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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50412설교 / 마태복음4장8-11절 / 하나님께경배하고다만그를섬기라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5.04.12|조회수622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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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48-11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려고 할 때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험은 예수님 자신이 나아지거나 완성된 자리로 나아가기 위한 목적으로 시험을 받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누구를 위해서인가?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아담이 인류의 대표로서 마귀로부터 오는 시험에서 넘어졌다면, 예수님은 택자의 대표로서 그런 마귀로부터 오는 시험을 물리치고자 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마귀의 시험은 단순히 예수님을 넘어뜨리는 것 이상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넘어뜨려 하나님의 백성들을 돕지 못하도록 하려는 목적이 있는 것이고, 예수님의 구속 사역까지 방해하고자 하는 그런 목적이 거기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 우리가 살피게 되는 시험까지 모든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달리 말하면 택자의 대표로서, 그리고 교회의 머리로서 이 모든 시험을 이기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기신 원리가 바로 택자의 원리요, 교회의 원리라는 것을 다시금 깊이 새기셔야 합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존재라는 것”, 사람은 어떻게 사는가? 현실 문제로서 원망 불평하면서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로 있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존재라는 것이것이 성도의 내용이요, 교회의 원리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세 번째 시험에 관한 내용입니다. 먼저 8절과 9절을 보시면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귀 자신에게 엎드려 경배하기만 하면 온 천하만국과 그 모든 영광을 다 주겠다고 말합니다. 특히 누가복음 4에 보면 마태복음에는 없는 표현이 있는데, 이런 표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4:6) 그러니까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주면서 이 모든 것을 주겠다고 말하기 때문에 내게 넘겨 준 것이란 이 말은 천하만국에 대한 권세입니다. 즉 마귀 스스로 천하만국에 대한 권세를 받았다. 그러니 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럼 마귀가 천하만국에 대한 권세를 가졌는가? 일단 성경의 몇몇 부분을 보면 마귀가 한 말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 13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절과 2을 보시면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 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더라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여기 보면 한 짐승이 나오고, 용도 나옵니다. 그런데 용이 그 짐승에게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2 9에 의하면 용은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용은 마귀요, 사탄인 겁니다. 바로 그가 짐승에게 권세를 주는데, 달리 말하면 오늘 본문에서처럼 마귀가 어떤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에베소서 2 2에서는 이런 표현도 있습니다.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그리니까 마귀를 어떻게 표현하는가 하면 공중 권세를 잡은 자로서 표현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말씀이 뭐냐?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라 행하는데,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느냐?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 본문에서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는 마귀의 이 말은 완전히 틀렸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방금 살핀 것처럼 마귀는 공중 권세를 잡은 자로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도록 만들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도록 만들 수 있는 존재입니다. 실제로 욥기를 보면 마귀가 사람들을 이용하기도 하고, 또 자연을 이용하기도 하는 등 빼앗고 죽이는 일까지 할 수 있는 것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종종 죄의 종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왜 죄의 종이라고 말하는가? 죄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죄의 종으로만 표현하느냐? 요한복음 8 44에서는 이렇게도 표현합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여기서는 마귀에게서 났다고까지 말씀합니다. 물론 그 대상은 중생하지 못한 자들입니다. 중생하지 못한 자들에게 있어 마귀는 어떤 존재냐? 아비라고 칭해지는 그런 존재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들은 아비를 따라 행할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 증거하는 것처럼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마귀는 그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이미 첫 번째 시험 부분에서 잠시 언급을 했지만 욥기의 정당한 이해가 있다면 마귀가 제아무리 권세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런 권세가 하나님의 주권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분명 마귀가 천하만국에 대한 권세를 받았다고 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그런 권세도 아무렇게 발휘할 수 있는 게 아니란 것입니다. 그래서 욥기에 보면 어떤 말씀이 있느냐? 욥의 소유물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그의 몸에는 손대지 말라고 하실 때 마귀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1:12), 또 그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은 허락하지만 생명을 빼앗아 가지는 못한다고 했을 때 마귀는 거기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2:6).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한 나라의 흥망성쇠, 그리고 개개인의 생사화복은 오직 하나님 한분만이 주장한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겁니다. 한 나라가 부국강병하거나, 아니면 그와는 정반대가 되는 일은 누구의 주권 아래 있는가? 또 한 개인에게 복이 있거나 혹은 화가 미치는 것, 아니 생명의 존재와 유지 혹은 그런 생명이 사라지는 것은 다 누구의 주권 아래 있는가? 하나님이신 겁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 안에서 마귀의 경우 그 악한 의도대로 천하를 꾀어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지만, 그런 대적도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서 대결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때문에 몇몇 선교단체들이 마귀의 권세를 너무 과하게 말함으로 그들이 마치 하나님을 능히 대적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여 영적전쟁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그런 내용은 그렇게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복음화 비율을 가지고 그 비율이 좀 낮은 지역의 경우 마귀의 역사가 심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하며, 또 그런 지역에 가면 마치 자신이 영적인 세계에 대해 매우 민감하기라도 한 것처럼 머리가 아프다는 등 그런 말도 서슴지 않는데,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다 무엇처럼 생각하느냐? 헐리웃 영화에 보면 선과 악이 대등한 위치에서 싸우는 것처럼 생각하는 그런 것과 전혀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마귀가 대등한 위치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시요, 마귀는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창조하신 만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은 다 사라질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가 있는데(24:35),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실제로 마귀조차 사라지게 할 수 있는 분이 우리가 섬기고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마귀는 그런 하나님 앞에서 뭔가를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어떤 것을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이 얼마나 오묘한지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할 뿐입니다. 마귀의 경우는 악한 목적과 악한 방법으로 일한다면, 하나님은 그것조차 사용하시어 선한 목적과 선한 방향으로 그 모든 것을 이끄시는 겁니다.

 

따라서 지금 마귀의 권세와 능력은 한마디로 제한 된 권세에 지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권세를 가지고 있지도 않으며, 하나님의 뜻 밖에서 자유로운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시험하는 게 뭐냐? 마치 천하만국이 자기 것인 양, 그리고 그 모든 권세와 능력을 줄 수 있는 것인 양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빌미로 자기에게 경배해 보라고 시험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조금 전에 요한복음 844절을 읽어드렸지만 마귀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입니다. 두 번째 시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씀을 가지고도 정당하게 해석하지 않고 거짓을 말할 수 있는 자, 그가 바로 마귀입니다. 그런 특성답게 세 번째 시험에서도 거짓으로 자기를 높이고 있습니다. 분명 성경 표현을 따라 공중 권세 잡은 자로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아무런 제한이 없는 그런 권세를 가진 것은 아닌 겁니다. 제한된 권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제한을 받지 않는 것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자기를 소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시험 앞에 인간이란 존재는 어떤 존재인가? 일단 인간이란 존재는 가장 기본적으로 첫 번째 시험과 관련해서 넘어질 때가 많습니다. 먹고 마시는 문제, 의식주라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가 채워지지 않으면 굉장히 힘들어 합니다. 그리고 믿는 자가 그런 문제에 부딪히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까지 흔들리게 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어느 정도 해결이 되면 높아지려고 하는 욕망, 힘을 가지려고 하는 욕망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실제로 마태복음 20에 보면 제자들 가운데 요한과 야고보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나아와 이런 말을 합니다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20:21) 그러자 나머지 열 제자가 어떤 마음을 품게 되느냐 하면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20:24) 그러니까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제자들조차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느냐 하면 좀 더 높아지려고 하는 마음, 좀 더 권세를 가지고자 하는 그런 마음을 품고 있더란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은 가르침을 받았고, 또한 그 내용에 있어서도 결코 높아지도록 하는 그런 말씀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분명히 낮아져야 할 것을 누누이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의 마음 가운데는 높음과 권세를 생각하고 있더란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아니 미래에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사람들은 항상 높은 곳, 더 나은 것을 항상 바라는 것이 본성으로 있습니다. 한 때 세계사를 보면 많은 땅을 정복하기 위해서 전쟁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왜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점령하는 일이 있는가? 또 그렇게 많은 피를 흘려가면서까지 전쟁을 하게 되는가? 자기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날에는 그런 정복의 역사가 없지만 여전히 자기 이름을 알리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 무엇과 관련이 있느냐? 세상의 권세를 가지기 위한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좀 더 높아지려고 하고, 좀 더 나아지려고 하는 마음, 그것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런 마음이 어떤 분야에 있어 뛰어난 사람들만의 몫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사람들 마음에는 좀 더 높아졌으면 하는 마음, 그리고 좀 더 나아졌으면 하는 마음이 항상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마음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심각한 모습은 인간이 하나님보다 높아지려고 하는 데 있습니다. 시편 2을 보면 이방 나라와 민족들이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한다고 하면서 3에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기 위해, 다시 말해 내 위에 하나님이란 존재가 군림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끊임없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인간은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데, 인간의 욕망이란 어디에까지 미치고 있느냐 하면 하나님 위에 인간의 자리를 두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앞서 요한복음 8장의 내용을 살폈지만 마귀의 욕심도 다르지 않는 욕심입니다. 유다서에 보면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에 관해서 말씀하시는데(1:6), 마귀의 욕심이 바로 이런 내용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욕심을 따라 행하는 자들이 중생하지 못한 자들인데, 그들도 동일한 내용으로서 하나님 앞에 서더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단지 시편 2편에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맨 첫 사람 하와를 향한 유혹의 내용이기도 했습니다. 창세기 3을 보면 마귀가 하와를 유혹하는데, 무엇을 가지고 유혹을 하느냐?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3:5)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2:16-17) 그러나 마귀는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3:1) 물었습니다. 그 말에 대해 하와는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3:3), 즉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게 되었고, 이런 하와의 말에 마귀는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3:4)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말했던 것이 뭐냐?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그 결과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와는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었던 것이고, 그것을 남편에게도 주어 먹게 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오늘날 모든 인류처럼 원죄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아니 어떤 죄도 짓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마귀의 유혹을 받아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되었느냐 하면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했습니다. 자기 지위를 지킨 것이 아니라, 자기 지위에 만족하지 못하고 좀 더 높아지려고 했던 것이 죄의 결과를 낳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마귀와 동일한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담의 타락 이후 본성적으로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어떠하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무한한 욕망을 가진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높아지려고 하고, 끊임없이 어떤 권세를 추구하려고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아니 근본적으로 하나님보다 더 높아지려고 하는 마음이 그들 마음 가운데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인간이 취하고자 하는 마음, 그 욕망이 인간 모두에게는 있다는 겁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런 인간의 본성과는 상관없는 분이십니다. 인성을 취하셨지만 아담으로부터 오는 원죄가 그분 안에는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시험하되,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면서 시험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 아담을 넘어뜨린 것처럼 예수님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자기 백성을 위한 권세를 이 땅에서 가져보라는 식으로 시험을 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오병이어 사건 이후 사람들이 먹고 배부른 까닭에 예수님을 따르고 또한 이 땅의 임금을 삼으려고 했던 것처럼, 저들의 욕망이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에 네가 그것을 채워줘 보라고 시험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위하여 조건을 내 거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비록 인성을 입으셨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마귀도 그것을 알고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렇게 시험까지 했습니다. 그런 분 앞에서 무엇을 조건으로 내 거느냐 하면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마귀도 참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이런 시험이 예수님께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계속해서 시험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것을 증명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기록해 놓고 있는 이유는 예수님의 경우 이 모든 시험을 이겨내시는 분으로 계시자만, 그의 몸 된 교회의 경우 그런 시험 앞에 너무나도 연약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앞선 시험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보십시오. 사람들이 높아지기 위해서라면 얼마나 타협하는지 모릅니다. 타협만이 아니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도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놔두고라도 믿는 사람들조차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주일성수를 생각해 보십시오. 주일에도 국가에서 치르는 시험이 있으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 때문에 그것을 포기하는 자가 없습니다. 오히려 꼭 합격해서 더 좋은 모습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만 말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20:8)고 말씀하셨지만, 그런 명령이 그때만큼은 적용이 되지 않는 것처럼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런가? 다 자기 욕심 때문입니다. 높아지려고 하는 욕심, 더 나은 자리를 확보하고자 하는 욕심, 바로 그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 사이에서 타협하더란 것입니다. 학생들의 경우도 보면 입시 때문에 많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그런 고민 때문에 주일에조차 공부를 하지 않으면 마치 다른 아이들보다 뒤로 밀리는 듯 한 생각을 가지게 되고, 그래서 열심히 공부를 하는 믿음의 자녀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아니 오히려 부모가 그것을 조장하기까지 합니다. 학교에도 보내고, 또한 학원에도 보내면서 주일에는 잠깐 교회 출석하게 하든가, 아니면 아예 빠지는 경우도 얼마나 허다한지 모릅니다. 다 뭐냐? 하나님의 명령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과 상관없이 세상과 타협을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명령 때문에 자기 십자가를 지는 자들이 없고, 하나님 때문에 자신의 욕심을 포기할 줄도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어떤 길을 가고자 할 때 혹 주일에 그 길과 관련된 시험을 쳐야지만 한다면 그 길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내 놓으신 길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그분의 명령을 따르는 것으로서 받고자 하시는 것이지, 그분의 명령과 상관없이 받고자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명령과 상관없이 가는 모든 길은 다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길이 아니라,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기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는 길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걸 주의하셔야 합니다. 혹 공부가 우리로 하여금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못하도록 한다면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그래서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취직을 하더라도, 그리고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말을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적인 어떤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슬러 가면서 하는 모든 일이라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영광과 상관이 없습니다. 다 자기 유익을 위한 것이요, 자기 영광을 위한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마귀는 바로 이런 것으로 우리를 유혹하는 겁니다. 말씀을 버리라. 말씀만 버린다면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겠다.

 

어쨌든 이런 마귀의 시험에 대해 예수님께서 답변하신 것이 뭐냐? 10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이 말씀은 신명기 6 13을 인용한 것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그리고 이렇게 명하고 계신 이유와 관련해서 말하자면 12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그러니까 왜 이런 명령을 하시는가?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셨기 때문입니다. 너는 애굽의 종이 아니라, 이제는 내 것이다. 그러니 여호와 하나님만 경외하며 그만을 섬기라고 명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같은 신명기 6장에 보면 13절로 가기 위하여 앞서 어떤 말씀을 하시느냐 하면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신명기 6 4절과 5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왜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를 섬겨야 하는가? 왜 하나님만을 경배해야 하는가? 그분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있는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께서 누구는 택하여 세웠느냐? 많은 민족들 가운데 너희를 택하셨고,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건져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실 것인데,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시느냐?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 대한 사랑을 줄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담과 하와의 내용을 다시 생각해 보십시다. 왜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통해 금지 명령을 주셨는가? 분명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허락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라 하셨고, 또한 선악과를 제외한 모든 나무의 열매들에 대하여 임의로 먹도록 하셨습니다. 말 그대로 만물의 영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만물의 영장도 피조물이라는 것을 기억하도록 하는 것이 뭐냐? 선악과 금지 명령입니다.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받았지만, 그런 인간 위에 누가 있느냐?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선악과 금지 명령인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처음부터 이 시험에서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마귀의 유혹 앞에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욕망이 그 속에서부터 불일 듯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시편 2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듯이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렇게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러한 모습이 인간의 죄악 된 본성으로 있다면 인간 위에 다른 어떤 대상을 두지 말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는 모습으로 전락하더란 겁니다. 로마서 1 21절 이하 23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하나님을 우리 위에 두기 싫어하면서 도리어 다스려야 할 그 대상이 우리 위에 위치한, 그런 이상한 모습이 되고 만 것입니다. 여기 표현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창조의 모든 질서가 파괴된 모습!

지금 마귀의 시험이 바로 이 방향인 겁니다. 단지 마귀 자신에게만 엎드려 경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만 경배하지 않는다면 어떤 것이라도 좋다. 그러면 내가 이 세상 어떤 것이라도 줄 수 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참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경배하는지 모릅니다. 굳이 어떤 대상에게 엎드려 절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더란 것입니다. 그래서 점을 칩니다. 뭔가 좋지 않은 것 같으면 굿을 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미신이라는 걸 알고 거부하는 사람들은 굳이 이런 것은 아니더라도 또 다른 것을 의지하기가 일쑤입니다. 특히 오늘날 돈을 섬기는 것이 보편적인 모습으로 있습니다. 더 많은 돈, 그래서 로또와 같은 것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무엇만 아니면 되느냐? 하나님만 아니면 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은 어떠한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서 하나님을 믿습니다. 아니 하나님을 이용한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좋은 대학 가게 해 달라, 좋은 직장 가게 해 달라, 복을 달라, 물질을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 때문에 그런 것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다 무엇과 맞물려 있는가? 기도했기 때문에, 전도했기 때문에, 또한 열심히 봉사했기 때문에 이런 저런 것을 달라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저런 것들을 다 뭐냐? 이 세상의 것들입니다. 좀 더 높아지려고 하고, 좀 더 나아지려고 하는 데 모든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내용은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인간 창조의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창조된 인간으로서 타락하였지만,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누구만을 섬기도록 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느냐? 하나님만을 경배하며, 그분만을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달리 말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살도록 부름 받지 않았습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그것을 이루기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란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 사는 자인가?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하며, 그만을 섬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존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살고 계십니까?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Boys, be ambitious! 이런 말 때문에 사람들이 야망을 가지는 것은 아니지만, 각자 형태는 다를지라도 다양한 야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야망이 다 누구와 관계가 되어 있느냐 하면 자기 자신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존재 목적이 마치 자기 자신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의 결과라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죄는 다 자기에게로 향하는 것입니다. 본래는 하나님께로 향해야 할 시각이지만, 죄의 결과 하나님이 아닌 자기에게로 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속의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음 안에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아는 것이요, 하나님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신 것을 아는 것입니다. 구속으로 말미암아 창조주를 아는 것이요, 그런 창조주께서 많은 사람들 가운데 우리를 특별하게 대우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의 삶의 목적은 어디 있는가? 바로 하나님만을 경배하며, 그분만을 섬기는 데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섬기는 데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버릴 각오를 하셔야 합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내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3:7).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물질도 버릴 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내 지위도 버릴 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때로는 인간과의 어떤 관계도 끊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존심을 내세우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자존심도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내 미리도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내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내게 유익한 어떤 것도 버리지 않는 자, 오히려 내 유익을 다 채우는 그런 모습으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세상에 마음을 쏟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에 있는 어떤 것들을 분명 주시지만, 지난 주 말씀드렸던 것처럼 헛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2:25-26 참조). 거기에 마음을 쏟는다는 것은 뭐냐? 헛된 것에 마음을 쏟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한번도 이런 헛된 것들을 주실 때 거기에 마음을 쏟으라고 주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있든지 없든지 하나님은 항상 하나님만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만 사랑하라고 명하시지, 이것을 벗어나서 뭔가를 준적은 한번도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나아가 하나님 편에서는 이런 것들이 우리를 향한 시험의 내용일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희가 하나님만을 섬기느냐? 아니면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을 섬기느냐?

물론 우리는 연약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매우 어리석은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으면서도 넘어지는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자가 해 주시고, 나의 유익을 위해 사는 자가 되지 않게 해 주옵소서.” 그리고 그런 은총을 항상 구하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돌아볼 뿐 아니라, 항상 그를 인정하는 자로 사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 11절에 보면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고 말씀하시는데, 예수님의 생애로 보자면 마귀의 시험이 이 세 가지로 끝난 것이 아니라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실 때까지 그 시험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서는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4:13)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의 시험, 두 번의 시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완전 성화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시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 가지 시험에서 이기시고 난 뒤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을 들었다는 것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인성을 입으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리는 것과 같습니다. 칼빈은 여기에 대해 이렇게 주석합니다.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든 사건은 그리스도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지켜보셨으며 하나님의 강력한 방어로 그리스도께서 사탄과 맞싸울 수 있었다는 점을 알고 위로를 받게 하기 위해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보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서도 계속해서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이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시험을 이기신 것은 우리의 연약함을 돕기 위함이라는 말씀도 믿어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앞에 여러 가지 시험을 있을 것이지만, 이미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돕고 계시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그 일을 위해 일하신다는 그 사실을 믿어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런 사실에 대하여 믿음으로 사시되, 우리의 모든 목적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인 줄 알고 그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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