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18장 1-6절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사도들의 신앙고백 이후 예수님께서는 반복적으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알리시고 계시는데, 그만큼 그의 죽음의 때가 다가왔다는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 있다는 것도 알려주심으로 결코 비참함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광의 소망이 있다는 것도 알려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의 반복적인 가르침에 대해 사도들이 그 뜻을 알았느냐 하면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로서, 그것도 사도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보다 더 가까이서 주를 따르게 된 자들로서 그 뜻이 무엇인지 물을 수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종종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무슨 뜻인지 묻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묻기도 두려워하였다고 마가복음 9장은 증거 하고 있습니다(막9:32 참조). 물론 저들이 깨닫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깨닫지 못하도록 숨기셨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누가복음 9장에서 그 사실을 잘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눅9:45 참조). 그러나 동시에 그들이 묻기도 두려워하였다고 할 때, 그러면서도 매우 근심하였다고 할 때(마17:23) 분명 그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야에 대한 생각과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 사이에는 뭔가 맞지 않는 듯 한 생각을 가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달리 말하면 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알지 못했다는 것은 그들의 생각이 지금 주님의 마음과 얼마나 상관없는 쪽으로 가 있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점에서 저들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내용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 보면 제자들이 한 가지 질문을 하게 됩니다. 1절을 보시면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마가복음 9장에서는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가버나움에 있는 집에 계실 때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으로 오는 길에서 제자들 사이에 토론한 것이 무엇인지를 물으신 것으로 설명합니다(막9:33). 그러니까 마가복음 상으로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알리는 두 번째 말씀이 있으셨고, 그리고 난 뒤 가버나움으로 오는 길에서 제자들 사이에 논쟁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천국에서 누가 큰가에 대한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가버나움에 있는 집에 이르렀을 때 주님께서 무엇을 논쟁하였는지에 대해 물으셨던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질문한 것은 예수님께서 먼저 물으셨을 때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다가(막9:34) 결국 길에서 논쟁한 것이 무엇인지를 대답하는 과정 속에서 질문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사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작은 자보다는 큰 자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꼬리가 되기보다는 머리가 되기를 원하며, 낮은 자리보다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원합니다. 그래서인지 용의 꼬리보다 뱀의 머리가 낫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이 언제부터 있었는가? 맨 첫 사람에게서부터 확인할 수 있습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할 때 먹지 말라고 한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말하자 하와는 그것이 걸림돌이 되어 넘어지고 말았습니다(창3:5-6). 그러니까 큰 자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타락 이후가 아니라 타락하기 전부터 그들 마음 가운데 들어왔던 것으로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지위를 생각하여 자족하는 마음을 가져야 했지만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그들로 하여금 타락하게 만들었던 겁니다.
인간만이 아니라 천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다서 (1장) 6절에 보면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데, 소위 마귀 혹은 귀신이라고 불리는 자들은 본래 천사였으나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자들입니다. 자기 지위에 만족하지 않았다는 것이요, 더 높은 자가 되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뱀, 다시 말해 뱀을 통해 사탄이 하와를 유혹할 때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고 유혹한 것은 그 자신이 그런 자로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큰 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 머리가 되고 더욱 높아지려고 하는 마음은 그만큼 오랜 역사 속에 있어왔던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어디까지 높아지려고 하는가? 하나님의 자리까지 높아지려고 합니다. 그럼 왜 이런 마음을 가지느냐? 어쩌면 우리가 의지 앞에 ‘자유’라는 말을 붙여서 사용한다고 할 때 우리 인생의 주인은 우리 자신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처럼, 어떠한 간섭도 받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높아지고 높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기 위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시편의 표현으로 하자면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고 말하는 정신과 같습니다(시2:3).
물론 이것이 근본적인 이유라면 좀 더 실리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타락 이후 자기를 방어하고 보호하기 위해서 높은 자리에 앉고자 하는 이유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작은 자보다는 큰 자가 더 많은 것을 누리기 때문에 큰 자가 되고자 하는 이유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초점이 맞춰지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인데, 실제로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한 나라에서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은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보다는 더 많은 혜택과 유익을 누립니다.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반 사원보다는 높은 지위를 가진 자들이 더 많은 혜택을 누리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쉽게 말하면 작은 자보다는 큰 자가 더 많은 섬김을 받기 때문에 큰 자가 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오늘 본문 1절을 통해 우리가 좀 더 생각해 볼 것은 제자들이 ‘천국’에서 누가 크냐고 묻고 있는데, 과연 저들이 천국에 대하여 정당한 이해가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난 뒤 승천하시고자 하셨을 때조차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 다시 말해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해방만을 꿈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자면 사도행전 1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난 뒤 40일 동안 제자들이게 보이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행1:3). 천국의 일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공생애 3년 동안 다르지 않는 가르침을 가르치셨지만 승천에 앞서 40일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쳤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집중적으로 가르쳤다고도 말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영광의 나라보다는 지상 왕국을 염두 해 두고서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말했다면 오늘 본문 역시 그들의 이해 속에는 주께서 가르쳐주고 계시는 영광의 나라보다는 지상 왕국을 염두 해 두고서 다투고 논쟁한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반복적으로 말씀하셨을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 저들은 깨닫지 못했지만, 그리고 그것이 무슨 뜻인지 묻기도 두려워하였지만, 아마도 제자들 마음속에서는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주의 나라가 이 지상에 건설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죽음이라는 문제가 좀 걸리긴 했겠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기다리고 있던 메시야, 그러나 성경을 따라 정당하게 이해한 메시야이기보다는 정치적 메시야로서 이해하는 면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주의 나라에서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에 대하여 논쟁과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논쟁과 다툼은 마태복음 20장에서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의 요청 속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20절과 21절을 보시면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그리고 이런 요청으로 인하여 다른 제자들은 분히 여겼다고 말씀하고 있는데(마20:24), 그만큼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있을, 물론 그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지 몰랐지만 어쨌든 그 이후에 있을,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생각하면서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는가로 논쟁하였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논리가 오늘날 영광의 나라를 생각하면서도 동일한 원리로 적용이 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전도 많이 한 사람이 천국에서 가장 큰 상을 받는다고 말하는 논리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나 많이 전도했느냐에 따라 천국에서 사는 집의 크기가 다르다고까지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지상에서도 다르지 않게 나타나고 있는데, 예를 들어 예수 믿으면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잘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주를 향한 열심을 가진 자들은 그렇지 못한 자들보다 더 잘 되어야 한다는 생각 역시 동일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들은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가 하면 공로주의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이 땅에서 어떤 열심과 노력을 하느냐에 따라 이 땅이든, 아니면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서든 열심과 노력을 하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더 좋은 것을 받고 누린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의 논쟁과 다툼의 이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누가 큰가로 논쟁하고 다투느냐? 그런 논쟁과 다툼 이면에 공로주의적인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천국에서 누가 큰가? 당연히 열심을 낸 자, 어떤 결과들이 좋은 자가 큰 자가 되는 원리로 있을 뿐입니다. 세상적인 원리가 그대로 그들 안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계속해서 가르치신 것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보면 세상 원리와는 전혀 다른 원리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산상수훈만 보더라도 어떤 자가 복이 있느냐 할 때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으며,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그리고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의 정당한 이해를 따라 말씀드리자면 심령이 가난해야지만 복이 있고, 애통해야지만 복이 있고,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아야지만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자들의 모습은 심령이 가난하며, 애통하며,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어떻게 공로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예수님 자신이 사람으로부터 섬김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섬기는 분으로 계셨습니다. 본래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으로서 경배를 받으셔야 마땅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인성을 취하여 오신 것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병든 자를 고치며, 귀신들린 자를 자유케 하는 등 많은 사람들을 만나 섬기셨습니다. 섬기시되 어떤 보상을 목적으로 섬기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을 대속물로 주려 하신다고 말씀하시는데, 마태복음 20장 28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런 예수님의 뜻과는 달리 예수님 곁에서 배우고 친히 본 자들로 있는 자들이 천국에서 누가 큰가로 다투더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저들을 교훈하시기 위해서 한 어린 아이를 부르시는데, 오늘 본문 2절과 3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가복음 9장 35절에 보면 어린 아이를 부르시기 앞서 이런 말씀을 더하여주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앞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높아지려고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섬김을 받기 위한 것이 있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이유, 큰 자가 되고자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섬김을 받기 위해서란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가르쳐주고자 하시는 것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어서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왜 하나님께서 높은 자를 두시는가? 그들이 섬김을 받도록 하는 데만 있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여러분, 분명 한편으로는 낮은 자가 높은 자를 섬기는 것이 맞습니다. 5계명만 하더라도 명시적으로는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5계명의 해석은 단지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는 것으로만 설명되지 않고 성경은 부모가 자녀에 대하여 어떤 자세로서 임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가르칩니다. 그러니까 5계명은 명시적으로는 부모에 대한 공경을 가르치지만 단지 육체의 부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윗사람에 대한 것, 그리고 아랫사람에 대한 것, 심지어 동료에 대한 것을 다 포함하여 명하고 계시다는 것이 그 해석으로 있습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모든 윗사람은 혈육의 부모와 같은 사랑과 의무로 아랫사람을 향해 자녀를 대하듯 해야 하고, 아랫사람은 모든 윗사람을 자신의 부모에게 대하듯 해야 한다는 것이 5계명에 대한 정당한 이해란 것입니다. 또한 모든 동료관계에 대해서도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서로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 5계명에 대한 이해로 있습니다(총회 공과 5계명 해설 참조).
이런 이해가 있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 높은 자를 두시는 이유는 방금도 말씀을 드렸지만 한편으로는 낮은 자가 높은 자를 섬기는 것이 맞지만,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섬기기 위해 있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랫사람이 윗사람에 대한 의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윗사람 역시 아랫사람에 대한 정당한 의무가 분명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무란 무엇인가 했을 때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섬김을 받기 위해 높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되고 섬기기 위해 높은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시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높아지려고 하면서도 높아지려고 하는 목적이 단지 섬김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만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높은 자를 세우고자 하신 목적과는 분명 먼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섬기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높음과 자신의 높음으로 인하여 얻게 되는 어떤 것들에만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주의 뜻과 분명 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다툼이 무엇인가 하면 섬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섬김을 받기 위한 것으로 있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런 교훈을 더하여주고 계신 겁니다.
다만 마가복음 9장 35절과 관련하여, 그리고 오늘 본문의 전체적인 내용 속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될 것이 있는데, 성도는 결코 첫째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높은 데 마음을 두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버려야 할 마음이지만, 그것이 성도로 하여금 부자가 되기를 포기해야 하고, 위정자와 같은 높은 자리에 앉지도 말아야 하고, 유명해지는 것도 멀리해야 한다는 그런 의미로서 이해하시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명에 따라’ 부자도 될 수 있고, 위정자로서 어떤 지위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유명세를 탈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만 마음을 쏟는 것 자체로서는 주의할 필요가 있지만 주의 뜻을 따라 행하면서 나아갈 때 주께서 우리를 그런 자리에 앉히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무엇을 돌아보셔야 하는가 하면 높은 자리에 앉은 자로서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가? 아니면 섬기는 자로 있는가? 이것을 살피셔야 합니다.
한 예로 왜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에게 부함을 주시는가? 쓰고도 남을 만큼 주시는가? 남는 것으로 다른 사람을 돕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나에게 권세를 주시는가? 그 권세로 공의를 시행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돈 많은 사람, 자기에게 이런 저런 이유로 유익이 되는 사람 편에 서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선악 간에 분별하여 옳은 것은 옳다,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하도록 하기 위해 권세를 주시는 겁니다.
지금 제자들의 다툼은 전혀 그런 방향으로 서 있지 못했던 겁니다. 서 있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 권력에 대한 다툼만으로도 하나님의 뜻 그리고 그리스도의 마음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교훈하시기 위해 어린 아이 하나를 세워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어떤 이들은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어린 아이의 순수성으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어린 아이라 할지라도 결코 순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전적으로 타락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 타락한 자들이기 때문에 어린 아이일지라도 타락한 본성의 모습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순수한 모습이 아니라 죄악 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린 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오늘 본문 4절을 보시면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물론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라고 말할 때 “어린 아이가 자기를 낮추는가?”로 시비를 걸 수 있을지 몰라도, 최소한 높아지려고 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고 계시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3절에서 어떤 표현까지 쓰는가 하면 ‘돌이켜’라는 말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너희들이 다투고 있는 그 원인으로부터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지금 제자들의 마음이 그들 스스로의 공로 때문에 높아지려고 하는 마음, 소위 권세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것으로부터 돌이켜 진리의 길,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만한 길로 향하기를 바라고 계시는 겁니다. 칼빈의 주석을 참고하여 말씀드리자면, 어린이들은 경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이방인들과 세상에 속한 자들이 항상 얻고자 애쓰는 존경받는 즐거움을 어린이를 표본으로 하여 제자들의 마음으로부터 몰아내고자 하셨던 겁니다. 매튜 풀 주석에서는 어린 아이와 같다는 것을 다섯 가지로 설명하는데, 그 중두 가지만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어린 아이들은 권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기 때문에, 권력에 대한 욕심이나 야심이 없다... (4) 어린 아이들은 부모님의 보살핌을 믿고 의지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염려하지 않는다...”
여러분, 자기를 낮춘다는 것은 본래 높은 자리에 있지만 그런 자리에 있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높은 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취하는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는 겸손을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미덕이라고 생각하는가? 높은 자로 있지만 높은 자가 아니라 낮은 자처럼 행동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가 높은 자로 있습니까? 세상 안에서는 그 지위가 높은 자, 낮은 자가 있다고 할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도 높은 자로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다 타락했습니다. 타락의 결과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외에는 받을 수 있는 것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거기에 어떻게 높은 자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 예수 믿고 난 뒤에는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고백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한 것도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듯 인간의 공로에 근거하여 내가 너보다 크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천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저들의 경우는 천국을 영광의 나라와 관련하여 생각하기보다는 지상 나라와 관련하여 생각하고 있었지만, 영광의 나라라 할지라도 누가 더 큰가에 대한 문제로 하나님 앞에 나올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지상에서 행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로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상급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개혁자들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상급까지도 은혜의 상급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어떻게 누가 더 크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천국에서 가장 크신 분은 하나님 외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유일한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에게 가장 높은 사람이 목사라는 직분을 가진 사람으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아닙니다. 혹은 장로교라고 할 때 장로가 가장 힘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도 아닙니다. 교회의 유일한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유일하다는 것은 그분 외에는 머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분의 말씀으로만 교회는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목사는 그의 말씀을 맡아 가르치며 목양하는 자로 있기 때문에 성경은 다스리는 장로에 대해서도 배나 존경할 자로 알아야 하지만 가르치는 장로, 즉 목사에 대해서는 더욱 그리할 것을 권하기도 하는 것입니다(딤전5:17).
참고로 목사, 장로, 집사의 직분을 계급 식으로 보는 분들도 계시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항존직분으로서 목사, 장로, 집사의 직분은 그리스도께서 구속자로서 선지자, 제사장, 왕의 직분을 실행하신다고 할 때 바로 그 직분으로서 교회를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말씀을 가르치는 목사와 교회를 다스려 질서 있도록 하는 장로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나타내는 집사의 직분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선지자 직분, 왕 직분, 제사장 직분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목사가 더 높은 직분, 그 다음이 장로, 그 다음이 집사라는 개념은 전혀 없습니다. 동등합니다.
결국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크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당연히 취할 수밖에 없는 자세로서 요구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아버지 앞에서 자신이 큰 것처럼 행사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어린 아이들은 자기 곁에 있는 아버지가 가장 큰 사람으로 있을 뿐입니다. 매튜 풀 주석에서 말한 것처럼 어린 아이들은 부모님의 보살핌을 믿고 의지해서 살아가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 스스로는 작은 자라는 것을 아는 것, 그렇기 때문에 크신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자세, 이것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자신이 작은 자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서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달리 표현하자면 자신이 죄인이고, 죄인으로서 구원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서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는 우리를 대신하여 구원을 베풀어주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크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언제나 어린 아이와 같아야 한다는 것을 배우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높여주셨을 때 높은 자로서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 그런 차원에서 낮추는 것도 겸손이라 할 수 있지만, 성도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항상 낮은 자요, 겸손할 수밖에 없는 자요, 소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그리고 많은 성도들이 자기의 열심이 곧 천국의 상급과 비례한다고 생각합니다. 은혜라는 말은 하지만 은혜라고 말하기 때문에 공로주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은혜라고 말하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말한다면 거기에 공로주의라는 사고방식의 공로는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어린 아이와 같은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 누가 큰가로 비교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그리고 그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어떠한 열심으로 나아가야 마땅한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누가 큰가 할 때 하나님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가장 크신 분이십니다. 교회로 하자면 오직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십니다. 머리되신 그리스도 외에는 다 한 지체일 뿐입니다. 한 지체이지만 각 지체마다 다른 역할을 할 뿐입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자라가고 주의 성전으로서 지어져 가는 겁니다.
오늘 본문 5절로 오시면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라고 말씀하시는데, 지금 제자들의 다툼이 누가 크냐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자로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오히려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섬김을 받기 위해 다투어야 할 것이 아니라 너희는 섬기되, 어떤 자까지 섬겨야 하는가? 어린 아이까지도 섬겨야 할 자로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계신 겁니다.
특히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한다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역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자녀의 마땅한 열매는 무엇인가? 누가 더 크냐로 다투는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이와 같은 자로서 어린 아이조차 섬기는 거기에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실제로 이런 내용은 마태복음 25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거기 보면 최후심판 때 주께서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과 같이 복 받을 자와 저주 받을 자를 구분하시는데, 구분하는 내용이 뭐냐 하면 오늘 본문 5절의 내용입니다. 34절부터 보시면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25:34-36) 그런데 정작 이 말씀을 들은 대상은 어떻게 반응하느냐? 37절부터 보시면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마25:37-39)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 5절로서 저들에게 대답하십니다. 40절을 보시면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저주 받을 자들에 대해서는 이와는 정반대의 말씀을 하시는데, 언 듯 보면 행위구원을 말씀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믿음으로만 받습니다. 그럼 이 말씀은 어떤 의도에서 말씀되고 있는가?
마태복음 25장 전체를 보면 한 마디로 심판을 준비하라는 맥락 속에서 있습니다. 열 처녀 비유나 달란트 비유가 그것입니다. 24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이 왔으니 깨어 있으라는 겁니다. 깨어 있어 준비하라는 것이고, 특별히 열매가 없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열매란 무엇인가? 크신 하나님께서 어린 아이와 같은 너희를 위해 긍휼을 베푼 것처럼 너희도 그런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누가 크냐로 다투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그 이면에 있는 공로에 대한 교만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깨달은 자로서 마땅히 그 은혜와 긍휼을 나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나타내야 하는가? 어린 아이들입니다. 성경의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가난한 자, 연약한 자, 병든 자, 고아와 과부와 같은 자에게 입니다. 아니 모든 자에게 주께 하듯 해야 합니다. 지극히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충성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어떻게까지 말씀하시느냐? 6절을 보시면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고 말씀하실 정도입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우리가 다음 주에 다시금 살피겠지만,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는 열매란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에 대해서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 아니 무슨 일이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라(골3:23)는 말씀 역시 동일한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므로 성도는 크신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오히려 인간의 공로와 자랑과 교만만 있는 그런 높은 데 마음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크신 하나님께서 어디에 계시는지를 주목하셔야 합니다. 한 예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말로서 생각해 보자면, 왜 지금 제자들이 다투느냐? 부활이라는 영광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부활이라는 영광도 실제로 주님께서 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세상적인 것 뿐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영광이 아니라 고난입니다. 부활이 아니라 죽음입니다. 지난주 이사야 52장 후반부와 53장 초반부를 살피면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이 땅에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장차 있을 영광을 위해 부르신 것이 맞지만 영광을 위하여 무엇도 받도록 하시느냐 하면 고난도 받도록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를 바라보고 있느냐 하면 영광만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이 땅에서의 영광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다툼이 끊이지 않습니다. 무엇으로 다투느냐? 누가 더 나은 자인가로 다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크신 분이시고, 충만하신 분이시지만 다투는 거기에, 그것도 진리가 아니라 자신의 큼을 나타내고자 하는 거기에는 결코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어디에 계시는가? 어린 아이와 같은 자들에게 어린 아이와 같은 심령으로 섬기는 자들에게 함께 계십니다. 교만이 아니라 겸손으로 나타나는 거기에 함께 계십니다. 혹 하나님이 너무 크셔서, 너무나도 충만하셔서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사물을 보려면 우리 눈 안에 들어와야 하지만 하나님의 크심은 측량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증거로서 십자가 사건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의 절정이 무엇인가? 십자가입니다. 아들조차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자리가 바로 십자기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절정이라고 할 수는 있으나 시작과 끝은 아닙니다. 그만큼 그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는 측량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지금은 마치 희미한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마지막 때는 다 밝히십니다.
때문에 여러분, 지극히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아무런 보잘 것 없는 일 같아 보여도, 그리고 어린 아이와 같은 자라고 할지라도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해야 합니다. 크신 하나님은 반드시 큰 자, 큰 일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아무리 큰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크심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오히려 우리의 큼만이 나타나는 자리라면 결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크신 하나님 앞에서 어린 아이여야 합니다. 어린 아이로서 하나님만이 모든 것이 되신다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 되시기 때문에 하나님마니 나타나는 그 일에 우리의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이것이 주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참된 겸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