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마태복음

171119설교 / 마태복음19장1-12절 / 아내를버리는것이옳으니이까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7.11.19|조회수319 목록 댓글 0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191-12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오늘 본문은 이혼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질문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혼에 관한 문제는 마태복음 5장에서 살핀 적이 있는데(5:31-32), 예수님 당시 율법 교사라 칭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이혼할 수 있다, 그것도 이혼증서를 써 주기만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율법의 가르침인 것처럼 인식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역시 동일하지만 마태복음 5장과 비교해 보면 좀 더 분명하게 말씀해주는 내용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선 오늘 본문 1절과 2절을 보시면 병자를 고치시는 사건을 먼저 언급합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 큰 무리가 따르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그들의 병을 고치시더라마태복음의 문맥을 따르자면 이 말씀을 마쳤다는 것은 지난주까지 살핀 마태복음 18장의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 누가 큰가?”로 다툴 때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 자가 큰 자라고 말씀하시면서 서로가 서로를 섬겨야 한다, 특별히 죄에 대해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지만 죄를 회개하거든, 혹 회개하지 않더라도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런 말씀을 하시고 난 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으로 가셨는데, 오늘 본문은 거기에 이르렀을 때 큰 무리가 따랐고 예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병든 자들을 고치셨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병든 자들, 연약한 자들을 섬기고 계신 모습을 보여주고 계신 것이며, 무엇보다 병이라는 것, 인생에 있어 고통이라는 것이 죄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은 이런 식으로 나타내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한 마디로 용서의 본을 보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친히 그런 분으로 계시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런 내용에 있어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병든 자들의 병을 고쳤다고 할 때 병을 고치는 것이 곧 그들의 구원과 직결되느냐 하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을 염두 해 두셔야 합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가 나음을 받았지만 구원은 오직 한 사람에게만 주어졌던 것처럼(17) 병이 나았다고 해서 그것이 곧 그들의 구원을 말하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이런 치유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 자신의 신성을 드러내기도 하시며, 죄의 결과로서 고통이 있다고 할 때 그것을 고치심으로 죄를 해결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드러내실 목적으로 치유 사역을 행하시는 겁니다.

 

어쨌든 이런 가운데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질문을 하는데, 3절에 보시면 조금 전에 언급한 것처럼 이혼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그러나 질문의 의도를 보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이런 질문을 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율법의 진의(眞意)를 배워 자신의 잘못된 해석을 교정하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오히려 질문을 통하여 넘어뜨리려는 악한 목적으로 질문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산상수훈이라고 일컫는 말씀에 대하여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 한 장소에서 그 모든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니었지만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어떻게 설명하시는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 이혼에 관해 말씀하셨던 것도 그들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바리새인들의 시험은 어떤 면에서 율법을 해석하는 데 있어 예수님의 해석과 바리새인들의 해석이 다르다는 것, 그러나 단순히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잣대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해석이 틀렸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시험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3절에서 이유로 번역된 단어가 원인이나 경우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범죄라는 의미도 지니기 있기 때문에 범죄로서 번역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매튜 풀 주석). 물론 어떤 범죄냐에 따라 달리 생각해야 하는 일이 있지만, 오늘 본문이나 이미 말씀하신 마태복음 5장에 있는 말씀에 근거해 음행한 경우라면 사실 큰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만 이해하고 있지 않았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혼과 관련하여 말씀하고 있는 신명기 241절의 경우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저들은 이 수치 되는 일을 음행으로만 해석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수치 되는 일에 대해 음행 외에도 다양한 내용으로 이혼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대로 하자면 어떤 이유에서건 이혼을 하고자 하면 할 수 있는 것처럼 만들어 놓았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옳다고 말한다면 마태복음 5장에서 말씀하셨던 것과는 달리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비를 걸 수 있었습니다. 역으로 저들의 질문에 대하여 옳지 않다고 말씀하신다면 저들 입장에서 볼 때 율법을 폐하는 것이 되므로 시비를 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칼빈은 본 구절에 대해 조금 더 단순하게 설명을 하는데, 이혼에 대한 찬성이냐, 반대냐 만을 놓고 설명합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이혼을 부정하시면 그들은 주님께서 율법을 폐하고 계신다고 그들의 불경건한 방법을 따라 소리칠 것이다. 만일 이혼을 인정하신다면 그들은 주님께서 하나님의 선지자가 아니라 인간의 욕정을 충족시키기 위한 포주에 불과하다고 말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지금 저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고, 시험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좋은 의도를 가지고 질문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우기보다는 넘어뜨리기 위한 목적이 바로 바리새인들의 숨겨진 의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성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저들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옳다, 옳지 않다는 대답보다는 창조 때부터 하나님께서 정하신 원리와 질서로 거슬러 올라가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4절 이하 6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우선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실 때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음을 말씀하십니다. 이 부분은 창세기 127절을 통해 증거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그러면서 말씀하시는 것이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된다는 것인데, 이 부분 역시 창세기 224절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그런데 이런 인용의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뭐냐? 6절입니다. 결혼은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둘이 아니라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 가운에 있는 일이요, 따라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오늘 본문에 따르면 바리새인들이 어떤 이유에서든지 이혼하고 싶으면 이혼할 수 있는 그런 문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혼에 대한 창조의 원리, 그 질서는 결혼한 사람이 이혼할 수 있느냐 할 때 그럴 수 없다는 것이 처음부터 정하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독특한 것은 5절에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라고 말하는 부분입니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어떤 이해가 있느냐 하면 출가외인(出嫁外人), 시집간 딸은 가족이 아니라 남이나 마찬가지라는 사고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아내가 그 부모를 떠나 남편에게 합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이 그런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런 표현을 쓰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아내가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 떠나야 한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럼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에베소서에 보면 남편과 아내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설명하는 부분이 있는데, 거기서도 오늘 본문과 동일한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JS). 에베소서 5 31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그리고 32절에서 이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는 것으로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그러니까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는 마치 부부의 관계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어떤 말씀을 하시느냐? 21절에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말씀하시면서 가장 먼저 부부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정리해서 말씀드리자면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것이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에 대해서는 주께 하듯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이 남편은 아내의 머리이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에서는 이 부분과 관련하여 설명할 때 창조의 순서로서 하와가 아니라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타락의 순서로서 아담이 아니라 여자가 먼저 속아 죄에 빠졌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데(딤전2:13-14), 이런 이유 때문에 남편은 아내의 머리라는 것입니다. 반면 남편이 아내에 대해서 사랑하라고 할 때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과 같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있어서 사랑과 순종을 말할 때 무엇이 앞서느냐 하면 사랑이 먼저 앞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일서 4 10에 의하면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순종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먼저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사랑의 증거로서 자기 자신을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그리고 오늘 본문이 인용하고 있는 창세기 224, 심지어 에베소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한다.”는 것은 이런 원리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교회를 사랑하시고 자신을 내어주신 것처럼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그와 같이 해야 한다. 그러니까 남편이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먼저 사랑하신 것을 드러내는 측면이 있는 겁니다. 교회가 그리스도께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교회로 오시는 겁니다. 먼저 사랑하셨다는 겁니다. 아니 성경은 먼저 사랑하신 것만 말하지 않고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것도 말합니다(13:1 참조).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뜻이 내포되어 있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 아내에게 합한다고 할 때 분명 그리스도께서 먼저 사랑하신 것, 그리고 끝까지 사랑하신 것을 말할 수 있지만, 에베소서를 통해 확인하는 것은 그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의 순종도 말한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는 원리가 부모를 떠나 아내에게 합한다는 말씀 속에 들어 있는 원리라는 것입니다.

부모를 떠난다는 것은 그런 차원에서 단순히 물리적인 떠남이 아니라, 비교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부모보다는 아내를 더 사랑해야 한다, 육신의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보다는 육신의 남편에서 순종해야 한다는 그런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칼빈은 이렇게 주석합니다. “하나님은 아내를 취하는 자에게 무조건 부모를 떠나라고 명령하지는 아니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효성을 철폐하신다면 하나님의 명령에는 모순이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편이 아내를 위한 의무와 부모를 위한 의무를 비교한다면 아내를 위한 의무가 부모를 위한 것보다 더욱 중요함을 알 수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면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결코 끊을 수 없지만 부부는 쉽게 끊을 수 있는 것처럼, ‘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방식은 결코 하나님의 뜻과 부합된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부부는 피가 섞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더더욱 끊을 수 없는 것이 부부와의 관계입니다. 이것이 창조의 원리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렇게 볼 때 지금 바리새인들의 질문,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습니까?”라는 것은 분명 창조의 원리와 질서와는 굉장히 먼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혼을 한다는 것, 그것도 남편 쪽에서 먼저 이혼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은 단순히 창조의 원리와 질서에서 멀다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는 악한 것이 분명합니다. 창조의 원리와 질서를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란 겁니다.

바리새인들만이 아니라 이런 내용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특별히 이혼이 많은 이 시대도 예외는 아닙니다. 세상은 본래부터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다 할지라도 그런 시대 속에서 교회만큼은, 성도만큼은 주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을 쫓아가야 하지만 오늘날은 교회조차 이런 현상들에 대하여 묵인하고 있는 듯 한 인상이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 때부터 분명히 알리신 것 가운데 하나가 남자와 여자가 만나 합법적 결혼을 통하여 부부가 되고 하나가 된다고 할 때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한 뜻, 본문의 표현대로 하자면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이 있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선한 뜻에 대하여 사람이 임의로 나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도 말씀을 드린 바가 있지만 이혼하는 이유 가운데 가장 많은 답변이 성격이 맞지 않다는 것인데,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성격이 맞겠습니까? 무엇보다 우리 모두는 죄악 된 모습을 가지고 있는데, 성격이 맞는 것 자체가 오히려 드물다고 말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럼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만나서 살게 하시는가? 다시 에베소서 5을 보시면 26절과 27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25절에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고 하시면서 나오는 내용이 이것입니다. 한 마디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시는 목적이 가정을 통해서도 이루시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결혼 생활은 우리가 바라는 것처럼 항상 즐겁고 행복하지만은 않습니다. 부부의 갈등이 있습니다. 자녀들이 태어나면 부모와 자녀 사이의 갈등도 있습니다. 그런 갈등 속에서 얼마나 많은 죄를 내놓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해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하십니다. 성도로서 성화를 이루어가야 하지만 내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어떤 면에서는 반복적으로 깨닫게 하십니다.

물론 모든 가정이 다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생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말하는 것처럼(90:10), 가정 안에서도 그런 모습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많은 부분 갈등으로 답답해하는 것이 보편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발견케 하시고 또한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심으로 어떤 길을 걷도록 하시느냐?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시는 성화의 길을 걷게 하시는 겁니다. 한 가정을 이룬다고 할 때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될 부분이 이 부분입니다. 두 사람이 한 가정을 이룬다고 할 때 사랑을 말할 수 있고, 행복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있지는 않다는 겁니다. 왜 가정을 세우셨는가?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분명 거기에는 갈등도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상 교회를 뭐라고 말합니까? 전투하는 교회라고 합니다. 왜 전투가 있는가? 죄와의 싸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지상 교회는 완전한 모습이 아니라 불완전한 모습으로 있습니다. 당연히 갈등이 있고, 이런 저런 문제들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 교회 안에 권징이 있는가?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입니다. 죄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서 무엇을 이루어 가시는가? 완전을 향해 가게 하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답변에 대해 저들은 다시금 질문을 하게 되는데, 모세의 율법이라는 구체적인 내용으로 질문을 하게 됩니다. 즉 그들이 이혼을 말하는 것은 모세의 율법을 따라 말하고 있는 것이고, 당신은 그런 모세의 율법을 범하고 있는 듯 한데, 이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7절을 보시면 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이 부분이 신명기 241절에 대한 내용인데, 앞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수치 되는 일을 음행으로서 이해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것 외에도 이런 저런 이유들, 다시 말해 어떤 이유에서건 이혼할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틀렸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저들의 율법 해석이 틀렸다고 말씀하시기보다는 왜 그런 법이 주어졌는지 그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8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본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은 창조 질서에 비춰보면 결코 이혼이라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왜 이혼하는 것을 허락했는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허락했다는 겁니다. 너희의 죄와 악으로부터 연유된 것이란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허락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간혹 개혁자들이 죄 문제와 관련해 허용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허용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거기에 하나님의 의지가 없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작정하실 때 분명 죄도 작정하셨습니다. 작정하실 뿐만 아니라 실행의 역사 속에서 작정하신 바대로 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죄의 원인자요, 저자라고 할 수 있는가? 성경 어디에도 그렇게 말하는 법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으로서 결코 죄의 원인자요, 저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죄에 대하여 허용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거기에는 마치 하나님의 의지가 없는 것처럼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지가 있으면 하나님이 마치 죄의 원인자나 저자가 되는 것처럼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결코 하고자 하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니라고 해야 합니다. 그럼 실제로 하나님이 그런 분으로 계신가?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이 문제를 이해하는 것도, 설명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 논리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에 대하여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11:33) 그러니까 인간은 무하하신 하나님 앞에서 유한한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유한한 존재가 어떻게 무한하신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허용하셨다고 해서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죄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으로서 허용했다고 할 때 하나님이 마치 죄의 원인자라도 되는 것처럼 그렇게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이 두 가지를 반드시 기억하셔야 합니다. 허용이라는 말을 할 때 의지가 없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럼 의지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죄의 저자요 원인자이신가? 그렇지 않다는 것. 아담의 타락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유롭고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타락을 작정하셨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드러낼 목적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낼 목적으로, 그러나 자신이 죄의 저자가 되지 않는 방식으로 작정하시고 작정하신 바를 그대로 실행하십니다.

다만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조금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이혼을 허락했다고 할 때 이것은 마치 로마서의 표현과 같은 방식과 같다는 것을 염두 해 두셔야 합니다. 로마서 1 24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내버려두시는 것. 26도 보시면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그러니까 죄에 대한 형벌, 다시 말해 죄를 죄로 벌하시는 성격으로서 허용하시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허용하시되, 하나님의 의지가 없다고 말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는 그 의지를 어떻게 행사하시느냐? 공의를 드러낼 방식으로 그 의지를 행사하신다는 겁니다.

 

실제로 저들이 근거로 두고 있는 신명기 241절은 결코 이혼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어진 것도 아닙니다. 이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신명기 241절에 대한 제네바 바이블의 해석을 보면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가벼운 혹은 경솔한’(light) 이혼을 인정하지 않으시지만 더 이상의 부당함을 피하도록 허락하신다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혼해도 된다가 아니라, 부당하게 이혼하는 것을 막고자 하실 목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란 것입니다.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는 부당한 이혼이 많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기들 좋을 대로 하는 일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창조의 원리와 질서가 있었지만 그런 원리를 부정하기라도 하는 듯 아내를 취하는 일이 있었고, 나아가 원하기만 하면 부당하게 버리는 일들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혼이라는 제도는 이미 창조의 원리에 있어서 남자들과 여자들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 즉 한 사람과 한 사람의 만남 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있었지만 타락 이후 그런 모든 것이 깨어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창세기 6장만 하더라도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아내로 삼았다는 내용이 있는데, 그런 모습이 편만해졌던 겁니다. 결혼과 관련하여 창조의 원리와 질서는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였던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부당하게 버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무엇을 허락하셨는가 하면 수치 되는 일이 아니면 함부로 이혼하지 못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해석은 어떠합니까? 얼마든지 이혼할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남자들의 정욕을 위해서 허락된 것처럼 그렇게 해석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본래는 그렇지 않지만 부당한 이혼을 막기 위해서, 부당한 이혼이라면 이미 거기에 정욕적인 죄악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벌하기 위해서 제정된 것입니다. 칼빈은 이렇게 주석합니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혼의 허락은 남자들이 정욕에 탐닉하거나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허가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에게 내려진 형벌이라는 것이다.”

여러분, 이혼만이 아니라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린도후서 6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4절부터 보시면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6:14-16) 이 부분과 관련해 개혁자들은 불신자와의 결혼을 금하는 내용으로 해석합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 창세기 6에서는 어떤 말씀도 있느냐 하면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6:1-2) 조금 전에 언급했던 부분인데,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택함 받은 자의 계보라 할 수 있고 사람의 딸들은 버림받은 자의 계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불신자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로 아내를 삼았다는 겁니다. 그 일에 대해 하나님께서 좋게 보시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3절에 보시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그러니까 불신자와의 결혼을 금하는 것은 고린도후서에서 비로소 언급되는 내용이 아니라 본래부터 있었던 말씀입니다. 그것을 어떻게까지 표현하기도 하느냐 하면 그리스도와 벨리알, 즉 우상이 어찌 조화될 수 있겠느냐?”고까지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는 신자와 불신자 사이의 결혼이 대수롭지 않은 듯 결혼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나마 이런 부분에 대한 생각이 있는 사람은 전도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결혼하기도 하고, 때로는 드물지만 하나님의 작정까지 말하기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은 작정하셨다고 해서 죄까지 하나님 탓으로 돌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있다면 그 길을 가야 할 것이 성도의 마땅한 본분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이탈하는 것은 하나님의 작정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 탓으로 돌릴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이 있기 때문에 말씀에 비춰보아 금하신 것을 행한다면 그것이 죄요, 그것이 곧 형벌이라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때문에 불신자와의 결혼은 죄요, 형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 때문에 때로는 그런 죄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드러내셔서 실제로 불신자로 하여금 믿음으로 이끄시기도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일을 우리 주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있다고 해서 죄에 대하여 괜찮은 것처럼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숨겨진 비밀에 대하여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으나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숨겨진 것이 아니라 이미 나타나 있는 말씀에 근거하여 가야할 길을 가고,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가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셔서 9절을 보시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결국 신명기 241절을 통해 무엇을 보호하고자 하셨는가 하면 결혼 제도를 보호하고자 하셨던 겁니다. 부당한 이혼을 금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창조의 원리와 질서로서 명하신 그 신성한 결혼 제도를 깨뜨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명하셨던 겁니다. 다만 한 가지 예외를 두셨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수치 되는 일, 즉 음행을 한 경우라면 이혼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역으로 말하면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결코 합당치 않다는 것이고,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를 가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간음죄를 저지른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32절에서는 어떤 말씀까지 하셨느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이혼 당했는데, 이혼 당한 그 사람이 결혼하는 것도 간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에는 이혼하고, 이혼한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만나 결혼하는 일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이지만 이 모든 것을 지금 하나님께서는 불법으로 규정하고 계신 겁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별하지 않고 재혼하는 것은 불법이란 것입니다. 다만 오늘 본문과 더불어 우리가 조금 더 생각해 볼 내용은 고린도전서 7에서 바울을 통해 이런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인데, 10절 이하를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 (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를 버리지 말며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고전7:10-15) 우선 우리가 정리해야 될 부분은 괄호 부분 가운데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라는 부분과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라고 말하는 부분인데, 그럼 주의 명령이 아니기 때문에 주의 말씀과 상관없는, 바울의 지극히 개인적인 말씀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부분은 주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가 있다는 것과 주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은 아니지만 계시를 받아 주의 뜻을 전하는 것이라는 그런 의미에서 말씀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 부분을 잘 정리해 두셔야 합니다.

다른 부분은 어려움이 없는데, 15절이 오늘 본문과 함께 좀 더 생각해야 될 부분입니다.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하지 않아야 되는 것이 분명 하나님의 뜻으로 있지만, 그 뜻을 알기 전에 결혼했다면 혹은 알지만 결혼하여 지금 믿지 않는 자와 함께 산다면 그런 결혼 생활은 유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15절 말씀처럼 믿지 않는 자 쪽에서 갈라서기를 원한다면 갈라서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어떻게 보면 오늘 본문과 상충되는 듯 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칼빈은 마태복음 19장 주석에서 이 내용을 다루는데,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의미하신 내용과 반대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혼에 대한 정당한 이유들을 논하고 있지 않고 남편이 아내가 섬기는 하나님을 미워하고, 아내는 하나님을 배반하는 대가를 지불함으로써만 남편과 화해할 수 있기 때문에, 그가 아내를 악하게 배척할 경우에 이 아내는 남편에게 계속적으로 구속되어 있어야 하는지에 관하여 논하기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처지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는 것보다는 인간과의 관계를 끊는 것이 더 낫다고 바울이 말한 사실은 그렇게 놀라운 말씀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절 자체에서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는 말씀도 하고 계시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아무리 예수 믿는 것을 싫어하더라도, 그렇게 싫어하는 가운데서도 화평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혼하자고 해서 무조건 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생활을 유지하려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음행이라는 이유와 관련해서도 우리가 조금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는데, 음행의 이유가 있으면 분명 이혼할 수 있고 이혼한다고 해서 불법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태복음 18장을 통해 배웠던 것은 무엇입니까? 섬김입니다. 사랑입니다. 용서입니다. 혹 죄를 범하여 끝까지 돌이키지 않아서 결국 출교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거기서조차 사랑과 용서를 버리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음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음행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무조건 갈라설 수 있다가 아니라 거기서도 용서가 있고,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대우하고 계시는 것 아닙니까? 성경은 다른 신을 섬기는 것에 대하여 행음하였다고 말합니다. 호세아서가 이 부분을 잘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신이라고 할 때 꼭 바알과 아세라와 같은 이방 종교에 대한 부분만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탐심은 곧 우상숭배라고 말합니다(3:5). 부연해서 말하자면 위엣 것을 생각하지 않고 땅의 것만을 생각하며 사는 것 자체가 우상 숭배와 같은 것입니다. 호세아 말씀대로 하자면 음행을 행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얼마든지 끊어내 버려도 할 말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끊어내십니까? 때로 징계하시는 일이 있지만 끊어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음행하고 있는 우리는 먼저 사랑하셨고, 또한 끝까지 사랑하기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섬겨라, 사랑하라,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섬기고, 내가 너희를 사랑하고, 내가 너희를 용서함 같이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얼마까지 해야 하는가? 일곱 번에 일흔 번씩이라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본문을 통해서는 이런 말씀까지 하고 계시지 않지만 성경의 전 내용 속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음행을 했다고 해서 용서할 수 없는가? 결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용서하고 사랑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열매가 바로 이런 내용들입니다. 다만 이때 이혼한다고 해서 그것이 불법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용서와 사랑이 있다는 것 때문에 주의 뜻이 아닌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악용해서 자기의 쾌락을 일삼는다면 이미 그것 자체가 주의 백성들이 가야 할 길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10절 이하는 이런 결혼에 대한 가르침에 대하여 제자들의 생각과 거기에 대한 주님의 교훈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이르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19:10-12) 우선 제자들의 반응인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것은 결코 좋은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닙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할 때 그러면 아예 결혼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도 보면 결혼이 서로를 서로에게 매이게 한다는 이유 때문에, 혹은 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 때문에 결혼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결혼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런 자로 부르시지 않는 이상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좀 더 분명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결혼하지 않도록 부르신 자 외에는 다 해야 될 것으로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사제들은 결혼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가톨릭의 입장은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법에 매이기보다는 그들 스스로의 법을 만들어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법인 양 말할 뿐입니다. 정확하게 바리새인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혼자 사는 것이 편하다는 이유로 결혼하지 않는 등 여러 이유들로 결혼하지 않으려고 하는 분위기가 있지만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떤 자들이 하나님께서 그런 자로 부르셨는가? 주님께서는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럼 이들이 하나님께서 그런 자들로 부르신 자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맨 마지막에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었다고 해서 이 말을 받을만한 자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자들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부르신 자들인가? 앞서 고린도전서 7을 살폈지만 9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이 말을 받을만한 자가 받는다고 할 때 절제할 수 있는 은사를 받은 사람, 정욕이 불 같이 타지 않는 사람이 이 말을 받을만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 사람, 즉 절제할 수 없고 정욕을 불탄다면 누구도 예외 없이 독신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제정하신 혼인이라는 규례를 통해서 이 세상에 사람들이 번성하여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사람들마다 각자의 기질이 있고 다른 체질을 가지고 있지만 혼인 없이 자신의 정욕을 다스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결혼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주의 뜻을 따라 때가 되면 해야 되는 문제로 있습니다. 다만 혼인 없이도 자신의 정욕을 제어할 수 있어서, 독신으로 살아가도, 넘치는 정욕과 부정한 욕망들로 인해서 하나님을 거슬러 범죄 하지 않을 수 있고, 세상 염려에서 벗어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좀 더 신령한 삶을 살아가면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데 좀 더 적합한 도구가 될 수 있는 자가 있다면, 바로 그런 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독신의 은사를 받은 자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매튜 풀 참조). 그런 사람들 외에는 다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때를 다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때가 되면 누구도 예외 없이 결혼해야 하고, 결혼을 통해 가정을 이루고 그 가정 속에서 사랑과 행복만이 아니라 갈등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또한 주의 은혜를 구하면서, 특별히 말씀이라는 은혜의 방편을 통해 자신을 살피면서 더욱 거룩함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음행 외에는 이혼이 불가하다는 겁니다. 이것은 음행이라는 이유로 이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우리의 정욕을 제어하기 위하여, 그리고 무엇보다 결혼이라는 틀 안에서 우리를 더욱 거룩하게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도록 하기 위하여 마련해 두신 틀입니다. 그런 제도를 성격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니면 좀 더 심각한 이유가 있을 수 있으나 이런 저런 이유들로 깨버린다면 이미 그것 자체가 형벌과 같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물론 가정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어떻게 다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임의대로 나누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하나가 되게 하셨다면 그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도록 해야 합니다. 아니 이혼 문제에 앞서 우리는 결혼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무엇보다 믿지 않는 자와의 결혼은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고, 세상이 말하는 것처럼 이런 저런 모양으로 외형을 갖추기보다는 내면을 더욱 갖춰가는 데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더불어 인간의 본성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이 땅에서 여전히 성화되어야 할 것을 생각한다면 결혼하고서도 많은 문제들을 겪게 될 것인데, 그 모든 것을 통하여 거룩하게 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배우셔야 합니다. 거기에는 섬기는 것도 있습니다. 절제하는 것도 있습니다. 용서하는 것도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것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충만까지 자라나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