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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71217설교 / 마태복음20장1-16절 / 내가선하므로네가악하게보느냐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7.12.17|조회수840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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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01-16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마태복음 19장에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나아와 질문한 것은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습니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미 그의 물음 속에서 그는 그 스스로 선한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떤 목적을 위해서일차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요약된 두 번째 돌판 부분을 언급을 하셨는데, 부자 청년의 경우 이 모든 것들 다 지켰다고 말했지만 실상 그러지 못한 것을 재물에 대한 탐심으로서 드러내셨습니다. 21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네가 온전하고자 한다면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말씀하셨는데, 결국 부자 청년의 경우 재물이 많아서 근심하며 떠나갈 수밖에 없는 그런 모습으로 있었던 겁니다. 그 스스로는 율법을 다 지켰다고 말했지만 그것이 곧 온전함으로 있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드러내셨던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일로 교훈하셨던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 앞에 제자들은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 질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는 말씀이었습니다(19:26).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선과 영생을 연결시켜 묻는 부자 청년에서 율법을 지키라고 말씀하신 것은 일차적으로 율법의 기능이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킬 수 있어서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지켜보라고 말씀하셨던 겁니다. 율법을 따라 선한 일을 온전히만 실행할 수 있다면 영생을 소유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지만, 인간은 결코 선한 일을 온전히 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할 수 없는 그 일을 누가 하시느냐? 하나님이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부자 청년과는 달리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고 하면서 그렇게 주님을 따른 자들에게는 무엇이 주어질 것인가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제자들의 끊임없는 비교 의식과 어느 정도의 공로주의적인 생각들을 엿볼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에게 책망보다는 위로와 소망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즉 자신이 받게 될 영광과 동등한 영광을 받게 될 것이고, 당연이 영생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부터 그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마태복음 1930절에서 이런 주의도 주셨습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즉 영광에 대한 약속 때문에 그들에게 주어진 일에 대하여 태만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의미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던 겁니다. 부자 청년의 경우 주님을 떠나갔지만 주님을 따른다고 해서 안심해도 될 문제는 아니란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930절 말씀을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을 통해서도 말씀하시는데 순서만 바뀌었을 뿐 반복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6절을 보시면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이런 측면에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마태복음 1930절 말씀을 좀 더 확증하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선 1절과 2절을 보시면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른 아침 시간이 정확하게 언제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대략 6시에서 8시 사이 정도로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른 아침부터 하루를 일할 품삯으로 몇 데나리온을 약속하고 있느냐 하면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를 통해 주목해야 할 것은 이른 아침에만 품꾼을 얻어서 포도원으로 들여보낸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일꾼을 들여보내면서 나중에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을 주었다는 데 있습니다. 3절 이하 10절이 그 내용입니다. “또 제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제육시와 제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제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일반적으로 유대 시간과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시간이 6시간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따라서 3절에서 제 삼시는 우리 시간으로 오전 9시 정도가 됩니다. 그러니까 이른 아침에 일꾼을 들여보내고, 이후 9시에도 들여보내고, 12시에도 일꾼을 들여보낸 것입니다. 오후 3시에도 들여보내고, 오후 5시가 되어서도 일하지 않고 있는 일꾼들을 들여보내어 일하게 하였는데, 모든 일이 끝나고 난 뒤 삯을 주는데 있어서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11절과 12절을 보시면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일반적인 상식으로 생각해 볼 때 1시간 일한 사람과 10시간, 혹은 11시간, 12시간을 일한 사람의 대가가 같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10시간을 일한 대가로 한 데나리온이라면 1시간 일한 사람한테는 그것의 10분의 1을 주는 것이 정당한 계산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1시간 일한 사람한테 한 데나리온 줬다면 10시간 일한 사람한테는 열 데나리온을 주는 것이 정당한 계산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논리는 그런 식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은 이것입니다. 13절을 보시면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시간만 따져서 본다면 인간적인 측면에서 주인에 대해 원망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본래 약속은 하루를 일하는데 있어서 한 데나리온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일한 사람의 입장이나 혹은 산술적인 어떤 입장이 아닌 계약의 조건으로 볼 때, 그리고 주인의 입장에서는 전혀 하자가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주인에게 불평한다는 것은 결코 정당한 태도가 아니라고 알리고 있습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4절과 15절을 보시면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사실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가 따지는 문제가 대부분 주인을 원망하는 먼저 온 자의 내용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를 마치 이 땅에서 누리는 축복의 차이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물론 주께서 주고자 하시는 진정한 복의 내용이라는 측면에서는 신자의 경우 복을 받았고, 불신자의 경우는 복을 받지 못했다고 말해야 합니다. 신자들의 경우 에베소서에서 표현하는 것처럼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참된 복으로 알고 있고, 바로 그 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일부 신자들은 세상의 물질적인 복도 거기에 반드시 포함되는 줄 알고, 당연히 불신자보다는 신자가 더 복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자와 불신자만이 아니라 신자들끼리도 비교를 합니다. 어떤 비교를 하느냐? 적어내 가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봉사도 많이 하고, 말씀생활, 기도생활에 있어 게으르지 않다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더 복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로 생각합니다. 교회마다 다를 수 있지만 일부 교회는 성공 지향적인 교회들도 있습니다. 부흥이라는 슬로건 아래 성도 숫자 늘리기에 집중하기도 하는 그런 모습을 띄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을 다 어떤 논리를 가지고 있느냐? 내 열심, 내 노력이 들어가면 반드시 그것에 대한 보상이 있어야 하는 줄 아는 논리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시 오늘 본문 1절을 보시면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20:1) 천국은 어떤 원리가 작용하는 곳인가? 바로 여기 비유에 나오는 집주인의 정신과 같은 원리가 작용하는 곳이라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앞으로 우리가 가게 될 그곳은 어떤 곳이며, 또한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는다고 할 때 어떤 원리로 살아가야 하는가? 바로 여기 비유에서 소개되는 집주인의 정신, 집주인의 마음과 같은 원리로 살아가야 한다고 가르치고자 하십니다.

그럼 집주인이 가지고 있는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13절과 14절을 다시 보시면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여기서 우리가 첫 번째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비유를 통해 핵심적으로 드러내고자 하신 것은 아니지만 이 사실은 전 성경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다. 때문에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거짓이 없으시며, 약속하셨다면 그 약속을 먼저 깨지도 않으시고, 혹 우리 쪽에서 먼저 깨는 일이 있더라도 결코 깨지 않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더 중요한 것14절입니다.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를 확인하게 됩니다. 덜 일했지만, 부족하게 일하고 충분히 일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삯을 주고자 하는 마음, 이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이요, 은혜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해서 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덜 일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고, 처음부터 와서 일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시지 않았는가? 처음 온 사람은 단지 계약에 따른 이행만 있었는가? 그들에게는 전혀 은혜가 없었는가?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어 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다(20:1)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루를 꼬박 일한 자도 집주인이 그 일을 허락하지 않았다면, 아니 집주인이 먼저 찾아 나서지 않았다면 결코 그 일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늦게 온 자들과 다를 바 없이 놀고먹는 인생 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라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말이 놀고먹는 것이지 하나님 앞에선 인생을 허비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꼭 이런 것이 있습니다. 분명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좀 오랫동안 하다보면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일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앞섬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를 생각하지 못하게 되더란 것입니다. 특별히 열심을 내고, 충성을 다하게 되면 바울의 말처럼 그것조차 하나님의 은혜이며, 또한 그렇게 고백해야 할 우리가 열심에 대한 어떤 보상을 은근히 바라게 되는 마음이 있더란 겁니다. 모든 것이 다 은혜요, 은혜이기 때문에 감사가 있어야 하지만 감사보다 뭔가 보상해주지 않는다는 생각에 원망과 불평이 앞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루를 꼬박 일한 자들, 분명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수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수고에 앞서 주인의 은혜가 없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실제 역사를 통해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유대인은 분명 하나님의 은혜로 먼저 믿게 된 자들입니다. 그리고 로마서에서는 유대인의 나음에 대해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으로 설명합니다(3:1-2). 그럼 그들이 해야 할 일은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모습입니다. 율법의 요약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그러나 그들의 모든 역사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했다는 지적이요,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연히 이웃에 대한 사랑도 턱없이 부족한 것으로 지적받았습니다. 결국 저들이 먼저 부름 받았지만 드러낸 결과는 저들 역시 이방인들과 다를 바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이었던 겁니다. 은혜를 은혜 되게 하지 못하며, 오히려 죄만 더 짓는 모습이더란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 아래 하루를 일할 수 있도록 부르셨는데, 그 하루도 충성하지 못한 결과를 낳았던 겁니다.

물론 오늘 비유에서 하루를 일한 사람에 대해 어떤 마음으로 일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가 부름 받은 것 자체가 은혜인데, 그 은혜를 잊고 보상에 대한 계산, 그리고 이후에 온 자들과 시간상으로 비교하여 계산에만 몰두하는 모습으로 오늘 본문은 소개를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와서 일했다는 것이요, 저들보다 더 많이 일했다는 것, 그것만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는 그에 대한 보상을 안 해주니까 주인이 불의한 것처럼 말하고 있는 모습인 겁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으로 있는 것은 아닌가를 돌아보셔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5절을 보시면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할 때 반드시 기억해야 되는 사실하나님은 어느 누구에게도 빚을 지신 일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누구에게도 빚을 갚아야 할 분이 아니시며, 그런 의무도 지니고 계시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마음대로 하실 권리가 있으며, 그 권리 앞에 어느 누구도 왈가불가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합니까?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믿지 않는 자보다는 믿는 자가 나아야 하며, 믿는 자들 가운데서도 내가 더 열심을 내고, 내가 더 노력을 하면 좀 더 나아야 공의로운 것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성경에도 없는 희한한 논리를 갖다 붙이고 있습니다. “적어도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나아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런 논리 아래 우리의 불평, 원망도 정당화시키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일 때가 많습니다. 다 뭐냐? 내가 노력한 만큼, 내가 신앙생활을 오래하여 충성했다면 충성한 만큼 당연히 그에 대한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본문 식으로 말하면 하루 종일 일한 자가 한 데나리온 받았다면 적게 일한 자는 적게 받아야 된다는 논리요, 혹 적게 받은 자가 한 데나리온 받았다면 그것보다는 훨씬 많이 줘야 한다는 논리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빚도 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뜻하신다면 일찍 와서 일하나 늦게 와서 일하나 동일한 은혜를 주시더라도 우리는 할 말이 없는 자들인 겁니다. 이것을 우리가 원망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불의하다 판단하는 것이고, 그런 신앙은 결코 성경이 말하는 신앙은 아니라는 것을 주의하셔야 합니다. 오히려 성경은 뭐라고 말하느냐? 오늘 본문 15절에서 “...내가 선하므로...” 이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대하시든 하나님의 속성상 그분의 선하심만큼은 폐할 수 없습니다. 혹 우리 인생에 있어서 고난을 주실 수 있습니다. 혹 우리에게 환난을 주시고, 가난을 주실 수도 있습니다. 혹 우리가 오해를 받아 사람들에게 비방의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혹 우리가 병들어 고통 받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그런 것 외에도 우리에게 주신 은사 자체가 적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번도 그 모든 일 가운데 그분의 선함을 폐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이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로마서는 무엇까지 말씀하는지 아십니까?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한다 한들 하나님께 불의가 있을 수 있느뇨? 그럴 수 없다고 말합니다(9:13-14). 우리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그 물음 이면에서 마치 하나님은 불의하시다는 판단이 앞섭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셔도, 하나님께서 유기하셔도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십니다.

 

여러분, 천국은 하나님의 은혜가 주장하는 곳입니다. 아니 이미 이 땅에서 천국이 시작되었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다고 할 때도 바로 이것이 원리가 되어 살아야 할 삶입니다. 일찍 오나 늦게 오나 동일한 은혜를 베풀고자 하는 마음이 바로 우리 하나님의 마음이듯, 우리도 그러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시간으로 새벽부터 와서 일하나, 아니면 9시에 와서 일하나, 혹은 12, 혹은 오후 3, 심지어 오후 5시에 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차별을 두시기로 하셨다면 몰라도 하나님께서 동일한 은혜를 베풀고자 하시면 그것이 불의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가장 오래 일한 자도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임한 결과이지, 은혜 없이 일할 수 있는 자리에 올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담의 타락 이후 죄 아래 놓여 있는 자들임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도 구원하시지 않기로 뜻하시면 어느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자들이 우리입니다. 그리고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구원하셔야 할 의무는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죄의 문제는 우리의 잘못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작정을 말한다고 해서 죄의 원인자가 하나님이신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강제성을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는 인간 스스로가 지었습니다. 때문에 죄는 누구로부터 출발했는가? 인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뜻하셨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먼저 부름 받았든, 아니면 나중에 부름 받았든 다 하나님의 은혜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은혜가 감사하여 더욱 충성할 수밖에 없는 자리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과 비교하되,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시는 어떤 분량 가지고 비교를 한다는 것은 결국 그 은혜를 폐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불의하게 만들며, 우리에겐 공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외에 달리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속는 자리입니다. 일찌감치 이런 생각을 버리셔야 합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것, 속담에도 있고 하니 당연한 것 같지만 그것은 다 우리의 죄성을 드러내는 마음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기뻐하지 못하고 있는 존재로 서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너무도 세상적이기에 세상을 좋아하고, 세상이 즐기는 방식으로 우리의 사고와 마음을 열고 있는 것이지, 결코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을 즐거워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분명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말하며, 그렇게 따른다는 것은 우리의 원리가 세상의 원리, 세상의 기준을 가지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대접받기보다는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을 것이며, 영광에 앞서 십자가를 지며 살아갈 것으로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즉 내 뜻보다 주의 뜻이 앞서는 것이며, 주님의 뜻,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우리의 목숨까지도 부인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16:24) 말씀하셨고, 마태복음 1929절에서는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말씀하셨던 겁니다. 비록 가까운 사람일지라도, 그것이 가족이라도 주의 뜻과 상관없이 우리에게 요청한다면 손해 보고 버릴 수 있는 각오가 되어 있는 자, 그것이 영생을 소유한 자의 원리인 것입니다. 결코 이 땅에 가치를 두며, 이 땅의 계산법에 따라 사는 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누가복음에 가시면 동일한 원망을 하는 자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5 25절부터 보시면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15:25-30) 여기 보면 맏아들의 원망이 바로 하루 종일 일한 자의 원망입니다. 분명 형제이면서도 둘째가 허랑방탕하다가 돌아왔는데도 반기지 않습니다. 도리어 아버지께 원망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가 지금까지 아버지 곁에서 일했지만 둘째가 돌아왔을 때처럼 대접을 해 주지 않더라는 겁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예수 잘 믿고 있는데도 이 땅의 삶이 천국의 삶이 아니라 맨 날 하는 공부, 직장생활, 집안 살림과 같은 일상의 삶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답변은 무엇입니까? 31절과 32을 보시면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다시 말해 첫째 아들을 위해서는 둘째 아들처럼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지는 않았으나 이미 그 모든 것이 본인이 누릴 수 있는 것으로 있었던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버지의 것을 물려받을 상속자인 셈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허랑방탕한 생활, 세상적으로 말해 재미를 볼 수는 없습니다. 집에서 아버지의 일을 거들어야 했고, 그 일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신자의 참된 복인 것을 이 첫째는 모르고 있었던 겁니다.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신자됨의 목적, 성도됨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는 것, 이것이 우리가 생각해야 할 참된 복인 것이지, 세상적으로 원 없이 살아보는 것, 그것이 복이 아닙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형들 때문에 잡혀가 노예로 살고, 그 가운데서 잘되어 보디발의 집안 살림을 살지만 보디발의 아내 때문에 다시 옥살이를 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생을 형통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이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큰 아들의 불평이 보상이 없다는 것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아버지와 함께 있는데도 그 자체가 복된 줄 몰랐던 겁니다. 특히 둘째가 돌아오면서 더 확연히 드러나는 것처럼 겉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그 속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닌지 돌아보셔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을 보면 부러워 보입니다. 아버지 곁에 있으면 세상을 향하여서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뭘 하려고 하면 말씀에 걸리고, 뭘 하려고 하면 성령을 통하여 양심을 때리고, 어딜 가려고 하면 막으시기 때문에 힘들고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맏아들이 아버지 곁에서 일만 하듯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은 훈련의 연속이더란 겁니다. 그러다보니 허랑방탕할 수 있는 세상이 좋아 보이고, 세상의 기쁨과 재미가 우리의 구미를 당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훈련을 통해 우리는 장차 상속할 나라가 있다는 걸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 나라는 결코 아버지를 떠나 상속할 수 없는 나라이기에 아버지 곁에 있는 자로서 세상을 부러워하고, 세상의 원리를 따르고자 하는 것은 결코 먼저 부름 받은 자로서 가져야 할 생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고난의 연속일 수 있고 어려움일 수 있고 또 하나님을 섬기면서 나아갈 때 그 길이 좁은 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상속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것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이 부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주의 뜻이 있어 일찍 예수를 믿을 수도 있고, 늦게 예수를 믿을 수 있습니다. 일찍 믿었다. 늦게 믿었다는 것은 사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이 각자에게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은 자리에서 마땅히 가야할 신앙의 길이 어디인지, 어떤 자리가 정당한 자리인지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단지 의롭게 되었다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좀 더 거룩함으로 나아가야 할 목표점이 있습니다. 그 거룩함을 위하여 하나님은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때론 신자들끼리도 전도서에서 말하는 분복이 다른 사람보다 적을 수 있습니다. 때론 다른 사람보다 일찍 예수 믿게 되어 그 성화의 과정을 더욱 더 많이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극적이게 믿지 않음으로 인해 극적이게 믿게 된 경우보다 뭔가 밋밋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고 있는 자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혹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하다 여기신다면 그것은 다 여러분의 착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한번도 그의 선하심을 우리로부터 거둔 적이 없으십니다. 우리의 계산법에 맞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악하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 잘못된 지식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즉 너희가 먼저 부름을 받았다면 너희의 모든 삶을 통해 원망하는 자리가 아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된 자로 나중 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겸손히 진전하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타인과 비교해 내가 더 우선적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각자 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진력하는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1 18절부터 보시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21:18-22)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원하는 곳으로 가지만 결국 주의 뜻만이 베드로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근데 재밌는 것은 베드로가 옆에 있는 다른 제자에 대해서도 궁금해 합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가?”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무슨 상관이냐? 하나님께서 정하신 네 길이 있고, 그에게 정하신 길이 있다. 신경 쓰지 마라.”

어쩌면 먼저 부름 받았다, 나중에 부름 받았다는 것 외에도 우리들 신자끼리 이와 같은 비교의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와도 비교할 필요가 없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걷는 길은 다 주의 뜻으로 말미암아 펼쳐지는 인생이며, 그 인생은 이 땅에서만큼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처럼 아침 일찍부터 부름 받을 수 있고, 오후 5시나 되어 부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일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되, 은혜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부르시고 난 뒤 역사하시는 모든 일하심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심만큼은 폐할 수 없습니다. 이 사실 앞에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그 길을 꾸준히, 쉼 없이, 넘어져도 다시금 일어나 푯대를 향하여 진력하시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먼저 된 자라 할지라도 교만하지 마시고, 나중 된 자라 할지라도 나태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그 은혜를 드러내는 삶, 그분의 선하심을 우리의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드러내며 사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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