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18장 15-20절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천국에서 누가 큰가의 문제로 다투는 것은 ‘크신 하나님 앞에서’라는 정신보다는 공로주의적인 정신에 기반을 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공로주의적인 정신은 교만한 마음과도 무관하지 않는데, 그런 교만은 무엇을 낳게 되느냐 하면 다른 사람에 대한 멸시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다툼에 대하여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셨는데, 한 마디로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크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처럼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크신 하나님 앞에서 내 것이라고 할 만한 어떤 것도 없다는 것을 아는 자로서 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어린 아이의 경우 부모가 가장 크다고 생각하는 자들로서 부모를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 앞에서는 언제나 작은 자로 인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는 어떤 대상보다 크신 분이 하늘 아버지임을 믿습니다. 아니 비교할 수 없이 크신 분이 하늘 아버지임을 믿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 아이가 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처럼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 결코 인위적인 것이 아닙니다. 크신 하늘 아버지를 알고 그분 앞에서 자신을 안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을 낮추어서 낮추는 것이 아니라, 본래 낮은 자로 있다는 것을 알고 그런 자세를 취할 뿐입니다. 결코 크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습니다. 혹 사람들 사이에서 좀 큰 자처럼 있다면 그것 역시 하나님께서 높여주셨기 때문에 크다는 것을 알 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큰 자로 세우셨다는 것은 큰 자로서 섬김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기 보다는 섬겨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던 겁니다. 섬기되 어떤 대상까지 섬기는 자로 있어야 하는가? 어린 아이까지 섬기는 자로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섬김이 아니라 어린 아이처럼 작은 자에 대하여 멸시하고 실족케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교훈하셨습니다.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예수님께서는 실족하게 하는 자는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다시 말해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미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실족하게 하기 보다는 실족하게 하는 원인이 무엇이든지, 혹 손이나 발이 실족하게 한다면 실족하게 하는 손이나 발을 잘라내서라도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온전한 몸으로 지옥에 가는 것보다는 불구가 되어서라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더 낫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난 시간에도 언급을 했지만 오늘 본문과 함께 생각해 볼 때 손이나 발조차 잘라내 버릴 각오를 하라는 것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분명 실제 손이나 발을 잘라내라는 그런 뜻은 아니지만 오늘 본문, 특별히 장로교 정신으로서 권징을 말할 때 출교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런 내용까지 생각해 본다면 지체 중 하나를 끊어내는 일이 있더라도 실족하게 하는 일, 다시 말해 죄의 성격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교훈은 굉장히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무엇까지 생각해야 하느냐 하면 지체 중 하나를 끊어내는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고, 왜 끊어내느냐 할 때 죄가 다른 지체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도록 한다는 데 있다는 데 있기 때문에 역으로 실족하게 하는 지체 역시 죄에서 돌이키는 일이 있다면 다시금 받아줄 수 있어야 합니다.
길 잃은 양에 대한 비유가 그것입니다. 비록 그 스스로의 잘못으로 길을 잃었지만 양의 주인의 마음은 길 잃은 양을 찾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길을 잃었기 때문에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길 잃은 양을 찾기 위해 밤낮 찾는 수고를 하는 것이 주인의 마음이란 것입니다. 때문에 지난주 실족하게 하는 자들, 죄를 범하는 자들에 대하여 잘라낸다는 것은 결코 잘라내기 위한 목적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일부가 전체를 망치지 못하도록 보호하기 위한 측면이 있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부가 되는 자들 역시 잘못된 것을 알고 돌이키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러한 내용을 좀 더 명확하게, 그리고 어떤 절차를 거쳐야하는지에 대해 말씀해 주시는 내용입니다. 지난주 본문과 비교해서 말씀드리자면 실족하게 하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혹 실족하게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우선 15절을 보시면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기서 ‘형제’란 17절에서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말하는 것과 비교해 볼 때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는 자, 교회 안에 들어온 자입니다. 소위 믿는다고 하는 자를 일컫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된 자가 죄를 범하였다고 할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가 15절부터 17절까지 설명하고 있는데, 15절은 이렇게 하라고 권합니다.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일단 15절의 경우 공적으로 드러나기 전 형제의 죄를 알게 되었을 때, 혹은 형제가 자신에게 죄를 지었을 때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고 권합니다. 즉 죄 가운데 거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돌이켜 돌아올 것을 권면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권고하라’는 말로 번역하고 있지만 본래 뜻은 ‘드러내다’, ‘지적하다’는 뜻이라고 합니다(ejlevgcw[엘렝코]). 논박하다, 훈계하다, 죄를 깨닫게 하다, 잘못을 말하다, 책망하다, 꾸짖다는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래서인지 누가복음 17장 3절에서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즉 형제가 죄를 범할 때 경고하라(ejpitimavw[에피티마오]), 달리 표현하자면 꾸짖으라, 책망하라고까지 말씀하고 있는데(김성수 마태복음 설교 참조), 단어로만 보자면 생각보다 강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한 개인이 형제의 죄에 대하여 돌이킬 것을 권면하는 이상으로 드러내고, 지적하고, 경고하고, 꾸짖고, 책망할 수 있는가 물을 수 있습니다. 아니 저 사람이 어떤 잘못을 했을 때 강한 표현이 아니라 부드럽게 권면하는 것 자체도 혹 실족하게 하는 일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본문의 의도와 관련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해 주시지 않았더라면 모든 사람이 타인들의 과오를 눈감아 주고 이렇게 함으로써 악한 자들을 더욱 악하게 만들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실족시키지만 않으면 된다고 말하기가 쉬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약한 자들을 과도하게 실족시키지 않으면서 그의 약점을 고쳐줄 중용의 방법을 정하고 계신다. 잘못을 시정하기 위한 약으로서 조제된 엄격성은 유용하고 칭찬할 만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리스도께서는 과오를 시정키 위한 방법으로 서로 용서할 것을 제자들에게 명하고 계신다.” 그러니까 죄에 대하여 권고한다, 혹은 드러낸다, 지적한다는 것은 그것 자체, 다시 말해 권하고 드러내고 지적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돌이키도록 하는 것, 그리고 나아가 용서가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지금 네가 행하고 있는 일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만 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돌이키도록 하기 위해서 부드러운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라 때로는 엄격하게 말할 수 있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에 대하여 권고한다는 것은 굉장히 신중해야 될 일임에는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죄를 지적하는 것 자체를 어느 누구도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 드린 것처럼 죄에 대하여 권고하는 것은 자칫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고, 또 그로 말미암아 실족케 되는 일로 있기 때문에 신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죄를 마냥 덮어두고 숨겨두어서 죄가 죄를 낳는 일이 계속되다가 나중에는 도저히 헤어날 수 없을 지정이 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 권고하는 것, 드러내고 지적하는 것은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죄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강하고 끈질기고 간교하게 역사하여 누룩이 퍼지듯이 점점 더 넓게 퍼지고 깊이 스며들고 뿌리 내리기 때문에(김성수), 그리고 그 결과 자칫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질 수 있기 때문에(고전5:6, 갈5:9) 죄에 대하여 묵과하는 것은 결코 유익한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다만 죄를 묵과하지 않는다고 할 때 너무 강하게, 상대편 마음을 격심하게 공격하는 듯 한 모습은 결코 바람직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의 목적은 결코 넘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세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돌이키도록 하고 용서하는 것, 지난주 비유로 말하자면 길 잃은 양을 찾는 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길 읽은 양을 찾는 주인의 마음과 같아야 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누가복음의 표현, ‘경고하라’(눅17:3), 꾸짖으라, 책망하라는 것은 반드시 사랑의 마음이 전제가 되어 있어야 하며, 죄에 대하여는 경고와 꾸짖음과 책망이 동원될 만큼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제가 죄를 범하는 것을 알았을 때, 그것이 공적으로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을 때 우선적으로는 개인적으로 그 문제를 조용히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형제를 돌이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죄를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라면 우리는 개인적으로 알게 된 죄에 대하여 무조건 교회에 알려서 모든 성도들이 알게 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15절은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를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죄에 대한 권고, 때로는 경고를 듣고서 돌이키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죄를 지었다, 저런 죄를 지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죄에서 돌이키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겁니다.
물론 죄가 처음부터 공적으로 드러나 교회가 알게 되는 일도 있습니다. 개인과 개인의 죄가 아니라 전체 교회를 어지럽히고 어렵게 하는 죄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오늘 본문의 순서보다는 디모데전서 5장 20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하라”는 방식으로 해야 합니다. 공적으로 드러났고 교회를 어지럽히고 어렵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가 곧바로 나서서 죄를 책망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때도 어떤 마음으로 해야 하는가? 용서의 마음, 사랑의 마음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가 아니라 개인적인 죄라면, 공적으로 드러난 것이 아니라 은밀한 죄로서 개인이 알게 되었다면 본문의 순서를 따라 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개인적은 권면을 듣고서 죄에 대하여 돌이킨다면 형제 된 자를 얻는 것이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지만, 권면하는데도 돌이키지 않는다면 16절과 같이 하라고 권합니다.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듣지 않는다는 것은 죄에 대하여 알리고 돌이킬 것을 권면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계속해서 죄를 지을 때, 유순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완고해질 때 두세 증인과 함께 그를 재차 권면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우리의 본성은 죄를 지적하면 죄에 대하여 부인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자녀를 키워보면 부모 입장에서 뻔히 다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하여 부인하는 일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혼나지 않기 위해서 자기 방어를 그런 식으로 할 때가 많습니다. 가인과 아벨 사건이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뻔히 다 알고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지만 가인은 자신이 알지 못한다고 부인할 뿐이었습니다(창4:9). 그런데 이런 일이 우리 모두에게 비일비재하다는 겁니다. 마치 습관처럼 되어 있습니다. 때로 죄를 지적하면 굉장히 화를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죄를 죄가 아닌 것처럼, 매우 가벼운 것처럼 만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중에 죄인 아닌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누구도 예외 없이 다 죄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죄에 대하여, 그것도 은밀하게 하나님과 자신만 아는 죄가 아니라 어느 정도 죄가 드러난 것에 대하여 결코 묵과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죄를 용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역시 동일하게 죄를 용납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말씀까지 더하여주고 계시는 겁니다. 지난주 본문과 함께 생각하자면 죄는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실족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마치 적은 누룩으로 말미암아 그 전체가 어떤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런 일이 있지 않도록 주의를 주고 계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15절에서 몇몇 사람이 알게 된 죄에 대하여 어떤 한 개인이 가서 권면하였을 때 돌이키지 않는다면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두세 사람과 함께 가서 돌이킬 것을 권면하라는 것이고, 이때는 권면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만났을 때 말한 것과 이후에 있을 공적인 권면 앞에서 말을 바꾸어 권면한 자가 오히려 모함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부연하자면 한편으로는 여러 사람과 함께 가서 권면함으로 회개해야 함을 조금 더 강하게 말하는 가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회개하여 돌이킬 것을 권면하지만 돌이키지 않고 있다는 것을 한 사람이 아니라 두세 사람의 증인을 통해 좀 더 분명하게 하는 것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후 공적인 책망으로 넘어간다고 할 때 한 사람만이 아니라 두세 증인을 통해 사실 여부에 대하여 확증하는 것이 율법의 요구이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가 개인적인 책망, 토마스 카트라이트에 의하면 사적 권징에 대한 내용입니다. 17절 이하의 말씀은 공적인 권징에 대한 것으로서 16절에서 두세 증인과 함께 찾아가셨을 때 듣지 않는 자로 있다면 17절 말씀과 같이 하라고 하십니다.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여기서 우리가 먼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개인적으로 찾아가 권면하고 때로는 책망한다고 할 때는 징계의 성격보다는 권면하고 권고하는 것으로 있지만, 공적인 성격으로서 권징 할 때는 권면과 권고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출교라는 징계까지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일단 두세 증인과 함께 권면했을 때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라고 하는데, 매튜 풀 주석의 경우 교회를 회중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면서 어느 특정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토마스 카트라이트의 경우 ‘교회’에 말하라고 할 때 교회는 분명 교회의 치리자들을 의미하는 말로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기독교교리강론, p.259). 이 부분을 좀 더 명확하게 할 수 있는 것이 18절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 말씀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마태복음 16장 19절입니다. 그리고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천국의 열쇠권을 누구에게 주셨는가 할 때 카톨릭이 말하는 것처럼 베드로 개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신앙고백을 하는 모든 사람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럼 누구에게 주셨는가? 사도들, 즉 말씀 사역자를 중심으로 한 회에게 주셨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렇게 볼 때 두세 사람의 증인과 함께 권면하지만 그들의 말도 듣지 않을 때는 교회에 말하라는 것은 바로 치리회를 통해 그 일을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치리회는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당회, 노회, 총회와 같은 곳인데, 그 구성은 가르치는 장로와 다스리는 장로로 되어 있습니다. 말씀으로 가르치는 장로, 즉 목사와 말씀으로 다스리는 장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 예로 저희 교회의 경우 지금 당회가 없습니다. 따라서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치리회에서 결정할 문제로 있다면 우리는 노회로 그 문제를 가지고 가야 합니다.
어쨌든 교회에 말하여서 다시금 돌이킬 것을 권면하도록 하지만 교회의 권면조차 받아들이지 않을 때 어떻게 하도록 하느냐 하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길 것으로 말씀합니다. 이것이 출교입니다. 토마스 카트라이트는 이런 출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마치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했던 것과 같이, 범죄한 사람으로 인해서 교회 밖으로 완고한 범죄자를 내어 쫓는 것이며, 교회의 기도와 성례로부터 그를 배제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세리와 같은 자로 여겨서 그와 함께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것이다.”(기독교교리강론, p.259) 쉽게 말하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서 한 지체로 생각하지 말고, 불신자처럼 여기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말한다고 할 때 카트라이트는 교회의 충고를 듣지 않는 즉시 쫓겨나야 한다는 것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좋은 내과 의사, 또는 외과 의사가 자르고 태워버리기 전에, 염려하고 모든 다른 방법들을 사용하는 것처럼, 선하고 지혜로운 교회의 치리자들은 (할 수 있다면) 범죄자에 대해서 행하는 출교와 단절의 두려운 책망을 있기 전에, 그를 회개케 하시는 하나님의 호의를 찾기 위해서, 기도와 금식을 위한 시간을 적절하게 가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약 그가 경고를 받았고, 반복해서 경고를 받았다면, 그리고 수찬이 일시정지 되었고, 교회가 오랜 동안 안내함으로, 더 이상 행할 수 있는 어떤 치료책이 남아있지 않다면, 그때에 교회의 치리자는 출교를 진행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신중히 처리해야 할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 겁니다.
그럼 출교를 진행하고 난 뒤에는 끝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말씀 사역자들은 그의 회개를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구체적인 설명은 더 이상 하지 않지만,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볼 때 그가 돌아오기를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선한 것으로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출교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겨서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는 것처럼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을 통해 간섭하셔서 돌아오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과정 속에서 단지 치리회만이 아니라 온 교회 회중이 알게 되는데, 앞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개인적인 측면이 아니라 공적인 측면으로 넘어가면 그런 일이 본보기가 되어 다른 사람이 그 일에 동참하거나 같은 죄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한다는 측면에서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는, 그래서 나머지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워하게 하는 일이 있는 겁니다(딤전5:20).
여러분, 교회의 권징은 영적인 성격을 갖습니다. 결코 물리적이지 않습니다. 정부가 칼의 권세를 가지고 있어 어떤 범죄에 대하여 때로는 이런 저런 모양으로 물리적인 힘을 가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죄를 범했을 때 감옥에 가둬두는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결코 물리적인 어떤 것을 가하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어떤 이들은 교회의 권징에 대하여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지만 저희 교단의 경우 여성 목사에 대하여 인정하지 않습니다. 여성에 대한 차별이 아니라 성경의 권위를 따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교역자로 생활할 때 어떤 여성분께서 목사 안수를 주는 신학교에서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겠다는 것 때문에 여러 과정을 밟으면서 결국 출교라는 징계를 받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징계가 물리적이지 않다보니 너무 가볍게 생각하여 반드시 그 교단에 머물 이유가 없다는 식으로, 오히려 여성 목사 안수를 허락하는 교단으로 가서 자기 소견대로 해 보겠다는 것으로 나오더란 것입니다. 성경을 따라 정당한 징계가 내려졌지만 그런 징계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더란 것입니다.
최근 일이지만 동기 목사 가운데 성령 운동을 함으로 노회에서 목사 직분을 파면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저희 노회가 아니라 다른 노회입니다. 파면 당하면 더 이상 목사로서의 직분을 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파면 당했다고 해서 목사의 직분을 행하지 않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교단을 탈퇴하고 마치 독립적으로 할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목사 직분을 행하는 것이 오늘날 모습입니다. 몇몇 이단들이 그러한 모습으로 있는 것 아닙니까! 목사 직분이 파면 당하면 더 이상 목사가 아닌데, 여전히 목사라는 직함을 가지고서 일하는 겁니다. 그것도 성경의 정당한 이해를 따라 권징을 행했는데도 그렇게 한다는 것은 그만큼 권징에 대하여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아니 더 문제는 성경에 대한 정당한 이해가 없는 그런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영적인 문제, 다시 말해 죄 문제로 말씀에 합당한 권징을 행한다면 우리는 결코 그것에 대하여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18절을 통해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물리적인 어떤 일이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출교를 당했다고 해서 지금까지 다녔던 직장에서 쫓겨나지는 않습니다. 사회적인 어떤 제약을 받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의 권위로부터 나온 합당한 권징이라면 비록 치리회를 통해 결정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늘의 결정과도 같기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주의를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모든 심판이 지속성을 지니며 승인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재판장으로서 그 심판을 주재하시고 성령과 말씀에 의해 비준된 심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볼 때 사람들이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선언하고 주님께서 정하신 바를 충성스럽게 실행하는 일은 한다면 인간이 내리는 심판은 인간 스스로의 것이 아닌 것을 알 수가 있다.” 회를 통한 결정이지만 그것이 말씀에 근거한 것이라면 결코 사람의 말이 아닌 겁니다.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인식을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다만 교회가 말씀을 따라 올바른 권징을 행할지라도 모든 위선자들을 다 분별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 안에 곡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라지도 있을 수 있습니다. 가라지가 마치 알곡의 모양처럼 보일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지만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러서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회개를 권할 때 회개하는 모양으로만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공적 자리에서 회개하는 척만 하고 이후 회개하지 이전의 모습을 그대로 갖출 수도 있습니다. 회는 그 사실을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는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심판자로 오셔서 양과 염소를 구분하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권징은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 아니라, 돌이키는 자들에게는 위로와 소망의 내용으로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범죄자가 교회와 화목하고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도 죄의식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된다고 주님은 선언하”시기 때문에 위선자들이 아니라 적어도 경건한 자들에게는 큰 위로의 내용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칼빈 참조).
19절도 보시면 동일한 뜻으로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앞서 치리회와 관련해 말씀을 드렸지만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는 말씀 역시 그런 측면에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19절에 대해서도 우리는 개인적인 성격으로서의 모임이라기보다는 회의 성격으로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회를 통해 행사되는 모든 내용이 사람의 수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할 때, 다시 말해 말씀을 통하여 합당하게 결정할 때 그것은 결코 땅에서만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결정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20절도 보시면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두세 사람, 즉 회로서 모인 그들이 주의 이름으로 모일 때 단지 그들만의 모임이 아니라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모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되 두세 사람이, 율법이 요구하는 법적 유효 증인의 수가 확보된 상태에서 결정을 내리는 그 모임에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들 중에 계셔서 함께하시리라는 뜻입니다”(김성수) 당연히 주님의 권위가 그 회 가운데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말씀을 통해 교회가 권징으로서 어떤 결정을 한다고 할 때 반드시 주의 이름으로 모여야 함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은 주님의 뜻이 그 회를 통해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말씀을 통하여 결정이 되어야 하는 것으로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내리는 결정이 단지 땅에서만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의 결정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회를 통해 결정하는 것에 대하여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특히 죄를 범하여 징계를 받는다고 할 때 결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해야 하고 두려운 만큼 속히 회개하여 돌이켜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이해 속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서두에서도 말씀 드렸지만 15절, 16절이 개인적인 책망, 다시 말해 사적 권징으로서 말씀되고 있고, 또 17절 이하 20절이 공적인 권징으로서 말씀되고 있다고 할 때, 특별히 공적인 권징의 경우 치리권을 행사한다고 할 때 그 모든 권징의 내용은 잃은 양을 찾는 주인의 마음으로서 행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음 주에 보게 될 21절 이하의 말씀, 즉 “형제가 죄를 범하면 몇 번까지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에 대한 내용에서도 이 사실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죄를 범했으니까 살벌하게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시는 주님의 마음으로, 그리고 어느 정도 용서했으면 됐다는 식이 아니라 용서하고 또 용서하는 마음으로, 단지 겉으로만 용서하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는 그런 자세로서 권징에 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용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에 또 그 사건을 언급하면서 마치 용서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는 것!
권징으로서 최고 수준인 출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는 것은 앞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한 지체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불신자처럼 여기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그리스도 안에서 관계를 가질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마음으로 있어야 하는가? 그러한 일을 통해 그 영혼이 돌아올 수 있기만을 바라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살핀 바 있지만 고린도전서 5장에서 이 부분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1절과 2절을 보시면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쫓아내야 하는 것으로 말하지만 그 목적은 어디 있느냐? 5절입니다.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사탄에게 내주었다는 것은 오늘 본문의 내용으로 하자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는 것입니다. 출교의 성격의 다른 표현입니다. 2절 말씀처럼 쫓아내는 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만큼 출교는 두려워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출교라 할지라도 무엇을 목적으로 그렇게 하는가? 육신은 쫓겨낫지만 영혼만큼은 마지막 날 구원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그 일을 통해 회개하여 돌아올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 왜 권징이 있어야 하는가 생각할 수 있을지 몰라도 권징을 통해 죄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권징을 통해 죄가 확산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권징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권징을 통하여 죄의 자리에서 떠나 의의 자리에 앉히고자 하는 목적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자 중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요6:39) 권징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택하신 자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마지막 자리에서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권징이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적이든, 공적이든 하나님의 영광이 훼손되지 않도록 권징을 행해야 합니다. 다른 무엇보다 잃어버린 양을 찾는 주인의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는 자세로 권징을 행해야 합니다. 주인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사랑입니다. 긍휼입니다. 물론 사랑과 긍휼이라는 것이 권징을 안 해도 괜찮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은 ‘죄와 함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처럼(롬5:8), 비록 죄 가운데 거하고 있다고는 하나, 그리고 죄 가운데 거하고 있기 때문에 권징을 행해야 하겠지만, 권징을 행하는 것은 언제나 무엇을 전제로 해야 하느냐? 사랑과 긍휼이라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실제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가 그런 모습으로 있습니다. 말씀으로 권면하시고, 때로는 징계하시고 하시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신다고 할 때 결코 징계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우리를 돌이키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하여금 자녀답게 만들기 위함인 것입니다. 거기에는 사랑이 전제가 되어 있습니다. 인생 채찍을 통해 징계하시는 일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으로 그렇게 하실 뿐입니다. 때문에 우리도 사랑과 긍휼 없는 자로서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셔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2-3) 권징도 마찬가지입니다. 권하고 특별히 징계한다는 성격 때문에 사랑이 없는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히브리서는 징계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12:8) 그렇기 때문에 징계라는 단어의 뜻을 보면 ‘자녀 만들기’라는 뜻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자녀를 자녀답게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강한 뜻이 거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징계를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할 것이고, 그것이 교회 안에서 권징으로 나타난다고 할 때 단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있다는 것에 두려워하며 순복하는 자세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