원수에 손에 붙이셔도, 그래서 내 생명을 땅에 짓밟게 하셔도, 내 영광을 마치 먼지와 같게 하셔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자신은 그런 자로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그만큼 지금 구시의 말은 중상모략이라는 것이고, 때문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도와주셔야 한다는 것을 아뢰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런 말씀 때문에 다윗에게는 아무런 점과 흠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앞서 우리가 배운 바 있는 시편 6편은 다윗의 시로서 그의 죄로 인한 영혼의 고통, 육체적인 고통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가 잘 아는 밧세바와의 간음 사건, 그리고 그의 남편인 우리아를 죽음으로 내몬 사건 등은 그도 역시 죄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아니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가 지은 시를 보면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51:5)고 고백할 정도입니다. 한 마디로 그도 역시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이요, 그런 원죄로 말미암아 자범죄까지 짓는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죄에 대한 책임이 그에게 있으며, 그도 역시 부패한 자로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이런 호소를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본성에 관한 문제로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성으로 하자면 누가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설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세리처럼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이런 기도를 올려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18:13) 그러나 지금 다윗의 고백은 이런 문제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저들의 말처럼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은 일이 있는가? 내 대적에게서 까닭 없이 빼앗은 일이 있는가?” 바로 이 문제인 겁니다. 우리의 모든 선행 가운데 분명 불순물이 있어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수준까지는 되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그 율법을 지키는 자로 있는가? 아니면 그것을 지키지 않는 자로 있는가?

그런 의미에서 다윗은 구시가 말하는 그런 자로 있지 않았습니다. 원수에 대하여 원수로서 대하고, 악에 대하여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에 대하여 선으로 갚았던 것이 다윗의 삶이었습니다. 실제로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은 사울의 경우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에 대하여 함부로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항상 사울에 대하여 선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선을 선으로, 악을 악으로가 아니라 악에 대해서도 선으로 갚는 일이 그에게는 있었습니다.

이런 성경의 증거를 통해 보자면 지금 구시의 말은 참인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중상모략인 것이고, 다윗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밖에 없는 상황 가운데 놓이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핍박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잘못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핍박을 받고 있는 상황. 그래서 다윗은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호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들의 거짓과 불의함 가운데서 나를 보호하시고, 핍박과 어려운 상황 속에서 나를 구원하옵소서.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교훈 받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성도는 저들의 중상모략이 실제 우리 삶의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원수를 원수로 갚거나, 악에 대하여 악으로 갚는 그런 삶은 우리의 원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통해 말씀하신 것이 우리의 삶의 원리가 되어야 하는데, 거기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5:38),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5:43) 어떤 면에서는 이것이 세상의 보편적 원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고, 또한 전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뭐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5:39),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5:44) 이걸 로마서에서는 이렇게도 말합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12:17-21)

지금 사울과 그의 지파에 대한 다윗의 자세가 그러했습니다. 비록 대적자로 있었지만 다윗은 그에 대한 존중이 항상 있었습니다. 물론 이방인들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진멸하는 일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일들 때문에 원수 사랑의 명령을 어긴 것이 아닌가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이런 부분은 하나님께서 저들의 죄에 대하여 벌하시는 성격으로서 다윗을 사용했다고 봐야 합니다. 때문에 당시로서는 진멸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스라엘의 시민법으로서 이해되어야지, 오늘날도 그런 명령이 주어질 수 있다고 보시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의 시민법이 폐지된 이상 오늘날 도덕법으로서의 명령은 방금 읽은 말씀처럼 모든 진노하심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원수를 원수로 갚는 일은 구약에서도 신약에서도 명령된 적이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심판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거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로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뭐냐?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그 원리입니다. 다윗이 사울과 그의 지파에 대한 자세가 바로 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사울과 그의 지파는 그런 다윗과는 전혀 다른 자세를 취했던 겁니다.

 

오늘 본문 6절 이하에서는 악인의 중상모략, 그들의 불의함에 대해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나길 원하는 마음으로 간구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우선 6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여 진노로 일어나사 내 대적들의 노를 막으시며 나를 위하여 깨소서 주께서 심판을 명령하셨나이다여기서 주의해야 될 것은 이런 기도가 있다고 해서 악을 악으로 갚는 방식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다윗 개인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으니까 보복심에서, 억울해서 이런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나길 원한다는 차원에서 이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 가운데는 누군가 나에게 해를 가하면 그것에 대한 보복심이 항상 있습니다. 눈은 눈으로 갚고, 이는 이로 갚고자 하는 본성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눈은 눈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 좀 더 보복하고자 하는 심리가 우리 안에는 있습니다. 왜 율법을 통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명령을 하셨는가? 우리의 보복심 때문입니다. 단순히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만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한 보복심이 있기 때문에 이런 명령까지 하셨던 겁니다. 그러나 더 깊은 뜻으로는 앞서 말씀드린 예수님이 율법 해석이라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어쨌든 믿는 자로 있지만만 그런 보복심을 가지고 기도하는 경우가 더러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기도는 하나님 앞에 합당한 기도가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지금 다윗의 기도는 그런 기도가 아닙니다. 할 수만 있다면 사울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과도 화목하고자 하는 마음이 다윗에게는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대적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자신을 향해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대적이요, 하나님의 교회를 향한 대적이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은 공의를 행하시는 분으로서 그런 자들을 가만히 두시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이런 기도를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대적자들을 향해서는 경고인 것이고, 다윗 편에서는 이것보다 더 든든한 것은 없다는 측면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으로 하여금 이런 기도까지 하게 하셨던 겁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 편에서 다윗에게 계시의 말씀으로서 기록하게 하신 내용이라는 걸 반드시 염두해 두셔야 합니다.

 

특히 여기 보면 여호와여 진노로 일어나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생각을 가질 때가 있느냐 하면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 빨리 도와주시지 않으면 마치 하나님께서 주무시고 계시는가!” 이렇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6절에 보면 나를 위하여 깨소서라는 말도 하는데, 다윗도 그런 생각을 가질 정도로 답답했던 것 같습니다. 시간과 관련하여 생각해 보자면 그만큼 오랫동안 어려움 가운데 있다 보니 답답한 것입니다. 어려움의 무게와 관련해서 생각해 보자면 그만큼 그 무게를 견디기가 힘들기 때문에 답답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런 가운데 기도하지만, 그런 어려움이 빨리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 더더욱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지만 응답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공의의 하나님이신데, 이 땅에 공의가 시행되기보다는 악이 더 횡행함으로 마치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있지 않는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부르게 됩니다. 부르되 공의의 하나님께서 일어나시고, 깨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리하여 저들의 노를 막아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다만 이런 기도를 한다고 할 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복수심이나 억울해서 하는 기도여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진노로 일어나 주시기를 기도한다고 해서 저들에게 진노가 쏟기를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는 악에 대하여 선으로 대하고, 또한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이런 말씀이 있기 때문에 공의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정을 아시고, 긍휼과 은혜를 베풀어 주시도록, 그래서 속히 이 어려움 가운데서 건져지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기도를 한다고 해서 당장 들어주신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최후 심판을 행하실 때까지는 매우 부분적으로만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 땅에서의 성도의 삶은 한편으로는 어려움 가운데서 그 어려움이 속히 해결되기를 기도해야 하지만, 동시에 이런 기도를 드리면서도 인내로서 끝까지 견디는 자로서 하나님을 불러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셔야 합니다. 아니 엄밀하게는 하나님께서 친히 성도들로 하여금 견인의 은총을 주실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죽어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혹은 최후 심판의 때가 올 때까지 하나님께서 그분의 은총으로 성도들로 하여금 끝까지 견디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견인의 은총을 주신다고 해서 어려움이 어려움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란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하나님을 찾고 구하되, 언제까지 그렇게 해야 하는가? 개인적으로 죽음의 순간이 올 때까지, 혹은 주께서 재림하셔서 최후 심판을 행하실 때까지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이 땅에서 가져야 할 모습입니다.

 

더불어 다윗을 통해 이런 기도를 하게 하시는 것은 모든 부분에 있어서는 아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에서 시행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에서 시행되지 않는다면 성도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은 너무나도 비참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때도 하나님께만 모든 소망을 두고 믿음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실족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하여 적절한 때에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주십니다. 다윗의 기도는 바로 그런 부분까지 염두해 둔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7절을 보시면 민족들의 모임이 주를 두르게 하시고 그 위 높은 자리에 돌아오소서쉽게 말하면 모든 민족들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모여 하나님의 공의를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말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다윗의 이 기도는 종말론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도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그때는 죽은 자 뿐만 아니라 모든 산 자들이 그분을 중심으로 모여들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 앞에 서지 못하는 자들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우편에, 그리고 하나님께서 유기하신 자들, 그러나 그 스스로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은 좌편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말씀은 여전히 하나님의 공의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길 기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비록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것은 다윗 개인이지만,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공의를 행하셔서 그 공의의 소식이 모든 민족들에게 교훈이 되도록 해 주십사 기도하고 있는 내용인 겁니다.

 

8절도 보시면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나의 성실함을 따라 나를 심판하소서앞서는 하나님께 심판을 행해 주십사 기도했다면 여기서는 친히 심판을 행하시는 분이심을 확신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다윗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무엇을 따라 심판 받기를 원하느냐 하면 자신의 의, 자신의 성실함이라고 말합니다. 이 성실함이라는 단어는 원문에 의하면 완전함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 단어인데, 얼핏 보면 오해를 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나의 의와 완전함을 따라 나를 심판해 달라고 기도하니까 마치 다윗이 자신의 의로서 의인이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어 보이지만, 그런 의미에서 기도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일단 칼빈은 이렇게 주석합니다. “여기서 취급되고 있는 주제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전체 생활에 대한 평가를 요구하실 때 거기에 대해서 그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 것이 아니라, 그는 자신을 자기 원수들과 비교하면서 그들과 비교할 때에 자신이 좀 더 의롭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저들보다 나은 의라고 말한다는 측면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의와 완전함이 곧 나의 것으로 있다는 의미에서 나의 의, 나의 완전함으로 말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여러분, 구약에 보면 종종 의인이라는 칭호를 돌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시편 바로 앞에 나오는 욥이 그러하고, 창세기에 보면 노아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의를 말할 때 그들의 공로적인 차원에서 의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표적인 예가 노아인데, 노아의 의(6:9)를 말하기에 앞서 무엇을 말했느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6:8)를 말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그러니까 당시 저들보다 나은 의로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얻어진 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는 실제로 저들보다 나은, 의로운 삶을 살기도 했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한편으로는 분명 저들보다 나은 의를 가진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 앞에서, 그것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자신의 의와 완전함을 말한다고 할 때는 그리스도의 의가 내 것으로 있지 않는 이상, 더 나은 의로서 하나님 앞에 설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것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나의 의, 나의 완전함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무엇으로만 가능한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거저 주신 그리스도의 의외에는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 다윗은 자신의 공로를 따라 하나님께서 심판해 주십사 기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아셔야 합니다. 1절에서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라고 말했는데, 왜 다윗이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라고 시작하고 있는가? 스스로 계신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우리에게 자신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겁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 의, 완전함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는데, 하나님께 속한 것을 우리에게 못 주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무엇보다 하나님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그의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놀라운 사랑의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은 자기 아들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시는데(8:32), 의와 완전함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내게 주셨기 때문에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 다윗의 의, 다윗의 완전함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내 것이라고 함으로 도둑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에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말하고 있는 것!

그러나 이런 말씀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함께 기억해야 될 것은 우리가 받은 바 그 선물이 내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다시금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자세라는 것도 함께 배우셔야 합니다. 역대상 29 14입니다.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이것이 우리의 정신이요, 하나님 앞에서의 마땅한 자세여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나의 의라고 말하고, 나의 완전함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더라도 본래 그것은 내 것이 아니라 선물이라는 것, 그리고 그 선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9절과 10절도 같은 맥락입니다. 9절을 보시면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나이다끊임없이 기도하는 내용이 뭐냐? 하나님의 공의가 시행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악인의 악이 끊어지고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가 회복됨으로서 의인들이 세워지는 그런 일이 있기를 기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면서 말하는 것이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나이다. 그러니까 악인의 악이 끊어질 때 단지 외적으로만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내면까지도 판단하셔서 그 일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고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숨은 의도까지 다 밝히십니다. 다윗을 위협하던 무리들, 그들은 거짓으로 다윗을 모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함을 하나님께서 모르시는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면 그 모든 죄악을 낱낱이 밝혀내실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내용이 무엇으로 연결되느냐 하면 10절입니다.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한편으로는 악인의 마음을 살피심으로 그들이 피할 수 없도록 하시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의와 완전함을 가진 자들의 마음도 살피십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분명한 사실은 성도들의 마음이 일체의 거짓도 없는 정직이어서 정직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정직이 나의 정직으로 있게 됨으로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는 역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어떤 분이 되신다고 고백하는가? 방패가 되신다고 고백합니다. 현실적으로 보자면 중상모략으로 인하여 어려움 가운데 놓여져 있지만, 다윗이 고백하고 있는 것은 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의 방패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방패라는 말은 모든 공격에 대하여 막는 도구입니다. 보호한다는 의미가 있고, 지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방패가 되어주신다고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결코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걸 분명히 해야 합니다. 혹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만을 진정한 방패로 여기지 않고 있다는 반증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15:1) 이것이 우리에게 변치 않는 사실로서 고백이 되어져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주에 보겠지만 다윗은 11절에서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라고 고백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계속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다윗은 의로우신 재판장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억울함, 답답함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원수를 갚는 것은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도가 원수를 갚아달라는 보복심으로 이해하시면 절대로 안 됩니다. 계시의 말씀으로서 보자면 하나님께서 악인들에 대하여 반드시 공의의 심판을 행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시지만, 그것을 통해 우리가 교훈 받아야 하는 사실은 뭐냐? 비록 지금은 성도를 대적하고 교회를 대적하는 원수들로 인하여 어렵고 힘들 수 있지만, 그래서 답답한 마음 가운데 있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반드시 공의를 행하시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의 위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공의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방패가 되어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에게만 피해야 하느냐? 하나님께만 피해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무엇을 주목해야 하는가? 의로우신 재판장 하나님만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본문 속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악에 대하여 선으로 갚는 자가 되도록 우리를 살펴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길입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