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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803설교 / 잠언1장7-9절 / 여호와경외와말씀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4.08.03|조회수561 목록 댓글 0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잠언 17-9

여호와 경외와 말씀

 

잠언의 전반적인 내용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란 무엇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열매라고 할 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그 열매의 주체가 인간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가르침은 열매의 주체조차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솔로몬을 통해 기록하게 하셨지만 잠언의 참된 저자가 하나님이시듯, 잠언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가 무엇인지를 소개한다고 할지라도 그 열매의 주체는 여전히 하나님이라는 것이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로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만 알리신다는 의미에서 하나님 경외 없이 이런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 했을 때 결코 맺을 수 없다는 것도 중요한 사실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잠언하면 일반적으로 지혜와 지식, 명철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잠언을 생각하면 그러한 방향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잠언의 방향성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없이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잠언을 통해 분명 지혜와 지식과 명철을 배우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 있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이 없다면 그것은 세상의 지혜, 세상의 지식, 세상의 명철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참된 지혜와 지식과 명철은 무엇과 관련 되어 있을 때냐?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갈 때냐? 하나님을 더욱 경외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입니다. 이것이 지난주에 살폈던 내용의 핵심입니다.

 

그럼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뭐냐? 약간 반복적인 내용도 있겠지만 다시금 복습한다는 마음으로 오늘 본문에 대한 내용을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7절 말씀 앞부분을 보시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참된 지혜와 지식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는 성경이 요구하는 어떤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모든 열매의 근본입니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에 보면 성령의 열매에 대해 기록하는 부분이 있습니다(5:22-23).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그런데 이런 열매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도 맺을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는 겁니다. 물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 즉 불신자들을 보면 저들도 사랑하고, 저들도 기뻐하며, 때론 오래 참기도 하고, 자비를 베풀기도 하는 모습이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열매는 분명 성경이 말하고 있는 열매와 다르다는 것을 정리해 놓으셔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무엇인가? 잠언이나 성경에서 말하는 그 열매를 하나님께서 받으시느냐, 받지 않으시느냐에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의 경우 주체가 성령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것을 그분이 받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의 열매는 결코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믿음이 빠져 있고 또한 불순물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행치 않는 모든 것이 죄며(14:23), 완전하고 온전하신 하나님 앞에 완전하고 온전한 것을 드리지 못하는 이상 결코 하나님께선 받으실 수 없습니다(2:10). 그래서 불신자들의 선행을 하나님께서는 받으실 수 없는 겁니다. 그 선에 불순물이 있고, 그 선에 점과 흠이 있으며, 나아가 믿음 안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불신자들의 선행을 받으실 수 없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어떤가? 물론 불순물이 있습니다. 아직 완전성화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점도 있고 흠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과 다른 것은 비록 불순물이 있고, 점도 흠도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때문에 받아주시는 겁니다. 나 자체로는 받으실 수 없지만 그리스도의 공로를 내 공로로 여겨주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선 그걸 받으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불신자들이 사랑하고, 기뻐하며, 오래 참고, 자비를 베푸는 모습이 있더라도 그리스도가 없는 이상, 믿음 안에 있지 않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열매는 아닌 겁니다. 반면 우리 역시 저들과 뭐가 다른가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가 있고,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받으시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잠언의 모든 열매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만이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 가장 지식이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문자적으로 하자면 경외라는 말은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이 두려움은 소위 공포를 의미하는 두려움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도 아낌없이 내어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8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죽으셨다는 것은 쉽게 말해 가장 못났을 때입니다. 가장 싫어할만할 때, 오히려 저주해도 아무런 할 말이 없을 때입니다. 그런데 그때 아들을 내어주심으로 그 사랑으로 확증하셨습니다. 그만큼 우리를 향하여 친절하시며, 관대하시다는 의미입니다. 때문에 여호와를 경외하라고 할 때 그것은 단지 하나님에 대하여 무서워하라, 공포를 느끼라는 의미는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일단 몇몇 구절을 통해 경외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가를 보면 이렇습니다. 우선 창세기 22 12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했다고 말씀하시는 구절이 있습니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이 부분은 우리가 잘 아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인 이삭을 바칠 것을 요구하시고, 그 요구에 응하는 아브라함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독자인 이삭을 바치려고 할 때 하나님이 무서워서, 하나님이 두려워서 바치려고 했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어떤 믿음이냐? 히브리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도 다시 살리실 줄을 믿는 믿음이 있었다고 말합니다(11:19). 바로 부활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 그에게는 있었던 겁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네 씨로 말미암아 네 자손이 많아질 것에 대해 약속하셨다면 죽은 자도 부활하게 하셔서 그 약속하신 바를 이루실 것이란 사실을 믿었던 것,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했다는 말 속에서 알 수 있는 내용인 겁니다.

출애굽기 14에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외했다고 말씀하시는 구절이 있습니다. 30절과 31을 읽어드리면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에서 애굽 사람들이 죽어 있는 것을 보았더라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이 말씀 역시 우리가 잘 아는 앞에는 홍해, 뒤에는 애굽의 군사가 쫓아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퇴양난의 상활을 맞이하게 되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어떻게 그들을 구원하시느냐? 홍해를 가르시고, 뭍을 드러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건너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 건너고 난 뒤 애굽이 쫓아올 때 다시금 물을 덮으심으로 그 애굽의 군사들을 다 수장시키시는 역사를 보이셨습니다. 본래는 이런 진퇴양난으로 인해 원망을 했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보고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나님을 경외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들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은 하실 때 경외함을 가질 수밖에 없는 모습인 겁니다.

 

이처럼 경외라는 말은 믿음과 관계가 있고, 그 믿음은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가에 대한 내용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경외란 말은 무엇인가? 두려움은 두려움인데 공경함이 함께 하는 두려움인 것입니다. 이것을 좀 더 쉽게 설명 드리자면 하나님이 우리와 얼마나 다른가에 대한 존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얼마나 넓으신지, 그리고 그분이 얼마나 높으시며, 그분이 얼마나 깊은신가에 대한 차원에서의 다름, 아무리 우러러보려고 해도 결코 우러러 볼 수 없는 차이, 이것이 바로 경외입니다. 예를 들어 같은 인간끼리 비교할 때도 사람들은 어떤 문학 작품이나 예술 작품을 통해 차이가 날 때 우러러보는 마음을 가집니다. 어떻게 저런 표현을 썼을까? 어떻게 저런 기교가 나올까? 그런데 차이가 나면 날수록 어떤 마음이 드느냐 하면 단순히 우러러 보는 정도가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해 무섭다고까지 말하는 경우들이 간혹 있습니다. “! 대단하다.”는 정도가 아니라 !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사람이야!”, “인간이 저렇게까지 할 수 있어?” 이 반응인 겁니다.

인간과 인간을 비교할 때도 이런 마음이 드는 경우가 있다면 하나님과 인간을 비교하자면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만큼은 우러러 보는 정도가 아니라 도저히 그분을 감당할 수 없어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마음, 그러나 그 사랑을 받았기에 멀어질 수 없고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더욱 가까이 하시기에 더더욱 가까이 할 수밖에 없는 신비로운 관계,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가지는 경외함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인간은 인간일 수밖에 없다고 깨달을 때, 다시 말해 하나님은 그렇게 높고 높은 분으로서 우리는 그렇게 낮고 낮은 자로서 인식이 될 때 경외라는 말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은 하나님을 스스로 계신 분으로 소개합니다(3:14). 누군가에 의해 지음을 받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면 우리는 스스로 계신 하나님에 의해 지음을 받은 존재입니다. 이것부터가 얼마나 큰 차이인지 모릅니다. 창조주 대 피조물, 이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보다도 더 큰 차이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일 수밖에 없고, 인간은 인간일 수밖에 없는 내용입니다. 속성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장소에 있어서도 제한을 받지 않으시며, 시간에 있어서도 제한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언제나 한결같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어떤 존재냐? 장소에 제한을 받고 시간에도 제한을 받습니다. 그리고 변덕은 얼마나 심한지, 시도 때도 없이 변합니다. 한 마디로 하자면 하나님은 완전한 분이십니다. 그에 비해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이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불완전한 존재로서 완전하신 분을 이해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성경은 믿음의 대상과 관련하여 오직 하나님만이 믿음의 대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생이 아니신 하나님(23:19), 때문에 인생과는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는 분,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신 겁니다. 그분은 장소도 초월하시며, 시간도 초월하십니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든 불러도 함께 해 주실 수 있는 분,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한번 우리를 사랑하기로 하셨다면 결코 그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습니다. 이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실제로 성경은 하나님의 일하심과 관련하여 영원한 작정, 특히 대상과 관련하여 예정론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로마서 9에 의하면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9:11)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행위에 따라 하나님의 백성, 사탄의 백성 이렇게 나눈 것이 아니라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입니다. 아직 나지도 않았을 때, 성경의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창세 전입니다. 이 세상이 창조되기도 전에 대상을 정하셨는데, 어떤 이는 택자로 어떤 이는 유기자로 정하신 겁니다. 그럼 우리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어떤 이는 택자로, 어떤 이는 유기자로 정하실 수 있는가? 하나님이 불의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렇게 답변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9:14) 그리고 말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9:15-16) 쉽게 말해 사람의 뜻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는 것이 예정론인 겁니다. 특히 바울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예정의 신비를 말하고 난 뒤 로마서 11 마지막에 가서 이런 표현을 하게 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11:33) 도저히 그로선 그 모든 지혜와 지식을 감당할 길이 없기에 헤아리지도, 찾지도 못한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무한하신 하나님 앞에서 유한한 인간의 모습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바로 바울의 고백인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하나님이실 수밖에 없다는 인정인 것입니다. 그분의 속성을 통해서도, 그분의 일하심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실 수밖에 없다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고, 그 앞에서 우리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자로 있는 겁니다. 아니 바울의 말처럼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인 것입니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혜 앞에 우리의 지혜를 가져갑니다. 그리고 마치 하나님의 지혜가 잘못된 것인 양 그렇게 따지고 듭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지혜와 우리의 지혜를 비교하겠습니까? 참된 경외는 뭐냐? 그분의 지혜가 더 높다는 것을 인정하고, 우리의 지혜를 그분의 지혜 아래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우리의 우리 됨을 인정하는 것, 하나님은 창조주시오,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바로 경외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여러분은 성경을 통해 그리고 여러분의 삶을 통해 이런 하나님을 인정하시는지 한 번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와는 너무도 다른 하나님! 바울의 고백처럼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우둔함이 그분의 말씀을 통해 전해지십니까? 우리 같으면 벌써 매를 들뿐 아니라 자기 성질에 못 이겨 함부로 대했을 텐데, 그렇게 참아주시고 참아주시는 하나님, 그러나 때론 자녀를 자녀답게 만드시기 위해 징계도 서슴지 않는 하나님, 그러나 사랑하기 때문에 징계를 드시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 가운데 우리와 너무나도 다른 그 사랑의 너비와 길이, 높이와 깊이가 확인이 되십니까? 이것 없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건 어쩌면 말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의 다름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 높이와 깊이를 아는 자들이며, 또한 그렇게 사랑하시기 위해 영원 전부터 어떠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는지를 아는 데 있는 것입니다.

저는 감히 말하지만 이런 의미에서 예정론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는 자들이 아니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가에 대해 예정론 없이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너비와 길이, 높이와 깊이와는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사랑을 이미 영원 전부터 베푸신 사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앞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로마서에 의하면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에 서게 하려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9:11). 그래서 누구는 사랑하시고, 누구는 미워하신다고까지 말씀하십니다(9:13).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우리와 다른지를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대상이 있어야 사랑을 합니다. 대상이 있어야 선물을 주며, 대상이 있어야 비로소 그때 움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역사 안에 존재하지 않을 때부터 사랑하셨습니다. 이미 그분 안에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셨으며, 인간의 불순종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의 서정에 대한 모든 것을 다 계획하셨습니다. 이게 놀라운 겁니다. 이게 신비인 겁니다.

심지어 계속해서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명령하시면 그 명령에 순종해야 할 자는 분명 우리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떻게까지 말씀하시느냐? 그 순종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더란 것입니다. 이게 놀라운 겁니다. 순종도 은혜인데, 그 순종에 대해 상급도 내리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게 신비요, 이게 하나님을 향하여 깊도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내용인 겁니다. 이런 말씀 앞에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미련한 자들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잠언의 기록자인 솔로몬은 7절 뒷부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물론 이 지혜와 훈계는 하나님의 율법, 그리고 그분의 전 말씀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8절에서 미련한 자가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시느냐?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그러니까 8절의 훈계와 법이 7절의 지혜와 훈계와 같습니다. 지혜는 곧 그분의 법인 것입니다. 결국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고 할 때 그 핵심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 그 법을 멸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의 뜻 또한 알 길이 없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시편 기자를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시편 1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1:1-2) 어떤 사람이 복된 사람인가? 단순히 악인의 꾀를 쫓지 않는 것,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 것,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것만 복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끄는 것이 뭐냐?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있어야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을 수 있고, 말씀이 있어야 죄인의 길에 서지 않으며, 말씀이 있어야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멸시한다는 건 결국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 서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 자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말씀, 말씀, 말씀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경외는 어디로부터 배우게 되는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배우는 것도 말씀이요, 그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 높이와 깊이를 배우는 것도 말씀입니다. 그분의 지혜와 지식을 배우는 곳도 이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이 말씀을 사랑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7절 말씀으로 하자면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기록된 성경을 따라 권면하는 모든 말씀을 사랑하도록 부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멸시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도움의 손길을 거절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잠언 1 23절 이하를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폈으나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1:23-26) 여러분, 우리 인생은 의존적입니다. 스스로 계신 분은 하나님 한분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있는 모든 힘을 박탈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의지하며 살 수밖에 없는 인생이 유일한 의지의 대상인 하나님의 손길을 거부한다? 그것은 곧 죽음의 길로 가는 것과 같습니다. 달리 말하면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곧 죽음과도 같은 것입니다. 때문에 성도로서 마땅히 귀 기울여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8절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비의 훈계, 어미의 법 역시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되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의 훈계, 법일 때 듣고 떠나지 말 것을 권면합니다. 단순히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5계명과 관련된 말씀이 아니라 그 부모가 하나님의 말씀을 심을 때 그 말에 귀를 기울이고, 결코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안 믿는 부모님 가정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과 다른 요구를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에 부모의 말에 순종해야 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오히려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더 합당하기 때문에 그 때는 부모의 훈계를 듣지 못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초점은 어디에 있느냐? 아비, 어미가 아니라 말씀의 훈계, 하나님의 법 여기에 있음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자녀에 대하여 훈계를 할 때 반드시 말씀의 정신을 벗어나서는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매어 있어야 할 자리는 오직 말씀인 겁니다. 이렇게 말씀을 매어 있는 자를 복되다 하시며, 말씀의 훈계를 듣고 떠나지 않는 자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하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 9절에 보시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지 않고 그 말씀에 귀 기울이는 자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이니라여러분, 말씀을 듣는 것 자체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확인하셔야 합니다. 말씀을 떠나지 않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 확인하셔야 합니다. 말씀을 지켰더니 아름다운 관이 씌여지고, 목에는 금사슬이 매이더라! 그것이 아닙니다. 이미 말씀을 듣고 떠나지 않는 그것이 아름다운 관이요, 목의 금사슬입니다.

때문에 여러분이 말씀을 지킬 때 어떤 약속을 더해주고 있다하더라도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잊지 마셔야 합니다. 말씀을 지키는 자리냐? 아니면 그것에 대한 상급이냐? 여러분, 성경은 말씀을 지키는 자리가 더 복되다 말씀하십니다. 이걸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결코 금은보화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비록 광야같은 인생을 살아간다 할지라도 그 인생이 말씀을 지켜 나가는 인생이면 그것이 가장 복된 인생이라고 가르치는 장이 이곳인 겁니다. 때문에 우리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자리,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도 지켜야 할 자리가 바로 이 자리입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물론 오늘 본문 이후에 보면 좀 더 구체적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의 열매가 무엇인가에 대해 나와 있습니다. 10절에 보면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따르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소개를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이 말씀을 보면 볼수록 열매보다는 우리의 부족함이 더욱 절실히 드러나게 되는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부족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대하실 때 얼마나 다른지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 자신을 더욱 알게 되지만, 그 아는 것이 어떤 면이냐 하면 나를 자랑할 만한 게 하나도 없다는 것 외에는 깨닫지 못하는 것만 알게 되더란 것입니다. 역으로 나의 나 됨은 무엇입니까? 오로지 주의 은혜 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참된 경외가 출발하는 것입니다. 이걸 성경을 통해 확인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확인되지 않고는 여러분의 열매는 다 무엇과 같은가 하면 여러분의 자랑꺼리일 수밖에 없게 되는 겁니다. 열매가 자랑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서 이해할 수 있다면 이미 그 자리에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는 자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디 주의 말씀을 대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많이 깨달으시고, 그 말씀 앞에서 우리는 더욱 더 낮아져 주님으로부터 맺는 열매가 하나님께만 영광이 되는 그런 열매로서 자리하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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