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잠언 1장 10-19절
악인의 꾀를 좇지 말라
잠언과 관련하여 우리가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란 무엇인가에 초점을 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세상 사람들도 교훈을 받을 수 있는 어떤 속담이나 격언, 명언집과 같은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열매를 누가 맺을 수 있는가 했을 때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맺을 수 있다는 걸 염두해 두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잠언은 교회를 향한 말씀이라는 걸 깊이 새기셔야 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 앞서 7절 말씀을 보시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그러니까 모든 지혜와 지식의 말씀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혹 이 말씀을 통해 여호와 경외와 연결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까지 할 수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혹 불신자들 가운데 잠언의 말씀을 좋아해서 어떤 교훈을 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좀 더 나은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것조차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한 면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방향과 맞물려 있지 않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잠언의 모든 방향은 어디를 향하는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의 열매란 무엇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열매를 맺는 것이 성도의 모습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이 잠언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보시면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따르지 말라” 여기 보면 ‘내 아들아’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데, 잠언의 기록자가 솔로몬인 것을 생각한다면 직접적으로는 솔로몬의 자녀들, 그리고 솔로몬이 왕으로 있었기 때문에 그의 모든 백성들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교회를 향한 말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을 향하여 하시는 말씀이 뭔가?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따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시편 1편 1절에도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자라고 말씀하시는데, 다르지 않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구체적인 예를 두 가지로 설명하는데, 그 첫 번째가 11절과 12절입니다. “그들이 네게 말하기를 우리와 함께 가자 우리가 가만히 엎드렸다가 사람의 피를 흘리자 죄 없는 자를 까닭 없이 숨어 기다리다가 스올 같이 그들을 산 채로 삼키며 무덤에 내려가는 자들 같이 통으로 삼키자” 사실 성도를 향하여 악한 자가 노골적으로 살인하자, 죄 없는 자들에게 까닭 없이 해하러 가자고 말한다면 아무도 그 일에 가담하는 이가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성경이 이것을 경계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악한 자가 우리에게 살인하자고 할 때 외형적으로만 이해하도록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 잠언의 표현은 매우 노골적이지만 노골적이라고 해서 반드시 노골적인 살인만은 경계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바리새인들이 구약의 율법을 이해할 때 주로 외형적인 면에서 치우쳐 있었는데, 이런 저들의 해석에 대하여 예수님은 참 뜻을 밝히십니다. 마태복음 5장 21절과 22절을 읽어드리면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간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간음한 것을 간음했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그 속에 품고 있는 음욕도 간음이라고 지적하십니다.
이런 의미로서 이해를 하자면 잠언이 경계하고자 하는 것은 악한 자가 우리를 꼬시는 방향이 노골적이라고 해서 노골적인 것만을 경계하는 것이 아니라, 신구약의 통일성 아래 은밀하게 조장하는 것까지도 경계하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악한 자가 우리를 꼬시는 방향이 노골적으로 살인하자, 죄 없는 자들을 까닭없이 죽이자고 말할지라도 그것만 경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노를 발하게 만들고, 욕을 하게 만들고, 업신여기게 만드는 모든 방향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이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 기억해야 되는 한 가지는 단순히 외적으로 살인하지 않았다고 하여 안심을 놓을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럼 외적으로 살인하지 않고, 내적으로 우리 마음을 지키기만 하면 되는 문제냐? 물론 지킬 수도 없지만, 마음을 지키기만 하면 된다는 그 문제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무엇을 하지 말라고 요구할 때 단순히 이런 쪽으로 가지 말라는 것만 말하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조금 전에 시편 1편 1절을 읽어드렸지만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고 오히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로 나아갑니다. 그러니까 죄를 짓지 않았다는 정도로 안심을 놓아서 되는 문제가 아니라,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자, 그리고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리로까지 나아가야 복된 자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 창세기 4장으로 가시면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걸 볼 수 있습니다. 7절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신 반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자 가인의 안색이 변하는 내용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게 7절인데, 쉽게 말해 선을 행하면 낯을 들지 못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릴 수밖에 없다. 여러분, 우리가 이해하는 바에 의하면 죄란 죄를 지어야만 죄라고 생각합니다. 악을 ‘행하는 것’ 그것을 죄로 여깁니다. 그런데 성경은 선을 행치 않는 이상 죄가 문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선을 행치 않고 있는 이상 그것은 늘 죄를 짓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뭔가 좀 극단적인 것 같지만 지금 말씀하고 계신 이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신다면 그것이 맞는 말이라 인정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4문을 보면 “죄란 무엇인가?” 했을 때 그 답변을 이렇게 합니다. “죄란 하나님의 법을 순종함에 있어서 어떤 결핍이 있거나 혹은 그 법을 범하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이해로 보자면 분명 어떤 법에 대하여 범하는 것, 어기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핍, 즉 부족한 것, 선의 부재 역시 죄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서 단순히 악한 자가 살인하러 가자고 할 때, 그것도 노골적으로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자고 말할 때 그것을 거부하는 것, 단순히 외적으로 거부할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 거부하는 것으로만 나는 말씀을 지켰다고 말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는 걸 아셔야 합니다. 오히려 살인하자고 말할 때 생명을 줄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하고, 분란이 있을 때 화평을 줄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까지를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것이 성도요, 교회의 방향인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서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 말씀하고 있고, 베드로전서에서는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3:9) 말씀하십니다. 악에게 지지 않기 위해 악을 행치 않는 것만 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선으로 악을 이기는 자리, 또한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악이 올 때 도리어 복을 빌어주는 것, 그것을 위하여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성도의 수준이란 높고도 높은 것입니다.
13절 이하 15절도 보시면 두 번째 예를 이렇게 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온갖 보화를 얻으며 빼앗은 것으로 우리 집을 채우리니 너는 우리와 함께 제비를 뽑고 우리가 함께 전대 하나만 두자 할지라도 내 아들아 그들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 네 발을 금하여 그 길을 밟지 말라” 여기도 보면 마찬가지입니다. 앞서 본 11절과 12절 아래 이 말씀을 이해하자면 노골적으로 도둑질 하자고 말합니다. 남의 것을 빼앗아 우리의 것을 채우자.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성도에게 이런 요구를 한다고 해서 함께 동참하는 자는 거의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성경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우리에게 가장 먼저 열매로서 요구하고 있는 이러한 내용은 그렇게 문자적으로 단순히 볼 내용은 아니란 것입니다. 도적질 하자. 그러면 도적질 안 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탐심의 마음도 뿌리 채 뽑아야 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하여 자족할 줄 알아야 하며, 나아가 할 수만 있다면 다른 이의 것을 보호하고 증진하며, 오히려 보탬이 되어 줄만 한 사람으로서의 요구가 그 이면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자들의 십계명 해설을 보면 ‘무엇 무엇을 하지 말라’고 했을 때 하지 말라는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도 초점이 있다고 해석을 했던 것입니다. 반대로 ‘무엇 무엇을 하라’고 했을 때는 역시 하라는 것만이 아닌 하지 말 것도 함께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방금 읽은 말씀을 잘 보시면 악인들이 꾀를 부린다고 할 때 노골적인 것만이 아니라 은밀하게 다가 올 때 이런 면도 있다는 것을 알립니다. 14절을 다시 보시면 “너는 우리와 함께 제비를 뽑고 우리가 함께 전대 하나만 두자 할지라도” 그러니까 노골적으로 죄를 짓자가 말하는 것 안에는 이미 은밀하게 죄를 짓자는 말도 들어 있는 것인데, 그 방식이 어떻게 다가오느냐? 노골적으로라도 안 될 것 같으면, 다시 말해 네가 우리와 같이 동참하지 않을 것 같으면 우리가 빼앗은 것 중 전대 하나만이라도 두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악한 일을 행하지 않는다면 인정하겠다. 그러나 우리가 빼앗은 것 중 작은 것이라고 가져라.” 이게 무서운 겁니다. 죄 지으라고 말하지는 않겠는데, 죄를 공유하자. 죄의 맛이라도 봐라. 아니 우리와의 관계성만큼은 깨뜨리지 말자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앞서도 시편 1편의 말씀을 언급했지만 악인의 꾀, 그리고 죄인들의 길, 그리고 오만한 자의 자리입니다. 처음에는 생각을 넣게 되고, 그리고 그러한 길로 가게 만듭니다. 나중에는 어떻게 되느냐? 저들에 자리에 털썩 주저앉게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악인의 꾀인 겁니다. 단순히 노골적으로 죄를 짓자고 말하지만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14절 말씀과 같은 유혹이 더 많을 수 있습니다. “죄의 맛이라도 봐라. 너더러 죄를 지으라고 안 할께!” 그러나 그 자리가 바로 우리로 하여금 죄의 방향으로 몰고 갈 수 있다는 걸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결코 그들과 함께 다니지 말라고 말합니다. 15절 “내 아들아 그들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 네 발을 금하여 그 길을 밟지 말라” 달리 말하면 맛이라도 보라고 할 때 비록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악이 조금만이라도 있으면 그리로 가지 말라. 악한 것이라면 이름도 부르지 말고(엡5:3), 악의 모양이라면 흉내도 내지 말고(살전5:22), 철저히 그러한 것에서 돌아서라. 이것이 성도가 가야할 방향이요, 성도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적지 않은 성도들이 이것을 철저히 끊어내지 못한 채 마치 외줄타기라도 하듯 위험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들이 더러 있습니다. “아! 이번 한번만 하고 다음에는 끊지!”, “매번 하는 것도 아닌데...” 뻔히 죄인 줄 알면서도 그 달콤한 유혹에 잠시 발을 들여놓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실제로 요즘 음란성이 짙은 영화라든가, 아니면 그런 광고물, 아니면 그런 영상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메일로도 오고, 전화로도 오고, 문자로도 오는 등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이런 부분에 있어 너무 노출이 되어 있습니다. 예전에 제가 고등부를 맡아 사역하던 곳이 있었는데, 이런 문제로 인해 꽤 오랫동안 토론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교육부 회의에서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하면 이런 노출에서 조금이나마 제한시킬 수 있을까? 그런데 결국 해결책이라고 내 놓은 것이 보통 인터넷을 통해 유포되는 그런 음란 광고들을 자동적으로 차단해 주는 프로그램을 깔자는 것밖에 해결 방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초등학교 저학년들까지는 어느 정도 차단할 수 있는데, 사실 그 이상으로 가면 도저히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게 실질적인 결론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광고와 같은 것은 차단해 주지만 지금 P2P 공유방식이라고 해서 개인컴퓨터 대 개인컴퓨터, 아니면 어떤 기업의 대용량에 저장하거나 저장된 것을 받아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에 대해서는 차단되지 않고 무분별하게 다운받아 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음란물들을 받아볼 수 있는 시대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 속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호기심에 들어다 봅니다. “한번만 보고 안 봐야지!” 그러나 한번 보고는 끊을 수 없습니다. 끊어지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만 그런 게 아니라 교회 안의 학생들, 청년들, 심지어 어른들조차 달콤한 유혹에 발을 들여놓고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더란 겁니다. 세상 사람들이야 그것을 죄라고 여기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교회는 그것을 죄로 여기고, 죄로 지적하기 때문에 마음이 찔립니다. 그런데 그렇게 찔리는데도 쉽게 끊어지지 않습니다. 이게 무서운 겁니다. 그럼 단지 음란물과 관련된 것인가? 남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적은 것 하나입니다. 그렇게 적은데도 떨립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어떻게 되느냐? 담대해 집니다. 떨리지가 않습니다. 그러면서 큰 것, 좀 더 비싼 것을 도둑질하게 됩니다. 이게 바로 죄의 영향력입니다. 악인의 꾀가 들어오고, 죄인의 길에 서며, 결국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처음부터 큰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작은 것 하나입니다. 한번만 맛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작은 하나, 그 한번이 우리 인생을 악인의 꾀에서 길로, 그 길에서 결국 죄의 자리에 주저앉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내 아들아 그들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 네 발을 금하여 그 길을 밟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유혹이 있다? 속히 금해야 합니다. 더 빠지기 전에 금해야 합니다. 혹 금지된 선이 있다면 그 선을 밟는 것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전에 우리가 놀이했던 것 중에 오징어 달구지라는 놀이가 있는데,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지역마다 그 명칭이 다른 것 같던데, 저희 부산에서는 오징어 달구지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적진에 들어가 밀어낼 때 선을 밟거나, 아니면 적진 밖에서 적진 안에 있는 사람에게 잡혀 선을 밟게 되면 다 아웃이라고 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이 우리의 발을 금했습니다. 선을 그어 놓았습니다. 그러면 그 선을 밟지 말아야 합니다. 밟으면 아웃입니다. 죽는 겁니다. 좀 더 정확하게는 그 선을 밟고 있는 것부터가 죄악된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의 방향인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세상과 하나님 양 다리 걸치듯 생활하고 있습니다. 마치 외줄 타기 하듯 그 선을 밟고 서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징어 달구지 놀이로 하자면 그건 이미 아웃입니다. 악인의 길을 걷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걸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하니까 외줄을 잘 타야 된다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 하나님 명령 안에서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명령 안으로 완전히 들어오라. 그래서 명령에서 떠나지 말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성도의 본분이요, 우리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씨인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악인의 꾀를 쫓지 않기 위해서는 언제나 말씀 안에 거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노골적으로 살인하자고 할 때, 노골적으로 남의 것을 빼앗자고 할 때 살인하지 않았다, 남의 것을 빼앗지 않았다는 게 다가 아니라 예수님 말씀처럼 마음도 살펴야 하고, 더 나아가 선을 행하기까지 결코 안심을 놓아선 안되는 것입니다. 아니 한번 선을 행하고 안심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계속해서 선을 행해야 하고, 항상 선을 행하는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항상 죄가 우리 앞에 있을 뿐입니다. 선을 행하고 있지 않는 이상 언제든지 죄의 유혹 가운데 있을 수 있고, 이미 그것 자체가 죄인 것입니다.
물론 “어떻게 이렇게 삽니까?”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럼 제가 여러분에게 해 드릴 수 있는 답변은 “우리는 아무도 이렇게 못 삽니다”라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요구를 하십니까?” 우리의 자리가 이만큼 높다는 것과 그리고 그것을 향하여 우리의 마음을 쏟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의 삶을 이해해야 하는 것 중 하나는 우리 삶이 이 땅에서 완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이 땅에서 완전성화는 보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완전성화는 언제 이루어지느냐? 우리의 죽음과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동시에 여러분이 지향하고 나아가야 할 바는 예수님께서 친히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해 질 수 있다는 측면이 아니라 방향인 겁니다. 너희가 가야 할 방향, 너희가 완성되어야 할 모습은 그만큼 높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코 쉴 수 없고, 그래서 결코 안심할 수 없다. 끝까지 진력하고,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삶 가운데서 죄 짓지 않았다는 것으로 안심하지 마셔야 하고 여러분의 마음을 더욱 살피셔야 합니다. 나아가 선을 행하고 있는지도 살피셔야 합니다. 악한 것이라면 이름도 부르지 마셔야 하고 악의 모양도 흉내내지 마셔야 하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 선을 행하는 것이 무엇인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 수 있는가 고민하고 또 고민하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 16절 이하는 죄의 길로 가는 발을 금하지 못하면 결국 어떻게 되느냐를 말씀해 주시는데, 먼저 16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대저 그 발은 악으로 달려가며 피를 흘리는 데 빠름이니라” 여러분이 만약 죄로 향하는 그 발을 금하지 않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결국 죄를 향하여 달려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냥 달려가지 않습니다. 마치 인생의 속도처럼 달려갑니다. 10대 때는 세월의 흐름이 마치 10km라고 그럽니다. 20대는 20km, 30대는 30km, 40대는 40km, 그런데 50대 때부터는 가속도가 붙습니다. 그래서 50km가 아니라 100km입니다. 60대, 70대는 이미 과속입니다. 죄가 마치 이런 인생의 속도와 같습니다. 처음엔 걸어갑니다. 그런데 죄악된 그 길로 가면 갈수록 빨리 달립니다. 웬만하면 지칠 것 같은데 지치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분기점만 넘으면 가속도도 붙습니다. 가속도가 붙는 정도가 아니라 죄에 대해서는 내리막길도 있습니다. 겉잡을 수없는 속도인 겁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역사는 죄악된 일, 악한 일에는 항상 빨랐습니다. 실제로 보안 프로그램과 같은 것은 다 어떻게 해서 나오느냐 하면 해된 것이 먼저 있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신학도 보면 같은 성경을 보면서 이단이 나오니까 그것이 아니란 걸 말하기 위해 정통신학이 나오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사와 같은 교회 역사를 보면 삼위일체, 기독론과 같은 교리들이 결정되고, 신조나 고백서들이 작성되는 것은 다 정통과 반대되는 이단들이 먼저 나오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교회도 보면 교회가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은 가지고 있지 못하고 오히려 시대적 흐름에 빨리 적응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교회가 어떤 것으로 성장했다고 하면 그것이 성경에 의해 옳은지, 그른지 확인도 하지 않고 무턱대로 달려듭니다. 왜냐하면 빨리 성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장했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교회들이 주목하고 거기에 매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교회가 성장 중심으로 뭔가를 결정한다면 그것은 이 시대의 사고방식이지 결코 하나님의 방식은 아니란 걸 아셔야 합니다.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이요,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방식만이 교회의 방향이지, 세상의 방식은 교회가 취해야 할 방향은 아닌 겁니다. 때문에 시대에 빨리 적응하자는 것은 교회가 할 소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느리더라도, 좀 천천히 하더라도 올바른 방향으로 가자고 말해야 합니다. 세상이 아닌 하나님의 방향!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만 돌아가야 합니다. 말씀 안으로 들어오셔야 하고, 결단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아야 합니다.
17절과 18절을 보시면 “새가 보는 데서 그물을 치면 헛일이겠거늘 그들이 가만히 엎드림은 자기의 피를 흘릴 뿐이요 숨어 기다림은 자기의 생명을 해할 뿐이니” 무슨 말씀인가 하면 상식적으로 새가 볼 때 그물 치는 것은 헛일이란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고 도망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악인들이 행하는 게 뭐냐 하면 마치 그런 짓을 한다는 것입니다. 뻔히 보이는데 그물을 치고 앉아 있습니다. 자기 피를 흘리고, 자기 생명이 해를 입고 있는데도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악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이 뻔히 보이는 그 길을 우리는 가지 말아야 하는데, 가더란 겁니다. 그래서 1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익을 탐하는 모든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 그 길이 뻔히 죄악된 길이고, 그 길로 가면 분명 헛된 일일 수밖에 없다는 걸 압니다. 특별히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받기 때문에 더더욱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결코 그 길로 가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의 자리를 지킴으로 저들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걸 알려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그들의 길로 가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앞서 말한 것처럼 저들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걸 우리의 삶을 통해 보여 줘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인 겁니다. 그런데 성도가 그 길을 갑니다. 뻔히 보이는 그 길을 갑니다. 죄악된 길이요 헛될 수밖에 없는데 그 길을 가더란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의 이익에 목매여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여러분, 세상적인 계산으로 하자면 하나님 말씀 다 지켜 가면서 돈 벌기란 쉽지 않습니다. 주일 일하지 않으면 계산적으로 볼 때 일하지 않은 만큼 손해입니다. 주일 공부하지 않으면 공부 안한 만큼 손해입니다. 주일 운동하지 않으면 운동하지 않은 만큼 건강을 잃습니다. 보편적인 계산법에 따라 생각하자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을 거룩히 지킬 것을 말씀하지만 우리는 세상을 따라갑니다. 주일 예배만 드리고 가게 문을 엽니다. 아니 나는 가게 주인이기 때문에 쉬지만 직원들은 일하게 합니다. 주일 예배 드리고 못 다한 공부도 하고, 평소에 운동 못하니까 운동도 합니다. 그러나 이게 성경이 말하는 주일성수인가? 예배만 드리면 이후로 뭘 해도 좋다는 게 주일성수인가?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미 어느 정도 신앙의 연수가 있으시면 이것을 잘 알 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말씀 안으로 쏙 들어와 있지 않습니다. 말씀도 지키면서 세상도 다리를 걸쳐 놓은, 마치 외줄을 밟고 있는 듯 그렇게 신앙 생활하는 모습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선 밟으면 아웃입니다. 선을 밟고 있는 것부터가 이미 그 마음의 방향은 세상을 향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드린 것으로 주일성수 했다는 것은 여러분 생각이지, 성경이 지금 여러분에게 요구하고 있는 바가 아닌 겁니다.
왜 이런 형태가 되었느냐? 다 여러분 이익을 위해서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결코 세상의 손해를 보려고 하지 않는 여러분의 탐심, 바로 그 탐심 때문에 결국 발을 금하지 못하고, 마치 선을 밟고 가는 것처럼 그렇게 신앙생활 한다는 것입니다. 아니란 걸 알면서도 이익 때문에, 결코 세상적으로는 손해 보려고 하지 않는 것 때문에 말씀 안으로 깊숙이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이익을 탐하는 모든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 결국 여러분이 가고 있는 길은 어떤 길이냐? 생명이 더욱 보장되는 길이 아니라, 생명을 잃게 만드는 길이란 겁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15절 “내 아들아 그들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 네 발을 금하여 그 길을 밟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선 오늘 말씀을 통해 여러분이 혹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면 돌아오길 원하십니다. 10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따르지 말라”는 것이요, 15절 말씀처럼 “내 아들아 그들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 네 발을 금하여 그 길을 밟지 말라”는 것입니다. 악인의 꾀도 좇지 말라는 것이고, 죄인의 길에도 서지 말라는 것이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도 앉지 말라는 것입니다. 죄는 모양이라도 버려야 하고(살전5:22), 그 입에 담지도 말아야 합니다(엡5:3). 오히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더욱 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하고(롬12:21),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복을 빌어주는 그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벧전3:9). 왜 그렇습니까? 이것을 위해 우리가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세상의 이익을 위해 부름 받은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내 아들아’ 단순히 솔로몬이 육적 아들을 위해 부르는 부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부르는 소리입니다. ‘내 아들아’, ‘내 딸아’ 너희가 가는 그 길은 너희가 가야 할 길이 아니다. 가지 말라. 금하라.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이 있을 때 뛰쳐 나온 것처럼 그렇게 뛰쳐 나와 하나님 앞에 서라. 물론 요셉의 경우 그 이후 더 어려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우리의 소유는 세상의 평가에 따라 이 세상에서 어떤 형태로 살았느냐가 아니라 말씀을 지켰느냐, 아니 지켰느냐인 것입니다.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를 지킨 것이니이다”(시119:56) 이 말씀을 기억하셔서 악인의 꾀를 좇지 않는, 오히려 선으로 악을 이기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노력하시고, 또한 그런 은총을 구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