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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71210설교 / 마태복음19장23-30절 / 하나님으로서는다하실수있느니라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7.12.10|조회수790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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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923-30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전도서 31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고 말씀하면서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름답게 만드신 세상 가운데 죄가 들어왔고, 죄로 인하여 그 마음은 부패함으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 가운데 주셨던 영원에 대한 갈망은 사라지지 않고 소위 종교성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는데,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찾는 인생이 없는 고로 영원에 대한 갈망은 결국 인간의 선한 노력에 의해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다는 보편적인 종교적 이해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부자 청년의 이해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분명 그는 유대인으로서 율법에 대하여 아는 자로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로마서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이 이방인들보다 나은 점이었습니다(3:1-2). 그렇다면 다른 이방인들과는 달리 누구보다도 인간의 타락과 부패성을 볼 수 있는 자였습니다. 성경이 그것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타락과 부패성을 보지 못하는 자로 있었습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다른 대부분의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선한 행실로 영생을 소유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온전히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율법을 통하여 결코 온전치 못하다는 것을 드러내셨고, 그들 스스로가 온전하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방식을 버리지 않는 이상 결코 영생을 소유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심으로서 영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을 수 있음을 알리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이 부자 청년이 근심하며 돌아간 뒤 제자들을 향하여 교훈하시는 내용입니다. 먼저 23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자칫 오해하면 부자이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처럼 이해하기 쉽지만, 부자면 다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표현 그대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운가? 지난주에 마태복음 6장 부분을 언급했지만 재물은 어떤 면에서 세상을 대표하는 성격이 있고, 그렇다보니 세상을 살아간다고 할 때 사람의 마음을 가장 많이 빼앗는 것이 재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재물에 대한 탐심으로 인하여 더 가치 있는 것을 보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세상으로서 대표하는 성격으로서의 재물이 그 마음을 차지하면 차지할수록 그 마음이 쏟아야 할 영원한 것에 대해서는 바라보지 못하는 성격으로 있기 때문에 어렵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부자 청년이 근심하여 돌아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율법에 대해서 성실히 지키는 자였습니다. 경건한 자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살인하지도 않았고, 간음하지도 않았고, 도둑질도 하지 않았고, 거짓 증언도 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겉으로는 율법을 지키는 외형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재물이 많은 자로서 재물에 대한 탐심은 버리지 못 했습니다. 영생을 얻는 것에 대하여 물으러 왔지만 영원히 가지지 못할 재물 때문에 영생에 대한 마음은 뒤로 물러나 버리고 말았던 겁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의 대부분이 이 부자 청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 사람들 마음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이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종교를 가지는 것도 일부 영원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보다는 영원에 대한 관심, 영생에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의 영혼과 관계된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과 자신의 육체에만 관심을 두기 때문입니다. 특히 외모에 대한 강조가 얼마나 심하지 그것이 곧 스펙이라고 말하는 시대입니다. 온통 외적인 것을 주목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4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탄으로부터 시험 당하시는 내용을 살핀 적이 있는데, 거기서 맨 마지막 시험이 사탄 자신에게 경배하기만 하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주겠다는 내용입니다. 한편으로는 세상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성경이 표현하고 있지만, 그런 권세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것은 분명 아니란 측면에서 사탄은 거짓으로 유혹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왜 이렇게까지 유혹하는가? 그것은 인간의 마음이 세상에 대한 탐심, 탐욕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 볼 때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에 대한 탐심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더 좋은 것을 입고자 하는 마음, 더 좋은 것을 먹고자 하는 마음, 더 좋은 곳에서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해결되면 자기 이름을 세상에 나타내고자 하는 마음도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명예와 권세가 다 이런 것들입니다. 바벨탑 사건을 생각해 보십시오.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11:3-4) 아니 맨 첫 사람의 타락만 생각해 보더라도 인간의 본성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35절에 보면 뱀이 이렇게 유혹합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바로 이 유혹에 빠져버리고 말았던 겁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마음! 이때는 죄가 들어오기 전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마음에 먹지 말라 하신 열매를 먹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조금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재물은 세상을 대표하는 성격으로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주로 재물에 대한 관심을 가지지만, 재물만이 아니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우리로 하여금 영혼을, 그리고 영생을 생각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있지만, 세상의 것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덮어 영원이 아니라 세상만 바라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난주 주께서 부자청년에게 하신 말씀, 즉 네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말씀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모든 재물을 다 팔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지만 거기에 우리의 마음을 두고, 거기에 우리의 가치를 두는 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재물만이 아니라 이 세상이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모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누가복음 12장에서 네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유를 통하여 영원한 나라를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12:33). 다시 말해 영원하지 않은 것으로 영원을 준비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데, 그 실천적인 모습이 구제 등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셔서 내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거기에 마음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 즉 이웃 사랑의 열매를 맺는 거기에 마음을 두는 것, 그리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 이것이 성도가 맺어야 할 열매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본문을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비유적으로 이렇게까지 말씀하십니다. 24절을 보시면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3절에서는 어렵다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여기서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쉽다고 표현합니다. 한 마디로 불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어떻게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낙타는 큰 동물인 반면 바늘귀는 너무나도 작은 구멍에 불과합니다. 때문에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그것이 더 쉽다, 역으로 말하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뭐냐?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는 정도가 아니라 여기서는 더 강하게 말씀하시는데,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부자여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게 아닙니다. 그들 마음 가운데 있는 탐심과 탐욕이 영원한 것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겁니다. 아니 지난주 말씀과 연결해서 생각해보면 이 부자 청년처럼 영원한 것을 바라보긴 하지만 그것을 자기 스스로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겁니다. 한편으로는 세상에 대한 탐심이요,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의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겁니다.

여러분, 다시금 강조하여 말씀드리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세상을 대표하는 재물, 그것이 사람들에게 힘으로 작용하지만 그런 힘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없습니다. 그럼 선행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경건의 훈련을 잘 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공로가 되는가? 그것도 아닙니다. 율법을 지킨다고 할 때 그들 나름대로의 해석을 따라 지킨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율법으로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3:20). 율법을 통해서는 우리가 죄인임을 발견하게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어떤 것으로도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당연히 부자 청년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다고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오늘날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말하며, 그런 만큼 돈이 곧 힘인 것처럼 하지만 영생은, 하나님 나라는 결코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놀라운 것은 이런 말씀 앞에 제자들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25절을 보시면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제자들의 경우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복음의 말씀을 듣고 들었습니다. 요약해서 말씀드리자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얼핏 보면 회개해야지만 천국을 소유할 수 있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도 회개하는 자 쪽에서 맺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16장에서 언급되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으라고 말하기 때문에 믿으라고 말씀하시는 그 대상이 어떤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말씀하셨다고 해서 믿고, 회개하고, 열매를 맺는 것이 사람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태복음을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지만 말씀 자체로 보자면 마치 인간에게 원인이 있고 결정권이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이 상당히 많습니다. 말씀하시는 형식이 그런 식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만이 아니라 성경의 많은 부분이 그런 식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사람에게 원인이 있고 결정권이 있다는 의미에서 말씀하신 적은 한번도 없다는 것을 전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교리를 통해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아니 마태복음 자체로서는 말씀하고 있지 않을지라도 어떤 사건에 대한 해석들이 요한복음에서 더욱 풍성하게 드러난다고 할 때, 거기서는 주체가 하나님이란 사실을 분명히 할 때도 있습니다.

한 예로 오병이어 사건의 경우 사복음서를 통해 다 증거 하고 있는데, 요한복음은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떡이라는 사실.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먹지 않으면 영생을 얻을 수 없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먹는다는 것은 그분을 믿는 것이라는 것까지 다 밝혀주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어떤 말씀도 하셨느냐?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는 말씀을 반복해서 가르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6:65).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하다고 할 때 결코 처음 듣는 말씀은 아니었던 겁니다. 복음을 들었다는 것은 비록 그 형식이 회개하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것으로 되어 있을지라도 인간의 본성상 그 스스로 회개할 수 없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더더욱 맺을 수 없다는 전제가 깔려져 있습니다. 그런 자들이 회개한다면 그것은 결코 그들에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라는 외적 방편을 통하여 내적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일하심이 항상 앞서기 때문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역사하시 아니하시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사람으로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 분명합니다.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들의 신앙고백만 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분명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6:17) 그런데 이런 말씀을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놀라면서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로 반문한다는 것은 그들 역시 부자 청년의 입장에 서 있는 자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렇게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복음의 말씀을 들었지만 영생의 문제, 구원의 문제를 어디에 근거를 두었느냐 하면 사람의 공로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마태복음 18장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누가 큰가로 싸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면에는 그들의 공로주의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보다는 내가 낫다는 생각이 그들에게 있었던 겁니다. 부자 청년과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아마도 제자들은 이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부자요, 관리라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경건함에 있어서도 남다르다면, 다시 말해 부자 청년이 말했던 것처럼 계명의 모든 부분을 어릴 때부터 지켰다면 이 사람만큼 하나님 나라와 영생에 가까운 사람도 없을 것이다.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실 때 이 사람만큼 거기에 가까운 사람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부자 청년과 관련하여 하나님 나라에서 멀다고 말씀하실 때 그들의 입장에서는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물을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6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여러분, 부자 청년의 질문을 다시금 가지고 와서 생각해 보십시다.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그러나 결국 주님께서 알리시고자 하시는 답변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다. 그것을 위하여 율법도 말씀하셨던 겁니다. 율법을 지킬 수만 있다면, 그것도 완전하게 지킬 수만 있다면 영생을 소유할 수 있지만, 인간이란 존재는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셨던 겁니다. 겉으로는 지켰다고 생각하는 그것조차 실상 어느 하나도 제대로 지킬 수 없다, 다시 말해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셨던 겁니다.

매튜 헨리 주석을 보면 이런 설명을 합니다. “사람의 지혜는 인간 영혼의 구원을 계획하는 데 있어서 전혀 어떻게 할 바를 알지 못하며, 인간의 능력도 역시 그 구원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 실패한다. 어떠한 피조물도 인간 영혼의 구원에 필요한 변화를, 자력에 의해서든지 타력에 의해서든지 일으킬 수가 없다. 사람으로서 인간의 성향을 바꾼다는 것은 그것이 너무나 강하며, 마음을 부드럽게 하기에는 그것이 너무도 완악하며, 의지를 꺾기에는 그것이 너무도 완고하여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것은 창조요 부활이기에 인간으로서는 이 일이 불가능한 것이다.”

여러분, 인간에 대한 참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도 하나님 지식에 근거하여 인간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 지식의 첫 번째는 창조 시 인간의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타락 이후 이간의 상태인데, 한 마디로 허물과 죄로 죽은 자로서 정의할 뿐입니다(2:1). 죽었다고 말하기에 죽은 자 스스로는 결코 살아날 수 없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며(2:3), 진노의 자녀로서 하나님 앞에서 선이라는 것은 하나도 내어놓을 수 없는 자들입니다(3:12). 그러므로 이런 인간에 대한 지식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공로를 통해서 영생을,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인간 스스로의 의로서는 결코 영생을 소유할 수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그럼 제자들의 질문처럼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누가 영생을 소유하며,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주님께서는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서 가능하게 하셔서 그 일을 이루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칼빈은 인간을 아는 지식과 함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가 알아야 할 지식이라고 말하는데, 인간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 인간의 타락이라면, 하나님 지식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그런 인간을 하나님 홀로, 그리고 하나님만이 전적으로 살리신다는 데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기 때문에 그 스스로는 살아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런 인간을 살리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것처럼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끌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다른 종교와 비교해 볼 때 기독교의 독특성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른 종교들은 대부분이 인간의 힘으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부자 청년의 질문처럼 선한 일을 많이 하면 지옥이 아니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기독교 안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펠라기안주의와 알미니안주의가 그렇습니다. 혹은 반펠라기안주의처럼 협력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말하면서도 거기에 뭔가를 섞어 말하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기독교란 무엇인가?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구원을 이룰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역사만이 구원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원인이라는 데 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구원의 은혜는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하나님께서 그 과정을 지키시고 보존하시며, 하나님께서 결국에는 완성하시는 것으로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11:36)이라고 말한 것이 바로 이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과정 그리고 완성까지 다 행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만이 영광을 받으셔야만 한다. 사람이 받아야 할 영광은 없다.”가 참된 기독교의 중요한 내용으로 있는 겁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다 하신다고 할 때 하나님의 속성에 반()하는 것을 하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이 죄인을 그대로 받으실 수 있는가? 없습니다. 가장 순결하신 분이 어떻게 더럽고 추한 자들을 받으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깨끗케 하셔서 받으시는데, 그분의 공의 또한 만족하셔야 하기 때문에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이신 분이 사람이 되셔서 죄 문제를 해결하게 하셨던 겁니다. 사랑 때문에 공의가 묵살되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과 공의를 함께 충족시키셔서 그 일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신앙으로서 분명히 해야 될 사실 한 가지는 오늘 본문 26절의 말씀을 확고히 하는 데 있습니다. 구원과 관련해서만이 아니라 실제로는 우리의 전 삶이 동일한 원리로 있습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다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만 영광을 올려드려야 하는 것이 성도의 삶이요, 교회의 방향이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27절로 오시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우선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네가 온전하기를 원한다면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말씀을 하셨고, 그 말씀에 따라 근심하며 돌아갔을 때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아니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신 것에 대하여 베드로가 나머지 제자들을 대표하여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르지 않았다면, 자신과 나머지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마태복음 4장에서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는 구절을 보게 됩니다(4:18-22). 그들과 마찬가지로 나머지 제자들 역시 그런 모습으로 주님을 따랐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영생을 소유할 수 있느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이 되느냐? 이미 말씀을 드렸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만약 베드로와 나머지 제자들이 그런 의미에서 물었다면 사람으로는 할 수 없다는 말을 여전히 모른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여전히 공로주의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앞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고백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바 되어 참된 고백을 했기 때문에 구원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가룟 유다를 제외하고는 참된 고백을 선물로 받은 자들은 구원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존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지식의 부족, 그리고 인간 지식에 대한 부족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여전히 사람으로서 할 수 있다는 것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 버렸기 때문에 무엇인가 얻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이것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진리 앞에서 사람으로서 할 수 있다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사도들의 신앙고백 이후 그 출처가 하나님이심을 밝히시고 난 뒤 주님께서 자신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하여 비로소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가 그럴 수 없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16:24)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사람의 모든 것은 다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27절 말씀을 부자에 비해 우리는 낫다는 의미가 아니라, 주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말씀과 함께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셔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르게 되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의미에서 해석할 때 “...그런즉 무엇을 얻으리이까라는 말씀은 공로에 대한 보상을 요구한다기보다는 약속의 말씀에 근거하여 물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제자들이 부자와의 비교를 통해 무엇인가를 요구하든,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약속된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원한다고 하든 주님께서는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고 하나님이 하실 수 있다는 차원에서 약속된 말씀을 전해주시는데, 28절이 그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쉽게 말하면 주님께서 가지게 될 영광에 그들 역시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이 새롭게 되어라는 말에 대해서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것 자체가 세상을 새롭게 하는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초림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이것을 곧이어 말씀하시는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라는 말씀과 연결해서 마지막 때 주님께서 심판하시면서 세상을 새롭게 만드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느 해석이나 차이는 없습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마지막 때 주께서 모든 것에 대하여 심판하실 때 열 두 사도, 그러나 가룟 유다를 제외하고 이후 뽑히게 될 맛디아까지 열 두 사도로 하여금 열 두 지파를 심판하실 권세를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있는 겁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도 하십니다. 29절입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주의해야 될 것은 집이나 형제나 자매,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는다는 것에 대하여 반드시 이 땅의 것을 복으로 받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는 정확하게 현세에 있어’, ‘현세에이런 복을 받는다고 되어 있지만(10:30, 18:30) 절대적인 의미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보다는 영생을 상속하게 된다는 말씀과 함께 이 땅에서부터 영생을 누리는 자로 있게 된다는 의미에서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이 세상 복으로만 이해를 한다면 사도들의 경우 약속된 말씀과 먼 자로 있기 때문에(3:6 참조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약속된 말씀이 틀렸다고 하든가, 아니면 사도들이 주를 위하여 다 버렸다고 말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 여러 배를 받는다고 할 때 그것은 마지막 때 영생을 상속하는 것과 함께 이 땅에서도 영생과 관련된 것을 받는다는 의미에서 말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칼빈은 이 부분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말씀을 요약하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기꺼이 잃는 자는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것보다 현세에서 더 큰 기쁨을 얻게 되고 무엇보다도 그를 위하여 하늘에 상이 쌓여지게 된다는 것이다.” 세상의 것을 많이 받아서 기쁨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이 그것입니다. 빌립보서 3 7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3:7-9)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괜찮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진정한 복의 내용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이 세상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그리스도만 잃지 않는다면 괜찮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매튜 풀 주석도 동일하게, 그러면서도 좀 더 풍성하게 해석을 하는데, 약간 길지만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현세에서 무엇을 백 배로 받게 되는가? (1) 성령 안에서의 기쁨, 양심의 평안, 하나님의 사랑을 느낌. 그들은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게될 것이다(5:41). 그들은 바울이나 실라 같이 감옥에서도 찬송을 부르게 될 것이다(16:25). 그들은 하늘에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음을 알고, 자신들의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여기게 될 것이다(10:34). 이러한 내적인 기쁨과 평안은 부모나 형제나 자매보다 백 배나 더 귀한 것이다. (2) 자족함. 그들은 자신들에게 남겨진 적은 것으로도 자족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전만큼 충분히 마실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목마름이 덜하게 될 것이다(4:11-12). (3)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그들의 쓸 것을 공급해 주게 하실 것이고, 그렇게 공급된 것들은 그들에게 전에 풍족했던 것들보다 더 큰 달콤함을 가져다 줄 것이다. (4) 하나님께서는 시련을 통과한 욥에게 이전보다 더 큰 재물을 다시 주셨듯이, 종종 현세에서 되갚아 주시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또 다른 세상에서 영원한 행복이 라는 확실한 상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물은 것이 부자 청년과 비교하면서 자신의 공로를 나타내는 측면이 아니라,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신다고 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모든 것을 버렸다고 한다면 우리 역시 바울의 고백처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줄 알고 그리스도 외에는 다 버려도 된다는 자세를 분명히 가지셔야 합니다. 그런 자세를 가지지 않고 여전히 세상의 것에 집착하고 그것을 가치 있다고 여긴다면 우리는 세상의 것을 가치 있게 여기는 만큼 하나님의 것에 대하여 소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것을 소홀히 여기는 만큼 주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이 땅에서의 영생의 시작을 그만큼 맛보지 못하는 자로 있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의 복은 어디 있느냐?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가장 큰 복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주고자 하는 영원한 것들이 복의 내용입니다. 그 복을 장차 받게 될 것이지만 이 땅에서부터 받아 누린다고 할 때 그것이 무엇인지를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 30절을 보시면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여기 보면 그러나로 시작하는데, 앞서 제자들은 주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말했든지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의 영광과 동일한 영광에 참여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혹이라도 여전히 공로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꺾으셔서 자신의 영광과 동일한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들어 가실 것이기 때문에 결코 거짓된 약속을 하고 계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수 있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영광에 대한 약속 때문에 현재 그들에게 주어진 일에 대하여 태만하지 않도록 하십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칼빈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 “사도들은 이제 겨우 경주를 출발해 놓고 극성스럽게 상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훌륭하게 시작한 자들이 힘 있게 계속 진행하도록 권면하고 계신다.” 쉽게 말하면 이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서 3을 통해 말한 것인데,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3:13-14) 영광의 약속이 있다고 해서 나태해버리면 결국 먼저 출발했지만 나중 될 수 있기 때문에 주의하라는 겁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오늘 본문의 전체적인 내용 속에서 무엇까지 생각해 볼 수 있느냐 하면 먼저 된 자로 생각하는 자들, 즉 사람으로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결국 나중 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에서 멀 수밖에 없다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때문에 사람으로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철저히 버려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신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이런 교훈은 27절 말씀에 대하여 제자들이 여전히 자신의 공로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할 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인데, 비록 주님께서 약속의 말씀으로 장차 주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고 말씀할지라도 사람으로서는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상 그 약속에서 멀다는 측면에서 그러나라는 말로 30절 말씀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소위 섰다고 생각하는 자는 넘어지지 않도록 자신을 잘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자신의 공로를 가지고 나아올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만을 증거 해야 합니다. 그 은혜에 감사해야 하며, 감사로서 주의 것을 나타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는 다 하실 수 있다는 그 사실만 남도록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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