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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71224설교 / 마태복음20장17-28절 / 많은사람의대속물로주려함이니라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7.12.25|조회수1,159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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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017-28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이미 마태복음 1장에서 밝혀주고 있는 것처럼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1:21). 회개케 하여 천국 백성이 되도록 하기 위해 오셨고, 나아가 천국 백성으로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며 살도록 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오늘 본문 28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자신을 대속물로 주려 하신다고 알리십니다. 죄를 속하기 위한 값을 지불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이요, 그것은 곧 죄인이 죽어야 할 자리에 자신이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그 값을 지불하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신앙고백 이후 본격적으로 자신의 고난과 죽음에 대하여 알리셨는데, 자신의 고난과 죽음만 알리신 것이 아니라 부활까지 알려주고 계시다는 것이 위로의 내용으로 있습니다. 일단 오늘 본문 17절 이하 19절을 보시면 마태복음 16장과 17장에 이어 세 번째로 말씀하시는 내용으로서 이렇게 알리십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여러 차례 반복해서 그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알리시는 것은 그만큼 그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즉 그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 없으면 죄에서 구원하는 일도 없는 것이고, 그렇다면 회개하라고 요청하는 것도 실상은 무익한 일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혹 회개하는 마음과 회개에 합당한 열매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모습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의 죽음과 부활이 없으면 그것은 마치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습니까?”라고 물었던 부자 청년의 자세와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죽음과 부활이 없는 열매라면 그것은 결국 자신의 공로를 말하는 것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와 그 열매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죄에서 구원하고 의를 향하여 살게 하신다는 것은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불어 반복적으로 가르치고 계시는 만큼 그의 죽음과 부활은 반드시 일어날 일임을 말씀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특히 누가복음에 보면 오늘 본문에서 기록하고 있지 않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누가복음 183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언제부터 예언 되었느냐? 이미 구약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되었고, 기록의 형태로 남겨져 있었던 겁니다. 이런 면에서 지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모든 여정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한 것으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고자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까지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문제는 여러 번 반복해서 말씀하고 계시는 이 사건의 중요성을 제자들이 알았는가? 이미 구약에서부터 예언되어 온 것에 대하여 이해하고 있었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1834절에 보면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계속되는 내용으로서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는 말씀이 있지만, 죄에 대해서도 핑계할 수 없듯이 무지에 대해서도 핑계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반복적으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시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그들의 무지함도 알리시는 측면이 있습니다. 무지하지만 계속해서 말씀하심으로서 그 일이 반드시 일어날 일이라는 것, 그러면서도 그 사건은 중요하다는 것을 알리고자 하셨던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조금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져 그들의 결의에 따라 죽음에 이르게 된다고 할 때 그런 결정은 사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인 것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인에게 있어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유대인 최고 법정 기관인 산헤드린의 주요 구성원으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그들에게 넘겨져서 어떤 결정에 이르게 된다는 것은 그들의 법정 기관을 통해 재판을 받아 결정하게 된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재판해야 할 거룩한 공회가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정죄하여 넘겨주게 되는 곳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이방인에게 넘겨주어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인데, 그만큼 그리스도를 기다린다고 하는 자들조차 철저한 어두움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지만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고 자기 백성이라고 하는 자들조차 그를 영접하지 아니하는 모습으로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란 겁니다(1:9-11). 로마서 3장에서는 유대인의 나음이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은 맡은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 말씀을 통하여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분별해야 하지만 전혀 그러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그들은 어떤 상태에 있느냐? 로마서 2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2:17-2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신 목적, 즉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19:6)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모습으로 가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라고 하는 자들조차 영접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고난과 죽음으로 내몰지라도 바로 그 일을 위하여 오셨고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는 것을 알리고 계시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고난과 죽음만이 아니라 부활까지도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부활과 상관없는 고난, 부활할 수 없는 죽음이 아니라 부활을 전제한 고난과 죽음인 것입니다. 다만 부활이라는 영광에 이르기 위하여 고난과 죽음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지금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신 것이고, 올라가시면서 바로 그 일에 대하여 이미 말씀하신 것을 다시금 강조하여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제자들이 알았는가?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 20절을 이하를 보시면 그러한 사실을 더욱 드러내주는 한 사건을 만나게 되는데, 마태복음 18장에서 누가 큰가로 다투었던 사건과 별반 다르지 않는 내용을 확인하게 됩니다. 20절과 21절을 보시면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여기서 그 때에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알리신 바로 그 때를 의미합니다. 그 때 세배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자신의 두 아들을 하나는 주님의 우편에, 하나는 주님의 좌편에 앉게 해 달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는 마가복음에서는 세배대의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요구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10:35-37). 칼빈의 주석을 보면 야고보와 요한이 직접적으로 요구하기가 부끄러워서 그들의 어머니를 통하여 요구한 것으로 말하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두 아들이나 어머니나 동일한 마음으로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 주십사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주의 나라라고 할 때 그것이 하늘나라에 대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부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자리에서까지 그들은 여전히 지상나라를 꿈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의 요구, 그리고 두 형제의 요구는 무엇이냐? 주님께서 이 땅에서 주님의 나라를 건설하실 때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해 달라는 요구임이 틀림없습니다. 마태복음 18장에서 누가 큰가로 다툴 때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이 땅에서의 영광을 차지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께서 바로 직전에 무엇을 말씀하셨는가 하면 자신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부활이라는 영광을 생각한다면 영광스러운 자리를 구하는 것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만은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상적인 것이 아니라 천상적인 것으로서 그 영광을 구하는 것이라면 오히려 우리는 그것을 구하는 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풍성하게 채워주시도록 우리는 구하고 또 구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그 영광을 위하는 삶이 되도록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두 형제는 지상적인 것을 구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볼 때 그들은 부활이라는 영광도 무슨 뜻이지 모르며, 나아가 그의 고난과 죽음조차 무슨 뜻인지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아니 그의 죽음과 부활이 가지는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더라도 예수님이 고난 받고 죽으시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고 한다면 이 땅에서의 영광을 구하고 높은 데 마음을 두는 그런 말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전혀 듣지 못한 자처럼 자기들의 영광만을 생각하면서 주님께 요구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될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계속해서 가르치고 계신 것은 지상의 영광을 구해도 된다가 아니라, 거기에는 마음을 두지 말고 주께서 가고자 하시는 그 길을 따를 것을 요청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실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베드로의 경우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하셨을 때 주님이 그렇게 되도록 하지 않겠다고 강하게 항변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말씀하시면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6:24). 마태복음 18장에서는 천국에서 누가 큰가로 다툴 때 도리어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18:3). 큰 자가 되어 섬김을 받기보다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어린 아이라 할지라도 영접하는 자가 되어야지, 그들을 무시하고 괄시하면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두 형제의 요구 자체가 지금 주님의 뜻과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모든 가르침이 헛된 것인 양 자기들의 영광만을 구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될 뿐입니다.

 

이런 저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22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이것은 그들 스스로가 무엇을 구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전혀 모른 채 구하고 있을 뿐이라는 의미입니다. 너희가 너희 뜻대로 구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거기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처음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 그렇게 내버려 둘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 주님에 대한 진심어린 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무엇을 놓치고 있었느냐? 하나님의 뜻을 놓치고 있었습니다. 자기 생각이 앞서고, 자기 감정이 앞설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 열심만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없고 자기들의 탐욕만 있을 뿐입니다. 지상의 영광이 아니라 하늘 영광을 구해야 하고, 그 영광을 위하여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쫓아야 하지만 그들은 그런 주의 뜻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마치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16:23).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여기서 이란 앞서 말씀하신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26장에도 보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서 기도하실 때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고 구하는 내용이 있는데(26:39), 이 때 잔이란 곧 이어 있을 그의 고난과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잔을 마실 수 있느냐? 즉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동참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 잔의 의미를 알고 있었는가? 구하는 것도 알지 못하는데 잔의 의미는 더더욱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그들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잔의 의미를 알았다면, 다시 말해 잔의 의미가 그의 고난과 죽음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들은 결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히실 때 도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도망치고 말았습니다(26:56 참조). 뿐만 아니라 고난과 죽음을 말씀하시는 자리에서 자신의 영광을, 그것도 지상에서의 영광을 구할 수 있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지상에서의 영광을 구하는 있다고 할 때 그들은 잔의 의미, 즉 주님께서 가고자 하시는 그 길이 무엇인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고 계시지만 듣기는 들어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하여 그들의 대답은 마치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것처럼 마실 수 있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데 있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무지와 교만함이 있는 겁니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솔함, 그리고 분별없음이 여기서 나타나고 있는 겁니다. 혹은 주님의 잔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영광의 자리를 위해서라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 또한 엿볼 수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과대평가가 여기에 있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23절을 보시면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언 듯 저들이 할 수 있다고 말하고 난 뒤 과연 내 잔을 마실 수 있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 쉽지만, 방금도 말한 바가 같이 그들은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다 도망갔던 자들입니다. 마태복음 2656절에 보면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도망했다는 것은 결국 그의 고난에 동참하지 않는 모습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겁니다. 베드로의 경우는 어떻게까지 하느냐?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부인하면서 저주까지 했습니다. 즉 아무도 주께서 마시는 잔을 마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도망하는 역사가 있다 하더라도 주께서 약속 하신 바 성령이 그들에게 임할 때(1:8), 그리고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오셔서 그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때(16:13), 그들은 실제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로 있게 되기 때문에 지금 주님께서는 과연 너희가 내 잔을 마실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이 부분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 “마실 수 있습니다.”,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순서로 되어 있기 때문에 실제로 그들이 답변한 대로 그들 스스로가 주의 잔을 마실 수 있다는 뜻으로 말씀하고 계신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는 결코 할 수 없습니다. 부자 청년을 통해 하신 교훈처럼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그들 스스로가 주의 잔을 마실 수 있어서가 아니라, 주께서 친히 진리의 영이신 성령으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때 그때서야 비로소 주의 잔을 마실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스스로가 아니라 주셔야지만 마실 수 있다는 겁니다. 주어지지 않았는데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마실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두 형제의 요구처럼 지상에서의 영광을 구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란 것도 교훈 받아야 할 중요한 내용입니다. 처음으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실 때도 마찬가지이지만 주님께서는 지상에서의 영광을 말씀하시지 않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시는 겁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능력으로 주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온전히 따라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만큼 무능력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바를 친히 이루십니다. 지금 당장은 주님을 떠나가는 일도 있고, 지금 당장은 주를 부인하기도 하는 등 주님의 뜻을 따라 온전함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지만, 예수님께서 자신을 대속물로 주신 대상으로 있는 이상 주님 편에서는 결코 포기하는 일은 없으십니다. 그것을 사도들의 예를 통해서 알려주고자 하시는 겁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런 주님 앞에 빨리 항복하는 인생이 되셔야 합니다. 세상 영광을 위해 살 생각을 일찌감치 버리셔야 하고, 높은 데 마음을 두는 것을 멈춰야 합니다. 물론 세상에서의 삶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일상의 삶을 살아가면서 어디를 향한 목표를 두고 열심을 다하는 것, 결코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재물로 대표되는 세상의 것에 마음을 두면 둘수록 하나님에 대해서는 자연스럽게 그 마음을 닫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세상 영광을 위하면 위할수록, 높은 데 마음을 두면 둘수록 거기에 마음을 빼앗겨 하나님과 멀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거기에 마음을 두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9으로 가시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먼저 57절과 58을 보시면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마태복음 8장을 통해서도 언급되고 있지만(8:19-20) 왜 어떤 사람이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는가? 예수님의 답변에 비춰 생각해 보면 주님을 따르면 근심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먹고 배부른 까닭에 주님을 쫓았던 무리처럼 주님을 따르기만 하면 만사가 형통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오늘 본문의 제자들처럼 어떤 영광스러운 자리까지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나를 따라온다는 것은 이 길로 가는 것이란 겁니다. 그래도 나를 따라오겠느냐?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이 세상의 영광을 다 누리는 길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길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말씀하신 그 길입니다. 고난의 길이요, 십자가의 길이란 겁니다. 주의 백성들에게 요청하시는 길이 바로 이 길이요, 혹이라도 이 길을 가고자 하지 않을 때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셔서 가게 하도록 하시는 길이 바로 이 길입니다. 왜냐하면 부활이란 죽음 없이는 없고, 영광이란 고난 없이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얼마나 많은 주의 백성들이 이 길을 외면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계속해서 59절과 60을 보시면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이 부분 역시 마태복음 8장에서 언급하고 있는데(8:21-22) 여기서는 주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무엇 때문에 주를 따르는 것이 어렵다고 말하느냐 하면 아버지 문제 때문에 주를 따르기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비단 아버지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도 주를 따르는 데 있어 이런 저런 문제들로 주님을 온전히 따르는 것이 어렵다고 말하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주님을 따르는 문제는 이런 저런 문제들 뒤로 미뤄둘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육신적으로 볼 때 아버지일지라도, 인간관계 속에서 가장 가까운 가족의 문제라도 그것이 주님을 따르는 데 있어 뒤로 물러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점에서 주일에 시험을 쳐야지만 무엇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길이 아닌 겁니다.

61절과 62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여기서도 가족의 문제가 나오고 있지만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언제나 하나님의 것이 우선순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때로는 가족도 뒤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바울을 통해서는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딤전5:8).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가족을 돌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이 누가복음의 말씀과 충돌되는 말씀은 아닙니다. 가족을 돌보아야 하지만 그런 가족이 주를 따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면 가족보다는 주님이 우선시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길을 걸어갈 때 자꾸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겁니다. 때로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을 가야만 합니다. 롯의 아내가 소금 기둥이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의 것에 미련을 두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꾸 뒤에 있는 것에 마음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세를 가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이 길을 걸어가고 계십니까? 하나님과 그분의 것이 가장 우선순위에 있어서 그것 아닌 모든 것은 배설물로 여기고 있느냐는 겁니다. 아니면 한쪽은 하나님께, 또 다른 한쪽은 세상에 걸쳐서 이도 저도 아닌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그러한 길로 인도하고야 말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사실로 있는데 억지로 가지 않겠다고 버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책망만 더 듣게 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찌감치 세상에 대한 모든 욕심을 포기하시란 겁니다. 세상의 영광을 구하고, 세상의 자랑을 구하고, 높은 데 마음을 두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 이라고 할 때 정말 주의해야 될 것 가운데 한 가지가 이것입니다. 잘 되면 하나님께 영광!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시면서, 십자가를 지시면서, 그리고 죽으시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렸습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조롱을 받고, 채찍을 맞으면서도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잘 되어야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느냐는 겁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 길을 걸어가면서도 주의 뜻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다는 그것 역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너희 착한 행실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주님께서는 결코 너희 높은 자리로, 너희 잘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너희 착한 행실입니다.

 

다시 23절을 보시면 너희가 내 잔을 마실 것이라는 말씀과 함께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언뜻 보면 이해가 잘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분명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잔을 마실 수 있다고 말씀하셨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주님 좌우편에 앉는 것은 그들의 몫으로 이해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알리시고자 하시는 것은 그것은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이라고 밝히십니다. 너희가 내 잔을 마신다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좌우편에 앉을 수 있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마시는 것도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주께서 그러한 길을 가게 하시고 또한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역사해 주셔서 가게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그들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그 길을 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한 것인 양 예수님이 좌우편에 앉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시각에서 보자면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자기 힘으로 주의 잔을 마실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아무도 주님 좌우편에 앉을 수 없는가? 본문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는 자들에 주실 것입니다. 지난 시간 우리가 살펴 본 것처럼 늦게 와서 일할지라도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 뜻대로 하신다고 할 때 우리는 어느 누구도 왈가불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마태복음 19 28에서 하신 말씀도 함께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어떤 특정한 자들만이 천국에서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열 두 사도 모두가 주께서 심판하실 때 함께 심판하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요한계시록에 가면 다음과 같은 말씀도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 26절과 27입니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심판권을 누구에게 주시는가? 이기는 자, 그리고 끝까지 주님의 일을 지키는 사람에게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본래는 지금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께서도 아버지께 받은 것인데, 바로 그 받은 것을 이기는 자, 끝까지 주님의 일을 지키는 자에게 주신다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3 21에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예수님께서 이기시고 아버지의 보좌에 앉으셨는데, 바로 그 자리를 누구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시느냐? 이기는 자에게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열 두 사도만이 아니라 교회에게도 동일한 권세를 주신다고 약속하고 있는데, 누구에게 이 약속을 하시는가? 이기는 자에게 약속하십니다. 문제는 그 스스로 이길 수 있느냐? 없습니다. 이기게 해 주셔야 이깁니다. 달리 말하면 이기게 해 주셔서 이기고, 그렇게 이긴 자들에게 주님과 함께 심판할 수 있는 권세까지 주신다는 겁니다. 누구에게? 열 두 사도와 더불어 교회에게 주신다는 겁니다. 그만큼 높여주신다는 것이요, 그만큼 영광스럽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 23절의 경우 어떤 특정한 대상에게만 주시는 것으로 볼 수 없고, 이기는 자, 그리스도의 잔을 마시는 자, 그러나 그들 스스로 이기고, 그들 스스로 주의 잔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이기게 해 주셔서 이기는 자, 그리스도의 잔을 마시게 해 주셔서 마시는 자들 모두가 동일한 영광을 받게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형제의 요청에 대하여 다른 제자들의 마음이 괜찮았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런 말씀을 듣고 있는데도 지금 제자들의 마음은 그렇게 좋지 못했던 겁니다. 24절을 보시면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분히 여겼다는 것은 그들 역시 두 형제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마태복음 18장에서 누가 큰가로 다투었던 것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은 높은 지위, 명예와 같은 지상적인 차원의 것을 동일하게 요구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재차 교훈하시기를 25절 이하 27절에서 다음과 같이 교훈하십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쉽게 말하자면 너희는 세상의 원리와 다른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어떠냐? 집권자들이 있어서 사람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권세를 부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그런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심으로 너희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하십니다.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낮은 자로서 섬기고 또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마태복음 18장에서 교훈하셨던 것처럼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요, 어린 아이일지라도 영접하여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모범으로 말씀하시는데, 28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섬기기 위해 오셨습니다. 본래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섬김을 받아야 될 분이십니다. 하나님으로서 경배의 대상이며,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으로서 가장 높임을 받아야 할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죄인을 위해, 그들을 섬기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모든 사역을 보시면 섬김 그 자체입니다. 여러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겠지만 요한복음 13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본래 발을 씻긴다는 것은 종이 주인에게 행하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는데, 왜 그렇게 하셨는가? 12절 이하에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13:12-15) 이처럼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제자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을 섬기셨습니다. “주인이고 선생이신데 섬겼다면 너희 역시 그렇게 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옳지 아니하냐!” 이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섬기기 위해 오셨다고 할 때 그 절정을 말씀하시는데, 바로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라고 밝히십니다. 서두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대속물이란 죄를 속하기 위한 값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죄는 죽음이라는 형벌을 받게 되는데, 우리가 죽어야 할 자리에 죄 없으신 분이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그 값을 치르고자 하시는 겁니다. 즉 그분의 섬김은 자신의 목숨까지 다 주시는 그런 섬김인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과는 달리 높은 데 마음을 두면서 섬김이 아니라 섬김 받기를 원한다면 과연 그런 사람이 주님을 따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교회가 가고 있는 방향은 이런 점에서 볼 때 주의 뜻과는 너무나도 먼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지만 그 영광을 위하여 언제나 교회가 잘 되어야 된다는 쪽으로만 있습니다. 더 많은 사람, 더 많은 헌금, 더 큰 건물. 건물도 없는 교회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습니까? 적은 사람이 모이면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지 않으십니까? 성경이 그렇게 말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그곳에 나도 너희와 함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더 많은 사람, 더 많은 헌금, 더 큰 건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그런 사고는 오늘 본문에서 두 형제가 주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는 요청과 전혀 다르지 않는 사고방식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면서 분히 여기는 다른 제자들과도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는 우리의 길만 가면 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명만 따라가면 됩니다. 옆에 있는 교회, 뒤에 있는 세상의 방식을 돌아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이라면 따라가면 됩니다. 그렇게 가는 길에서 고난이 있을 수 있고,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이 주께서 가신 길이라면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그 길을 걸어가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때로는 그러한 길을 가면서 주께서 외적인 복을 허락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의지하도록 주셨는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주어진 어떤 것도 주신 자보다 클 수 없습니다. 외적인 것을 주셨지만 여전히 주님을 바라보면서 걸어가도록 주신 것이지 그것을 의지하라고 주신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어진 것을 의지하는 지 모릅니다. 오히려 우리는 주어진 그것으로 더욱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많이 주셨다면 그것을 가지고 영원한 천국에 저축하는 방식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2:33 참조).

여러분,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누리며 가는 길이 아닙니다. 세상의 것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주께서 오신 목적이 모든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 즉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위하여 자신을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오셨다면, 그 값으로 사신 바 된 주의 백성들의 길은 모든 사람들이 가는 그 길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 좁은 길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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