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20장 29-34절
보게 되어 예수를 따르니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하여 세 번이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의 관심은 그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보다 자신들의 자리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나라가 이 지상에 세워질 때 누가 주님 좌, 우편에 앉을 것인가?” 여기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큰가로 다투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셨고, 또한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셨지만 제자들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 십자가를 지고서 주님을 따르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그들의 신앙고백이 거짓된 것이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가룟 유다를 제외하고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참된 신앙을 고백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하나님이 주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그것을 거짓된 고백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신앙고백은 했을지라도 그들의 신앙은 많은 부분 하나님 지식에 합당한 것으로 채워져 있지는 못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주께서 하나님 나라와 관련하여 많은 가르침을 베푸셨지만 그들은 그런 많은 가르침 속에서 주의 뜻을 따라 생각하기보다는 그들의 생각에 따라 예수님을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께서 가르치고자 하시는 의도를 따라 순순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자기 생각이라는 것이 걸러져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비단 제자들에게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있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유일한 교사이시며, 그렇기 때문에 완전한 가르침을 가르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반면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가르친다고 하는 소위 오늘날 목사들은 수많은 오류들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어느 누구도 완전한 가르침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이 땅에서는 불완전한 존재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완전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조차 제자들이 오해하였다면 오늘날 목사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어떻겠습니까? 혹 어떤 설교에 있어 바른 말씀을 전한다 할지라도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그 말씀을 걸러서 듣게 되는 일이 있을 수 있는 겁니다. 전하는 자는 이것을 전하는데 듣는 자는 저것을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는 할 수만 있다면 바른 말씀을 신실하게 전하고자 해야 하고, 그 말씀을 듣는 성도는 그 말씀이 과연 주의 뜻에 합당한가를 살피셔야 합니다. 목사가 전한다고 해서 모든 말씀을 무분별하게 다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분별하셔야 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주의 말씀을 받는 자가 되어야 하지만, 그것이 곧 분별없이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하시는 바가 과연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자세로서 주의 말씀 앞에 서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은 맹인 두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사건인데, 앞선 말씀들과 비교해 보자면 단순히 맹인 두 사람의 눈을 뜨게 하셨다는 것만 알리시는 말씀이 아니라 좀 더 깊은 의미를 가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설교 후반부에 가서 언급을 하겠는데, 우선 오늘 본문의 경우 다른 복음서와 비교해 볼 때 차이 나는 한 부분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 맹인 두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는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의 경우 맹인 한 사람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경우는 그의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언급하는데,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로 소개하고 있습니다(막10:46). 그리고 그렇게 소개할 때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는 맹인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그가 거지라는 것까지 소개하고 있습니다(막10:46, 눅18:35).
그러나 두 명이든 한 명이든 그것 자체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은 두 명인 반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한명을 말하기 때문에 복음서 자체에 어떤 오류가 있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동일한 사건에 대하여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하게 하셨을 때 어떤 관점에서 기록하느냐에 따라 약간 다른 듯 기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마태복음의 경우 맹인 두 명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분명 두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의 경우는 두 사람 모두를 주목하기보다는 그 가운데 한 사람을 더 주목하고서 기록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좀 더 알려진 그런 인물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그 사람의 이름까지 기록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복음서들이 서로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고 해서 사건 자체에 어떤 거짓이 있거나 사건에 대하여 가감(加減)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동일한 사건이지만 그 사건을 전하고자 할 때 모든 것에 대하여 세세하게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요약적으로 기록함으로써 이런 차이가 생기기도 하는 것입니다. 다만 이런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고 할 때 하나님의 말씀 자체는 결코 오류가 없다고 고백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오류가 없는 분이기시 때문입니다.
어쨌든 본문 자체로 들어와 29절에 보시면 “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이고(마20:17 참조), 마태복음 21장에 의하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간 것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마21:1) 지금 여리고라는 장소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거쳐 가야 했던 곳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거쳐 간다고 할 때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다고 되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주님을 따르는 목적이 그렇게 순수한 모습은 아니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지금 주님을 바로 곁에서 따르고 있는 제자들조차 올바른 모습으로 따르고 있지 못하고 있음을 계속해서 살펴 왔는데, 무리들이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물론 모두가 다 동일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진정으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할 수 있는 집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하실 때 바로 그 길을 따라 가겠노라고 생각하면서 가는 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른 어떤 일보다 주님의 일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면서 가장 가까운 가족조차 주님 때문에 뒤로 하고 따르고자 하는 자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주의 크신 은혜와 역사하심이 있기 때문에 따르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보편적으로는 그런 은총을 받은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한 것처럼(요1:5), 무엇보다 자기 백성이라고 칭하는 자들에게 오셨지만 그들조차 영접하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는 것처럼(요1:11), 오병이어 사건과 비교해 보자면 먹고 배부른 까닭에 주님을 찾았던 무리들처럼(요6:26) 당시 정황으로 볼 때 여기서도 다르지 않는 모습으로 주님을 따랐을 것이라고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모습 속에서 맹인 두 사람이 예수님을 향하여 소리치게 되는데, 30절에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이 부분과 관련해 조금 더 자세히 보자면, 일단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눅18:35-38) 지금 맹인 두 사람은 이미 예수님께서 여리고 가까이 왔을 때부터 많은 무리들로 인하여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을 때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 누가복음에서는 한 사람만 언급하고 있는데 이 한 사람이 크게 예수님을 불렀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마가복음 10장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막10:46-47)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여리고 가까이 왔을 때부터를 기록하고 있다면, 마가복음은 여리고에 이르렀다가 나가실 때의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후 내용은 다르지 않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종합해서 보자면 이미 예수님께서 여리고 가까이 오셨을 때 예수님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서 지나가시자 소리를 질렀던 겁니다. 어쩌면 두 사람이 함께 소리 질렀다기보다는 처음에는 한 사람이 먼저 소리 지른 것이 아닌가라고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그 사람이 바디매오입니다. 그러나 많은 무리들로 인하여 시끌벅적 했을 것이고, 그래서 그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신성으로서 예수님께서 그들의 소리를 듣지 못할 리는 없습니다. 열 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한 여인이 많은 무리들 속에서 예수님의 겉옷을 만졌을 때도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이 사람도 저 사람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몸을 만진 것이 아니라 겉옷만 만졌는데도 아셨습니다. 당연히 많은 사람들의 소리 가운데서 예수님을 부르는 그 음성을 듣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나가실 때쯤, 그리고 두 명의 맹인이 소리를 질러 불렀을 때, 즉 그들로 하여금 좀 더 간절한 마음으로 부르게 하실 때까지 응답하시는 것을 미뤄두셨던 겁니다.
이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배울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인데, 우리가 기도하는 바에 대하여 응답이 더딜 때 왜 응답해 주시지 않는가 하면서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이 문제만큼은 좀 해결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기도하지만 좀처럼 응답되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응답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그 기도에 대하여 응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로 하여금 더욱 간절함으로 부르짖게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기도 하십니다.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지난 시간 살폈던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구하는 것이라면, 이 세상에서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구하는 것이라면, 주의 영광과 상관없이 그저 자신의 탐심만 앞세운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주의 뜻으로부터 거절되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할 수 있지만 그것은 우리의 연약함을 고려하셔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이지, 기도하라고 해서 우리의 모든 욕심을 다 채우기 위해서 기도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실 때도 하나님의 영광을 전제로 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즉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9-10)라는 기도가 전제되어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6:11)라는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주의 영광에 합당한 기도를 한다고 할 때 응답하시는 것이 더디고 뭔가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그 기도를 거절하시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간절히 부르짖기를 원하시는 뜻이 있다는 것을 배우셔야 합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한 것이라면 항상 기도해야 하고, 기도하면서도 결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눅18:1 참조). 인내하면서 기도해야 하고, 주께서 들어 응답하실 때까지 간절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30절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될 사실 한 가지가 있는데, 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부르느냐 하면 다윗의 자손으로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과 비슷한 사건을 우리는 마태복음 9장에서 살핀 바가 있는데, 거기도 보면 두 맹인이 나오고 그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다윗의 자손으로 부르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때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 속에 다윗의 자손 가운데 메시야가 올 것이라는 약속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오늘 본문도 동일합니다. 지금 두 맹인이 예수님의 향하여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윗의 자손 가운데 메시야가 올 것이라는 약속을 믿으며, 나사렛 예수라는 분이 바로 그분이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는 말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다윗의 자손으로 인식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저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다시 말해 그리스도로 인식하면서 예수님을 부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무엇인가 하면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앞을 못 보는 자로 있기 때문에 불쌍히 여기셔서 볼 수 있도록 해 달라는 표현인 겁니다. 그들이 얼마나 메시야와 관련된 내용을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성경은 메시야가 오시면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모든 슬픈 자를 위로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사61:1-2) 불쌍히 여겨 달라는 것은 그런 긍휼을 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혹은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처럼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마11:5) 불쌍히 여겨 달라는 것은 주께서 말씀하신 것이 그들에게도 성취되기를 원한다는 의미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저들의 부르짖음에 대하여 무리들이 좋아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31절을 보시면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여러분, 무리들은 오늘 본문 29절에서 증거 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떠하든지 지금 외형으로는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며, 그런 면에서 최소한 예수님에 대한 존중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무엇을 원하는지가 그들의 관심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미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그의 말씀과 사역을 통해 누누이 알려주셨습니다. 한 예로 마태복음 9장 13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같은 장 36절에서는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는 사실도 말씀하시는데, 왜냐하면 많은 무리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하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시면서 가르치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면서 모든 병과 모든 악한 것을 고치시는가? 한 마디로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마9:35).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불쌍히 여겨 달라고 외치는 두 맹인에 대한 저들의 자세는 예수님의 마음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매튜 풀 주석에 보면 “무리들은 우리 주님께서 이 두 맹인을 거들떠보지도 않으시는 것처럼 보였고, 이 맹인들이 구걸하기 위해서 끈질기게 소리치고 있다고 생각해서, 그들을 꾸짖었다.”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과 연관해서 말하자면 응답하시는 것이 더디다고 해서 주님께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미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섣부른 판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때로 주님께서는 항상 기도할 것을 명하시는 것과 더불어 낙심하지 말고 인내하면서 기도하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기도하는 자들의 음성을 다 듣고 계시지만, 듣는 즉시 곧바로 응답하지 않기도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에 대하여도 불쌍히 여기고 계시기 때문에 구걸하는 소리에 대해서도 시끄럽다는 이유로 꾸짖고 잠잠하라고 했다면 그것 역시 주님의 마음과는 다르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칼빈은 이 부분에서 “충성과 존경의 마음에서 그를 따르고 있었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불쌍한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은혜로부터 몰아내고 그들이 그의 능력을 향하여 나가는 길을 될 수 있는 한 막으려고 했던 사실은 믿을 수 없는 처사이다.”고 주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사실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도 비일비재하게 찾아볼 수 있다는 데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분명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가 되었다고 할 때 머리되신 그리스도에 걸 맞는 몸이 되기 위하여 올바른 내용과 올바른 방식으로 주를 쫓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어떤 교회들은 성경을 따라 가장 좋은 길로서 개혁주의를 지향한다고 할 때 굉장히 비판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개혁주의를 지향한다고 하는 교단 교회들조차 그렇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친구 목사에게서 이 길을 간다고 하니까 “그러지 마라!”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무슨 이유에서 그렇게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굉장히 부정적이라는 겁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올해가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로 종교개혁에 대한 관심이 어느 해보다 뜨거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관심이 각 지역에 있는 교회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는가? 쉽게 그렇다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종교개혁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으로만 기억할 뿐 종교개혁자들이 가지고 있던 정신, 다시 말해 성경을 따르는 가장 좋은 길로서 가고자 했던 그 정신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길을 가고자 하는 교회들에 대하여 안타까운 듯 한 눈빛을 보내기 일쑤입니다.
성도들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좀 더 철저히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은 뭘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주일오후에 주일성수와 관련해서 윌리엄 굿지의 문답 내용을 공부하고 있지만 주일을 철저히 지키고자 하는 것을 마치 율법주의로 매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24시간 주일성수에 대하여 강조한다고 할 때 경건의 의무와 긍휼의 의무를 행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특별히 주일에 스포츠나 오락 금지, 세상 공부도 금지, 할 수만 있다면 주일 전에 주일을 준비하도록 하고, 개인적인 유익을 위하여 돈을 사용하는 것도 금지한다고 할 때 뭘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좋지 못한 시각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가르침 받을 수 있는 내용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가르침 받을 수 있는 것조차 율법주의라고 하시겠습니까? 오히려 하나님 지식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좀 더 철저히 지키고자 하는 선한 열심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성도들에게 자극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간절히 찾는 자들에게 주님을 찾지 못하도록 하는 그런 방해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간절히 부르짖고 있는데 그 소리가 시끄러워 꾸짖어 잠잠하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바리새인들을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이런 말씀을 하기도 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23: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23:15) 우리는 이런 자들이 되어선 안 됩니다. 막아서는 자, 방해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주님께로 인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아는 자로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긍휼을 베푸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더 좋은 길, 더 선한 길로 이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처럼 무리들이 두 맹인의 부르짖음을 방해했지만 그들은 더욱 더 소리를 높이게 되는데, 31절 이후 부분을 보시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이때 예수님께서 가시던 길을 멈춰 서서 돌아보셨는데, 32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는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을 보면 마태복음보다는 조금 더 세세하게 기록하는데, 오늘 본문 32절의 경우 저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소리 지를 때 예수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렀다고만 되어 있지만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을 보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9절입니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누가복음 18장 40절도 같습니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그가 가까이 오매 물어 이르시되”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직접 그들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따르는 자들, 제자들일 수도 있고 아니면 무리들일 수도 있는데, 바로 그들을 통해서 맹인 두 사람을 부르셨던 겁니다.
여러분, 마태복음 19장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나아올 때 제자들이 꾸짖은 사건을 살핀 적이 있습니다. 그 부분과 비교를 해 보자면 오늘 본문 역시 대상만 달라졌을 뿐 연약한 자들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매우 부족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경우 어린 아이들이 예수님께로 나아오는 것을 막았고, 오늘 본문에서는 무리들이 맹인이요 거지로 있는 두 사람을 막아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맹인 두 사람을 불러오라고 말씀하심으로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자들에 대하여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마치 무엇과 같은가? 어린 아이아이들이 예수님께로 나아오는 것을 막았을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는 말씀을 동일하게 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 19장에서는 말씀이라는 형식으로서 어리 아이들을 내게로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교훈하셨다면, 오늘 본문에서는 말씀하시되 누군가로 하여금 데리고 오게 함으로, 어쩌면 꾸짖은 사람 중에 보냈을지도 모르는데,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동일하게 나타내도록 하시는 방식으로 교훈하고 계시는 겁니다.
이후 누군가 그들을 데리고 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셨고, 두 맹인은 보기를 원한다는 소원을 아뢰게 됩니다. 33절을 보시면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그리고 그들의 소원대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눈을 고쳐주시는데, 34에 보시면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이 부분에 있어서도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마가복음 10장 52절의 경우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그리고 누가복음 18장 42절에서는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그러니까 다른 치유 사역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처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로서 설명한다는 것입니다. 치료하시는 것은 육신이지만 더불어 무엇까지 알리시느냐 하면 영혼의 구원까지 알리고 계시는 겁니다. 거기에 무엇이 필요한가? 믿음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정리해 두어야 할 것이 있는데,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에 대하여 드러나 있는 그대로만 생각한다면 반드시 인간의 공로와 연결되어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믿음으로 병이 나았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할 때 믿음을 마치 믿음 때문에 병이 낫고, 믿음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들에게 믿음이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있었던 믿음의 내용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우리는 그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그 사실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비록 맹인이요, 거지로 있지만 다윗의 계보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예수가 바로 그분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이 놀라운 것은 당시 종교지도자라 일컫는 자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배척했고,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잡아 죽일까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들에게 잡혀 죽으시기 위하여 여리고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신 겁니다. 반면 종교지도자들이 아니라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자, 심지어 다른 사람의 것을 빌어먹는,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가장 없는 자들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음의 내용으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맹인의 믿음은 남다른 믿음인가? 그런 믿음으로 가지고 있는 두 맹인이 남달랐는가? 그런 의미에서 말씀하시는 내용이 아니라, 오히려 주께서 알리시고자 하시는 것은 그 스스로 있다고 하는 자들은 없는 자들이며, 그 스스로 없다고 하는 자들에게는 없는 가운데 주셔서 있도록 하시는 역사가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시는 겁니다. 다시 말해 본다고 하는 자들은 실제로는 보지 못하는 자들이요, 보지 못하는 자들은 놀랍게도 보는 자로 있다는 것을 알리고자 하시는 겁니다. 마치 어떤 교훈과 같은가? 부자 청년의 사건과 비교하자면 있다고 하는 자들은 결국 근심하며 돌아갔지만, 세상적으로 볼 때 가장 없는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선물을 받아 누리는 자로 있다는 것을 알리시기도 하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문제는 사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으로서 하시는 일이며, 그런 차원에서 믿음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의 성격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면 믿음과 믿는 자에게 주목하고자 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드러내고자 하시는 사실은 결코 그런 측면이 아니라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믿음은 무엇인가? 에베소서를 통해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 선물이 언제, 어떻게 맹인 두 사람에게 주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이 예수를 다윗의 자손으로 부를 때는 이미 그러한 선물이 주어졌던 겁니다.
그러므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할 때 구원의 원인을 믿는 사람에게 돌리는 이해는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금 더 명확한 이해를 위해 마태복음 9장을 보시면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때도 믿음을 보시고서 중풍병자를 고치시는데, 이때는 약간 다른 측면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태복음 9장 2절을 보시면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여기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는 말은 직접적으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왔다고 하는 그들, 마가복음에서는 네 사람이라고 되어 있는데 바로 그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물론 이 부분에 관하여 설교할 때 “중풍병자에게는 전혀 믿음이 없었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믿음을 통하여 죄 사함을 말하고 구원을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기록이 왜 하필 네 사람의 믿음을 언급하면서 중풍병자의 믿음은 언급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죄 사함이, 그리고 구원이 중풍병자에게 원인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더욱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표현하고 있지만 그것이 곧 믿는 자에게 원인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주시는 분 쪽에 원인이 있다는 것을 더욱 뚜렷하게 알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선물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선물이기 때문에 믿는 자 쪽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주시는 분에게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의 눈을 만져 고쳤다는 사실은 단순히 육신적인 의미에서만 불쌍한 자로 여긴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까지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앞서 그들이 불쌍히 여겨 주시라고 외친 것은 분명 그들의 육체와 관련해서 말하고 있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차원에서 보자면, 그리고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비교해서 보자면, 뿐만 아니라 세상적인 의미에서 높은 데 마음을 두고 있는 제자들과도 비교해서 보자면 분명 육체 이상의 영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육체의 모든 고통이 결국 영혼의 죄 문제와 관련 있다는 것을 알고서 불쌍히 여기 주십사 외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분명히 드러난 것으로 말하자면 누가복음 18장에서 예수님께서 비유를 드실 때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세리의 기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18:13)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런 믿음이 다름 아닌 앞 못 보는 맹인에게 주어졌다는 것이고, 이 세상 것으로 볼 때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처럼(사6:9)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 당시 종교지도자요, 심지어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의 모습이었다면, 볼 수 없는 자로 하여금 보게 하시고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자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선물로 주고 계셨던 것을 드러내고 계시는 것이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세상적인 것으로 볼 때는 가진 것이 없습니다. 앞을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들에게 놀라운 선물을 주셨던 겁니다. 두 눈을 가지고도 보지 못하는 자들과는 달리 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것을 보는 자들로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4절에서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랐다’는 것은 단지 육신적으로 보지 못하고 있다가 보았다는 것으로 설명하는 말이긴 하지만, 전반적인 내용과 함께 교훈의 내용으로서 생각해 보자면 우리가 주를 따른다고 할 때 무엇을 보는 자들이 되어야 하느냐? 제자들처럼 세상의 높음, 세상의 잘됨, 이런 쪽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믿음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볼 수 있어야 하고, 이런 영적 상태에서 회복시켜 주실 유일한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을 보셔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도 예외 없어 불쌍한 자들입니다. 불쌍한 자들이기 때문에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구했기 때문에 불쌍히 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불쌍하다는 것을 아는 것 자체, 그렇게 영적으로 볼 수 있는 상태가 이미 주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계시다는 증거와 같습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주를 따른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주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눈으로 주를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께만 모든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는 나오지 않지만 누가복음 18장 43절에 보면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는 말로 사건을 정리하고 있는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것은 그분이 다 행하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세인 겁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지만 결국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은 그 모든 것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모든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로서 한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주일이지만 믿음으로 걸었던 모든 것은 주의 은혜가 항상 앞섰기 때문임을 인정하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어린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고백을 하는 자들은 결코 어떤 것을 했다고 해서 하나님께 무엇을 주십사 요구할 수 없습니다. 나로 하여금 주님의 좌편에, 주님의 우편에 앉도록 해 달라고 요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누가 크다고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다 하셨는데 무엇을 요구하며, 무엇을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보상이라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면, 그리고 이런 저런 비교를 하고 있다면 그것은 믿음의 눈으로 주를 바라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이라 할지라도 그 믿음은 어쩌면 공로적인 차원에서의 믿음일 가능성도 굉장히 높습니다.
혹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무리들과 같은 모습, 제자들과도 같은 모습으로 있다면, 그래서 믿음 안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세상의 것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며 산다면 우리는 더욱 주의 은혜를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기도는 우리 평생에 있어 끝까지 구하고 또 구하는 기도 내용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한번 기도해서 안 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구나!”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고, 주께서 기도할 내용으로 주셨기 때문에 우리 평생에 있어 간구하고 또 간구해야 될 내용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들어주실 때까지 끈질기게 간구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